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imbc)

방송기간 2002.09.08 ~ 2002.11.17
기획 이여춘
연출 장덕수, 김상균, 김철진, 이채훈, 김환균, 채환규, 오상광, 민운기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 미국의 힘의 원천은 무엇인가?
'거대한 용광로'라 불리는 미국 사회의 다양한 단면들을 살펴보고 미국 사람들의 목소리를 통해 미국 사회의 문제점을 진단한다.
그리고 지구촌 전체의 운명을 좌우하게 될 미국의 대외정책을 균형있는 시각으로 조명하고 건강한 비판적 안목을 제공하고자 한다.

1편 - 911 그 후
2편 - 자유의 여신
3편 - 전쟁과 평화, 그리고 진실
4편 - 총의 나라
5편 - 시민의 힘
6편 - 공립학교의 개혁 열풍
7편 - 인종, 약자보호조치
8편 - 은막 위의 전쟁, 헐리우드와 펜타곤
9편 - 자유의 초석 수정헌법 1조
10편 - 햄버거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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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겨레)
 
지난 화요일부터, 성인오락실에 대한 연재기사가 나갔습니다. 저는 16일부터, 부산에서 도원, 용주오빠가 쌓은 취재 노하우를 전수받아, 수도권의 성인오락실 실태를 취재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특별취재반에 합류했습니다. 기사에 그닥 큰 도움은 되지 못했지만, 나름대로 며칠간 취재하면서 배우고 느낀 것들이 어느 때보다도 많았기 때문에, ‘특별취재반’의 이름으로 나왔던 첫 기사가, 제 이름이 쌩으로 나갔던 이전의 어떤 기사들보다도 더욱 의미 있게 느껴졌던 것 같습니다. 그 의미를 다른 인턴과도 공유하고자, 그동안 취재하면서 겪은바, 느낀 바를 뒷담화로 올려봅니다. :D

#1.  “아빠 찾으러 왔는데요.”

수도권 취재 첫날, 비가 주륵주륵 내리던 날, 나와 도원오빠는 서울 동쪽에 성인오락실이 집중돼 있는 곳으로 향했다. 이미 부산에서 여러 오락실을 다녀봤던 도원오빠와 달리, 난생 처음 성인오락실이라는 곳에 가보는 터였던 나는, 지하철에서는 애써 웃고 있었지만, 긴장과 걱정으로 가득 찬 마음을 누를 길이 없었더랬다. 거기에다, 부산의 오락실들이 무슨 파 무슨 파 조폭과 연계가 됐니 어쨌니의 얘기를 잔뜩 들은 후인지라, 티는 안냈지만 사실 살짝 쫄았던게 사실이었다. 어쨌든 지하철은 한 정거장을 2분만에, 그렇게도 빨리 달려, 우리를 목적지에 내려주었다.

먼저 도원오빠가 임무(?)를 마친 후, 내가 오락실에 들어갈 차례가 됐다. 나는 처음이라 좀 작은 데에 들어가고 싶었지만, 나와 함께 오락실을 물색하던 도원오빠는, 무심하게도 지하에 있는 대빵 커보이는 오락실을 보며 ‘저기 있다, 있다 연락해’하며 떠나버렸다. 밖에서만 봐도 오락기 100대는 있어 보이는 큰 오락실, 온통 가려져 있어 안을 들여다 볼 순 없었지만, 들려오는 기계소리만으로도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숨을 크게 한 번 들이쉬고, 떨리는 마음으로 당차게 오락실 문을 와락! 열었다.

헉. 근데 이게 왠 일. 오락실이 내부수리중인지 뭔지, 암튼 그 큰 오락실에는 손님이 단 한명도 없었던 것이다. 순간, 그때따라 ‘쾅’ 하고 문을 열어 재낀 나에게로, 5명의 직원들의 눈길에 쏠렸다. 한 5초간 우린 아무 말 없이 서로를 쳐다봤다. 그 침묵을 깬 건, 그 중 가장 무서워 보이는 직원.

“아니, 뭔 일이십니까?”

순간 당황한 나.

“아.. 네.. 아.. 아빠 찾으러 왔는데요.”

그 말이 떨어지자 마자, 직원들 킥킥 웃기 시작하며,

“아, 그래. 아빠 이름이 뭐니?”

아니, 반말은 왜 반말이야. 나보다 끽해야 10살이나 많을까 말까해 보이는데. 그래도 꾹 참고.

“아, 김.. 이.. 뭐, 암튼 다른데 계시나봐요. 딴 데로 가볼께요. 안녕히 계세요.”

왜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난 아빠 이름을 묻는 질문에, 순간 우리 일진 선배인 “임인택이요.”라는 말이 진심으로 목구멍까지 올라왔었다. 내가 선배를 아빠처럼 생각하고 있었나? 뭐, 한 두 번 정도, 선배한테 취재내용을 보고하고 보고하는 과정에서, 내가 ‘지지배배’ 우는 아기 제비고, 선배가 늠름한 아빠 제비같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사실 선배께서, 제비를 좀 닮으시기도 했다) 암튼, 나 살겠다고 선배의 신분을 노출시키면 안 된다는 생각에 퍼뜩! 떠올라, 임기응변으로 대충 얼버무리고 나왔다. 그 날 집에 가자마자, 전주에 계신 아빠한테 오랫만에 안부전화를 드렸다.

#2. “애들은 가라, 애들은 가”

내가 쪽팔려서, 같이 취재 갔던 도원오빠에게도 아직까지 말 못했던 일. 나는 바다이야기에서 무참하게 쫓겨난(?) 적이 있다. 사실, 성인오락실에 내 또래 애들, 특히 여자애들은 직원들 말고는 찾기 힘든 일이거니와, 내가 또 나이보다 더 어려보이는 취재 상 단점!이 작용해, 처음에는 취재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난 곧 요령을 파악하고, 이 점을 장점!으로 활용했다. 이 건 뒤에 계속...)

일단 내가 오락실에 들어가면, 순간 그 곳에 있던 모든 사람의 눈이 나에게 쏠리는 것이다! 여기에는 어리 버리해 보이는 내 모습과, 속으로 잔뜩 긴장했지만 애써 아닌척하는 나의 어색한 표정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더 많이 눈에 띄게 했을 것이다. 암튼 그 날 나는 긴장도 늦추고, 최대한 껄렁껄렁하게 보이기 위해, 풍선껌을 구입하여 최대한 오버스러운 동작으로 쫙쫙 껌을 씹고 풍선을 불며, 당당하게 오락실에 들어갔다.

들어가자 마자, 그 곳의 수석직원인듯한 사내의 눈길에 나에게 꽂히더니, 들어간 후 5분 동안 졸졸졸졸 나를 쫓아다니는 것이다. 사실, 나 또래 애들이 많지도 않거니와, 직원 눈에, 나같이 돈없어 보이는 인간이 5분간 단돈 만원도 안 쓰고, 게임만 구경하고 있는 모습이 아니꼬왔을 터였다. 나는 애써 자연스러운 척, 화려한 물고기들의 몸짓에 정신을 빼앗긴 척하며, 불법 행위를 잡기 위해 신경을 곤두세웠다. 나를 쫓아다니던 수석직원, 드디어 입을 열었다.

“여기, 애들은 출입 안됩니다.”

헉. 애들? 내 참 ‘청소년’도 아니고, ‘학생’도 아니고, ‘애들’이라니. 순간 나는 취재고 뭐고 열이 받아 맞받아 치기를.

“애들이라뇨? 저 애기 아니예요...........”

“아무튼 안됩니다. 나가세요. 여기, 여기 내보내!”

순간 너무 열이 받은 나는, 내 본분을 잊고................

“뭔 소리예요. 저 19살 넘었어요. 저 게임할 돈도 많아요! 민증 까 민증까!”

하며 내 이름 송경화 석자와 주민등록 번호가 또렷이 박혀 있는 민증을 까고 말았다. 아뿔싸. 그 싸가지없는 직원 손에 내 민증이 들려있는 모습이 내 눈에 들어온 순간, 난 그때서야 제 정신이 들었다. 미쳤지. 우리는 기자임을 숨기고, 불법행위 여부를 관찰한 후, 적발시 경찰에 신고하는 일을 하고 있지 않았던가. 제 정신이 든 나는, 손에 있던 민증을 확 빼앗은 후,

“딴데 가면 되잖아!” 라고 외치고 뒤도 안돌아보고,  뛰어 나왔다.

#3. 카지노에 가보다!

다음날 도원오빠와 나는, 동네를 바꿔 다른 지역의 성인오락실 밀집지를 찾았다. 그날도 비가 많이 오던 날이었다. 이제 취재에 좀 익숙해진 나는, 더 이상 첫날처럼 ‘크게’는 긴장하지 않고, 좀 자연스럽게 오락실을 활보할 수 있었다. 저녁때쯤 찾은 한 오락실, 배에 찬 두둑한 복대 주머니가 인상적인 아주머니에게 접근해 물었다.

“여기, 좀 잘 돼요? 이 동네 오락실이 꽤 있던데...”

“여기? 여기 별로야. 이거 한 시간째 돈만 먹잖아.”

“그래요? 그럼 나도 딴 데로 가야겠네. 어디 좋은데 있어요?”

“좋은데? 데려다 줄까? 내 딸같아서 그런데.”

내 손목을 잡은 아주머니는 우산도 쓰지 않고, 5분정도 쉬지 않고 걸었다. 그리고 왠 간판도 없는 건물에 들어서서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5층에서 내려서야 내 손목을 놓았다. 헉. 그런데 여기는 뭐야. 양복 입은 잘생긴 오빠들 4~5명이 서 있던 입구 안쪽에는 빨간 카페트가 깔린 카지노가 있었던 것이다! 여기는 간판도 없이 운영해, 아는 사람만 아는, 그런 곳인 모양이었다.

성인오락실과는 달리, 이곳의 분위기는 꽤 ‘젊었다!’ 오락실에서 보기 힘들었던 내 또래 애들, 30대 초반 여성들이 여럿 앉아 게임에 집중하고 있었다. 아주머니 나에게 묻기를,

“얼마 있어? 같이 해서 한 판 할래?”

나, 얼마 있다고 해야 할지 감 못잡고, 고민하다가...

“저, 20만원 있습니다. 한 판 할까요?”

사실 내 지갑에는 6천원이 있었다. 오락실 취재 갈 때 돈을 좀 두둑히 뽑아놨어야 하는데, 깜빡 하고 돌아다니던 터였다. 그래도 목에 힘 주고, 20만원이나 있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런데 아줌마의 답변.

“뭐? 야. 집에 가라 집에 가. 집에 가서 밥이나 먹어.”

헉. 뭐야. 난 나름 큰 돈 있다고 뻥친거였는데, 여기 판에서는 이 돈으로는 택도 없는 모양이었다. 나는 ‘2백만원 있다고 했어야 했나?’ 고개를 갸우뚱 하며, 난생 처음 가본 그 빨간 카지노장에서 빠져나왔다. 근데 생각해보니, 20만원 있다고 해서, 한 판 하게 됐으면 어쩔뻔 했어. 지갑에는 6천원 있는데!

#4. 이성 잃고 경찰과 싸우다.

그 다음날 우리는, 경기도의 또 다른 동네로 발길을 옮겼다. 취재가 길어져서, 밤 10시까지도 계속됐는데, 이쯤 되면 마무리 하고 집으로 돌아가면 됐을 터였다. 10시쯤, 오락실에 들어간지 5분도 안돼서, 나는 오락실의 불법행위를 포착할 수 있었다. 아, 이제 말하자면, 나는 나의 ‘어려보임’과 ‘어리버리해보임’을 단점에서 장점으로 발전(?)시켜, 취재에 활용했다. 기계에서 막 나오는 상품권을 그 순간 잡고, 일련번호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사전에 그 기계 손님과 친해져야 하는데, 대부분 손님들이 40~50대 아저씨인지라, 어리버리한 여학생이 와서 “이게 뭐예요? 오와 상품권이다!!!!! 한 번 봐도 돼요?” 식으로 물어보면 친절하게도 각종 설명을 서로! 해주시기 위해 나서는 것이었다. 또 자기 딸 또래 되는 애가 와서 게임 하겠다고 있으니까, 사뭇 진지하게, 자기가 여기서 돈 잃은 과정, 오락에서 이길 수 없지만 여기 있는 모습에 대한 후회 등을 얘기해 주시며, ‘넌 나처럼 빠지지 말고, 집에 돌아가’ 라고 충고해주는 분들도 많았다.

아무튼, 그 날도, 기프트 수치가 20000에 가까워진 기계에 접근, 손님과 미리 친해진 후에, 막 나오는 상품권들을 ‘제가 받을께요!’하고 쥔 후, 일련번호를 확인하고, 두 번 연속으로 나오는 상품권 8장의 일련번호가 엉망이어서, 경찰에 신고를 했다. 그런데 경찰차는 내가 있던 공중전화에 한 번 와서 둘러보더니, 오락실에는 들어가지 않고 그냥 가는 것이었다. 그래서 다시 신고를 했다. 그런데 경찰 왈.

“신고자가 확인되지 않으면 단속을 나갈 수 없습니다.”

“왜요?”

“신고자가 자기 신분 안 밝히는 것은, 경찰을 믿을 수 없다는 건데, 그런 사람 말을 경찰이 어떻게 믿고, 가서 단속까지 합니까.”

순간 머릿속이 뜨거워짐을 느낀 나는, 또 다시........... 취재의 본분을 잃고, 열에 받쳐 그 경찰과 서로 목소리를 높이며, 나와야 된다 안된다 싸우기 시작했다. 그렇게 전화로 싸우기를 30여분. 우리의 대화는 이렇게 끝났다.

“경찰관 얘기 잘 들었다. 내 그럼 그게 맞는지 확인해볼테니, 당신 말에 확신이 있으면 네 이름 알려줘라.”

“내 이름 알려줄 수 없다.”

“뭐냐. 넌 내 이름 안 알려줘서 나올 수 없다매. 역으로 적용해봐. 니가 니 성명 안알려주면, 난 네가 지금까지 한 말이 진짜라고 어떻게 확인하고 믿으라는 거지?”

“아가씨가 경찰을 믿든 말든 난 상관없다. 여기는 아가씨 논리 듣는 곳이 아니다. 어찌고 저찌고. 그럼 문광부나 정통부에 신고하든가.”

두둥. 전화를 끊고, 순간 오락실 안에서 계속 기다리고 있었을 도원오빠의 후들거리는 다리가 떠올라 정신을 차리고 오빠에게 나오라고 전화를 했다. 근데 괜히 눈물이 쏟아지고, 열이 가라앉혀지지 않았다. 아무튼 신고 후 30분 기다리고, 30분 경찰과 싸우고 해서 벌써 1시간이 지나있었다. 오후 11시. 그런데 그렇게 안보낸다고 싸워놓고서, 경찰차가 오락실 앞에 나타난 것이다. ‘뭐여, 그 아저씨...’ 하면서 다시 긴장을 잡고, 경찰들을 예의주시했다. 전화기로 친구와 전화하는 척 하면서, 경찰에 접근했는데, 경찰 둘은 10분 가량 자기들끼리 계속 대화하고 웃으며 있다가, 오락실에 들어간지 40여 초도 안돼서 나와버렸다. 답답하고 허탈한 하루였다.

나의 무모한 ‘이성 잃음’으로 시간이 지체 되어, 우리는 그 날 서울로 가는 막차를 놓치고 말았다. 피씨방에서 밤을 세고, 첫 차를 타고 서울로 돌아가는데, 그래도 전국의 일선현장에서 애쓰고 있는 수많은 경찰들의 모습을 떠올리려고 노력했다. 그들도 답답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과, 그들의 현재 모습 및 태도 하에서는, 그 답답함이 해소될 길은 요원해 보인다.

#5. 미친 척 하다!

다음 주가 되어, 나는 혼자 서울 북쪽의 또 다른 오락실 밀집지로 가게 됐다. 이곳은 다른 곳에 비하면 밀집지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서민들의 삶 속까지 파고든 성인오락실의 문제점들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곳이었다. 동네 성인피씨방과 오락실 개수와 위치를 지도에 그린 후, 분위기를 살피기 위해 오락실에 들어갔다. 근데, 그 전전날 나온 성인오락실 기사에 메인 사진이 흔들렸음이 못내 아쉬웠던 나는, ‘오늘은 내가 한 번 사진을 찍어볼까?’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사실, 오락실도 이제 수군데 들락날락한 후라, 여유도 생긴 후였다.

그런데, 대놓고 찍기에는 한계가 있는 상황. 고민하던 나는 무늬가 혼란스러운 쇼핑백을 사서, 카메라 렌즈 만하게 구멍을 뚫었다. 그리고 거기에 렌즈를 꽂고는, 한 손은 쇼핑백을 들고, 한 손은 백안에 넣어 촬영 버튼을 누르면서 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쉽지가 않았다. 각도도 엉망이고, 기계 머리만 찍히거나, 손님들 발만 찍히거나 하는 것이었다. 여러 번 시도 와중에, 깝깝질이 난 나는, ‘에라 모르겠다’ 하고 그냥 카메라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찰칵 착칵! 그때! 직원 중 한 명이 나를 발견했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왜 찍어요????”

헉. 너무 놀란 나는, 어찌 할 바를 모르고 얼굴이 빨개졌으나, 이내 대답하기를.

“아.. 그.. 이게.. 너무 알록달록 예뻐서요. 헤헤. 제가 그림을 좋아해요. 헤헤.....

어? 저게 문어야 오징어야? 헤헤....”

하면서 상황을 넘겼다. 하지만 그 뒤로도 직원들의 눈은 나에게 쏠려 있었다. 나는 애써 자연스러운 척 하면서, 아까참에 친해졌던 60대 아저씨와 매실 음료수를 ‘원샷 해요 원샷!’ 하면서 벌컥벌컥 마시며, 계속해서 정신없는 척 ‘헤헤’ ‘흐흐’ 웃어댔다. 애써 웃고는 있었지만, 그때 내 가슴은 정말 쿵쾅쿵쾅 뛰어댔다. 그 뒤 얼굴에 경련이 일어남을 느끼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오락실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뒤도 안돌아보고, 정말 미친듯이 지하철역으로 뛰어들어갔다. 근데 그렇게 찍은 사진들, 역시 다 별로여서, 기사에 별 다른 도움이 되지 못했다!

# 성인오락실 취재가 내게 남긴 것은..

며칠간 성인오락실을 취재하면서, 많은 것을 보고 배웠다. 특히, 같은 주제를 다룬 기사여도, 그 방법이나 깊이에 따라 기사가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지를 볼 수 있었던 점이 인상 깊었다. (이미 성인오락실에 대한 기사는, 식상해지리만큼 많이 나온 후였기 때문)  또 현장에서 취재를 할 때, 특히 이번처럼 잠복취재(?)를 할 때 가져야 할 각종 노하우에 대해서도 터득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번 취재가 내게 남긴 가장 큰 것은 ‘사람’이다.

오락기 앞에 하루고 이틀이고 쉬지 않고 계속 앉아 있는 아저씨, 아줌마들은, 그냥 ‘게임중독자’들이 아니다. 다들 가족이 있고, 생각이 있고, 삶의 애환이 있는 옆 집 아저씨, 친척 이모이다. 나는 취재 중에 몇 분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그 사람들의 기대, 아쉬움, 괴로움, 손짓, 한숨 등을 지켜보면서, 이 취재의 중심에 ‘사람’이 있음을 취재 내내 느꼈다. 그 사람들이 왜 거기에 삶을 꼬라박고 있을까. 좀 더 ‘잘’ 살아보고 싶다는 희망, 기대가 왜곡돼, 오락실 안에 갖혀 있는것 아닌가. 또 심지어 오락실을 운영하는 업주들 역시, ‘사람’이다. 계중에는 조폭과 사채업자와 연계돼 대규모로 사업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되는 사업도 없고, 먹고 살 길도 없고 한데, 요즘 이게 뜬다고 하니까, 있는 돈 다 부어 오락실을 차린 사람들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 창신동에서 봉제공장을 하다, 팔고 동네에 성인피씨방을 차린 사람도 있었다. 요컨대, 내가 취재한 성인오락실 안에는 상품권과 바다이야기 오락기 외에도, ‘사람’이 있었다.

정부가 상품권 제도를 합법화 시키는 등, 각종 도박 사업의 진흥정책을 펼친 이후, 그것들은 나비효과를 일으켜, 실제 곳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결과적으로 그것은 나비가 아니라 커다란 새의 날개짓이 되었다. 어떤 아줌마는 이혼을 했고, 어떤 아저씨는 3억원 전재산을 날렸다. 또 어떤 분은 사채까지 끌어다 써 빚더미에 앉아 막막해 하고, 어떤 분은 예전부터 자신의 꿈이었던 봉제공장을 내놓았다. 엊그제, 정부에서 상품권 제도를 없애고, 성인오락실을 규제할 수 있는 각종 정책들을 발표했다. 이것이 또 어떤 나비효과를 일으켜,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지, 아직 알 수는 없다. 다만, 이미 뿌리깊게 박힌 사람들의 상처가, 이번 정책으로 말끔히 치유되는 것은 ‘절대 불가능’해 보인다. 예전의 나비효과가 ‘커다란 새’의 날개짓으로 확장돼, 큰 상처를 남긴 만큼, 이번의 나비효과는 ‘작은 파리’의 날개짓에 불과할 것 같다.

나는 여기서, 이번 취재의 의미를 찾았다. 그리고 한겨레가 하고 있고 할 수 있는 일,  기자의 역할, 기사의 힘에 대해서, 예전보다 뚜렷한 생각을 가질 수 있게 됐다. 결국, ‘사람’인것 같다. 오늘 하루 종일, 이 ‘사람’이라는 두 글자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오늘은 커피도 안마셨는데, 잠이 안 온다. 그래도 내일을 위해, 이제 잠을 청해봐야겠다.

 에효. 쓰다보니 글이 억수록 길어졌다;; 24시팀 인턴들 외에는, 서로 겪은 바를 얘기하고 나눌 기회가 많지 않아 아쉬움이 컸었나 봅니다. :) 아무쪼록, 우리 모두 다음주부터 새로운 부서에서 또 다른 경험들을 하게 될텐데! 이번 달의 수많은 ‘어리버리함’, 그리고 그것에 의한 수많은 ‘어믄 짓’들을, 지난 한 달간의 ‘경험’으로 잘 메꿔, 다음 달에는 좀 더 빡시게! 멋지게! 활동했으면 참참참 좋겠어요. 헤헤헤 고롬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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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 2006-08-01 23: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 있군요. 인턴 기자분 취재 경험 톡톡히 했네요. ^^

sb 2006-08-02 0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죠? ^^;
 

1967년 3차 중동전에서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와 요르단강 서안 점령

- 이스라엘 검문소(몇일씩 기다리기 일쑤)
- 주거지역 폭격, 철공소 폭격
- 자식, 남편, 여성(오빠와 약혼자가 이미 순교)의 순교
- 가자지구 주변으로 콘크리트담 건설, 해안선 봉쇄, 국제공항 파괴

- 팔레스타인 아이들은 가족이나 친지의 죽음을 보며 성장
- 하마스의 창시자(87년) 야신의 암살과 지하드(성전) 운동의 확산
"무슬림으로서 남의 땅을 침략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의 땅을 침략당했을 때에는 되찾아야 한다."
- 87년 1차 인티파타(팔레스타인 민중봉기)

- 부서진 자치정부 청사 안에 천막을 쳐놓고 집무
- 팔레스타인 민족주의의 상징 아라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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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금 돔 사원: 예루살렘에 살고있는 팔레스타인인 생활의 중심. 심판의 날에 알라가 내려와 구원.
- 통곡의 벽: 메시아가 내려와 세울 천년왕국의 기초. 유대인에게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곳. 예루살렘을 시온이라 부름.
- 유대교, 아르메니안, 기독교, 무슬림이 공존하다가 이스라엘 건국과 함께 분열.

- 1917년 밸포어 선언
- 1947년 UN총회. 팔레스타인 국가와 이스라엘 국가 동시 인정
- 1948년 시온주의자 벤구리온을 중심으로 이스라엘 건국
- 주변 아랍국가들의 정규군의 팔레스타인지역 침공
- 1950년 요르단이 요르단강 서안지역 합병했으나 인정 못받음
- 팔레스타인 난민(주변국 250~400만)의 유랑과 난민촌 건설
- 1967년 6일 전쟁: 예루살렘 전체를 이스라엘이 통치
- 1974년 아랍연맹은 팔레스타인해방동맹을 유일한 국가로 인정(이슬람교도, 기독교도, 유대교도 각각의 국가 수립을 주장)
- 1980년 이스라엘, 예루살렘을 수도로 지정하면서 무슬림들은 2천여년간의 주거를 박탈. 이스라엘은 계속 유대인 주거지역을 확장. 붉은 신분증(점령지역)과 푸른 신분증(피점령지역)
"우리는 아무 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단지, 평화를 원합니다."
- 1993년 평화협정으로 가자와 웨스트뱅크에 자치정부 수립

- "(4천여년 전)예루살렘은 본디 이스라엘의 땅이다." "(난민문제와 관련해서) 그들이 먼저 공격을 시작해서 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 전 세계(예멘 양탄자 작전, 이디오피아)에서 유대인들을 불러들여. 공격적으로 정착촌 건설하고 군대 주둔
- 이스라엘 정착촌이 평화의 걸림돌, 갈등(이스라엘 정착민-팔레스타인 원주민)의 중심지 "그들은 야곱의 자식들을 혐오한다." "그들이 진짜 원하는 것은 전쟁인 것 같습니다."

- 국제법상 정착촌 건설은 범죄이다.
- 국제사법재판소는 장벽이 불법이며 철수시키라고 판결

- 2000년 2차 인티파다: 샤론이 무슬림 성전을 침략하면서 발발. 1,000명이 사망. 이후 자살폭탄 테러와 군대 폭력이 지속. 02년부터 장벽 건설

- 샤론 총리의 가자지구 정착촌 철수안에 대한 반대 고조
- 2004.11 아라파트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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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3.03 미국의 이라크 침공
- 2003.05 종전선언
- 2003.12 후세인 체포
- 2004.06 주권 이양. 이라크 임시정부 공식 출범.

- 사담 시절 공무원들은 피신 (사담 시절 수혜인들은 돌아다니지도 못한다)
- 미군의 침공과 빈곤 추위
- "사담도 싫지만 미국도 싫다." "미국은 체제를 바꾼다고 들어왔지만, 스스로 체제의 점령자가 되었다." "미국은 우리를 존중하지 않는다. 미군들에게 박수를 보내고 지지했지만, 우리에게 돌아온 것이 무엇인가."
- 설문조사의 90% "내전이 발발하더라도 미군이 철수하길 바란다."

- 임시정부는 해외망명 지도자(알라위)들로 구성. 국민위원회 역시 위로부터 조직.
- 강경 시아파 종교 지도자들이 중심으로 부각.

- 2004.08 나자프(시아파 종교성지) 대공세. 700여명 사망. 시스타니(시아파 최고 지도자)의 온건 노선으로 인해 교전은 중지.
- 2004.08 팔루자(구 바트당 세력과 수니파 저항의 중심지) 대공세. 1000여명 사망.
- 2004.11 팔루자 2차 대공세

- 미국은 저항세력이 이라크 국민들과 상관없는 알 자르카위(요르단)나 알 카에다와 같은 외국 출신 저항세력이라고 주장.
- 이라크 국민들은 극단적인 테러에 반대하지만, 저항세력에 동조한다.
- 알 자르카위가 가공의 인물이라는 주장도 있음. 자르카위에 대한 정보의 출처는 전부 미국이다.

- 아부 그레이브 교도소 : "15일동안 벌거벗은 채 있었다."
- 이라크 이슬람 혁명 최고위원회(이라크 최대 정당) : "우리는 점령을 끝내길 주장했고, 구체제 붕괴 이후에 치안유지를 맡길 바랬다. 미국이 동의하지 않았다." 이라크의 모든 이념, 민족, 종교를 포괄하는 정부를 수립할 계획

- (1) 이스라엘 지원을 위한 정치구도의 변경 (2) 2위 산유국 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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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라크 시아파는 인구의 60%. 지난 30년간 차별받아 옴. 레바논에서 아프가니스탄까지 13억 무슬림 중 10% / 이란은 시아파가 90% (시아파가 권력 장악한 유일한 국가)
- 나자프 침공과 포로학대에 대한 이라크 시아파의 저항이 중동의 시아파를 자극.
- 시아파 무슬림들의 순교 신청이 계속됨 / 레바논 50만 대중집회

"왕의 억압과 폭정에 맞서 봉기하라" - 이맘 아야툴라 호메이니
- 1953 미국의 지원으로 쿠데타 일어나 왕정 복귀
- 1978 팔레비 왕정 타도 시위
- 1979 호메이니 귀국. 혁명에 착수. 최초의 시아파 정권 수립.
- 1979 급진적 대학생들이 주이란 미국대사관을 점거하고 팔레비 환송 요구.
- 1980~1988 왕정 타도 직후 이란-이라크 전쟁. 100만명 사망.
- 1981 인질 석방
- 1989 호메이니 사망 : 이슬람 원리주의를 확산시키는 역할을 함. 반이스라엘 반시오니즘 반서구 반기독교 의식.
- 1997 하타미 대통령 당선(개혁성향) * 치안과 사법, 등 보수파 종교 지도자들이 장악. 신문, 대학은 개혁파 / 모스크, 경제는 보수파
- 젊은이들은 별로 관심이 없음 / 젊은 여성들의 옷차림이 불량해지고 있다며 전통고수 집회

- 1983 레바논 헤즈볼라: 이란과 같은 정부를 세우는 것이 목표

- 2004.12 국민적 지도자로 인정받던 이라크 이슬람 혁명 최고위원회(이라크 최대 정당) 하킴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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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만 자와히리(빈 라덴의 참모, 이슬람 율법학자)는 아랍 정권을 반종교적인 미국 종속적 권력으로 본다.

- 1979~1989 소련의 붉은 군대가 아프가니스탄 침공. 이슬람 세력(무자헤딘)을 중심으로 한 대중적인 저항 시작. 빈 라덴도 포함. (다양한 국적의 무슬림들이 성전을 위해 결성된 첫번째 사례)
미국 CIA의 무기, 재정, 등 지원도 있었으나 공식적인 증거는 없다. 미국은 반소, 반공을 위해 이슬람 세력들을 규합. 알 카에다의 조직적 기초가 됨.
- 1996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이 정권을 수립
- 1998 빈 라덴이 '유대인과 십자군에 대항하는 국제 이슬람 전선'을 결성. 빈 라덴의 주장은 (1)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외국 정권을 몰아내는 것 (2) 이스라엘군의 철수와 팔레스타인의 해방
- 2001 미국과 아프가니스탄 북부동맹군인들이 알 카에다 소탕작전을 실시.

- 민간인을 공격하는 것은 이슬람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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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

인구는 62만 2091명(1997)이다. 아라비아인은 이 도시를 쿠드스(신성한 도시)라고 부른다. 행정수도는 텔아비브야파이다. 동부는 요르단령이며, 서쪽은 1948년부터 이스라엘령이 되었고, 1950년에는 그 수도가 되었다. 1967년 6월 중동전쟁 이후로 유대교도·그리스도교도·이슬람교도가 저마다 성지(聖地)로 받들고 있는 동쪽 지역도 이스라엘의 점령지이다.

이스라엘 (인구: 647만 3000명)

수도는 예루살렘이고 공용어로는 헤브라이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지중해 동쪽 팔레스타인 지방의 아랍 세계에 존재하는 유대인 공화국이다. 이스라엘이란 헤브라이어로 '하느님이 지배하신다'는 뜻으로, 구약성서(창세 32)에 나오는 이삭의 둘째 아들 야곱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19세기 유럽에서 일기 시작한 시오니즘 운동을 배경으로 세계 각지의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 땅으로 이주하여 1948년 5월에 국가를 수립하였으므로 주변 아랍 여러 나라와 적대 관계에 있으며 분쟁이 끊이지 않는다.

1967년의 중동전쟁으로 옛 예루살렘시(요르단령)를 비롯한 요르단, 시리아, 이집트 등 인접한 아랍 여러 나라 영토를 점령하였으나 점령지역을 자국의 영토라고 주장하며 이스라엘화하려고 하는 노력은 국제적으로 승인받지 못하고 있다. 이들 지역을 합치면 이스라엘 영토는 3배로 불어나고 133만의 아랍인 인구를 수용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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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imbc)



2004년 11월 29일 (월) / 제 35 회
제 1 부 : 21세기의 게토, 팔레스타인

게토. 중세 유럽에서 설치한 유태인 강제 거주지역, 독일이 만들었던 유태인 강제 수용소. 그러나 게토는 역사 속에 묻힌 단어가 아니다. 21세기인 지금에도 버젓이 존재하고 있는 게토의 현장. 팔레스타인을 찾아가 본다.

◈ 탱크 VS 돌팔매질

마을 농장에 들어온 이스라엘의 탱크와 불도저. 건물을 부수고 농장을 망가뜨리는 그 끔찍한 괴물 앞에서 팔레스타인 소년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돌멩이를 집어 든다. 무참히 발포되는 총탄에도 소년들이 집어 들 수 있는 건 작은 돌멩이가 고작. 거대한 탱크를 향한 팔레스타인 소년들의 돌팔매질. 비록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에 불과하지만 소년들은 상처받은 그들의 자존심을 그렇게라도 드러내야만 한다.
죽음을 무릅쓴 분노의 돌팔매질은 이스라엘 군이 쏜 총탄을 맞고 한 소년이 쓰러져도 멈출 줄 모른다.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계란을 바위에 던져야 거대한 바위가 깨질 수 있을지.. 전쟁 같은 일상을 버텨내고 있는 팔레스타인 소년들의 저항. 그 저항의 중심에서 소년들의 외침을 들어본다.

◈ 저항의 상징, 하마스

1987년 이스라엘 공격을 위해 야신이 조직한 저항 단체 하마스. 지난 3월 이스라엘은 야신을 암살했고 한 달 후 새롭게 지도자가 된란티시 역시 암살당한다. 하마스는 그들의 죽음이 촉매제가 되어 더욱 강화된 저항 활동을 벌이고 있는데... 하마스를 키워내고 있는 훈련장을 찾은 취재팀. 취재팀은 한여름 태양 아래 팔레스타인의 해방을 위해 열심히 훈련 받는 많은 젊은이들의 땀을 담았다.
그러나 취재 두 달 후 훈련장은 이스라엘의 공격을 받았다고 하는데... 하마스의 저항과 희생.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 순교냐? 테러냐?

팔레스타인의 사브라 마을. 자살 폭탄 테러로 죽은 사람들의 유가족을 취재하기로 결심한 취재팀은 몇 차례의 촬영 시도 끝에 나사르 가족을 만나게 된다. 가족 중 14명이 순교했다는 나사르 가족. 나사르 가족 뿐 아니라 팔레스타인에서 순교자 유가족들을 만나는 일은 어려운 것이 아니다. 동네마다 즐비하게 늘어놓은 순교자의 포스터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순교를 통한 그들의 저항은 끊임없이 계속 된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순교가 아니라 테러라고 말하는데... 순교라는 미명 하에 왜 그토록 많은 팔레스타인의 젊은이들이 목숨을 내 던지는 지. 유가족들이 말하는 순교의 이유와 의미를 들어보고 그들의 마음을 헤아려 보자.

◈ 아라파트, 눈을 감다.

팔레스타인 자치정부 수반이었던 아라파트. 11월 11일 그가 숨을 거뒀다. 불과 4개월 전 취재팀이 찾아갔던 7월에만 해도 75세의 나이가 믿기지 않을 만큼 총기 어린 눈빛으로 좌중을 압도하는 카리스마를 보여줬던 아라파트. 언론과 중동 정치권에서는 포스트 아라파트를 준비하느라 분주한데... 자신의 한평생을 팔레스타인에 바친 아라파트. 팔레스타인의 자유를 위해 세계에 전하고자 했던 그의 메시지가 어떤 것인지, 연설회 현장에서 담은 그의 생생한 음성을 직접 들어본다.

2004년 11월 30일 (화) / 제 36 회
제 2 부 : 누구의 땅인가

3대 종교의 성지 예루살렘. 원래는 ‘평화의 도시’ 란 뜻을 지닌 장소지만 1948년 이스라엘 건국 이래 지구상에서 가장 살벌한 곳이 되어버린 땅.
예루살렘을 점령한 이스라엘은 국제사회의 비난 속에도 정착촌 건설로 끊임없이 유대인 지역을 늘려가고 있고, 2천년 동안 살아온 터전에서 하루아침에 쫓겨난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내 조국’을 도둑맞고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테러와 점령.. 악순환 과연 누구의 책임이라 말할 수 있을까?

◈ 공존의 도시, 예루살렘

세계 3대 종교의 성지가 모두 모여 있는 곳, 예루살렘. 통곡의 벽 앞에서 기도하는 유대인들, 성묘교회의 기독교인들, 알 아크사 사원 앞 무슬림들. 이들은 모두 이 곳, 예루살렘이라는 동일한 장소에서 기도를 올린다. 비록 서로 다른 종교를 가졌지만 예전에 이곳은 공동의 성지를 둔 공존의 도시였다.

◈ 평화의 걸림돌, 정착촌

그러나, 1948년 이스라엘 건국과 함께 예루살렘을 유대인의 땅으로 만들고자 하는 이스라엘의 대 예루살렘 계획은 자연스레 팔레스타인 원주민을 고립시키거나 추방하는 꼴이 되어버렸고.. 하루 아침에 자신의 땅에서 쫓겨난 팔레스타인들은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내는 형상이라고 분통을 터뜨린다. 그리고, 그들의 고통과 분노는 점령에 대한 저항이 되어 오늘날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의 씨앗이 되는데..

◈ 정착촌과 팔레스타인 난민 귀환권

이스라엘의 벤구리온 공항. 이 곳에는 하루에도 수 십 명의 이디오피아 유대인들이 이민을 위해 들어오고 있으며, 이미 약 9만여 명의 이디오피아인들이 이스라엘에 정착을 하고 있다. 주택과 가족부양비등을 제공하며 해외 유대인들을 적극적으로 불러들이고 있는 이스라엘. 그리고, 이스라엘의 정착촌 정책에 내몰려 주변국을 떠도는 수백만 명의 팔레스타인 난민들.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고향 땅을 밟을 기회마저 박탈당하고 있는데.. 이-팔 평화의 가장 큰걸림돌이 되고 있는 팔레스타인 난민 귀환권, 그리고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이스라엘의 속내를 들어본다.

◈ 이-팔 리더십의 위기! 중동평화는?

예루살렘 정착촌 건설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이스라엘 샤론 총리의 가자지구 철수안은 평화 정착과 인티파다 진압 실패를 무마하려는 정치적 놀음에 불과하다는 비판적 목소리에 부딪치고.. 팔레스타인 해방운동의 살아있는 역사로 불리 우는 아라파트 역시 이스라엘과의 평화협상 실패 이후 국내외적인 압력과 도전을 받으며 위기의 말년을 맞이한 채 세상을 떠나게 되는데.. 중동 평화 정책을 리더 해왔던 샤론과 아라파트. 엇갈리는 협상 과정에서 그들이 맞이하는 새로운 위기. 과연 그들에 의해 진정한 중동평화의 청사진은 그려질 것인가?

◈ 후예간의 슬픈 전쟁

원래 이스라엘인도 팔레스타인 사람도 거슬러 올라가면 아브라함의 한 후예이다. 그러나 지금은 이웃에 살면서도 서로 적처럼 으르렁댄다. 서로가 이 땅의 주인이 되면 예루살렘에 평화가 올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그러나 ‘이 땅의 주인’ 이 되기 위한 전쟁과 점령이 가져다 준 것은 정작 평화가 아닌 테러와 보복이며, 그 보복은 또 다른 피의 보복을 불러오고 있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형제간의 전쟁.. 그 끝을 위한 공존의 열쇠는 진정 없는 것일까?

2004년 12월 1일 (수) / 제 37 회
제 3 부 : 바그다드

인구 약 450만의 이라크의 수도 바그다드. 미국의 바그다드 함락 이후 1년 7개월이 지난 지금 바그다드는 어떤 모습일까? 11월 7일 쿠르드 지역을 제외한 이라크 전역에 60일 간의 비상상태가 선포된 가운데 겉으로는 평화로워 보이는 바그다드의 속내를 ‘제 3부 바그다드’에서 들여다보자.

◈ 죄 없이 죽어가는 아이들

바그다드 남서부의 알 아밀. 9월 30일 미군의 하수처리장 개장식에서 차량폭탄 공격이 세 차례 일어났다. 개장식에서 나눠주는 사탕을 받으려고 기다리던 아이들 중 35명이 사망. 아이가 입고 있던 셔츠의 조각을 보고 자식의 사망 사실을 알아야하는 부모의 마음은 그 어떤 말도 위로가 안된다. 죄 없이 죽어간 아이들, 누구를 원망해도 소용없다. 지금도 바그다드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 지옥 같은 일상. 그 실상을 살펴본다.

◈ 알라위는 미국의 앞잡이?

시아파 4대 성지 중 하나인 알 카두미야 모스크 앞. 흉물스런 괴물마스크를 앞장 세워 수 많은 인파가 몰려나온다. “알라위는 비겁자! 미국의 앞잡이!”를 외치며 격렬한 시위를 벌이는데... 하나 같이 알라위 정부를 반대하는 시민들. 7월 1일 출범한 이라크 임시정부의 총리 알라위는 총리 지명 당시부터 반정부세력의 반대를 샀던 인물이다. 임시정부 출범 이후 미국의 앞잡이라는 소리를 줄곧들어왔는데.. 현 정부에 대한 이라크 국민의 감정이 폭발한 그 현장에서 그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들어보자.

◈ 포로들의 지옥, 아부그레이브를 가다

아부그레이브에 아들, 남편, 아빠를 빼앗긴 많은 사람들이 미군의 삼엄한 경계 속에도 구름 같이 모여 들었다. 그들은 수용소에 빼앗긴 가족의 죄목이 뭔지도 알 수 없다. 저항활동을 한 혐의로 아부그레이브에 수감됐다가 석방된 남자. 그를 통해 듣게 되는 미국의 비인간적인 행태. 미국에 대한 수치심으로 가득 차 있는 이라크인의 분노를 들어보자.

◈ 바그다드의 미래는?

도무지 미래가 존재 하지 않을 것 같은 혼란의 도시 바그다드. 후세인도 싫었지만 부시도 싫어진 이라크 국민들. 그렇다면 지금 이들은 어디로 가야하는 걸까? 과연 중동 제2위 산유국 이라크의 위용을 다시 찾을 수 있을까? 중동 각국의 여러 전문가와 만나 중동평화의 중심에 서 있는 이라크의 미래를 점쳐본다.

38 회
제 4 부 : 이란, 중동의 힘으로 떠오르다

79년 외세 개입을 반대하고 부패한 팔레비 정권을 무너뜨린 이란의 이슬람혁명은 이슬람근본주의 운동을 확산시키는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혁명 이후, 막강한 카리스마와 철저한 반미정책의 독자노선을 달리며 이란 시아파를 혁명의 자존심으로 똘똘 뭉치게 했던 호메이니. 혁명 25주년을 맞고 있는 올 해. 과연 호메이니의 혁명은 성공 이였을까, 실패였을까?

◈ 순교를 지원하는 사람들

위대한 신의 이름으로 성지 카르발라와 나자프 수호를 위한 출정 준비가 되었음을 선언하는 이란의 시아파 젊은이들. 전체 이슬람교도 내에서도 소수파를 자처하며 끊임없는 반미 투쟁 속에 자신들의 종교적 정체성을 지켜 가고 있는 이들은 이맘이 부른다면 불덩이 속이라도 뛰어들 준비가 되어 있는 이란의 시아파 무슬림들이다.

◈ 이란 혁명의 별

이맘 아야툴라 호메이니. 그는 이란의 영웅이자 시아파를 혁명의 자존심으로 강하게 묶어 놓은 백색혁명의 장본인이다. 외세개입을 반대하고 세계 최초로 이슬람혁명을 달성했던 막강한 카리스마의 호메이니. 지금은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는 호메이니의 생가를 취재팀이 직접 찾아가가 그가 살아생전 혁명을 주도 했던 당시 상황에 대한 생생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 혁명과 순교의 현장에 함께 했던 사람들

1979년 11월 4일. 이란의 회교도와 대학생들은 미국 병원으로 이송된 팔레비 전 국왕의 인신 인도를 요구하며 테헤란 주재 미대사관을 점거하고 미대사관 직원 60명을 인질로 억류해 무려 444일 동안 그들을 감금했다. 당시 세계적으로 떠들썩했던 미대사관 인질사건을 주동했던 핵심 인물 중 한 명을 취재팀이 직접 만나 당시사건 배경과 함께 그렇게 오랫동안 대사관을 점거하게 된 속사정을 들어보았다.

이맘의 부름을 받고 19살 나이에 이란·이라크전에 지원병으로 참전하여 한 쪽 팔을 잃었다는 한 남자. 그러나 그것마저 영광의 상처로 여기며 자신의 팔을 스스로 땅에 묻었다던 어느 참전자와 그를 따라 신혼여행을 전쟁터로 갔다 온 간호사 부인을 만나보았다. 참전 부부의 이야기를 통해 그들에게 전쟁은 또 하나의 ‘성스러운 방어’ 였음을 느끼게 된다. 그들은 주저 없이 말한다. 다시 이맘이 부르다면 어디든지 달려가겠다고.

◈ 중동의 힘으로 새롭게 떠오르는 시아벨트

예멘, 레바논, 파키스탄, 이라크 등 중동 전 지역에 널리 퍼져있는 시아파는 전체 무슬림의 10%밖에 차지하지 않는 소수파이다. 그중 이란은 전체 인구의 95%가 시아파로 수니의 바다에 떠있는 시아의 섬에 비유되면서 이른바 시아파벨트의 중심이라 불려지는데, 특히 9.11테러 이후 이란은 뜻밖의 선물을 얻게 된다. 이란 시아파에 적대적이었던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정권 붕괴와 시아파를 핍박하던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축출로 인한 뜻밖의 수혜자가 된 것. 이슬람교의 2대 종파인 시아. 그리고 그 시아파가 세계적으로 유일하게 정권을 장악한 이란과 함께 그 영향력이 엄청 커지고 있는 시아벨트는 이제 중동의 새로운 힘으로 떠오르고 있다.

2004년 12월 3일 (금) / 제 39 회
제 5 부 : 알 카에다

2001년 9월 11일 뉴욕. 비행기 두 대가 차례로 무역센터와 충돌한다. 이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끔찍한 장면은 일어나지 말았어야 했을 엄청난 재앙이다. 그 배후로 지목된 알 카에다와 빈 라덴. ‘제 5부 알 카에다’에서는 이슬람전투주의를 표방한 국제적 테러단체인 알 카에다와 알 카에다의 1인자로 알려진 빈 라덴의 실체를 파헤쳐본다.

◈ 현상금 300억원의 남자, 한국을 공격하겠다!

흔히들 ‘알 카에다=빈 라덴’을 떠올린다. 그러나 알 카에다의 실질적인 지도자는 따로 있다. 지난 10월 1일 발표한 성명에서 한국을 알 카에다의 공격 대상으로 지목해 우리나라를 긴장케 했던 아이만 알 자와히리가 바로 그 장본인. 이집트의 명문 가문에서 태어나 카이로대학 출신의 의사였던 자와히리. 지금 빈 라덴과 똑같은 300억원의 현상금이 걸려있다고 하는데... 이집트의 사다트 대통령 암살 사건 후 감옥에서 만나 자와히리와 친하게 지냈다는 자야트 변호사를 만나 무엇이 그를 알 카에다로 만들었는지 들어본다.

◈ 알 카에다를 소탕하라

2001년 미국의 대대적인 알 카에다 소탕 작전이 진행됐다. 알 카에다 가담혐의로 아들을 쿠바의 관타나모 수용소에 보내게 된 남자.
예멘에서 그를 만났다. 아들이 잡혔다는 소리를 신문을 통해서야 알게 되었다는 아버지. 지금은 생사조차 알지 못하는 아들. 아버지는 아들이 알 카에다가 아니라고 말하는데...
한편 파키스탄에서도 역시 관타나모에 수감되었다 무혐의로 석방된 22살의 청년을 만날 수 있었다. 알 카에다에 가담했다는 것이 그의 죄목이었다는데... 아무런 죄 없이 잡혀간 관타나모에서 받았던 상식 밖의 고문! 한 청년의 버려진 18개월간의 시간은 누가 어떻게 보상해주어야 할런지...

◈ 빈 라덴의 흔적을 찾아서...

빈 라덴의 흔적을 찾아서 취재팀이 떠난 곳은 아프가니스탄의 토라보라. 민병대의 경호를 받으며 높고도 험한 산 토라보라를 등반한다. 그곳에서 만난 빈 라덴의 흔적들. 빈 라덴을 잡으려는 미국과 미국을 피해 다니며 괴롭히는 빈 라덴. 미국의 알 카에다 소탕작전으로 형체도 온전하지 못한 빈 라덴의 은신처와 훈련소를 현지 민병대장의 안내로 살펴본다.
또한 파키스탄에서 빈 라덴이 살았다던 페샤와르의 부촌과 79년 대소 아프간 전쟁 당시 알카에다의 실질적 집결지였던 게스트 하우스를 찾아가 그의 흔적을 좇는다.

◈ 단독 입수한 빈 라덴 모습 공개

전세계를 테러의 공포로 떨게 하는 빈 라덴. 그렇지만 페샤와르의 사들 바자르(시장)에서 만난 시민들은 빈 라덴을 좋은 사람이라고 한다. 더군다나 이라크전으로 인해 알 카에다는 더욱 강화되고 있는데.. 무엇이 빈 라덴을 좋은 사람으로, 알 카에다를 강하게 만들고 있는지 이슬람의 입장에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취재진이 단독 입수한 빈 라덴의 모습을 공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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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길 나의 꿈 - 할 일 많은 경기도 일 잘하는 김문수
김문수 지음 / 미지애드컴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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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난 오리새끼‘
이제는 경기도지사가 된 국회의원 김문수는 스스로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재야에서는 변절자로, 한나라당에서는 빨갱이로 불리우는 자신의 처지를 나타낸 것이죠. 71년 현장에 투신한 이래, 수배와 고문, 구속의 고통 속에서 74년 민청학련 사건, 79년 도루코노조 위원장, 85년 구로동맹파업과 86년 5·3 직선제 개헌 투쟁에 이르기까지, 그는 참 열심히 민주화 운동을 했습니다. 그런 그가 94년 집권 민자당에 입당한 것을 두고, 재야에서는 변절자로 한나라당에서는 빨갱이로 부르는 것입니다.

87년 6월항쟁이 6·29 선언을 이끌어냈을 때 그는 감옥에 있었습니다. 2년 6개월간의 감옥생활에서 사면되고, 유신헌법과 체육관 선거도 사라지고, 민간인 출신 대통령이 당선되어 25년 만에 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던 김문수. 그가 어떤 심경으로 자신의 진로를 선택했는지 모르지만,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젊어서는 좌파로 지금은 우파로 여겨지지만, 대한민국에 대한 애국심과 대한민국 선진화 라는 단어 앞에 나는 변한 것이 없다.”

‘대한민국에 대한 애국심과 대한민국 선진화‘ 이것이 정치인 김문수의 변하지 않은 정치철학인 것입니다.
제도권에 들어갔다고 해서, 야당이 아닌 집권여당에 들어갔다고 해서 비판하는 것은 정치적인 태도가 아닙니다. 87년 6월항쟁은 다양한 계층과 집단의 참여 속에서 이루어졌고, 500여만명이라는 거대 집단의 최소공약수는 정치의 민주화였습니다. 직선제로 대표되는 정치적 민주화가 이루어진 사회에서, 그가 더 이상 재야에 남아있을 이유는 없다는 것입니다. ‘민주화‘ 란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최소한의 절차를 의미할 수도 있고, 정치 경제를 아우르는 전반적인 사회의 상태를 의미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비판은 정치적이어야 합니다. 그가 가진 정치철학 - 탈규제, 사교육 옹호, 등 - 과 정당하게 경쟁하고 투쟁해야 합니다.

시장에 대한 정치적 규제는 시장의 실패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수도권정비계획‘은 그것의 성공과 실패를 떠나서, ’균형개발‘ 이라는 민주적 목표와 ’서울과 지방의 격차‘ 라는 시장의 실패로부터 기인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한나라당과 김문수 지사가 공유하고 있는 정책에는, 애초의 목표와 문제의식은 생략된 채로, ’수도권정비계획의 실패’만 있을 뿐입니다.

규제는 시장에 대한 규제이지, 개발에 대한 규제가 아닙니다. 규제는 정책적 무기력함에도 불구하고, 비민주적인 시장을 통제하기 위한 노력이요, 민주적 개발을 위한 노력입니다. 수도 이전, 공공기관 지방 이전, 수도권정비계획, 공교육의 옹호, 등의 실패가, 이들의 탈규제·성장만능주의의 정책적 성공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우파들이 이것에 대답할 수 있어야 진정한 정치적 경쟁이 가능합니다. 지난 5·31 지방선거와 더불어 다가올 대선에서 가시화되고 있는 이들의 집권이 이것을 증명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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