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 출신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
그녀가 태어난 1871년은 러시아 전역에서 나로드니즘이 일어나던 시점이었다. 봉건 구체제에 저항하고자 했던 나로드니키들은, 차르 정부의 요인들을 암살하는 것을 통해 뜻을 펼치고자 했고, 이들의 장렬한 죽음은 젊은이들을 이 대열로 끌어들였다. 러시아령 폴란드에서 유태인으로, 지체장애로 차별받았던 학생 로자 역시도 이 젊은이들 중 하나였다.
로자가 본격적으로 혁명운동에 뛰어드는 것은, 나로드니즘에 대한 당국의 탄압을 피해 스위스로 피신하게 되면서 부터이다. 당시 스위스는 유럽 각국의 혁명가들의 피신처였고, 로자는 취리히 대학에서 수학하며 여러 혁명가들과 교류한다. 혁명의 시대 20세기 초를 풍미했던 유럽의 혁명가들에게, 나로드니즘과 스위스로의 피신은 하나의 정형과 같았다고 보여진다. 러시아 사회주의 운동의 1세대인 노동해방단의 플레하노프, 악셀로드, 자술리치, 오스트리아의 사회주의자 빅토르 아들러, 등을 여기서 만나게 된다.
그녀의 공식적인 정치활동은 1898년 독일 사민당에 가입하면서 부터 시작된다. 그녀에게 유럽에서 가장 먼저 사회민주당이 결성되어 대중적인 지지를 받고 있던 독일은, 분명 세계혁명의 중심지로 받아들여 졌을 것이고, 그녀는 평생 국제주의적인 관점을 유지했다.
당시 독일 사민당은 대중적인 지지를 받으면서 혁명 없이도 평화적으로 사회주의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와 환상이 일어나고 있었고, 이러한 경향은 사민당의 지도자였던 베른슈타인이 불러일으킨 수정주의 논쟁으로 드러난다. 로자는 베른슈타인의 논리를 반박하는 논문 <사회 개혁이냐 혁명이냐>를 발표하면서, 독일을 비롯해 유럽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주목을 받게 된다.
하지만, 그녀 역시도 여느 혁명가들과 다름 없이, 1차 세계대전을 앞둔 당내 갈등과 분화 속에서 외로운 싸움을 해야했다. 더군다나, 유럽 사회민주당들의 연합체였던 제2인터내셔널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해오던 역사 깊은 독일 사민당 내의 분화는 더욱 격심했으며, 독일이 1차 세계대전의 주요 참전국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전쟁이 발발하는 1914년 직전 1912년 선거에서 독일 사민당은 대거 승리하게 되는데, 의회로 진출한 사민당 내의 주요 지도자들은 전쟁공채 징수에 찬성하고, 심지어 대거 정부에 참여하게 된다.
주도적인 세를 떨치던 그(녀)들이었기 때문에, 로자는 전쟁과 당, 두가지 모두에 맞선 어려운 싸움을 해야했다. 그녀는 어제까지 친분을 유지했던 당내 주요 지도자에게도 필요한 비판을 아끼지 않았고, 예의 직설적인 화법으로 독일 전역에서 연설했으며, 1905년 1917년 러시아 혁명에도 적극적으로 참가했다.
전쟁이 한참 무르익던 1919년 그녀는, 독일 사민당 내에서 끝까지 전쟁 반대를 고수했던 칼 리프크네히트 등과 함께 독일 공산당(스파르타쿠스단)을 창설하게 되고, 1919년 예기치 못했던 봉기로 휩쓸려들어간다. 로자는 스파르타쿠스단을 지지하던 젊은 노동자들의 자발적인 봉기에 반대했지만 끝까지 함께 했고, 실패한 봉기에 의해 결국 그녀는 독일 유격대에 의해 살해되고 만다.
로자의 일대기를 기록한 막스 갈로가, 대외적 활동 못지 않게 로자의 인간적인 측면을 조명하고 있다는 점이 이 책의 장점이다.
보통 혁명가들은 자신의 정치활동에 일반적인 가치들을 종속시켜왔기 때문에, 그(녀)들의 일대기에서 정치활동 이외의 것을 발견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는데, 스위스 피신 중에 만난 폴란드의 지하운동가 레오 요기헤스를 비롯한 뭇 남자들과의 사랑, 가구나 악세사리에 대한 관심, 동물과 자연에 대한 애정, 등 우리는 자신의 욕망에 충실했고 솔직했으나, 이를 자신의 정치활동 아래 망설임 없이 종속시키는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있다.
“1898년 이후, 나는 개인적으로 끊임없이 가장 천박한 모욕들을 받아왔어요. 그러나, 그런 모욕들에는 결단코 단 한줄도, 단 한마디 말로도 응수한 적이 없어요. 적수들은 정치적으로 이념적인 갈등을 개인적이고 윤리적인 영역으로 몰고가려고 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대해야해요.” <로자 룩셈부르크 평전> 중 350쪽
마지막으로, 로자가 러시아 사회주의자들과 대립했던 부분을 살펴야 한다. 그녀는 1905년과 1917년의 러시아 혁명을 직접 경험하면서, 크게 두가지 사안에 대해 다른 입장을 제출했다.
첫 번째는, 민족정책이다. 봉건 러시아는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그루지야, 우크라이나, 벨로루시, 폴란드, 에스토니아, 라투비아, 리투아니아, 등을 지배하고 있었고, 10월 혁명 이후 수립된 볼셰비키 정부는 각 민족의 자결권을 인정해 분리독립을 허용하는 정책을 채택했다.
그러나, 로자의 경우 러시아령 폴란드에서 태어나 스위스로 유학한 이래 줄곧, 자신의 조국 폴란드의 민족주의 운동에 대해 반대 입장을 표명해왔으며, “노동자에게 조국은 없다.” 라는 명제 아래, 국경 없는 노동자 계급의 단결을 촉구해왔다.
두 번째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이다. 러시아 사회주의자들 사이에서는, 1905년 혁명 이후 의회가 설립되면서 차후 러시아의 혁명전망에 대한 논의가 한참이었다. 이 논의는 크게 세가지 입장으로 나뉘었는데, 의회의 설립과 이에 대한 참여를 종용했던 멘셰비키 그룹과, 현재는 의회의 설립과 참여에 그치지만 의회를 이용해서 노동자 정부의 구성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볼셰비키 그룹, 마지막으로 노동자 계급이 주도권을 쥐고 노동자 정부의 구성에 즉각 나서야 한다는 트로츠키 그룹이었다.
마지막 입장은 1905년에 쓰여진 트로츠키의 논문에서 제시된 것으로 ‘영구혁명론‘ 이라 하는데, 볼셰비키 그룹은 1917년 4월 이후 이 입장으로 선회하게 된다.
영구혁명론에 따르면, 당시 러시아 사회에서 대립해왔던 각 세력들에게 1905년에 설립된 의회를 비롯해 1917년 2월에 설립된 임시정부라는 공식적 국가기구는, 독자적인 노동자 계급의 세력에 의해 대체되어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프롤레타리아 독재론이다. 로자가 반대했던 것은 이것이었다.
# 더 읽어야 할 책
<대중파업론> : 로자가 1905년 러시아와 폴란드의 혁명을 경험하면서 분석한 글. 1905년 혁명을 경험하며 향후 혁명 전망을 제시한 글은 이 외에도 레닌의 <민주주의 혁명에서의 사회민주주의당의 두 가지 전술>, 트로츠키의 <평가와 전망> 등이 있다.
<자본축적론> : 1차 세계대전이 본격화되고 있던 1912년. 독일 사민당의 찬성 움직임을 경계하며 집필한 글. 자본주의가 제국주의로 발전하는 매커니즘을 서술하고 있다. 같은 시기, 레닌도 <제국주의론>을 집필해, 자본주의의 마지막 발전 단계로서 제국주의는 사회주의 혁명이 임박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사회 개혁이냐 혁명이냐> : 1898년 독일 사민당의 지도자였던 에두아르드 베른슈타인이 주장한 수정주의, 그리고 이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않는 독일 사민당 지도부를 비판한 글. 로자는 이 논문을 발표하며 유럽 사회주의자들에게 주목받게 되고, 수정주의 논쟁은 1904년 독일 사민당 암스테르담 대회에서 공식적으로 배격되어 종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