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UN군 사령부(장면 정부 지지만 할 뿐 행동은 없음), 장도영(오후4시30분에 수락), 윤보선(오후 10시에 특별담화), 장면 갈팡질팡
- 전두환(ROTC교관으로서 지지)
- 수도경비사령부 설치
- 이한림 체포
- 육사생도 지지시위
- 장도영이 장면 찾아가서 설득. 국무회의에서 수락.
- 군사혁명위원회가 민주당 각료들을 체포. 장도영과 불협화음이 시작됨.
- 국가재건최고회의(입법, 사법, 행정 총괄), 장도영은 최고회의장, 국방장관, 참모총장, 계엄사령관직 겸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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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폭력조직 일소(4,200명), 반체제인사(2,100명)
- 군사혁명위원회가 국가재건최고회의로 전환. 민심수습책으로 땐스광(?) 최고 1년까지의 징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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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2월 7일 (일) / 제 1 회

<인간 박정희 上>

1917년  경북  선산군  구미면  상모리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
난  인간  박정희는  가난과  왜소한  신체에  콤플렉스를 느끼며 
생활을  한다. 가슴속에  한을  품고  살아가던  그는 응어리진  한
을  대야망으로  설계하면서  교직을  그만두고  만주군관학교에 
들어간다. 해방  이듬해, 북경의  해방광복군에 있던  그는  개인자
격으로  서울로  돌아와  남조선경비사관학교 2기생으로  입교하는
데  곧  대구폭동사건이  발생하고, 그때 그가  가장  따랐던  셋째
형(상희)이  현장에서  경찰의  총에 맞아  사망한다. 1947년  사관
학교를  졸업하고  육군소위로 임관한  뒤  남로당과  관계를  맺
어  군복을  벗었다가 6.25 가  터지자  현역으로  복귀하여 1950년
7월  육본  전투 정보과장으로  발령받고  후배  김종필,석정선,이
영근  등을 불러'2.26사건  시말기'란  책을  건네주고  쿠데타를 
계획 한다. 또한  일생동안  부부의  연을  맺었던  세여자(김호남,
이여인,육영수)와의  결혼생활  모습

1993년 2월 21일 (일) / 제 3 회

<5.16쿠데타>

치밀한 사전모의에도 불구하고  거사계획은  탄로나고, 박정희는
술취한 채 쿠데타를 지휘한다. 육참총장 장도영의 소극적인 쿠데
타 저지와 장면총리의 피신으로 마침내 쿠데타군은 무혈로 서울
을 점령하고 6개항의 혁명공약을 발표한다.

1993년 2월 28일 (일) / 제 4 회

'군사혁명위원회 의장 장도영'
 
미8군사령관  매그루더와  미국대리대사  마샬그린의  쿠데타
반대성명  발표. 수녀원에  숨어버린  국무총리  장면. 사태
수습에  갈팡질팡하는  육참총장  장도영. 혼란의  와중에서
제1군사령관  이한림장군외  체포와  장면내각의  총사퇴로
장도영을  전면에  내세운  군부는  입법,사법,행정 3부를
장악한다.

1993년 3월 7일 (일) / 제 5 회

'군사정부  출범'

국가재건최고회의와 혁명내각 구성으로 본격적으로 출범한 군사
정부. 대통령 윤보선의 하야발표와 번의.최고위원 선정을 둘러싼 
혁명 주체세력간의 갈등. 5.16직후의 혼란 속에서 부패한 구정권
을 비판했던 혁명주체들도 점차 권력의 맛에 탐닉되기 시작하면
서 권력투쟁의 막이 오른다.

1993년 3월 14일 (일) / 제 6 회

'혁명,혁명과업'

혁명공약의 실천을 위한 군사정부의 활동. 투서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는 이후락, 김종필에 의해 골격을 갖추어가는 중앙정보부.
깊어만가는 2기와 3기의 불화속에 장도영은 일방적인 행동으로 
혁명주체들의 눈밖에 나게되고, 장동영을 견제하려는 비상조치법
이 기초되면서 장도영과 박정희의 불화는 깊어진다.

1993년 3월 21일 (일) / 제 7 회 

'장도영 거세'

비상조치법으로 군통수권을 잃어버린 장도영은 분노를 폭발시키
는데, 이 사실은 거세의 빌미를 제공하게 된다. 중앙정보부법이 
통과되고, 김종필의 5기생에 대한 견제가 극에 달하자 5기생을
중심으로 김종필 제거작전이 은밀히 진행되지만, 결국 반혁명모의
죄로 장도영과 5기생들은 체포되고 만다.

1993년 3월 28일 (일) / 제 8 회 

'박정희시대  개막'

최고회의의장에 취임하면서 18년 박정희시대의 막을 연 박정희.
불만세력 제거로 권력 내부의 문제를 정리한 뒤 본격적인 국내 및
대외정책을 추진해 나간다. 화진포의 한미회담 등으로 국제관계 
개선을 도모하는 한편, 8.12 성명을 발표하여 민정이양을 약속하
는 등 활발한 활동을 전개해 나간다.

1993년 4월 4일 (일) / 제 9 회 

'남북대화, 그리고 황태성'

5.16직후,서해의 용매도에서 극비리에 진행됐던 남북 비밀회담. 인
사교류,문화교류 등의 의제로 4차회담까지 진행한다. 한편,북한은
통일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과거 박정희와 절친했던 황태성을 내려
보내기도 하지만, 남북한의 입장차이로 남북회담은 결국 중단되
고, 황태성은 간첩죄로 처형당하고  만다.

1993년 4월 11일 (일) / 제 10 회 

'군사정권  외교'

박정희는 그동안 교착상태에 빠졌던 한일관계, 5.16 소원해졌던 
한미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일본과 미국을 방문한다. 일본을 방문
한 박정희는 공식석상에서 유창한 일본말을 구사하는가 하면 요정
에서 자민당 간부들에게 큰절을 하기도 하는 등 상례를 벗어난 행
동을 한다. 또 미국에서는 케네디에게 월남 파병을 먼저 제의해 파
문을 일으키는데...
그 와중에서 극비리에 통화개혁이 준비된다.

1993년 4월 18일 (일) / 제 11 회

'공화당 사전조직과 증권파동'
 
박정희는 구정치인의 정치활동을 일체 금지하고있던 기간중 자신
은 민정이양에 대비해 극비리에 정당을 사전조직한다. 정당조직 
자금 확보에 부심하던 김종필은 희대의 사기극으로 불리는 증권파
동과 이른바 4대 의혹사건을 일으켜 국민들의 지탄을 받는다.

1993년 4월 25일 (일) / 제 12 회

'통화개혁과 대통령 직선제 개헌'
 
제 2차 통화개혁을 위한 화폐가 극비리에 부산항에 도착한다. 경제
개발과 정치자금 확보를 위해 장농속에 감추어져 있는 돈을 끄집
어 내겠다는 의도였으나 미국의 반발과 국민들의 원성만 샀을뿐
소득없이 끝나고 만다. 한편 민정이양을 위한 직선제 개헌안이
국민투표에 의해 통과되면서 권력내부에서는 민정 참여파와 원대
복귀파 사이의 갈등이 심각해진다.

1993년 5월 2일 (일) / 제 13 회

'2.18 (이일팔) 성명'

정치활동이 재개되면서 이른바 구정치인들은 선제의 기치를 내걸
고 대통령후보의 단일화를 모색한다. 그동안 극비리에 사전조직됐
던 공화당은 김종필을 중심으로하여 전면에 드러나지만 여전히 원
대복귀를 주장하는 군정내부의 반김종필계에 의해 심각한 내분양
상을 보인다. 군부는 박정희에게 실력행사로서 민정불참을 압박하
고 마침내 박정희는 2.18 민정불참성명을 발표한다.

1993년 5월 9일 (일) / 제 14 회

'김종필의 외유와 군정연장 음모'
 
4대 의혹사건에 대한 국민의 비난, 그리고 혁명주체들의 반발을 견
디다 못한 김종필은 급기야 자의반 타의반 외유길에 오른다.
김종필 없는 공화당이 휘청거리고 있을때 박정희는 군과 정치인
한자리에 모아놓고 혁명과업을 계승하겠다는 선서식을 하게한다.
이자리에서 박정희는 민정불참을 다시 한번 천명했으나 쿠데타사
건을 조작하고 현역군인의 데모를 연출하는 술수를 보이더니 마침
내 군정연장 성명을 발표하고 만다.

1993년 5월 16일 (일) / 제 15 회

'백조그릴 위장 약혼식 사건'
 
군정연장 성명에 대한 반발이 극심해지자 박정희는 조야 영수회담
을 열어 사태를 수습해 보려하나 감정대립만한채 결렬되고 만다.
그동안 박정희의 민정참여를 반대하던 군은 태도를 바꿔 지프 시
위를 벌이면서 박정의의 군정연장을 지지하고 나서자 야당은 약혼
식을 가장한 데모를 벌이는 등 투쟁에 나서고 박정희는 결국 군정
연장을 번의하고 만다.

1993년 5월 23일 (일) / 제 16 회

'범탕작전과 친위 쿠데타'

군정연장을 번의한 박정희는 이번에는 민정참여를위한 본격적인
공작에 들어간다. 이재만이라는 인물의 두뇌를 빌어 대항세력의
와해를 위해 범탕이라고 불리던 범국민당의 조직에 나선다.

한편 노태우, 전두환 등 육사 11기생들은 김종필계의 제거를 위한
쿠데타를 모의하나 실패로 끝나고 이 사건으로 범탕작전의 산파였
던 김재준은 물러나게 된다. 범탕의 이용가치가 없어지자 박정희
는 군복을 벗고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나선다.

1993년 5월 30일 (일) / 제 17 회

'김형욱의 대통령 당선 작전'

그동안 난립해 있던 야당은 대통령선거를 목전에 두고 후보단일화
를 꾀하나 단일야당 국민의 당은 창당대회에서 난투극으로 끝을
맺고 만다. 그런 가운데 박정희는 밀가루 무상배포 등 선심공세를
펴는 등 본격적인 대선 작전에 나선다. 박정희와 윤보선으로 압축
된 5대 대통령 선거는 박정희의 사상논쟁과 윤보선의 5.16 사전 내
통설이 중요한 쟁점으로 부각되는데 결국 박정희는 의심쩍은 호남
지역 몰표에 힘입어 윤보선에 신승을 하고 대통령에 당선된다.

1993년 6월 5일 (일) / 제 18 회

'정치자금 정치공작' 

제 3공화국은 출범했으나 윤보선은 부정선거를 이유로 자신이야말
로 정당한 대통령이라고 주장한다. 한편 김형욱은 야당거물 유진
산에게 거액의 정치자금을 제공하는 등 정치공작의 술수를 발휘하
고, 여당은 정치자금 마련을 위해 삼분폭리 사건과 국유용지 불정
불하사건을 일으켜 국회에서 크게 논란이 된다.

김형욱은 사건을 무마하기 위해 야당의원 유창열을 고문하는 등
갖은 방법을 다 사용한다.

1993년 6월 13일 (일) / 제 19 회

'6.3 사태, 上 '
 
정치자금과 경제개발 자금의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던 박정희
는 한일회담을 타결짓고 그 청구권 자금으로 돌파구를 찾고자 국
민들의 반발을 무릅쓰고 회담 강행에 나선다. 그동안 군사정권의 
위압에 눌려 지내던 학생들은 매국적 굴욕외교 반대를 외치며 4.19
이후 최대규모의 시위를 벌인다. 한일회담 타결을 위해 일본을  방
문한 김종필은 국내의 거센 반대데모 때문에 서둘러 귀국하고, 한
편 국내에서는 김종필을 제거하기 위한 모종의 계획이 수립되기
도 한다.

1993년 6월 20일 (일) / 제 20 회

'6.3 사태, 下'

김종필. 오히라 데모토 한일 양국이 국교정상화에 대한 실질적인 
협의를 보자, 국민들은 고작 청구권 3억불로 36년간 일본의 수탈
을 묻어버렸다고 격렬하게 들고 일어났다. 대학가의 데모는 민족
적 민주주의의 장례식으로 정점에 달하고, 중앙정보부는 학원사찰
을 통해 대학에 대한 감시를 강화한다. 정부는 국민들의 입을 봉쇄
하기 위해 계엄령을 선포한다.

1993년 6월 27일 (일) / 제 21 회

'진산파동' 
 
계엄사태의 책임을 언론에 돌리고 있던 박정권은 동아일보에 무장
군인을 난입하는 사태를 만든다. 제도적으로 언론을 규제하기위
한 언론윤리위원회법이 정부에 의해 제안되는데 야당은 법 반대
를 위한 극한 투쟁을 선언했다가 막상 국회에서 표결에 붙이자 슬
그머니 퇴장해버리는 수상쩍은 태도를 보인다. 법 철폐를 위해 언
론계는 극한 투쟁을 선언하고, 마침내 박정희는 법시행의 전면 유
보를 발효한다.

한편 야당은 언론법 통과시 유진산과 여당의 묵계설로 심한 갈등
을 겪는데 결국 윤보선은 진산을 당에서 제명시키고 만다.

1993년 7월 4일 (일) / 제 22 회

'월남파병'
 
청구권 문제를 둘러싼 굴욕적인 한일회담을 반대하는 데모가 전국
을 휘몰아치던 1964년 겨울, 박정희는 비밀리에 월남파병 계획을
추진한다. 외무부장관 이동원을 앞세워 미국에 파병에 따른 선결
조건을 제시하지만 미국의 반대에 부딪치자 박정희는 차지철로 하
여금 여당내에 파병 반대를 선동하라는 전략적인 지령을 내린다.
시위 도중 사망한 한 학생의 시위 도중 사망한 한 학생의 죽음은
정계에 엄청난 파급을 가져오고 야당은 결사의 투쟁을 전개한다.
그러나, 공화당은 여당일당국회를 통해 한일협정 비준동의안과
월남파병 동의안을 통과시키고 위수령을 발동, 군대의 힘으로 국
민적 저항을 억누르고 만다.

1993년 7월 11일 (일) / 제 23 회

'김두한과 사카린 밀수사건' 
 
부총리실 캐비넷에서 나온 귀금속들로 중정부장  김형욱은  고위 
공직자  기강 운운하고  한편으론  이후락, 김성곤  등과 정치자
금  모금에  몰두한다. 김종필의 생일잔치에서  공무원의  요정  출
입  문제로 김종필계는  박정희에게  심하게  반발하고 이에  박정
희는  대노한다.정치자금  헌납과 맞물려  삼성의  한국비료사건
과  사카린 밀수사건은  터지고  야당은  정경유착이라고 규탄하
며  철저한  규명을  요구한다. 삼성의 밀수사건  대정부  질의에 
나선  김두한은 국무위원들에게  오물을  투척하는  해프닝을 벌이
고  궁지에  몰린  박정희는  삼성의 이병철에게  한국  비료의  국
가헌납을  강요한다.

1993년 7월 18일 (일) / 제 24 회

'3선 개헌' 
 
3선개헌은  결코  하지않을  것이라는 박정희의  발언에도  불구하
고  공화당은 이후락, 김형욱을  중심으로 3선개헌의 준비작업에 
몰두한다. 김종필을  차기 대통령으로  옹립하려는  친JP계의 복지
회사건으로  김종필은  궁지에  몰리고 일부  공화당  의원들은  정
치생명을  건 개헌저지투쟁을  벌인다.신민당은  재야와 재야와 
연계해서 3선개헌  반대  범국민투위를 구성하여  전국적인  저지
투쟁을  전개하지만 공화당은  국회  제3별관에서  단독으로 날치
기  통과시킨다.

1993년 7월 25일 (일) / 제 25 회

'40대 기수론'
 
박정희의 3선개헌에 절대적으로 공헌한 이후락과 김형욱은 권력
형 축재로 전격적인 해임을 당한다. 신민당의 김영삼, 김대중, 이
철승은 40대 기수론을 주장하며 신민당 대통령 후보 지명전에 출
마하고 야당중진들의 거센 반발에 직면한 신민당수 유진산은 자신
의 후보 출마문제로 고민한다.

한편, 박정희는 중정부장 김계원에게 유진산을 신민당 대통령 후
보로 만들 공작을 지시하고, 번민하던 유진산은 마침내 김영삼을 
후보로 이에 열세에 놓인 김대중은 이철승을 포섭, 대역전극을 연
출하며 신민당 후보로 당선된다.

1993년 8월 1일 (일) / 제 26 회

'유신전야' (마지막회) 
 
중앙정보부장 이후락의 공작과 거대한 물량공세로 3선에 성공한 
박정희는 자신의 영구집권을 위한 개헌을 구상한다. 국무총리에
임명된 김종필을 견제하던 공화당의 김성곤, 백남억등이 JP계인
내무장관 오치성의 해임건의안을 통과시키자 박정희는 중정을 통
해 이들을 잡아들인다.

정계에 국회해산, 친여쿠데타 루머가 무성한 가운데 중정부장 이
후락은 비밀리에 북한을 방문하고 이후락의 건의로 박정희는 남북
적십자회담을 전개, 마침내 7.4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른
다. 궁정동 안가에서 비밀리에 제정중이던 소위 유신헌,1972.10.
17 박정희는 헌법을 정지시키고 비상계엄을 선포하고야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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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1.09 테러에서 3500명 사망
- 2001.10 아프가니스탄 침공, 반테러법 제정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정권은 2달만에 붕괴. 민간인 5000명 사망.
- 2002 조국안보부 신설(연간 380억달러)

- 911 테러 이후 지지율이 91%까지 상승
- 미국 내 무슬림 800만. 아랍인은 300만. 해고, 방화, 살인(9), 폭행(200건), 구속(1500여명), 추방에 노출됨.
- 발가벗겨지고, 식사도 제대로 지급되지 않음. 면회도 되지 않음 (반테러법 : 용의자 7일까지 구금, 외국인 추방, 전화 이메일 감청, 개인정보를 정보기관이 공유, 수많은 카메라 설치, 투시카메라, 등에 의거)
- 인권단체까지 감시

- 애국심 열풍: 휘트니 휴스턴 '성조기여 영원하라', 역대 대통령을 비롯한 애국심 서적 출판, 성조기 패션 유행

- 아프가니스탄 민간인 사망에 대해서, 언론과 정부는 침묵함.
- 국방성의 보도통제 및 애국심 때문. 행정부 대변인 "미국인들이 지켜보고 있으니 언론은 조심하라."
- FOX 루퍼트 머독 "나는 이윤을 위해 미디어를 경영한다. 존경받기 위해 경영하지 않는다." 스타 폭스 뉴욕포스트 타임, 등 50여개국 800여개 언론사 300억달러의(30조) 자산 소유

- 이라크 전쟁에 대해서는 회의적, 유럽 일본 중국 러시아 등도 반대기류.
- 미국 내 이스라엘 사람들의 로비의 영향. 부시(텍사스 석유회사 하켄), 체니(석유회사 핼리버튼), 럼즈펠드 국방장관(방위산업체 레이시온, 노드롭 주식 소유), 존 애쉬크로프트 법무장관(기독교 보수주의자, 흑인 판사 임명 반대한 인종주의자)

- 조국안보부 이후 최고의 국방예산(500조까지, 예년에는 300조) 레이건 이후 사상 최대. 러시아 중국 프랑스 국방예산을 합한 것 보다 많음.

* WASP (White Anglo-Sexon Per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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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유의 여신상: 1886년 미국 독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프랑스 공화주의자들이 선물. (당시 프랑스는 왕정과 공화정이 번갈아가면서 수립) 처음 미국인들은 달가워하지 않았음. 퓰리처의 강력한 캠페인으로 수용.

- 1849년: 캘리포니아 골드러쉬로 많은 중국인들이 이전
- 중국 이민자들에 대해 악의적인 선동. 여자들은 매춘을 한다는 이유로 입국 거부. 1882년 중국인 배제법. (일자리에 대한 노동조합 이기주의)
- 1880년대부터 급격하게 밀려온 이민자들을 하층민 취급.
- 인종의 용광로 : 이주민들에게 백인 미국인이 되라는 인종주의의 표현. KKK등, 슬라브, 아시아, 라틴, 유대인을 열등하다고 취급. 혈통 지키기 계획 및 표준 미국인 제정. 우생학자들이 로비.
-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사회주의자들로 의심되는 외국인들을 추방.
- 1924년 국적별 이민제한법. 강제불임시술법(사회적으로 부적합한 아이를 막기위해) 제정. 6만명 시술.
- 1941년 진주만 폭격 이후 12만 일본계 미국인들을 수용소에 수용. 1990년에서야 비로소 보상금과 유감표명.
- 1960년 이민법 재개정.
- 2001년 911테러 이후, 이슬람계 이민자들은 다시 차별.

-----------------

- UN 경제제재: 약과 치료장비가 없어 병원에서도 치료받지 못함.
- 걸프전: 하이테크 병기의 실험장(800톤의 우라늄 사용). 근처의 암 발생률을 높임.

- 후세인은 전쟁 직전 협상을 제안하고 UN이 수락. 그러나, 미국이 거부.
- 중앙아시아(우즈베키스탄, 등)에 미군기지 설립과 송유관 개통(01.11)
- 동쪽 13개주 > 루지애나, 알래스카, 하와이 매입 > 필리핀, 괌

- 엘살바도르 독재정권 지원: 대주교 로메로 암살
- 파나마 노리에가 장군: 독자 정책 추진하다 붕괴
- 니카라과: 산디니스타 정권 붕괴
- 콰테말라
- 스쿨 오브 아메리카: 남미 군인 양성소 (파나마의 노리에가, 볼리비아의 휴고 반세르, 엘살바도르의 로메로 주교 암살자, 콰테말라의 알프레도)

- 냉전 이후 군수산업업체들 합병
- 국방예산 냉전 이전 4000억 달러에서 줄었다가 다시 증가 (미국 다음의 15개국의 국방비 합친 것 보다 많음)
- 군수산업 빅3: 록히드 마틴, 보잉, 레이시온 "군수산업 자체가 곧 미국이다!" 린 체니(록히드 마틴 이사), 폴 월포위츠(노스롭 그루먼 고문), 고든 잉글랜드 해군성 장관(제너럴 다이내믹스), 등 국방부와 군수산업 임원을 돌아가며 차지
- 칼라일펀드: 역대 미국 대통령을 임원으로 두고 영향력 행사. 한미은행 주식 인수.
- 무기시장 점유율: 미국 48% - 러시아- 영국 - 프랑스
- 무기수입: 대만 - 중국 - 사우디 - 인도 - 그리스 - 터키 - 한국
- FX사업에서의 미국의 압력

-----------------

- 100만 어머니들의 행사: 총기 규제를 요구
- 총기사고 한해 3만여명이 사망, 10만여명이 부상
- 18세 이상이면 총을 구입할 수 있다.
- 미국 가정의 45%가 총기 소유. 75%는 총기소유에 찬성
- 암거래 40% 이상
- 외국인들의 총기피해는 미국의 총문화를 모르기 때문 (스스로 자신을 방어하는 문화)
- 68년 총기규제 법안: 총기 구입 연령대를 낮추는 것 / 94년 브래디 법안: 구입자의 신원조회(7년 소요) / 99년 로텐버그 법안: 신원조회 및 잠금장치
- NRA(전미총기협회): 350만 회원. 총기 제조업체들의 지원 아래 막대한 로비.
- 1700년대 수정헌법에서 총기소유 인정 (연방 정부의 전횡을 견제할 목적) - 서부개척시대 - 남북전쟁 거치며 총이 대대적으로 확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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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국민의 절반이 자원봉사에 참여: 1억 940만명 (정규직 직원 9백만명의 효과)
- 하버드 내 자원봉사단체 PBHA: 80여개 프로그램, 주로 저소득층 학생 교육
- 노인들의 자원봉사 일상화되어 있음.

- 남북전쟁 거치며 자원봉사단체 결성
- 1961년 케네디가 평화봉사단(국가 주도의 봉사) 조직한 이후, 존슨 VISTA, 닉슨 ACTION, 부시 POLF(촛불재단) 클린턴 AMERICORPS 을 조직.

- 대학이나 기업에서도 자원봉사 경력을 요구
- IBM: 봉사 프로그램을 통해 경제적 이득을 얻음. 멘토링 프로그램.

- 기부의 일상화
- 운동선수들의 재단설립
- 재산가들의 재단설립: MS 멜린다 재단 * 여론의 비난을 무마시키기 위한 수단이라는 의혹

- 조지 소로스, 워렌 버핏과 같은 자산가들이 상속세 폐지에 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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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EY Academy (차터스쿨: 민간이 설립하지만 공공자금 지원, 더 많은 자율권이 있음. 전국의 공립학교의 15% 2400여개)
- 더 많이 더 재밌게 공부. 수업시간 교사의 급료를 교장이 결정.
- 학생 수업시간 연장 토요일도 등교, 교사도 15시간 이상 근무.
- 교육법안: 교육목표 미달성시 다른 학교 전학이나, 교장 교사 구조조정 가능

- 바우처 시스템: 공사립을 불문하고 학생이 다니는 학교의 교육비를 지원해주는 시스템. 단, 학비의 일부분만을 지원하기 때문에 종교계 사립학교에만 몰려.
- 바우처 반대: 공교육 예산 감소.

- 1957년 소련 스푸트니크위성 발사 이후 교육과정 변화
- 1983년 <위기에 처한 국가>: 80년대 초반은 증가하는 일본의 경제력으로 미국 산업의 경쟁력이 떨어지기 시작했고, 권력자들은 이것을 교육의 문제로 돌려.

- 표준학력시험으로 학교의 순위를 정하고 그에 따라 학생들의 타학교 선택이 가능
- 규격화된 평가 대신 자체적인 평가를 중요시하는 반대흐름도 존재
- 재산세 > 주정부. 따라서, 주정부 예산에 의존하는 공교육은 빈부격차가 존재.

-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기업이 인수하거나, 다른 주정부로 행정권 이양.
- 민영화 이후에 안전 관련 인원 감축
- '물질적 재산과 점수차이'에서 미국이 1위 "학교가 실패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학교와 교사를 실패하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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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종비율: 백인계 70 흑인계 12 중남미 12 아시아 3
- 흑인 게토지역은 기업이 없고 일자리도 없으며 경제수준이 방글라데시보다 못함
"인종의 샐러드"

- 1862년 노예해방
- 1955년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은 로사 파커가 경찰에 체포
- 1961년 케네디 Affirmative Action 으로 고용에서의 인종차별을 금지
- 1963년 워싱턴 대행진
- 1964년 민권법 공표: 공공장소, 고용에서의 인종차별 금지
- 존슨의 약자보호조치: 특혜를 주는 것
- 로드니 킹 사건, 도노반 잭슨 사건
- 1992년 LA폭동
- 1995년 캘리포니아주에서 약자보호조치 폐지 (1990년대초 경제위기의 책임을 전가) 17개주로 확산

약자보호조치
- 대학입학시, 채용시, 공사계약시 특혜
- 인종 뿐 아니라 여성, 장애인, 등
* 과거에는 소수민족에게 고등교육의 기회 부여하지 않아

백인들의 역차별 반대
- 약자 보호는 평등한 개인에 대한 권리 침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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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악관과 헐리우드의 밀약: FBI는 영화 <Sum of all fears> 개봉에 맞추어 아랍계 미국인을 체포 (정치보좌관 칼 로브 - 영화협회회장)
- <위 워 솔저스> 백악관에서 시사회, <블랙 호크 다운> 에는 럼즈펠드가 참석, 펜타곤의 지원.

- 1941년 진주만 침공 이후 미국이 참전을 결정. 결정 후 7주 만에 새 영화가 출시.
- 위문공연, 홍보영화, 등으로 참여. <Wake Island> (전쟁홍보) <과달카날 다이어리> (전쟁에서의 낭만, 상영장에 모병부스까지 설치) <바탄> (다인종이 함께 싸우는 것)
- 헐리우드는 전쟁정보국에 동원. 영화에 대한 검열과 승인을 실시.
- 종전 후 헐리우드 사업가들에게 훈장을 수여

- 펜타곤 공보국 시청각특별위원회
- <탑건> <아마겟돈> <어퓨굿맨> <패튼 대전차 군단> <007 골든아이> <그린 베레> <붉은 시월> <에어 포스 원> <긴급명령> 등의 지원받음
- 1960년대 헐리우드 역시 반전 대열에 합류했을 때, 1968 <그린 베레> 존 웨인이 백악관에 베트남 참전 정당화하는 영화 제작과 지원 요구.
- <인디펜던스 데이> <아마겟돈> 펜타곤의 지원을 염두하고 시나리오 제작
- <탑건> 해군장교 지원율 500% 증가
- <진주만> 대형 항공모함을 진주만으로 옮겨옴
- <크림슨타이드> <커리지 앤 파이어> 등은 거부당함
- <롤스 오브 인게이지먼트> 아랍인들에 대한 인종차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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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맥도날드 > 버거킹, 웬디스
- 소비자의 감정지배: 음식 이상의 오락으로서의 의미

- 최초의 체인점 '화이트 캐슬'
- 2차 세계대전 후 자동차, 자판기, 등 속도 제일주의. 드라이브-인 시스템 도입
- 1948년 맥도날드가 셀프서비스, 포드시스템 방식 도입
- 1955년 레이 크락이 맥도날드에 프랜차이즈 도입. 로고 이름은 Speede.
- <맥도날드 매뉴얼> 맥도날드 햄버거는 조리가 아니라 조립되는 음식이었다.
- 애플파이, 에그맥머핀, 훌라버거, 빅맥
- 로날드 맥도날드: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마케팅 (캐릭터 상품 끼워팔기), 산타클로스와 같은 존재 - 가장 큰 소고기 돼지고기 소비업체, 장난감 배포업체
- 드라이브 스루를 도입.
- 일이 단순화 되면서 저임금 노동자를 고용 (청소년, 이민자, 노약자)
- 딱딱한 의자는 20분을 넘기지 못하도록 고안.

- 1980년대 중반 영국 그린피스 회원들에 의해 문제제기 시작
- 1989년 패스트푸드에 대한 공격
- 조제 보세가 1999년 트랙터로 맥도날드 습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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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방의 중동 억압 역사

민족해방운동에 대한 태도

시온주의와 아랍민족주의

중동문제의 진정한 해결책

걸프전 종전 10년

제2차 걸프전쟁의 교훈

이라크의 혁명적 경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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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구사범학교 졸업 후 보통학교 선생님
2. 만주군관학교
3. 해방
4. 군사학교
5. 형 박상희가 46년 10월항쟁으로 사망
6. 남로당 이재복과 관계맺고 위관급 장교 포섭
7. 46년 10월 여순사건 이후 숙군작업 하면서 특무대. 김창룡 대위에게 고문. 이중간첩으로 활용하기 위하여 미 군사고문단 하우스만이 박정희 석방 요청.
8. 박정희는 군내 남로당 조직을 밝혀 숙군작업에 공로
9. 625와 함께 장도영에 의해 복직
10. 낙동강 대치 상황에서 육영수와 맞선
11. 1950.12 육영수와 결혼하고 전투전선(9사단 참모장)으로 배치
12. 직선제 개헌안 부결 - 관제데모를 동원해서 국회의원 소환 움직임 <-> 내각책임제
13. 이용문ㆍ박정희 - 민주국민당 / 미국의 암묵적 동의 하의 쿠데타 추진, 장면 측에서는 반대
14. 계엄령 발동. 국회통근버스 헌병대에 연행. 발췌개헌안(직선제, 내각책임제 중 발췌) 변칙으로 통과 후 잠재워짐.
15. 준장에 이어 소장으로 진급 (김창룡과 대치)
16. 0508 쿠데타 계획은 0419 의거로 좌절. 박정희는 지휘관 정화론으로 스타가 됨. 송요찬에게 사퇴를 주문하자 체포 명령 내려
17. 16인 하극상 사건: 최영희 장군을 찾아가 육군의 위상 문제를 건의한 것이 빌미, 미8군 하우스만에서 박정희 예편시키려
18. 장도영의 도움으로 예편 모면하고 2군 부사령관으로 취임
19. 박정희를 비롯해 24명이 주도. 경찰국, 중앙청, 국회의사당, 민주당사, 방송국, 변전소, 마포형무소, 청와대, 탄약고, 연희송신소, 육군본부 장악 계획. 장도영은 미흡한 대처. 6군단 포병단 육군본부 - 해병대 한강철교 국무총리 집무실 - 공수여단
20. 쿠데타군 박종규와 미 CIA 한국담당자 실버와의 만남
21. 장면은 혜화동 칼멜수녀원으로 도피
22. 당일 발표는 장도영 이름으로 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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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세광과 육영수>

- 당시 수사발표는 총성이 아닌 것을 총성으로 하고, 두발의 총탄은 사라짐.

- (1) '조총련 정치부장 김호룡이 북괴의 사주를 받아 문세광에게 지시' 했다고 발표
(2) 버렸다고 한 총 두정 중 한정이 집에서 발견
- 김호룡이 기자회견했으나 한번도 조사받지 않음
- 문세광이 진술하기도 전에 수사본부 명의로 신문지상에 보도 (실제로는 수사본부가 발표한 적이 없음)

- 문세광: 재일교포 2세. 한국청년동맹 활동가. 한청 1등급 요주의 인물이 어떻게 귀국했는지.
- 입장 하루 전 청와대 경호실에서 경비완화를 요청
- 사건 일주일 전에 한국 남자가 전화를 받음
- 김종필이 중정에 나타나서 한국 남자에 대해서 함구할 것을 요청
- 사건 하루 전에 중정에서 문세광 숙소를 발견 / 815 D-day, 권총, 투쟁일기, 등 10종의 압수물을 들고 떠남.

- 저격을 지시했다는 사람, 입원처 알선했다는 사람, 등 거의 거짓으로 발표. 이 사건으로 인해 한청과 조총련은 큰 타격을 받음.

- 중정은 문세광의 영사관 폭파계획을 사전에 입수하고, 1년 동안 발표하지 않으면서, 마침내 민단계 신문 <통일일보>에 사주해서 만든 신문.

- 사건 1년 전 (문세광의 편지가 노출된 이후) 불쑥 한청을 찾아온 Y가 활동을 자원하면서 문세광과 친해짐. 그 후 문세광의 씀씀이가 달라짐. 그는 사건 직후 나오지 않음. (사건 1년 후에서 일본 언론에서 주목)
- 문세광은 병원 입원하면서 한청과 연락을 끊음.
- Y는 사건 2달 전 조직폭력배에게 총 구해달라고 함.

- 문세광은 가짜 일본여권, 일본경찰의 총 이용
- 경찰서에는 문세광의 발자국 아님. 지문도 발견되지 않음.
- 일본대사, 일본 자민당에서 특사 파견
- 연일 반일시위

- 꼭 1년 전에, 김대중 납치사건으로 인해 김종필 총리가 일본 방문.
- 김대중 사건 수사종결로 인해 일본 언론 논조 악화
- 외교적 처리 과정에서 입지가 넓어지고, 긴급조치 1, 4호 해제, 최종 수사발표와 문세광 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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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인 해직사건>

- 방송사 사주들이 불려가 방송사 포기각서를 쓰고 언론통폐함 이루어짐.
- TBC 동양방송은 고별방송을 함.

- 신군부의 보도지침. (보안사 이상재 준위가 주도)
- 기자협회에서 반대움직임(제작거부) 있자, 계엄확대조치.
- 80년 광주항쟁에서 언론은 침묵.
- 국보위 출범. 많은 언론인, 기자들이 대공분실에 끌려가 고초를 당함.

- 정관계 인사, 언론인, 젊은이들 대거 숙정. (김대중, 삼청교육대, 등등)
- 권정달 (민정당 사무총장 - 11, 12, 15대 국회의원 - 한나라당 당무의원 - 국민회의 부총재 - 새천년민주당 부총재 - 한국자유총연맹 총재), 이상재 (한나라당 지구당위원장), 허문도, 등이 실무분야 주도
- "사주들은 피해자가 아니라, 신군부에 영합한 가해자"

- 전두환 찬양의 시작
- 언론의 정관계 진출은 언론탄압 시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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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역비리>

원용수 준위의 수첩
병역비리의 대부 박노항 원사
김대업이 막혀있는 수사 도와 (병무 면제과정, 의학지식)
98년 병역비리 합동수사본부 (군/민간 검찰단)
군의관들의 자백을 받기위해 면책을 약속. 면책 약속 후 진술서.
99년 발표.
이명현 수사팀장이 외부의 압력이 아닌, 내부의 압력에 밀렸다고 탄원함. 고석 검찰부장-이명현 수사팀장의 갈등커짐. 김대업의 신분노출로 군의관의 지원 줄어듬.
관련 헌병이나 기무 기관원들의 압력에 의해 면책특권 폐지. 군의관들만 대거 처벌.
기무 기관원들이 김대업을 수사에서 배제시키기 위해 압력행사.
01년 기소된 김대업 구속. (채권채무관계에 의한 사기죄)
01년 박노항 구속으로 마무리.
시민단체에서 재수사 요청.
국회의원들은 기획수사라며 반발. 고위층 병역실명제 발의.
03년 1월. 이회창의 두 아들 병역비리 고발, 공무원 사칭으로 다시 구속.


12만 중 1/10이 병역면제
사회관심자원 - 지도층 인사, 재벌, 연예인

병원에서부터 시작(필름바꿔치기) - 알선(기무사, 헌병대, 병무청, 군의관) - 군의관

1970년대 중앙병무청 창설
석사장교제도(4개월 교육 2개월 전방근무 후 예비역 소위로 전역) 일시적 유지
90년대초 병역비리 늘어 대부분 강남의 부유층, 중산층까지 확대 (면제자 62%가 강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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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9의 진실>

민주와 화해를 위한 시국수습선언
"629는 속이구" 반쪽의 승리였다..

- 0413 호헌조치(직선제 개헌을 대통령 선거 이후에 하겠다는 것)
- 0500 박종철 고문치사 축소발표
- 0609 이한열 열사
- 0610 노태우 대통령후보 추대, 610대회 20개 도시 24만명 참여
호헌을 유지, 610대회 연행자 전부 구속, 국민운동본부에게 내란혐의
- 0610 김근태 고문폭로, 권인숙 성고문사건, 박종철
- 0615 명동성당 시위대 해산
- 0618 최루탄 추방대회, 민정수석이 직선제 수용 건의 "이거다. 노태우에게 내가 보냈다고 얘기해라."
노태우는 "내각제 얘기를 이미 했으니, 직선제 수용에 난색"
- 0618 철야시위
- 0619 군동원 검토. 출동준비 상태에서 출동중지명령. 안병호 당시 육본 작전처장이 군 내의 의사 밝힘.
- 0624 전두환 김영삼 여야 영수회담 회동과 결렬. 전두환 "직선제를 해도 이기지 않겠어?" 김대중 사면복권도 노태우에게 이양.
- 0626 야당의 장외투쟁
- 0629 노태우는 한국의 정치기적을 이룬 인물로 보도
- 0709 이한열 열사 장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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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년 건국대점거농성 사건>

- 1100 검찰에서는 '공산혁명분자들의 건국대점거난동'으로 발표. 1290명 구속. 실형 90명. 23명 국가보안법.
- 반외세반독재애국학생연합 29개 대학 2,000여명의 학생. 당시에는 이례적인 일.
- 경찰이 이례적으로 집회를 방임. 대신, 집회의 퇴로를 차단. 퇴로가 없는 검거작전.
- '깨부수자', '원수', 등의 단어를 가지고 빌미. 방송사와 기자들의 취재는 묻힘.
- 반공이데올로기, 국가보안법에 대한 문제제기가 빌미
- 최상엽 공안부장. "옛날 공안사건에 대해서는 일체 무덤에 갈때까지 얘기 안하기로 결심했다."

- 85년 학원안정법 제정 및 군대로 (김형오 대통령 비서실, 현재 한나라당 원내 대표)
- 86년 미국이 전두환 정권에 우호적 태도 취함. 반미 투쟁이 타격이 된다고 생각함.
- 86년 4월 서울대 김세진 분신. 5월 이동수 분신.
- 86년 금강산댐 공작사건
- 86.10 마르크스-레닌주의당(ML당) 조직사건으로 노동자와 교수 구속. 공안기사 늘어남. 이후에 조작으로 드러남.
- 점증하듯이 많은 공안사건의 결말으로서 건국대점거농성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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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

60년대 인혁당 사건
70년대 재미교포 간첩단 사건
80년대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80년 미스유니버스 사건
83년 간첩 사건
85년 납북어부 사건
86년 민청련 사건
86년 부천서 성고문 사건 - 피고인 문귀동 징역 5년
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 치안본부장 사과
89년 서경원 방북 사건 - 김대중 1만불
94년 구국전위 사건
95년 대학교수 간첩 사건

- 전기고문
- 물고문
- 통닭구이
- 비행기태우기, 비녀꽂기
- 만 3일만 잠을 재우지 않으면 어떤 것도 진술하게된다.
- 가장 자신있어 하는 부분을 공략, 모멸감
- 개밥먹이기

노덕술 체포되자 친일경찰들이 반민특위 습격
00년 전기고문기술자 이근안 7년형, 다른 이들은 1~2년

"6개월만 살아달라. 너 때문에 우리 8명이 시말서 써야된다. 이것까지 부인하면, 너희 가족까지 잡아다가 안기부 구속시키겠다."

7년간 감옥생활 하고, 가정마저 해체.
간첩사건의 피해자들이 재심 청구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아.
최동 - 안기부에서 당한 고문 후유증으로 분신자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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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화사업>

강제징집(국방부 447명. 그러나 축소발표)과 의문사
녹화사업(국방부 429명. 그러나 축소발표) - 관제 프락치 작업

1800여명이 학생운동과 관련해서 학원에서 나옴,
1300여명은 제적이나 투옥. 나머지는 강제징집(특수학적변동자)
녹화사업 입안자 보안사 서의남 중령
녹화사업: 진술서 - 심사 - 순화교육 - 서약서 - 관제프락치 임무
전기고문

84년부터 강제징집 관련 시위
85년 진혼비 강제철거

"월북이라는 겁을 주면 유족들이 더 이상 따지지 않겠지 않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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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와 한국전쟁>

첫번째 오만. 중국군 참전 가능성 없음.
두번째 오만. 한국전쟁 발발 가능성 없음.
(1932년 1차 세계대전 참전군인들이 자신의 복지를 요구하며 보너스 행진을 벌임. 맥아더가 이를 강제해산.)

중공군의 참전과 미8군 사령부 리지웨이 장군 부임
맥아더는 대중국전 및 26개 원폭 제안(해상봉쇄, 대만군투입 포함)
쉐이크다운 계획 : 핵무기 개발에 박차가해 1~2년 안에 대소련용 핵까지 개발. 136개 원폭 계획.

트루먼은 대소련용으로 핵무기를 비축해야 한다는 생각.
맥아더는 몇개만이라도 사용하자고 제안.
한반도 소개 계획까지 제출

리지웨이에 의해 반격 시작. 중공군 공군력의 부족과 인력에 의한 병참.
서울 수복 후 협상 준비
맥아더는 도쿄에서 성명서 발표 - 51년 봄에 끝날 수 있었던 전쟁이 연장됨.

(일본 점령사령관 시절 48년 대통령 후보 등록. 52년 대통령 선거 준비.)

맥아더 해임과 동시에 핵무기를 태평양으로 이동
맥아더 귀환 후 환영 퍼레이드 800만명. 매카시즘과 트루먼 비난 여론.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아이젠하워가 부각 및 당선. 맥아더는 아이젠하워에게 전쟁 승리를 위한 비밀제안을 함. (핵과 핵폐기물 사용)

밴플리트 장군 부임과 중공군 대공세

트루먼 "내가 휴전협정을 했다면 군중들에 의해 교수형 당했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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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버레디 플랜>

52년 부산 계엄령 발동 및 야당 국회의원 탄압

육본 작전국장 이용문 - 대통령 암살계획
- 박정희 대령

미국 - 이승만 감금하고, UN군정 실시 계획

헌법 수정과 2대 대통령 취임

휴전회담과 북진 시위
한국의 작전권은 미국에 있으며 북진은 불가능

에버레디 플랜
- 이승만의 단독북진 압박에 대한 대응책
- 한국군 장교들을 미국에 복속
- 반항하는 군과 민간지도자를 체포한다
- UN군정을 실시한다

한미상호방위조약
- 한국군의 병력증강과 미국의 작전권 이양
- 휴전을 방해하지 않겠다

1959년 경제위기
1960년 315 부정선거
김주열군의 죽음과 마산학생들의 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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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좌제>

1961년 516 군사쿠데타의 혁명공약은 반공을 제1의 국시로

625 당시 피학살자유가족회 - 반국가단체로 규명
43유족의 86%가 연좌제로 고통받음
월북자
공안사건

유형: 대살, 공직발령 금지, 요시찰인 동향보고서

국보위가 연좌제 폐지, 625부역자 기록 삭제(84년)했으나, 기록은 계속 유지
80년 윤석양 이병 양심선언 - 보안사 민간인 사찰
98년 참여연대 - 경찰의 민간인 사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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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도영과 516>

"박정희에게 속아넘어갔다."

- 혁명계획서(419 1주년 시위에 대비한 비둘기작전계획)
- 장도영을 중심으로 한 쿠데타說
- 박정희의 쿠데타 계획은 여기저기 누설
- 장도영은 10일 전에 보고받음

- 박정희는 좌익경력(남로당) 때문에 예편당할 뻔한 것을 장도영이 복직.
- 30사단장 가족을 볼모로 쿠데타에 참여시킴.
- 30사단, 33사단, 공수여단의 야간훈련으로 보고가 되어 장도영이 취소시킴.
- 박정희는 장도영에게 편지.
- 해병대가 한강대교에서 헌병과 대치한다는 사실에 장도영은 충격
- 6군단 포병대가 육군본부 점령

- 장도영이 윤보선 면담. 서로 총질하지 말 것을 지시. 장도영 진압 포기.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장 수락.
- UN 매그루더는 쿠데타군 진압을 지시. 장면은 행방불명.
- 케네디의 논리: 총리가 없는데, 진압할 수 없다.
- 장면은 칼멜 수녀원에 칩거하면서 미국과 연락. UN 사령관이 상황을 맡아서 처리할 것을 요구.
- 미국은, 상황이 명확해질 때 까지 지켜보기로 함. 붕괴될지도 모르는 장면내각과 운명을 같이 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어서는 안된다.
- 장면은 미국이 결정해야 자신의 입장을 표명할 수 있다고 함.
- 518 미국의 지지 없이는 힘들다고 생각하고 칼멜수도원 나옴. 내각 총사퇴 발표.

- 미국이 쿠데타에 개입했다는 증거는 없다.

- 박정희와 장도영은 군정기간을 두고 갈등
- 국가재건 비상조치법: 장도영의 참모총장과 국방장관직 박탈
- 장도영은 반혁명으로 사형까지 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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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거>

50년대 움막촌
강제철거는 60년대부터.
도시주민들은 시 외곽(경기도 성남)에 강제이주. 광주대단지 20만명.
70년대 무허가 판자촌

71년 광주대폭동
79년 4명의 철거반원을 살해한 무등산타잔 박흥숙 사건
83년 목동계획(최초의 공영개발) - 그러나, 고급아파트 계획으로 변경
상계동
전농동 - 폐타이어에 불을 붙여 철탑에 옮겨붇음.
행당동 - 대낮에 성추행
봉천동 - 바지를 벗기고 연탄재
장애인들을 동원

상계 5동 개발이익 200억원
용역비 30억~70억 (철거가 늦어지면 용역업체에 손실)
86년 이후 철거 관련 사망자 32명
세입자의 입주비율은 1% 미만
건설은 공기단축이 원가절감의 지름길

한국은 남아공과 함께 가장 비인간적으로 강제철거를 자행하는 나라 - 세계주거회의
강제철거는 인권침해행위이다. - UN 인권위
주거는 기본적인 권리이며 이것을 실현하는 것은 국가다.

철거는 합법, 반대는 불법.
순환식 개발과 가수용의 제도화 요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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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의 감옥, 청송감호소>

81년 국보위에서 사회보호법을 제정

삼청교육대 출신들에게 사회보호법 소급적용
81.02 수용, 감호자 인원 급증
폭동으로 많은 이들이 사망
84년 박영두 사망
85년 6명 교도관 인질로 폭동 - 박영두, 구타, 등의 요구안 / 추가 띄우면 법정에서 진술할 계획이었으나 방치
87년 12월 1,200명 전원의 단식
88년 2차 인질사건, 3차 인질사건
진실을 알리기 위해서 칫솔 2개를 삼킴. 7개월 만에 병원 이송되어, 야당 총재와 소설가에게 밀서.
88년 한겨레 신문 통해 진실 알려져.
88년 현역법관들까지 참여하는 헌법소원 제기
89년 제소자들까지 참여하는 대규모 단식. 국정조사권 발동 요청. 전두환 구속, 노태우 물러가라, 사회보호법 폐지하라
89년 5조 1항 여야합의로 폐지. 5조 2항은 유지. (헌재에서 위헌결정이 내려질까 두려워, 국회에서 개정안 통과)
헌재의 5조 1항 위헌결정에 대해 법무부가 압력 행사
98년 최초공개

5조 1항 필요적 감호
42조 일반 제소자들과 마찬가지로 행형법의 적용

가혹한 징벌 - 뒷수정, 비녀꽂기
근로보상금 50여만원
생필품과 외부병원비는 개별부담

감호소 출소자들의 재범율 계속 높아져.
03년 사회보호법 폐지를 위한 공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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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선과 코리아게이트>

76년 10월 희대의 로비사건 코리아게이트

미국 의원들이 매수되어 한국에 유리한 결정을 해주었다는 사건.
박동선 : 워싱턴 사교계에 부각

워싱턴에서 조지타운클럽 만듬.

76년 12월 서울에서 공식적으로 입장표명 : 박동선과 한국정부는 무관하다
77년 12월 사법공조 체결

박동선이 중정의 지시를 받았다는 것은 증명되지 않음.
박동선과 청와대가 공생관계라는 인식이 짙어짐.

당시 수사검사가 윤리위원회 사퇴.
군사원조안 확정.

미국의 쌀 수입시장인 한국과 쌀생산지 출신의 미국 국회의원.
쌀 수입은 공화당의 정치자금으로 사용.

69년 8월 닉슨독트린 - 주한미군의 철수
철수 대신 군사원조 할 것을 제안
70년 8월에 청와대의 대미로비 본격화
- 69년 3선개헌으로 인한 박 정권에 대한 더 나은 평판
- 그 로비스트 중 한명의 박동선
72년 유신헌법 선포

중정 - 재미교포들 중에서 중요한 인물들의 결점을 알아두라
76년 대미공작 계획. 박동선의 활동에 대한 상세한 기록과 평가
박동선은 쌀 중개로 번 돈으로 로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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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과 포로들>

10월말 인민군 포로 13만명, 하루에 20~30명씩 사망

미군피복 지급, PW 글씨, 포로번호 지명
전쟁 상황이 달라지고 포로수용소가 개선되면서 새로운 질서가 발생함.

(1949년 제네바 협정에서 포로들의 자치조직 허용)
국적 상관 없이 영어를 하는 사람들을 선출
여단장, 대대장, 중대장, 소대장, 경찰, 감찰대(최고권력기관)
대부분 반공주의자들이 차지

간부들은 작업 열외
식사 및 보급물자 착복

전범조사과에서 조사받는 도중 정보제공자가 됨. 파벌을 형성. 대한반공청년단 조직. (51.08 이관순)
쿠데타 후 권력 장악

친공포로들의 조직화는 방어에서 시작. 해방동맹. (51.04 이학구)

거제도 17만명. 처음에는 친공포로들이 주도권 장악. 미군들은 좌시.

51.07 휴전회담이 시작
북 - 전원송환 / 남 - 자원송환

각 포로수용소에서의 전향공작, 성직자들도 전향공작에 동원. 친공진영에서는 적대시.
포로들을 이중간첩으로 활용

친공진영에서는 공민교육을 거부하고 자체적인 군사교육 실시
인민군 + 빨치산 + 친공포로 합동작전 계획

송환에 대한 의사를 물어서, 별도의 수용소에 분류
친공포로들 강제송환 요청하면서 수용소장 면담 요청

52.10 백마고지 전투

북진통일은 정치적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정책

53.06.18 반공포로 탈출 27,000명
이승만이 UN과 상의 없이 독자적으로 함
로버트슨 국무차관보가 특사로 옴.
중국은 이승만의 휴전협정 위반을 이유로 2차례 전투를 더 결정.

아이젠하워 - 한국이 휴전에 동의하면, 한미상호방위조약 맺겠다.

53.07 휴전협정 조인

53.08 포로송환
탈출하지 못한 7,000여명이 중립국 감독 하에 설득 작업. 188명 북행.
헌병총사령부의 지시를 받아 설득 반대시위.

대한민국을 선택했던 35,000명의 포로들 군입대. 신분보장 문제로 계속 요시찰당하면서 고통받음.
귀환한 국군들이 심문하다가 많은 포로들이 자살.

65,000명의 국군포로 중에서 7,000여명만 송환.
상당수는 북한 인민군에 편입

미송환 인민군포로 - 포로가 아닌 간첩으로 취급받아 포로수용소가 아닌 형무소로 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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