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한겨레)

토머스 프리드먼은 <세계는 평평하다>(창해)에서 세계화의 과정을 세 단계로 나눴다. 세계화 1.0 시기는 콜럼버스가 대서양을 항해해 구세계와 신세계의 장벽을 허문 1492년부터 1800년 전후까지다. 이 시기에 지구적 통합을 이뤄내는 변화의 동력은 마력이나 풍력, 화력으로 표시할 수 있는 국력과 그 힘을 얼마나 적절하게 배치하는가에 관한 창조적 재능이었다.

2.0 시기는 1800년부터 2000년까지로 이때의 동력은 다국적 기업에서 나왔는데 변화의 강력한 추진력은 초기의 화력선과 기차에서부터 전화와 컴퓨터에 이르기까지 주로 하드웨어에서 나왔다. 개인이 전 세계적 차원에서 협력하고 경쟁하게 된 지금의 3.0 시기에 동력은 하드웨어가 아닌 광케이블을 통한 네트워크와 여러 가지 새로운 형태의 소프트웨어에서 나온다.

계몽서이기에 당대의 특성이 고스란히 드러날 수밖에 없는 우화 또한 시대적으로 달랐다. 국가가 평균적 능력의 신민을 요구하던 1.0 시기에는 ‘이솝우화’나 ‘라퐁텐 우화’가 안겨주는 윤리적 교훈과 재미가 안성맞춤이었다. 전세계 국가들이 일제히 석유 확보에 나섰던 1970년대 말의 오일쇼크가 엄청난 불경기를 불러왔을 때만 해도 대중은 리처드 바크의 <갈매기 조나단> 같은 책에서 크나큰 위안을 얻었다. 대부분의 갈매기들이 오로지 먹이를 더 많이 찾기 위해 날았지만 주인공 조나단은 남보다 높고 멀게 나는 게 꿈이었다. 그러나 조나단은 결국 자신의 꿈이 남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같음’의 미학을 깨닫게 된다.

2.0 시기에 전 세계를 강타한 우화는 1998년 미국에서 출간된 스티브 존슨의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다. 이 우화가 강조하는 것은 미로(기업주)는 결코 변하지 않으니 남보다 ‘빨리’ 치즈가 있을 법한 미로를 찾아내라는 철저한 환경순응의 철학이다. ‘변화’라는 교훈은 결국 스스로 ‘차이’를 만들어내라는 것에 다름없다.

올해 상반기에 치열한 3파전을 벌이고 있는 세 우화는 누구도 가지 않은 길, 곧 ‘외길’을 갈 것을 요구한다. <마시멜로 이야기>(호아킴 데 포사다 외, 한국경제신문사)는 마시멜로라는 달콤한 과자를 먹고 싶은 욕구를 참아내는 자만이 미래에 누구보다 많은 마시멜로를 지닐 수 있다고 말한다. <핑>(스튜어트 에이버리 골드, 웅진윙스)에서 주인공인 개구리 핑은 부엉이(멘토)의 도움을 받아 누구도 가지 못하는 ‘황제의 정원’으로 향한다. <배려>(한상복, 위즈덤하우스)에서는 남을 위한 배려나 나눔의 철학을 강조하지만 그것도 결국 개인의 성공을 위한 것일 뿐이다.

오늘날 개인은 국가도 통제할 수 없는 눈에 보이지 않는 외부의 강력한 힘에 지배받는다. 그 힘을 가진 이는 토마스 프리드먼이 <렉서스와 올리브나무>(창해)에서 말한 ‘초강대 개인’일 수 있다. 프리드먼은 초강대 개인은 ‘초강대 국가’나 ‘초강대 자본’과도 맞설 수 있다고 말하며 개인의 능력을 한껏 띄워놓았다.

하지만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를 기업주들이 대량 구매해서 직원들에게 나눠준 ‘쓰나미’가 지나간 후 이 땅에는 전국민의 임시직화가 진행되었다. 이제 대중은 원초적인 인간관계만을 그린 소설 또는 최상의 멘토는 자기 자신이라고 유혹하는 자기계발서, 외길을 가라는 우화 등에서나 겨우 ‘개인’의 힘을 느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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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겨레)

‘87’은 지고 ‘97’은 뜬다. 여기서 87은 민주화의 원초적 체험인 1987년의 6월 항쟁, 97은 세계화의 원초적 체험인 1997년의 외환위기를 말한다. 87의 정서는 오로지 정상이나 중심을 향한 외길이었지만 97의 정서는 비록 오솔길일지언정 자기만이 만족하면 되는 길이다. 그것은 삶의 방향성이 아니라 삶의 무늬를 추구한다. 그리고 그 무늬는 매우 섬세해지고 있다.

이런 흐름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영화다. 영화시장에서는 <쉬리> 등장 이후, <공동경비구역 JSA>, <실미도>, <태극기 휘날리며>, <동막골> 등 분단과 전쟁 그리고 민족주의를 다룬 영화가 연이어 등장하며 전국민을 역사적 ‘경험의 공동체’로 만들었다. 그러나 2005년 연말에 개봉한 <태풍>은 초특급 블록버스터 영화였음에도 관객 420만 명에서 막을 내리고 저예산 영화 <왕의 남자>가 전인미답의 1200만 관객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왕의 남자>는 한마디로 세대마다 자기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다초점 영화다. 작년에는 <내 이름은 김삼순> 같은 로맨스 판타지를 원작으로 하는 드라마가 인기를 끌었지만 지금은 19세기와 21세기를 넘나드는 만화가 원작인 드라마 <궁>이 인기다. 하지만 두 유형 어디에서도 진지한 ‘구라’는 찾아보기 어렵고 가벼운 ‘수다’만이 넘친다.

출판시장에서도 ‘개혁적 열망’을 담은 책이 힘을 잃은 지 오래다. <모모>(미하엘 엔데 지음)가 드라마에 몇 번 소개된 뒤 85만 부나 팔렸던 것처럼 영상과 결합한 책은 언제나 상종가를 친다. 20권이나 되는 <만화로 보는 그리스 로마신화>가 100만 질의 신화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가운데 <서바이벌 만화 과학상식>(코믹컴 외 지음), <마법 천자문>(시리얼 지음), <코믹 메이플 스토리>(송도수) 같은 스토리 만화 시리즈들도 모두 400만 부를 넘겼다. 홈쇼핑에서는 150만원이 넘는 그림책 시리즈가 1시간 방영으로 20억원의 매출을 기록하기도 한다. 하지만 소설 분야는 아무리 평단에서 주목받는 작품이라도 3천부 초판을 넘기기 어렵고 1만부 넘는 작가는 손가락을 꼽을 정도이다. 인문서 또한 1천 부를 넘기기 어렵다.

외환위기 직후만 해도 우리 사회의 담론은 ‘변화’였다. 변하기만 하면 나도 언젠가는 ‘성공’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다. 하지만 월급으로 먹고 사는 사람보다 자본운용으로 즐기는 사람이 늘어나는 등 우리 사회가 급격하게 양극화하면서 그런 믿음은 이제 완전히 사라지고 있다. 오르지 못할 나무는 포기하고 경쟁사회의 어지러움증에서 스스로 벗어나려 하고 있다.

<마시멜로 이야기>(호아킴 데 포사다 지음), <핑>(스튜어트 에이버리 지음), <배려>(한상복 지음) 등 지금 베스트셀러에 상위권에 올라있는 우화형식을 차용한 자기계발서가 대중에게 자기만의 길을 가라고 촉구하고 있는 것은 모두 이런 흐름을 반영한다. ‘산다는 것’과 ‘죽는다는 것’을 다룬 책이나 특이한 이력의 삶을 가진 사람들의 감동적인 자전적 이야기에서 위안을 얻고자 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87’과 ‘97’의 세대교체는 물론 물리적 나이의 세대교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문화소비자는 동일하지만 앞의 경험은 급격하게 잊혀지고 뒤의 경험이 강렬하게 작용하는 것이다. 이런 흐름이 지금 문화시장의 판도를 완전히 뒤바꿔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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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겨레)

새해에는 늘 새로운 기대로 들뜨게 마련이지만 올해 출판시장은 꼭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새해 벽두부터 ‘사재기’란 악재가 터진 데다 일반론으로 악재라 여겨지는 것들이 올해에는 적지 않기 때문이다. 출판 불황을 이야기할 때 주로 상황적 근거를 대기 마련인데 그런 측면으로만 보면 올해는 대한민국 건국 이래 출판의 최대 위기라고 볼 수도 있다.

가장 큰 위기의 원인은 걸어다니는 인터넷 시대의 개막이다. 당초 계획보다 조금 늦춰지긴 했지만 상반기 중에 이동하면서 초고속 인터넷을 사용할 수 있는 무선 휴대인터넷인 ‘와이브로’ 상용화 시대가 열릴 것이다. 인류가 생산한 ‘모든’ 지식이 인터넷으로 모이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이가 없는데 이제 그것을 언제 어디서나 활용할 수 있게 된다니 정보매체인 책으로서는 크나큰 위기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뿐이 아니다. 5월에는 지방선거, 6월에는 월드컵 축구가 있다. 이미 우리 국민은 2002년에 4강 신화를 맛보았던 터라 밤을 새워가며 열광할 것이기에 책을 가까이 할 시간이 없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출판은 희망이 없는가? 아니다. 늘 기회는 위기와 함께 온다고 했지 않은가? 인간은 언제나 이런 상황을 반전시킬 방안을 스스로 마련해왔다. 올해라고 예외이겠는가? 올해 그것은 ‘디테일 기획’이 될 것이다.

원래 사소하게 보이는 디테일에 의해 주요 프로젝트나 사업의 방향이 결정되게 마련이다. 책하면 보통 거창한 이론을 떠올리게 되지만 앞으로는 책에서 제시하는 섬세한 디테일에 의해 책의 운명이 달라질 것이다.

지난해 초에 나는 2005년의 화두는 ‘어젠다’가 될 것이라고 했다. 실제로 작년 출판시장의 최대 화두는 어젠다였다. 어젠다는 인간이 스스로 실천할 수 있는 좌표이다. 작년에 그것은 실천매뉴얼, 미래담론, 요다형 책, 기본과 원칙, 임파워먼트 등 다섯 가지로 나타났다. 그런데 그런 담론은 총론에서 각론으로, 총괄성에서 구체성으로, 전체에서 부분으로, 종합에서 세부로 변해왔다. 그런 흐름이 올해에는 좀더 디테일로 나아갈 것이다.

그 증거는 지난해 출판시장에서 나타났다. 대표적인 것이 10만 부 이상 팔린 <괴짜경제학>(스티븐 레빗 외, 웅진지식하우스)이다. 이 책의 주제는 ‘인센티브’가 인간의 일상을 어떻게 지배하는가이다. 그런데 논의의 출발점은 일상에서 벌어지는 ‘보잘 것 없는’ 정보, 즉 정보의 ‘노이즈’다. 과거에 노이즈는 늘 무시되었지만 디지털 시대에는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예를 들어 평범한 주부 개개인의 가계부는 소음 같은 노이즈에 불과하지만 1만 명의 가계부가 모이고 그것이 디지털화해 즉각 데이터 분석이 가능한 상태가 되면 그를 통해 기업이나 국가가 경영전략을 세울 수 있다.

지금의 베스트셀러 중에 노이즈라는 디테일의 힘을 강력하게 실증하고 있는 책은 2초 안에 일어나는 순간적인 판단인 직관 또는 통찰을 다룬 <블링크>(말콤 그래드웰, 21세기북스)와 행복한 인간관계를 위한 방법론을 제시하는 <끌리는 사람은 1%가 다르다>(이민규, 더난출판)다. 공들여 쌓은 탑도 벽돌 한 장 때문에 무너지고 1%의 실수가 100%의 실패를 부른다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이 책들은 일상의 사소한 요소들을 분석해 제시하고 있다.

작은 차이가 큰 변화를 이뤄내는 디지털 시대. 어떤가? 당신도 디테일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보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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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겨레)

“책의 시대는 이제 겨우 시작되었을 뿐이다.” 아니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린가 하겠지만 도쿄대학 교수인 사토 도시키 <책과 컴퓨터> 최신호에 실린 ‘책은 아직 생기지 않았다’란 다소 도발적인 제목의 글에서 이런 주장을 했다.
그의 주장을 요약하면 이렇다. 과거의 책은 파노라마처럼 시각이나 청각, 후각을 전달하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그런데 영상과 음성 미디어가 발달하자 이런 감각을 효율적으로 기록하거나 전달하는 수단이 꼭 책이어야 할 필요가 줄어들었다. 컴퓨터가 멀티미디어의 제왕으로 등극한 이후에는 한때 멀티미디어였던 문자는 다른 감각매체를 대신하는 자리에서 해방되었다.

그래서 양적인 책의 비중은 훨씬 줄어들고 있다. ‘책의 위기’나 ‘교육의 위기’의 상당부분은 만들기 쉽고 읽기 쉬운, 가령 지은이의 이름으로 파는 책, 독자가 이미 알고 있는 것 알고 싶은 것을 반복해주는 책, 대학교수가 교과서라 칭하며 권력으로 팔던 책들로 장사할 수 없게 된 것에 대한 두려움일 것이다. 그들이 사라진 새로운 지구에서 인류는‘책’과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그것은 ‘구텐베르크 은하계’에서 놓친 ‘책’다운 ‘책’이다. 아직은 그 모습을 상상하기 어렵지만 그런 ‘책’들이 다가올 것이다.

하지만 상상하기 어려운 것만은 아니다. 전세계 거의 모든 나라가 출판매출은 매년 감소하고 있지만 청소년도서는 성장하고 있다. 이때 청소년도서도 정보를 가공하고 판단하는 능력을 키우는 새로 ‘시작’되는 책들이 큰 흐름을 이룬다. 미국에서는 지난해에 45.3%라는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였으며 중국에서도 판매액이 16.4%나 증가했다. 일본 대형출판사들은 청소년 대상의 만화가 아니면 편집자 임금도 주기 어렵다고 아우성이다.

우리라고 다른가 출판사의 크기와 관계없이 일제히 청소년출판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 때마침 2008년에는 모든 국정교과서가 검인정으로 바뀔 예정이다. “인류문화의 정수를 모아놓은 표준지식”을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지적 호기심을 유발하고 더 깊은 지식습득의 길을 알려주는 안내자”가 되려는 것이다.

하지만 교과서만 바꾼다고 만사형통인 것은 아니다. 아이들 머리 뚜껑을 열어놓고 모든 지식을 쏟아 붓기만 하는 지금의 ‘교실수업’같은 일은 컴퓨터가 얼마든지 대신해줄 수 있지만 스스로 보고 느끼고 맛보며 읽는 멀티미디어적 감각으로 상상력을 키워가는 것은 도서관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그래서 학교도서관이 대세다. 학교도서관문화운동네트워크( www.hakdo.net)의 주최로 지난 7일 국회에서 열린 학교도서관 정책토론회의 열기는 분명 그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자리에서 경희대 도정일 교수는 군사정권은 우민화정책 때문에 학교도서관을 기피했다지만 그 이후에도 학교도서관을 잉여적인 존재로만 여기는 공통점이 있다고 했다. 문민정부는 인터넷만 있으면 학교가 필요 없는 것처럼 말했고, 국민의 정부는 게임만 잘해도 대학간다고 외쳤고, 참여정부는 문화산업 잘 되어야 먹고산다는 말만 하고 있다는 것이다. 더구나 교육부는 얼마 전 교육방송의 수능과외라는 사교육을 위해 학교도서관 리모델링 예산을 100억 원이나 삭감해, 공교육을 희생했다는 혐의마저 받고 있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른 법이다. 100억원부터 제자리로 되돌려놓는 것이 바람직한 교육의 출발점이다. 정책당국자의 빠른 답변을 기다린다.

한기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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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겐 영화밖에 없다 - 영화 제작.감상을 위한 이효인의 영화캠프
이효인 지음 / 한국문학사 / 2000년 4월
평점 :
절판


'영화는 종합예술' 이라는 말이 있죠.
종합되기 이전의 각각의 예술을 상대하는 것도 만만치 않은데, 더욱이 종합까지 하라니요.

그래서인가요. 어두운 영화관을 나올 때면, 꼭 담배 한대가 생각나는 것이..

저자와 책 속의 주인공 슬기는 몹시 바쁩니다.
영화의 시작과 발전에 대해, 영화를 이루는 다양한 요소들에 대해 설명하는 것 만으로도 책 한권이 금방입니다.

저자는, 영화의 구성요소들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 여러번 반복해서 볼 것을 권합니다.

줄거리를 파악하며 한번,
시퀀스를 나누며 한번,
쇼트 수를 파악하며 한번,
카메라의 움직임에 주목하며 한번,
미장센에 주목하여 한번,
사운드에 주목하여 한번,
조명에 주목하여 한번, 모두 일곱번이죠.

차마 용기는 나지 않지만, '영화는 종합예술' 임을 실감하게 됩니다.

최초의 영화가 1895년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이 잘 믿어지지 않아요. 일전에, 고전 중의 고전으로 꼽히는 <전함 포템킨> 이라는 영화를 분명히 봤음에도 불구하고, '수병들의 반란' 이라는 역사적 사실에만 집중하느라, 흑백화면이니 제작의 시기에는 도통 무관심했던 것이죠. 그 후 영화가 본격적으로 발달하는 것은 1930년대부터라고 하네요.
(대공황 속의 영화라니, 간신히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가 생각나는군요.)

우리가 익숙해져있는 블록버스터(Block-buster)라는 요즘 영화의 한 특징이, 가정에 자리잡은 TV와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영화의 생존전략이었다는 사실도,
장르(Genre)영화가, 미국 동부영화계를 피해 따로 서부에 자리잡아야했던 유태인계 영화자본 특유의 특성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도, 무척 흥미롭습니다.

영화는 흥미롭지만, 책보다 더 어려운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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