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한겨레)

며칠 전 한 출판인이 찾아와 올해 정기국회에서는 어떻게든 도서정가제가 통과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른바 한 권을 사면 한 권을 더 얹어주는 ‘1+1’을 주도해 베스트셀러를 여러 차례 만든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이대로 가다가는 출판계가 공멸한다는 논리를 폈다.

자, 그의 논리를 들어보자. 매출이 집중되는 온라인서점 서너 곳의 구매담당자들은 갈수록 능력이 커진다. 한마디로 책을 좀더 싸게 구매하는 논리를 개발한다. 원래 도매상에서는 정가의 60%에 책을 공급받고 3-4개월짜리 어음을 줬다. 그런데 갑자기 등장한 온라인서점은 같은 가격에 현금을 주었다. 그래서 출판사들은 얼씨구나 하고 쫓아갔다.

온라인서점들은 한꺼번에 1000부를 주문하면서 55% 공급을 요구했지만 판매력이 커진 지금은 5000천부 주문에 50%를 요구한다. 도매상에서도 자주 있던 일이라 출판사도 쉽게 따라갔다. 그런데 어느 날 쿠폰이라는 것이 생겼다. 지금 웬만한 베스트셀러에는 대부분 쿠폰이 붙어 있다. 처음에 500원으로 시작했지만 지금은 1000원 정도가 상식이다. 1만원 정가인 책에 1000원의 쿠폰이 붙으면 다시 10%가 내려간다. 따라서 출판사는 40%에 공급하는 셈이다. 이래놓고도 불안하다. 서점의 무료 배송하는 비용마저 떠안고 1만원짜리 책에 5천원 쿠폰까지 붙이는 지경이다. 심하게는 할인에다 마일리지까지 감안하면 독자는 10%도 안 되는 금액에 책을 살 수도 있다. 그러니 이벤트나 광고를 해야 하고 1+1처럼 보다 자극적인 수단도 동원해야 한다.

이래저래 모든 것을 감안하면 통상 정가의 35% 이하에 책을 공급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 금액은 통상 제작비와 맞아 떨어진다. 물론 20만 부 정도를 팔면 제작비가 어느 정도 절약되기는 한다. 그러나 인건비나 경상비는 그대로다. 그래서 전에는 20만 부 정도 팔면 이익이 짭짤했지만 지금은 종이 값과 제작비를 지불하고 나면 남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그렇다고 ‘이 짓’을 하지 않을 수도 없다. 이렇게라도 해서 베스트셀러에 올려야 그나마 책이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흔적이라도 남는다. 그나마 ‘이 짓’을 계속 할 수 있는 출판사는 주로 ‘팔리는 책’만을 추구하는 대형 출판사들이다. 홈쇼핑 또한 매출만 증가하지 이익은 없기에 소수의 출판사가 독점한다. 어쨌든 그들은 자본력이 있으니 어떻게든 ‘이 험난한 시국’을 견뎌내겠지만 이른바 중소형 출판사는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들다.

여기까지가 그가 말한 논리다. 온라인서점의 등장을 처음에 두 손 들고 반긴 것은 주로 인문사회과학 출판인이었다. ‘이익’보다는 ‘뜻’에 집중하는 그들은 기존 유통시스템에서는 ‘찬밥’ 대우를 받았지만 온라인서점들이 현금거래 같은 미끼를 들고 나온 데다 초기화면에 자주 띄워주면서 한때 ‘호경기’를 만났기 때문이다. 그들은 온라인서점 칭찬에 침 마를 날이 없었다. 그런 그들이 지금은 도서정가제에 목숨을 건다.

그때 나는 ‘자본’에게 도덕이나 양심을 기대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말했다. 그들을 움직이는 유일한 축은 ‘이익’일 뿐이라고, 머지않아 그 원리를 깨닫게 될 것이라고 말이다. 지금 이 땅의 출판인들은 그 지엄한 ‘철칙’에 몸을 떨고 있다. 자, 그러면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 그 답은 여러분의 가슴속에 이미 똬리를 틀고 있을 것이다.

한기호/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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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조건
안재성 지음 / 한길사 / 1991년 2월
평점 :
품절


- 한동안의 외도를 마감하고, 다시 계획을 세워 책을 읽으려고 합니다. 외도의 이유는 지금의 진창에서 벗어나는 것이었지만, 외도를 마감하는 이유 역시도 같습니다.
일제 치하에서 사회주의자들의 활약상을 그렸던 <경성트로이카>의 작가이자, 서문에서 자신의 과거 활동을 회의하는 것으로 인상에 남았던 안재성씨의 소설 <사랑의 조건>을 끝으로 외도를 마치려고 합니다.

- <사랑의 조건>은 80년대 한국을 시대적 배경으로 합니다. 흔하지 않은 소재이며, 그래서 ‘노동소설’이라 따로 묶여있는 운동권들의 이야기이자, 동시에 가장 흔한 소재인 사랑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80년대 운동가 개인의 역사가 시작되는 1980년 5월 광주 민중항쟁을 비롯해서 김대중내란음모사건, 82년 미 문화원 방화사건, 강제징집과 녹화사업, 83~84년 학생 출신 운동가들의 대규모 공장 이전, 85년 구로 동맹파업, 87년 6월 항쟁과 노동자 대투쟁, 87년 대통령 선거와 89년 천안문 사태와 소련(소비에트연합)의 해체, 91년 현대중공업 골리앗 투쟁까지 굵직한 역사적 사건들을 배경으로, 그 속에서 살아가고자 투쟁하고자 했던 운동가들의 고민과 갈등을 옅볼 수 있습니다.
또한, ’사랑’이라는, 더구나 하나의 사랑 풍경이 아니라 일반적인 사랑의 조건이라는 쉽지 않은 이야기들이, 어두운 시대와 무거운 정치적 사건들 사이에 기묘하게 자리매김하고 있는 것이죠.
주인공인 ‘나’와 김진숙이라는 여성의 인연은, 주인공이 80년 5월 광주의 소식에 분개하여 서울 복판에서의 시위를 계획하고 준비하는, 소설의 시작에서 함께 시작합니다. 다만, 독서후기의 편리를 위해, 분리해서 적어나가도록 하겠습니다.

- 가발제조업체였던 YH무역의 여성노동자들이 회사의 일방적인 폐업에 대항해 야당이었던 신민당 당사를 점거하고 투쟁을 시작합니다. 그리고, 정부가 야당 당사에 경찰병력을 투입하면서 무차별적으로 폭력을 행사하게 됩니다. 이 사건으로 김경숙 노조 위원장이 사망하고, 김영삼 당시 신민당 총재가 의원직에서 제명되게 되죠.
이 사건은 단지 특정 노조의 생존권 투쟁을 넘어서, 한 노동자의 죽음과 정치적 싸움으로까지 번져나갔습니다. 동시에 박정희 정부 말기의 사회상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구요.

- 이런 사회상은 그 해를 넘기지 못했습니다. 10.26 이라는 정치 테러가 발생하고, 전두환을 필두로 한 새로운 군부집단이 10.26 사건을 조사한다는 명목으로 정치권에 진출하게 됩니다. 그리고, 군정의 연장을 원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권력의 일시적 공백기를 겨냥해 숨죽였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잠시. 권력의 실세로 떠오른 군부집단은 비상계엄령의 전국 확대, 국회 해산, 대학 휴교령, 등으로 다시금 야당 정치인을 비롯해 대학생들과 국민들의 열망을 통제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80년 5월 광주민중항쟁의 배경이 되는 것이죠.

- 70년대 말부터 권력의 공백기 동안 민주화를 주장하며 거리를 누볐던 이들은, 5.17 조치로 인해 높아진 현실의 폭력 앞에서 선택을 강요당하게 됩니다. 동시에, 끔찍한 폭력을 자행하며 정부를 장악한 군부정치의 연장은 기존 운동과 새로운 운동 사이의 갈등을 만들어냅니다. 그것을 편의적으로 분류하자면, 70년대 학번과 80년대 학번이라는 세대의 갈등으로, ‘민주화’와 ‘노동계급의 정치세력화’라는 정치 슬로건의 갈등으로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주인공인 ‘나’와 1980년에 포고령 위반으로 대학에서 제적당한 작가의 이력 또한 후자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 새로운 운동은 83~84년경 학생 출신 운동가들의 대규모 노동현장 이전으로 표현됩니다. 어떤 이가 “트럭으로 사람들을 실어오는 것 같았다.” 라고 표현할 정도로, 기존 운동 방식의 전환은 거대했습니다. 세계 역사에도 유례가 없는 일이라고 하니까요. (19세기 러시아의 나로드니즘 운동에서도 많은 학생 출신 운동가들이 농촌으로 이전했지만) 주인공인 ‘나’가 강제징집과 전역 이후에 노동현장을 막연히 동경하며 노동일을 시작하는 것이 여기에 있습니다.

- 하지만, 학생 출신 운동가들의 대규모 노동현장 이전이, 단순히 70년대 운동방식에 대한 회의나 이유없는 열풍일 수는 없습니다. 당시 한국으로 유입되기 시작했던 <무엇을 할 것인가> <레닌주의의 기초>와 같은 마르크스-레닌주의 사상이 배경이 되었던 것입니다. 난생 처음 해보는 노동일 속에서 그가 재회하고 학습을 받게되는 후배 박인주의 존재가 그것을 의미합니다. 운동가들의 노동현장 이전은 노동자들의 사회적 불만과 맞물리면서 85년 구로 동맹파업을 비롯한 파업투쟁과 서노련, 인노련, 인민노련, 등을 비롯한 노동자 조직의 탄생으로 이어집니다. (일제시대와 해방을 전후로 해서 많은 조선의 사회주의자들이 러시아 중국의 공산당과 교류를 했고, 소위 ‘본토’에서 직접 교육을 받은 이들도 여럿 있었습니다. 80년대 초중반의 이런 사회상은, 한국 사회주의 운동의 전통이 6.25 전쟁과 이후 몇차례의 정부를 거치며 거의 완전하게 단절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 노동현장으로 이전해 노동조합을 비롯해 학습소모임과 노동자 조직을 구성하기에 여념이 없었던 이들이 있었던 반면, 대학 내에서는 여전히 이제 막 유입되기 시작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바탕으로 한국 사회의 문제에 대한 연구와 논쟁이 본격화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내용과 활동방식이 비슷했던 70년대 학생운동의 유형을 변화시킵니다. 소위 ‘사회구성체 논쟁’을 통해서, 학생운동은 뚜렷한 내용의 차이와 그에 따른 활동방식의 차이를 가지는 각각의 세력으로 분화하게 됩니다. 분화는 여러 방식을 통해 이루어졌을 겁니다. 기존의 인적 전통을 통해 이루어지기도 했을 것이고, 인적 전통을 무시하면서 사상을 좇아 이루어지기도 했을 것이며, NL-CA 라는 큰 조직 구도 속에서 선택을 내리지 못하거나, 않고 있는 이들도 있었을 것이구요.

- 대학과 노동현장 모두에서 새로운 운동이 이루어지는 사이, 87년 6월 항쟁과 7~9월 노동자 대투쟁이 터져나오게 됩니다. 수많은 노동현장에서 어용 집행부가 교체되거나, 신규 노조가 결성되었습니다. 전국적으로 500여만명이 참여했던 6월 항쟁의 의미는 말할 것도 없겠지만, 7월부터 9월까지 계속되었던 노동자 대투쟁 역시 노동운동의 대중화를 의미했습니다. 그동안 학생 출신 운동가들과 소규모 학습 소모임에서 비롯된 운동이 비로소 그 주인에게로 자리매김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죠.

- 하지만, 노동자 대투쟁은 80년대 초반 노동현장으로 이전한 운동가들에게 다시 한번 갈등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노동자 대투쟁은 하나의 큰 물줄기였다기 보다는 수많은 작은 물줄기였고, 이제 겨우 5년 정도 되었을 뿐인 노동현장의 운동가들은 물줄기들을 하나로 모아내지 못했던 것이죠. 대중적인 투쟁의 위력을 제대로 발휘시키지 못한데 대한 고민이 다시 한번 사상논쟁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리고, 거대한 투쟁의 물결은 그 해 12월의 대통령 선거를 맞이하여 가라앉게 됩니다.

- 노동자 대투쟁을 거친 후, 88년에도 노동자 투쟁은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됩니다. ‘수많은 작은 물줄기를 어떻게 하나의 거대한 물줄기로 모아낼 것인가’ 하는 질문은 운동가들 내에서 뿐만 아니라 노동운동 내에서도 이루어졌고, 그 성과가 90년 출범하는 전노협이라는 노동조합 전국조직으로 모아지게 됩니다.

- 노동자 대투쟁을 겪은 운동가들의 갈등이 채 아물기도 전에, 또 한번의 갈등이 찾아오게 됩니다. 중국에서 천안문 사건이 일어나고, 소비에트 연합이 해체한 것이죠. 이제 막 형성되기 시작했으나 대중투쟁 속에서 자리매김하지 못했던 사회주의 운동세력들은, 계속되는 갈등과 혼란 속에서 뿔뿔이 흩어지게 됩니다. 막연했던 정치적 전망이 사라지면서 활동을 중단하는 이들도 많았고, 70년대 학번을 비롯한 일부는 제도권 정치로, 일부는 기존의 정치적 전망을 한없이 낮춘 채 대중운동 속으로 뛰어들었습니다. 물론, 주인공인 ‘나’와 같이 “달라진 것은 없다” 며 기존의 활동 – 전국적인 전위정당의 조직 - 에 매진하는 이들도 있었구요.

- 이렇게 각자의 길을 선택하며 89년의 소용돌이가 어느정도 가라앉을 무렵인 91년, 현대중공업노조의 파업투쟁이 있었습니다. 전투경찰, 해군함정, 헬기를 비롯해 육해공 도합 5만명의 군사병력이 동원되고, 노동자들이 화염병과 쇠파이프, 새총과 민주박격포로 무장해, 마치 전쟁터를 불사했던 현대중공업노조의 거대한 투쟁은, 80년대를 관통했던 노동운동의 상승을 마감하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알려져있습니다.

- 주인공 ‘나’의 역정은 현대중공업노조의 투쟁을 마지막으로 끝이 납니다. 그 해 91년에 쓰여진 <사랑의 조건>은 이렇듯, 70년대 민주화 투쟁 80년 광주민중항쟁을 딛고 일어서 80년대를 풍미했고, 87년 노동자 대투쟁과 89년 소비에트연방의 해체를 맞아 91년 현대중공업노조 투쟁에 쉼표를 찍는, 운동가들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어느새 15년이 훌쩍 지났습니다. 90년의 전노협은 민주노총으로 전화했고, 군인 출신 대통령의 시대는 물론이요 3김의 정치가 막을 내렸으며, 진보정당을 표방하는 정당이 탄생하여 버젓이 공개활동을 하는 등, 그간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주인공 ‘나’가 이루고자 했던 ‘전국적 전위정당’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소규모의 사회주의 조직들이 열심히 공개 비공개 활동을 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그 성과가 집약되고 있지는 못한 것이 현실입니다.

- 완전한 사회를 이루고자 했던 ‘나’, 완전한 사랑을 이루고자 했던 ‘나’는, 80년대 투쟁의 역사가 저물어가는 울산의 바다 앞에 서서 “사랑과 혁명은 영원히 완성될 수 없다. 미완의 시대 전부가 최고의 완결성을 가지는 것” 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변한 것은 완전한 사랑과 혁명에 대한 열망이 아니라, 그것에 이르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는 더 이상 김진숙을 아내로 소유하려 하지 않고, 패배한 투쟁 앞에서 좌절하지 않습니다. 아내 김진숙과 완전한 사랑을 이루기 위해서 먼저 인간 김진숙을 사랑해야 했듯이, 혁명의 주체 노동계급과 완전한 사회를 이루기 위해서는 먼저 착취받고 노동하며 살아내는 노동계급을 담담하게 사랑해야 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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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 2006-08-28 16: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현대중공업 노조도 이제 많이 변했죠. 투쟁않는다고 민노총에서 제명되고 거꾸로 비정규직에게 교묘히 떠넘기면서 과실을 회사와 공유하는 모델로 전환합니다. 오웰이 이야기한 것과 같이 노동자들은 평등하지 않습니다. 인간해방이라는 거대한 주제를 끌어안고 많은 사람들이 불을 살랐지만 어느새 그 열정이 식어가면서 보이는 현실은 점점 차가와집니다.

sb 2006-08-29 0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엊그제는 12년 무쟁의라고, 한 전의경의 부모에게 감사편지를 받기도 했더군요. 정규직 노동자들은 쟁의 없이도 생존과 권리 보호가 이루어지는 모양입니다만, 이면에는 하청노동자들의 피와 땀이 배어있습니다. 민주노총에서 제명된 것은, 하청노동자 박일수씨가 분신했을 때, 현중노조 대의원들이 장례식장까지 난입해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가로막았던데에 있습니다.
저는 열정은 두번째라고 생각합니다. 열정에 앞서, 바로 이 시대가 노동자들을 싸우지 않을 수 없도록, 이기는 싸움을 위해서 단결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테니까요.
 

(출처: 한겨레21)

‘민들레’는 시들지 않는다
장기수들의 누이동생으로 ‘컴백’했던 박영란, 다시 투쟁조끼를 입었다

광주 ‘통일의 집’에 살았던 비전향 장기수 김동기 선생을 나는 한번도 직접 뵌 적이 없었다. 북한에서 의사 일을 한다는 나의 고모가 김동기 선생의 사촌동생과 의과대학 동창일 거라거나, 이제 곧 북한으로 가게 되면 그 고모를 한번 찾아보겠노라거나 하는 모든 얘기들을 나는 김동기 선생과 직접 나눈 적이 한번도 없다. 짬날 때마다 장기수 어른들을 찾아 뵙던 광주의 한 후배가 그런 얘기들을 중간에서 몇번 전해 주었을 뿐이다. 비전향 장기수들이 북으로 떠난 지난해 겨울, 파업을 벌이고 있는 ‘동광주병원’의 노동자들을 만나러 내려갔다가 짬을 내 잠깐 만났을 때 후배는 책 한권을 내밀면서 말했다. “하 선배가 언제든 광주에 내려오면 주라고…. 김동기 선생님이 남기고 가셨어요.”

88년 겨울, 운동권을 떠난 뒤…

<새는 앉는 곳마다 깃을 남긴다>. 33년간의 감옥생활과 1년여의 짧은 사회생활에서 느낀 점들을 기록한 김동기 선생의 책이었다. 책 속표지에 선생이 쓴 친필이 눈에 들어왔다. 석줄밖에 안 되지만 “2000.8.2. 김동기 드림”까지 읽는 동안 나는 목이 메었다. 그렇게, 나로 하여금 한번도 뵌 적이 없었던 사람에게 평생 빚을 지게 만든 후배가 바로 ‘우리들의 광주 언니 민들레’ 박영란(37)이다.

80년 5월, 여고 1학년 학생으로 광주민중항쟁을 지켜봤던 박영란은 이십대 6년가량을 운동권으로 살았다. 전남대 법대의 여학생 후배들에게 그의 이름은 ‘살아 있는 전설’이었다. ‘5·18기념재단’에 근무하는 후배 강정미에 따르면 “법대의 80년대 운동권 출신 중 노동현장까지 간 유일한 여학생”이었다. 그랬던 그가 자신의 표현대로 “88년 겨울, 패잔병이 되어 운동권을 떠났다”. 우여곡절 끝에 지방일간지의 기자라는 소시민으로 변신한 이후에도 그 ‘젊은 날’을 후회해본 적은 없었지만 자신의 발로 운동권 사람을 찾아가지는 않았다. “당신들이 나를 필요로 한다면 돕겠다”는 최소한의 다짐이 그를 지탱하는 버팀목이었다. 자칭 ‘얼치기 열정주의자’였던 그가 그뒤 한동안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았던 이유는, 사상투쟁 와중에서 종파주의자로 비판당하며 운동권을 떠났을 때 그의 ‘사회적 생명’은 이미 심대하게 훼손당했다고 생각했으며, 그뒤부터는 무슨무슨 근본주의자들처럼 글 한줄 쓰려고 해도 그 ‘원죄’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네 꼴에 뭘 하겠다고 나서는 거냐? 그냥 얌전히 있어라”는 자각이 항상 그의 머리 뒤꼭지를 잡아끌었다.

그러나 우리의 역사는 자각하는 인간을 그렇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후배로부터 “선배를 지금까지 종파주의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그 시절에 잘못 저지르지 않은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고 해라. 선배가 사람들을 안 만나고 살아서 아직도 그런 생각을 하는 거다”라는 말을 듣기도 하고, 그보다 훨씬 더 험한 ‘린치’를 당했음에도 십 몇년째 의연하게 한길을 가고 있는 친구를 보면서 “박영란! 네가 만든 감옥에 널 가두고 응석부리고 있었구나. 자학하고 있었구나”라고 깨달으면서, 그는 과거의 상처로부터 벗어나 7년 만의 은둔을 박차고 우리의 세상으로 뚜벅뚜벅 걸어나왔다.

앰네스티가 선정한 ‘세계 최연소 장기수’ 강용주의 후원사업에 힘을 보태면서 그는 우리 앞에 다시 나타났다. “이것저것 따지면 또 못하게 될 테니까 단순무식하게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하자”고 소박하게 마음먹고 시작한 일이었고 “고작 내가 한 일이라곤 면회 두어번 가고, 그가 부탁한 책 몇권 보내주고, 한달에 두어번 편지 보내고, 강용주의 답장을 타이핑해 다른 사람들에게 알린 것밖에 없다”고 겸손하게 말하지만 그의 그런 활동이 나를 비롯한 세상의 많은 사람들에게 ‘순결한 영혼을 간직한 투사’ 강용주의 존재를 알렸던 것이다.

장기수 어른들과 피붙이처럼

1999년 2월, 비전향 장기수 김동기(69), 리공순(67), 리경찬(66), 이재룡(57)씨들을 만난 뒤부터 그는 틈나는 대로 광주 ‘통일의 집’으로 그 어른들을 찾아뵈었다. 20, 30대 새파란 나이에 구속돼 30, 40년씩 징역을 살고 대부분 환갑을 넘긴 나이에 병든 몸으로 석방된 사람들이었다. 분단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 비극의 대가를 가장 혹독하게 치른 사람들이었다. 2000년 9월2일 북으로 돌아가기까지 1년6개월 동안, 그와 몇 사람이 ‘우리 시대의 살아 있는 상처’들을 가까이에서 지켰다. 한달에 한번씩 장기수 어른들을 모시고 가까운 곳으로 조촐한 여행을 다녀왔다. 그 ‘통일나들이’는 단 한번도 거르지 않고 계속되었고 사람들은 어느새 그 모임을 박영란의 애칭을 본떠 ‘민들레 모임’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 몇 사람의 따뜻한 마음이 장기수 어른들로 하여금 “이 사회의 실정법을 위반한 우리에게 여러분들이 나누어준 정을 죽더라도 잊지 않겠습니다. 북으로 돌아가면 내 자식들과 가족들에게도 꼭 얘기하겠습니다. 70평생 이렇게 울어본 적이 없는데 자꾸 눈물이 납니다”라고 뺨을 떨며 울게 했던 것이다.

장기수 어른들이 북으로 떠나던 날, 민들레 모임의 회원들은 임진각으로 달려가 공동경비구역의 바리케이드를 뚫고 그들을 배웅했다. 그들은 또다시 그렇게 ‘이산가족’이 된 것이다. ‘민들레 모임’의 회원으로 여주에서 농사를 지으며 결코 넉넉한 살림이 아니면서도 ‘통일의 집’에 매달 쌀 한 가마씩을 보내곤 했던 임은주·남창현 부부는 지금 그 쌀을 민들레 모임 회원들에게 나누어주며 허전함을 달래고 있다.

지난해 겨울 ‘양심수를 위한 시와 노래의 밤’ 행사장 귀퉁이의 어두운 계단 한쪽에 봉투를 깔고 앉아, 박영란은 마음속에서 불어대는 시작도 끝도 알 수 없는 바람 때문에 줄줄 울었다. 햇살 쏟아지는 창가에 앉아 1년도 더 지난 그 얘기들을 하면서 그는 끝내 눈물지었다. 장기수 어른들의 30년 세월과 그뒤 1년6개월간 겪었던 감동의 순간들을 자신의 한두 시간 얘기로는 차마 포장조차 할 수 없다고 했다.

박영란에게 부끄럽지 않게 살기! 
 


사진/ 광주매일신문사 안 자신이 쓴 대자보 앞에서.

그는 요즘 ‘한국전쟁전후민간인학살진상규명및명예회복을위한범국민위원회’와 관련을 맺고 양민학살사건 조사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광주인권운동센타’의 ‘진실과조사’팀의 구성원으로서 담양과 장성이 그의 담당지역이다.

“문헌자료 조사를 한 다음 현장에 나가는데 가는 곳마다 시체가 수십구씩 나와요. 그것도 50여 가구쯤 살았던 작은 마을에서…. 영문도 모른 채 부모를 여읜 자식들은 반 비렁뱅이가 되어 제 힘으로 자랐고…. 어느덧 어른이 돼서 아이를 낳았고… 그 아이들이 다시 아이를 낳을 만큼의 세월이 지났는데…. 놀라운 건 그들이 그 억울함을 평생을 참고 살 수 있었다는 사실이에요. 당했으면서도 참고 살 수밖에 없었던 부모세대의 고통을 필설로 다 헤아릴 순 없을 거예요. 피해자들은 평생 입 다물고 어둠 속에 숨어 울며 살았는데, 가해자들은 여전히 떵떵거리고 잘살고 있는 거예요. 내가 살았던 이 더러운 세상을, 내 자식세대에게 물려주지 않기 위해서라도 신발끈을 야물게 고쳐 매야겠다…. 이런 생각이 들어요.”

인터뷰를 위해 그가 일하는 ‘광주매일신문사’를 찾아갔을 때, 신문사의 노동조합은 25일째 파업중이었고 회사는 폐업을 운운하고 있었다. 그는 또다시 투쟁조끼를 걸친 전사로 우리 앞에 선 것이다. 그가 지금 가장 바라는 것은 “다시 일하고 싶은 것”이라고 했다. 노동조합의 정당한 싸움을 마무리하고 하루빨리 현장에 돌아가 정론직필의 본분을 다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장소를 옮기기 위하여 주차장으로 나서는데, 그가 내 차의 트렁크를 좀 열어달라고 했다. 자신의 카메라 장비를 내 차에 실으려는가보다 하고 무심코 열어주었는데, 웬 사내가 낑낑대며 메고 온 쌀 한 포대를 내 차에 턱 하니 싣는 것이 아닌가. 바로 임은주·남창현 부부가 보낸 ‘여주쌀’이었다. 서울까지 돌아오는 동안 내내 그 쌀의 무게가 나를 짓눌렀다. 민들레 박영란에게 부끄럽지 않게 살기! 나는 내 인생의 목표를 새로 정했다.

글·사진/ 하종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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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겨레21)

춤으로 편견을 타격하는 <몸> 편집장 박성혜 “걷는 것도 춤이다” 
 


사진/ "춤에 관한 고정관념을 깬다." 월간 <몸> 사무실이 있는 창무예술원 연습실에서.

에라, 처음부터 그냥 솔직하게 나가자. 무용인 박성혜(37)씨는 ‘난지도’ 출신이다. 그걸 굳이 숨기지 않는다. 대학에서 무용을 전공했고 대학원도 마쳤고 유학도 다녀왔으며 지금은 무용계의 거목 김매자 선생이 발행하는 춤 전문 잡지 <몸>의 편집장이면서 틈틈이 아이들에게 발레를 가르치고 있으니, 누가 봐도 박성혜씨는 ‘무용인’이다. 그런데 ‘무용’과 ‘난지도’는 언뜻 연결되지 않는 단어다. 그렇게 어울리지 않는 단어들이 충돌하면서 ‘양에서 질로 전화하는’ 변증법적 탄생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있는데 박성혜씨가 바로 그 드문 예다. 난지도에서 살았던 7살부터 14살까지의 세월은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많은 것들을 배운 시기였다.

가장 많은 것들을 배웠던 쓰레기산

“어느날 부반장인 내 짝이 학교에 나오지 않았어요. 집에 가면서 보니까 쓰레기 더미에서 아버지와 같이 병을 줍고 있는 거예요. 생각해보세요. 쓰레기를 뒤지고 있는 그 아이는 똑같은 사람이에요. 그런데 부반장일 때는 내 친구이고, 쓰레기 더미에서 병을 골라내고 있을 때는 친구가 아니고…. 이건 말이 안 되는 거다. 어린 나이에도 그런 ‘편견’에 대한 고민을 했어요. 춤을 보거나 세상을 볼 때도 마찬가지인 거예요.”

춤에 관한 한 철저히 문외한인 나는 춤이 ‘귀족적 취미’라거나 ‘정신적 사치’라는 무식한 ‘편견’을 갖고 있는데 “그게 보통 사람들의 상식이 아니냐?”며 심기를 건드리자 박성혜씨는 참 딱하다는 표정으로 말한다.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사치품일 수도 있고 아닐 수 있어요. 정장을 입고 비싼 공연료를 내고 공연장에서 보는 춤이나, 관광버스에서 아줌마들이 추는 춤이나, 다 같은 ‘춤’인 거예요. 차이가 있다면 하나는 보기만 하지만 다른 하나는 같이 춘다는 거지요. 춤은 관찰의 대상이라는 생각으로부터 벗어나면 돼요.”

옆에 있던 김남수(33)씨가 거든다. “지금은 아니지만, 미래에는 우리가 그런 춤에 관한 일도 하게 될 겁니다.” 김남수씨는 박성혜씨의 영향을 받아 무용 비평에 막 입문한 후배다. 튀는 감각과 넓은 소양으로 많은 사람들을 열등감에 빠지게 하는,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우리 사회 대표적 ‘네티즌’이다. 박성혜씨는 “내가 김남수의 도움을 많이 받고 있다”라고 강조한다.

“어느날 나이트클럽에 갔다가 내 몸이 굳어 있다는 걸 발견했어요. 몸이 굳어서 도저히 춤을 출 수 없었어요. 그런데 평범해 보이던 친구가 춤을 추니까 살아오르는 게 보이는 거예요. 매력이 뿜어져나오는 거예요. 춤이 ‘인간’을 담기에 전혀 결함이 없는 매체라는 걸 느꼈지요.” 김남수의 설명에도 나는 계속 무식하게 나아갔다. “진리를 알려거든 우선 부인하라”고 하지 않던가…. “그게 가능해? 춤에 ‘인간’을 담는 게 가능해?” 두 사람은 이제 난리가 났다. 김남수가 마치 유치원생을 앞에 앉혀놓은 듯 설명하기 시작했다. “춤도 영화나 연극과 마찬가지예요. 물론 가짜와 진짜가 있어요. ‘문장을 위한 문장’이 몰가치하듯 ‘춤을 위한 춤’은 진짜가 아니에요. 예를 들어, 아무것도 안 하면서 빈 공간을 가리키며 ‘이게 마임의 정체다’ 하면 이건 사기예요. 그렇지만 무언가를 하면서 아무것도 없는 구석을 보여주는 것은 가능해요. 그런 아름다움을 구별하는 눈은 누구나 가질 수 있어요.”

푸줏간의 고기와 춤의 관계

내가 “너무 심오하다. 나한테는 너무 어려워”라고 계속 엇나가자 이번에는 박성혜가 나섰다. “지금까지 한번도 춤을 춰보지 않았고 평소 ‘춤은 내 인생과 전혀 관계없다’고 생각하며 살았지요? 걷는 것도 다 춤이라고요. 두려워할 거 없어요.”

맞다. 나는 춤을 두려워하고 있는 거다. 박성혜는 그걸 간파했다. “죽기 전에 내가 그런 경험해볼 수 있을까?”라고 내가 한발 물러서자 “나에게 세 시간만 주면, 지금 당장 경험하게 해줄 수도 있다”고 못을 박는다.

이제 단도직입(單刀直入)으로 물어보자. “잡지를 통해서 구현하려고 하는 것은?”

“춤은 고상하고 특별하며 소수의 것이다…. 그렇게 되면 살아남지 못해요. 나이트클럽의 막춤은 이해하면서 공연장의 춤은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하는데, 같은 시각으로 봐도 괜찮은 거예요. 그렇게 볼 수 있도록 길을 안내하는 지팡이와 같은 역할을 하고 싶은 거지요.”

그런데 그 일이 결코 쉬워 보이지 않는다. 그가 만드는 잡지 <몸>이 파격적 표지사진으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린 적이 있었다. 돼지 머리, 남성 성기, 돼지 똥구멍, 푸줏간의 고기, 여성 음모 노출…. 이건 흡사 엽기 시리즈다. 내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이냐?”고 물으니 “몸이니까요. 그게 다 ‘몸’이잖아요”라고 간단히 답하는데, 나처럼 생각이 짧은 사람은 설명을 들어야 고개가 끄덕여진다.

“반응은 당연히 안 좋았어요. 난리가 났지요. ‘끔찍하다.’ ‘미쳤다.’‘말도 안 된다.’ ‘푸줏간의 고기와 춤이 무슨 관계가 있냐.’ 그런데 저는 그런 의문을 제기하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보는 거예요. 관계가 있는지 없는지 고민하는 것부터 시작하는 거지요. 춤사위 하나를 바꾸는 데도 20년 걸려요. ‘요렇게 추는 것만이 춤이다’라는 고정관념이 박히면 못 바꿔요. 저는 그것을 바꾸는 사람들을 옹호하고 싶은 거예요.”

그 일에 호흡을 함께 맞추는 사람이 김남수다. 박성혜가 김남수에게 바라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다른 분야의 전문가들이 무용을 새롭게 많이 봐야 해요. 그런 사람들이 무용계에 많이 들어와서 공연도 자주 보고 춤에 대한 인식도 바꾸면서 나름대로 생산물들을 토해내면 뭔가 되지 않을까요?”

이제 조심스럽게 밝혀야만 될 이야기가 있다. 박성혜는 ‘운동권’ 출신이다. 이야기하지 말라고 했으나 딱 한 가지만 쓰겠다. 청계천에서 ‘시다’로 일한 적이 있다. 그뒤 발레를 가르치는 아르바이트를 일주일에 두번 한 적이 있는데, 그렇게 해서 번 수입이 ‘시다’로 한달 동안 뼈 빠지게 일해 번 돈과 같더라는 것이다. 추운 겨울에 온기라고는 다리미 하나밖에 없는 곳에서, 발에 동상이 걸려 신발을 찌그려 신고 한달 동안 죽어라 일해서 번 돈이 일주일에 단 두번 일해서 번 돈과 같더라는 것이다.

화가 나는 날엔 구로공단으로 간다

“회의가 당연히 오지요. ‘이런 고급예술 뭐하러 하고 있나’ 그런 고민하게 되지요.”

박성혜는 오늘도 그 고민에 대한 해답을 구하기 위해 ‘고해’(苦海)의 바다를 간다. 그래서 비싼 음식점에서 귀한 마님과 동화 속 꿈같은 얘기를 한 날은, 잔뜩 화가 나서 돌아오는 길에 구로공단을 한 바퀴 돌기도 한다. 자신과 세상에 대해 적색경보등을 켜는 것이다.

인터뷰를 끝내는 의례적인 질문을 던졌다. “자신의 미래가 어떠했으면 좋겠어요?”

“별로 생각 안 해봤어요. 난 ‘뭐가 되고 싶다’거나 은행잔고 같은 것에 별로 관심없어요. 결혼도 마찬가지예요.” 이게 바로 우문현답(愚問賢答)이다. 물어본 사람이 오히려 부끄럽고 미안하다. 이번에는 박성혜가 지나가는 말처럼 내게 물었다. “지난번 <스파르타쿠스> 공연에 내가 사람들 초대했을 때 왜 안 왔었어요? 제일 먼저 달려올 줄 알았는데….”

그런 공연에 내가 제일 먼저 달려올 거라고 생각해주는 박성혜의 공감대가 고맙다. 고백하건대, 무용을 전공한 사람에게도 그런 공감대가 있다는 것을 신기하게 생각했던 나의 편견을 반성한다. 우리 모두 그런 편견을 버리자. 그게 안 되는 사람은 박성혜씨를 찾아가 3시간만 투자하면 된다.

글 하종강
사진 이정용 기자 lee31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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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매일경제)

부천은 지금 온통 만화로 덮였다
 
지난 17일 개막한 제9회 부천국제만화축제(BICOF)가 20일까지 경기도 부천 복사골 문화센터에서 계속된다.
'상상에너지'란 슬로건으로 부천만화정보센터가 주최하고 문화관광부 경기도 부천시 등이 후원하는 이번 축제는 다양한 주제의 만화출판 기획전시와 시민들이 참여해 즐길 수 있는 각종 체험ㆍ부대행사 등으로 꾸며진다.

주요 행사로 국내외 만화출판 경향을 살펴볼 수 있는 '국제코믹북페어'는 도서 전시와 함께 30% 할인 판매하는 '국내출판관'과 미국 프랑스 아르헨티나 등 세계 13개국 32개 출판사가 참가하는 '해외출판관', 외국에 한국만화 콘텐츠의 우수성을 알리고 외국 진출 가능성을 모색하는 '수출만화도서전' 등으로 구성돼 있다.

만화작가와 만화출판사, 만화 관련 다양한 업체 등을 연계해 비즈니스가 이뤄지도록 기획된 '출판만화견본시장' 행사엔 만화작가 55명과 15개 만화출판 업체가 참가해 열띤 비즈니스를 펼치고 있다.

또 전시 행사로 지난해 부천 만화대상을 수상하고 영화로도 만들어진 미스터리 공포만화 '아파트' 배경을 만들어 놓은 '강풀 특별전', 신비롭고 환상적인 그림책 세계를 보여주는 '세계만화그림책전', 만화 속 공주 캐릭터를 사람처럼 움직이게 만든 구체관절인형을 보여주는 '만화 속 공주인형전' 등이 관객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한국을 대표하는 만화 작가들이 참여하는 '핸드프린팅전'도 있다.

아울러 가족사진 촬영하기, 캐리커처 그리기, 나만의 셔츠 만들기, 내가 만드는 그림책, 만화 등을 싸게 파는 프리마켓, 보물찾기 등 다양한 참여행사가 준비돼 시민들을 즐거운 '만화세상'으로 초대한다.

복사골 문화센터측은 만화문화 발전과 저변 확대를 위해 모든 행사에 입장료를 받지 않고 있다.

[서진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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