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8년은 적어도 세 개의 주요 정부가 반란으로 뒤흔들린 해였고, 그 밖의 여러 나라에서도 젊은이들 사이에서 희망이 물결이 일었던 해였다.
쿠바 |
쿠바 혁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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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
흑인 게토들의 반란, 민주당 전당대회 폭력사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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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
베를린의 학생운동이 양대진영에 도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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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 |
소련이 무력으로 체코의 공산당 정부를 침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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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 |
올림픽 개최 위해 시위대 학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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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
역사상 가장 큰 총파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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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아일랜드 |
영국의 식민주의적 차별정책에 맞선 항의시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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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
1968년 낙살라이트 운동이 탄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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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 |
군사독재에 항의한 최초의 시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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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 |
대중적 노동자 학생운동이 시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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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 |
파업과 토지점거운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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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 |
무장 게릴라가 팔레스타인해방기구를 장악하고 이스라엘 군대와 전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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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이후~ |
이탈리아 |
뜨거운 가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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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
워터게이트 추문으로 정부 붕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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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
1970년 그단스크와 슈체친의 노동자 반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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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
연대노조운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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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
1974년 파업과 히스정부의 실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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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네 |
과학기술대학에서 일어난 항쟁, 정권 붕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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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 |
1974년 4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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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
1976년 3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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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차 세계대전 이후의 호황기와 양상들
: 실업률은 줄어들고 생활수준이 향상되는 전반적인 번영기를 맞아 투쟁의 기운은 줄어들었고, 정치분야에서는 사회당 공산당의 분화, 사상분야에서는 온갖 이데올로기적 배신이 잇따랐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이 북유럽을 중심으로 진행되었을 뿐, 남부 유럽, 미국의 남부 주들, 북아일랜드, 개발도상국들 다수의 상황은 그렇지 않았다.
: 장기호황은 대규모 산업 성장과 농업 합리화를 수반한 것이었고, 이 때문에 수많은 소농과 그 자녀들이 도시로 이주하면서 사회구조 전체가 바뀌었다. 스페인의 파시즘, 포르투갈의 파시즘은 소농 층에 의존했다.
: 1960년대 들어 노동조합 운동이 끊임없이 후퇴했지만, 공산당에 대한 지지율(득표율)은 상승했다.
: 미국의 경우도 과거 노예들에게 주어졌던 공민권을 박탈하고, 인종격리제도인 ‘짐 크로우’를 시행하고, 백인무장단체인 KKK단을 조직했다.
: 냉전 이후의 이분법적 구도는 수억명의 사람들이 세계를 이해하는 틀이었고, 이러한 환상은 무척이나 굉장한 것이었다.
- 존 스트래치는 1930년대 영국에서 다른 누구보다도 마르크스주의 사상을 선전하는 데 앞장섰다. 그는 여전히 마르크스의 분석에 찬사를 보냈고 사회를 자본주의로 설명했다. 그러나 이제 그 역시 실업과 위기가 과거의 일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대중 민주주의와 케인스가 발견한 정부의 경제 개입 방법 덕분에 이제 자본주의가 계획되고 있다고 말했다.
- 다니엘 벨은 <인카운터>라는 잡지에 기고한 논문들과 ‘문화 자유 회의’에 제출한 논문들에서 “이데올로기의 종말”을 선언함으로써 당시 존재하던 합의를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 크로스랜드 식의 개량주의적 낙관주의와 마르쿠제 식의 혁명적 비관주의가 전제로 한 사실들은 실제로 현실이었다. 자본주의는 역사상 가장 긴 호황을 겪고 있었다.
- 북유럽의 조직 노동자 대중은 민주당과 노동당에 충성했지만, 남유럽의 많은 노동자들은 여전히 혁명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던 공산당을 지지했다.
- (미국) 북부에는 공식적이고 법적인 인종 격리는 존재하지 않았지만, 비공식적인 인종 격리가 존재했다.
- 유럽의 반체제 세력은 미국의 방송인 ‘자유 유럽 라디오’를 들으며 언젠가는 나토가 자신들을 해방시켜 주는 일을 상상했다. 서방의 가장 전투적인 노동자들은 소련 지배자들을 세계적 투쟁에서 동지라고 믿었다.
- 장 폴 사르트로, 아이작 도이처, 배런과 스위지, 심지어 제4인터내셔널의 지적 지도자인 에르네스트 만델조차도 그와 비슷한 생각을 고수했다.
- 1956년에 헝가리 노동자평의회들이 유혈낭자하게 파괴된 뒤에조차도 새 세대의 청년 활동가들은 소련이 노동자의 낙원이라는 생각에 매력을 느꼈다. 미국이 라틴 아메리카의 군사 독재 정부들을 무장시키고 스페인의 파시스트 정부와 동맹을 맺었을 때조차도 수많은 젊은 이상주의자들은 미국의 ‘자유’ 수호가 가치 있는 대의라고 생각했다.
# 투쟁의 서곡
: 프랑스에서는 1963년 광원 노동자들의 파업이 있었는데, 정부는 광원 노동자들을 전부 징집시키겠다고 협박했고, 광원 노동자들이 이를 비웃으며 파업물결이 상승했다. 임금과 휴가 부문에서 개량적 성과를 얻었으나, CGT 지도부가 파업 확산을 저지.
: 스페인에서는 1961년 12월 첫 번째 파업, 노동자위원회가 건설됨. 노동자 위원들은 대중 집회에서 선출되고 통제를 받았고, 1966년 어용 노조 선거에 개입하면서 대중적인 수준으로 발돋움함. 1968년 대대적인 탄압을 받으며 와해됨.
: 미국에서는 1910년에서 1960년대 사이 흑인들이 지방 농민에서 도시 노동계급으로 전환되면서, 민주당의 경우 점증하는 흑인 지역사회의 표를 획득해야만 하게 되었고, 이것은 흑인중간계급 단체와의 연계를 낳았다.
: 흑인 단체의 경우 두가지로 나뉘어 볼 수 있는데, 인종 차별 금지나 투표권 획득, 등을 목적으로 하는 개량적 단체가 한 축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중간계급출신의 소수 개인 활동가들이나, 지역사회에서 중심을 이루는 종교단체들이었다.
: 1950년대 중반에는 흑인 교회들이 중심으로, 1960년대에는 학생들을 중심으로 투쟁의 물결이 시작됐지만, 이들의 시위는 비폭력주의와 더불어 닉슨을 상대로 한 선거전을 펼치던 민주당 정치인들에게 이용당하는 것 때문에 저물었다.
흑인단체들 |
NAACP(전미유색인지위향상협회) |
흑인 중간계급 단체, 법률 소송을 중시 |
SCLC(남부기독교지도자회의) |
마틴 루터 킹이 주도, 남부 흑인들이 지지했지만, 조직의 핵심은 중간 계급인 목사들 |
CORE(인종평등회의) |
북부에 기반을 둔 비폭력주의 조직 |
SNCC(학생비폭력조정위원회) |
남부 학생 활동가 조직에서 시작해 전미 100여개 대학의 학생들 조직 |
: 영국에서는 1960대초 파업투쟁이 증가했지만, 노동당과 공산당의 당원 수는 줄어들었고, 파업은 직장위원들이나 현장 대표들이 주도했다.
: 1956년 헝가리 혁명 이후, 공산당은 급격히 와해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공산당의 몰락을 단순히 소련공산당의 탓으로 돌릴 수는 없는데, 이미 이들은 공공연하게 자국의 부르주아지와 동맹을 맺고 싶었으나, 소련공산당의 허울 때문에 그러하지 못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 중국에서는 마오가 소련과의 관계를 공식적으로 단절하고 문화대혁명을 일으켰고, 쿠바에서는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가 혁명을 일으켰다. 프랑스 상층 계급 출신의 철학과 대학원생인 레지 드보레이가 <혁명 속의 혁명>을 통해 체 게바라의 실천적 혁명 전략을 정교한 이론으로 만들었고, 이내 20만부가 인쇄됐다.
- 혁명을 일으키는 것은 혁명가들이 아니라 사회 계급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사회 계급을 대리하려는 혁명가들의 시도는 실패할 수 밖에 없다.
- 의지력을 강조하는 것, 밖으로 뛰쳐나가서 가능성과 무관하게 투쟁하는 것에 대한 강조는 전 세계 스탈린주의의 와해 속에서 성장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1968년과 그 이후의 격변에서 독자적 구실을 하게 된다.
# 학생 시위
: 1960년대의 학생 시위는 미국 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일반적이었기 때문에, 1968년은 학생들의 해로 여겨질 정도였다.
: 학생들의 시위는 그들의 계급적 관계에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데, 자본주의 초기에는 소수의 지배계급의 자녀들만이 대학에 다닐 수 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대부분의 부르주아지가 통치자들에 대항할 때만 저항에 나섰다. 그러나 독점자본주의 단계에 이르러서 자본의 이해가 국가정책에 까지 밀접한 영향을 미치게 되자, 자본의 대규모 인적자본 필요성이 대학 확장이라는 국가정책으로 반영된다. 이러한 이해관계는 20세기 중반에 대학의 팽창을 가져오게 되고, 이들은 이제야 한 계급의 이해를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최종 계급 지위가 아직 결정되지 않은 청년들로 이루어진 일시적 집단이라고 보아야 한다.
: 동시에, 이들은 과밀 학급에 몰려 있으면서 피말리는 시험과 평가 제도에 종속되어 억압을 받게 되고, 이것이 이들을 투쟁에 나서게 하는 이유가 되었다.
: 1968년 혁명의 초기에 등장한 학생시위에서, 학생들은 전혀 정치적이지 않았고, 이들이 일반적으로 내세웠던 구호는 반권위주의였다.
: 이 당시 학생들 사이에서 우세했던 신급진파 신좌파들은 그들의 이념이나 입장을 일반화하는 것을 거부하거나 싫어했던 사상이었다.
: 독일 학생운동을 주도했던 마르크스주의 조직인 독일사회주의학생연맹(SDS)는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는데, 이들은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유일한 도전은 주변적 사회 집단과 제3세계에서만 나올 수 있다는 것이었다. 소르본 대학을 점거한 학생들의 구호 역시도 인간 해방과 잠재력에 대한 강조였다.
: 학생들은 그들이 생산관계에 편입되어 있지 않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매우 빠르게 성장했다가, 매우 빠르게 쇠퇴할 수 있다.
: 이런 학생시위의 경향은 1960년 문화를 이끌었던 히피문화에 그대로 반영된다. 이들은 자신의 나라를 변혁하는 것이 아니라 이탈하는 것을 원했다. 언더그라운드 문화와 정치적 좌파가 주변부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지만 그 둘은 결코 동일하지 않았다. 개인적 혁명이라는 히피의 철학은 1960년대 정치 권력이라는 엄혹한 현실에 맞설 수 없었다.
# 미국
: 민주당은 상이한 이해관계를 포괄하려 하였지만, 1968년 갈기갈기 찢어졌다. 1964년 대통령에 당선된 민주당의 존슨이 이것을 잘 보여준다.
: 미국은 여타 다른 국가에 대한 지배와 마찬가지로 베트남을 생각하고 참전하였지만, 그 양상은 전혀 달랐다.
: 미국의 흑인운동은 1964년 민주당에 양보하려는 킹 목사의 경향을 둘러싸고 분열하게 되었고, 전투적 분리주의 경향이 생겨났다. 이것은 “검은 것은 아름답다” 와 같이 아프리카 문화를 재발견하려는 시도들, 아프리카식이나 이슬람식 이름, 분리주의적 흑인 정치의 유행으로 나아가고, SNCC나 CORE의 활동가들도 이러한 경향으로 이동하게 된다. 이러한 경향은 1966년이 되어서야 혁명적인 정치적 분리주의로 나아가고, “블랙 파워” 운동이 탄생하게 된다. 킹 목사는 1967년에서야 운동의 성격의 변화에 대해서 인정하였으나, 1968년 사망하게 된다. 그리고, 그가 죽자마자 미국 전역의 수백 개 게토에서 폭동, 약탈, 방화가 일어나며 경찰과 대립하게 된다. SNCC와 CORE 지도자들은 점점 더 급진적인 언사를 표명했지만, 그들의 말에 따르는 실천을 하지는 못했다.
: 1964년부터 대대적인 시위가 계속되고, 1965년에는 미국 역사상 최대의 소요로 나아간다. 40명의 사망자와 4000명의 체포, 그리고 2억 5000만 달러의 재산 피해가 발생했다.
: 킹 목사의 사망 이후 대안적인 운동으로 백인들에 맞선 무장을 인정하는 흑표범당이 등장했는데, 이들은 체제 이탈적인 정치를 가지고 있었고 무장 외에는 전혀 정치적인 통일성 조차 없었다.
: 1968년 8월 시카고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전쟁을 지속하려는 민주당의 정책에 맞서 매카시를 대통령 후보로 내세우려는 시위대가 탄압당한다.
# 프랑스
: 권위주의에 대해 저항했던 학생들의 시위에 대해서 정부가 파리 내의 모든 대학을 폐쇄하겠다고 강경하게 나오자, 학생들은 탄압 중지를 요구하며 동맹 휴업에 들어갔다.
: 학생들의 시위에 젊은 노동자들과 공산당원들이 동조하기 시작하자, 이에 압력을 받은 CGT가 파업을 호소한다. 하지만, CGT 지도부들은 학생들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고, 이들은 그저 국가기구에 자신들의 힘을 과시할 목적을 가지고 있었을 뿐이었다. CFDT도 마찬가지로 정당에는 소속되어 있지 않았지만 조직원을 늘리는데에만 관심이 있었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시위는 지도부의 통제를 넘어서 사상 초유의 파업과 공장점거운동으로 나아간다. 노동자들은 스스로 자발적인 파업위원회를 구성했다.
: 이 당시 학생운동과 노동자운동의 교류는 CGT 노조관료들에 의해 차단되었고, 혁명그룹의 영향력은 취약했다. 학생들은 실행위원회를 구성했지만, 실행위원회는 혁명정당과 달랐다. 이들은 노동자계급 내로 침투하려는 경향과 학생권력을 주장하는 경향, 제도 개선에 머무르는 경향, 등으로 분화되었고, 노동자투쟁과 결합하지 못했다면 투쟁은 상승하지 못했을 것이다.
: 노동자들의 투쟁이 이렇게 나아간 데에는, 전쟁을 통한 손실을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를 통해서 만회하려는 드골 정부의 반노동자 정책이 컸다. 당시 프랑스 노동자들은 유럽 공동시장 내에서 두 번째로 낮은 임금과 최장시간의 노동에 시달리고 있었고, 가장 많은 세금을 냈다.
: 학생들의 시위가 노동자들에 비해 일찍 분출될 수 있었던 데에는, 학생들 역시 집중적으로 몰려있고, 특권층을 가진 학생들이라 하위 계급들을 자극할 수 있었으며, 동시에 관료제의 영향을 덜 받았기 때문이다.
: 드골 정부가 노조 지도부와 고용주들을 모아 협상을 시작했고, 최저임금 35% 인상, 기타 임금 7% 인상 등으로 그르넬 협상을 맺는다. 그러나 총파업은 지속되었다.
: 프랑수아 미테랑을 중심으로 하는 임시정부 구성 제안이 정치권 내에서 광범한 지지를 얻었고, 학생조직들과 일부 정치권에서 이 제안을 지지했다. 공산당은 더 많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이 제안에 찬성하지 않았다.
: 국내를 떠났던 드골이 돌아와, 집권을 계속할 것이며 탄압을 강화할 것이라고 주장했고 내전과 총선거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했다. CGT와 공산당은 총선거 준비를 위해 공공 부문부터 복귀를 선언했다.
: 혁명가들은 부쩍 늘어나 수만명을 헤아렸지만, 이들의 대부분은 학생이었고 CGT관료들의 차단 때문에 노동자 대오에 정치사상을 전달할 수 없었다. 그리고, 노동자들의 경제주의와 학생들의 경제주의와 결합되지 못한 정치편향이 이들의 대화를 가로막았다.
: 운동은 재빨리 후퇴했다.
: 국가권력을 장악하려는 세력이나 시도는 없었지만, CGT와 공산당 관료들의 타협에 의해 운동이 소멸한 것이다. 이들의 영향력을 제거하고 운동을 확장하고 저변을 확대했어야 했다. 그랬다면, 정부가 권력을 재확립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68년 5월의 프랑스 정치경향 |
JCR(혁명적공산주의청년조직) |
트로츠키조직 |
FRS(혁명적학생연맹) |
청년공산주의연맹 |
마오주의조직 |
프랑스 공산당 |
UNEF |
처음 시위를 주도한 대중적 학생조직 |
노동자의 목소리 |
조직원의 상당수는 학생과 학생 출신들이었고, 공장 외부에서 공장 안으로 전단을 돌렸다. |
- 금요일에 이르기가지 모든 르노공장과 거의 모든 항공 산업, 로디아스타의 전 사업장을 노동자들이 점거했고, 파리와 노르망디의 금속 산업이나 서부의 조선소들로 확산됐다. 바리케이드의 밤이 지나고 1주일째 되던 날 밤에 철도 노동자들이 기차역을 점거하기 시작했고, 이로써 투쟁은 주말을 지나서도 계속 이어질 수 있었다. 월요일이 되자 파업은 보험사, 대형 상가, 운행, 인쇄업 쪽으로 번졌다. 인쇄 노조는 일간 신문은 인쇄했지만 기타 정기 간행물은 거부했다. 2~3일 내에 900만 1000만 명의 노동자들이 파업에 돌입했다.
- 의대생과 인턴, 레지던트 들이 운동에 참가해 병원의 고질적인 위계 질서의 종식을 선언했다. 미대생과 화가는 미대 건물을 장악하고 그곳을 포스터 제작 본부로 바꾸어 운동을 지지하는 포스터 수천 장을 집단 창작했다. 영화 제작자들은 경쟁적인 칸 영화제에서 철수하고 영화 산업을 이윤 동기와 독점에서 구제할 수 있는 방법을 논의했다. 프로축구 선수들은 축구연맹 본부를 점거했다.
- 16만 8000명의 군인 중 12만명이 징집병이었고, 그 중 일부는 노골적으로 파업에 동조했다. 위원회들이 꾸려져서 상관의 명령에 반대하고 수송과 장갑차의 출동을 거부할 조짐이 나타났다.
- 경찰 개개인은 근무를 마친 뒤 불필요한 언쟁에 휩싸이는 것을 피하기 위해 모자와 뺏지를 숨겨야 하는 현실의 불만이 있었다.
- 사람들 스스로 그토록 강하다고 느낀 적은 한번도 없었다.
- 국회가 부르주아 극장이 되는 날, 부르주아 극장은 국회가 될 것이다.
- 상상이 권력을 장악한다. 꿈을 현실로, 현실은 꿈으로 만들자.
- 실패한 혁명은 매우 빠르게 기억에서 사라진다. 지배 계급은 서둘러 낡은 생활방식을 재건하려 하며서, 한편으로는 대안은 없다는 낡은 사고방식도 재구축하려고 애쓴다.
# 프라하의 봄
: 스탈린 사망 후에 스탈린에 의해 견제받았던 관료들이 복권하기 시작했고, 동시에 아래로부터의 투쟁도 발발했다. 폴란드 노동자 봉기를 타고 고무카가 정권을 잡는다.
: 체코에서는 경기 후퇴를 겪으면서 보수적 관료인 노보트니를 실각시키는데, 노보트니가 군대와 현장에서 음모를 꾸민다. 두브체크 지도부 역시도 노보트니 반대자들을 부추기게되는데, 자발적인 시위는 관료들의 싸움과 상관없이 독자적으로 발전하게 된다. 노보트니가 패배를 인정한 이후에도 이 운동은 지속된다.
: 폴란드는 1968년 체코의 개방화 소식과 함께 학생시위가 일어나지만, 노동자 시위로 까지 나아가지 못했다.
: 1968년 8월 20일, 바르샤바조약기구의 폴란드, 헝가리, 동독, 불가리아의 군대가 체코를 침공하고 두브체크가 소환된다. 돌아온 두브체크는 이전과 같은 강력한 통치를 하려고하지만, 학생들의 점거투쟁이 시작되었고, 노동자들도 이에 동조했다. 그리고 1969년에는 개혁 포기에 항의해 분신한 학생을 기념하기 위한 시위에 80만명이 참가하게된다.
# 유고슬라비아
: 유고에서는 ‘시장사회주의’를 시행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생산수단에 대한 통제를 인위적으로 위로부터 부여했을 뿐이었고, 더욱이 실제로는 집권당인 공산주의자동매의 인맥이나 국가기구와 연계를 맺고 있는 경영자들이 공장을 운영했다. 노동자들은 상승하는 물가와 실업에 시달려야 했고, 기업과 국가의 관리직들은 노동자들보다 최고 40배나 많은 소득을 올리고 있었다.
: 학생들도 실업, 불평등, 국가 관료 지배층의 특권 등 핵심 문제들을 제기하면서 점거농성에 들어갔는데, 정권은 노동자들과 학생을 분리시키기 위해서, 학생들의 행동 강령을 지지하는 전술을 선택했다. 그리고, 바로 대학을 폐쇄하고 핵심인물을 징계했다.
# 멕시코
: 멕시코의 유일당인 제도혁명당은 다양한 사회 세력을 하나의 국가로 통합시키는 희귀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 그러나, 급속히 팽창하는 학생 숫자와 그에 따르지 못하는 학교 시설이 학생들의 불만을 가져왔고, 학생들은 정치수 석방, 학내 경찰 철수, 폭력 경찰 해체, 억압적 법률 철폐 등을 요구하며 1968년에는 50만명의 시위대가 운집하기에 이르렀다. 당국은 올림픽 준비에 급급한 나머지 5000여명의 군대를 출동시켰고, 100명 이상의 사상자를 냈다.
: 여기에서도 학생들은 고립되었다.
# 북아일랜드
: 북아일랜드에서 사회주의자들의 영향력은 미미했으나, 노동당이나 공화주의 클럽 출신 사회주의자들이 주택 부족 문제를 놓고 선동을 시작했다. 이들은 시의회 방해, 도로 점거, 빈집 점거, 등을 선택했다. 온건한 정치 세력이었던 민권연합도 차별적인 주택 배분에 항의하면서 4000명이 참가하는 행진을 조직했다. 그러나, 이들은 경찰과의 충돌은 피했다. 주택 배분 시위에 경찰이 강경하게 대처하면서, 대중들도 움직이기 시작했고 결국 북아일랜드 정부는 개혁을 약속했다.
: 벨파스트에서 소규모 사회주의 조직이 ‘민중민주주의’라는 느슨한 조직을 형성했는데, 이들의 시위가 폭력적으로 진압당하면서 보그사이드를 중심으로 바리케이트가 쳐졌다.
: 개신교와 가톨릭 사이의 충돌이 심해지면서, 영국 정부가 자국 군대를 파견하게 된다.
# 이탈리아
: 이탈리아의 학생운동은 프랑스보다 먼저 시작해 더 오해 지속되었다. 이탈리아 학생운동 역시도 이탈리아 자본주의의 축적 드라이브에 의해 조성되었고, 이탈리아는 25~30%의 학생들만이 수업을 마칠 정도로 열악한 교육환경에 처해있었다.
: 학생운동의 사상은 마르쿠제, 체 게바라, 블랙 파워, 문화혁명, 반권위주의, 등이 섞인 잡동사상이었는데, 프랑스 5월 총파업이 이들의 눈을 노동자 계급에게 돌리게 만들었다.
: 이탈리아 대공장에는 사실상 노조가 없었지만, 1968년 많은 노동자들이 지도부의 통제에서 벗어나 자생적이고 부분적인 파업을 전개한다. 이 파업의 특징은 노조의 관심사가 아니었던 작업속도와 노동조건을 두고 일어났다는 점, 비노조원들 사이에서 일어났다는 점, 노조위원회가 아닌 현장위원회(CUB)가 파업을 주도했다는 점이다.
: 이탈리아 학생운동가들은 노동자들과 지속적으로 연계를 가져왔다. 이를테면, 매주 토요일에 모이는 시 차원의 노동자 학생 회의들이 생겨났다. 혁명적 학생과 새로운 노동자 투사들 모두 이런 회의들을 전위의 맹아적인 정치조직으로 여겼다.
# 영국
: 1964년 노동당 정부가 당선되었지만, 이들은 노동당 내 좌파의 기대와는 달리 반노동자적인 정책을 펼쳤고, 1968년 40시간 노동을 요구하는 선원 파업 이후 간접세 인상, 공공지출 대폭 삭감, 6개월 간 법정 임금 동결 조치등을 발표했고, 급기야 파운드화를 평가절하하게 된다. 신임 재무장관 로이 젱킨스도 디플레이션 정책을 실시했고, 중등학교의 무료 우유 급식 폐지, 의약품 처방전 유료화, 주택 정책에 대한 예산 삭감, 의무교육 기간 연장 조치 연기, 등의 조치를 취했다. 많은 사람들이 노동당을 떠났다. 노동당에 대한 환멸이 우익 사상의 확산을 허용하는 효과를 낳았다.
: 노동당의 대안은 공산당이었지만, 공산당 지도부는 오래 전에 혁명을 포기했고, 이들은 노동당 좌파와 함께 하원에서 다수를 확보하는 것에 집중할 뿐이었다. 공산당은 노동당에 환멸을 느끼고 나온 사람들을 끌어당길 수 있는 분명한 구심점을 제공하지 못했다.
: 당시 보수당 측에서 벌인 인종차별주의 캠페인에서 혁명적 좌파 세력이 좌파의 공백을 메우고자 노력했다. 혁명적 좌파세력은 1965년 학생들 사이에서 형성되어 잇었다. 이들은 굉장히 소수였다. 이들은 1967년 런던경제대학의 점거농성을 시작으로 세력화되기 시작했고, 베트남 전쟁 반대 투쟁이 이 과정을 촉진했다. 베트남 전쟁에 대한 반대와 인종차별주의 정책에 대한 반대가 주를 이루었다. 그 외에도 윌슨 정부의 평가절하, 고물가, 실업, 임금 동결, 등도 문제였다.
: 고립되던 시위가 1968년 프랑스의 경험을 통해 고무받았다. 그동안 소수이던 혁명적 좌파 그룹의 대응은, <블랙 드워프> 경향과 IS 경향이 있었다. <블랙 드워프> 경향은 체게바라, 마오쩌둥, 만델주의가 뒤섞인 좌파 지식인 그룹경향으로서, 제3세계 지도자들의 사회주의를 신뢰에 도전하지 않았다.
: 학생운동과 반전운동은 그것 자체로는 무한정 발전할 수 없었으나, 노동계급 내에 좌파의 공백이 너무 컸다. 노동당과 공산당이 노조를 쥐어틀고 있었다. 학생운동도 계속 고립되고 있었고, 사회주의자연합은 고립된 선도투를, IS 그룹은 신중하게 행동할 것을 주장했다. 1969년에는 학생운동의 패배와 함께 조직과 신문이 사라졌다.
: IS는 고립된 학생운동에서 벗어나 노동자들과 연계를 맺기 위해 노력했다.
전국학생회연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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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진학생동맹 |
전국학생회연합의 좌파 (공산당, 노동당, 자유주의 학생들) |
베트남평화위원회 |
공산당과 노동당 좌파의 영향력 아래에서 반전운동을 주도했던 그룹 |
베트남연대운동(VSC) |
IS가 소속되어 활동 |
사회주의노동동맹 |
노동자혁명당의 전신, 68년 영국에서 일어난 모든 운동을 쁘띠 부르주아적이라 비난하며 운동과 연계 맺는 것을 거부 |
국제사회주의 |
사회주의노동자당의 전신 |
국제마르크스주의그룹 |
제4인터내셔널을 지지 |
밀리턴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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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자 노조(TAS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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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적사회주의학생연합(RSSF) |
전국학생회연합의 태도에 대한 반대그룹, 운동의 쇠퇴와 함께 사라진다. |
2부 : 1968년 이후
- 위기를 초래한 요소 중에 1970년대 초까지 해결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실제로 이 요소들은 1980년대 말까지 세계 체제에 만연해 있었다. 하지만 이런 요소들은 더는 1968년처럼 폭발적 방식으로 서로 상호작용을 일으키지 않았다.
# 미국
SDS |
분열 이후, 마오주의-스탈린주의 사상으로 선회 |
업어게인스트월 |
아나키즘 경향, SDS에서 분리 |
제임스 P 캐년 경향 |
반전 투쟁 벌였지만, 혁명적 청년들을 관료적으로 억누름 |
막스 샤흐트먼 경향 |
소련, 중국, 베트남, 쿠바 등을 관료적 집산주의 국가로 규정.
이후 조직을 해체하고 우파 사회민주주의에 합류. 베트남 전쟁 지지 |
독립 사회주의 클럽 |
샤흐트먼 경향에 약간 기울음 |
진보노동당 |
마오주의 경향, 종파주의적 |
흑표범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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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U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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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시인 1968년에 정권을 잡은 닉슨과 그의 보좌관 헨리 키신저는 전쟁을 더욱 확대하는 것을 통해 위기를 벗어나려고 했는데, (지상군 철수, 남베트남 군대 지원, 폭격 강화, 새로운 외교환경 조성, 캄보디아 침공 등) 이것이 시위를 격화시켰다. 350여개 대학에서 동맹 휴업에 돌입한다. 전체 학생의 60%에 가까운 비율이었다. 이 시위는 1970년 폭격을 재개하면서 더욱 격화되었고, 심지어 군 내부에서 공공연한 반대 조짐이 보이면서, 시위 참가, 반전 신문, 항명, 탄원서 서명, 상관을 겨냥한 수류탄 투척, 등으로 등장하기도 했다.
: 베트남에 대한 지출이 떨어지면서 국방비 비율이 줄어들었고, 경기 과열에 대처할 수 있었으나, 이제 경기후퇴에 직면하게 되었다. 1971년 달러는 평가절하된다. 경기후퇴의 효과는 물가가 하락, 임금 인상 투쟁 압력의 감소로 나타났고, 1971년 늦여름에는 ‘임금-물가 통제’ 시스템이 도입되었다.
: 투쟁이 낮아지면서, 조직력이 높아진다 한들 투쟁으로 이어질 수 없었다. 1972년에는 노동자투쟁이 덜 활발했다.
: 베트남전에서 수세에 몰리자 닉슨은 초조해졌고, 그는 기성 사회 내의 비둘기파를 포함해서 평화운동가, 흑인조직, 사회주의조직을 교란시켜야 했다. 수천 명의 기관원들을 동원해서 이것을 감시했는데, 당시 FBI 국장이었던 에드거 후버와 장단을 맞추지 못하면서 사설공작팀을 운영한 것이 워터게이트 사건의 시작이 되었다. 닉슨은 선거에서 승리했으나, 2년 뒤에 사임할 수 밖에 없었다.
: 참여민주주의 반권위주의를 주장하던 미국의 신좌파는 1968년의 일련 사건들을 접하면서 다시 구좌파 쪽으로 기우는데, 이것은 거의 마오주의였다.
: 엄격한 조직과 인민 전쟁에 관한 논의를 강조했던 마오주의적 마르크스-레닌주의는 1968년의 첨예한 상황에서 규율이 부족한 학생 좌파를 괴롭혔던 여러 가지 문제에 대한 해답처럼 보였지만, 이 경향 조차도 노동자 계급과의 연계로 나아가지 못했다. 이들은 스탈린주의적 방식에 의존해, 인민 대중 속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 개인들의 집단들을 전위당으로 묶으려고 했다.
: 웨더맨(풍향을 알기 위해 일기예보원이 될 필요는 없다.) 경향도 존재했는데, 그들은 여전히 미국의 노동자 대중이 선천적으로 반동적이며 “백인 특권 의식”을 통해 체제에 묶여 있는 계급이라고 생각했다. 이들의 결론은 미국의 혁명가들이 제3세계 혁명의 지지자 그룹으로서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논리적 귀결은 생활수준이나 노동 조건 향상을 위한 미국 백인 노동자들의 어떠한 투쟁도 제3세계에서 더 많은 것을 강탈하려는 투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웨더맨은 SDS 초기부터 유행하던 정치 - 노동자 대중의 참여 없이 미국 사회의 변혁 주체를 발전시키려는 정치 - 가 극단적으로 발전한 것이었다. 그러나, 사실 그들이 한 일은 한 종류의 자유주의적 도덕주의를 다른 것으로 대체한 것 뿐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을 자극한 것은 체제에 맞선 무장 저항의 도덕적 필요성이었지 승리할 수 있는 투쟁 방법에 대한 유물론적 분석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 1968년의 경험은 흑인 운동도 변화시켰는데, FBI의 후버는 흑표범당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자행했고, 룸펜 프롤레타리아트로 구성된 흑표범당은 이러한 탄압을 막아낼 수 없었다. 이러한 변화는 지도부로 하여금 좀 더 진지한 투쟁을 받아들이게 하였고, 흑표범당 신문은 자기 당을 ‘마르크스-레닌주의’ 당으로 묘사하기에 이르렀으나, 실제로는 마오주의 경향이었다. (이들은 ‘아이들을 위한 아침식사’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마오주의로 기울은 이들은 결국, 백인 동맹 세력을 찾기 시작했고, 이것은 결국 조직의 와해로 귀결되었다.
: 흑표범당 외의 조직도 있었는데, 이들은 디트로이트에서 시작했으며, 노동자 투쟁을 중심으로 조직을 키워나갔다. <이너 시티 보이스> <도시 혁명적 노조 운동> 소식지를 발행했다. 이 조직은 이후 ‘혁명적 흑인 노동자 연맹’으로 발전해나갔으나, 인종 분리주의를 극복하지 못하고 파업의 힘을 스스로 감소시킨 나머지, 1971년 심각하게 분열하고 만다.
: 흑표범당과 혁명적 흑인 노동자 연맹이 대안으로 제시되지 못하자, 게토의 정치는 다시 민주당이 지배하게 되었고, 흑인들은 흑인 정치인과 비정치적인 문화적 민족주의자 양 극단의 경향으로 나뉘었다.
# 이탈리아
: 당시 이탈리아는 기독교민주당이 장악하고 있었는데, 1960년대 중반 자본의 주요 부문들이 부패와 비효율성에 대한 불만들이 생겨나자, 이들은 노동자에 기반을 둔 사회당을 정부에 참여시켰다.
: 노동자 투쟁은 기존 노조질서에서 벗어난 자생적인 것이었고, 투쟁의 물결은 1971년까지 지속되었다. 노조 지도부는 노동자들의 전투성을 억누르지 않고 오히려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돌리려고 애썼다. 1972년에는 8101개의 새로운 공장평의회가 만들어졌고, 1975년에 이르면 공장평의회는 32000개로 늘어난다. 그러나, 평의회에서 대부분의 실질적 결정권은 상근 노조간부들이 행사하게끔 되어 있었다. 노조는 매우 급속하게 성장할 수 있었고, 정부가 경기후퇴를 이용해 운동의 고양을 저지하려 했지만 실패했다.
: 이런 상황에서 우파들이 궐기하기 시작했다. 좌파에 대한 파시스트와 경찰의 공격이 급증했다. 그러나, 투쟁은 계속 되었고 우파 정부도 대안으로 떠오르지 못했다. 이제 공산당이 자리를 차지하려고 나섰고, 기독교민주당과 권력을 나눠가지게 된다.
: 1968년 전에 극소수였던 이탈리아 혁명적 좌파는 1973년 즈음에 거대한 세력으로 성장해있었다. 이 경향은 로타 콘티누아의 극좌파 경향과 <쿠아데르니 로시>의 자율주의 경향, <일 마니페스토> 경향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 로타 콘티누아의 경우 초기에는 체계적인 조직이 아니었으나, 점차 대의원 체계를 갖추었고 지식인들이 주요 지도자가 되었다. 이들은 극좌적으로 노조관료들이 주도한 공장평의회 구성, 대의원 제도, 단체협약 체결 등에 반대했다. 이들은 “우리는 기독교민주당 정부를 무너뜨리는 데 관심이 없다. 우리는 자본주의 체제의 파괴를 원한다.” 라고 말할 정도였다. 로타 몬티누아는 1972년 기독교민주당의 판파니에 맞선 반파시즘 투쟁을 하면서 과거의 공장평의회 거부와 같은 종파주의적 태도를 반성하는데, 이러한 태도는 극우적으로 기울어 공산당을 정부로 내세우게 된다. 뿐만 아니라, 이들의 자생주의 경향은 좌충우돌하면서 노조를 우회할 수 없게 되자, 관료 체계에 영향을 미치려 했다.
기독교민주당 |
|
공산당(PCI) |
1973년 정부에 참여 |
사회당 |
1960년대에 정부에 참여 |
CGIL |
공산당 계열 |
CISL |
가톨릭계 |
UIL |
우파 사회민주주의적 경향 |
이탈리아국민연합(MSI) |
파시스트 조직 |
보르디가 분파 |
극소수 |
로타 콘티누아 |
1969년 노동자 학생 회의에서 결성된 혁명적 좌파조직, 극좌적 경향. 무원칙한 선거개입 등으로 우경화 하면서 조직 쪼개지고 1976년에 붕괴. |
<쿠아데르니 로시> |
1960년대 중반, 노동자주의자들로 알려진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리오 트론티가 결성. 이들에게는 마오주의적 요소도 있어서, 이들은 문화혁명을 귀감으로 여길 정도였다. 1969년 로타 콘티누아에서 갈라져 나옴. |
<일 마니페스토> |
공산당 내부의 지식인 조직, 독자경향성을 강조하면서 당에서 축출. 1971년에 로타 콘티누아와 통합활동 |
PDUP |
사회당에서 떨어져나온 분파로 1974년에 <일 마니페스토>와 통합. |
아방구아르디아 오페라이아(노동자 전위) |
현장조합원 조직인 CUB와 밀라노 학생 운동에서 출발. 로타 콘티누아 만큼 선동적이지 않았지만 이데올로기적이고 분석적이었다. 레닌주의를 자처하며, 로타 콘티누아의 자생주의와 일 마니페스토의 중도주의를 비난. 이들은 개량주의 정당에도 전술적 여지가 남아있다고 주장. 결국, 이들도 중국과 문화혁명을 수용. 공장평의회를 반대. 이후 무원칙한 선거개입 등으로 우경화 하며서 분열되었고 <일 마니페스토와 통합> |
: 자율주의 경향의 경우 애매모호한 정치에 마오주의적인 요소까지 접목하고 있었다.
: <일 마니페스토> 경향은, 공산당과 노동조합의 기존 활동가들이 좌경화하는 것을 중요시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이들도 역시 중국 문화혁명을 귀감으로 여겼으며, 자생성을 조직과 대립시켰으며, 고전적 레닌주의를 거부했다. 로타 콘티누나 보다 상당히 작은 규모였고, 현장 기반도 약했다. 이들은 1971년에 로타 콘티누아, 1974년에 PDUP와 통합했다.
: 아방구아르디아 오페라이아 경향도 있었는데, 이들은 로타 콘티누아와 일 마니페스토를 비판하며 레닌주의 경향을 고수하고자 노력했으나 차후에 중국과 문화혁명을 수용하고 공장평의회를 거부하는 등의 경향으로 치우치게 된다. 이들도 1976년에는 극우적 경향으로 돌아서면서, 좌파 연합정부 노선을 선택하게 된다.
: 1975년 지방선거에서 공산당을 비롯한 혁명적 좌파그룹들의 지지도가 상승했고, 기독교민주당-사회당 정부가 뇌물스캔들에 휘말리면서, 1976년 총선거를 치르게 된다. 혁명적 좌파가 선거를 통해서 지지를 얻겠다며 무원칙한 우경화를 하자, 일부 지지자들이 이에서 이탈하면서 조직이 와해되기 시작한다.
: 1977년 학생운동이 다시 폭발했지만, 1968년과 다르게 고립되어있었다. 정부의 고립정책과 탄압으로 운동이 확산되기는 했지만, 운동은 학생들의 영역 밖으로 확산되지 못했다. 경찰 탄압이 심해지자, 1969년 이래로 조직된 혁명적 좌파 그룹에서 분리되어있던 자율주의 경향들이 올라왔고, 조직된 자율주의자들은 무장과 테러 위주로 쏠리기 시작했다. 이러한 경향이 실질화 된 것이 붉은 여단인데, 혁명적 좌파의 붕괴 때문에 실망에 빠지고 경찰과 공산당이 1977년의 운동을 공격하는 것을 보며 급진화되고 자율주의자들의 주장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을 끌어당겼다. 이 물결은 1980년이 되어서야 가라앉았다.
: 기독교민주당-공산당 정부는 붕괴하고, 1979년 선거에서는 많은 지지를 잃었다.
- 자율주의자들은 경찰과 싸울 수도 있었고 다른 혁명 조직들을 비난하며 운동의 주도권을 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운동을 진전시킬 수 있는 어떤 전략도 없었다.
# 프랑스
: 드골 사임 이후에도 우파정권은 계속되며, 이들은 덜 권위주의적인 유화책으로 대중을 지배하고자 하였다. 이탈리아와 달리 프랑스의 노조는 지도부의 통제를 벗어나지 못한 탓에, 그 규모에도 불구하고 조합원 수의 증가나 현장 조직의 강화를 경험하지는 못했다.
: CGT는 관료적이었지만 가장 전투적인 노조로 여겨졌다.
: 1968년에 대두된 학생운동가들은 선도투로 매몰되면서 모종의 마오주의로 전환했고, 트로츠키주의 조직은 그나마 상황이 나았다. 공산주의자동맹은 조직이 확대되었으나 극좌에서 극우로 좌충우돌했고, 노동자투쟁의 경우는 학내 정치활동을 중단하고 공장 지역의 활동에 치중했으며, 선거에서의 선전적 가치를 강조했다. 더구나 노동자투쟁의 경우 자기네 회원과 직접 관련이 없으면 캠페인을 벌이려 하지 않았다.
<리베라시옹> |
1968년 출신의 학생운동가들과 사르트르가 공동으로 창간 |
공산주의자동맹 |
JCR의 후신 |
노동자투쟁(L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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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
: 독일 노동자들 역시도 스스로 대표를 선출하고 통제할 수 있는 구조가 없었으며 관료적 체제는 강고했다.
: 독일 학생운동가들은 1968년 이후 붕괴하면서 대거 공장활동에 투신했다. 그러나, 학생운동가들은 독일 자본주의의 발전과 독일 노동자들의 투쟁에 대한 구체적 평가에 기초하지 못한 채 1903년의 레닌과 1929년 마오가 갖고 있던 계획을 독일에 적용한 것이었다.
: 마오주의 정치 외에도 일부가 테러에 의존하는 경향을 보였는데, 바더-마인호프 그룹 같은 조직들이 나타났다. 이들은 1970년에 와해되었다.
- 한때 마오주의자였던 요슈카 피셔는 핵발전소 정책을 고수하는 정부에서 녹색당 최초의 장관이 됐다.
# 영국
: 1968년에 시작해 조금씩 파고를 높여왔던 노동자투쟁은, 1972년과 1973년에 전면화되었다.
: 1960년대 들어 서독과 일본에 조금씩 밀리고 있던 정부는, 생산성 증가에 몰두했다. 영국노총을 비롯한 노조관료들은 1960년대에 이미 포섭되어 있었고, 1968년에는 이것이 하나의 전략으로까지 여겨졌다. (도노번보고서)
: 그러나, 이런 전략은 안정적일 수 없었고, 노동자들의 생활수준이 억제되면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결정적인 계기는 1966년 노동당 정부의 임금통제와 1969년 노동당 좌파였던 바바라 캐슬이 <투쟁을 대신해>라는 백서를 발간해 파업찬반투표 비밀, 냉각기 동안 쟁의행위 금지, 벌금제도, 등을 제안한 사건이었다.
: 1969년, 임금통제정책 반대투쟁은 전투적이었던 부문에서 산업투쟁 경험이 없는 노동자들에게까지 퍼져나갔다. 이 투쟁은 1971년까지 지속되었는데, 노동자들은 자발적인 피켓팅으로 이를 조직했다.
: 1970년에는 보수당이 집권하는데, 노동당이 워낙 우경화했기 때문에 보수당은 더욱 우경화해야 했고, 보수당은 10년 뒤에 통화주의라고 부르게 된 강력한 요소들이 들어 있었다. 모든 것을 시장에 맡기고, 정부의 개입을 줄이고, 소득세를 삭감해 ‘인센티브’를 증대하고, 노조의 ‘특권’을 제한하는 것 등이다. 소득세 법인세 삭감, 우유 무료급식 폐지, 복지 예산 감축, 공공 임대주택 임대료 상승, 노사관계법 추진, 등
: 베트남 전쟁으로 인플레이션이 시작되었지만, 정부는 충돌을 피하려고 하였다. 노조지도부는 이중적인 플레이를 했다. 영국노총은 항의집회를 준비했지만, 법안에 반대하는 파업 투쟁은 배제했다. 연락위원회와 같은 자발적인 조직은 공산당 관료체계에 부속되어 제 역할을 하지 못했고, 혁명조직인 IS도 소수였다.
: IS는 1968년 대학점거 투쟁을 통해서 학생운동가들을 흡수했는데, 이들은 1969년부터 공장 소식지를 만들어 배포하였고 주도적인 활동가들과 함께 기사를 발간했다. 이들은 노조 관료로부터 독립적인 활동가들을 단결시키기 위한 현장조합원 운동을 주장했다.
: 영국노총은 1970년 히스정부의 노사관계법 반대 투쟁을 소극적으로 진행하였으나, 조합원들의 반발에 부딪히게 되었다. 이들은 총파업 대신에 집회를 조직하면서 투쟁을 제한하려 했다.
: 그러나, 노조관료들의 현장통제를 뚫고 노동자들의 자생적인 파업투쟁이 발발했고, 광원노동자들은 정부로부터 양보안을 쟁취했다. 광원노동자들의 승리는 정부의 자신감을 흔들었다.
: 아래로부터의 압력 때문에 영국노총이 마지못해 하루 총파업을 호소했다.
: 1972년 히스정부는 임금 동결 조치를 시도한다. 최대의 정치파업이 조직되었다. 분노는 임금동결이나 노사관계법에 국한되지 않고 공정임대차법까지 확대됐다. 그러나, 투쟁은 확대되지 못했다. 운동을 효과적으로 지속시킬 수 있는 조직 형태들이 노동자들의 투쟁 의지를 따라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 1973년 경제가 호황기에 접어들었고 성장률은 높았으며 실업률이 전년도의 절반에 불과했다. 은행가들과 온갖 투기꾼들의 이윤이 놀랄 만큼 눈에 띄게 증가했지만, 노동당이 얻은 것은 없었다.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들의 전쟁 때문에 유가가 4배 상승했고, 광원들의 투쟁이 빗발치면서 지배계급들이 분화되기 시작했다. 일부는 쿠데타나 연정에 끌렸다. 선거결과는 아무도 정부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다. 보수당의 득표는 감소했고, 노동당 득표율도 떨어졌다. 자유당의 득표가 올라갔다.
: 법을 이용해 노조의 힘을 분쇄하려 했던 지배계급 핵심부의 전략은 붕괴했지만, 자리를 메꿀 수 있는 진정한 세력은 존재하지 않았다.
: 1974년 노동당 정부가 입각하여 노사관계법 조항을 대부분 폐지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다시 투쟁에 나섰으며, 영국 자본주의는 세계적인 위기의 영향에서 오랫동안 벗어나 있을 수도 없었고, 만약 정부가 노동자들을 분쇄하지 않으면 고용주들이 정부를 분쇄하려고 달려들 것이었다.
: 지배 계급 내의 강경 우파들이 1974년에 자기들끼리 뭉쳐서 대처에게 정권을 넘길 준비를 하였으며, 상층 기업인들이 전경련을 사임했고, 예비역 장교들은 파업 분쇄용 사설 군대를 창건하였다.
: 1975년 좌파 노조 지도자들은 임금 인상을 주당 6파운드로 제한하는 사회 협약을 지지하고 나섰다. 거대한 퇴조기가 덥쳤지만, 혁명적 좌파는 와해되지는 않았다. 국제사회주의노동당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그 정치 덕분이었다.
- 당원이 5만명인 혁명적 사회주의 정당은 특정 쟁점에서는 30만 명의 직장위원들을 당 주변으로 조직할 수 있으며 이들을 통해 1100만 명의 노동조합원들을 움직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 한 편에는 1100만 명의 조합원을 거느린 노동조합 운동이라는 거대한 톱니바퀴가 있었고 다른 한 편에는 그보다 훨씬 작은 톱니바퀴, 즉 혁명 조직이 있었다. 이 작은 톱니바퀴가 바로 거대한 톱니바퀴를 돌리려고 한다면 그 자신이 부러지고 말 것이다. 그 둘을 매개하는 중간 톱니바퀴가 필요했다.
# 북아일랜드
: 1969년 영국이 북아일랜드에 군대를 파견한 것은, 노동당 정부가 그 지역을 직접적으로 통치하지 않으면서도 지역불안정이 투자가들을 위협할 것을 걱정했기 때문이다.
: 북아일랜드에서 왕당파들의 횡포가 심해졌고, 처음 영국군이 도착했을 때 가톨릭 주민들은 이를 환영했다. 물론, 한편으로는 무장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세력도 있었다. (프로보스) 가톨릭계의 저항이 거세지면서 정부는 모든 시위를 금지하며 억압했지만, 1972년 피의 일요일로 알려진 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대규모 정항이 남아일랜드까지 확대되었으며, 영국 대사관이 불에 타 무너져내렸다.
: 저항에 직면한 히스정부는 북아일랜드 정부를 해산하고 영국정부의 직접 통치를 확립했다.
: 그러나 영국정부는 북아일랜드 개신교와의 협력도 놓칠 수 없었으며, 가톨릭계와의 휴전은 지속될 수 없었다.
: 북아일랜드 노동자 투쟁은, 노동자들의 다수인 개신교도의 태도 때문에 혼란을 겪었고, 사회주의적 입장을 받아들이기 전까지 이러한 혼란은 지속되었다. 노동자 대중은 북아일랜드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태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반면, 혁명적 사회주의 정치로 이끌린 소수는 잘 이해하고 있었다.
- 노동자들의 연대가 어떤 것인지 보여 주는 시위에 참가한 것은 난생 처음이었다. 우리는 모두 매우 강력한 힘을 느꼈고 우리가 세계를 지배할 수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 잭 존스는 TUC 총평의회에서 말하기를 만약 어떤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비공식적 요소들이 총평의회를 대신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영국노총(TUC)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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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조합 방어를 위한 연락위원회 |
공산당계 조직, 그러나 연락위원회는 공산당 관료체계에 부속되어 기능했다. 노사관계법 반대 투쟁이 노조간부들의 뜻을 거슬러 산업 투쟁으로 확산되자 연락위원회는 기권했다. |
전경련(CB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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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르투갈
: 1974년 쿠데타는 산업 대부분을 지배하고 있던 독점 기업과 군대의 주요 지도자들이 함께 일으킨 것이었다. : 그러나 스피놀라 장군은 파시스트 권력 구조의 갑작스런 붕괴가 포르투갈 노동자들에게 미칠 영향을 고려하지 않았다. 쿠데타 1주일 후에 노동자들은 시위를 시작했으며, 이들은 경제적 문제 뿐만 아니라 파시스트 경영진과 스파이들을 청소할 것을 요구했다. 정권은 최저 임금을 30% 인상하고, 파시스트와 연계된 회사중역 1000명을 축출했다.
: 스피놀라 장군은 이에 놀라 연정을 구상했고, 사회당과 공산당과 연정을 시도했다.
: 공산당은 반파시즘 투쟁에서 중추를 이루었고, 쿠데타 이후 세력이 크게 확대되었지만, 여전히 스탈린주의적이었다. 이들의 목표는 노동자들의 투쟁을 억누르면서 자신들의 힘을 강화시킨 다음, 그 지위를 이용해 옛 부르주아지를 몰아내고 국가자본주의를 확립하는 것이었다. 공산당은 정부에 참여하면서부터 반동성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 공산당의 변절에 투사들은 혼란에 빠졌고, 혁명 그룹들이 세력을 획득하기 시작했다.
: 스피놀라 정부는 우익과 파시스트 세력을 키워 이에 대항하려고 했고, 1975년 군대 내 우파장교들도 무력시위를 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노동자들의 투쟁에 불을 붙이는 격이 되었다. 노동자들은 그들에게 동조하는 군대 내 세력과 연합을 시도했고, 이러한 경향이 병영 내 사병들을 격려해 몇몇 병영에서는 일반 사병들과 장교들이 공동의 회의체계를 구성하기도 했다.
: AFM지도부들은 장교와 사병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었고, 사병들은 장교들의 공식적인 권력을 뒤집을 만큼 충분한 자신감이 있지는 못했다. AFM은 독재 보다는 제3세계 해방운동 모델에 자신을 맞추고자 했다. 하지만, 포르투갈은 쿠바 중국과는 달리 부르주아지들이 힘이 있었다. 그들은 서방 열강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1974년 상황을 이중권력으로 보기에는 노동자 계급을 대표할 만한 조직이 존재하지 못했다.
: 혁명적 좌파의 규모는 무척 작았다. 대부분은 공산당이나 일선 조직에서 뛰쳐나온 사람들이었고, 대부분 마오주의 게바라주의 4인터의 사상을 무분별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마오주의 그룹들은 공산당을 분석하지 못했고, 극좌적으로 매도했다. 이들은 우경화했고, 전투적인 노동자들을 혼란에 빠트렸다. 이들은 공동전선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 이런 상황에서 유럽의 사회민주주의 정부들이 사회당과의 관계를 강화하고 있었다. 그리고, 미국 CIA의 공작을 통해서 포르투갈 내 극우파들이 사회당을 지지하기 시작했다. 노동자들은 사회당에 대해서 무지했기 때문에 그들의 외피에 속아넘어갈 수 있었으며, 사회당은 1975년 제헌의회 선거에서 기반을 마련했다.
: 소아레스의 사회당은 당선되자 정부 내에서 합의됐던 사항들을 파기하고, 공산당, AFM을 공공연히 비난하기 시작했다. 공산당은 효과적인 반대투쟁을 조직하지 못했다. 사회당은 곧 연정에서 탈퇴하게 되고, AFM은 곧바로 단독 통치를 시도한다. 장교들만으로 정부가 구성된다. 그러나, 정부는 무능력했고, 노동자들의 자발적인 시위물결과 경제 위기에 대처하는 법을 몰랐다. AFM은 그들이 직면한 딜레마를 해결할 수 없는 운명을 타고났다. 그들에게 깊이 배어있는 중간 계급적 태도 때문에 노동자들과 일반 병사들을 해방의 주체가 아니라 군사 음모의 잠재적 지지자로 보았다. AFM은 결국 분열하고, 사회당과 민중민주당의 연합 정부가 구성된다.
: 정부는 교체되었지만, 직면했던 문제는 사라지지 않았다.
: 사병들이 독자적인 힘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혁명적 좌파의 주도 아래 병사들의 시위가 있었고, 이들은 우파 장교들을 사임시키기에 이른다. 내전 분위기가 격화되면서, MES와 PRP는 노동자들을 무장시키고 봉기를 준비시킨다.
: 혁명적 좌파는 노동자보다 병사들에게서 더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고, AFM과 COPCON이 중재를 통해서 얻어준 성과에 의존하면서 환상에 빠졌다. 노동자 평의회는 대중적으로 조직되지 못했다.
: 정부가 좌익적으로 기울고 있던 군부대를 진압하고자 했을 때, 대중적 역량이 강화되어 있지 못하던 군부대도, 무장에만 집착한 나머지 대중행동의 힘을 호소하지 않았던 혁명적 좌파도 진압을 막아내지 못하고 와해되고 말았다.
- 병사들이 얼마나 큰 힘을 갖고 있는지는 그들의 조직과 정치의식에 달려있다.
인테르신디칼 |
전투적 노동자들이 장악한 지역 노조 |
공산당 |
반파시스트 투쟁에서 중추 구실을 함 |
사회당 |
변호사 주도로 결성. 극소수 |
민중민주당(PPD) |
사회민주당(PSD)의 전신 |
무장세력운동(AFM) |
1974년 쿠데타를 벌인 군대 내 소장파 그룹 |
MRPP |
가장 큰 마오주의 조직, 공산당과 AFM에 대항 |
AOC |
마오주의 조직, 공산당과 AFM에 대항 |
UDP |
마오주의 조직 |
사회주의좌파운동(MES) |
지식인 그룹 |
프롤레타리아트혁명정당(PRP) |
노동자평의회에 기초한 노동계급 혁명 강조, 게바라주의 정치를 가미
종파적 활동으로 기반을 무너뜨림, 무장을 기술적으로 준비하는 것에 치중
당의 임무가 사회주의 혁명을 위한 선전이며 거사 당일 동원 가능한 조직들을 확보하는 것이라 주장, 개량주의에서 떨어져 나오고 있는 사람들을 정치적으로 조직하기 위해 지금 당장 여기서 싸워야 할 필요성을 전혀 모르고 있음. |
ELP |
우파 지하조직 |
단결한 병사들은 승리한다(SUV) |
혁명적 좌파가 주도한 병사조직 |
# 그리스
: 1967년 자유주의 중도연합당의 집권을 못마땅해한 파시스트들이 쿠데타를 통해서 집권했고, 이들은 아주 사소한 개혁도 두려워한 나머지 가장 기본적인 민주적 절차도 무시하는 정책을 시행했다. 이들은 이윤 상승과 그리스 산업의 경쟁력, 임금 상승 억제 등으로 제도권 야당과 타협하면서 정권을 유지했다.
: 1971년부터 조금씩 파업의 물결이 일어나고 있었고, 1973년 아테네 과학기술대학 점거투쟁은 학생 징집 중단, 보안경찰의 학원 사찰 중단, 교육 제도 개선 등을 요구하는 군부독재와 독점기업에 반대하는 시위로서 저항을 전면화하였다. 이 시위를 강경하게 진압한 군부는 중간계급으로부터도 신뢰를 잃었고 자본가들에 의한 압력도 받기 시작했다.
: 대중적인 압력을 받아 군사정부는 쿠데타를 통해 전복되었고 보수 정치인 콘스탄틴 카라만리스가 국민 화합 정부를 맡았다. 하지만, 억압적 국가기구는 잔존했다.
: 그리스 역시 혁명적 좌파의 영향력이 미미했고, 마오주의 경향이었을 뿐이었다. 군사정권 몰락과 함께 성장한 것은 혁명적 좌파이기도 했지만, 공산당이었고, 범그리스 사회당이 건설되었다. 범그리스 사회당은 1981년 정권을 잡았고, 혁명적 좌파의 경우 ‘사회주의혁명‘이라는 단체 뿐이었다.
# 스페인
에테아(ETA) |
바스크족의 고향과 자유, 바스크민족당에 반해 무장투쟁을 중요시
프랑코정부의 파시스트 총리를 암살하면서 대중적 인기를 얻음 |
바스크민족당(PNV) |
|
스페인사회노동당 |
곤살레스가 지도 |
공산당 |
|
노동조합총연맹(UGT) |
사회당 계열의 노조 |
노동조합연맹(USO) |
좌파 사회주의 노조, 가톨릭 계열에서 등장 |
중도민주연합(UCD) |
민주적 파시스트들 |
마르크스주의통일노동자당(POUM) |
옛 투사들의 모임으로 전락 |
스페인공산주의운동(MCE) |
ETA의 분파가 결성 |
혁명적공산주의자동맹(LCR) |
ETA의 본파와 통합 |
노동자혁명조직(ORT) |
가톨릭 계열에서 탄생 |
: 프랑코 정부는 1968년의 물결 이후에도 계속 강압적인 방식으로 사회를 통치하고자 했다. 그러나, 1970년대 노동자들의 자생적인 파업투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스페인 뿐만 아니라 바스크 지역에서도 파업과시위가 잇따랐다. 그리고, 이 모든 투쟁에서는 1960년대의 노동자위원회 운동의 양상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리고, 이 물결은 1973년 경기침체와 함께 불붙기 시작했다. 1974년에는 절정에 달했다.
: 대중적 저항이 거세지면서 지배계급들도 분화하기 시작했는데, 이들은 지배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민주적 구조는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 이러한 와중에 공식적인 재야세력(공산당이 주도하는 노동자위원회, 자유주의 왕당파, 가톨릭)이 민주회의를 수립하고 프랑코를 내려앉힌다. 그러나, 프랑코는 강경파 파시스트에게 정권을 이양하게 된다.
: 1976년에 비토리아 지역으로부터 거대한 총파업의 물결이 일어나면서 파시스트 집단은 1977년 총선을 치르기로 약속하고 정치수 사면을 발표한다. 그러나, 이들은 대중적 물결을 잠재운 뒤 파시스트들과 온건야당세력을 집권시키려고 하였다.
: 이 틈을 비집고 수아레스가 곤잘레스의 사회당을 통해 선거에 참여하고, 공산당이 이를 지지한다.
: 공산당은 프랑코 독재시절부터 지하 활동의 중추역할을 했다. 그러나, 이들은 현장 노동자 직접 민주주의에 기초한 통일된 노동자 운동을 건설할 의지도, 능력도 없었다. 지도자들은 자유주의 왕당파, 민주적 파시스트들, 진보적 고용주들, 사회당 지도부와의 관계를 위해 전투성을 무디게 만들었고, 1976년 우경화했다. 1977년 노동자위원회의 변호사들이 살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공산당은 제대로 된 투쟁을 조직하지 않았고, 공산당 합법화를 대가로 몬클로아협약을 체결한다. 임금인상을 20%로 제한하고 통화주의에 입각해 공공지출을 삭감한다는 내용이었다.
: 결국 1977년 총선에서는 민주적 파시스트들이 다수당이 되고, 사회당은 이와 연정을 구성할 수 있었다.
: 혁명적 좌파의 힘은 미약했고, 이들은 1970년대 중반 6개의 주요 조직으로 정리되었으며, 부르주아지에 대한 태도, 민족운동에 대한 태도, 등으로 논쟁했다. 일부 혁명적 좌파들은 스페인에서 프랑코 체제가 민주주의로 평화롭게 이해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하고 혁명 가능성을 염두해두었었다. 이들은 자기 자신의 능력을 과대평가하는 동시에, 공산당의 역량을 과소평가하는 우를 범했다.
: 1981년 과거 군 장성들의 쿠데타가 있었으나, 더 이상 지배계급은 군부독재의 위험을 감수하려 들지 않았고, 바스크의 투쟁이 남아있었으나 이는 스페인정부에 크게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 유럽 좌파의 위기
: 1968년은 과거 냉전과 번영의 곡해된 구도가 깨어진 해였다.
: 1974년은 두 번째 전환점으로서 부르주아적 지배가 안착화되었다. 스페인(1974), 포르투갈(1975), 그리스(1973)의 독재정권이 물러나고, 제도권 야당이 설립되었다. 이것은 1973년 경제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최소한의 타협이었다. 이것은 영국의 사회협약(1975), 스페인의 몬클로아협약(1977), 이탈리아의 역사적타협()으로 나타났다.
: 때로 아래로부터의 압력에 못이겨 투쟁을 조직하기도 하지만, 결정적인 시기 투쟁을 억누르는 개량주의 정당들의 행보를 지켜봐야한다. 이들은 유로코뮤니즘으로 일반화 될 수 있다.
: 1970년대 중반의 노동자들은 1920년대와 같은 끔찍한 경제불황을 겪지는 않았고, 경영진의 교활한 노무관리가 그 한몫을 차지했다. 1974년에 노동자들은 개량주의자들의 그럴듯한 대안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 혁명적 좌파는 1970년대를 경과하며 세력화하였으며, 이들은 1976년 개량주의 정당들이 정권을 창출하면 계급 투쟁이 거대하게 분출할 것이라는 환상과 낙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희망이 좌절되면서 1975~1977년 이들은 해체되었다. 심지어 정반대의 입장으로 돌아선 그룹도 있었다. 1978년 덩샤오핑이 마오쩌둥과 문화혁명을 비판하고, 베트남이 캄보디아를 침략하고 무력으로 폴 포트 정권을 전복, 중국이 베트남과 전쟁을 벌이자 그나마 남은 환상도 깨어졌다.
: 그나마 남아있는 조직들도 대세를 따라 우경화했다.
: 그 이후 대안은 여성을 비롯해서 여러 부문에서의 운동이었다. 그러나, 이 운동들은 지속적인 자체동력을 유지하지 못했다.
- 그런 운동들이 개량주의로 바진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그들이 노동계급 투쟁을 통해서만 변혁이 가능하다는 사실에 눈을 감은 순간부터 그것은 필연적이었다. 그런 운동들 자체에는 사회에 결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힘이 없었다. 그런 운동은 사회적 항의이지 사회적 힘이 아니었다. 그들은 급속히 성장할 수 있었으나 그 지지자들이 운동의 무기력함을 발견하자마자 재빨리 사그라졌다. 이제 남은 것이라고는 더 넓은 사회관계에서 고립돼 자신들의 생활양식을 바꾸는 것으로 자족하거나 자신들에게 변화를 가져다줄 수 있는 기성 정치 제도에 의존하는 소규모 집단이 되는 것 뿐이었다.
# 다음 번의 불꽃
: 개량주의 지도자들은, 민족적 민주적 가치에 대한 강조, 부르주아 민주주의 구조에 대한 과대평가를 통해서 운동을 억누르고 있다. 안토니오 그람시도 국가와 대중 사이를 중재하는 제도적 네트워크를 시민사회라고 불렀고, 이 네트워크 덕분에 자본주의 사회는 직접적인 경제적 요소들의 재앙적 공습에 저항할 수 있다고 하였다. 네트워크들이 국가에 대한 공격을 막는 일종의 방어막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시기에 혁명적 투쟁은 진지전의 형태, 즉 이러한 네트워크와 영향력을 다투는 투쟁 형태로 나타나고, 전면적은 단지 전술적 중요성만 가지게 된다.
: 그러나, 개량주의 지도자들은 자본주의발전이 과거에 형성된 시민사회 구조 자체를 허물어버리는 경향이 있다는 점을 무시한다.
: 노동계급의 무관심에 대한 지적도 있는데, 무관심이나 개인주의라는 개념은 정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발전의 특정 단계에서 무관심은 그 반대, 즉 신속한 대중 행동으로 바뀔 수 있다. 이것이 1968년에 투쟁이 분출할 수 있었던 진정한 이유이다.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단지 이데올로기적 추상이나 일련의 의회적 형태들에 불과한 것 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특정한 구체적 제도들과 연결된 부르주아 민주주의였다.
: 물질적 양보는 일시적인 것이다.
: 1970년대 이후 위기의 특징은 1930년대 만큼 전면적이지 않지만, 지속적이라는 점이다.
- 의식은 개인들이나 계급들의 고정 자산이 아니다. 의식은 그들 상호간의, 그리고 이 세계와 그들 간의 관계의 반영이다. 그런 관계 조건이 변하면 의식 자체도 혼란에 빠진다.
- 우리는 사람들이 두 개의 이론적 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하나는 그의 행동에 함축돼 있으며, 현실에서는 실제 세계를 실천적으로 변화시킬 때 동료 노동자와 그를 단결시켜 주는 의식이다. 다른 하나는 겉보기에는 분명하고 말로 표현되는 것으로, 과거로부터 물려받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의식이다.
- 부르주아 민주주의 이데올로기는 그 자체로 존속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노동자들이 자신들을 위협하는 사회 과정을 어떻게 통제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해 부르주아 사회가 제시하는 답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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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크푸르트학파 [Frankfurter Schule]
T.W.아도르노, H.마르쿠제, W.벤야민, E.프롬, F.L.노이만 등을 비롯하여 제2세대 연구자인 J.하버마스, A.슈미트 등이 포함된다. 그들은 정통파 마르크스주의의 교조주의(敎條主義)에 반대하면서도, 어떤 의미에서든 마르크스의 동기(動機)를 계승, 그것을 S.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과 미국 사회학의 방법을 결합시켜 현대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비판이론을 전개하였다.
나치스로부터 탈출, 미국으로 망명한 후에는 기관지 《사회연구》를 통하여 파시즘에 대한 사상적 저항을 관철하였고, 《권위와 가족》(1938) 《권위주의적 퍼서낼리티》(50) 등의 뛰어난 공동연구를 이룩한 외에, 서유럽 문명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省察), 예컨대 《계몽의 변증법(辨證法)》(48)을 시도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관리사회(管理社會)의 문화라든가 지배적인 실증주의에 날카로운 비판을 가했고, 60년대의 국제적인 학생소요 때에는 마르쿠제를 비롯하여 신좌익적(新左翼的)인 현대사회비판론(現代社會批判論)으로 일약 각광을 받았다.
아도르노의 《부정적 변증법》(66),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41), 노이만의 《비히모스》(42), 마르쿠제의 《1차원적 인간》(64), 하버마스의 《이론과 실천》(63) 《인식과 관심》(68) 등은 이들 연구성과의 일부이다.
히피 [hippie]
이듬해에 뉴욕·로스앤젤레스·버클리·워싱턴 등의 대도시로 퍼져 나갔으며, 파리·런던까지 파급되었다. 어원에 관해서는 여러 설이 있는데, 해피(happy:행복한)에서 나왔다는 설, 히프트(hipped:열중한, 화가 단단히 난)에서 나왔다는 설, 재즈 용어인 힙(hip:가락을 맞추다), 엉덩이를 뜻하는 힙(hip), 갈채 등을 보낼 때의 소리 '힙,힙'등에서 나왔다는 설 등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행복에 최대의 관심을 가지고, 진부한 물질문명에 대해서 분노를 터뜨리며, 재즈에 황홀해지고, 항의집회에서 뜨겁게 기세를 올리며, 발가벗고 인간성을 찾는 시위를 하므로, 어느 설이든 부분적으로는 히피의 성격을 나타내고 있다. 또한, 이처럼 많은 어원이 지적되는 것 자체가 그들의 복잡성을 말해준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자유와 사랑을 찾고, 비둘기의 힘, 꽃의 힘(평화의 상징)을 사랑하며, 자신을 위해서 살려고 한다. 체질적으로는 외면적·기성적인 것에 만족할 수 없으며, 무엇이든 자기 손으로 만들고 있지 않으면 안심할 수 없는 성격의 소유자가 많다.
차림새는, 남성은 장발·수염투성이에 펜던트(목걸이)와 굵은 벨트에 부츠를 신었고, 여성도 장발·미니스커트에 샌들 또는 맨발이다. 그들은 대도시 안에서나 교외에 히피 빌리지를 형성하는데, 그러한 곳에는 젊은이들의 탈사회적 생활방식에 공감하는 사람들(diggers)의 기부금 등으로, 일하지 않고도 먹고 살 수 있는 시설까지 마련되어 있다.
또, 인간성을 압살(壓殺)하는 물질문명이나 국가·사회제도로부터 개인의 자유를 해방시키기 위해서 징병기피·반전·인종주의에의 반항 등을 내세운 캠페인을 벌이며, 기관지도 발행하고 있다.
알제리전쟁
1954년 11월 알제리민족해방전선(FLN)이 무장봉기를 함으로써 시작되어 각지로 무장투쟁이 확대되었고, 1958년에는 그 병력이 13만 명을 넘는 인민전선으로 발전하였다. 이에 대하여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지원을 받은 프랑스는 80만의 병력과 5조(兆) 프랑의 군사비를 투입하여 철저한 진압작전을 전개, 알제리 인민 약 100만이 죽고 70만이 투옥되었으며 프랑스군도 1만 2000명이 전사하였다.
그러나 민족전선을 진압할 수는 없었으며, 1960년에는 전국적으로 확대되어 도시의 정치투쟁과 결합되었다. 이 투쟁의 발전을 토대로 FLN은 58년 가을 카이로에서 알제리공화국 임시정부를 수립, 아랍제국과 사회주의 국가의 승인과 광범한 국제적 원조를 얻게 되었다. 이보다 앞서 1958년 2월에 성립된 프랑스의 드골 정부는 병력을 증강하여 군사탄압을 강화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정치적 교섭을 벌이지 않을 수 없었다. 1960년 여름부터 메룬·에비앙 등에서 비밀교섭을 벌인 결과, 1962년 3월 에비앙 협정이 성립되어 전쟁은 막을 내리고, 7월 1일에 행한 국민투표에 의하여 알제리의 독립이 선언되었다. 9월에 선출된 의회는 알제리의 공화제를 선언하고, 26일에는 A.벤 벨라를 수반으로 하는 정부가 수립되었다.
유로 코뮤니즘 (Eurocommunism)
유로코뮤니즘이라는 신조어가 나타난 것은 1970년대 중반부터였다. 그 뜻을 문자 그대로 번역하면 유럽식 공산주의이다. 유로(Euro)라는 접두사를 붙인 것은 소련식 공산주의 또는 동구식 공산주의와 구별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즉 이태리, 프랑스, 스페인 등 서구공산당을 중심으로 1974년 이후에 주장해온 서구식 공산주의로 서구의 자본주의적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에 있어서 새로운 사조를 드러내고 있는 제3의 변용된 공산주의라 할 수 있다. 소련으로부터의 독자노선의 표방과 서구민주주의의 제도와 절차를 통한 사회주의에로의 길을 선언함으로써 소비에트형 동방세계에는 충격을 서방세계에는 새로운 도전을 제기한 셈이다. 이런 상황의 시사점이 공산주의의 또 다른 망령인가? 아니면 모든 유럽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보편적 대안인가? 하는 점은 당시 많은 이들의 궁금증을 자아냈다.
유로코뮤니즘은 현대 자본주의가 빈부격차 심화, 탈인간화, 권력의 기업화등 많은 병폐점을 드러내고 있으며 기존의 공산주의 역시 인간의 무력화, 기계화, 권력의 도구화, 생산의 저하 등 공산주의국가 간에도 많은 회의와 불신을 자아내게 되자 이들에 대한 재검토 내지 돌파구로서의 의미가 담겨져 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이러한 관계가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소위 개발도상에 있는 제 3세계국가들에게는 유로코뮤니즘이 폭발적인 환영을 받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