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허무주의자들에게 고한다"
  [대화]〈12〉서경식 & 김상봉 : 디아스포라, 민족, 그리고 역사
  2006-09-06 오후 6:23:49

 재일조선인 3세 서경식은 1966년 고등학교 1학년 때 처음 한국에 올 수 있었다. 당시 '재일거류민단 하계학교' 프로그램에 참석해 경주를 방문한 그는 먹고 살기에 급급해 문화 유적 따위는 돌볼 겨를이 없는 모국의 가난을 보았다. 그리고 경주의 한 박물관에서 제 몸뚱이조차 잃어버려 머리만 남은 석불을 보고 시를 썼다.
  
  석불
  
  
머리가 아파질 만큼 하늘이 깊은 날
  시골 마을의 작은 박물관 기와 조각이 무너져 내릴 것 같은 붉은 문을 들어서다
  머리 하나가 서늘하게 미소 짓고 있네
  불타버린 석단에 엄숙한 얼굴로 서 있는 내 앞에서
  머리만 남은 그대는 조용히 미소 짓고 있네
  비를 피할 수 있는 처마도 없고 위험을 지킬 만한 철책도 없네
  말라버려 숨죽은 잡초 위에 머리만 남은 그대
  나는 그대를 무어라 부르면 좋을까
  
  매미도 울지 않는 여름 눈부신 빛 속을 나는 그대를 향해 다가선다
  비틀어져 볼품없는 소나무
  그 조그만 그늘 속에서 돌로 된 그대는 미소 짓고 있네
  얼마나 긴 세월을 그대는 그렇게 웃어 왔는가
  제대로 된 논밭도 없는 산악지대
  경상북도의 가난하고 시커먼 백성들에게 그대는 그렇게 미소를 건네 왔다
  하지만 세월의 태풍은 그대의 강건하고도 부드러웠던 몸을 빼앗았다
  코조차 떨어져 나가고 윤곽 여기저기에는 이끼들이 돋아나 살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대의 이 안정감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세월이 흐르게 만들었던 백성들의 눈물조차 마침내 말려버리고 마는
  경상북도의 여름에 평화롭게 웃고 있는 그대
  그대는 도대체 무엇인가
  나는 도대체 무엇인가
  나는 남의 나라 일본의 말로 이야기하고 그대의 이름조차 이해하지 못한다.
  나는 도시인의 손을 가져 그대를 흔들어 움직일 수 없다
  나는 야간열차를 타고 배를 타고 일본에서 왔다
  그러니 이 마을에서 가끔 교토를 떠올리기도 한다
  아마도 그대는 일본을 알고 있음이 틀림없다
  그대가 몸통을 잃어버린 것도 코가 떨어진 나간 것도 그 나라와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대 눈으로 그 나라 인간들이 이 나라에서 무엇을 했는지 보았을 것이다
  나는 일본에서 온 나그네
  그대는 왜 나를 비난하지 않나
  그럴듯한 얼굴로 카메라를 들고 그대를 가엾어 하려고 하는 이런 나를
  
  그대는 미소 짓고 있네
  정원석과 같은 산들에 벌레처럼 들러붙어 살아가는 백성들에 둘러싸여
  그대는 미소 짓고 있네
  시골마을 박물관 마당 위에 아무렇지도 않게 미소 짓는 그대
  시커먼 세월의 흔적 돌로 된 그대
  그대를 금이나 동 같은 것이 아닌 돌로 만든 조상의 그 지혜가 얼마나 기특한지
  나는 그대 앞에서 무심결에 눈물을 흘릴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 이해할 수 없다
  간밤에 해협을 건너 처음 이 나의 나라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니
  그러니 그야말로 나는 납득할 수 없다
  
  그대의 풍요로운 입가
  어째서 참을 수 없는 분노에 뒤틀리지 않을까
  그대의 부드러운 눈의 윤곽
  어째서 피눈물이 흘러넘치지 않을까
  나는 무엇을 구경하고 있을까
  나에게 보이는 것은 그대의 부드러운 미소
  하지만 나의 귀에는 나의 관광에 들어붙어 먹고 살려는 껌팔이 소년들의 조숙하고 쉰 목소리만 끼어드는 것이다

  

▲서경식 도쿄 게이자이대 교수(왼쪽) ⓒ프레시안

  거리의 성매매 여성들이 15세 소년인 자신마저 붙들어 세우는 어둡고 우울한 모국의 모습, 또 그 모국에 쉽게 동화되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 첫 한국 여행을 통해 얻은 문제의식은 평생 그의 화두가 됐다. 조국 방문 후 2년이 지나, 그는 이 시들을 묶어 박일호라는 필명으로 자비 출판했다. 그리고 그 시집의 머릿글에서 첫 고국 여행에 대해 이렇게 썼다.
  
  "이년 전 나의 첫 한국 여행은 고향을 모색하는 것이었다. 그때까지 나는 스스로의 존재기반으로서의 고향 또는 민족을 실제적으로 이미지화하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나는 고향의 실체를 잡고 싶었다. 한국의 8월은 둔기로 얻어맞는 것처럼 더웠다. 나는 그 더위 속에서 마비되려는 의식에 피를 흘리는 듯한 방식으로 고향의 모습을 기록하려고 했던 것이다.
  
  나는 목격자이고자 했다. 목격자는 방관자가 아니다. 목격자는 언젠가 증언을 한다. 그리고 나는 목격으로부터 증언까지 2년의 세월이 필요했던 것이다. 하지만 나의 무능력은 나의 진실의 증언을 허락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의 말은 공중을 떠돌고 의미를 잃고 허망하게 붕괴해버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의 말은 그대들의 머리를 자극하는 데는 너무 가벼운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누구를 향해 이야기하고 있는가. 그대들 일본인들에게 있어 나의 시는 과연 무엇이 될 수 있을까. 나는 모른다. 아마도 이 책은 내 마지막 시집이 될 것이다. 나는 일본어로 고향을 쓴다는 것의 한계에 직면하고 있고, 모국어로 고향을 쓰기에는 나는 너무나 일본인인 것이다. 자, 나는 증언했다. 내일에는 이미 나는 목격자에 머물러 있지는 않으리라."

  
  서경식은 마치 평생을 '경계인'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스스로의 미래를 예고라도 하듯이 재일조선인으로서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시와 글 곳곳에 토로하고 있다. 서경식이 40년 전에 쓴 시와 글을 읽고 김상봉은 "디아스포라의 정체성이 시와 글에 고스란히 배어 있다"면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 김상봉 전남대 교수 ⓒ프레시안

  전편의 대담("2006년 한국은 '고통의 역사'를 잊었나")에서 서경식이 '동아시아인으로서 공통성'을 쉽게 언급하는 한국 지식인들에게 문제의식을 느낀 것도 그의 디아스포라적 정체성에 기반한 것이다. 역사의 고통을 잊은 사회는 막연한 자부심과 긍지에 기반한 왜곡된 민족의식에 사로잡힐 수 있다. 이처럼 '과거를 어떻게 기억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 의식은 국가의 경계를 넘는 디아스포라가 점점 더 증가하고 있는 '현재', 그리고 '미래'와 연관된 것이기도 하다.
  
  서경식은 20세기 소수자의 삶이 배어 있는 디아스포라의 정체성이 새로운 보편성을 만들어낼 수 있기를 바란다. 서경식이 김상봉과 만나는 부분도 이 대목이다. 김상봉 역시 (패권적, 배타적) 민족주의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공동체의 가능성을 모색해 왔기 때문이다.
  
  서경식과 김상봉은 타자와의 만남이 가능한 주체를 꿈꾼다. 김상봉이 '서로 주체성'이라고 이름 붙인 그것은 서경식이 '디아스포라 정체성'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런 대안적인 정체성을 가진 이들의 자발적 연대를 통한 '공동체', 바로 이것이야말로 21세기의 '민족'이 되어야 한다.
  
  대담 후반부를 발췌해서 소개한다. 두 사람의 대담엔 서은혜 전주대 교수가 배석해 통역과 진행을 도왔다.
  
  "민족을 새롭게 정의해야 할 때"
  
  서경식 : 윤동주의 시 '별을 헤는 밤'을 보면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프란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나온다. 윤동주는 이를 통해 열린 형태의 민족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다고 본다. 민족의식이 형성되는데 타자와의 만남은 아주 중요하다. 타자와 만나지 않을 때 국수주의적 민족의식이 우선한다.
  
  윤동주의 모어(母語)는 조선어였다. 나는 일본어가 모어다. 한국에서 일본의 지배는 35년 만에 끝났지만 아프리카처럼 100년 가까이 식민 지배를 받았다면 모어가 없어지고 일본어를 모어로 하는 사람이 많았을 것이다.
  
  개인들에게 모어가 절대적이라면 별 문제가 없다. 자기가 쓰고 있는 모어에 대한 의심이 없었다면 나도 운동주의 '서시'를 보고 이부키 같이 번역했을지도 모른다. 일본어를 모어로 하는 내 사고엔 일본적인 사고가 침투해 있기 때문이다. 무엇이 아름답다, 좋다는 느낌 자체가 일본어로 구성된다.
  
  일본어라는 모어는 자기가 선택한 게 아니고 아기일 때 투입된 것이다. 어머니가 아기에게 언어를 가르치는 것, 그것이 원초적인 폭력이다. 이 과정이 폭력으로 인식되면 근원적인 것도 의심하게 된다. 애국심이나 가장 깊은 수준까지 생각하면 자기가 쓰고 있는 말에 대한 의심까지 든다.
  
  김상봉 : 민족이 '상상의 공동체'라고 하는 말은 맞는 말이기도 하고 틀린 말이기도 하다. 그것은 민족이 '실체'냐 '무(無)'냐 하는 잘못된 인식으로 빠질 수 있다. 민족은 '실체'도 아니고 '무(無)'도 아니다. 집단적 주체다. 그것은 '우리'라는 공유된 자기-정체성에 대한 인식이 있으면 존재하고, 그것이 없으면 사라진다. 진정한 주체성은 타자와 만남을 통해 형성된다. 언제나 타자와 만남을 통해 참된 의미의 주체성이 형성되고 그게 '서로 주체성'이다.
  
  나는 이전에 민족을 가리켜 역사와 언어라고 하는 어떤 전제, 조건 위에서 수립되는 '공동 주체성'이라고 풀이했는데, 서경식 선생을 만나면서 내 안에 굉장히 중요한 변화가 있었다. 타인과 만남에 전제가 필요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금은 역사나 언어라는 전제를 버려야할 때가 아닌가 생각하게 되었다. 이 땅에 들어온 피부 색깔이 다른 이주민들과의 '공동 주체성'의 형성이란 과제를 생각해 봐야 한다. 민족은 역사적으로 조건 지어진 상황에서 우리가 맞닥뜨린 '만남의 공동체' 정도로 느슨하게 개념 지어져야 한다.
  
  윤동주 시인이 패, 경, 옥 등 이국 소녀 이름들을 통해 표현하고자 했던 민족주의 개방성에 대해 개념적인 말로 형상화시켜야 하는 게 인문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의 몫이다. 디아스포라적인 것을 담아낼 수 있는 지금까지의 민족 개념이 아닌 다른 것이 어떤 것이 있을까. 혼자서 곱씹으면서 도달한 결론이 우리 시대에 추구해야 할 개념은 만남의 지평 그 자체를 민족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서경식 : 5·18에서 '서로 공동체'라고 할 때, 모든 사람이 다 나서서 싸운 것은 군사독재에 대한 분노, 일상적인 지역적 억압에 대한 분노 등이 근간이 됐다. 한국 사람이니까, 광주니까, 이렇게 보는 게 아니다. 다소 진부하지만 정치적 목표를 같이하는 사람들의 공동체다.
  
▲ ⓒ프레시안

  김상봉 : 5·18을 생각하면 정치적 이념에 앞서야 하는 게 타인의 고통에 대한 응답의 문제다. 그것 없이 정치적 이념이 먼저 갈 때 인간은 수단화된다.
  
  서경식 : 1960년대에 일본에 재일조선인들의 정체성이 문제가 됐을 때 일본 내에서 조선 문화를 얘기한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이 주장은 일본이 고대와 중세 때 백제, 고려 등으로부터 문화를 전수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이 조선을 침략했다는 것이다.
  
  문화가 있다, 없다는 문제와 지배, 피지배는 다른 얘기다. '문화가 있다'고 강조하는 것은 자기가 천대받을 사람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고 싶은 욕심이다. 그렇다면 '문화가 없는' 사람들은 지배당해도 되는가? 이런 사고방식은 서양인들이 인디언들을 문명화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프란츠 파농의 <대지의 저주받은 사람들>(남경태 옮김, 그린비 펴냄)에 보면 식민지 지식인의 인식의 세 단계가 나온다. 처음에는 백인에 동일화하려고 노력하고, 두 번째 자기들이 고대에 있어 얼마나 훌륭한 문화가 있었는지 증명하려고 한다. 하지만 고대 아프리카에 훌륭한 문화가 있었다고 해도 백인들은 그 앞에서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문화를 시발점으로 자기를 증명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지금 눈앞에 있는 싸움을 통해서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이 세 번째 단계가 바로 디아스포라인 내가 근거로 삼을 수 있는 것이다. 파농도 디아스포라다. 알제리와 별 상관없는 사람이었지만 알제리 독립을 위해 투쟁하고 새로운 보편성을 위해 싸웠다.
  
  김상봉 :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지금 나누는 얘기들이 한국 사람들만의 얘기가 아니라 전 지구적인 보편성을 갖고 있다.
  
  서경식 : 디아스포라적인 객관성이 있다. 디아스포라야 말로 자신의 존재조건, 즉 언어조차 의심하면서 그래도 남는 자신을 근거로 타자와 서로 공동체를 만들 수밖에 없다. 피부 색깔이 다른 이주 노동자를 한국 사람으로 만드는 게 아니고 그들과 만남을 바탕으로 새로운 보편성을 이 사회에서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허무주의에서 나오는 삶의 의지?"
  
  어디서 어떻게 죽을까. 언제나 그게 마음에 걸린다.
  외국이 숙소에서 눈을 떠, 잠들지 못한 채 천장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면, 삶의 실감이 급격히 흐려질 때가 있다. 죽고 싶은 것은 아니다. 슬프다거나, 우울해진다거나 하는 그런 감정과는 좀 다르다.
  (…)
  '누군가가 뒷머리카락을 잡아당긴다'는 말이 있지만, 내 뒷머리를 이승으로 잡아끄는 힘은 너무 약하다. 이대로 죽는다고 해도 별로 달라질 것은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왜 계속 살아야만 하는가.
  (…)
  이렇게 나를 이 세상에 잡아매 두는 끈들을 그 어떤 것도 인공적이고 불투명한 것이다. 내가'죽음'을 향해 몸을 내밀었을 때 그 끈들이 나를 꽉 잡아줄 것인가. 그럴 것 같지 않다. 내 쪽에서 손에 쥐고 있는 끈을 살짝 놓으면 그걸로 그만일 것이다.(<디아스포라 기행> 46~49쪽)

  
  김상봉 : 서경식 선생의 <디아스포라 기행>에서 제일 가슴 아프게 읽었던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이었다. '낯선 도시 호텔방에서 내가 뛰어내린다고 하더라도 무엇이 나를 붙잡을 수 있을까'라는 물음에, 한 인간이 놓여 있는 측량할 수 없는 뿌리 없음, 허무함 등에 대해, 이 절규에 대해 내가 뭐라고 응답해야 하나, 이런 생각을 많이 했다.
  
  허무주의자가 아닌 사람은 교양인이 아니라는 식의, 우리 시대의 가벼운 허무주의에 대해 반감을 갖고 있기 때문에 허무주의라는 말을 쓰고 싶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아스포라로서 아주 절대적이고 실제적인 허무의 체험과 또 정반대로 보통 허무주의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가질 수 없는 삶에 대한 열정과 진지함이 어떻게 같이 갈 수 있는 것인지 궁금했다. 정말로 서경식 선생이 살아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조금만 더 정면으로 선생이 그 지점을 대면해줄 수 있겠나.
  
  서경식 : 아주 근본적인 문제다. 민족과 관련된, 디아스포라와 관련된 허무주의라고 할 때는 두 가지가 생각난다. 가네코 후미코(편집자 주: 조선인 남편 박열과 함께 1923년 히로히토 당시 일본 왕세자와 고관들을 폭살하려다가 붙잡힌 일본인. 1926년 3월 이들 부부는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가네코는 석달 후 감옥에서 자살한 시신으로 발견됐다)는 무정부주의자는 죽음을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아주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는 사생아라서 호적이 없었고, 그래서 소학교도 들어가기 힘들었다. 그의 아버지는 아주 가부장적이고 폭력적인 사람이었다. 그래서 후미코는 가부장제와 국가 제도에 대해 아주 철저한 증오를 갖고 이를 끝까지 관철했던 사람이다. 그는 죽음으로 자기를 관철했다.
  
  이봉창(편집자 주: 1932년 임시정부 국무위원 김구의 지시로 일왕 히로히토의 암살을 시도했던 인물로 그해 10월 사형을 당했다)도 마찬가지다. 과자점 직공, 철공소 직공 등을 전전하던 그는 유가다를 입고 게다를 신고 김구 선생을 찾아가 '죽고 싶다. 죽을 명분을 마련해 달라'고 했다고 한다. 이봉창이 마지막에 히로히토를 암살하기 위한 폭탄을 가지고 일본에 갈 때 바보처럼 웃고 있었다. 그는 평생 집착이 없었다. 이봉창도 다이스포라였고 그래서 그런 허무주의자의 분노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 ⓒ프레시안

  
김상봉 : 삶에 집착하는 한 누구도 자유를 쟁취할 수 없다. 죽음을 무릅쓰고 자기를 걸 수 있다는 것은 별로 놀랍지 않다. 오히려 궁금한 것은 삶에 대한 의지다. 삶의 이유, 존재의 이유, 근원적으로 긍정할 수 있는 힘이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
  
  우리 시대의 많은 사람들이 허무주의 때문에 병든다. 삶에 대한 열정을 잃어버리고 냉소에 빠지면 모든 게 다 면죄부를 부여받게 된다. 정반대로 그 허무주의를 참을 수 없을 때 맹목적인 우상숭배에 빠져들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소련이 망하기 전까지 역사에 대한 신뢰를 가질 수 있었다. 지금은 어떤 유토피아도, 절대자도 오지 않는 시대다. 서경식 선생은 디아스포라로 그걸 누구보다도 철저하고 처절하게 경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누구보다도 열정적으로 살았다.
  
  서경식 : 진부한 말이 될 것 같아 쓰고 싶지 않은데 그래도 '정의'다. 정의롭게 살고 싶다는 욕심이다. 중국의 루쉰은, 사람이 살아가는 것은 어떤 가능성 때문이 아니라고 했다. 길이 있다고 해서 걸어가는 게 아니다. 소련이 무너졌다고 해서 그만두는 건 싸움이 아니다. 근거가 없더라도 추구해야 할 가치가 있다. 전부 다 없어도 그래도 살아야 할 이유는 뭐냐고 물으셨는데, 그럼 전부 다 없으면 죽는 것이냐. 개개인의 허무주의와의 싸움이다. 19세기 러시아 허무주의자들은 다 귀족이었다. 사치스럽게 살 수 있었는데 노예를 해방시키고 재산을 나눠줬다. 이런 허무주의적 테러리스트들이 있었기 때문에 러시아의 변화가 있었다.
  
  김상봉 : 수백년 전 사람이 경험했을 무조건적이고 직접적인 삶의 동력 같은 것은 이제 누구에게도 없다.
  
  서경식 : 나는 유한이다. 국가나 국민은 무한이다. 내가 국가를 위해서 죽으면 불사가 된다. 새로운 우리라는 걸 구성할 때는 이런 사고방식을 거부해야 한다. 죽고 싶지 않다는 욕망을 직시하지 않는 한 국가나 국민이 재생되고, 국가주의나 국민주의로 후퇴할 수 있다.
  
  진짜 자유인이 되려면 이것부터 거부해야 한다.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는 게 자기 자신의 인생에 주인이 되는 길이다. 마음 아프게 생각할 일이 아니다.
  
  '나'라는 존재를 태어나게 만든 제국주의나 식민주의에 대한 저항이 삶의 끈을 잡는 행위 자체가 될 수 있다. 이를 놓는 게 패배라고 생각해서 끈을 놓을 수가 없다. 하지만 내가 내일 여기에서 몸을 던지고 죽었다고 해도 놀랄 필요나 가슴 아프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그냥 자살한 것처럼 뚝 끊어지는 것도…"
  
  허무주의와 삶에 대한 열정과 진지함의 관계를 두고 두 사람 사이에 아주 가깝지만 결코 좁혀지지 않는 거리가 보였다. 답이 없는 문제를 두고 대화는 끝이 없이 계속되었고 그럴수록 점점 더 자신의 가장 깊은 곳을 들여다봐야 한다는 불편한 긴장감이 자리에 있던 모두를 옥죄었다. 대화의 에너지는 거의 최고조에 달했다.
  
  윤리를 가능하게 하는 어떤 초월적 계기를 찾아내야 하는지, 혹은 그런 믿음에 기대지 않는다는 그 자체가 동력이 될 수도 있지 않은지…. 이런 문제들에 대한 대답은 좀 더 철학적인 탐구의 시간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기에 이 정도로 대담을 마치기로 했다.
  
  대담이 결말 없이 중간에서 끊긴 느낌이라 마무리 멘트를 부탁하자 서경식은 "그냥 자살한 것처럼 뚝 끊어지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는 말로 답을 대신했다.<끝>
   
 
  강양구,전홍기혜/기자
 
"2006년 한국은 '고통의 역사'를 잊었나" 2006-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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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지젝, 레닌을 권하다

슬라보예 지젝의 레닌론 <혁명이 다가온다: 레닌에 대한 13가지 연구>(길, 2006)가 출간됐다. 언젠가 이 책의 러시아어판 번역가능성을 타진해보다가 국내 한 출판사에서 책이 나올 예정이라고 들은 바 있는데, 바로 그 책인가 보다. 국역본은 독어본을 옮긴 것인데, 왜 마르크스가 아니라 레닌인가란 '상식적인' 의구심에 대한 반문으로 책을 열고 있는 지젝은 "하지만 21세기 신자유주의가 일상 생활의 곳곳을 지배하고 있는 시점에서, 레닌에 대한 새로운 평가를 통해 레닌을 복원"하고자 한다. 그것이 그가 고유하게 '레닌을 반복'하는 방식이다.

역자에 따르면, "지젝은 레닌을 통해 행동하는 지성이 아니라 실천하는 이론가를 발견한다. 오늘날 서구의 대다수의 행동하는 지성들, 구체적으로 예를 들자면 촘스키와 같이 '정치적으로 올바른' 사람이 아니라 지젝 자신은 실천하는 이론가이고 싶어한다. 지젝에게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은 최선이 아니다. 물론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태도를 취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속에서 발견되는 수많은 상대주의와의 투쟁을 하고자 한다. 이 점에서 지젝은 독일 고전철학의 계승자이다. 다른 한편으로 지젝은 노동자의 눈으로 (레닌처럼) 인텔리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분석가의 눈으로 (라캉처럼) 인텔리를 비판한다. 중요한 것은 무엇이 진실의 자리를 차지하는가이다."

한데, 목차에서부터 경제학 전공자인 역자가 너무도 잘 알려진 (영화 <매트릭스>의 문구이자 지젝의 저서명이기도 한) 문구 "Welcome to the Desert of the Real"을 "현실의 사막에 온 것을 환영하네"로 옮길 걸 보면 좀 우려되는 번역이기도 하다. '현실(reality)'과 '실재(the real)'를 구별해주지 않는 라캉-지젝 번역이 온전한 번역인가에 대한 의구심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더불어, 역자는 국내의 반면교사적 지젝 번역서들을 전혀 참조하지 않았다는 걸 알 수 있다). 그 정도선에서 번역의 오류가 다 카바되었기를 바랄 따름이다(책값도 만만찮은데 말이다).

 

이 책의 영어본은 <임박한 혁명(Revolution at the gates)>(Verso, 2002)이며, 1917년 2월부터 10월 사이에 씌어진 레닌의 문건 선집에다가 지젝이 서문과 후기를 붙인 것이다. '레닌의 선택'이란 제목이 붙은 후기의 분량만 170쪽 가량이 되는데, 독어판과 러시아어판은 이 후기만을 따로 독립시켜서 출간한 것이다. 이 영어판 출간과 관련한 소식이 교수신문에 게재된 바 있는데, 잠시 옮겨놓는다. 

교수신문(02. 09. 14) 영국의 레닌 다시 읽기 열풍

-‘레닌에 대해 말하지 않기’에서 ‘레닌에 대해 말하기’로? 사회주의권의 붕괴가 몰고 왔던 사상적 공황상태가 끝나가고 있다는 징조일까. 한국에서 거세게 불어닥쳤던 ‘청산’바람에 아랑곳하지 않고 끈질긴 유령들이 속속 돌아오고 있다. 맑스와 벤야민에 이어 이제 레닌까지 이 대열에 합류할 태세다. 영국의 좌파 출판사 버소가 맑스와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을 재발간한 데 이어, 펭귄출판사도 새로운 서문을 이마에 붙인 같은 책을 다시 출간함으로써, 이 귀환의 행렬을 실체화하고 있다. 버소는 오는 9월에 사르트르의 ‘변증법적 이성 비판’을 프레드릭 제임슨의 서문을 받아 재출간할 예정인데, 이 또한 오늘날 영국의 사상적 지형에 흐르는 기류를 가늠해볼 수 있는 좋은 실례라고 할 수 있겠다.



-거대한 레닌의 동상이 처참하게 무너지는 장면을 텔레비전 화면으로나마 똑똑히 지켜보았던 우리의 입장에서 새삼스럽게 레닌의 전기가 쏟아져 나오고, 그의 일대기를 조망한 다큐멘터리가 제작되는 것은 어안이 벙벙한 일임에 틀림없다. 프로이트가 말하듯이, 과거란 언제나 사후에 재구성되는 것이기에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일까. 그러나 단순하게 이런 사상적 ‘복고’현상을 심리적 과잉결정의 효과로만 설명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런 유령들을 불러내고 있는 힘은 과거의 유토피아를 통해 미래를 상상하는 그 노스탤지어에서 기인하는 바가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얼마 전 슬라보예 지젝의 손질을 거쳐 나온 레닌 선집 <임박한 혁명(Revolution at Gates)>은 이런 낭만주의적 노스탤지어에 대항해서 제기되는 ‘레닌 다시 읽기’의 전형처럼 보인다. 현실 사회주의의 한복판을 뚫고 나온 지젝의 입장에서 현실 사회주의에 대한 막연한 노스탤지어는 용납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의 입장에서 본다면 현실 사회주의는 리얼리즘 자체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사회주의 이론은 정신분석학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일까. 그가 이 선집에서 목표로 삼고 있는 것은 영웅적 이미지로 상징화되어 왔던 ‘천재 레닌’을 ‘인간 레닌’으로 현실화하는 것이다. 최근 류블랴나 대학의 ‘철학교수’로 직위를 옮겨 앉은 지젝은 혁명이란 파국적 상황을 온 몸으로 뚫고 갔던 ‘인간’ 레닌을 특유의 분석으로 형상화한다.

-물론 지젝이 레닌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욕망을 기준으로 한 쾌락의 정치학이다. 레닌과 스탈린을 비교하면서 지젝은 자본주의 발전이 늦었던 러시아에 공산주의를 직접적으로 이식하는 행위를 경고한 레닌의 입장을 강조한다. 이런 관점에서 레닌은 소비에트 권력이 할 수 있는 것은 ‘국가 자본주의’ 정책을 농민 대중에 대한 문화 교육과 결합시키는 것이라는 주장을 펼쳤다. 지젝이 볼 때 스탈린은 이런 레닌의 중도 점진적 사회주의 이행노선을 철폐하고, 일국 사회주의를 성급하게 달성하려고 함으로써 실패를 자초하게 됐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지젝은 레닌의 <국가와 혁명>을 일종의 유토피아적 기획으로 읽는다. 레닌은 말년에 이르러 <국가와 혁명>에서 제기된 유토피아주의를 폐기하면서, 훨씬 더 현실적인 볼셰비키 노선을 제시하고자 했다는 것이 지젝의 말이다. 물론 이런 레닌의 노선 수정이 혁명의 물질적 기반만을 강조하는 볼셰비키적 태도의 수용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지젝에 따르면, 레닌은 1920년대에 볼셰비키의 주요 임무가 교육을 포함해서 진보적인 부르주아 제도를 도입하는 것에 있다는 입장을 피력한다. 그러나 이런 레닌의 바램은 오히려 레닌이 지적한 러시아의 후진성은 유럽국가와 근본적으로 다른 문명을 새롭게 창조할 수 있다는 흥분 속으로 레닌을 몰고 갔던 것이다.

-이런 지젝의 분석은 다분히 러시아 혁명과 그 이후 전개된 레닌의 정책들을 ‘욕구 충족’의 차원에서 바라보고 있는 것 같다. 헬레네 카레리가 쓴 <레닌>은 이런 지젝의 분석을 뒷받침해주는 구석이 있다. 카레리는 레닌의 역사적 성취가 전형적 혁명의 내러티브라고 할, 유토피아적 에너지의 황홀경 뒤에 찾아오는 낭만주의적 상실감을 극복함으로써 이룩됐다고 주장한다. 말하자면, 레닌은 이런 냉엄한 리얼리즘을 통해 유토피아적 순간을 연장시키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지젝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런 능력으로 인해, 레닌의 글들은 라캉이 지칭한 ‘상실된 원인에 대한 나르시시즘’을 갖고 있지 않은 것으로, 이런 사실은 레닌을 오늘날 가장 ‘실재’의 열정을 생생하게 전달해주고 있는 20세기 정치가의 한 사람으로 읽히도록 만든다. 



-물론 이 ‘실재’를 인식하고자 하는 야심들이 20세기의 사상사를 밀고 나갔다는 것은 부정할 수가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실재의 인식 문제와 별도로, 시종일관 지젝은 이런 실재의 범주를 리얼리티로부터 분리해왔다. 그의 입장에서 본다면, 오히려 리얼리티는 허위이며, 그 리얼리티의 고갱이가 바로 실재이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레닌은 리얼리티의 가상을 꿰뚫고 들어가서 이 실재를 직관적으로 경험한 흥미로운 인물이기도 하다는 것이 지젝의 궁극적 평가이다. 그러나 이 실재는 경험될 뿐 재현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실재는 언어 내에 존재하는 틈과 같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언어적 상징 형식을 분석함으로써, 이 틈의 형상을 그려내는 것뿐이다. 20세기의 숱한 사상가들과 작가들이 추구했던 것이 바로 이 언어를 임계상황으로 밀어붙여 실재의 틈을 발견하는 것이었다.

-지나간 혁명을 논하는 것이 언제나 노스탤지어를 간직할 수밖에 없는 것은 이 재현되지 않는 실재에 대한 무의식적 상실감 때문이다. 그러나 지젝은 이런 상실감을 넘어선 자리에 있는 레닌의 글들을 강조한다. 냉철한 리얼리즘을 통해 레닌은 이 실재에 대한 상실감을 직시함으로써, 오히려 우리에게 더 생생한 ‘혁명의 임박’을 알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이택광 영국통신원)

 

 

 

 

06. 09. 07.

P.S. 아래는 책의 러시아어본(2003). 제목은 <레닌에 대한 13가지 경험>이며, 표지 이미지는 데이비드 베컴과 레닌의 얼굴을 합성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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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그렇게 혁명을 갈구했나"
'대화' <1> 전순옥 vs 조주은, '여성, 노동, 그리고 삶'
등록일자 : 2004년 05 월 15 일 (토) 09 : 11   
 

  월 2회 정도 연재될 '대화'는 대다수 대담과 달리 논쟁이 지향점은 아니다. 책이나 글을 매개로 비슷한 지향과 입장을 가진 두 사람의 대담 형식으로 진행될 '대화'는 애정과 신뢰에 기반을 둔 공통의 지향점을 찾아가는 게 목적이다. '사회적 소통의 장'이라는 언론 본연의 기능에도 좀더 충실할 수 있기를 기대하며 첫 번째 '대화'로 전태일 열사의 동생이자 노동학자 전순옥씨와 노동자 가족을 연구하는 여성학자 조주은씨의 대담을 싣는다. 편집자.
  
  전순옥 이야기
  
  동대문 창신동 '참여성노동복지터' 소장인 전순옥(50)씨에게는 전태일 열사의 동생이란 수식어가 늘 따라붙는다. 1970년 전태일 열사의 분신은 전순옥씨 인생에도 큰 전환점이었다. 당시 16살이었던 그녀는 어머니 이소선씨와 함께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전씨는 22세까지 봉제의류 공장에서 일했고 그 후 노동조합 활동, 지역운동을 했다. 그녀는 35세의 늦은 나이에 영국 유학길에 올라 지난 2001년 런던 워릭대에서 70년대 여성노동운동을 다룬 <그들은 기계가 아니다(They are not machines)>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 논문은 그해 워릭대 최우수 논문으로 선정된 바 있다.
  

 
전순옥 참여성노동복지터 소장 ⓒ프레시안

  최근 출간된 <끝나지 않은 시다의 노래>(한겨레신문사 펴냄)는 이 논문을 한국어로 옮긴 것이다. 이 책은 동일방직노조·청계피복노조 등 70년대 여성 노동운동가 1백여명의 생생한 육성을 통해 1970년대 여성 노동운동, 또 그녀들의 삶에 대한 재해석의 필요성을 보여준다.
  
  박사학위를 받았지만 전씨는 유학을 떠나기 전 바로 그 자리로 돌아왔다. 영국 대학과 성공회대 교수직을 마다하고 전태일기념사업회 사무실이 있는 동대문에서 가난한 여성 노동자들과 함께 지내고 있다.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대신 사회에 알려주는 역할이 바로 내가 할일"이라고 생각하며 "저소득층 여성노동자에 대한 제대로 된 통계를 만드는 것"이 그녀의 목표다.
  
  전씨는 또 지난해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 의뢰를 받아 고 조영래 변호사의 〈전태일 평전〉(A Single Spark)을 영어로 옮긴 데 이어,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의문사진상위원회 등의 한국 민주화운동사 영문 번역 작업에도 적극 참여하고 있다. 이 작업에는 뒤늦게 그녀의 인생의 반려자가 된 남편 크리스 조엘(61)도 함께하고 있다.
  
  조주은 이야기
  
 
여성학자 조주은 ⓒ프레시안

  이화여대 여성학과 박사과정인 조주은(38)씨는 국내에서 드물게 '노동자 가족'을 연구하는 학자다. 노동, 노동운동에 대한 연구는 많지만 노동자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구체적인 삶에 대한 연구는 전무하다는 점에서 조씨가 석사학위 논문으로 쓴 울산 현대자동차 가족에 대한 <현대가족 이야기>(이가서 펴냄)는 올 상반기에 출간된 노동 관련서 중 도드라졌다.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의 재생산을 담당하는 곳인 가정은 노동 정책과는 거리가 먼 듯하지만 상호 중대한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그런 노동자 가족에 대한 연구가 전무한 우리나라의 학문 풍토에서 조씨는 일찌감치 어려운 길을 선택한 셈이다. 이런 선택에는 남다른 개인사도 한몫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면서 늦깎이 운동권이 돼 만난 노동운동가인 남편을 따라 울산에 내려가 '전업 주부'로 살았던 경험은 연구자로서 그녀를 '관찰자'에만 머무르게 하지 않았다. 그녀는 앞으로도 '노동'과 '가족'을 화두로 연구를 진행할 계획이다.
  
  전순옥ㆍ조주은 이야기
  
  두 사람에게 공통된 이슈는 '여성'과 '노동'이다. 지난 6일 오후 동대문 '참여성복지센터'에서 첫 대면하자마자 둘은 서로의 연구에 깊은 관심과 애정을 보이며 대담은 시작됐다. 대담을 마치면서 전씨는 조씨에게 공동 연구를 제안하기도 했다.
  
  70년대 여성노동운동이 남성 연구자에 의해 경제주의적ㆍ고립적 운동으로 폄하돼 왔다는 점에 동의하면서 두 사람은 연구 대상을 '대상화'하는 지금까지 구태의연한 연구 방법으로는 평범한 사람들의 삶이 제대로 설명될 수 없다는 점에 공감을 표시했다.
  
  또 "공부한 사람들끼리만 아는 책을 쓰는" 기존의 현학적 풍토에 대한 저항 의식도 비슷했다. 조씨는 "한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이해할 수 있는 책"을 쓰고자 했고, 전씨는 "책에 나오는 주인공들이 직접 자기 얘기를 읽고 자신들의 역사를 되돌아보면서 지금 여기에서 새로운 삶을 만들어가고 긍지와 자부심을 갖는 것"이 여성 노동자들에 대한 연구를 수행하는 목적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현재의 남성, 대기업, 정규직 중심의 노동운동에 대한 비판 의식도 똑같았다. 조씨는 "대기업 남성 노동운동가들이 자본가와 함께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놀이문화를 공유하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이들에게 희망은 없다"고 강하게 비난했다. 전씨도 "영국의 노조가 무기력하게 무너진 것은 노조의 조직 이기주의 때문이었다"며 "현재 우리나라 대기업 정규직 중심의 노동운동도 바로 그런 방향으로 가고 있지 않은지 반성해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리 사회의 '낮은 곳'을 들여다보고 있는 두 사람은 "우리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질문해야 할 때라고 지적한다. "우리가 왜 노동운동을 하고, 정치를 민주화하려고 하고, 경제 성장을 이룩하려고 하는가?", 좀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날 두 사람의 대담은 사회자가 별 끼어들 필요, 아니 끼어들 틈 없이 세 시간 넘게 계속됐다.
  
ⓒ프레시안

  대담은 지난 6일 저녁 '참여성복지터' 사무실에서 이뤄졌다. 다음은 대담 전문이다.
  
  "여성노동운동에 대한 무관심, 폄하로 이어져"
  
  프레시안 : 전순옥 선생의 책 <끝나지 않은 시다의 노래>와 조주은 선생의 책 <현대 가족 이야기>는 상반기에 출간된 주목할 만한 노동 관련 책이다. 서로의 책을 읽은 소감이 있을 듯하다.
  
  조주은 : 먼저 시작하겠다. 그간 '노동운동'의 역사는 있는데 '여성노동운동'의 역사는 없었다. 2000년에 개인적인 이유로 여성노동운동의 역사와 관련된 책을 도서관에서 검색해보니 정말 한 권도 찾을 수 없더라. 일제 강점기 때 부문운동의 하나로 여성노동운동이 좀 언급돼 있고, 최초로 고공농성을 했던 강주룡 열사의 얘기 등이 부분적으로 인용될 뿐이었다.
  
  이런 무관심은 자연히 여성노동운동에 대한 폄하로 이어진다. 남성이 쓴 많은 노동운동사는 1987년 노동자 대투쟁, 1990년 전노협(전국노동조합협의회), 1995년 민주노총으로 이어지는 한국 노동운동의 역사를 말하면서, 이런 노동운동이 1970년대 노동운동의 중심이었던 여성노동운동의 경제주의와 고립적인 한계를 극복하면서 가능했다고 쓰고 있다. '그건 아닌데', 하면서 한국 여성노동운동의 역사를 새롭게 재조명할 필요성을 절감했다. 이런 의미에서 전순옥 선생님이 쓴 이 책은 굉장히 큰 의의가 있다고 본다.
  
  전순옥 : 나는 일단 <현대가족 이야기>라는 제목이 참 좋더라. 현대에 살고 있는 가족이 파괴되고 있잖아. 난 제목만 보고도 많이 사서 볼 것 같던데. (웃음) 책은 많이 팔렸나?
  
  조주은 : (웃음) 거의 안 팔렸다.
  
  전순옥 : 사실 노동조합에 대한 연구는 너무나 많은데 실제로 노동자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그들의 구체적 삶에 대한 얘기는 전혀 없었다. 이 책은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에 돋보기를 들이댔다는 점에서 중요한 연구라고 본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나는 이 책에서 사용한 방법론이 참 마음에 들었다. 복잡한 이론을 사용하기보다는 책에서 서술되는 주인공들의 목소리를 가능하면 그대로 반영하려는 노력, 그렇게 그들의 목소리를 통해 구체적인 삶을 들여다본 것도 참 좋았다.
  
  조주은 : 글을 쓸 때 '한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은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전순옥 : 그런 부분이 나랑 맞았다. 내 책의 주인공들도 내가 인터뷰를 할 때, 전에도 인터뷰를 많이 했지만 도대체 내 말들이 어떻게 쓰이는지 몰라서 인터뷰하는 게 싫다는 얘기를 하더라. 그래서 나는 어떻게 하면 주인공들의 언어로 글을 쓸 수 있을까. 그래서 그들이 직접 자기 얘기들을 읽을 수 있을까, 이런 것을 고민하면서 글을 썼다. 나는 학자라기보다는 노동자 출신이니까 그런 면에서는 좀더 유리했고.
  
  내 책에 나오는 주인공들이 직접 자기 이야기를 읽고, 자신들의 역사를 되돌아보면서 지금 여기에서 새로운 삶을 만들어 갈 수도 있고 긍지와 자부심을 가질 수도 있다. 공부한 사람들끼리만 아는 책을 쓰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서구 페미니즘이 제3세계 여성을 대상화한 것은 오류"
  
 
ⓒ프레시안

  프레시안 : 책을 읽으면서 상대방의 연구에 이견이나, 아쉬운 점은 없었나?
  
  전순옥 : 영국에서 공부하면서 서구의 여성학자들이 아시아 개발도상국 여성노동자들을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알게 됐다. 그들은 아시아 여성노동자들이 경제성장 과정에서 겪은 희생을 보면서, 여성노동자들을 '희생자로 개념화((victimization)'하곤 한다. 대부분이 이런 접근인데 나는 이렇게 제3세계 여성들을 대상화시키는 것에 대해 비판적이다.
  
  제3세계 여성들은 무조건 순종적이면서 희생을 묵묵히 받아들이지 않았다. 자기들을 없애기보다는 오히려 현실의 모순을 떨쳐 일어나려는 움직임이 활발했고, 우리나라의 70년대 여성노동운동은 그 단적인 예라고 볼 수 있다.
  
  <현대 가족 이야기>를 읽으면서도 그런 접근이 좀 묻어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남편이 현대자동차 노동자이긴 하지만 그도 노동자 출신은 아니지 않느냐, 조주은 씨도 마찬가지고. 그러다보니 조주은 씨도 노동자 가족들 속에 파묻히기보다는 한 발 떨어져서 '관찰자의 시선'으로 본 게 아니냐는 느낌을 받았다.
  
  조주은 : 물론 그런 측면에 있다는 걸 부인하진 않겠다.
  
  사실 울산에서 이 책은 일종의 '금서'다. 나는 남성 노동자들이 이 책을 읽기를 원했다. 그들이 이 책을 읽고 성찰할 부분이 있다면 성찰하고, 너무 일상이나 관성에 젖었던 자기들의 모습을 이 책을 통해 스스로 객관화시켜 자기비판의 계기로 삼기를 바랐는데...... 남성 노동자들은 아예 안 읽더라. 남편 동료들한테 책에 대해서 물어보면 말을 안 한다. 왜 자기들 사는 모습을 공개적으로 까발려서 우리를 죽일 놈을 만드느냐, 자본가를 욕하고 기업을 욕해야지 왜 우리를 비판하느냐, 이런 식이다.
  
  실제로 인터뷰에 응한 여성들도 책을 보면서 기분이 별로 안 좋다고 애기했다. 한 여성은 나한테 "그래 언니 말이 맞아. 내 남편이 생산직 노동자가 맞긴 한데 그 책을 보니까 갑자기 내 처지가 서글퍼지더라"고 불편한 심정을 털어놓았다. 연봉 4~5천만 원씩 받지만 그래봤자 결국 너희는 노동자다, 이렇게 규정하는 게 불편해 보였다.
  
  전순옥 : 실제로 노동자이면서 노동자라는 것을 까놓고 얘기하는 건 안 좋아한다는 얘긴데, 그게 일반 노동자의 의식이 아닌가 싶다. 노동운동을 하면서 또 학생들에게 가르치면서 임노동자와 그들의 자녀들이 정작 스스로 노동자 또는 노동자의 자녀라는 의식을 거부하는 것을 보고 갑갑했던 적이 있다. 사실 그렇게 임노동자들이 노동자 의식을 갖지 못한 것은 예외적인 일은 아니지만 말이다.
  
  조주은 : 이견이라기보다는 질문이 될 텐데, 선생님 책을 보면 1970년대 여성노동운동과 관련된 국내 여성학 연구에 대해서도 비판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어떤 점이 문제라고 생각하는가.
  
  전순옥 : 사실 1970년대 우리나라에 여성운동은 없었다. 1980년대 들어오면서 여성평우회, 여성민우회가 생기는 것을 시작으로 여성운동 단체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여성학자들은 1970년대 '여성들이 여성의식이 없었다'고 비판하고 있다. 예를 들어 노동조합에서 단체교섭을 할 때 여성만의 문제를 제기하지 못했다거나, 여성 노동자로서 받아야 할 교육은 없었다는 둥. 이런 비판은 당시의 상황을 충분히 감안하지 않은 조금은 무책임한 것이다. 자기들은 그 때 뭘 했나?
  
  프레시안 : 그 당시 여성노동운동을 살펴보면 여성노동자들의 '생활 공동체' 같은 게 존재했다. 그런 모습을 '자생적 페미니즘'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전순옥 선생님도 '한국적 페미니즘'이라는 이유로 그런 것을 강조하고 있다.
  
  "박정희 정권의 탄압에 여성노동운동은 어떻게 10년을 버텼나"
  
 
ⓒ프레시안

  전순옥 : 그렇다. 이런 것을 한번 생각해보자. 1970년대 여성노동운동이 어떻게 박정희 정권의 억압적이고 무자비한 탄압 속에서 10년을 견딜 수 있었을까? 나는 그 힘이 바로 지적한 그런 데서도 나왔다고 생각한다. 많은 연구들은 당시 교회에서 여성노동운동을 지원해준 것을 중요하게 보는데 그것보다는 바로 이런 부분이 더 중요하다.
  
  그들은 정말 인간으로서, 여성으로서 너무 대접을 못 받고 살아왔다. 집에서는 말순이, 섭섭이, 끝단이, 큰년이, 막내로 불리다 공장에 오니까 시다 1번, 미싱사 3번으로 불렸다. 그런데 노동조합에서는 그들의 이름을 불러줬다. 노동조합 활동을 하면서 위원장, 교육선전부장 등 직함으로 불리고. '아, 나한테 이름이 있었구나', 이렇게 노동조합 활동을 통해 자아, 존재를 찾은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공장에서 사장들하고 단체교섭을 하면서 사용자가 "미스 리"라고 부르면 "내 이름은 이총각이고, 지부장이다"라고 당당하게 요구할 수 있게 됐고 또 그런 대접을 받으면서 '아 노동조합이야말로 나의 자아를 지켜주는 곳이구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됐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노동조합을 지키는 데 헌신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생각된다.
  
  프레시안 : 그런 점과 연관해서, 1970년대 여성노동운동은 노동조합의 민주적 운영 방식에 있어서도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고 생각된다.
  
  전순옥 : 맞다. 남성 노동운동가들이 노동조합을 운영하는 방식과 여성 노동운동가들이 노동조합을 운영하는 방식은 전혀 다르게 나타났다. 심리학적으로 남성은 개인적으로 지도자로 우뚝 서려고 하는 성향(individual-oriented)이 있고 여성은 같이 하려는 성향(group-oriented)이 있다고 설명된다. 노동조합 운영에서도 이런 면이 발견된다.
  
  남성들은 자기가 모든 것을 결정하고 이끌어가려다 보니 굉장히 비민주적으로 조직을 운영하게 된다. 그러나 1970년대 여성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을 운영할 때 모든 것을 조합원들과 같이 의논했다. 여성 노동운동가들은 조합원들 이름 하나하나를 다 기억하려고 했고. YH노조의 최순영 씨 같은 사람은 조합원 3천 명의 이름을 다 기억하려고 노력했던 사람이다.
  
  예를 들어 남성 노동운동가들이 단체교섭을 할 때는 '빠다 조건'이라는 게 있다. 노조 지도자가 사용자한테 이번에 임금을 10%에서 1%를 더 올려주면 내가 노동자 생산력을 향상시키고, 노조가 시끄럽지 않도록 하겠다고 물밑 협상을 하는 것이다. 그러고는 조합원들한테 는 '당신들이 나를 위원장으로 뽑아준다면 다른 사람보다 임금을 1% 더 올리겠다'고 말하고.
  
  근데 여성 노동운동가들의 모습에서는 이런 것을 찾아볼 수 없다. 그들은 단체교섭을 할 때 임금 인상률을 지도부에서 결정하는 게 아니라 조합원들과 함께 결정했다. 1970년대에는 소그룹이 많았는데, 그런 소그룹에서 '이번에 우리가 임금을 얼마를 올려야 하는지' 자기들끼리 논의를 한다. 조합원들이 임금 인상률을 15%로 결정되면 집행부가 논의를 해서 조합원들의 의견을 최대한 수용한 결정을 내리고, 공고한다. 이런 과정을 거친 간부들은 교섭에 들어가서 반드시 15%를 올려야 한다. 조합원들의 의견이기 때문에 다른 '빠다 조건'으로 바꾸지도 못한다. 조합원들은 그들대로 내가 주장한 15% 인상을 간부들이 사용자와 교섭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자연스럽게 지도부에 신뢰와 절대적 지지를 보낸다. 여기서 지도부는 또 싸울 용기와 힘을 얻는다.
  
  "혼자 결정하다 보니 남성 노동운동가들은 회유가 잘 돼"
  
  조주은 : 동감한다. 남성 노조 지도자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은 "제가 다 알아서 하겠습니다", "제가 다 책임지겠습니다", "믿어주십시오", 이런 얘기들이다.
  
  전순옥 : 맞다. 그런 남성 노조 지도자들은 모든 것을 혼자 결정하고, 혼자 달려가다 보니 유혹에도 쉽게 무너진다. 남성 노동운동가들은 회유가 잘 된다. 어용이 되기 쉽다. 박정희가 1960~70년대 노조를 완전히 어용화시켜 조정할 수 있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남자들 몇 명만 잡고 있으면 노조를 좌지우지할 수 있었던 그런 분위기 탓이었다.
  
  그러나 1970년대 여성들이 중심이 된 노조는 그럴 수 없고, 비타협적이어서 오히려 박정희한테 큰 타격이었다. 그래서 더욱 박정희는 민주노조를 없애야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YH노조가 신민당사에서 농성을 할 때 겨우 여성 2백여 명이 농성을 하고 있는데 중앙정보부 김재규가 관여를 하지 않았느냐. 그만큼 그들의 행동을 큰 타격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한두 사람을 회유하는 것으로 안 되니까 뿌리째 뽑아서 노조를 없애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 상황을 바로 1970년대 여성 노동운동가들이 만들어냈다.
  
  조주은 : 당시에 여성노동자들의 파업을 남성노동자들이 앞장서 방해했었다. 구사대의 대부분이 남성노동자였고 여성노동자가 출근 투쟁할 때 위협을 가하고, 머리채를 잡으며 폭력을 가했던 게 다 남성노동자들이었다. 그런데 그런 부분은 선생의 연구에서 별로 드러나지 않는다.
  
  전순옥 : 섬유나 방직 산업에서도 총 4천 명이 일하는 공장에 남자는 한 5백 명 정도에 불과했다. 1천3백 명 있는 공장에서 남자는 1백 명 정도가 있었고, 나도 당시 여성노동자들을 인터뷰하면서 '당시 남성노동자들에게 얼마나 많이 당했느냐, 같은 노동자들에게 당하는 게 더 분하지 않았느냐'고 질문을 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의 대답이 놀라웠다. 그들은 "아니다. 다시 생각해봐도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남성노동자들도 결국 사용자에게 고용된 희생자일 뿐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그들은 오히려 그런 남성노동자들을 노조 지도부에 넣으려고 노력했다. 이 사람들이야말로 계급의식이 훨씬 강했다. 남성과 여성의 대립 구도로 끌어가지 않았다. 만약에 그 남성들과 싸우기 시작하면 그게 바로 자본가들이 바랐던 '노-노(勞-勞) 갈등'이라고 여겼다. 개인적으로 이견이 있더라도, 그들의 입장을 최대한 그대로 반영하는 게 기록자의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내 책에서 남성과 여성간의 '적대적 관계'가 빠진 것은 그 때문이다.
  
  "대기업, 정규직, 남성 중심 노동운동 썩었다"
  
  프레시안 : 현재 민주노총이나 한국노총으로 대표되는 대기업, 정규직, 남성 중심의 노동운동에 대한 비판이 많이 있다. 두 분의 연구는 현재 이런 노동운동 경향에 대한 아픈 비판이라고 생각한다. 노동운동이 자기비판을 하면서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의견을 듣고 싶다.
  
  조주은 : 극단적인 표현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대기업, 정규직, 남성 중심의 현재 노동운동은 '썩었다'고 생각한다. 파업을 하면서도 '삐삐 아줌마'를 불러서 같이 놀고... 울산에서 직접 보고 들은 차마 얘기할 수 없는 부분들이 많다. 가장 진보적이라고 생각되는 사람들이 집행부를 장악했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노사가 상견례를 핑계로 룸살롱을 같이 가는 경우도 많다. 사용자가 미리 대기시켜 놓은 아가씨들 끼고 양주 마시면서 놀고. 사용자가 용돈을 쓰라고 주머니에 돈을 찔러주면서 미끼를 던지면 일부 노동운동가들은 그걸 거부하지 않고 받기도 한다. 적어도 남성 노동운동가들도 자본가와 함께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놀이문화를 공유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무슨 전망을 가지고, 진보가 나올 수 있을까 굉장히 자괴감이 든다.
  
  오히려 나는 노동운동의 희망이 지금 현재 가장 변두리에 있는 노동자들, 비정규직 노동자들 또 그 중에서도 가장 주변부에 있는 노동자들의 활동 속에서 나오리라고 기대한다. 그들의 활동에서 새로운 희망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
  
  전순옥 : 자본가와 싸울 수 있는 조건은 자본주의화 되지 않는 것이다. 단체교섭을 통해 임금을 많이 올리는 것은 결코 자본과 싸우는 게 아니다. 오히려 그렇게 임금을 조금씩 올려 받으면서 노동자들은 '자본의 그물' 속으로 점점 들어가는 것이다. 우리가 의식된 노동자라면 그런 것들을 오히려 거부해야 한다.
  
  우리가 아무리 임금을 올려 받아도 자본가처럼 잘 살 수는 없다. 결국 우리가 노동자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그런데 지금은 마치 임금인상이 노동운동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 됐다. 그것이야말로 자본가들이 원하는 것이다. 대기업 노동자들 중에서는 연봉 4~5천만 원, 심지어 6천만 원을 받는 곳도 있다. 강연을 하러 가면 아예 노조에서 그런다. 강연 듣는 사람들은 노동자가 아니라고.
  
  그렇게 임금이 올라가면 자연히 노동조합의 힘은 없어진다. 어느 정도 임금이 되면 노동자 동료들과 함께하기보다는 가족들과 자본주의가 제공하는 각종 소비문화를 즐기고 싶어진다. 비정규직 문제를 가지고 노조가 집회를 해도 '그것은 나하고는 상관 없는 일이다', 이런 식이다. 정말로 자본가들이 바라는 그런 노동운동이 지금 한국 노동운동의 모습이다.
  
ⓒ프레시안

  "영국 노동운동 조직이기주의로 망해. 현 대기업 노조 권력 다툼에 몰입"
  
  그럼 어떻게 할 것인가. 나는 영국 노동운동이 망했다고 본다. 그들은 노동조합이 조직이기주의에 빠져 비정규직이나 여성노동자들 등 주변에 있는 노동자들의 권익을 추구하는 데 등한시했고 결국 대중으로부터 소외됐다.
  
  그것을 절묘하게 이용했던 게 바로 대처다. 1980년대 대처가 추구했던 신자유주의 정책의 핵심은 노동조합의 힘을 약화시키는 데 있었다. 노조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서는 조합원 수를 줄여야 했고, 국영기업의 민영화 정책을 강하게 밀어붙인 배경에도 이런 사정이 있었다. 국영기업을 사기업으로 만들면서 구조조정을 통해 한 사업장에서 반 수 이상의 노동자들이 해고됐다. 영국의 노조가 너무나 무기력하게 이런 공세를 당한 데는 노조의 조직이기주의 때문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대기업, 정규직 중심의 노동운동도 바로 그런 방향으로 가고 있지 않은지 반성해봐야 한다.
  
  영국에 처음 간 1990년 초에 노동자 대회를 갔는데, 2백 명이 참석했더라. 당시 우리나라는 노동운동이 비약적으로 성장하고 있을 때였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운동은 성공할 때가 있고 기울 때가 있다. 우리나라의 노동운동도 이런 것을 똑바로 배워야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조주은 : 현재 대기업 노동조합들은 서로 조직의 권력을 잡는 데 몰두해 있다. 민주노총 현대자동차 노조 자유게시판을 한번 봐라.
  
  내가 남편하고 5년 정도를 떨어져 있었다. 남들이 남편이 '바람'을 필지도 모른다면서 걱정하곤 할 때마다 나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남편이 혹시 다른 여자하고 그런 일이 있다면 바로 자유게시판에 뜬다. 눈에 띄는 신인 노동운동가가 부인하고도 떨어져 있는데, 저 뒤를 캐면 속한 조직에 흠집을 낼 수 있겠구나 하면서 감시를 하는 거다. 남편이 속한 조직의 상대편 조직 사람들이 내 남편을 지켜주고 있는데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웃음)
  
  현대자동차 노조의 경우에는 이번에 울산 북구에서 민주노동당 국회의원이 나왔기 때문에 권력을 둘러싼 경쟁이 더욱더 치열해질 것이다. 다음 현대자동차 노조 위원장을 하는 것은, 이후에 누가 울산 북구 국회의원을 하느냐의 문제와도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차마 말로 못하는 사정들이 너무나 많다.
  
  전순옥 : 사실 우리 노동운동 속에 보기에도 민망한 추악한 계파 싸움이 있다. 다들 다른 이데올로기를 표명하지만 사실 자기 조직을 지키기 위한 이데올로기이지 노동자를 해방시키기 위한 이데올로기가 아니라는 것은 본인들이 더 잘 안다. 서로 자기 정파를 살리기 위해서 내분을 하고, 그 때문에 지도자들을 믿고 따랐던 노동자들이 희생을 당하고.
  
  이렇게 지도부가 계파 싸움에 몰두해 있는 동안 조합원들과 지도부의 괴리감이 커진다. 지도부가 뭘 하고 다니는지 조합원들이 모른다. 그러다 보니 예전에 없던 '지도부 불신임'이 많이 일어난다. 이런 속에서 노동운동의 노하우가 축적이 안 된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지도부는 능력 없는 허수아비가 될 것이고, 그러다 보면 더 계파 싸움에 의존하는 악순환이 반복될 것이다.
  
  프레시안 : 조주은 선생의 남편도 현대자동차 노조 활동가였다. 남편은 이 책에 대해 어떻게 평가했나?
  
  조주은 : 남성노동자들을 너무 비하하는 표현들이 있어서 걸린다고 얘기했다. 예를 들면 "남성노동자들은 여성노동자들을 성적인 시선으로 대한다", 이런 단정적인 표현을 "그러기 쉽다" 이렇게 고치는 식으로. (웃음)
  
  전순옥 : 물어보고 싶은 게 하나 있다. 여성은 18명을 인터뷰했는데, 현대자동차 남성노동자들의 수는 적다. 일부러 아내들을 중심으로 그들의 가족 얘기를 쓴다고 해도, 부부 양쪽 얘기를 같이 들으면 내용이 더 풍부해졌을 텐데, 왜 그랬나? 남성노동자들을 인터뷰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나, 아니면 의도적이었나?
  
  조주은 : 약간 의도적이었다. 이 연구를 하기 전에 울산 노동자 가족에 대한 연구를 하면서 부부를 같이 인터뷰한 적이 있는데 부인은 말을 한 마디도 못했다. 그런 거 보면서 같이 안 되겠구나 싶었다.
  
  사실 가장 좋은 것은 똑같은 사안을 놓고 부부를 동시해 인터뷰해서 그들의 목소리를 담는 것일 텐데, 울산에서는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많았다. 그럴 때 남자들은 대개 "나는 이렇게 얘기했는데 너는 뭐라고 했느냐. 너한테 이런 질문 할 테니 이렇게 답해라", 이런 식으로 아내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려 든다. 그래서 처음부터 아내의 목소리에 주목하기로 했다.
  
  프레시안 : 혹시 서로의 책을 읽으면서 세대차나 또는 시각차는 없었나?
  
  조주은 : 나 같은 경우는 오히려 가까워졌다. 솔직히 말하면 전태일 열사의 여동생이라는 선입견 때문에 전순옥 선생의 책은 남성적 시각이 주가 됐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막상 책을 읽어보니 책 전체에 여성주의적 관점을 견지하려고 애쓰고 있는 것을 보면서 오히려 반갑게 느껴졌다.
  
  "노동자 중에도 가장 힘없는 노동자에 마음 가. 그게 바로 여성노동자"
  
  전순옥 : 이 책을 쓸 때도 그랬고 지금도 주변 사람들은 내가 여성주의자인지 안다. 또 여기 창신동에 와서 '참여성노동복지터'를 하고 있어서 내가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누가 '페미니스트가 아니냐' 물어보면 '아니다'라고 말한다. (웃음) 페미니즘을 거부하기 때문은 아닌데 어쨌든 나는 페미니스트는 아닌 것 같다.
  
  나는 아무래도 노동자 출신이라서 그런지 노동계급의 성향이 짙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 노동계급 중에서도 가장 열악한 곳에서 일하는 사람들, 사회에서 가장 힘이 없는 사람들, 같은 노동자 중에서도 가장 힘이 없는 노동자 쪽에 내 마음이 갈 수밖에 없다. 그런데 항상 그곳에는 여성이 있었다.
  
  프레시안 : 괜한 것을 물은 것 같다. 그럼 상대방에 대한 조언이나 바람이 있을 법하다.
  
  전순옥 : 나는 오늘 조주은 선생이랑 같이 얘기를 해보니까 앞으로 같이 해볼 수 있는 일들이 너무 많을 것 같아서 기대가 된다. 얘기를 하면 할수록 그런 생각이 더 뚜렷해졌다.
  
  앞으로 빈민 여성에 관심을 가지는 학자들끼리 네트워크를 한번 해보고 싶다. 서로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방점은 다르겠지만, 부분적으로는 같이 연구할 수 있는 것들이 많이 일을 거라고 기대된다.
  
  조주은 : 나도 그 네트워크에 꼭 끼워 달라. (웃음) 나는 전 선생이 페미니스트가 아니라고 말한 게 페미니즘에 대한 거부감이 아닌가라는 생각도 든다. 얼마 전에 <한겨레21>에 내 책에 대한 서평이 실렸는데 거기에 '여성학자 조주은'이라고 쓰인 것을 보고 나도 깜짝 놀랐다. 그 때 기분이 참 묘했다. 내 자신부터 여성학자라고 규정되는 게 당혹스러웠다.
  
  나는 전순옥 선생이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한다. 선생이 하는 일이 가장 앞서가는 여성주의적 실천과 연구라고 생각한다.
  
  "노동자 목소리 대신 알려주는 게 내 할일"
  
 
  전순옥. <끝나지 않은 시다의 노래> (한겨레신문사 펴냄) ⓒ프레시안

  프레시안 : 현재 하고 있는 일과 앞으로 계획이 있다면 소개해 달라.
  
  전순옥 : 내가 연대하고 싶은 사람들, 이 노동자들에 대한 기록이 너무 없었다. 창신동 봉제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몇 시간을 일했고, 얼마를 받고 있는지에 대한 통계가 하나도 없다. 기존의 통계들은 너무나 공평하지 못하고 자의적이다. 소외된 사람들은 통계마저도 거부한다.
  
  우리나라가 세계 11위의 경제 규모를 가지고 있고, 노동운동도 많이 발전했지만 여전히 이 사람들은 그런 것과 무관하게 살고 있다. 그들의 목소리를 기록하고 그들의 통계, 아니 우리들의 통계를 만드는 것이 바로 내 꿈이다.
  
  영국에서 학위를 마쳤을 때, 그 학교에 자리가 났었다. 사실 고민하면서 영주권 신청까지 했다. 그러나 이런 결심을 굳히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한국에 와서 마침 성공회대학에 연구교수 자리가 생겨서 가게 됐는데 거기도 딱 1년 만에 사표를 냈다.
  
  내가 원래 이 지역에서 여성노동자 공동체, 탁아소를 했다. 이제 외국까지 가서 박사를 마치고 다시 돌아오니까 주변에서 '박사까지 하고 이걸 하느냐'고 혀를 차는 사람들이 많다. 나는 바로 박사까지 했기 때문에 꼭 여기로 돌아와야 했다고 생각한다.
  
  전태일 오빠는 70년대 노동자들의 참상을 알리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으로 노력했다. 그런데 그가 보잘 것 없는 노동자였기 때문에 아무도 귀를 안 기울였다. 만약 전태일이 대학생이었어도 그랬을까?
  
  여기서 1960~70년대부터 노동을 하고 있던 여성노동자들이 16시간씩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고 있어도 아무도 모른다. 그런데 내가 돌아오니까 인터뷰도 하고, 한마디 하면 신문에도 실리고 그러더라. 그게 바로 외국 유학 다녀온 박사라는 타이틀 때문이라면,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대신 사회에 알려주는 역할이 바로 내가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조주은 : 나는 아직 학위 과정 중에 있으니까 큰 포부를 말하기는 좀 어렵다. 다만 노동자 가족 문제에 계속 천착해 들어갈 생각이다. 솔직히 노동자 가족을 연구하는 사람이 나 밖에 없는 것 같다. <현대가족 이야기>는 노동자 안에서도 가장 상층 가족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이젠 가장 밑바닥에 있는 노동자 가족에 대해서 연구해보고 싶다. 또 민족주의적인 태도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더 홀대 받고 있는 이주 노동자의 가족에 대해서도 연구를 해보고 싶다.
  
  "권력 가진 이들의 정체된 의식이 사회의 정체 낳아"
  
 
  조주은. <현대가족 이야기> (이가서 펴냄) ⓒ프레시안

  프레시안 : 마지막 질문을 던져보자. 각자 영역에서 두 분은 우리 사회의 변화에 대한 어떤 전망을 가지고 있나.
  
  전순옥 : 요즘엔 현대 사회와 가족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곤 한다. 가족이 어떤 가치를 함께 나눌 수 있을까, 이런 생각 말이다. 서구와 달리 우리는 끈끈한 가족애, 가족에 대한 사랑이 있었고 나는 그것이 우리 사회를 건강하게 만들어갈 수 있는 힘이 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자부심을 가졌는데 그 동안 많이 변했더라.
  
  사회가 발전하면서 경제 성장이라는 한 가지 목표만 열중하다 보니까 정말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이제 우리 사회도 거시적인 것보다는 좀더 미시적인 접근을 해서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의 가치관을 어디에 둘 것인지를 같이 고민했으면 좋겠다.
  
  우리가 왜 노동운동을 하고, 정치를 민주화하려고 하고, 경제 성장을 이룩하려고 했나. 왜 우리가 그렇게 혁명을 목소리 높였나. 바로 내 삶을, 또 이웃들의 삶을 좀더 행복하게 만드는 게 아니었나?
  
  그게 개인의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사회 모든 구성원들이 가치관을 어디다 놓느냐에 따라 '새로운 희망'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노동자들부터 새로운 가치관을 정립할 때다. 우리가 무엇을 향해 달려갈 것인지를 점검한 다음에 다시 시작했으면 좋겠다.
  
  조주은 : 질문에 답하기가 막막했는데 전순옥 선생 말씀을 듣고 보니 감이 온다. (웃음) 우리 사회는 현재 엄청난 변화와 정체가 섞여 있는 것 같다. 강금실 법무부 장관이 인기를 얻는 것을 보면서 여자가 법무부 장관을 하고, 그가 이혼했다는 게 거의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을 보면서 사람들의 인식이 많이 변했다고 느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변하지 않는 뭔가가 있다.
  
  난 두 아이 엄마인데 큰 애가 '가정환경 조사서'를 갖고 왔다. 너무 놀랐다. 우리가 학교 다닐 때 그 양식 그대로더라. 여성, 소수자와 같은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지 않는 그런 모습이 여전히 우리를 짓누르고 있다. 좀더 힘 있는 사람들,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정체된 의식이 바로 사회의 정체를 낳는다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가 합리적인 의사소통이 안 되고 힘을 가진 사람 위주로 돌아가는 것도 그 때문이라는 생각이고.
  
  변화의 가능성과 과거의 정체가 혼돈돼 있는 이럴 때일수록 조금이라도 더 힘을 가진 사람들부터 우선 변할 필요가 있다. 당장 우리 사회 남성들부터 조금씩 변하기 위해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물론 그것을 이끌어내기 위한 여성들의 노력도 필요하겠지만 말이다.
  
  프레시안 : 오랜 시간 좋은 말씀 감사하다.
  
  (<한겨레> 홍세화 기획위원과 <한국일보> 고종석 논설위원이 '사회적 연대'를 주제로 두 번째 '대화'를 나눌 예정입니다.)
  
 
 

강양구ㆍ전홍기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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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말이 우리의 무기입니다 삶과 전설 1
부사령관 마르코스 지음, 주제 사라마구 서문, 후아나 폰세 데 레온 엮음, 윤길순 옮김 / 해냄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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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 사파티스타 운동. 이들이 계승하고자 하는 에밀리아노 사파타는 1911년 멕시코 혁명의 주역으로서, 원주민 자치권과 토지 개혁을 요구해 1917년에 헌법으로 제정시켰습니다. 100여년 가까이 지난 오늘날에 벌어지고 있는 사파티스타 운동은 곧, 헌법이 제대로 시행되고 있지 않음을, 원주민의 자치와 토지 개혁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음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 멕시코 뿐만 아니라, 16세기의 영국을 시작으로, 봉건사회의 질서가 무너지는 모든 곳에서 토지 개혁의 요구는 있었습니다. 지주-소작농 관계에서 자신이 직접 생산한 생산물의 대다수를 빼앗겨왔던 이들은, '새로운 생산관계'가 이러한 모순을 해결해주기를 바랬던 것이죠. 하지만,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생산관계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토지의 사유화가 이루어졌고, 소작농과 소농들은 자신이 일구어온 토지를 분배받기는 커녕 빼앗긴 채, 생존을 위해 도시로 흘러들어오게 됩니다. 1960년대 자본주의 한국이 그러했고, 오늘날 자본주의 중국이 그러하듯 말이죠. 땔감으로 쓸 나무 한 그루만 내 손으로 베어도, 가혹한 법적인 처벌을 받는 곳. 그곳이 바로 사파티스타 운동의 진원지인, 멕시코의 사파티스타주입니다.

- 멕시코에서는 그 진통이 길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오래도록 땅을 갈아 생계를 유지해왔던 원주민들은 1911년 멕시코 혁명 이래로 줄곧 토지 개혁을 요구해왔으나, 1992년 토지 개혁은 공식적으로 종료되고 토지 사유화가 결정됩니다. 종료된 토지 개혁과 강행되는 사유화 앞에서, 원주민 공동체들은 1993년 원주민혁명비밀위원회를 구성하고, 10년 가까이 무력 항쟁을 주장해 온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을 인정하게 됩니다.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 NAFTA 가 시행되던 1994년 1월 1일, 그렇게 사파티스타 운동은 시작됩니다.

- 기실 사파티스타 운동이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100여년 넘게 지속되어 온 '원주민의 자치, 토지 개혁'이라는 요구를 표현하는 하나의 방법에 불과합니다. 이들이 좀 더 적극적으로 행동했기 때문에 주목받았던 것 뿐입니다. 이들은 과거와 달리 인터넷을 이용해 전 세계로 자신들의 요구를 알렸고, 정치적 대안을 제시했습니다. 1994년 8월에는 6,000여명이 참석한 전국민주주의대표자회의를 개최했고, 1996년 4월에는 전 세계에서 참가하는 대륙간 엔쿠엔트로(encuentro)를 개최하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70년간 집권해오며 행정 입법 사법을 독점하고 토지 개혁을 끝내버린 제도혁명당(PRI) 대신, 민주적인 정부가 들어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시민단체와 원주민 공동체들까지 참여할 수 있는 전국민주주의대표자회의를 통해 민주적인 헌법을 제정하고 새 정부를 구성하자는 계획까지 제안했습니다.

- 하지만, 아무 것도 강요하지 않은 이들의 제안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1994년 2월 시작되었던 평화회담은 무위로 끝났고, 1년 후에 재개된 회담을 통해 '산 안드레스(san andres) 협정을 통해 일정한 합의에 이르렀지만, 법률로 제정되지 못하고 결국 협정이 폐기되기에 이릅니다. 2001년 무장을 해제한 사파티스타 원주민들과 20여만명의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 산 안드레스 협정의 이행을 촉구했지만, 협정에서 협의된 내용은 몹시 후퇴한 채로 입안되었습니다.

- 사파티스타 운동에 국한되지 않은, 토지 개혁 운동의 근본에는 '새로운 생산관계'가 있습니다. 봉건사회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대규모 자본(토지)의 축적과 이를 바탕으로 한 규모의 경제가 그것입니다. 새로운 생산관계의 문제는 '규모의 경제'라는 월등한 생산력에 있지 않습니다. 문제는 규모의 경제를 이루어내기 위한 '생산관계'에 있습니다. 대규모 자본(토지)의 축적이죠. 자본과 토지를 축적하는 방법에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새로운 생산관계는 합의되고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강요되었습니다. 토지의 실질적인 생산자였고 소유자여야 할 이들은 의사결정 과정에서도, 소유권에서도 완전히 배제되었습니다.

- 단지, 결정의 비민주성만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강제된 자본주의화의 혜택 역시도 올바르게 분배되지 않았습니다. 과정과 결과 모두에서 자행되고 있는 일방적인 약탈행위는, 오로지 축적된 자본(토지)을 독점하고자 하는 이들을 위해 이루어졌습니다. 이들은 더 많은 자본과 토지, 자원을 축적하기 위해 자본주의 세계화를 하는 것이지, 그들이 내세우는 것 처럼 세계적인 경제 분업과 효율적인 생산이라는 경제 공동체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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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매일경제)

BCWW 이틀째…"맞춤형 콘텐츠가 미디어 좌우"
 
방송과 통신으로 양분돼 있던 미디어 영역이 서로 통합되고 그 수단인 플랫폼이 점차 디지털화함에 따라 세계 유수 미디어 기업들의 생존 전략도 다양해지고 있다.

지난달 31일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국제 방송영상 콘퍼런스(BCWW) 이틀째 행사에서 한국 영국 멕시코 대만 홍콩 미디어기업 최고경영자(CEO)들은 '디지털 메가트렌드의 미래'라는 주제로 이른바 '슈퍼패널' 토론을 벌였다.

이 자리에서 CEO들은 각국 미디어산업 환경의 변화상을 소개하고 해당 기업의 미디어 전략을 설명했다.

그러나 그들이 공통으로 강조한 것은 △매체에 상관없이 콘텐츠가 경쟁력의 핵심이고 △모바일 미디어가 다른 미디어 수단과의 경쟁에서 승리하며 △미디어 환경 변화가 소비자들 행태도 변화시키고 있다는 점이었다.

우선 정연주 KBS 사장은 콘텐츠 중요성을 강조하며 "아이팟, 아이튠 등 콘텐츠 유통 혁명이 일어남에 따라 더욱 강조되고 있는 것은 결국 콘텐츠의 질적 가치"라고 역설했다.

수단보다 콘텐츠가 우선이라는 주장은 국외 미디어기업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알레한드로 벨라 두할트 멕시코 MVS텔레비전 이사는 "다국적 미디어기업이 늘어나 콘텐츠 전송 채널이 증가함으로써 소비자 선택권도 다양해졌다"며 "전송 수단의 변혁 못지않게 경쟁력 있는 콘텐츠를 확보하는 일이 매우 중요해졌다"고 강조했다.

특히 두할트 이사는 "전 세계 누리꾼들을 상대로 동영상을 공유하는 인터넷 사이트인 유튜브(youtube.com)처럼 멕시코에서도 온라인 비디오 클립을 제공하는 사이트가 크게 늘어나고 있다"며 "(콘텐츠)전송 틀이 어느 정도 안정됨에 따라 콘텐츠 경쟁이 더욱 치열해지고 있다"고 덧붙였다.

영국의 세계적인 공영 방송사 BBC는 소비자들의 개인화에 더욱 집중했다.

닉 반 츠바넨버그 BBC월드 지역이사는 "현재 수직적인 방송체계는 사라지고 1인 중심의 호환적(interactive), 주문형 서비스가 늘어나고 있다"며 "이는 기존 '브로드 캐스팅'과 달리 개인을 상대하는 P2P식 '내로(narrow) 캐스팅'으로 소비자들에게 더욱 직접적인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를 위해 BBC TV 프로그램을 맞춤형 라디오로 제공하는 아이플레이어(iPlayer) 서비스가 올해 말 영국에서 실시되고 내년 전 세계로 확대될 것이라고 츠바넨버그 이사는 밝혔다.

데이비드 창 대만 ETTV 대표는 2003년 단행된 자사 뉴스 부서의 디지털화를 중점적으로 소개하며 "이젠 'TV Anywhere'라는 개념이 등장할 정도로 디지털 미디어가 자리잡았다"며 "이로써 미디어기업은 기존 광고 수익에만 의존하던 것과 달리 유료 채널, 주문형 비디오 등으로 수익원을 확대시키고 있다"고 설명했다.

소비자 행태 변화도 지적됐다.

그레그 문 소프트뱅크코리아 대표는 "디지털 기술이 미디어에 미치는 가장 큰 영향은 단순한 단말기 변화나 방통 융합이 아니라 기존 소비자를 활발한 '프로슈머'로 바꾼 데 있다"며 "이로써 콘텐츠 서비스 플랫폼은 모바일ㆍIP TV로 급격히 진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때 모바일TV와 아날로그TV가 서로 단점을 메워줄 수 있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제이슨 옙 홍콩 스타TV 그룹 부사장은 "모바일TV가 많은 장점을 갖고 있긴 하지만 스크린 크기가 작다는 단점이 있는데 이는 기존 TV와 인터넷으로 보완될 수 있다"며 "결국 미디어기업은 각 매체의 내재적 가치를 극대화할 수 있는 전략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서진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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