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생활백서 - 2006 제30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박주영 지음 / 민음사 / 2006년 6월
평점 :
절판


'책만 읽고싶어서 백수가 된 여자' 의 근황이 궁금해 책을 집어들었습니다.
이것저것 재지 않고 호기심에 책을 구입하는 것은 제 오래된 습관이지만, 이번 만큼은 거기에 더해 동질감에서 비롯되는 반가움이 있었죠. "너도 백수니? 나도 백순데."

사실, '반가움' 에는 약간의 기대가 숨어있었습니다.
반쯤은 만족하지만 반쯤은 불만족스러운, 오늘에 대한 해답을 발견할지도 모른다는 근거없는 기대감이죠. "그래도, 명색이 백서인데."

소설을 펼쳐놓고 분석이라는 것을 시작합니다.
'음.. 그녀는 하루에 1권 이상의 책을 비타민처럼 복용하고, 책을 모으는 것 만이 유일한 관심사이며, 정말 먹고사는데 필요한 만큼의 일만 하는군.'
물론, 주변환경에 대한 조사도 놓치지 않습니다.
'그녀의 주변에는 별다른 간섭을 하지 않는 아버지와, 한편의 소설을 써낸 적이 있는 외할머니, 수차례 직장과 연애상대를 갈아치우는 친구 유희와 더 나은 로맨스를 꿈꾸는 친구 채린이 있구나.'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자신과 비교하기 시작합니다.
저는 하루 대략 1권 정도의 책을 읽고, 옷이며 최신 전자제품 보다는 책을 선호하며, 먹고사는데 필요한 만큼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 주변에는 공무원 시험을 종용하는 아버지와, 저를 무던히 답답해하는 공무원 누나,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친구녀석들이 대거 포진되어있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주변환경의 차이인가?"

이제 다시 그녀에게 돌아갑니다.

그녀는 '신세한탄'을 하지 않습니다. 가끔 '평범한 삶'을 잠시 상상하는 듯 하지만, 그녀에게 별다른 감흥을 일으키지 못합니다. (책 속에서 몇 문장 차지하지 못하죠.)
대신, 그녀는 '백수로서의' 자신의 삶을 규정하고 또 규정합니다. "내 꿈은 무엇이다" 부터 "올해의 계획은 무엇이다" 까지, 자기 삶에 대한 크고작은 의미 부여와 방향의 설정, 계획의 수립이야 별 대수로운 일이 아닙니다만, 그녀는 좀 다릅니다. 이런 얘기들을 두번이고 세번이고 반복하는데에는, 뭔가 구린데가 있는 것 같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백수의 표본으로서 그녀를 분석하고자 했던 저는, 결국 수사의 단서를 찾지 못하고 책장을 덮고 말았습니다. 근거 없는 추측만 남아있죠.
설마, '오늘의 작가상'까지 수상한 작가께서 글줄이 궁했을리는 없는데.. 대체 무엇일까요? 단서가 없는 것인지, 찾지 못하는 것인지.

백수로서의 삶은 단 한번만 긍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지 못해 반복되는 긍정은, 일종의 자기암시이고, 자기암시란 곧 불안함을 뜻하니까요. 백수에게 불안함이란, 감점요인입니다.

백수로서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은 제한적입니다.
삶에 대한 많은 기준에다, '자기만족'이라는 중요한 기준 하나를 덧붙여주고 증명해보이는 것이죠. 그러기 위해서, 백수는 진정으로 행복해야 합니다. 자신을 속이는 순간, 감점입니다.

물론, 야박하지만은 않습니다. 조금 불안하다고 상담해오는 백수님들에게, 생계유지형 아르바이트를 소개해드릴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도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는 백수님들에게는, 더 이상 백수로서의 자격을 유지시켜드릴 수가 없는 것이죠.

자격유지를 못하게 된 백수님들에게는 두가지 진로가 있습니다.
한가지는 직업세계로 진출하는 것이요, 또 한가지도 직업세계로 진출하는 것인데요, 전자와 후자는 분명히 다른 세계라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두 세계의 차이점에 대해서는, 백수에 입문하신 분들께만 말씀드려야 할 것이라, 부득이하게 말을 아끼도록 하겠습니다.
다만, 한가지! 불안해하는 백수님들이여, 최선을 다하시라. 그대 어느 길이든, 직업세계에는 당도할지니.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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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안의 명예가 여성인권보다 중요한 나라.
- 혼인한 여성의 간음은 가장 큰 죄악
- 순결을 잃을 것에 대한 극심한 공포가 여성들의 분신을 유도.
- 코란에는 여성에 대한 차별 없지만, 사리앗에 따르면 여성들은 종교복장을 갖추고 외출하게 되어있음. (이슬람 교리가 특정 정파에 의해 이용당함.)

- 긴 수염은 탈레반 치하에서 의무.
- 부르카(여성의 얼굴을 전부 덮음), 집 밖에서 일할 수 없음, 질서 어기면 즉결처분.
- 종교음악을 제외하고는 결혼식 음악도 허용되지 않음.

- 대소 항쟁, 종족간 내전. 미국의 공습까지 20여년에 걸친 세차례의 전쟁
- 탈레반이 비켜난 자리는 미국의 지원을 받는 지방군벌들이 차지.
- 일부 여성들이 부르카 벗고 스카프를 했지만, 많은 여성들은 아직도 불안한 정세 속에서 부르카 착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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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blog.naver.com/bschun55/60026840644)

-‘로쟈’라는 이름에 관해서 직접 말해달라. 그 이름은 자신을 얼마만큼 반영하고 있는지도 더불어...
=이런 자리를 마련해주어서 감사하다. 어떤 용도가 될는지는 의문이지만 이 또한 자기 존재감의 과시이면서 자기 존재의 '확장'일 테니까. 물론 이건 모두 '로쟈'가 열심히 끄적거려준 덕분이다. 어느 자리에선가 밝혔는데, '로쟈'는 <죄와 벌>의 주인공 로지온 라스콜리니코프의 애칭이다(즉, 로지온의 애칭이다). 교양있는 분들은 로자 룩셈부르크를 대개 연상하고서 '여자' 이름이 아닌가로 판단하는데, 로쟈는 '혁명가'가 아니라 '살인자'의 이름이다(혹 '박노자'의 닉네임이 아닌가란 의견도 예전엔 있었다.^^).
인터넷에서 글쓰기를 처음 시작한 게 지난 99년부터인데, 초기엔 '이가두' '이가휘' 같은 중국풍의 닉네임을 한동안 쓰기도 했다. 그러다 '로쟈'로 정착된 건 기억에 <죄와 벌>을 다시 읽을 필요가 생기면서부터였다. 보르헤스가 언젠가 '나와 보르헤스'란 글을 쓴 적이 있는데, '나와 로쟈'도 비슷하다. 많이 닮았지만 똑같지는 않다. 그는 나의 페르소나(가면)이면서 대변인이고 때론 주인이면서 동시에 하인이기도 하다. 그래도 가장 정확하게 말하자면, 나의 '책읽기 주체'라고 해야 맞을 듯하다. 그런 말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bibliological subject' 정도라고 해두자. '나는 책을 읽는다, 고로 존재한다'란 명제로부터 탄생하는 어떤 주체.

-당신의 알라딘 활동(?)이나 비평고원 활동(?)은 이른바 ‘업계(책을 읽고 쓰길 좋아하는 사람들을 포괄하는 의미에서)’에서는 꽤 유명한 편이다. 그들 중 상당수는 당신의 독서편력에 혀를 내두른다. 당신의 그런 현재를 있게 한 책읽기의 시작점이 궁금하다.
=내가 글을 쓰는 공간은 그 딱 두 군데인데, 해놓은 일에 비해서는 '이름'이 많이 알려졌다고 한다. 오역에 관한 지적들을 자주 하면서 출판 동네에 '요주의 인물'로 찍혀서 그런지도 모르겠고. 해서, '내성적인' 성격과는 좀 다르게 많이 나서는/나대는 인물이란 인상도 주는 듯하다(나는 책 얘기가 나오지 않는 대부분의 자리에서 '조용한' 편이다!).
'비평고원' 같은 카페는 내가 선택한 것이지만(나는 초창기 멤버인데, 내가 운영하는 카페에서보다도 더 열심히 '활동'했다), 알라딘의 서재 같은 경우는 어느날 뚝 떨어진 것이다. 알라딘은 책값 좀 벌어보려고 마이 리뷰를 몇 개 쓰다가 (지금은 없어졌지만) '명예의 전당'에 오르기도 해서 나름대로 애착을 갖고 있는 공간이다. 그렇다고 리뷰를 많이 쓴 건 아니고 아마도 유명세의 8할은 '페이퍼' 때문인 듯하다. 책에 대한 잡담들.  
'독서편력'이라고 하면 좀 부끄럽다. 생각만큼 책을 많이 읽는 건 아니기 때문에. 그건 독서의 성격과도 좀 관계가 있는데, 문학 전공자라서 자연스레 갖게 된 태도이기도 하지만, 나는 '자세히 읽기'가 필요한 책이 아니면 손에 잘 들게 되지 않는다 (더불어 책을 빨리 읽는 편도 아니다). 그럼에도 많이 읽는 것처럼 비치는 것은 '아는 체'를 많이 해서인 듯한데(보수만 두둑이 준다면 앉은 자리에서 하루 종일 책 이름들을 적어나갈 수 있다), 사실 책들을 둘러보고 찾아보고 하는 일들을 즐기는 편이긴 하다(주변에선 내 전공이 '서지학'이라고 말하곤 한다).
한데, 그건 '독서편력'이 아니라 '도서편력'이라고 해야 맞겠다. 어쩌면 '편력'도 정확하지는 않다. <어린왕자>에 보면 지리학자가 사는 별이 나오는데, 그는 여행자들이 보고 온 내용을 책에 기록하기만 한다. 즉, 그가 하는 건 편력이 아니라 기록이다. 나는 책들의 성좌, 문학과 사상의 '지도'를 작성하는 데 취미가 있다.      
책읽기의 시작점? 어머니 말씀으론 내 당사주에 그렇게 나와 있다고 한다. 백발 도사가 책을 읽는 모습이 나의 당사주라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 여하튼 8살 때쯤 동네 친구네 집에 놀러갔다가 책꽂이에 소년소녀 세계문학전집이 좍 꽂혀 있는 걸 보고 경이감을 느낀 적이 있다(우리 집에는 낱권으로도 책이 별로 없을 때였다). 어쩌자고 세상엔 도대체가 아무것도 없지 않고 책이란 게 있는 것일까?! 그러한 책의 존재 자체는 30년이 지난 지금도 경이롭다(여성들 또한 경이롭지만, 그들은 책만큼 친절하지 않다!).  

-당신의 글쓰기는 인터넷이라는 사이버 공간에서 활발하게 이뤄지는 편이다. ‘인터넷’이 글쓰기와 관련하여 갖는 어떤 의미가 있나? 지면을 허락받는 게 아니라, 지면을 스스로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자유로움을 느끼는 것인가?
=사이버 공간이란 게 특별한 의미를 갖는 건 아니다. 원래 독서일기 같은 걸 PC에다 쳐넣곤 했으니까. 다만, 공개된다는 게 다를 뿐인데, 사실 그게 ‘특별한’ 의미를 갖긴 한다. 좀더 친절하게 좀더 풀어써야 하기 때문이다. 더불어, 지면을 스스로 만들 수 있다는 자유로움과는 별개로(그건 별로 의식해보지 못했다) 오프라인에서라면 가능하지 않은 글쓰기라는 걸 얼마간 의식하고는 있다. 그건 자유로움이면서 동시에 어떤 막연한 슬픔 같은 것이기도 하다.
‘곁다리 텍스트’라고 부르는 것에 나는 애정을 갖고 있는데, 가끔씩 들어오는 청탁을 받고 쓰는 게 아닌, 온라인에 직접 쓰는 글들의 대부분은 ‘곁다리 텍스트’들이다. 번듯하지도 않아서 내세우기에는 멋쩍은. 그래서 ‘책’으로 묶이지 않을 텍스트들. 그런 텍스트들을 모아놓을 수 있다는 점이 인터넷 공간의 특장이고 미덕이라고 생각한다.   

-당신은 외국문학, 특히 러시아문학을 공부하고 있다. 당신의 학과 진학이 우연의 산물이라고 치더라도(아니라면, 그 이유도 물론 궁금하거니와), 그것을 당신의 업으로 삼은 것은 엄연히 당신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문학을 한다는 것, 러시아 문학을 한다는 것이 당신을 위태롭거나 공허하게 한 적은 없는가(여기서의 위태로움은 경제적인 위태로움에 관한 것은 아니다).
=러시아문학을 전공으로 고른 것은 운명이다.^^ 나는 예정조화설 같은 걸 믿기도 하고(‘예정파국설’이어도 무방하다). 애초에는 그냥 ‘문학’을 전공한다는 생각이었고, 러시아문학에 큰 작가들이 많다는 게 마음에 들었다. ‘경제로운 위태로움’을 논외로 하면, 문학이나 러시아문학을 공부한다는 사실에 회의를 느낀 적은 거의 없다. 동료들끼리는 상투적인 푸념들을 늘어놓지만 그건 내가 좋아서 하는 일에 주변 사람들의 ‘희생’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문학이란 성채는 인간들이 써놓은 최우량의 텍스트들로 구성된다. 이 텍스트들을 읽고 음미하는 일을 (조금 미안한 얘기지만) 고답적인 어투의 육법전서 따위를 읽는 것과 어찌 비교할 수 있겠는가? 물론 이러한 오만의 대가는 현실에서 톡톡히 치르고 있다.^^ 
한편으로, 질문은 ‘외국문학도’로서의 한계 같은 걸 느낀 적은 없는가, 라고도 읽히는데, 전공에 국한하여 말하자면 내가 목표로 하는 건 ‘러시아문학에 대한 이해’라기보다는 ‘러시아문학에 대한 한국인의 이해’ 혹은 ‘러시아문학에 대한 나의 이해’이다. 충분히 행복하고 보람된 일이다. 그저 인생이 짧다는 게 한스러울 뿐(이미 나는 내가 갖고 있는 책들을 다 읽기 전에 죽을 운명에 처해 있다).   

-당신은 이전에 <텍스트>에 출판번역의 오류에 관해서 글을 쓴 적도 있다. 번역 문제에 관하여 글을 쓸 때, 당신은 더욱 집요하고 철저한 것처럼 보인다. 그것이 비단 당신의 전공인 ‘노어->한국어’의 경우에만 해당하는 것도 아니다. 외국문학을 공부하는 동안 특별히 이런 작업에 대해서 더욱 날카로워진 것인가?
=나는 한국어를 사랑하지만, 한국인이 한글로 쓴 책만 읽고서 무얼 좀 알게 되고 또 똑똑해진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유감스럽지만 현실이 그렇다고 본다. 때문에 필요한 것이 좋은 번역이다. 특히나 고전들의 번역(‘우리시대의 고전’들을 포함해서). 기본적으로 좀더 많은 책들이 좀더 정확하게 번역되어야 한다. 그게 총론이다. 번역상의 오류 등에 대한 지적은 각론에 해당한다. 읽을 만한 책을 읽고 싶다는 개인적인 바람도 거기엔 겹쳐 있다. 더구나 내 돈 주고 산 책 아닌가?
그러한 작업과 관련하여 외국문학 전공자라는 정체성을 크게 의식한 적은 없다. 사실, 내가 문제삼았던 책들은 대부분 문학서들이 아니라 철학서나 이론서들이었다. 나는 그 책들이 교양서라면 일반 대학생들이 읽을 수 있고 이해할 수 있어야 된다고 생각한다(적어도 한국어로 된 책 아닌가?). 하지만, 현실이 그렇지 않다.
한 지방대학에서 문화기호학 같은 과목의 강의를 한 적이 있는데, 시키지 않았는데도 어려운 이론서들을 읽다가 나가떨어지는 학생들이 더러 있었다. 아무래도 머리가 나쁜 듯하다면서. 그런데, 그들이 읽은 책들 가운데도 주어 술어도 못 맞추는 오역서들이 적지 않았다. 이런 게 ‘학문’이고 ‘관행’이라면 어처구니없을 뿐더러 비참한 일이다. 좀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나는 그런 책들과 함께 우리가 ‘인간적인 사회’를 만들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당신은 교육 잘 받은 세대로서 풍요로움과 자부심을 가질 만하다. 그러나 직업을 유전 받지 못한 세대로서의 곤궁함과 난처함 또한 당신의 몫이다. 당신의 풍요로움과 곤궁함에 관해 듣고 싶다.
=교육 잘 받은 ‘세대’라는 건 무슨 뜻인가?(어느 세대와 비교해야 하는 것인가? 아버지 세대?) 교육 ‘잘 받은’은 대학원졸을 의미하는 건가? 그런데 백수인? 나의 ‘실상’을 까발려놓으라는 얘기 같다.^^ 나의 풍요로움은 물론 책이다. 책밖에 없기도 하다. 가진 재산이라고는(지방 도시의 아파트 한 채 값 정도는 책값으로 들어갔으니까). 그러니까 나의 곤궁함은 정확히 그 풍요로움이 낳은 것이다. 그리고 그때의 곤궁은 확산력이 있어서 주변 사람들이 모두 곤궁에 시달린다(그리고 나는 그들에게 시달린다!). 이런 문제를 자세히 늘어놓는다는 건 궁상맞은 일이다.^^  

-사람들은 늘 ‘(인)문학의 위기’에 대해서 말한다. 어느 때도 인문학이 위기에 놓이지 않은 적이 없었다는 점에서, ‘인문학의 위기’란 인문학적 역사가 된 듯싶다. 이것이 비록 상투적인 얘기가 되어버렸다고 한들, 당신 나름대로의 대답을 갖고 있을 텐데 (그것이 비록 상투적이라고 하더라도) 들려달라.
=사안은 좀 다르지만 문학이고 인문학이고 늘 위기였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회고적으로라도 ‘그때가 좋았지!’ 할 만한 시절은 있는 법이니까. 더불어, 나는 (인)문학 자체의 위기에 대해서는 별다른 느낌을 갖고 있지 않다. 사회 속에서의 위상이 저하되고 있다든가 필요가 절하되고 있다는 식의 평가는 가능하겠지만 (인)문학 혼자 억울할 일은 아닐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건 인문학자의 위기, 내지는 인문학 후속 세대의 위기이다. 물론 이 위기의 빌미는 태생적인데, 그것은 (인)문학이 기생적이라는 데 있는 듯싶다. 자기 스스로 밥벌이하는 게 아니라는 것. 보다 실감나게 말하자면, (인)문학 ‘공부’가 기생적이다. 이 공부는 있는 집 거덜내고 없는 집 주저앉게 한다. 한마디로 멜랑콜리한 공부이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해서 적극적인 해답을 갖고 있지 않다. 굳이 있다면 생태학적이고 진화론적인 것이다. 학문 후속 세대를 배려하고 격려하는 사회와 그렇지 못한 사회가 있을 법하다. 그들은 각자의 풍토에 맞는 인문학의 부피와 깊이를 갖게 될 것이다.  

-인문학적 공간(혹은 장) 안에서 자신을 바라봤을 때, 현재의 당신의 자리는 어떠하며, 미래에는 어떨 것 같은가?
=정확하게 이해하기 어려운 질문이다. 내게 주어진 자리가 있고 찾아가야 할 자리가 있다. 즉, 해야 할 몫이 있고 나잇값이 있다. 그리고 하고 싶은 일, 해야 할일은 많다. 물론 일차적인 관심은 그것들을 구체화하는 것이다. 하지만, 자리보다 중요한 것은 책임이다. 인문학도로서 나는 우리 사회에서 인문학의 지분을 넓히면서 인문학이 더 많은 책임을 떠안도록 하는 데 일조하고 싶다. 인문(人文)은 ‘사람의 무늬’란 뜻도 갖고 있지만, 한편으로 인문학의 책임은 우리가 ‘무늬만 사람’인 이들은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너나 할 것 없이 기본적으로 많이 읽어야 하며, 제대로 읽어야 한다. 그럴 수 있는 환경을 만든다는 것이 중요하다.  

-당신은 자기 고백적인 글을 쓸 때, 시와 시인을 인용하곤 한다. 그리고 어느 글에서인가 ‘시를 읽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서 날카로운 태도를 취한 바 있다. 시(인)란 당신에게 무엇인가?
=‘시를 읽지 않는 사람들’을 신뢰하지 않는다고 했었나?^^ 20대 초반에 많은 시들을 읽었고 몇 권 분량의 시도 썼다. 인문학이란 궁극적으로 ‘말과 사람’에 대한 관심이고 사랑이다. 시라는 건 그러한 관심/사랑의 최적의 표현이 아닐까 싶다. 프랑스의 시인 르네 샤르는 시를 ‘영혼의 끼니’라고 불렀는데, 나는 그러한 끼니로 ‘비만한’ 영혼들을 좋아한다. 한편으론 ‘찌라시’ 수준의 강파른 언어를 혐오하고. 물론 시인들은 그런 ‘끼니’가 될 만한 시들을 쓸 책임과 의무가 있다. 저급한 시들로 식중독이나 걸리게 하면 안된다.   

-당신에게 있어서, 혹은 당신의 글쓰기에 지식이란 어떤 쓸모를 갖는가? 당신은 주로 이론적이고 논리적인 글을 쓰는 편이다. 그렇지만, 러시아에서 보내온 ‘편지’들을 돌이켜보면, 시적인 감수성으로 씌어진 글을 쓰고 싶어하는 욕망도 엿보인다. 현재 당신의 글쓰기는 당신을 얼마만큼 드러내고 있는가.
=<텍스트>는 나에 대해서 너무 많은 걸 알고 있다.^^ 이론적이고 논리적인 글들이 원래 체질에 잘 맞는 건 아니다. 러시아인들이 대개 그렇듯이 나도 주정적인 면이 강하다. 한데, 그러한 면이 걸러지지 않은 채로 드러나는 걸 혐오하는 편이다. ‘시적인 감수성’이 ‘너절한 감상’을 의미할 수는 없다. 그런데, 시는 그냥 언어만이 아니다. 시는 삶이고 삶의 파토스이다. 나는 니진스키의 일기를 시로 읽는다. “나는 울고 싶은데 신은 내게 쓰라고 명령한다. 그는 내가 빈들거리는 걸 원하지 않는다. 아내는 울고 또 운다. 나 역시 운다...”라는 걸 읽으며 나는 울고 싶지만, 대신에 쓴다. 이러한 울음이 감상으로 함부로 절하되는 걸 혐오하고 경계하기 때문에 이론적이고 논리적으로 쓴다. 다른 뾰족한 수가 있는가?   

-지금 당신은 진정 쓰고 싶은 글을 쓰고 있는가?
=마지막 질문은 의외이다. 보통은 “당신이 진정 쓰고 싶은 글은 무엇인가?”라고 묻는 게 예의 아닌가?^^ 아무래도 쓰고 싶은 것보다는 써야겠다는 걸 더 많이 쓰게 된다. 만약에 직업이 ‘공부’가 아니라 전업 작가라면 한두 달에 한권씩 책을 낼 만큼 쓸 생각도 있다. 어쩌면 그게 더 ‘자아실현’에는 도움이 될는지도 모르겠다. 한데, 문제는 내가 쾌락적이면서 또한 너무 금욕적이기도 하다는 데 있다.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만 한다. 하지만, 아주 조금씩만 한다. 나는 진정 쓰고 싶은 걸 내내 아주 조금씩만 쓰게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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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6-08-13 17: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잘 정리해놓은 페이퍼도 있는데, 굳이 네이버에서 퍼오신 이유가 있으신가요?^^

sb 2006-08-14 07: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예, (로쟈님의 서재에서 알게 된) 북매거진 <텍스트>에 대해서 검색하다가 찾았거든요. 정리된 페이퍼가 있는 줄은 몰랐어요. 네이버에서 찾아 정리하느라 힘들었는데.
 

(출처: 한겨레)
구본준 기자 이정용 기자  



이시대 최고의 미술 이야기꾼이 이주헌(46)씨라는데 이의를 달 사람은 아마도 거의 없어보인다. 대중들에게 쉽고 편안하게 미술을 만나게 안내해주는 필자로 이씨만큼 유명한 이는 아직 없다. 일찌감치 이 분야에 뛰어들어 가장 먼저 이름을 얻은 ‘개척자’다. 미술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했고 신문사에서 미술담당 기자를 지낸 이력을 보면, 그가 미술 저술가가 된 것은 어찌보면 아주 자연스러운 변신같아 보인다. 그런데 이씨가 기자를 그만 두고 최고의 미술저술가가 되는 과정이 과연 그렇게 순조로왔던 것일까?

<한겨레>에서 미술기자로 이름을 날리던 이씨는 93년 5년 넘게 몸담았던 신문사에 사표를 낸다. 미술 글쟁이로만 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열달 남짓 미술잡지 편집장을 지낸 뒤 이씨는 아예 전업 저술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94년 봄, 이씨는 무작정 화랑 겸 출판사인 학고재의 우찬규 사장을 찾아갔다. 이씨는 우 사장에게 유럽 주요 미술관을 가족과 함께 답사해 기행문처럼 들려주는 대중적 미술책을 펴내자고 제안했다. 그리고 그 취재비용으로 1000만원을 먼저 달라고 요청했다. 선인세로 받아 책이 나온 뒤 팔리는만큼 갚는 것인데, 한가지 조건을 더 달았다. “책이 안팔려 절판되도 갚을 돈이 없다”고 미리 못박은 것이다. 지금 보면 거의 ‘배째라’ 수준이지만, 당시 이씨의 형편으로선 솔직하게 밝힐 수밖에 없었다.

이씨가 특별한 교분이 없었던 우 사장을 찾아간 것은 학고재의 성격이 책의 성격에 맞아보였고, 그런 지원을 해줄 인식을 지닌 출판사가 학고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우 사장은 놀랍게도 그자리에서 흔쾌히 이씨의 조건대로 책을 펴내기로 약속했다. 그렇게 1100만원을 지원받은 이씨는 저금한 돈 400여만원에서 100만원만 남기고 모두 인출해 여행비에 보탰다. 그해 8월 말, 이씨는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유럽으로 출발했다. 이씨 나이 서른세살, 아이들은 겨우 세돌과 한돌이 지났을 때였다. 그리고 도착지에서 바로 답사기를 <한겨레>에 송고하기 시작했다. 53일간의 미술관 답사기는 <한겨레> 연재를 거쳐 <50일간의 유럽 미술관 기행>이란 제목으로 학고재에서 출간됐다.

출판사에 “천만원 먼저 달라”

“제 인생의 승부를 건 것이죠. 이게 되면 이걸 통해 살아갈 길이 나올 것이고, 안되면 미술 글쓰기를 접기로 하고 이 책에 제 전부를 던진 겁니다.” <50일간의~>는 미술과 여행 두가지 재미를 함께 지녔다는 평을 들으며 단숨에 베스트셀러가 됐다. ‘최초의 대중적인 미술 저술가’ 이주헌은 이처럼 더이상 물러날 곳 없는 배수의 진을 친 도전으로 탄생했던 것이다. 신문기자를 그만 두고 그때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직업인 ‘미술 저술가’에 승부를 건 것 역시 당시로선 아무도 하지 않았던 모험이었다. 이후 이씨는 <미술로 보는 20세기>, <신화 그림으로 읽기> 등 내는 책마다 호평을 받았고 당대 최고의 미술 저술가로 자리를 굳혔다.

이씨의 강점으로는 잘난척하는 법 없이 차분하고 편하게 미술을 설명하는 글솜씨가 맨 먼저 꼽힌다. 이씨 이전에도 미술 글쟁이들은 있었다. 그러나 대중들로 하여금 오히려 미술과 거리감을 느끼게 만드는 그들만의 언어로 그들만의 관심사를 논할 뿐이었다. 저술가로서 가져야 할 문장 구사력, 그리고 작품의 배경과 여러 의미를 읽어내는 인문적 소양을 갖춘 필자도 드물었다. 이런 모든 단점을 한꺼번에 극복하고 등장한 저술가가 이씨였다. 신문기자를 하면서 늘 미술을 쉽게 설명하는 훈련을 쌓았던 것이 이씨의 자산이었다. 미술과 대중과의 거리를 좁힌 최초의 저술가가 이씨이고, 대중들에게 감상의 동반자로 나선 저술가도 이씨가 처음이었다.

이씨의 글은 철저하게 저널리즘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씨가 생각하는 저널리즘은 결국 ‘소통’의 문제다. 정보나 지식 등 필요한 것을 전하는 과정에서 일상인의 언어로 길을 터주는 것이다. 이씨 스스로도 항상 ‘나 자신이 미디어다’라는 생각을 갖고 글을 쓴다. 그래서 이씨의 글은 가장 편하게 읽으면서 정보와 감상을 얻을 수 있다는 평을 듣는다. 이씨 이후 이씨보다 더 학문적 배경을 갖췄거나 이씨처럼 쉽게 글쓰는 이들이 등장했지만 누구도 이씨처럼 대중들의 호응을 얻지는 못했다. 그 이유가 바로 ‘저널리즘적 글쓰기’ 감각 때문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이씨가 10년 넘게 최고의 미술 저술가 자리를 지키고 있는 데에는 글솜씨 이상으로 탁월한 책 기획력이 중요하게 작용했다. 이씨는 자신이 책의 모든 부분을 기획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리고 그 바탕에는 철저한 프로의식이 깔려 있다.

이씨의 출세작인 <50일간의~>을 보면 이씨가 얼마나 철두철미한 ‘프로’인지를 알 수 있다. 이씨는 처음부터 아이들을 데려갈 생각이었다. 일반 독자를 대상으로 하는 미술책이므로 가족여행 이야기가 들어 있어야 독자들이 편하게 책을 접할 수 있고, 또한 아이들을 데리고 가야 글을 쓸 에피소드들이 나올 것으로 계산했기 때문이었다. 비록 부부는 힘들어도 책에 재미를 넣어 보다 폭넓은 대상들을 독자로 끌어들이기 위한 선택이었다. 이런 기획은 기막히게 맞아떨어졌다. 당시만해도 이런 식의 미술책은 거의 없었다. 가족들에게 미술이 뭔지 쉽게 설명해주는 이씨의 고군분투 여행기를 읽다보면 유럽 풍광을 엿보는 동시에 옆에서 설명듣듯 미술을 만날 수 있는 것은 이 책만의 새로운 재미였다. “당시 여행자유화가 되면서 유럽에 대한 관심이 높아질 때였어요. 그런데 유럽에 가면 미술관을 가봐야 하고, 미술관에 가면 뭔가를 좀 알아야 그림을 볼 수 있으니, 이제는 이런 책이 나올 때가 됐다고 본거죠. 개인적으로는 ‘될 수밖에 없는 책’이라고 생각했어요.”

콘셉트·문체·구성, 책마다 달라

이런 기획력으로 이씨는 지금까지 낸 10여종의 책을 단 한권도 절판되지 않은 스테디셀러로 만들어냈다. 이씨의 책들은 모두 제각기 컨셉과 문체, 구성이 다르다. 이씨처럼 계속 책에 변화를 주는 필자는 찾아보기 힘들다. 이씨는 언제나 책의 소재와 주제를 그 시점의 미술책 트렌드에서 벗어나지 않되 새로운 것으로 골라 철저하게 독자의 눈높이에 맞춘다. 자신의 취향보다는 독자들이 관심가질 만한 것들을 고르는 것이 원칙이다. 한동안 그가 집중적으로 소개한 라파엘 전파가 대표적인 사례다. 때로는 철저하게 타깃 독자들에게만 맞추기도 한다. ‘가정주부’들만을 대상으로 한 미술책 <그림속 여인처럼 살고 싶을 때>가 대표적이다.

이씨의 프로기질에는 미술 관련 글이 아니면 절대 쓰지 않는 자기 분야에 대한 순결주의와 자기관리도 빼놓을 수 없다. 파주 헤이리 자택에 틀어박혀 오로지 미술만,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책만을 쓸 뿐이다. 요즘에는 러시아 미술관을 소개하는 책을 집풀중이다. 트레챠코프 미술관과 에르미타주 등 러시아가 자랑하는 미술관들과 그 소장품을 소개하는 책이 조만간 이씨의 책목록에 이름을 올릴 예정이다.

글 구본준 기자 bonbon@hani.co.kr, 사진 이정용 기자 lee31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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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겨레)
전진식 기자
 
 
1970년대 노동집약형 수출산업의 한 축이었으며, 1990년대 들어 동대문 의류상가의 번영과 함께 ‘르네상스’를 맞았던 대표적인 가내 봉제공장 밀집지역인 창신동과 숭인동이 기로에 서 있다. 디자인에서 원단구입·제조·판매가 원스톱으로 이뤄지고, 기동력 있는 다품종 소량생산 체제로 씽씽 미싱을 돌려대던 ‘좋았던 시절’은 점점 세계화의 뒤안으로 밀려나고 있다. 값싼 중국 의류들이 밀려들면서 하나 둘 씩 ‘공장의 불빛’이 꺼져가는 ‘창신동’의 오늘과 내일을 3차례에 나눠 싣는다.

세계화·개발 기로에 서다

경상도 산골에서 스무살에 혼자 서울로 올라와 창신동에서 20여년째 미싱을 밟고 있는 노정섭(45)씨는 6년전부터 ‘객공’으로 일하고 있다. ‘객공’이란 고용 기간을 계약하지 않고 일감이 있으면 일하고 일감이 떨어지면 자동 해고되는 비정규직의 극단적 형태다.

그는 대뜸 입고 있는 바지를 흔들어 보였다. “이게 7천원이야. 한국산이라고 쓰여 있지만 딱 보면 알아. 중국산이지. 싼 물건에 당할 수가 있나. 길거리에서 파는 거 90%가 원단에서 바느질까지 모두 중국산이야. 일요일 오전에 평화시장 가 봤나? 거기 파는 옷들 바지고 웃도리고 3천원짜리가 수두룩해. 그런 가격을 어떻게 한국에서 만들어?”

창신동 사람들 중엔 최근 객공으로 신분이 떨어진 사람이 늘어났다. 주문이 없을 때 월급제 직원을 두면 고스란히 사업자의 빚으로 남기 때문에 정규 직원이 아닌 객공을 채용하게 된 것이다. 객공의 수입은 불안하기 짝이 없다. 성수기인 3~5월, 9~11월엔 하루종일 일해 월 200만~300만원씩 벌지만 비성수기때는 말 그대로 ‘0원’이 된다. 노씨는 “비성수기때에는 성수기에 필요한 옷을 미리 당겨 만들어놓기도 했는데 4~5년 전부터는 그렇지 않다”며 “예전의 성수기가 비성수기가 됐고, 예전의 비성수기엔 아예 일이 없다”고 말했다.

일해도 수입은 갈수록 줄어든다. 납품가격이 구제금융기 이후로 동결됐기 때문이다. 남편과 함께 봉제 하청을 받아 일하는 지아무개(54)씨는 “디자인에 따라 다르지만 티셔츠는 1벌에 500~600원, 블라우스는 2천~2500원, 바지는 1500~2천원을 받고 바느질을 한다”고 말했다. 이는 90년대 말과 같은 단가다. 지씨는 “하루 종일 3사람이 매달려 500원짜리 티셔츠 100장을 만들면 오히려 밑지는 장사”라고 말했다.

<한겨레>가 지난달 3~7일 창신동 봉제공장 노동자 14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벌인 결과 한달 임금이 평균 134만원으로 조사됐다. 2006년 2/4분기 도시근로자 가구주 평균소득 225만8천원의 59%에 불과했다. 99년 서울시정개발연구원이 창신동 공장 129곳을 조사한 것과 비교하면, 봉제공장의 평균 매출액은 7년 전보다 40%나 줄어들었다. 99년엔 한달 매출이 2176만1천원이었으나 올해엔 1306만6천원이었다.

수입이 줄어들자 미래에 대한 불안도 심해지고 있다. ‘이곳이 앞으로 쇠퇴할 것으로 보느냐’란 질문에 99년엔 4.7%만이 ‘그렇다’고 답했으나 올해엔 78.6%로 늘었다. 고령화 현상도 뚜렷해 7년 전에는 30대(40.3%)가 가장 많았지만 지금은 40대(42.1%)와 50대(29.3%)가 절반을 넘는다. 인구도 해마다 평균 700여명 씩 줄어 7년 사이 15% 이상이 다른 곳으로 빠져나갔다.

직원 8명을 고용하고 있는 한성화(41) 사장은 “일하는 사람들이 지쳐서 떠난다”고 했다. “여자들은 식당, 남자들은 일용직 노동자로 가는 거야. 경쟁이 안 되니까. 올해는 이렇게 공장문을 열고 있지만 내년엔 어떻게 될지 모르지.”

관련된 가게들도 연쇄적으로 배를 곯는다. 원단가게를 하는 임아무개(70)씨는 35년 동안 창신동에 살았다. 본래는 봉제일을 하다가 원단가게를 차렸는데 하루에 1만원 어치도 못 팔고 있다. “앞에 (임대로) 내놓은 식당 건물은 10개월도 더 됐는데 아직도 안 나가고 있어. 이 동네는 봉제가 중심이지. 봉제가 죽으면 지게꾼이고 용달꾼이고 오토바이꾼이고 다 같이 죽는 거지.”

파괴되는 것은 일자리만이 아니다. 평소엔 사슬처럼 엮여있는 듯한 가족도 경제적 시련 앞에선 실밥처럼 뜯겨져 나간다. 22년째 창신동 공장에 다니고 있는 김아무개(53)씨는 8년전 아내가 빚 때문에 집을 나갔다. “아내가 사라지자 매일 밥대신 소주 5병만 마셨다”는 김씨는 그래도 딸 하나를 바라보고 마음을 다잡고 재봉틀 앞에 앉았다고 했다. 그러나 그처럼 악착같이 일하는 그도 다섯달째 월급을 못 받고 저축한 돈을 까먹으며 지내고 있다.

창신·숭인동 일대 83만9966㎡가 3차뉴타운 후보지로 지정된 것도 봉제공장 사람들을 우울하게 만든다. 아파트 중심 재개발이 진행될 경우 그렇잖아도 경쟁력을 잃어 허덕이는 창신동 봉제업은 해체가 가속화될 것으로 보인다.

이임자 산업연구원 전문연구원은 “2003년도 조사를 기준으로 할 때 창신동 일대는 서울의 봉제업체 전체 가운데 9~10%가 몰려 있다”며 “창신동이 세계화와 개발에아무런 전략없이 무방비로 해체돼간다면 우리나라 의류산업을 이끌어온 인력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안타까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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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신동의 어제와 오늘… 동대문시장 끼고 패션메카 성장
조기원 기자  이주현 기자 

 
전문생산자 네트워크로 거듭나야

창신동엔 왜 봉제공장들이 몰려들게 되었을까? 뿌리는 청계천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70년대 평화·통일·동화시장을 축으로 한 청계천 일대의 의류공장은 우리나라 전체 기성복 물량의 70%를 소화할 만큼 번창했다. 하지만 청계천의 번영은 어린 노동자들의 저임금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전태일이 70년에 평화시장 실태를 조사한 결과를 보면 노동자들은 한 달에 두 차례만 쉬며 하루 12~13시간씩 일했다.

그러나 이런 청계천 공장은 70년대 말부터 창신·신당동 등으로 흩어졌다. 기성복 시장의 주도권을 대기업에 빼앗긴데다 노조활동 때문에 저임금·장시간 노동을 유지하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동대문시장에서 가장 가까운 창신·숭인동이 봉제공장의 새로운 메카로 떠올랐다. 79~80년 동대문 일대엔 제일평화시장, 동평화시장, 흥인시장, 광희시장 등이 잇따라 문을 열었다. 동대문시장은 남대문의 의류 원단·부자재 시장까지 흡수해 옷을 만드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갖춘 장소가 됐다. 동대문과 가까운 창신동은 원료를 공급받아 바로 다음날 납품하는 이점을 누렸다.

뉴타운 개발되면 설자리 잃어

숭인동에서 20여 년째 재단사로 일하는 최명주(53)씨는 “90년대 초반까지는 설·추석 빼고는 계속 공장을 돌렸다. 한때는 이곳 미싱사 월급이 공무원 월급 갑절 이상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90년대 중반 중국 등에서 값싼 제품이 밀려들며 창신동도 침체에 빠져들었다. 창신동 봉제산업을 옥죄는 건 또 있다. 지난해 8월 서울시는 창신동 일대를 3차 뉴타운 후보지로 선정했다. 창신동 주민들이 찬성파와 반대파로 나뉘어 목소리를 거세게 높이고 있어, 이곳은 아직 지구 지정 절차를 밟지 못하고 있다.

문제는 뉴타운을 둘러싼 찬반 논란에서 봉제공장에 대한 논의는 끼어들 틈이 없다는 것이다. 봉제업자들은 대부분 세들어 있다. 기존 뉴타운 사업처럼 이곳도 주거형으로 개발되면 창신동 밖으로 나가야 한다. 창신동의 공장들이 없어지는 것은 단지 노후한 주거지가 깔끔한 아파트로 바뀌는 것이 아니라, 비록 영세했을 지라도 하나의 산업 클러스터가 사라지는 것이고 도시 고용이 위축되는 것이며 도시 서민이 빈민으로 추락하는 것을 뜻한다.

“패션 생산기지 계획 관리를”

강우원 세종대사이버대학교 부동산경영대학장은 “창신동은 동대문의류상가 등 도시의 패션을 뒷받침하는 생산기능을 담당하고 있다”며 “도심지역을 지원하는 대표적인 점이지역으로 볼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이러한 점이지역이 노후화됐다고 해서 기존 기능을 없애버리는 게 아니라 점이지역의 기능을 어떻게 배분할 것인지 계획적 관리를 해야 도심이 활성화된다”고 지적했다.

이우관 한성대 교수(경영학)는 “창신동은 재고를 최소화하는, 그때 그때 빨리 값싸게 생산하는 시스템으로 커왔으나 이는 결국 값싼 노동력에 의지해야 하기 때문에 본질적인 한계가 있다”며 “소규모 생산자들이 네트워크를 만들고 기획능력을 갖춰야 봉제공장들이 창신동을 떠나더라도 생존의 활로를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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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닥다닥 14평 공장…패션시장의 새벽을 밝힌다
조기원 기자  

최명주-홍금례씨 부부의 24시

창신·숭인동의 하루는 ‘드르륵’ 거리는 재봉틀 소리와 함께 돌아간다. 좁은 골목을 따라 벌집처럼 붙어있는 다세대주택마다 하루만에 옷을 ‘뚝딱’ 만들어내는 가내 공장들이 가득 들어차 있다. 평범한 주택가처럼 보이지만 안을 들여다보면 어김없이 공장들이다. 숭인동에 있는 최명주(53)씨 공장도 그 가운데 하나다.

AM 9:00~

최씨 공장이 문을 연다. 미싱사는 부인 홍금례(49)씨 혼자다.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와 16살 때부터 재봉틀을 밟았다. 33년째다. 홍씨는 “한 벌 당 공임이 4천원(봉제 2천원+재단 2천원)인데, 먹고 살려면 우리 공장에서 하루 40벌은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곳 공장들은 청바지·숙녀복·아동복 등 저마다 전문 품목이 있다. 최씨네는 중년 여성 윗도리가 전문이다. 여름엔 남방, 겨울엔 점퍼를 만든다.

안감 달기→주머니 박기→어깨선 박기→소맷단 달기→옆솔기 박기→깃 달기로 이어지는 모든 공정을 홍씨와 미싱보조 최성순(49)씨가 익숙하게 해낸다. 디자인과 재단은 남편 최씨의 몫이다. 재단사는 대부분 남자들이다. 최씨도 1980년대 초 학원에서 재단을 배웠다. 카탈로그와 옆 매장 옷들을 두루 참고해 디자인과 재단을 한다.

그러나 유행이 눈 깜짝할 사이 바뀌는 캐주얼은 전문 디자이너가 있어야 한다. 이들 ‘디자이너’는 하루에 옷을 몇 벌 만들지 공장 사장과 협의해 결정한다. 캐주얼은 유명 연예인이 한번 입고 나온 옷을 그 다음날 바로 지어낼 수 있을 만큼 기동성도 있어야 한다. 이렇게 유행을 탄 옷은 늦어도 이틀이면 동대문 전체에 쫙 퍼진다. 중년 여성복 옷 도매 수익이 15% 수준이면, 캐주얼은 40%가 넘는다. 그러나 재고가 많고, 올해 인기있는 디자인은 다음해엔 통하지 않기 때문에 위험부담이 높다.

PM 8:00~

해가 저물면 옷은 온전한 모양새를 드러낸다. 남은 것은 단추 달기와 다림질 뿐. 이런 마무리 작업은 보통 ‘시아게집’이라 불리는 끝손질집에 맡긴다. 하지만 최씨는 직접 한다. 한 벌당 1500원씩인 공임도 아깝지만, 저녁 때 한꺼번에 물량이 몰리는 시아게집의 품질도 만족스럽지 못한 탓이다. 최씨는 ‘시루시’(단춧구멍을 내는 작업)를 하고 단추를 다는가 싶더니, 금방 끝내고 한쪽 구석의 다림질 방으로 옷들을 싸들고 간다.

끝손질 집에선 한 벌 당 1분이면 끝나지만, 꼼꼼하게 하느라 시간이 세 곱은 걸린다고 했다. 도매시장이 문을 여는 밤 10시께까지 매장으로 물건을 나르려면 밥 먹을 시간도 없다. 물건을 갖다 준 뒤에야 동네사람들과 저녁 식사를 들며 소주 한 잔을 걸친다.

AM 4:00~

평화시장 가는 길목은 관광버스로 가득 차 있다. 지방에서 올라온 소매상들이 타고온 차다. 길이 꽉 막혀 있는 일도 많아 이곳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오토바이를 이용한다. 최씨의 매장은 도매상들이 밀집해 있는 구평화시장 4층. 건너편에는 두타, 밀리오레 등 젊은이들이 즐겨 찾는 소매업소들이 모여 있다. 최씨 매장은 딸 이름을 딴 ‘은아패션’. 주로 지방에서 올라온 중간도매상과 소매상들과 주로 거래한다. 낮 동안 미싱사였던 부인 홍씨는 이번엔 밤 10시부터 새벽 4시까지 가게를 지킨다.

새벽에는 원단 영업사원들이 도매상을 한바퀴 도는데, 때때로 날이 훤해지도록 이들을 기다린다. 원단을 조금이라도 싸게 사려는 수고를 마다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침이 밝기 전에 관광버스들은 동대문을 떠난다. 곱절로 길었던 창신동도 다시 하루를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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