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초로 아저씨의 세계화에서 살아남기 - 만화로 보는 자본주의와 세계화의 역사
엘 피스곤 지음, 김명신 옮김 / 부광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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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한미FTA가 화두입니다. 한국과 미국의 시장을 통합하겠다는 한미FTA.
통합된 시장에서 새로운 경쟁자들을 만나야 하는 양국의 사업가들과 이들의 이해를 반영해야 하는 양국의 정부가 한참 협상에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한미FTA라는 협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멀리 WTO까지는 올라가야 합니다. WTO란 전 세계의 시장을 한번에 통합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인데, 언뜻 봐도 그리 만만치 않아 보입니다. 지방에서 줄곧 1등을 해왔던 우등생이 전국수학능력시험장으로 나서는 두근거림이라고나 할까요.

WTO 협상이 만만치 않으면서 등장하는 것이 FTA입니다. 한번에 전 세계의 시장을 통합하긴 어려우니, 평소 교역이 많았거나 지리상 가까운 국가들 사이에서 먼저 시장을 통합해보는 것이죠. 엊그제 한칠레FTA 협상을 했던 것과 같이, 한미FTA는 전세계의 시장을 거미줄처럼 엮어들어가는 수많은 FTA 중 하나일 뿐입니다.

우리는 이런 것들을 두고 '세계화'라고 합니다. 굳이 한미FTA가 아니라도, 우리 일상에서 외국의 재화나 서비스를 이용하는 것은 그리 어색한 일이 아니죠. 한미FTA는 그것을 더 활발하게 만들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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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세계화'라는 낭만스러운 표현에는 약간의 함정이 있습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그것은 '시장의 세계화' 내지는 '자본의 세계화' 라고 불러야 합니다.
왜냐하면, 세계화를 통해 세계적으로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죠. 각국의 사업가들이 좀 더 나은 투자 조건을 찾아 국경을 넘나들게 되는 것 처럼, 노동자들 역시 더 나은 노동조건을 찾아 자유롭게 국경을 넘나들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니니까요.
얼마 전, 미국이 멕시코와의 국경 검문을 강화했던 것이나, 그 전에 유럽의 흑인 젊은이들이 폭동을 일으켰던 데에는, 이주노동자에 대한 각국 정부의 각박한 태도가 깔려있는 것이죠.

세계화를 둘러싼 이런 모순적인 풍경은, 우리가 세계화를 너무 단순하게 단편적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가르켜줍니다. 한미FTA가 WTO라는 국제무역협정에서 부터 비롯되었듯이, 국제무역협정은 왜 갑자기 시작되었는지, 더 넓고 깊게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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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초로아저씨의 세계화에서 살아남기>는 멕시코의 정치풍자만화가 엘 피스곤의 풍자만화집입니다. 한미FTA협정에 반대하는 분들이 종종 멕시코 사례(미국-멕시코FTA)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데요, 막상 자국에서 FTA를 경험한 그는 미국-멕시코FTA에 국한해서 얘기하지는 않습니다. 그는 멀리 돌아 자본주의의 기원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세계화, 아니 정확하게 시장의 세계화는, 200여년 전부터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이죠. 그것이 유럽 강대국들의 식민지 정책과 1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지고, 복지국가와 사회주의국가의 탄생, 냉전의 와중에서 한숨 돌렸다가, 1970년대 인플레이션을 기점으로 다시 시작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즉, 세계화라는 것은, 끊임없이 시장을 세계화하고자 하는 자본주의의 기본 운동법칙의 하나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군대를 동원해 공공연히 시장을 개척했다면, 1970년대의 그것은 돈을 이용합니다. 남미를 비롯한 제3세계 국가들에 대한 상상을 초월한 채무와 이것을 빌미로 한 해당국 시장의 개방입니다. 칠레의 독재자 피노체트, 영국의 노동조합운동을 억눌렀던 대처, 미국의 레이건을 시작으로 해서, 아르헨티나, 멕시코, 페루, 브라질과 같은 남미 국가 뿐 아니라, 프랑스, 스페인과 같은 유럽권 국가들의 정부가 등장합니다. 저자의 시각이 좀 더 넓었다면, 한국의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정부도 들어갔을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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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 자체를 탓할 필요는 없습니다. 문제는 '시장의 세계화'일 뿐이죠. 즉, 누구에 의한, 무엇을 위한 세계화인지가 중요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한미FTA와 같은 시장의 세계화로 인해 고통받을 이들, 그래서 이에 반대하고자 하는 이들에게도 큰 시사점을 남겨줄 것입니다.

단순히 한미FTA에 대한 찬반논쟁은 정말 중요한 논점을 흐릴 수 있습니다. 예상되는 협상의 결과에 따라 일희일비할 사람인지, 아니면 협상의 결과에 상관 없이 시장의 세계화에 의해서 고통받는 사람인지 잘 따져봐야 할 것입니다. 세계화 시대에 아무렴, 국적은 상관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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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즐겨보는 한 드라마의 대사란 이런 것이다.
"빨갱이들이란 도무지 제 가족이란 안중에 없는 것들이죠."

몹쓸 놈의 이념이 가족을 가르는가?

그렇지 않다.
이념이 가족을 가른다는 일반화는 잘못되었다. 극중 동우와 해경이 그렇듯, 지배세력의 이념은 가족을 가르지 않기 때문이다.

동기와 운혁이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가족과 이별해야 했던 것은,
그들의 신념이 적어도 지배계급의 그것이 되지 못했기 때문일 뿐이다.

지배계급의 신념에 동의하지 않는 당신에게 한마디 조언하고 싶다.

신념 이전에 형성되어 있는 가족인들 어찌하겠나.
다만, 이런 상황에서 앞으로의 비극이나마 막기 위한 최선은, 당신이 가족이라는 공동체를 구성할 의향이 있다면, 우선적으로 신념을 따져보라는 것이다.

물론, 연애를 하고자 할 때도 명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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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6-26 10: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정 박헌영 일대기
임경석 지음, 이정박헌영기념사업회 엮음 / 역사비평사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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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이정 박헌영 전집의 일부입니다. 이승만, 김구, 여운형, 김규식, 등과 함께 해방 이후 정국을 주도했던 그에 대해서 객관적인 자료는 부족한 채, 왼쪽이든 오른쪽의 편향적인 평가만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문제의식에서 쓰여졌습니다.
일대기는 그와 관련한 신문이며, 경찰 및 미군정의 자료들을 연대기 대로 나열하는 형식을 갖추고 있으며, 이에 대한 저자의 판단은 최대한 절제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습니다.

해방 이후의 역사에 대한 어리석은 접근 중의 하나는, '왼쪽이 옳으냐 오른쪽이 옳으냐'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접근은 우리의 사고를 제약하며, 자칫 소모적인 비난으로 치우치기도 합니다.
좀 더 발전적으로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왼쪽이든 오른쪽이든 그들의 행보를 둘러싼 이해관계를 이해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해방이라는 권력의 공백기 상태에서 각각의 세력과 인물들이 구상했던 사회상과 실천을 이해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박헌영이라는 인물에 대한 연구가 50년 동안이나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옳고 그름을 떠나서 우리에게 큰 손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정치가는 대중들의 정치적 열망을 대변하는 사람들입니다. 그에 대한 연구는 곧, 해방 직후 박헌영과 조선공산당에 대한 광범위한 정치적 지지에 대한 연구를 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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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를 통해서 우리는, 한국 사회주의 운동의 전형을 옅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님 웨일즈의 <아리랑>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나와있지만, 박헌영 역시도 그 전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1919년 3ㆍ1 운동을 통해 정치활동을 시작하며, 이어진 일제의 탄압, 그리고 망명. 망명지는 1923년 간도대지진 이전까지는 일본이었고, 이후에는 중국이었습니다. 물론, 정치활동과 상관없이 일제 하 200만에 가까운 조선인들이 일본, 만주, 중국, 미국, 등지로 떠나게 되죠.

여튼, 1923년 이후 중국으로 모인 조선의 정치가들은 자연스럽게 러시아 및 중국의 사회주의자들과 교류하게 되고, 그 속에서 그(녀)들 각자의 정치적 경향은 화학적인 반응을 일으키게 됩니다. 박헌영의 경우 러시아 사회주의자들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고, 조선에서부터 외국어(영어 및 에스페란토어)에 능숙했던 그는 러시아 대학에서 수학합니다. 그가 러시아로부터 정치적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는 것을 예측해 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 이후의 그의 활동은, 조선 내에서 공산당을 설립하는 것으로 축약될 수 있습니다. 그것으로 인해 두차례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았고, 해방이 될 때 즈음 그는 목수로 위장해 지하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해방과 동시에 조선공산당을 수면 위로 띄우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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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좌익' 내지는 '공산당' 이라는 한마디로 일축하는 해방 이후의 세력이란, 사실 굉장히 다양한 세력들의 집합이었습니다. 더군다나, '좌익' 으로 묶인 상당수 세력 중에, 실제 해방 이후에 사회주의 강령을 공식적으로 주장한 세력은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즉, 해방 이후의 정치적 이슈는 '자본주의냐 공산주의냐' 하는 것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오랜 일제 치하와 독립에 대한 열망 속에서, 해방 이후 가장 중요한 정치적 이슈는 (1) 친일파 청산 (2) 봉건적 지주제의 청산 (3) 스스로 새로운 국가의 기틀을 닦는 것 이 세가지에 있었다고 보여집니다.
따라서, 해방 직후 대중들의 정치적 지지는 이러한 요구의 대변 여부에 달려있는 것이었죠. 조선공산당이 대중적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 이유도 거기에 있었습니다.

이러한 정세가 급변하는 것은, 모스크바 삼상회의 직후 불거진 찬탁/반탁이 정치적 이슈로 부각하면서 부터입니다.
모스크바 삼상회의는, 조선인들 스스로 국가를 수립할 수 있도록 하고, 이를 지원하기 위해서 당시 조선에 진주하고 있던 미국과 소련 양국이 공동위원회를 구성해 제반 원조 방안을 논의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신탁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이 회의안을 기점으로 조선은 찬탁/반탁의 열풍으로 휩싸이게 되고, 응당 이 회의안에 찬성했던 정치세력들의 입지가 줄어들게 됩니다.

더 이상은 외국에 의한 지배를 원하지 않았던 조선인들의 열망에 비해, 그것을 대변하는 정치세력은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대다수 정치세력은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미국과 소련이 조선인의 정부 수립을 인정하고 지원한다는 것 자체에 의의를 두었던 듯 하며, 박헌영의 조선공산당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리고 이 회의안에 찬성했던 정치세력들이 찬탁이라는 오해를 받으면서, 반사적 이익을 통해 정치적 입지가 넓어진 것은,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신탁통치안을 제출했던 미국과 미군정, 그리고 한국민주당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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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탁/반탁 논쟁과 더불어 박헌영과 조선공산당의 정체성을 옅볼 수 있는 것은, 좌우합작입니다.
좌우합작은 조선인민당의 여운형 선생이 주도합니다. 그런데, 좌우합작의 핵심은 좌와 우를 합작한다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그것의 핵심은 자주적 정부의 구성에 있습니다.

앞에서 해방 이후 정치적 이슈의 핵심은 (1) 친일파 청산 (2) 봉건적 지주제의 청산 (3) 스스로 새로운 국가의 기틀을 닦는 것 에 있다고 말씀드렸는데요, 좌우합작이란 (3) 을 위해서 다른 것을 포기할 수도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조선공산당은 (1)과 (2)가 전제되지 않은 좌우합작에 찬성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좌우합작은 여운형의 암살과 함께 실패하고 맙니다.

조선공산당이 좌우합작에 반대했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남과 북의 분리를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이 (1) (2) (3) 세가지 모두에게서 대중적 지지를 받았던 조선공산당이 스스로의 정치적 목표를 포기하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1) (2) 없는 (3) 만을 이룰 수는 없었던 조선공산당은, 다른 방법을 통해서라도 (1) (2) (3) 모두를 이루고자 했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좌우합작 실패를 즈음하여 박헌영을 비롯한 조선공산당이, 활동의 축을 북으로 옮기게 되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3당 합당을 통한 남로당의 결성은 그 이후의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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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으로 옮겨간 이후의 박헌영의 행적에서 특이할 만한 점은 없었습니다.
곧 이어 한국전쟁이 일어났고, 정전협상 이후 그는 미국의 간첩이라는 누명을 쓰고 김일성에 의해 숙청당합니다. (조선노동당 내에 남과 북 모두 여러 경향이 혼재되어 있었다는 것은 알려져 있는 사실이나, 새로운 자료를 통해 신중히 접근해야 할 부분입니다.)

박헌영. 그 역시 정치 외에 개인적 행적을 거의 남기지 않은 열정적인 정치가였습니다. 그는 조선공산당 당수이기 이전에, 해방 이후 조선인들의 정치적 열망을 대변하고자 했던 정치가였고, 북으로 넘어가기 까지 친일파 청산, 봉건 지주제의 청산, 자주적인 국가의 수립이라는 열망 그대로를 포기하지 않았던 인물이었습니다.

'불필요한 이념 논쟁' 이라고들 합니다.
하지만, 이념 논쟁은 소중하고 필요한 것입니다. 불필요한 것은 이념 논쟁의 흉내를 내는 엉터리 편가르기 싸움입니다.
박헌영 그에 대한 연구가, 해방이라는 정치적 열망으로 가득찬 역사의 한 순간을 돌아보는데 있어서, 진정한 이념 논쟁에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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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eune 2006-08-26 2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읽을만 하던가요? 요즘 한국공산주의운동사연구라는 책을 읽고 있는데 이 책을 서점에서 보고 살까 말까 망설이고 있었거든요^^

sb 2006-08-27 1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정 박헌영 일대기>는 '박헌영 전집'의 일부입니다. 전집의 나머지 6권은 그의 글이나 논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일대기는, 신문이나 재판기록을 바탕으로 해서 시간 순서대로 그의 행적을 복원한, 일종의 자료집에 가깝습니다.
 
로자 룩셈부르크 평전
막스 갈로 지음, 임헌 옮김 / 푸른숲 / 200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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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출신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
그녀가 태어난 1871년은 러시아 전역에서 나로드니즘이 일어나던 시점이었다. 봉건 구체제에 저항하고자 했던 나로드니키들은, 차르 정부의 요인들을 암살하는 것을 통해 뜻을 펼치고자 했고, 이들의 장렬한 죽음은 젊은이들을 이 대열로 끌어들였다. 러시아령 폴란드에서 유태인으로, 지체장애로 차별받았던 학생 로자 역시도 이 젊은이들 중 하나였다.

로자가 본격적으로 혁명운동에 뛰어드는 것은, 나로드니즘에 대한 당국의 탄압을 피해 스위스로 피신하게 되면서 부터이다. 당시 스위스는 유럽 각국의 혁명가들의 피신처였고, 로자는 취리히 대학에서 수학하며 여러 혁명가들과 교류한다. 혁명의 시대 20세기 초를 풍미했던 유럽의 혁명가들에게, 나로드니즘과 스위스로의 피신은 하나의 정형과 같았다고 보여진다. 러시아 사회주의 운동의 1세대인 노동해방단의 플레하노프, 악셀로드, 자술리치, 오스트리아의 사회주의자 빅토르 아들러, 등을 여기서 만나게 된다.

그녀의 공식적인 정치활동은 1898년 독일 사민당에 가입하면서 부터 시작된다. 그녀에게 유럽에서 가장 먼저 사회민주당이 결성되어 대중적인 지지를 받고 있던 독일은, 분명 세계혁명의 중심지로 받아들여 졌을 것이고, 그녀는 평생 국제주의적인 관점을 유지했다.

당시 독일 사민당은 대중적인 지지를 받으면서 혁명 없이도 평화적으로 사회주의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와 환상이 일어나고 있었고, 이러한 경향은 사민당의 지도자였던 베른슈타인이 불러일으킨 수정주의 논쟁으로 드러난다. 로자는 베른슈타인의 논리를 반박하는 논문 <사회 개혁이냐 혁명이냐>를 발표하면서, 독일을 비롯해 유럽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주목을 받게 된다.

하지만, 그녀 역시도 여느 혁명가들과 다름 없이, 1차 세계대전을 앞둔 당내 갈등과 분화 속에서 외로운 싸움을 해야했다. 더군다나, 유럽 사회민주당들의 연합체였던 제2인터내셔널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해오던 역사 깊은 독일 사민당 내의 분화는 더욱 격심했으며, 독일이 1차 세계대전의 주요 참전국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전쟁이 발발하는 1914년 직전 1912년 선거에서 독일 사민당은 대거 승리하게 되는데, 의회로 진출한 사민당 내의 주요 지도자들은 전쟁공채 징수에 찬성하고, 심지어 대거 정부에 참여하게 된다.

주도적인 세를 떨치던 그(녀)들이었기 때문에, 로자는 전쟁과 당, 두가지 모두에 맞선 어려운 싸움을 해야했다. 그녀는 어제까지 친분을 유지했던 당내 주요 지도자에게도 필요한 비판을 아끼지 않았고, 예의 직설적인 화법으로 독일 전역에서 연설했으며, 1905년 1917년 러시아 혁명에도 적극적으로 참가했다.

전쟁이 한참 무르익던 1919년 그녀는, 독일 사민당 내에서 끝까지 전쟁 반대를 고수했던 칼 리프크네히트 등과 함께 독일 공산당(스파르타쿠스단)을 창설하게 되고, 1919년 예기치 못했던 봉기로 휩쓸려들어간다. 로자는 스파르타쿠스단을 지지하던 젊은 노동자들의 자발적인 봉기에 반대했지만 끝까지 함께 했고, 실패한 봉기에 의해 결국 그녀는 독일 유격대에 의해 살해되고 만다.

로자의 일대기를 기록한 막스 갈로가, 대외적 활동 못지 않게 로자의 인간적인 측면을 조명하고 있다는 점이 이 책의 장점이다.
보통 혁명가들은 자신의 정치활동에 일반적인 가치들을 종속시켜왔기 때문에, 그(녀)들의 일대기에서 정치활동 이외의 것을 발견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는데, 스위스 피신 중에 만난 폴란드의 지하운동가 레오 요기헤스를 비롯한 뭇 남자들과의 사랑, 가구나 악세사리에 대한 관심, 동물과 자연에 대한 애정, 등 우리는 자신의 욕망에 충실했고 솔직했으나, 이를 자신의 정치활동 아래 망설임 없이 종속시키는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있다.

“1898년 이후, 나는 개인적으로 끊임없이 가장 천박한 모욕들을 받아왔어요. 그러나, 그런 모욕들에는 결단코 단 한줄도, 단 한마디 말로도 응수한 적이 없어요. 적수들은 정치적으로 이념적인 갈등을 개인적이고 윤리적인 영역으로 몰고가려고 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대해야해요.” <로자 룩셈부르크 평전> 중 350쪽

마지막으로, 로자가 러시아 사회주의자들과 대립했던 부분을 살펴야 한다. 그녀는 1905년과 1917년의 러시아 혁명을 직접 경험하면서, 크게 두가지 사안에 대해 다른 입장을 제출했다.

첫 번째는, 민족정책이다. 봉건 러시아는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그루지야, 우크라이나, 벨로루시, 폴란드, 에스토니아, 라투비아, 리투아니아, 등을 지배하고 있었고, 10월 혁명 이후 수립된 볼셰비키 정부는 각 민족의 자결권을 인정해 분리독립을 허용하는 정책을 채택했다.
그러나, 로자의 경우 러시아령 폴란드에서 태어나 스위스로 유학한 이래 줄곧, 자신의 조국 폴란드의 민족주의 운동에 대해 반대 입장을 표명해왔으며, “노동자에게 조국은 없다.” 라는 명제 아래, 국경 없는 노동자 계급의 단결을 촉구해왔다.

두 번째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이다. 러시아 사회주의자들 사이에서는, 1905년 혁명 이후 의회가 설립되면서 차후 러시아의 혁명전망에 대한 논의가 한참이었다. 이 논의는 크게 세가지 입장으로 나뉘었는데, 의회의 설립과 이에 대한 참여를 종용했던 멘셰비키 그룹과, 현재는 의회의 설립과 참여에 그치지만 의회를 이용해서 노동자 정부의 구성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볼셰비키 그룹, 마지막으로 노동자 계급이 주도권을 쥐고 노동자 정부의 구성에 즉각 나서야 한다는 트로츠키 그룹이었다.
마지막 입장은 1905년에 쓰여진 트로츠키의 논문에서 제시된 것으로 ‘영구혁명론‘ 이라 하는데, 볼셰비키 그룹은 1917년 4월 이후 이 입장으로 선회하게 된다.
영구혁명론에 따르면, 당시 러시아 사회에서 대립해왔던 각 세력들에게 1905년에 설립된 의회를 비롯해 1917년 2월에 설립된 임시정부라는 공식적 국가기구는, 독자적인 노동자 계급의 세력에 의해 대체되어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프롤레타리아 독재론이다. 로자가 반대했던 것은 이것이었다.

# 더 읽어야 할 책

<대중파업론> : 로자가 1905년 러시아와 폴란드의 혁명을 경험하면서 분석한 글. 1905년 혁명을 경험하며 향후 혁명 전망을 제시한 글은 이 외에도 레닌의 <민주주의 혁명에서의 사회민주주의당의 두 가지 전술>, 트로츠키의 <평가와 전망> 등이 있다.
<자본축적론> : 1차 세계대전이 본격화되고 있던 1912년. 독일 사민당의 찬성 움직임을 경계하며 집필한 글. 자본주의가 제국주의로 발전하는 매커니즘을 서술하고 있다. 같은 시기, 레닌도 <제국주의론>을 집필해, 자본주의의 마지막 발전 단계로서 제국주의는 사회주의 혁명이 임박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사회 개혁이냐 혁명이냐> : 1898년 독일 사민당의 지도자였던 에두아르드 베른슈타인이 주장한 수정주의, 그리고 이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않는 독일 사민당 지도부를 비판한 글. 로자는 이 논문을 발표하며 유럽 사회주의자들에게 주목받게 되고, 수정주의 논쟁은 1904년 독일 사민당 암스테르담 대회에서 공식적으로 배격되어 종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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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6-06-20 06: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용하신 로자 룩셈부르크의 말이 얼마나 통쾌했는지 모릅니다.^^

sb 2006-06-20 1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 저 어록을 인용하려면, 로자가 1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독일 사민당 내에서 얼마나 고립되었는지를 좀 더 설명했어어야 했는데, 좀 뜬금없죠?

2006-06-23 04: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sb 2006-06-23 16: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답변 드립니다.

1. 저는 로자 룩셈부르크의 사상에 대해서, 평전을 통해 간접적으로 접했을 뿐입니다. (꼽아놓은 책이 있긴 합니다. 풀무질 출판사에서 나온 <룩셈부르크주의>, 로자의 저작선을 모아놓은 것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대중' 이라는 어휘는, 노동자계급을 뜻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인민'은 일하는 사람들을 광범위하게 지칭하는데, 소생산자인 농민을 포함합니다. 아시겠지만, 계급은 생산수단의 소유 여부로 구분하지요. '민중'도 '인민'에 가까운 의미입니다.

2. '인터내셔널' 이란 각국 사회민주당 내지는 공산당, 즉 사회주의를 지향했던 정당들의 연합기구를 뜻합니다. 그에 숫자를 붙이는 것은 역사가들이 편의상 붙인 것인데요, 시대에 따라 인터내셔널이 결성되었다가 해체되기를 반복했기 때문에, 연대기를 구분하기 위함입니다. 각각의 인터내셔널은 가입 조건이나 활동 면에서 차이가 있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북막스 출판사의 <마르크스주의와 당>을 참고하시면 됩니다. 시대 별로 인터내셔널이 결성되는 과정과 문제의식이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3. 기존 체제가 격변하는 시기에는 늘상 대중기구가 출연합니다. 러시아에서는 그것을 소비에트(평의회)라고 불렀고, 한국의 경우에도 해방 직후에 인민위원회가 결성되었죠.
'프롤레타리아 독재' 란, 노동자 소비에트가 혁명 이후 공백상태인 국가권력을 장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독재' 가 뜻하듯이, 노동자 소비에트가 농민 소비에트와 같은 다른 대중기구에 앞서 새로운 국가권력에서 주도권을 명확하게 해야한다는 것이죠.
러시아 10월 혁명을 주도했던 것은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였는데, 페테르부르크는 공업도시였기 때문에, 구성원이 대다수 노동자였습니다. 당시 러시아의 상황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 란, 혁명 직후 최고의 의사결정 기구인 전러시아소비에트대회(여기에는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처럼 노동자들이 중심인 소비에트 못지 않게, 농민 소비에트들도 소속되어 있습니다.)에서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와 같은 노동자 소비에트가 주도권을 가져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당시 러시아 대다수가 농민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획기적인 주장임에 틀림 없습니다.)
그리고,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자동으로 붕괴할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말하는 자본주의 붕괴는 예언이나 예정이 아닌, 사회발전의 일반법칙 속에서 나온 것입니다. 봉건주의가 자본주의로 발전했듯이, 자본주의 역시도 새로운 생산양식을 가진 사회로 발전할 것이라는 일반법칙입니다. 그것은 자동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노동계급의 투쟁이 어떻게 일어나느냐에 달려있겠죠. 실패한 혁명도 있고, 성공한 혁명도 있듯이요.

로드무비 2006-06-25 1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전 책을 통해 읽었으니까요.
제 댓글이 뜬금없군요.
 
10월혁명사
이완종 지음 / 우물이있는집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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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가 트로츠키의 사상이 빛을 발하는 이유는, 그의 사상과 실천이 소련의 해체와 러시아의 자본주의화를 바라보며 낙담한 나머지 이성적 판단을 상실해버린 이들에게, 소련에 대한 비판적 분석과 실천의 방향을 제시해주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1905년 혁명 이후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의장, 1917년 10월 혁명의 주역이었던 군사혁명위원회 지도, 혁명 정부의 외무인민위원, 적군 사령관, 망명 이후의 4인터내셔널을 조직, 등 활발했을 뿐 아니라 비중 있었던 그의 실천활동이 그의 사상에 대한 권위를 뒷받침해주고 있지만,
무엇보다 스탈린의 서기장 집권 이후에 유일하게 조직적으로 당내 비판을 했던 세력으로서 그의 저작과 실천경험은, 혁명 이후의 러시아를 분석하는데 있어서 반드시 연구할 가치가 있는 것이다.

물론, 트로츠키주의에 대한 비판도 만만치 않다. 1930년대 트로츠키주의자들은 반당분자, 소부르주아 급진주의자, 심지어 미국의 간첩이라는 당내 비판을 받으며, 직위 해임, 당원자격 박탈, 투옥과 숙청을 당해야 했고, 그의 저작이 스탈린과의 당내 권력투쟁 과정에서 나와 지나치게 편향적이고 자기중심적이라는 비판도 있다.

<10월혁명사>의 저자 이완종의 출발점은 여기에 있다. 그는 이제 공개된 소련의 문서들을 기초해 1917년 혁명 이후 부터 1939년까지의 러시아 및 소련 내의 여러 정책과 세력관계를 분석하고 있는데, 그의 연구의 중심에는 스탈린이 놓여있다.
그는 과거 트로츠키주의 내지는 부하린주의에 편중되어 있던 혁명 러시아에 대한 연구가 객관적이지 못함을 지적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트로츠키와 부하린 역시 제3자가 아닌, 스탈린과 함께 혁명 러시아를 누볐던 핵심주체일 뿐 아니라, 심지어 스탈린과 대립했던 당내 비판세력이었으며, 심지어 이들의 주장을 뒷받침할 객관적인 자료가 충분히 제시되지 않고 있다는 이유 때문이다.

스탈린이 집권했던 혁명 러시아의 숱한 과오들은, 집권 이전의 볼셰비키당의 역사와 정책, 혁명 러시아의 아버지로 불리우는 레닌의 사상으로 부터 분리하여 규정할 수는 없다는 지적은 무척이나 타당하다.

소련을 비롯한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의 몰락으로 부터 자본주의를 정당화하는 논리나, 스탈린 집권 하의 혁명 러시아의 과오로부터 사회주의를 분리하려는 논리는, 모두 반비판에 불과하다. 반비판에 기대어 있는 기존의 논쟁들을 스스로 일으켜세우는 데에 <10월 혁명사>의 의의가 있다.

<10월 혁명사>는 우선, 집권 이전의 스탈린의 행보를 추적하는데 충실하다. 스탈린은 1914년 볼셰비키당의 독자 당대회의 중앙위원, 볼셰비키당 기관지인「프라우다」의 편집진을 역임했고, 1918년부터 시작된 내전에서 활약했다. 레닌의 신임을 받으며 혁명 러시아에서 노농방위회의를 비롯한 중요 직책을 역임했고, 민족문제에 정통했다. 무엇보다 그가 서기장에 집권하고, 레닌 사후에 실제적인 당내 최고지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을 단지 권력투쟁의 측면에서만 바라볼 수는 없으며, 그가 계승하고 있던 사상적 정통성에 대한 당내의 승인이 있었다는 것이 그의 분석이다.

따라서, <10월 혁명사>는 스탈린 집권 이전의 레닌주의의 행보(국가자본주의, 전시공산주의, NEP)를 추적하는 것을 통해서, 스탈린이 권력을 승계한 이후의 정책(NEP, 농업집단화, 당내 숙정)을 분석하며, 마찬가지 측면에서 스탈린 집권 이후에 부각되었던 당내 비판세력인 민주집중파, 노동자반대파, 트로츠키주의, 부하린주의에 대해서도, 그 과거의 행보, 즉 레닌주의에 대한 반대 움직임을 추적하는 것을 통해서 분석한다.

<10월 혁명사>는 분명 연구할 만한 가치가 충분하다. 과거 70년 가까이 전 세계의 절반을 풍미했던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의 의의는, 외면되어서도 안되고, 자본주의의 모순 앞에서 외면될 수도 없기 때문이다.

# 더 읽어야 할 책

<국가와 혁명> (레닌) : 국가자본주의론에 대한 레닌의 기본적 구상.
「노동조합의 역할과 과제」(트로츠키): 혁명 이후 민주집중제 논쟁의 일면. 노동조합의 군사화에 대한 당내 비판.
<좌익소아병> (레닌) : 혁명 러시아에서의 당내 반대파에 대한 레닌의 비판.
「사회주의로의 길과 노농동맹」(부하린) : 부농에 대한 수탈에 반대했던 부하린의 견해.
「식량세론」「협동조합론」(레닌) : 레닌의 농업정책 기본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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