- KBS 70부작 대하드라마 <서울1945>가 오늘 종영했습니다. 주인공이었던 운혁(류수영)은 인천 포로수용소에서 탈출한 후에 벌어진 교전에서 죽고, 동우(김호진)와 석경(소유진)은 결혼을, 해경(한은정)은 일본을 거쳐 함흥에 도착하는 것으로 결말이 났습니다. 운혁은 동우의 품에서 죽어가며, "전후(戰後) 조선땅의 희망을 만들어달라."는 유언을 남깁니다.

- 여느 대하드라마가 그러하듯, <서울1945> 역시도 한차례 논란에 휩싸였습니다. 종영과 함께 보도된 세계일보 기사에 따르면, "'건국 세력을 모함했다'는 비판과 '좌우의 활동상을 균형 있게 그렸다' 긍정적 평가를 동시에" 받았다고 하는군요. 전자의 비판은 이승만(1대 대통령)과 장택상(1대 외무부장관)의 후계들에 의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이승만이 친일지주의 딸인 석경을 양녀로 받아들이는 내용과, 장택상의 측근이었던 친일 경찰 출신 창주(박상면)가 여운형(독립운동가, 조선인민당 당수)의 암살에 관여한다는 극중 내용이 논란이 되었습니다. 비판자들은 1억원 상당의 고소와 함께 조기종영 가처분을 신청했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 후자의 긍정적 평가는 극에서 여운형이 차지하는 비중 때문입니다. 그동안 한국 역사는 뿌리깊은 반공 이데올로기에 의해, 일제시대와 해방 전후 사회주의자를 비롯한 좌익 운동가들을 언급하지 않아왔습니다. 하지만, <서울1945>는 주인공 운혁이 여운형이 조직한 조선인민당의 정치위원으로 활동함에 따라 전례없는 여운형의 해방 전후 행보가 부각되었습니다. 여운형 외에도 석경의 외삼촌 동기(홍요섭)가 조선노동당 정치위원으로, 운혁의 친구 철형(이병욱)이 인민군 대좌로 등장합니다. 좌익 운동가들이 극의 중심 인물로 등장하면서, 기존의 관행, 즉 좌익에 대한 주변화 적대화 설정이 깨졌습니다. 

- 우선, 전자의 비판을 살펴보자면, 이승만과 장택상의 후계들이 제기한 소송이나 조기종영 가처분의 신청은 일종의 해프님(happening)에 불과하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대하드라마에 등장하는 인물이란 그가 속한 정치세력을 대변합니다. 드라마인 이상 존재하는 픽션(fiction)이란, 그에서 벗어나지만 않는다면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극중 이승만이 석경을 양녀로 받아들이는 것은, '해방과 더불어 위협받고 있는 자신의 기득권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해방 후에 형성되고 있던 새로운 기득권 세력과 유착한 친일세력들의 정치적 행보'라는 사실을 드라마화 한 것이죠. 하지만, 이승만의 후계들의 인내심까지 강제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석경을 이승만이 아닌 가상의 한민당 인물과 연결시켜도 드라마 흐름에는 전혀 변화가 없을 것을, KBS의 배려가 아쉽습니다. 장택상 후계들의 소송은 해프닝 축에도 끼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극중에서 여운형을 암살하는 것은 창주이지 장택상이 아니니까요.

- 이제 후자의 긍정적 평가를 살펴보겠습니다. 전자의 비판이 소송과 가처분으로 이어지고, 이것이 '좌우갈등'이라는 상품을 만들어내는 언론의 도움을 받으며, 순식간에 <서울1945>는 좌우갈등의 격전지로 비화되었습니다. 이런 갈등은, 해경이 친구이지만 정치적으로는 대립하던 운혁, 동우와 삼각관계가 되면서, 동우-해경이냐 운혁-해경이냐 하는 시청자들 각각의 바램과 더해지면서 더욱 증폭되었고, 공식 홈페이지 시청소감 게시판이 전장 역할을 했습니다. 동우와 운혁의 대립구도에서, 해경은 중간자적인 역할을 맡으며 두 사람으로 대변된 정치세력의 인간적인 면모를 부각시키는 역할을 맡은 것입니다.

- 저는 결론적으로, <서울1945>가 좌우의 활동상을 균형있게 그렸다는 긍정적인 평가에 아쉬움을 느낍니다. 물론, 앞서 말씀드렸듯이, 기존의 관행과는 달리 사회주의자를 비롯한 좌익 운동가들이 극의 중심에 등장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이 곧 '좌우의 활동상을 균형있게 그리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TV라는 매체는, 관영매체이든 상업매체이든을 떠나 본질적으로 보수적일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즉, 독립 매체가 아닌 이상, TV가 진정한 사회주의자, 좌익 운동가들의 활약상과 이상을 조명하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이죠. <서울1945>는 본연의 기획의도와 매체로서의 본질적 특성 사이의 모순에서 줄타기를 했을 것입니다.

- 이런 줄타기는 처음부터, 즉 기획의도에서 부터 예정되어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공식 홈페이지의 기획의도에 따르면 "좌우에 대한 선입견 없이 작은 영웅들의 숭고한 이상을 그대로 그려 낸다."라고 씌여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자유와 평등을 위해 헌신한 그들의 삶은 숭고한 것"이라는 거죠.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작은 영웅'과 '숭고한 삶'입니다. 이것은 <서울1945>가 사건 보다 인물에 초점을 두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방영 중 이승만 장택상 후계들의 소송 시비에 휘말리자, "<서울1945>의 핵심은 이념이 아니라 남녀 간의 사랑"이라는 제작진의 고백으로 까지 이어집니다. 

- 실제, '사랑', '가족'이라는 소재는 70부작 내내 <서울1945>를 떠돌았습니다. 그것은 드라마의 인기 소재임과 더불어, 좌우의 활동상을 균형있게 그리고자 하는 노력이 사회적 갈등에 부딪힐 때 제작진의 쉼터가 되었을 것입니다. (계속)

댓글(4)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비로그인 2006-09-11 0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운혁 역을 맡은 류수영 씨를 좀 좋아하는데요..^^ 첨에는 재밌을 것 같아서 보려다가 나중엔 류수영 씨라도 보자는 마음에 보다가... 이 드라마는 보고 있으면 이내 마음이 시들해져버려서 제대로 본 적이 없어요. 아무리 봐도 이 드라마 주제는 "남녀간의 사랑" 맞는 것 같아요..^^

sb 2006-09-11 1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625로 넘어가는 후반부에 들어서 제작진의 어깨가 많이 무거웠던 것 같아요. 전 중간부터 보다가, "에이 안되겠다." 해서 처음부터 다시 봤답니다. ^^;

마노아 2006-10-17 2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지금 마지막 회를 보았는데요, 동우와 석경이는 혼인하지 않았는데요. 동우가 석경이를 두고 어디론가 떠나는 모습으로 끝났어요. 외국으로 가는 것처럼 보이더라구요. 뒷편은 쓰다가 마셨는데 더 올려주세요. 궁금해요^^

sb 2006-10-19 1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블로그는 혼자만의 공간이자 여럿의 공간이기도 한데, 쓰다 만 글을 저리 버젓히 올려두었네요.
 

- “일반적으로 순수한 예술이라고 하는 클래식 음반도 거대 음반사의 철저한 기획을 거쳐서 나온다. 예술과 상품을 구분할 수 있는가.”
”전문성을 무엇으로 측정할 수 있는가. 전문성을 기준으로 가수와 뮤지션을 구분할 수 있는가. 펑크처럼 의도적으로 비전문성을 표방하는 음악의 문화적 파급력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방송을 타지 않으면 언더그라운드인가”
”취향과 신념을 같이하는 이들의 소규모 공동체 음악은 포크가 아닌가”
”대중성과 통속성은 대중가요에만 적용되는 특성인가”

- ”대중예술은 작가가 표현하는 것을 드러낸 결과물이라기 보다는, 수용자가 향유하고 싶어하는 것을 작가가 제공해주는 측면이 강하다.”
”소통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는 익숙한 것을 선호하게 마련이고 그러다 보면 참신하고 난해한 것 보다는 진부한 패턴이나 손쉬운 방식을 선호할 가능성은 늘 존재한다.”

- 미국 힙합의 역사

70년대: 힙합 문화는 1960년대 흑인 민권운동 세대의 하위문화와 70, 80년대 세대를 통합.
80년대: B-boy(비행청소년?) 이미지와 흑인 특유의 감성을 탈색시키려는 비즈니스 전략 사이에서 다양한 변종이 파생. MTV의 힙합 전문 프로그램이 대표적.
90년대: 80년대의 비즈니스 전략의 지속으로 로린 힐의 앨범 <Mis-education>이 그래미상 수상.

- 한국 힙합의 역사

1세대: 수입래퍼 업타운, 원타임, 드렁큰타이거, 등. 이들은 영어 랩을 구사하며 자신의 전통성을 증명하고자 하는 동시에, 한국어로는 랩이 힘들다는 논쟁을 불러일으킴.
2세대: 언더그라운드 래퍼들과 DJ DOC, 등. 한국어로 된 랩을 다양하게 구사하면서 대립구도 형성. 신총 라이브 클럽 ‘마스터플랜’의 언더그라운드 래퍼들이 <2000 대한민국> 발표.

- 록의 역사

90년대 중반을 풍미한 록 담론은 선언적인 발언과 함께, 음악, 패션, 문화, 이데올로기로까지 승화.
록의 상업화와 함께 얼터너티브 장르가 도입.
하지만, 감각의 해방을 통한 저항은 비이성적인 것으로 간주되었고, 실제 저항문화의 본령은 포크와 전투적 민중가요.
1993년 민중록밴드 천지인 등장

- 포크

70년대 초 종로와 명동을 오가던 포크 가수들은 대게 명문대에 재학 중인 학사 가수.
1975년 대마초 파동과 함께, 포크의 감성은 대학가에 머물며 민중가요라는 변이형 창출. 이들은 공동체에 의한 공동체의 음악이라는 포크의 집단적 효과에 주목.
1999년 포크 페스티벌과 함께 포크 리바이벌 운동이 시작. 이를 통해 ‘저항과 낭만의 음악’이 역사 속으로 침전.

- 뽕짝

뽕짝은 익숙한 방식을 이용하여 낯설게 하는데 기여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가요 어떻게 읽을 것인가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26
박애경 지음 / 책세상 / 2000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 여기 극단적인 이분법이 있습니다. "이것저것 재지 말고, 그냥 즐기자."는, 음악평론가들에게 쏟아지는 비난입니다, 이것은 반쪽의 진실을 담고 있는 비난입니다. 음악은 분명 즐겨야 할 대상이지만, 평론이 쓸모없는 잣대로 음악을 재단하는 행위라는 것은 거짓입니다. 반쪽의 진실로 나머지 반쪽을 왜곡하니 비난일 수 밖에요.

-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평론은 음악을 두배로 즐길 수 있도록 해줍니다. 그것은 드라마의 NG장면이나, 기자들의 취재후기에 비유할 만 합니다. 음악의 앞과 뒤에 가려진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소개시켜주고, 3~4분의 짧은 감흥 속에서 자칫 놓칠 수 있는 이야기들을 전해줍니다. 물론, 감추어진 이야기들만을 소개시켜주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평론가들이 전해주는 이야기들을 통해서, 음악을 좀 더 풍부하게 이해할 수 있고, 두배로 즐길 수 있습니다.

-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까지는 대중가요를 듣는 것 만으로 만족했습니다. 하루가 멀다하고 신곡이 발표되는 대중가요 시장에서 듣기 좋은 곡을 발견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습니다. 지루해질 만 하면, 새로운 곡을 들으면 그만이었죠. 변화는 이런 만족이 불만족으로 바뀌면서 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것은, 저와 다를 바 없이 하루 1시간 정도 음악을 듣지만 월등한 만족감을 느끼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비롯되었습니다. 이들은 같은 음악을 저보다 더 즐기고 있었죠. 저는 궁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무작정 따라하기를 시작했습니다. 김광석을 들었고, 정태춘을 들었죠. 노래 제목 보다 앨범 제목이 더욱 중요해졌습니다.

- 하지만, 그것 만으로는 무언가 부족했습니다. 노래를 듣는 방식은 변했지만, 만족감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더 이상 노력하지 않았지만, 시간이 흘러 느닷없는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인터넷에서 자료를 검색하다가, 우연히 하이텔 힙합동호회 사이트를 발견한 것이죠. 그리고, 거기에서 역사가 그리 오래지 않았던, 한국 힙합의 역사를, 그리고 그 속에서 몇몇 유명한 힙합가수들의 이름을 발견했습니다. "이런 일이 있었네."로 시작된 호기심은, 결국 지난 유행가들을 다시 듣게 했고, 듣고 싶은 노래목록을 만들게 했습니다. 그리고, 힙합 음악은 이전에는 없었던 만족감을 주기 시작했습니다. 재밌어지기 시작한 것이죠.

- 서문에서 저자는, 90년대 들어 대중가요가 폭발적으로 성장했고, <리뷰> <이매진> <이다> 에서의 대중가요 평론은 이러한 대중가요의 양적 질적 확대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하위문화로 불리우던 대중가요가 문예지에 실리면서, 기존의 고급문화-대중문화의 구분이 퇴색된 것이죠. 저자는 이런 전환기를 맞아, 대중가요의 개념적 정의를 통해서, 대중가요의 인기와 성장이 무엇으로부터 기인하는지 고민하고 있고, 그 일환으로 90년대를 통과해 온 힙합, 록, 포크, 뽕짝의 역사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 이런 저자의 노력은 교통정리에 비유할 법 합니다. '교통정리를 어떻게 하느냐'는 재미없는 주제이지만, 이 재미없는 주제는 결국, '어떻게 많은 자동차들이 가장 효율적으로 이동할 수 있는가'라는 지극히 일상적인 필요를, 효율적으로 정리하는 내용이기도 하니까요. 이미 마련된 제도 아래에서 별다른 불편 없이 교통을 이용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노력들이 잘 와닿지 않는 것일 뿐입니다.

- 가요 듣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은 가요평론가들의 노력 없이도, 대중가요를 거리낌없이 듣고 즐기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저자의 노력 덕분에 대중가요의 빛이며 그림자인 '통속성'을 이해할 수 있다면, 여전히 통속적인 가요계 내에서도, "모든 가요는 통속적이야."라는 쓸모없는 선입견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더 많은 가요를 다양하게 즐길 수 있겠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 - 보고 듣는 클래식 이야기 04
애너 하웰 셀렌자 지음, 조앤 E. 키첼 그림, 이상희 옮김 / 책그릇 / 2006년 6월
평점 :
절판


- 흔히, 클래식은 '교양있는' 상류층 만의 음악이라고 받아들여지지만, 그것은 한 음악이 사회에 자리잡게 된 특정한 사회적 배경 때문이지, 음악 자체로 부터 기인하는 것은 아닙니다. 3~4분 정도의 길이인 대중가요에 비해 길이가 긴 것도, 클래식과의 거리를 설명해주지는 못합니다. (음악과 영화를 단순 비교하기는 힘들지만, 대중적인 문화라는 측면에서 비교하자면) 우리는 3~4분 길이의 대중가요와 120분 길이의 대중영화에 모두 집중을 하니까요. 우리가 클래식으로 부터 멀어진 것이지, 클래식이 우리로 부터 멀어진 것은 아닙니다.

- 선입견은 또 있습니다. 보통의 문고판 보다 크기가 크다고 해서, 과장된 몸짓의 그림이 등장한다고 해서, 아이들만을 위한 책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림은 글과 마찬가지로, 저자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좀 더 잘 표현하는 역할을 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순수하지만 이해력이 조금 부족한 아이들에게도, 이해력은 갖추었지만 선입견으로 둘러쓴 어른들에게도, 글과 그림으로 된 이야기는 클래식으로의 좋은 안내자가 될 것입니다.

- 보통 어떤 음악을 듣고 "좋다." 라고 표현할 때, 사람마다 만족의 내용이 다릅니다. 어떤 이들은 음악의 선율이 좋아서, 어떤 이들은 음악의 가사가 좋아서, 어떤 이들은 가수의 목소리가 좋아서 좋아합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가수와 가사가 없이 연주로만 된 클래식은 만족의 폭이 좁을 수 있을텐데요, 책그릇 출판사에서 발간하는 '보고 듣는 클래식 이야기' 시리즈는 클래식에 대한 만족의 폭을 대중가요 만큼이나 넓혀줄 것입니다. 우리가 대중가요를 들으며, 가사가 연상하는 자신의 경험이나, 뮤직비디오에서 봤던 짧은 비디오 영상을 떠올리듯, 우리는 바흐의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들으며, 카이제를링크 백작의 집에서 밤새 하프시코드를 연습하던 골드베르크를, 잠을 이루지 못하던 백작의 요청을 만족시키기 위해 고심하던 어린 소년의 열정을 떠올릴 것입니다.

- '보는 것'을 통해 곡에 담긴 사연을 알았다면, 이제 선입견을 버리고 '듣는 것'을 통해 클래식에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가시기 바랍니다. 대중가요에는 없는, 클래식만의 매력을 발견하실 수 있을테니까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출처: 한겨레21)

-바쁠텐데 인터뷰를 위해 시간 내주어 감사하다.
=원래 약속이 하나 있었는데 의례적인 만남이었다. 인턴기자들 만나려고 왔다. 술벗도 없었는데 반가웠다. 취재는 취재고 소주나 마시자.

-`처음처럼 백세까지' 직접 만들었나?
=‘처음처럼’ 나왔을 때 이름 보면서 내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이야기 ‘초심을 잃지 마라’가 떠올랐다. 주위 사람들이 ‘초심을 잃지 않으면 왕따여도 지켜줄 것이고, 초심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대통령 할아버지라도 당신을 볼 일이 없다’고 한다. 거의 내 좌우명이라 할 수 있다. ‘처음처럼’이 제일 중요하고 ‘백세까지’는 농담이다. 내 마음은 처음처럼 백세까지 간다는 것이다. 중간에 바뀌는 게 아니라 처음처럼 백세까지 영원히 간다. 그래서 섞어 먹으면서도 그 생각을 한다.

-제주도에서 태어나 대학 입학 전까지 계속 제주도에서 자랐나?
=제주도 서귀포가 고향이고, 고등학교는 제주시에서 나왔다. 대학 입학과 함께 서울로 올라오게 되었다.

-제주도에서 학력 고사 전국 수석을 한 것은 원의원이 처음인가?
=내가 처음인 것으로 알고 있다.

-대학에 와서도 고등학교 때까지 하던 대로 공부만 계속 했나?
=학자가 될 생각으로 1학년 1학기 때는 도서관파였다. 시골에서 올라와 열심히 공부해서 학자가 되어야겠다는 마음뿐이었다. 하지만 대학에 와서 세상과 사회를 보는 눈이 바뀌었다. 당시 1982년 당시에는 전경들이 학교에 상주했고 광주항쟁에 항의하는 시위가 많았다. 현실에 참여를 해야 한다면 학업인지 직접적인 저항 운동을 해야 하는 것인지 고민하면서 1학기를 보냈다. 한편으로는 도서관에서 공부하면서도. 도서관 출석률과 집회 참여도가 반비례했다.
이념 서클을 제 발로 찾아들어가 소위 본격적인 운동권 학생이 되었다. 2학기 때부터 학업을 접다시피 하고 학내 시위를 과격하게 하다가 2학년 1학기 올라가자마자 정학을 맞았다. 구로공단에서 2년 반 정도 야학을 했고 공활도 갔다. 휴학과 정학을 반복하다가 4학년 되어서는 인천에 있는 한 공장에 위장 취업을 해 노동조합 만들었다. 기술 없이 할 수 있는 웬만한 일은 다 해봤다. 그러다 신분이 탄로나 쫓겨나게 되었다.
학교로 돌아와 ‘직업적인 운동가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89년까지 학생운동을 했다. 89년에 겨우 졸업을 했는데, ‘부모님에게 마지막 불효는 하지 않아야겠다’는 마음뿐이었다.

-학생운동을 하게 된 구체적인 계기는?
=광주항쟁이다. 유인물을 통해 광주를 알게 되었다. 친구들과 선배들 통해서도 알게 되었다. 지하 이념 서클에서 활동을 했는데 법대 동기 360명 중에 60명 정도가 이념 서클 활동을 했다.
이념의 시대, 저항의 시대였고 저항에 대한 공감이 있던 상태였다. 참여하면 참여한 대로, 안 하면 안 한대로 부채의식이 있었기 때문에 모든 대학생들 사이에 강렬한 연대감이 심정적으로 있었다.
우리 시대가 불행했다고 생각한다. 모순이 있었으니 저항하려는 집단적인 움직임이 있었지, 사실 바람직한 것이야 모순이나 고통 없이 자기 행복을 추구하는 게 행복 아닌가. 그런 면에서 우리는 불행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후회하지 않는다. 후회했다면 그런 결단들을 못했을 것이다. 시대의 흐름 속에서 흘러왔던 것이다.

-공단에 들어갔다가 나와서 고시공부를 시작했나?
=공단에서 나온 게 85년이고 85년부터 89년까지는 학내 조직 운동을 했다. 요즘 말로는 배후 조종 비슷한 일을 했다. 취직을 하려는 생각은 안 하고 스스로를 직업 운동가라고 생각했다. 학교는 안 짤릴 정도로만 적을 두고 있었고 고시 공부로 전환한 것은 89년 말, 90년 무렵이다.
현실 사회주의권 붕괴하고 노태우 정권 들어서고 사회 전반에 민주화가 급속하게 진행되며 그 속에서 이념적인 방황을 했다. 당시 많은 운동권이 이념적 혼란에 빠졌고 전향을 한 사람도 많았다. 나같이 전향에 가깝다시피 이념의 껍데기를 버려야 하겠다는 사람들은 많이 변했다. 80년대 말부터 90년대 초에 이르기까지 운동권 내부에서 분화가 많이 일어났다. 하지만 나는 두 손 두 발 다 들고 항복을 많이 한 편이다. 당시에 전향했다고 욕도 많이 먹었다. 공개적으로 ‘전향했다’고 비판 받지 않은 이유는 그렇게 고민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기존의 내용으로서의 사회주의, 방법으로서의 혁명을 나는 버렸다. 솔직히 고백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회주의를 버렸을 때 ‘어떤 방향과 가치관을 가지고 우리 사회에 대안을 내세울 것인가, 내 에너지를 어떻게 바칠 것인가’에 있어서 무척이나 방황을 많이 했다. 하지만 방황을 한다고 해서 현실 세계에서 사라질 수는 없으니까 ‘제도권 내로 들어가자’는 생각을 했다. 예전에는 개량주의이라고 비판 했지만 점진적인 개혁의 길을 찾고, 우리 사회 한편에서 이뤄졌던 경제성장, 민주화 등과 같은 인정할 부분이 있지 않나 생각했다. 그래서 통합적인 가치를 찾자는 고민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변화의 폭이 너무 심하지 않나? 납득이 되지 않는다.
=변화의 폭이 커서 같이 활동하던 사람들한테 욕도 많이 듣고 오해도 많이 받았다. 변화의 직접적인 계기는 현실 사회주의권의 변화다. 현실 사회주의권의 붕괴를 보며 민중민주혁명이나 인민민주주의혁명을 통한 사회주의 건설과 같은 북한의 혁명 노선, 우리 내부 서클들이 추구한 혁명 노선 등에 대해 생각이 변한 것이다. 그 부분을 받아들이려 하고 준거로 삼고 살아왔는데 그 이론 틀은 틀렸다는 결론을 내렸다.
충격과 혼란에 빠진 대표적인 계기는 토플러의 책이었다. 정보 혁명의 물결이 다가오고 우리 사회가 정보화 사회로 넘어가고 있는 현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독점 자본주의의 말기적 현상이라고 치부하면서 계급투쟁 이론만으로 사회 변화를 어떻게 다 담아낼 수 없다.
윤리로서 마르크시즘의 휴머니즘에 공감하는 부분이 많다. 하지만 마르크시즘의 사회 역사 이론들은 버렸다. 맑시즘은 종말론이지 과학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과학은 현실을 분석하고 설명할 수 있는 이론적 틀로서 의미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를 함께 더불어 사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마르크시즘의 휴머니즘과 같은 열정에서 도망간 것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단연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 대안이 한나라당이었어야 하는가?
=이 부분에 대해서는 엄청나게 많은 고민과 현실의 제약과 변수에 의해 여기까지 온 것이다. 완결된 답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대학 다닐 때 친했던 친구는?
=대부분 운동을 같이 했던 친구들이다. 대부분 운동 현장에서 운동을 하고 있다. 제일 친한 친구 중 한 명은 부산에서 노동 운동을 하는 민주노동당 당원이다. 참여연대에서 일하는 친구도 있고, 변호사 된 친구는 지평에서 일하고 있다. 나같이 한나라당 와서 꾸역꾸역 무언가를 하려고 하는 사람들한테 ‘네가 이용당하는 것이지 한나라당을 변화시킬지 모르겠다’고 주위에서 걱정도 한다.
친했던 친구 중에 여전히 노동운동하고 있는 친구부터 크게 돈 벌어서 자본가의 길을 걷는 친구까지 있다. 다같이 운동하던 친구들인데. 제가 대학 들어가자마자 운동을 시작했기 때문에 어차피 오래 사귄 친구들은 운동권일 수밖에 없다. 서클 또는 공장에서 만난 친구들이다. 지금은 가끔 만난다.

-술자리에서 친구들의 질타는 없는가?
=기본적으로 질타를 한다. 그런 질타의 수위가 내려갈수록 주문이 강해지기 때문에 더 부담스럽다.
차라리 욕을 들으면 ‘알았다, 잘 먹고 잘 살게’라고 생각해 버리면 마음이야 편한데, ‘힘들지? 잘해봐’라고 하면 오히려 더 부담스럽다.

-정치활동의 결정적인 계기가 무엇인가?
=솔직히 김민석, 김부겸 두 사람이 꼬셔서 하게 되었다. 김민석은 민주당 오라고, 김부겸은 한나라당 오라고 꼬셨다. 부겸이형을 아직도 아주 좋아한다. 정말 한국의 한 시대를 이끌어야 하는 사람이고 그 정도 수준이 되는 사람이다. 내 인생을 망친 장본인이기도 하다.

-김부겸 의원 오라고 전화하겠다.
=당장 오라고 불러라. 독수리 5형제 중 김부겸 의원이 없었다면 내가 한나라당에 오는 것이 불가능했다. 부겸이형은 ‘한나라당도 힘들지만 맡아서 5년 내지 10년을 하면 답이 나올 것이다’고 해서 고민을 많이 했다.
오랜 고민 끝에 내린 어려운 답이 한나라당이었다. 내가 해야 하는 역할을 봤을 때는 한나라당에서의 역할이 더 개혁적일 수 있었다. 더 중요한 것은 ‘앞으로 우리 미션을 어떻게 설계할 것이냐’는 문제인데, 보수당을 바꿔보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한나라당 개혁파가 생겼다.
전두환한테 줄 설 이유가 없다. 노태우한테도. 나는 뻐꾸기 둥지로 날아간 새다. 안에서 품고 있는 속뜻을 펴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부겸이형한테 원망 아닌 원망을 많이 했다. 감히 지게지고 가다가 벗어놓고 도망쳤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 지게 백개를 지고 있다. 나도 벗어버릴 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는 데까지 가보자’는 마음이다. 그런데 아흔아홉 번 때리면 갈라질 수 있는 부분도 보인다. 다른 사람들은 다 구경꾼이다. 돌의 강도는 돌을 깨는 사람만 안다.

-강풀의 <26년>은 안 봤나?
=몰랐는데 인터뷰한다고 해서 다 봤다. 내 느낌은 첫째 너무 공감하고 너무 가슴이 아프다. 내가 저격총을 쏘려는 마음으로 테러리스트가 되려고 한 적이 있다. 내 가족을 죽였던 상대방에 죽음으로 보복했다면 인류의 역사가 어떻게 되었을까? 광주는 아직 현재성을 갖고 있다. 광주와 다른 홀로코스트와의 차이는 현재성이다. 현재성이 있기 때문에 함부로 말하면 안 된다.
한편으로는 섬뜩하다. 광주와 6.25전쟁, 그리고 4.3을 보자. 6.25도 아직 살아있다. 북한하고 어떻게 화해를 할 수 있겠는가? 이 모든 역사의 질곡이 굉장히 깊은 문제라 할 수 있다. 80년으로부터 26년이 지났고 앞으로 더 많은 시간이 흐를 텐데 ‘이 문제를 어떻게 승화시킬 것인가?’가 중요하다.

-광주에 어떻게 접근하고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그 길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광주문제에 대해서는 내가 성 안에서 그 안쪽을 깨뜨리는 역할을 하겠다. 과거의 역사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빚진 사람들은 조용히 있어야 한다. 빚의 탕감은 피해자가 용서해서 이뤄지는 것이지, 가해자가 ‘이쯤하면 됐지 않니?’라고 하면 고이즈미가 하는 짓과 무엇이 다른가?
다른 문제는 ‘사회 에너지를 계속 과거사에만 집중할 것인가?’이다. 집중은 미래를 향해서 하되 과거를 정리해야 한다. 내가 한나라당에 2000년에 들어왔다고 해서 한나라당이 80년에 총질한 것을 내가 왜 책임져야 하나? 사람들이 나를 비겁하고 야속하다고 한다. 경제성장이라는 자산만 가져가지 말고 광주의 부채도 가져가라는 것이다. 물론이다. 내가 누군가에게 진짜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일을 정확하게 할 것이다.
전두환을 라이플로 저격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학살범을 저격해서 보복하는 것은 승리의 역사가 아니다. 우리는 이 점을 소화하는 게 필요하다. 나는 그것은 확신한다. 26년이 정답이 아니란 것은 확실하다.

-가장 친한 국회의원은?
=남경필 의원이다. 더 친한 의원은 이성권, 김명주 의원이다. 제일 친한 의원 물으면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처럼 싸움 붙이는 거랑 똑같다.

-한나라당에서 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가?
=보수적인 사람들을 감동시켜서 꼬시는 것이다.

-원 의원과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것은 쉽지 않아 보인다.
=내 중심이 흔들리지 않기 때문에 걱정하지 마라. 사람들이 나를 많이 의심한다. 나를 20년 넘게 본 사람들도 나를 많이 의심한다. 하지만 나는 진실 되게 대답한다. ‘나는 내 할 일이 있다’고. 다음 총선까지는 한나라당 안에서 당장은 비전이 없어 좌절할지도 모른다. 좌절하더라도 전체에 도움이 되게 하려고 한다.

-전체에 도움이 되는 좌절은 무엇인가? 꿈꾸는 이상은 무엇인가?
=나의 도덕적인 세계는 영원히 안 온다. ‘어린 양이 사자들과 뛰놀고’라는 노랫말처럼. 불가능하다. 난 사회주의 이념에 혼란을 느끼면서 자유주의까지 왔다. 신자유주의의 맹점을 너무 잘 안다. 하지만 그 맹점조차 안고 가는 쪽으로 가겠다. 기회가 오면 힘 발휘해 바꿀 것이다. 난 뭐든 정직하게 하려고 한다.

-왜 한나라당에 있는가?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한나라당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한민국이 진짜 바뀌려면.

-한나라당은 기득권층의 입장을 대변하지 않는가?
=누군가는 바꿔야 한다. 화해할 수 없는 두 개의 계급으로 세상이 나뉘어져 있다고 생각한다면 한나라당의 변화가 불가능하겠지만 난 그렇게 안 본다. 그렇기 때문에 그 안에서 끊임없이 노력하려고 하는 것이다.

-민정당 인적 자원 청산은 예전부터 계속 나온 얘기인데 정작 2006년에도 민정당 정신이 부활하고 있는 형국이다. 어떻게 변화시키겠다는 것인가?
=나도 헷갈린다. 시대에 대한 고민 중에서 겹치는 부분도 있고 나만의 것도 따로 있다. 내가 할 일을 정직하게 할 테니, 교집합을 위해서 사랑을 보태 달라. 동시에 냉철한 비판도 필요하다.

-한나라당으로 간 궁극적인 이유는?
=나름대로 해야 할 역할이 있다. 말했듯이 해답을 못 갖고 방황하는 중이다. 대한민국을 위해서 한나라당의 변화가 꼭 필요하다.

-대학 시절 때 연애 경험은 어떤가?
=미팅 대타를 몇 번 나간 적 있는데 재미를 보진 못했다. 이런 저런 스토리는 많지만 딸 둘까지 있는 마당에 지금 어떻게 말할 수 있나.
제주도 동향 동기생들 중에 아주 가까워진 친구가 있었다. 동문회 같이 하고 대성리 MT도 같이 갔다. 3년 동안 친구로 지내다가 그 친구와 4학년 때부터 애인이 되었다. 한 때 수배를 받아서 1년 넘게 도망 다닐 때 1년 넘게 못 만나기도 했다. 믿음과 사랑은 세월을 넘어 이어졌다.
그렇게 85년부터 8년을 사귀고 결혼을 했다. 사법 시험 합격하고 나서 바로 결혼을 했다. 오래 사귀어서 서로 잘 안다고 생각을 했는데 요즘 드는 생각은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계속 궁금하다. 직업 운동가로 살 때는 결혼하고 가정을 꾸리는 생각을 자꾸 버리려고 했다. 내 자신이 약해질까 두려웠다.

-고백은 어떻게 했나?
=봉천동에서 자취를 했다. 참 생각이 많이 났다. 고백을 하기는 해야겠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자취방으로 초대를 했다. 내 친구와 그 친구의 친구를 불렀다. 영양보충을 하자며 삼겹살을 같이 먹자고 불렀다. 그 날 넷이서 내 방 안에서 삼겹살을 맛있게 먹었는데 소주만 실컷 먹고 결국 고백을 못했다. 나중에 이야기를 해보니 삼겹살 먹을 때 자신을 좋아한다는 느낌이 왔다고 했다.
두 번째는 야학하던 때 어느 모임에 갔다가 뒤풀이에 갔는데 떡이 남아서 싸가라고 했다. 떡을 싸오며 누구에게 갖다 줄까 생각을 해보니 줄 사람이 한 사람밖에 없었다. 자취방에 무작정 찾아 갔다. 마침 방에 있었다. 방에 있어서 같이 떡을 먹고 많은 대화를 나눴고 그리고 밤이 깊어져서 아무 말이 필요 없었다.

-떡을 건네줄 때 핵심적인 질문은 무엇이었고 부인의 대답은 무엇이었나?
=8년 사귀고 결혼해 결혼 생활 13년째다. ‘당신의 허물까지도 있는 그대로 사랑한다’는 말을 제일 좋아한다.
상대가 변해야 내가 해준다는 조건부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내가 사랑할 수 있는가? ‘숱한 허물에 대해서 있는 그대로 사랑해 줄 수 있는지, 그 사람을 편들어 줄 수 있는가’라는 마음이 있을 때는 나 스스로도 고귀하게 느껴진다. ‘love you as you are’다.

-연애하며 특별한 추억은?
=연애하며 가장 미안하고 가슴 아픈 일이 하나 있다. 신림사거리에서 가끔 데이트를 했는데 돈가스 집에 돈가스를 먹으러 갔다. 아내에게 돈이 있을 줄 알고 시켰다. 계산할 때쯤 확인해보니 서로에게 돈이 없었다. 나는 물론 빈털터리였다. 아내에게 잠깐 나가 있으라고 하고 나 또한 바로 뛰어나와서 손을 잡고 도망쳤다. 얼마 뒤에 돈 갚아주려고 갔는데 가게가 없었다. 지금도 아내는 돈가스 이야기가 나오면 울려고 한다.
또 다른 일은, 고시 공부 스터디를 같이 했던 친구들과 1차 시험 보고 난 뒤 지리산 종주를 연인 동반으로 간 적이 있다. 2박3일간 종주를 하는데 아내가 등산을 잘 못하지만 지는 것을 싫어해 꾸역꾸역 걸어갔다. 세석평전을 가는데 우리 둘만 뒤쳐졌고, 해는 떨어졌는데 후레쉬도 없었다. 거의 실신 상태였던 아내가 너무 힘들어했지만 결국에는 세석평전에 도착했다.
가자마자 아내는 결국 혼절을 했다. 텐트 안에 눕혀 발을 높이 올려놓고 웃통을 벗기고 여자들만 텐트 안에 남았다. 남자들은 모두 밖에 나와 있었다. 그 때 종교가 없었는데 텐트 밖에서 나도 모르게 무릎을 꿇고 기도를 했다. 아내가 깰 때까지 한참을 무릎 꿇고 기도를 했다. 기도라는 게 별 거 있나? ‘여기서 잘못 되면 안 됩니다’라고 계속 빌었다. 그 뒤로 다른 커플들 전부 ‘당신은 내가 아파서 쓰러졌을 때 저렇게 기도할 수 있는가’라며 싸웠다고 한다.

-어떻게 프로포즈했는가?
=아내가 야학하고 노동운동을 하다가 나랑 비슷한 시기에 생각이 변했다. 82학번인데 86학번들과 학교를 같이 다녔다. 수많은 고민들을 같이 이야기했기 때문에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였다.
우리 사랑은 이성을 보고 가슴이 두근거리고 신비를 꿈꾸는 게 아니라 거의 조폭의 의리와도 같다. 사람 하나가 얼마나 소중하고 사람 하나의 작용이 얼마나 크게 미칠 수 있는지를 아내를 통해 알게 되었다.
원래 나는 결혼 반대, 여성 해방, 가족 해체주의자였다. ‘당신과 보다 많은 시간을 같이 함으로써 내가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혼자 사는 것보다 함께 사는 게 좋은 사람이 될 것 같다’고 청혼을 했다. 하지만 막상 결혼하고 나서는 남성의 기득권에 안주하고 있다.

-서울대학교에서 특별한 추억이 있는 장소는?
=‘강 건너 집’이 제일 기억난다. 관악산 올라가는 쪽 냇가 건너편에 있었다. 지금은 다 헐어버렸다. 강의 때 교수님 모시고 가서 막걸리를 마시곤 했다. 대운동장 위 둔덕에서도 막걸리를 많이 마셨다. 관악산 아래에 있는 작은 댐 위에서 보신탕을 많이 먹었다. 하숙생 친구들 하숙집에서 솥을 가져오고 돈 있는 친구들 돈 모았는데 15명 정도 모이면 딱 좋았다.
졸업 하고 나서 몇 번 가보았는데 너무 많이 변했다. 그 때는 녹지 공간 많았는데 지금은 건물이 아주 많고, 특히 기업들이 지은 건물이 많이 늘은 것 같다. 예전에 비하면 세련된 것 같지만 낭만이 없어진 것 같아 아쉽다. 서울대는 연구시설에 투자가 많이 되어야 될 것 같아 나쁘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추억의 장소들을 콘크리트가 차지하고 있으니 벌써 이렇게 늙었나 생각이 든다.

-딸들 교육은 어떻게 시키는가?
=스트레스를 안 주는 게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본인들이 알아서 무언가를 하고 싶을 때 기회를 주고, 자극이 필요할 때 좋은 자극을 주는 일을 한다. 결과를 끌어내기 위해 싹을 뽑아 올려야겠다는 생각은 안 한다.

-딸들에게 몇 점 받는 아빠인가?
=내가 생각할 때는 100점 만점에 40점을 과락이라고 본다면 59점 정도가 될 것 같다. 과락은 아니지만 아이들이 원할 때 있어주는 아빠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다.
3주일 장기간 외국 출장을 다녀와서 아이들이 보고 싶어서 반겼는데 아이들은 오히려 덤덤했다. 보고 싶지 않았냐고 물어보니 ‘평소에도 못 보잖아’라고 말했다. 충격을 받았다. 기회가 될 때 일단 자주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있을 때 잘 해야겠다.

-대학 1학년으로 돌아가면 무엇을 하고 싶은가?
=돌아가면 더 치열하게 더 열심히 할 것 같다. 그 때의 대학이라면 민주화가 최고의 과제였기 때문에 더 철저히 운동해서 전두환, 노태우를 퇴장시켰어야 하지 않았을까? 대학생들은 혜택을 많이 받았고 빚을 많이 진 사람들이기 때문에 빚을 갚는 방법은 민중들한테 갚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역사의 제단에 나를 바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금의 대학이라면 ‘누구를 타도할 것인가? 누구한테 최루탄을 쏴야 할 것인가?’가 모호하다. 진보운동을 배척하는 것은 아니지만 더 중요한 과제가 달라졌다. 지금의 대학으로 돌아간다면 전혀 다르게 살 것 같다.
전공 선택부터가 문제인데, 경영을 택했을 것이다. 한국 사회가 나아갈 길은 생산성 혁신 밖에 없는데 과학기술혁신과 경영혁신이 핵심이다. 과학기술, 경영, 가치 창조 부분에서 인재들이 다른 것들 신경 안 쓰고 마음껏 할 수 있고 삶의 질도 높일 수 있어야 한다. 20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사회적 지향점이 달라졌다고 생각한다. 지금 대학에 들어간다면 나는 놀기 좋아하고 호기심 많기 때문에 무언가 새로운 것을 해보려고 하지 않을까? 매킨지를 넘을 수 있는 경영컨설팅지식그룹을 만든다든가 펀드매니저 같은 것을 해보고 싶다. 이용주

<한겨레> 인턴기자 minamjijon@naver.com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