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한겨레)
전진식 기자 1970년대 노동집약형 수출산업의 한 축이었으며, 1990년대 들어 동대문 의류상가의 번영과 함께 ‘르네상스’를 맞았던 대표적인 가내 봉제공장 밀집지역인 창신동과 숭인동이 기로에 서 있다. 디자인에서 원단구입·제조·판매가 원스톱으로 이뤄지고, 기동력 있는 다품종 소량생산 체제로 씽씽 미싱을 돌려대던 ‘좋았던 시절’은 점점 세계화의 뒤안으로 밀려나고 있다. 값싼 중국 의류들이 밀려들면서 하나 둘 씩 ‘공장의 불빛’이 꺼져가는 ‘창신동’의 오늘과 내일을 3차례에 나눠 싣는다.
세계화·개발 기로에 서다
경상도 산골에서 스무살에 혼자 서울로 올라와 창신동에서 20여년째 미싱을 밟고 있는 노정섭(45)씨는 6년전부터 ‘객공’으로 일하고 있다. ‘객공’이란 고용 기간을 계약하지 않고 일감이 있으면 일하고 일감이 떨어지면 자동 해고되는 비정규직의 극단적 형태다.
그는 대뜸 입고 있는 바지를 흔들어 보였다. “이게 7천원이야. 한국산이라고 쓰여 있지만 딱 보면 알아. 중국산이지. 싼 물건에 당할 수가 있나. 길거리에서 파는 거 90%가 원단에서 바느질까지 모두 중국산이야. 일요일 오전에 평화시장 가 봤나? 거기 파는 옷들 바지고 웃도리고 3천원짜리가 수두룩해. 그런 가격을 어떻게 한국에서 만들어?”
창신동 사람들 중엔 최근 객공으로 신분이 떨어진 사람이 늘어났다. 주문이 없을 때 월급제 직원을 두면 고스란히 사업자의 빚으로 남기 때문에 정규 직원이 아닌 객공을 채용하게 된 것이다. 객공의 수입은 불안하기 짝이 없다. 성수기인 3~5월, 9~11월엔 하루종일 일해 월 200만~300만원씩 벌지만 비성수기때는 말 그대로 ‘0원’이 된다. 노씨는 “비성수기때에는 성수기에 필요한 옷을 미리 당겨 만들어놓기도 했는데 4~5년 전부터는 그렇지 않다”며 “예전의 성수기가 비성수기가 됐고, 예전의 비성수기엔 아예 일이 없다”고 말했다.
일해도 수입은 갈수록 줄어든다. 납품가격이 구제금융기 이후로 동결됐기 때문이다. 남편과 함께 봉제 하청을 받아 일하는 지아무개(54)씨는 “디자인에 따라 다르지만 티셔츠는 1벌에 500~600원, 블라우스는 2천~2500원, 바지는 1500~2천원을 받고 바느질을 한다”고 말했다. 이는 90년대 말과 같은 단가다. 지씨는 “하루 종일 3사람이 매달려 500원짜리 티셔츠 100장을 만들면 오히려 밑지는 장사”라고 말했다.
<한겨레>가 지난달 3~7일 창신동 봉제공장 노동자 14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벌인 결과 한달 임금이 평균 134만원으로 조사됐다. 2006년 2/4분기 도시근로자 가구주 평균소득 225만8천원의 59%에 불과했다. 99년 서울시정개발연구원이 창신동 공장 129곳을 조사한 것과 비교하면, 봉제공장의 평균 매출액은 7년 전보다 40%나 줄어들었다. 99년엔 한달 매출이 2176만1천원이었으나 올해엔 1306만6천원이었다.
수입이 줄어들자 미래에 대한 불안도 심해지고 있다. ‘이곳이 앞으로 쇠퇴할 것으로 보느냐’란 질문에 99년엔 4.7%만이 ‘그렇다’고 답했으나 올해엔 78.6%로 늘었다. 고령화 현상도 뚜렷해 7년 전에는 30대(40.3%)가 가장 많았지만 지금은 40대(42.1%)와 50대(29.3%)가 절반을 넘는다. 인구도 해마다 평균 700여명 씩 줄어 7년 사이 15% 이상이 다른 곳으로 빠져나갔다.
직원 8명을 고용하고 있는 한성화(41) 사장은 “일하는 사람들이 지쳐서 떠난다”고 했다. “여자들은 식당, 남자들은 일용직 노동자로 가는 거야. 경쟁이 안 되니까. 올해는 이렇게 공장문을 열고 있지만 내년엔 어떻게 될지 모르지.”
관련된 가게들도 연쇄적으로 배를 곯는다. 원단가게를 하는 임아무개(70)씨는 35년 동안 창신동에 살았다. 본래는 봉제일을 하다가 원단가게를 차렸는데 하루에 1만원 어치도 못 팔고 있다. “앞에 (임대로) 내놓은 식당 건물은 10개월도 더 됐는데 아직도 안 나가고 있어. 이 동네는 봉제가 중심이지. 봉제가 죽으면 지게꾼이고 용달꾼이고 오토바이꾼이고 다 같이 죽는 거지.”
파괴되는 것은 일자리만이 아니다. 평소엔 사슬처럼 엮여있는 듯한 가족도 경제적 시련 앞에선 실밥처럼 뜯겨져 나간다. 22년째 창신동 공장에 다니고 있는 김아무개(53)씨는 8년전 아내가 빚 때문에 집을 나갔다. “아내가 사라지자 매일 밥대신 소주 5병만 마셨다”는 김씨는 그래도 딸 하나를 바라보고 마음을 다잡고 재봉틀 앞에 앉았다고 했다. 그러나 그처럼 악착같이 일하는 그도 다섯달째 월급을 못 받고 저축한 돈을 까먹으며 지내고 있다.
창신·숭인동 일대 83만9966㎡가 3차뉴타운 후보지로 지정된 것도 봉제공장 사람들을 우울하게 만든다. 아파트 중심 재개발이 진행될 경우 그렇잖아도 경쟁력을 잃어 허덕이는 창신동 봉제업은 해체가 가속화될 것으로 보인다.
이임자 산업연구원 전문연구원은 “2003년도 조사를 기준으로 할 때 창신동 일대는 서울의 봉제업체 전체 가운데 9~10%가 몰려 있다”며 “창신동이 세계화와 개발에아무런 전략없이 무방비로 해체돼간다면 우리나라 의류산업을 이끌어온 인력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안타까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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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신동의 어제와 오늘… 동대문시장 끼고 패션메카 성장
조기원 기자 이주현 기자
전문생산자 네트워크로 거듭나야
창신동엔 왜 봉제공장들이 몰려들게 되었을까? 뿌리는 청계천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70년대 평화·통일·동화시장을 축으로 한 청계천 일대의 의류공장은 우리나라 전체 기성복 물량의 70%를 소화할 만큼 번창했다. 하지만 청계천의 번영은 어린 노동자들의 저임금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전태일이 70년에 평화시장 실태를 조사한 결과를 보면 노동자들은 한 달에 두 차례만 쉬며 하루 12~13시간씩 일했다.
그러나 이런 청계천 공장은 70년대 말부터 창신·신당동 등으로 흩어졌다. 기성복 시장의 주도권을 대기업에 빼앗긴데다 노조활동 때문에 저임금·장시간 노동을 유지하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동대문시장에서 가장 가까운 창신·숭인동이 봉제공장의 새로운 메카로 떠올랐다. 79~80년 동대문 일대엔 제일평화시장, 동평화시장, 흥인시장, 광희시장 등이 잇따라 문을 열었다. 동대문시장은 남대문의 의류 원단·부자재 시장까지 흡수해 옷을 만드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갖춘 장소가 됐다. 동대문과 가까운 창신동은 원료를 공급받아 바로 다음날 납품하는 이점을 누렸다.
뉴타운 개발되면 설자리 잃어
숭인동에서 20여 년째 재단사로 일하는 최명주(53)씨는 “90년대 초반까지는 설·추석 빼고는 계속 공장을 돌렸다. 한때는 이곳 미싱사 월급이 공무원 월급 갑절 이상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90년대 중반 중국 등에서 값싼 제품이 밀려들며 창신동도 침체에 빠져들었다. 창신동 봉제산업을 옥죄는 건 또 있다. 지난해 8월 서울시는 창신동 일대를 3차 뉴타운 후보지로 선정했다. 창신동 주민들이 찬성파와 반대파로 나뉘어 목소리를 거세게 높이고 있어, 이곳은 아직 지구 지정 절차를 밟지 못하고 있다.
문제는 뉴타운을 둘러싼 찬반 논란에서 봉제공장에 대한 논의는 끼어들 틈이 없다는 것이다. 봉제업자들은 대부분 세들어 있다. 기존 뉴타운 사업처럼 이곳도 주거형으로 개발되면 창신동 밖으로 나가야 한다. 창신동의 공장들이 없어지는 것은 단지 노후한 주거지가 깔끔한 아파트로 바뀌는 것이 아니라, 비록 영세했을 지라도 하나의 산업 클러스터가 사라지는 것이고 도시 고용이 위축되는 것이며 도시 서민이 빈민으로 추락하는 것을 뜻한다.
“패션 생산기지 계획 관리를”
강우원 세종대사이버대학교 부동산경영대학장은 “창신동은 동대문의류상가 등 도시의 패션을 뒷받침하는 생산기능을 담당하고 있다”며 “도심지역을 지원하는 대표적인 점이지역으로 볼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이러한 점이지역이 노후화됐다고 해서 기존 기능을 없애버리는 게 아니라 점이지역의 기능을 어떻게 배분할 것인지 계획적 관리를 해야 도심이 활성화된다”고 지적했다.
이우관 한성대 교수(경영학)는 “창신동은 재고를 최소화하는, 그때 그때 빨리 값싸게 생산하는 시스템으로 커왔으나 이는 결국 값싼 노동력에 의지해야 하기 때문에 본질적인 한계가 있다”며 “소규모 생산자들이 네트워크를 만들고 기획능력을 갖춰야 봉제공장들이 창신동을 떠나더라도 생존의 활로를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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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닥다닥 14평 공장…패션시장의 새벽을 밝힌다
조기원 기자
최명주-홍금례씨 부부의 24시
창신·숭인동의 하루는 ‘드르륵’ 거리는 재봉틀 소리와 함께 돌아간다. 좁은 골목을 따라 벌집처럼 붙어있는 다세대주택마다 하루만에 옷을 ‘뚝딱’ 만들어내는 가내 공장들이 가득 들어차 있다. 평범한 주택가처럼 보이지만 안을 들여다보면 어김없이 공장들이다. 숭인동에 있는 최명주(53)씨 공장도 그 가운데 하나다.
AM 9:00~
최씨 공장이 문을 연다. 미싱사는 부인 홍금례(49)씨 혼자다.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와 16살 때부터 재봉틀을 밟았다. 33년째다. 홍씨는 “한 벌 당 공임이 4천원(봉제 2천원+재단 2천원)인데, 먹고 살려면 우리 공장에서 하루 40벌은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곳 공장들은 청바지·숙녀복·아동복 등 저마다 전문 품목이 있다. 최씨네는 중년 여성 윗도리가 전문이다. 여름엔 남방, 겨울엔 점퍼를 만든다.
안감 달기→주머니 박기→어깨선 박기→소맷단 달기→옆솔기 박기→깃 달기로 이어지는 모든 공정을 홍씨와 미싱보조 최성순(49)씨가 익숙하게 해낸다. 디자인과 재단은 남편 최씨의 몫이다. 재단사는 대부분 남자들이다. 최씨도 1980년대 초 학원에서 재단을 배웠다. 카탈로그와 옆 매장 옷들을 두루 참고해 디자인과 재단을 한다.
그러나 유행이 눈 깜짝할 사이 바뀌는 캐주얼은 전문 디자이너가 있어야 한다. 이들 ‘디자이너’는 하루에 옷을 몇 벌 만들지 공장 사장과 협의해 결정한다. 캐주얼은 유명 연예인이 한번 입고 나온 옷을 그 다음날 바로 지어낼 수 있을 만큼 기동성도 있어야 한다. 이렇게 유행을 탄 옷은 늦어도 이틀이면 동대문 전체에 쫙 퍼진다. 중년 여성복 옷 도매 수익이 15% 수준이면, 캐주얼은 40%가 넘는다. 그러나 재고가 많고, 올해 인기있는 디자인은 다음해엔 통하지 않기 때문에 위험부담이 높다.
PM 8:00~
해가 저물면 옷은 온전한 모양새를 드러낸다. 남은 것은 단추 달기와 다림질 뿐. 이런 마무리 작업은 보통 ‘시아게집’이라 불리는 끝손질집에 맡긴다. 하지만 최씨는 직접 한다. 한 벌당 1500원씩인 공임도 아깝지만, 저녁 때 한꺼번에 물량이 몰리는 시아게집의 품질도 만족스럽지 못한 탓이다. 최씨는 ‘시루시’(단춧구멍을 내는 작업)를 하고 단추를 다는가 싶더니, 금방 끝내고 한쪽 구석의 다림질 방으로 옷들을 싸들고 간다.
끝손질 집에선 한 벌 당 1분이면 끝나지만, 꼼꼼하게 하느라 시간이 세 곱은 걸린다고 했다. 도매시장이 문을 여는 밤 10시께까지 매장으로 물건을 나르려면 밥 먹을 시간도 없다. 물건을 갖다 준 뒤에야 동네사람들과 저녁 식사를 들며 소주 한 잔을 걸친다.
AM 4:00~
평화시장 가는 길목은 관광버스로 가득 차 있다. 지방에서 올라온 소매상들이 타고온 차다. 길이 꽉 막혀 있는 일도 많아 이곳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오토바이를 이용한다. 최씨의 매장은 도매상들이 밀집해 있는 구평화시장 4층. 건너편에는 두타, 밀리오레 등 젊은이들이 즐겨 찾는 소매업소들이 모여 있다. 최씨 매장은 딸 이름을 딴 ‘은아패션’. 주로 지방에서 올라온 중간도매상과 소매상들과 주로 거래한다. 낮 동안 미싱사였던 부인 홍씨는 이번엔 밤 10시부터 새벽 4시까지 가게를 지킨다.
새벽에는 원단 영업사원들이 도매상을 한바퀴 도는데, 때때로 날이 훤해지도록 이들을 기다린다. 원단을 조금이라도 싸게 사려는 수고를 마다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침이 밝기 전에 관광버스들은 동대문을 떠난다. 곱절로 길었던 창신동도 다시 하루를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