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문으로 가는 길 - 20세기 현대 중국사의 불꽃
찰리 호어 지음, 김희정 옮김 / 책갈피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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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팡시의 <나의 중국혁명 회상>은 1950년 이후의 역사에 대해서 거의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한권을 더 읽게 되었습니다. 찰리 호어의 <천안문으로 가는 길>은 중국 근대사의 중요한 사건들을 빠지지 않고 다루고 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회주의 역사가들이 그러하듯, 호어는 사건을 나열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사건이 일어나게 된 주객관적인 조건들을 서술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며, 모든 사회문제는 경제체제의 강한 영향을 받는다는 마르크스주의에 비추어, 경제 사회문제에 좀 더 집중해서 서술하고 있습니다.

중국공산당을 지도했던 마오쩌둥은 어떤 인물이었는지, 1949년 중국 2차혁명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막연히 비효율적인 집산정책이라고 알려져있는 마오쩌둥의 경제정책은 어떠했는지, 중국의 시장화를 이끌었다는 덩샤오핑은 어떤 인물이었고 어떤 정책을 펼쳤는지, 1976년과 1989년의 천안문시위의 원인과 내용은 무엇이었는지, 등 주된 관심사들은 결국, ‘중국의 대대적인 개방과 개혁의 의미‘를 밝히기 위함입니다.

1차 국민당-공산당 합작을 통해서 형식적이나마 한편이라고 믿었던 국민당의 장제스가, 공산당원과 노동자들의 시위에 대해서 무차별적인 쿠데타를 저지르면서 공산당의 세력은 크게 줄어듭니다. 그리고, 그나마 남아있던 공산당원들은 코민테른의 지시에 따라 광둥에서 무모한 폭동을 일으키면서 절멸하는 수준에 이르게됩니다.

한줌밖에 되지 않았던 공산당은 대부분의 도시에서 철수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는 이가 바로 마오쩌둥입니다. 중국에서 공산당이 결성된 것은 고작 6년 전이었으니, 초기 정당의 모습이 의례 그러하듯 지식인 출신들이 대부분이었을겁니다. 마오쩌둥 역시 그러했구요.
그리고, 도시에서 철수한 공산당은 국민당 정부의 대대적인 탄압을 받으며 산간지대를 근근히 돌아다녔으니, 당의 주축은 응당 농민과 지식인들 중심이었을 것이구요.
당원들의 구성정도는 응당 정당의 정책에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1949년 중국혁명의 성격은 당원의 구성을 떠나 실제 과정에서도 나타나는데, 중국공산당은 일본에 맞서던 게릴라식 전투로 권력을 장악하게 됩니다. 봉건적인 소작제로 고통받던 많은 농민들이 중국공산당을 지지했을 뿐, 중국공산당은 노동자들에게 시위 자제를 요청할 정도였습니다.

당시 중국혁명을 취재했던 한 미국인 기자는,
“주목할 만한 것은 공산주의자들이 도시 노동자들에게 과도하게 높은 임금을 지불하여 환심을 사려 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사유공장에서 생산에 대한 최고 권위를 경영자에게 부여했다는 것이다.”
라고 회고하고 있습니다.
대중적인 지지를 받으며 국가기구를 장악했다는 점에서 ‘혁명‘임에 틀림없으나, 구성이나 방식 면에서 사회주의 혁명과 어떤 공통점도 없었던겁니다.

물론, 이러한 성격은 이후 공산당 정부의 정책에도 그대로 반영되는 것이기에 중요합니다.
중국공산당은 처음부터 사회주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들은 오랫동안 타국의 지배와 봉건적 소작제에 고통받았던 기존의 경제 대신, 자립적인 경제를 수립하고 싶었을 뿐이고, 생산수단의 공공소유라는 형식을 선택하게 됩니다.
하지만, 내용이 빠진 채 형식만 갖추어졌다고 해서 변화를 기대하기란 힘듭니다. 역사에는 순리, 즉 나름의 운동법칙이 있는 것이니까요.

내용이 빠진 생산수단의 공공소유란 오히려 해악적일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중국에서 보게됩니다.
더구나 대중의 지지를 받았을 뿐, 대중의 자발성이 단순히 지지를 보내는 것에 그쳤던 중국혁명에서, 공공소유된 생산수단에 대한 통제력을 대중들이 발휘할 수는 없었겠죠. 모조리 국가기구의 손에 쥐어졌던 셈입니다.
1958년부터 시작한 대약진, 인민공사 운동을 통해, 강제적으로 생산수단의 국가소유를 이루게 되고, 지극히 강제적인 방식으로 노동자와 농민들은 착취받게 되고, 대중의 착취를 기반으로 한 경제란 그것이 사회주의든 자본주의든 어떤 명찰을 달고있느냐에 상관없이 비효율, 곧 경제침체로 귀결되는 것이죠.

결국, 마오쩌둥은 4년 만에 정책을 철회하고 농업과 공업의 사유화를 시작하는데,
정책적 실패를 인정한 그의 입지가 약해지는 것에 따라, 반대파들이 등장하게 됩니다. 문화혁명과 덩샤오핑의 등장이 여기서 시작됩니다.

찰리 호어는 마오와 덩 두 사람으로 대표되는 두 그룹을 두고 이렇게 논평합니다.
“전체 전략의 성격과 속도에 대한 논쟁이 있었지만, 이것은 명확하고 체계적으로 정립된 대립이라기 보다는, 현대화 전략 그 자체에 내재되어 있는 모순의 반영이었다. 보수파는 중국이 뛸 수 있기 전에 먼저 걷는 연습부터 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덩샤오핑파는 설사 계속 뒤지는 한이 있더라도 뛰는 것만이 따라잡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대응했다.”

덩샤오핑의 집권을 두고 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로 급선회했다는 평가를 내리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이 무지한 평가자들은 덩샤오핑의 개방화 정책을 찬양하는데 급급한 나머지, 전혀 사회주의적이지 않았던 마오쩌둥에게 사회주의자라는 명찰을 달아준 셈입니다.

여튼, 덩샤오핑의 경제정책은 마오쩌둥의 그것에 ‘전면적’ 이라는 수식어를 붙여야하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는 바로 수출지향적 경제와 전면적 시장화를 실시했는데, 필연적으로 부작용을 안고 있었습니다.
1978년에 집권한 덩샤오핑의 경제정책은 흡사 박정희의 그것과 비슷한 셈이죠. 덩샤오핑과 박정희가 도달했던 같은 결론이란, 자본주의는 축적된 대규모의 자본을 바탕으로 하는데, 축적된 자본도 없는 상태에서 규모있는 경제발전을 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국외의 축적된 자본을 빌려와야 한다는 사실이었을겁니다.
그리고, 외자를 유치하기 위해서는 자본이 구미를 당길만한 요소, 이를테면 세금의 감면이나, 저임금 상태로의 동결, 등이 반드시 필요했을거구요.

그 이후에 중국에서 표방했던 구호가 ‘정치와 경제의 분리‘ 였습니다. 이 아이러니한 구호는, 경제분야에서는 자본주의 개방정책를 채택하지만, 정치는 여전히 사회주의를 유지한다는 것이었죠.
하지만, 그 이후에도 사유화가 지속적으로 확장되었다는 점이 시사하듯이, 애초부터 실현 불가능한 공문구에 불과했습니다. 정치와 경제는 서로 분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전자는 후자에 종속적이니까요.
정치체제는 해당 경제체제에 가장 합당한 형식으로 유지될 뿐입니다. 이를테면, 무역, 세금, 금융, 노동에 관한 법안들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 처럼요.
이것들은 특정 시기의 경제적 이해관계에 따라 변화하기 마련입니다.

여튼, 경제는 경제대로 발전시키고 통제는 통제대로 하고싶었던 중국 지배계급들의 순진한 소망과 상관없이, 중국이 세계경제에 편입되는 그 순간부터, 중국의 정치란 중국 지배계급이 아닌 세계자본주의의 흐름 내지 대세의 영향을 더 많이 받는 것이죠. 지배계급의 통제에서 벗어나는겁니다.

1978년부터 1988년 사이에 일어났던 소위 민주화에 대한 대중적인 열망과 1989년의 천안문 시위까지는 이러한 경향들은 반영한다고 생각됩니다.
외국자본을 유치하기 위해서 노동자들을 저임금의 착취 속에 가두어두어야 하고, 금융 은행업 부문이 팽창하면서 인플레이션이 발생하고, 점점 경제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는 관료들의 부패가 이들 시위의 원동력이었습니다. 500만에 가까운 시위대가 거리로 쏟아져나왔고 인민을 해방시킨다는 군대가 2,000여명 이상의 인민들을 학살했던 천안문 시위는, 중국의 경제위기가 극심했고 당국이 초긴축정책으로 옥죄였던 1989년에 있었구요.

중국의 정치는 앞으로도 지속적인 변화를 겪을 것이고, 다당제가 시행되면 중국공산당은 가장 보수적인 정당으로 자리매김할 것입니다.
일당독재의 중국공산당, 부르주아 의회체제에서 왼쪽 날개를 맡고있는 이탈리아 재건공산당, 프랑스 공산당을 비롯해서 각국의 숱한 노동당, 사회당, 등등
당명은 스스로의 정치를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혼재되다 못해 극과극의 경향을 이루면서도 같은 당명을 가진 정당들이 있다는 것이 재밌습니다. 하긴, 군사독재 시절 정권을 장악한 쓰레기들도 당명에는 ‘민주’며 ‘자유’를 갖다 붙였지만요.

당명 만으로는 알 수 없습니다. 꼭 부르주아 의회체제에 국한시킬 필요도 없습니다.
누가 임명시켜주는 것도, 자임할 수 있는 것도 아닐겁니다.
진정한 노동자계급의 정당, 사회주의 정당은, 정당 역사상 단 한번, 혁명의 시기에만 대중적인 지지를 받을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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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상 - 나의 중국혁명
왕범서 지음, 김승욱 옮김 / 새물결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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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한국에서 ‘사회주의‘는 무척 먹칠되어 있어서, 그것은 ’부패한 관료‘와 ’비효율적 경제‘를 뜻하는데 사용됩니다.
이것은 사회주의를 표방했던 현실의 국가들, 즉 소련과 중국의 경험들이 미친 영향입니다. 사회주의 사상은 멀지만, 소련과 중국은 가까우니까요.
따라서, 소련과 중국의 역사를 돌아보는 것은, 사회주의의 복권을 위해서 꼭 필요한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사회주의는 노동자계급 스스로의 힘으로만 가능하다“라는 오랜 공식에 비추어 볼 때에도, 소련의 1917년 10월혁명과 같은 명실상부한 노동자혁명이 존재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반세기 가까이 사회주의국가를 표방하고 있는 - 이제는 거의 억지수준으로 - 중국이기에 더욱 그러했습니다.
오랫동안 가지고 있었던 중국역사에 대한 부채의식을 조금이나 덜 수 있었던 기회이기도 했구요.

최근 중국의 세계경제의 엔진으로 각광받으면서 중국 관련 서적들이 쏟아져나왔고, 그중의 일부는 중국의 역사나 사상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중국의 역사를 돌아보는데 있어 나름대로 풍족한 조건이 갖추어져 있는 셈이죠.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 객관적인 역사란 존재할 수 없고, 사료를 선택하는 순간부터 역사가의 주관이 강하게 개입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누구에 의해 쓰여진 역사인지도 무척이나 중요한 사실일겁니다.

<나의 중국혁명 회상>은 중국의 트로츠키주의자였던 왕팡시(왕범서)의 회고록입니다.
그는 중국 사회주의운동의 2세대이고, 1953년에 중국공산당에 의해 트로츠키주의자들이 거의 절멸된 이후, 2002년 사망할 때 까지 오랜 망명생활을 하며 트로츠키의 저작들을 중국어로 번역하는데 애썼습니다.

그는 본래 공산당원이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1차 중국혁명으로 알려진 1925년 혁명이 장제스에 의해 파괴되면서 모스크바로 일종의 도피성 유학을 떠나게 됩니다. 하지만, 그가 일종의 환상을 가지고 있던 러시아의 현실과 스탈린에 맞선 트로츠키의 활동과 저작들을 보며, 트로츠키주의자가 됩니다.

1차 중국혁명의 실패는 스탈린이 장악한 코민테른의 정책과 밀접한, 아니 거의 절대적인 수준의 영향을 받았고, 트로츠키의 反스탈린 활동이란, 단순히 개인에 대한 반대가 아니라 공산당 정책에 대한 대립, 중국의 당면한 혁명정세에 대한 정책의 대립이었으니까요.

그는 중국혁명에 대해 올바르게 분석하고 있는 트로츠키의 의견에 동의하게 되고, 유학을 마치고 중국으로 돌아와 트로츠키주의 활동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세 번의 감옥살이를 거쳤고, 단 한번도 정권을 장악하지 못했던 소수파였던 왕팡시를 비롯한 중국의 트로츠키주의자들, 그의 회고는 마치 제 자신이 1920년대에 중국과 소련에 있는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그 당시 분위기를 감지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붉은 10년‘이라고도 불리우는 1930년대는 사회주의역사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실패의 경험들을 전해주고 있는데, 사건 나열식으로만 접했던 당시의 역사를 경험담을 통해 생생히 전해들을 수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1949년 중국공산당이 정권을 장악하기 이전 50년의 중국역사는 한국역사에도 시사하는 바가 많았습니다. 대략적이기는 하지만, 1911년에서야 봉건제 사회였던 청이 몰락하고, 1차 세계대전과 함께 본격적인 경제발달이 시작되었으며, 인접국가였던 러시아에서 1917년 10월혁명이 일어나면서 사회주의사상이 조금씩 보급되기 시작했고, 한국의 3.1 운동이 일어났던 1919년 그 해에 5.4 운동이 일어났던 점, 일본 제국주의의 착취와 봉건적 잔재 하에서 어떤 형태로든 운동이 일어났다는 점, <태백산맥> <경성트로이카>에 등장하는 국내파 사회주의자들과 국제파 사회주의자들(스탈린의 코민테른과 연계되었던)의 갈등도 공통점입니다. 퍼즐을 맞추듯 하나의 큰 그림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1930년대 한국에도 트로츠키주의자가 있었을까요? 저로서는 알 수가 없지만, 왕팡시가 말년에 ‘중국에 좀 더 일찍 좀 더 강력한 트로츠키주의정당이 있었다면..’ 하고 회상하듯, 한국에도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있었다면..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물론, 역사에 ‘만약’이란 없겠지만.

“혁명을 준비해야 할 뿐 아니라, 나아가 혁명의 도래를 위해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일단 혁명이 앞에 닥쳐왔을 때, 우리는 여전히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하다고 느꼈다. 조직적으로 확실히 그랬고, 심지어 사상적으로도 어느 정도 그랬다. 대중은 발효되었지만, 과자를 만들거나 술을 담글 만한 강력한 조직과 정확한 사상을 갖춘 혁명당은 없었다. (중략) 그때 중국 트로츠키파가 수천의 기간조직을 가지고 있었다면 가장 좋았겠지만, 만약 수백 명이라도 있었다면, 능히 이 공백을 메울 수 있었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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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제1차 중국 혁명


- 신해혁명이 청제를 붕괴

- 1919년 베르사이유 조약에서 일본이 중국을 점령하는 것으로 결정나면서, 54운동이 촉발. 3000여명의 학생시위와 200여개 이상의 도시에서 동맹휴업

- 노동자운동은 1917년 러시아 10월혁명의 영향을 받아 1922년 제1차전중국노동자대회 개최.

- 1921년 공산당이 조직되나, 코민테른의 지시로 국민당에 입당.

- 1925년 임금인상파업 도중 한 노동자가 죽는 것으로 시작해, 530운동 촉발. 16만 이상의 노동자가 거리시위. 광저우와 홍콩에서는 파업위원회를 비롯한 대중권력기구가 등장

- 1926년 국민당(공산당을 포함한) 좌파들이 국민당 우파와 각기 정부를 수립.

- 1927년 장제스가 쿠데타를 일으켜 상하이의 노동자들과 국민당 좌파들을 학살.


2장 권력으로 가는 길


- 장제스의 대학살에도 불구하고, 우한을 비롯해서 후베이, 후난, 장시, 등 다른 곳에서는 아직 혁명이 상승기세. (이때 트로츠키는 소비에트 수립 주장)

- 그러나 우한정부를 장악한 국민당 좌파가 머뭇거리는 사이, 군벌들의 반혁명이 시작. 공산당은 소규모화되어 전략적 도시에 대한 전쟁을 벌이다가 파편화됨. 나머지 세력조차도 1927년 광둥 코뮌 봉귀로 일소됨.

- 공산당은 당내 반대파와 단절, 당내 반대파가 합당.

- 정강산을 거점으로 도망한 공산당은 1928년 제창된 코민테른의 3기론에 따라 몇차례의 봉기를 일으키나 실패하고, 스탈린계 진소우가 권력을 장악.

- 모택동부대는 국민당 군대에 쫒겨다니다가 1934년 대장정을 시작.

- 1936년 서안사변으로 장제스가 연금당하고 2차 국-공합작이 시도됨. 항일전쟁에서 전과를 발휘한 공산당은 이후 권력에 도전할 수 있는 세력으로 탈바꿈. 이 기간동안 모택동이 장악한 공산당은 스탈린계 공산당과는 일정정도 거리가 있었음. 그러나, 홍군은 빈농과 부농을 구분하지 않는 비계급적 부대였으며, 대부분 농민과 지식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 1949년 부패한 국민당, 경제공황, 등의 호조 속에서 공산당이 집권. 국민당은 대만으로 도주.


3장 1949년 : 과연 사회주의 혁명이었나?


- 중공은 강력한 자립적 민족경제를 세우려 하였으며, 이에 반할 경우 노동자들의 투쟁을 잠재우기까지 하였다. 토지몰수, 가부장제 폐지, 식량배급제 실시, 교육의 보급, 등을 실시함

- 1953년 1차 5개년 계획에서는 대중의 빈곤을 바탕으로 압도적인 자본을 중공업과 무기생산에 집중했다.

- 이러한 계획경제가 파탄에 이르자, 주의주의자 마오쩌둥은 1958년, 대약진(식사시간 폐지, 18시간, 24시간 교대제), 인민공사(25,000명으로 이루어진 농민 협동조합), 등 3면홍기 운동으로 이를 극복하려 하였고, 극심한 노동력 착취와 강제적인 농업집산화가 이루어졌다.

- 위와 같은 정책적 실패는 1962년 다시금 농업과 공업에서의 사유화를 가져왔고, 마오쩌둥의 입지를 약하게 만들었다.


4장 "반란을 일으키는 것은 정당하다" - 문화혁명


- 입지가 좁아진 마오쩌둥은 1966년, “자본주의적 길을 걷는 권력 내부의 사람들”에 대한 전국적 봉기를 호소하게 되고, 억눌려있던 학생 중심으로 홍위병이 구성되어 부르주아적, 봉건적 문화로 간주될 수 있는 것, 도서관, 절, 박물관, 모두를 무차별적으로 파괴하게된다.

- 지방 관료들도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홍위병을 구성해 내전으로 치닫게되고, 노동자들의 독자파업이 일어난다. 지방 관료들과 결탁한 군부가 혁명위원회를 수립하여 문화 혁명을 종식시킨다.

- 문화혁명 이후에는 당과 국가장치의 재건, 경제문제 해결이라는 과제를 놓고 분파싸움이 치열했으며, 마오쩌둥과 4인방를 위시한 세력과, 덩샤오핑을 위시한 현대파 세력들이 대립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마오쩌둥이 후계자로 지목한 린뱌오가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 당시 세력을 쥐고있던 4인방이 계속적인 포위모델을 진행하자, 불만에 찬 노동자들의 시위는 1976년 천안문 소요로 이어짐. 베이징에서만 10만이 동원되었고, 공공기관이 불타고 파괴당함. 항저우, 난징, 장저우, 쿤밍, 구이양, 안후이성, 광시성에서 같은 소요가 발생. 책임을 빌어 덩샤오핑이 실각하게 됨.

-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가 사망.


5장 '시장 사회주의' : 마오쩌둥 사후의 중국 경제


- 덩샤오핑의 경제정책은 크게 수출지향적 경제와 전면적 시장화라고 볼 수 있다. 그는 경제특구를 조성하고 홍콩자본을 비롯한 외자유치에 힘썼으며, 인민공사에 의해 조성되었던 공동경작지를 다시금 가족경작지로 되돌렸고, 소비재와 대부분의 중공업에서 전면적인 자유화조치를 실시하였다.

- 외자유치는 중국경제에 대한 중국정부의 통제력을 감소시키면서 중국경제를 세계경제에 통합시켰으며, 농업의 사유화는 인민공사에 의해 제공되었던 복지서비스를 감소시켰고, 공업의 자유화는 정부가 향진기업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는 것을 뜻했다.

- 인플레이션은 단지 물자 부족 때문 만이 아니라, 금융과 은행업 부문의 팽창, 이에 따른 신용의 확대 때문이었다.

- 전체 전략의 성격과 속도에 대한 논쟁이 있었지만, 이것은 명확하고 체계적으로 정립된 대립이라기 보다는, 현대화 전략 그 자체에 내재되어 있는 모순의 반영이었다. 보수파는 중국이 뛸 수 있기 전에 먼저 걷는 연습부터 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덩샤오핑파는 설사 계속 뒤지는 한이 있더라도 뛰는 것만이 따라잡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대응했다.


6장 개혁을 기다림 - 1978~88년의 저항 운동


- 경제부문과 더불어 문화 출판부문에서도 대거 자유화가 이루어졌지만, 여전히 상당 부분 검열이 이루어졌다. 문화 혁명 희생자 일부에 대한 복권과 농촌으로 하방당했던 일부 학생들의 도시 귀환으로 복권 요구를 비롯한 사상의 자유에 대한 열망이 끌어올랐고, 운동을 정부가 정한 한계에 가두어두려했던 덩샤오핑 정부는 1980년초 모든 비공인 신문을 금지시키고 민주벽을 폐쇄하였다.

- 민주벽 운동이 끝난 직후, 1981년 정신오염 추방운동을 비롯해 가지각각의 사회통제 도구들이 등장하기 시작해, 생활과 복장까지 통제하게 된다.

- 소수인종에 대한 공격은 티베트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고, 티베트에서는 1987년~1989년 사이 몇차례의 소규모 시위와, 대중집회가 열렸으며 중국경찰과의 충돌이 있었다.

- 학생운동 또한 1980년대 대학규모의 확장으로부터 시작되어 열악한 생활조건과 노동조건에 대한 불만을 표현했다. 그러나, 이들의 이념은 중국 사회를 좀 더 효과적으로 운영하기 위한 대안적인 전략에 불과했다. 실제, 이들의 핵심 논리는 민주주의 없이는 현대화 없다는 것, 즉 중국의 후진적 또는 봉건적 정치 구조가 실질적인 경제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는 것이었다.

- 변화를 요구하는 물결은, 1986년 12월에 지방인민대표자대회 선거부정에 대한 항의로 시작되었고, 이 시위가 20여개 이상의 도시와 150여개 대학으로 확산되었다. 1987년까지 계속된 시위로 지도부들이 징계처분을 받거나 서부 변경지방으로 강제 이주되었다.


7장 "우리는 여전히 늑대들에게 지배받고 있다" - 1989년의 반란


- 1989년 천안문시위는 인플레이션과 관리들의 부패 때문에 시작되었다. 1989년 초 중국은 최악의 경제 위기에 빠져있었고, 지배계급은 초긴축정책으로 이를 극복하려고 했다. 후야오방의 추모시위로 시작해 4월 20일 11개 이상의 도시에서 동조 행진과 동조 항의 시위가 벌어졌고, 4월 22일에는 천안문 시위 금지 조치에도 불구하고 15만에 이르는 시위자들이 광장으로 행진했으나 베이징 시장의 대화요청으로 5월 7일 이후 투쟁의 기운이 사그러들었다.

- 그러나 리펑 파면과 덩샤오핑 퇴진 요구를 하며 5월 13일에 시작된 단식투쟁을 기점으로 다시 운동이 사직되었고, 5월 16일에는 200만의 시위대가 광장에 운집하고 제철 제강공장의 노동자들까지 시위에 참가했다. 시위대는 무척 질서정연했고, 항저우, 광둥, 허페이, 내몽골, 원난성, 쓰촨성, 저장성, 심지어 티베트에까지 시위가 확장되었다. 그리고 5월 19일 계엄령이 선포됨과 동시에, 노동자들도 이 시위에 적극 가담하기 시작했다.


8장 혁명과 반혁명


- 노동자들은 버스, 트럭, 건설장비로 군대에 대한 바리케이트를 쳤으며, 병력 수송용 지하철 운행 중지, 제철 제강의 동맹 파업, 총파업 요구로 까지 확대되면서 500만에 가까운 사람들이 천안문에 운집했다. 조직된 시위대는 여전히 질서정연했으며, 약탈 폭력사건은 일어나지 않았고, 심지어 이들은 바리케이트를 통해 군인들을 설득시키려 하였다. 노동자와 학생들은 서로 토론하거나, 선동가의 연설에 집중했으며, 여성차별도 사라졌다. 5월 21일 홍콩에서는 인구의 1/6이 참가하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 베이징 공인자치연합이 월요일 총파업을 제기했으나, 학생들이 총파업을 저지하며 운동을 가로막기 시작한다. 이들은 국민경제의 손실을 우려했으며, 노동자들을 거리시위의 동참자 정도로 제한했다.

- 베이징에서의 시위가 교착상태에 빠지면서, 운동의 방향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으며 대오는 조금씩 와해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6월 3일에 수만명의 인민해방군이 투입되어 2,600명 이상의 시위대가 학살당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은 평화운동을 주장하며 군대와 협상하려 하였으며, 심지어 노획한 무기를 군에 돌려주기까지 하였다.

- 대학살 이후 전국에 걸쳐 항의 시위가 잇다르고, 다른 도시에서도 사상자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학생지도자들은 6월 7일 시위철수를 결정한다.

- 6월 24일, 자오쯔양이 모든 지위에서 물라나고, 장쩌민이 공산당 총서기에 올랐다.


9장 다음은 무엇이?


- 농촌에서는 37만개 이상의 향진기업이 원료나 자금 결핍으로 문을 닫으면서 180만에 가까운 대규모의 잉여인력이 발생하였다. 지배계급은 계속해서 중국경제에 대한 통제력을 잃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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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야오방 [胡耀邦(호유방), 1915.11~1989.4.15] 


1933년 중국공산당에 가입, 1934년 장정(長征)에 참가하였다. 1945년 항일군정대학 정치부 주임, 중앙군사위원회 총정치부 조직부장, 1949년 신민주주의청년단 중앙집행위원, 1956년 당 제8기 중앙위원을 거쳐 1957년 중국 민주주의청년단 중앙위원, 중앙 제1서기, 1964년 공산주의청년단 제9기 중앙상임위원 겸 제1서기 등으로 문화대혁명 이전까지 공산주의청년단 업무를 맡았다. 1966년 문화대혁명으로 공산주의청년단 중앙서기처가 해산되고 홍위병(紅衛兵)의 비난을 받고 실각되었다.

그 후 1973년 덩샤오핑[鄧小平]이 복권됨에 따라 다시 활약, 1975년 중국과학원 부비서장, 1976년 당 제11기 중앙위원, 당 중앙조직부장이 되었다. 1978년 제5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 그해 11월 당 제11기 3회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중전회)에서 정치국 위원으로 승격되고 1979년 당 중앙비서장 겸 선전부장, 1980년 2월 당 제11기 5회 중전회에서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이어 당 중앙서기처 총서기로서 당의 실권을 장악하고, 1981년 6월 당 제11기 6회 중전회에서 문화대혁명에서의 마오쩌둥[毛澤東]의 오류를 비난하고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주석에 선출되었다. 1982년 당 기구 개편으로 중앙서기처 총서기가 되었다.

자오쯔양 [趙紫陽(조자양), 1919.11~2005.1.17] 


중학교를 중퇴하고 1932년 중국공산주의청년단에 가입하고, 1938년에는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여 1948년 위어환[予鄂?]지구 당위원회 서기가 되었다. 1951년 광둥성[廣東省] 인민정부 토지개혁위원회 부주임으로 토지개혁을 주도하였으며, 1953년 중국공산당 화남분국 부서기에 임명되었다. 1955년 광둥성인민위원회 위원, 1956년 중국공산당 광둥성위원회 서기 겸 광둥성 군구(軍區) 제1정치위원, 1963년 광둥성위원회 제1서기 겸 당 중앙 중남국 서기가 되었다. 1967년 문화대혁명으로 비판·숙청되었다가 1971년 복권, 1973년 중국공산당 제10기 중앙위원, 1975년 쓰촨성[四川省] 당위원회 제1서기, 혁명위원회 주임, 청두[成都]부대 제1정치위원이 되어 농업진흥과 기업자주권을 확대시켜 현저한 성과를 거두었다.

1979년 당중앙정치국 위원을 거쳐 1980년 상임위원이 되었으며 제5기 전국인민대표대회 제3차 회의에서는 국무원 총리로 선임되었다. 이어서 1981년 당중앙위원회 부주석으로 임명되었고, 1987년 총서기, 1988년 군사위원회 부주석이 되었다. 그러나 1989년 4월 베이징[北京]에서 발생한 민주화운동 때에 민주화시위에 동조하였다는 이유로 숙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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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운동이 정치투쟁 혹은 군사투쟁으로까지 고조되면 문학의 소리는 곧 들을 수 없게 된다. 그 운동이 불행히도 좌절이나 실패에 부닥친다면 다양한 방식의 문학활동이 또 생겨난다. 만일 혁명이 성공한다면 문학은 적어도 한동안은 쇠약해진다.


- [1926년] 장개석에 대해서는, 내가 남쪽으로 오기 전 적어도 지부회의에서는 불만이나 비판의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 당시는 공산당이 자체적인 의혹에도 불구하고 코민테른의 지침에 따라 국민당에 입당한 시기였다.


- 이곳의 국민당은 좌파와 우파로 분열하고 있었다. 특히, 우파의 역량이 컸으면 그들은 군사적인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서산회의파는 결코 몇몇의 완고한 늙은이들이 아니었고, 장개석도 원래는 이들과 같은 길을 갔다. 당시 광주에서 세력을 떨치던 손문주의학회는 대계도를 정신적인 지주로 삼았는데, 이것은 곧 장개석의 국민당 내 전투조직이었다. 이른바 국민당 좌파는 기실 ‘외부공작’을 하는 공산당원과 장개석과 반목하는 몇몇 상층 인물들에 불과했다.

: 국공합작 이후의 국민당 내 상황을 잘 보여준다. 공산당은 국민당 내 좌파의 역할을 했다.


- 우리 청년학생들은 아무도 국민당을 신뢰하지 않았다. (중략) 그런데도, 우리 모두는 국민당에 가입되었다. 심지어 국민당원으로 행세하라는 명을 받기도 했다.


- [1927년] 이렇게 우리는 완전히 못한 사상을 고무시켰고, 간명한 목표(반제반군벌)에 대해 부담 없는 낙관적인 태도로 날로 광기를 더해가는 반동적 공포 통치 아래에서 행동 또 행동했다. 하지만, 4월에 이대조 동지가 붙잡혀 살해되고 나서야 우리의 행동 양상, 특히 해동할 때의 심리상태는 완전히 바뀌었다. (중략) 장작림은 한때 이들을 관외로 호송하여 장기간 감금하려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때 남방 혁명군의 총사령관인 장개석이 비밀리에 연락을 취해 이들을 죽이라고 재촉하였고 마침내 장작림은 결단을 내리게 되었던 것이다. (중략) 북방의 공산당원을 더 경악하게 하고 불안과 곤혹감에 빠뜨렸던 것은 남방으로부터 전해오는 ‘청당’ 의 소식이었다. 우리는 사상적으로나 감정적으로 너무 준비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혁명군의 지도자’가 노동자를 도살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 27년 장개석의 쿠데타와 공산당원들의 혼란을 묘사


- 들리는 바로는 풍옥상이 “남경과 무한의 충돌을 조정”하려 한다고 했다. (중략) 풍옥상의 혁명적인 태도는 단지 소련의 무기를 갈취하기 위한 가장일 뿐이라는 것을 분명히 깨달았다. 자신의 입장이 공고해지면 그는 곧바로 반동 군벌의 진면목을 드러낼 것이다. (중략) 왕정위 등은 공공연히 호남 호북 농민운동의 과격성을 비난했고 공산당원에게 무한 노동자들의 혁명행동을 제한할 것을 요구했다.

: 우한정부와 남경정부가 분리된 이후에, 장개석의 쿠데타와 더불어 우한정부 내에서도 국민당 좌파들이 반공적인 태도를 드러내고 있었다.


- 일부 사람들을 뽑아 소련으로 학습을 보내는 것은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였다. 들은 바로는 이것이 모스크바의 생각이라고 했다.


- 당초 그곳에 이미 선하고 아름답기만 한 지상천국이 실현되어 있다고 순진하게 생각했던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상상은 그리 명확하지 않았고 실제의 상황과도 커다란 거리가 있었다.

: 당시 중국의 공산당원들이 가진 사회주의에 대한 환상을 드러냄


- 소련에서 관리는 꼭 러시아인만 하는 것은 아니구나! 이곳에서는 협애한 민족의 벽이 사실상 허물어져 있었다. 우리는 책이 아닌 현실 정치 가운데서 국제주의를 보았다.


- 그의 말에 따르면 오늘 아침 반대파가 ‘반대 시위’를 했는데, 그들이 ‘레닌의 유촉을 실행할 것을 요구한다’는 표어를 들고 대열 가운데 끼어서 붉은광장을 통과할 때, 표어는 사람들에 의해 찢겨졌고 양측의 충돌이 발생했으며 어떤 사람은 트로츠키의 자동차를 향해 총을 쏘았다고 한다.

: 1927년 러시아 당내반대파의 반대시위를 묘사


- [1928년] 중국혁명은 1927년 여름과 가을 사이에 이미 확실히 실패했다. 실패의 주요 원인은 스탈린-부하린의 기회주의정책이다. 이제 중국 공산주의자들은 이러한 새로운 정세를 인식하며서 지난간 일을 분석해 앞으로의 일을 확고히 다져야 한다. (중략) 트로츠키는 다음과 같은 말로 당시의 정세와 우리의 임무를 총괄했다. “중국은 현재 퇴조기에 처해있다. 따라서 현재는 당 안에서 철저히 이론을 연구하고 자기비판과 교육을 행할 시기이다. 이 시기에 우리는 노동운동의 각 방면에 거점을 수립, 이를 공고히 하고 농촌 지부를 건립하며 노동자, 빈농을 지도, 통일하여 각지에서 분산적인, 처음에는 방어적이고 나중에는 나서서 싸우는 투쟁을 전개해야 한다.” 또한 다가올 혁명적 사회의 내용에 관해서 그는 “앞으로 시작되는 시기가 닥치면 도시와 농촌 부르주아의 재산을 몰수하며, 아직 해결되지 않은 민주의 임무는 프롤레타리아독재로 완성될 것” 이라고 지적했다.


- 1928년 봄부터 모스크바의 중국 공산주의자들이 떼지어 반대파로 향했던 주요 원인은, 중국과 소련의 정세에서 놀라운 속도로 반대파의 주장이 실증되었기 때문이다. (중략) 1928년에 비교적 유명한 반대파의 지도자들이 계속해서 잘못을 뉘우치고 스탈린에게 투항했지만, 일반 다원, 특히 젊은 세대의 노동자 당원들은 오히려 지하로 숨어들고 있던 반대파 조직의 주변으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 소련 내 반대파의 대세


- 플리아코프가 공장에서 파업을 주도하다가 체포되었고 자신도 이제 대학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말했다.

: 스탈린주의에 대한 반대투쟁


- 진독수와 그와 친했던 일군의 동지들이 트로츠키파로 옮겨갔던 일이 중앙 내부에 비교적 커다란 파문을 부러일으켰기 때문에 실권파인 중앙 지도자는 트로츠키파에 대해 매우 심각하고 비타협적인 입장을 취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고는 해도 중공의 노간부들이 가졌던 트로츠키-진독수 반대파에 대한 적의는 소련의 스탈린파가 트로츠키파에게 품었던 것과는 시종 같지 않았다. 이는 한편으로 중국의 트로츠키파가 끝내 그들에게 대항할 세력으로 발전할 수 없었기 대문이지만, 한편으로 더 중요한 이유는 노간부들의 진정한 적대자는 미프-왕명파라는 데 있었다. 왕명파는 그야말로 증국에서 스탈린의 직접적인 대리인이었다.

: 소련 외 국가에 반드시 존재했던 출신논쟁


- 나 자신이 동의하지 않는 방침을 위해 이렇게 유쾌하게 노력할 수 있었던 이유는 첫째, 공작 속에서 반대파 노선이 옳다는 것이 착착 증명되었고 둘째, 몇몇 진정한 혁명가들은 공작하면서 고민하고, 경험 속에서 6전대회 방침의 착오를 점차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으며 셋째, 이 기회에 실제적인 공작의 처리 방법을 어느정도 배웠다는 데 있다.


- 나이 든 중공 활동가들은 모스크바에서 돌아온 유학생들을 매우 깔보았다.


- [1929년] 현 정세에서 국민회의는 유일하게 정확한 구호이며, 이를 통해 궤멸된 노동자계급을 다시 뭉치게 하고 농민과 도시 중소자산계급의 투쟁을 통일함으로써 공산당을 다시 정치 무대에 내세워 새로운 혁명의 도래를 촉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중략) 국민회의 구호에 관한 견해는 그후 중국 반대파가 여러 해를 지내며서 가장 많이 논쟁해온 문제가 되었다.


- 당시 파벌 사이의 투쟁 상황을 회고하면 단지 난장판 같은 혼란이 느껴질 뿐이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것도 어떤 정치사상이든지 운동의 최기에 나타나는 공통적인 현상이다. 개인적 야심과 파벌 간의 편견은 진정한 혁명사상과 뒤엉켜 종종 매우 괴상한 양상을 보이기도 한다.


- 앞 단계에서 주로 논쟁한 것은 내 기억에 의하면 국민회의 구호 문제, 홍군 문제, 장래 혁명의 성격, 그리고 이른바 과거 혁명 실패의 교훈에 관한 것이다.


- [1930년] 1903년 9월 홍군의 두 차례에 걸친 장사 공략이 실패로 돌아가자 이 노선은 이미 파산했음이 모든 동지들 앞에 사실로 드러났다. 이에 같은 달에 소집된 6기 3중전회에서 구추백을 중심으로 한 일부 중공의 지도인물들이 들고일어나 이른바 이립삼노선 시기를 마감했다.


- [1931년] 그 힘은 바로 스탈린으로 대표되는 소련과 코민테른의 성망, 그리고 그가 지배하는 물질적인 역량, 특히 중국공산당에 지급하는 매월 수만 원의 돈이었다! 바로 이런 정신적 물질적 역량이 이립삼과 구추백으로 하여금 잘못을 뉘우치고 물러나게 하고, 주은래로 하여금 자아비판하고 손을 들어 진계와 합작하게 했으며 진소우 조무래기들을 제위에 올려놓았던 것이다. (중략) 바꾸어 말하면 우리는 진소우의 정변을 중국공산당의 어떤 사람들이 어떤 시기에 범한 착오로 간주해서는 결코 안 되며, 소련과 코민테른의 몰락이 세계공산당에 저지른 죄악의 영향이라고 이해해야 한다.

: 1930년대초부터 전세계의 공산당에서 진소우와 같은 인물들이 집권하게 되는 계기를 설명


- 진소우는 본격적인 공격에 나섰다. 원래 가지고 있던 코민테른이라는 배경에 새롭게 얻은 당내의 권세를 덧붙여서 대단히 맹렬한 반우파 공격을 발동했다. 모든 우세는 진소우 등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그러나 ‘우파’는 오히려 완강한 기세를 보이면서 굴복하려 하지 않았다.


- 그 시기에 반대파분자들이 생활 때문에 직접 번역해 낸 사회과학서적들은 중국 사회주의사상의 보급과 심화에 확실히 적지 않은 공헌을 했다.


- 흥정에 성공한 사람들은 예외 없이 당의 권력층에 친한 친구가 있어서 당에서 거금을 내어준 경우였다.


- [1934년] 국민당정부는 계속 ‘먼저 국내를 안정시키고 나중에 외적을 물리친다’는 정책을 시행했다. 그들은 일본제국주의에 양보를 거듭하면서도 전력을 강서의 공산군을 공격하는 데 집중했다. 1934년 말에 국민당은 결정적인 승리를 획득했고, 공산군은 간신히 포위를 뚫고 장정에 올랐다. 그리고 1935년 1월 귀주성 준의에서 열린 중공중앙회의에서 모택동은 진소우를 대신해 당의 최고 지도자가 되었다. 이것은 이른바 중국 토착 공산당의 스탈린의 직계에 대한 승리를 의미한다.  같은 해 8월 1일 중공은 모스크바의 새로운 노선에 근거해, 내전의 중지, 국민당과의 연합항일, 계급투쟁의 포기, 항일강령의 기초 등을 주장하는 선언을 발표했다.


- 심지어 국민당을 인정하는 합작을 하기 위해서 계급투쟁을 포기하고, 홍군의 편제를 취소하며, 삼민주의로 개종하는 것 조차 서슴지 않았다.


- [1937년] 독소협정은 독수의 사상을 크게 바꾸는 계기가 되었는데, 이는 그에게 있어서 마지막 사상적 전변이다. 이 전변은 이미 있는 표현을 빌려 간단하게 말하자면, 볼셰비키주의에서 카우츠키주의로 물러선 것이다.


- 군사적인 기회주의에 반대한 나머지 모든 성질의 군사활동을 두려워하고 완전히 포기함으로써 자신을 항일전선 주류의 바깥에 위치시켰던 것이 적어도 지금은 커다란 잘못이었음을 인정해야 한다.


- 폭넓고 진실하게 일어나는 반국민당적 대중운동을 스탈린다이 이용하게 나둬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중략) 그러나 이군중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들이 이른바 민주당파들에게 가질지도 모르는 환상을 깨놓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환상을 깨뜨리려면, 우리는 그들과 동맹을 체결해서는 안 되며 반드시 독자적인 입장을 지켜야 했다. 구체적인 문제에서는 그들과 공동 보조를 취할 수는 있지만, 사상과 정치에서는 그들에 대해 비판을 전개해야 했다. 따라서, 나는 따로 신문을 내자는 의견을 다시 제기했다.


- 나는 본래, 적대시하는 태도를 타파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스스로 따라서 적대시하지 않고, ‘새로움과 낡음’ 또는 다른 추상적이고 낙후한 표준으로 울타리를 삼지 않으며, 자신의 주의를 정치사상으로 끌어올리고, 눈길을 더 멀리 있는 이익 위에 놓는 것이라 여겼다.


- [1939년] 이런 진독수의 태도는 당시 제4인터내셔널에 제기된 소련 문제에서 반대파와 본질적으로 일치하는 것이다.


- [1941년] 중국 트로츠키파의 분열은 1941년 태평양전쟁 뒤에 다시 발생했다.


- 장개석의 변화는 1941년 4월에 일소협정이 조인되고 일미전쟁이 더욱 임박함에 따라, 게다가 같은해 6월 독소전쟁이 발발하면서 더욱 더 분명해졌다.


- 진독수는 중국의 혁명사상사에서 적어도 플레하노프에 견줄 수 있다.


- 혁명가와 정치가는 서로 다른 품격을 가진 존재이다. 혁명적인 정치가도 있고, 혁명적이지 않은 정치가도 있다. 정치가의 품격을 겸한 혁명가가 있고 전혀 그렇지 못한 혁명가도 있다. 일반적으로 어렵고 힘든 창업 시기에 필요하고 따라서 유행하는 것은 혁명가이다. 하지만 일단 혁명이 완성되면 권력을 장악하고 전열에 나서는 것은 정치가이다. 진정으로 위대한 정치가는 필경 혁명가이지만, 위대한 혁명가 중에는 결코 정치가가 아닌 사람도 많다. 반대로 정치가의 단편적인 조건만을 갖춘 사람들은, 설령 시세를 좋아 혁명가의 대오에 휩쓸린다 해도 사태가 발전하는 가운데 대부분 실패하면 가장 먼저 변절하며 승리하면 가장 먼저 관료로 부패한다.


- [1945년] 전쟁이 바로 혁명의 어머니이다.


- 혁명을 준비해야 할 뿐 아니라, 나아가 혁명의 도래를 위해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일단 혁명이 앞에 닥쳐왔을 때, 우리는 여전히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하다고 느꼈다. 조직적으로 확실히 그랬고, 심지어 사상적으로도 어느 정도 그랬다. 대중은 발효되었지만, 그들을 구워 과자로 만들거나 술을 담글 만한 강력한 조직과 정확한 사상을 갖춘 혁명당은 없었다. (중략) 그때 중국 트로츠키파가 수천의 기간조직을 가지고 있었다면 가장 좋았겠지만, 만약 수백 명이라도 있었다면, 능히 이 공백을 메울 수 있었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 국민당정권은 전쟁 속에서 빠져나온 뒤 이전보다 훨씬 부패했다. 그 상황은 본래 누구나 다 아는 것이다. 당시 국민당을 둘러싸고 있던 통치계급은 이미 투기꾼, 밀수꾼, 기생충 그리고 약탈자들의 거대한 집단으로 변모해 있었다.


- 타인의 승리를 인정하는 것은 투항이 아니며, 자신의 실패를 확인하는 것은 낙담이 아니다.


- 1946년에서 1949년까지 국공양당이 내전을 진행하던 시기에 우리는 비록 충심으로 중공측을 지지하고 그들이 승리를 쟁취하도록 힘을 다했지만, 동시에 늘 소자산계급정당이 이끄는 농민군대는 승리할 수 없으며 설령 승리한다고 해도 반드시 막다른 골목에 빠지고 말 것이라고 생각했다.


- 동시에 혁명노선의 일관성이나 지도자가 노동자계급 및 전체노동자에 대해 취하는 태도로 본다면, 중공은 결코 러시아의 볼셰비키당과 같은 무산계급정당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중략) 이 새로운 계급을 초린은 국가자산계급이라고 칭했고, 나는 집산주의적 관료계급이라고 이름지었다. 우리의 견해에 따르면, 이러한 계급들이 출현하게 된 것은 바로 연이은 세계혁명의 실패와 자본주의 제도의 과도한 성숙의 결과였다. 따라서, 그들은 반동적이지만 강대했다.


- 그의 유일한 관심은, 분명한 모순 속에서 올바른 해결을 모색하는 것이 아니라, 이 모순들 속에서 온 힘을 다해 자신의 일관된 정확성을 지키려는 데 있었다.


- 한 정당의 계급성을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관해서 레닌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 당원 중의 노동자 성분 뿐만 아니라 그 정당을 지도하는 사람이 누구인가와 행동 및 정책의 내용이 어떤 것인가를 함께 보아야 합니다.”


- 스탈린당은 어떤 시간과 조건 속에서도 혁명을 파괴할 뿐, 그것을 성공시키거나 승리로 이끌 수 없으며 심지어 그것을 바라지도 않는다고 여겼다. 이런 선입견을 품고 중공의 승리를 대면했으니, 자연 당혹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 우리는 결코 앞에서 서술한 두 측면을 헷갈려서는 안 된다. 스탈린당이 아직 자본주의를 반대할 수 있으며 어떤 특정한 조건에서 혁명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사실과, 그들이 어떻게 자본주의에 반대하고 어떻게 혁명을 달성하며 또 어떤 혁명과 제도를 만들어낼 것인가는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후자는 전자에 비해 결코 중요성이 떨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새로운 국가가 더욱 많아지면서 후자가 전자보다 더 중요해진다. (중략) 그렇다면 극도로 전횡하는 관료통치하에서는 어떠한 사회제도를 건설할 수 있는가? 이전에 나는 그 아래에서 관료집산주의적인 사회를 만들어낼 수는 있지만 결코 사회주의에 도달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여전히 그렇나 관료통치는 사회주의에 도달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 대신 생겨나는 것이 관료집산주의 제도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는 국유재산 제도 위에 서 있는 관료통치는 끊임없이 전쟁과 혁며을 일으킬 수 있다고 믿는다.


- 모든 공산당 파벌과 공산국가를 어떤 시기와 상황을 막론하고 모두 한통속으로 간주하여 똑같은 태도로 공격하고 배척하게 되면, 사실 우리 스스로 고립에 빠질 것이며 객관적으로도 진짜 스탈린주의자와 관료제도를 돕는 결과가 될 것이다.


- 모택동이 스탈린의 적계에 속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결코 그 자신은 완고한 스탈린주의자가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 중공은 충분히 스탈린주의화된 정당이다. (중략) 창광하는 개인숭배, 엄격한 등급특권, 특무에 의한 사상통제, 무고를 통한 반대파의 제거, 당내의 파벌 금지, 당 외의 당 금지. 이 모든 것들을, 모택동과 중공은 설사 본래보다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는 않았더라도, 결국 그대로 본떠서 실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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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표[린뱌오] : 1926년 황푸[黃埔]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1927년 국공분열 후 난창[南昌]폭동에 참가하였다가 실패하고, 주더[朱德]·마오쩌둥[毛澤東]과 함께 게릴라활동을 전개하였다. 1929년 공농홍군(工農紅軍) 제4군장이 되고 1934∼1935년 장정(長征)에 참가하였다. 1936년 항일군정대학 교장, 1937년 팔로군(八路軍) 115사단장(師團長)이 되었다. 1947년 중국공산당 제7기 중앙위원, 8월 만주(滿洲)에서 소련군으로부터 일본군의 무기를 접수하고, 둥베이[東北]인민해방군을 조직하였으며, 사령원, 당중앙둥베이국 서기 등으로 만주를 장악하였다. 1949년 제4야전군 사령원, 당중앙 화중국[華中局] 서기, 10월 중국공산당 정권 수립 후 중앙인민정부 위원, 중앙인민혁명군사위원회 위원,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정협) 전국위원회 상무위원, 1950년 중난군[中南軍] 군정위원회 주석 겸 중난군구 사령원이 되었다. 1954년 국무원 부총리, 국방위원회 부주석, 1956년 당중앙정치국 위원, 1958년 당중앙위원회 부주석, 정치국 상임위원, 1959년 국무원 부총리, 국방위원회 부주석을 연임하고 국방부장이 되었다. 1959년부터 군 내부에 마오쩌둥사상 학습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65년 〈인민전쟁 승리 만세〉 논문을 발표하고, 마오쩌둥의 ‘농촌으로 도시포위’ 전략을 세계전략으로 확대하였다. 1967년 문화대혁명 속에서 마오쩌둥·장칭[江靑]과 결합, 군의 힘을 동원해 권력을 탈취하고, 1969년 중국공산당 제9기 전국대표대회에서 마오쩌둥의 후계자임을 당규약으로 명기하였다. 1971년 9월 실각하였으며, 반(反)마오쩌둥 쿠데타를 음모하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로 돌아가자, 가족과 함께 비행기로 탈출하여 소련으로 망명하던 중 몽골 지방에서 비행기가 추락하여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진소우[천사오위] (왕명) : 별명 왕밍[王明]. 우창[武昌] 중화(中華)대학을 거쳐 1925년 모스크바 중산(中山)대학을 졸업하였다. 1930년 귀국한 후에는 상하이[上海]에서 공산당활동에 종사하였다. 1931년 당 중앙위원, 정치국 상임위원 겸 장쑤성[江蘇省] 위원회 서기, 그해 중국공산당 총서기인 샹중파[向忠發]가 체포되자 그의 뒤를 이어 당 중앙 총서기로 선출되었다. 그 후 중국공산당 코민테른 주재대표단 수석대표로 파견, 1935년 코민테른 제7차 대회 집행위원, 주석단위원, 서기처 후보서기가 되었다. 1942년 정풍운동(整風運動) 때 마오쩌둥[毛澤東]으로부터 신투항주의 ·교조주의로 몰려 비판을 받았다. 1956년 당 제8기 중앙위원이 되었으나, 그 해 건강악화로 모스크바에 가서 요양하면서 그 곳에 계속 머물렀다. 문화대혁명 때 비판을 받게 되자 1969년 마오쩌둥을 비난하는 글을 캐나다의 공산당 기관지에 발표하였다. 1974년 모스크바에서 병사하였다. 저서에 《왕명최근논문선》 《왕명항전언론집(王明抗戰言論集)》 등이 있다.


주은래[저우언라이] : 지주·학자의 집안에서 태어나 1913년 톈진[天津]의 난카이[南開]중학에 입학하였으며 졸업한 뒤에도 계속 공부하기 위하여 1917년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등에서 청강하기도 하였다. 톈진의 난카이대학 재학 중 5·4운동에 참가하여 투옥, 퇴학당하였고 1920년 프랑스로 건너가 파리대학에서 정치학을 공부하였다. 1922년 중국공산당 파리지부(支部)를 창설하였고, 런던 ·베를린 ·모스크바를 거쳐 귀국하였다. 1924년 황푸[黃織]군관학교 정치부 대리에 발탁되었고, 1927년 북벌군에 호응하는 상하이[上海] 봉기를 지도하였다. 그 후 장제스[蔣介石]의 반공 쿠데타를 피하여 우한[武漢]으로 가서 노동자의 무장규찰대(武裝糾察隊)를 조직, 난창[南昌]폭동을 지도하고, 광저우[廣州] 코뮌을 조직하였다. 1931년 말 광시성[廣西省]의 소비에트구(區)에 들어가 군사부장·제1방면군 정치위원으로서 정보공작과 국민당군의 포위에 대한 전략을 지도하였다. 1936년 혁명군사위원회 부주석으로서 장정(長征)에 참가하였고, 시안[西安] 사건 때에는 국공(國共)내전의 정지와 항일연합전선의 결성에 힘썼다. 항일전이 발발한 후에는 우한·충칭[重慶]에서 공산당의 대표로서 국민정부의 국방위원회·군사위원회 위원 등 요직에 있으면서 국공관계의 처리를 맡아 탁월한 정치적·외교적 수완을 발휘하였다. 1949년 4월 공산정권 수립 후 문화대혁명을 거쳐 최후까지 공산당에서 지도적 위치를 유지하면서 27년간 총리(1958년까지 외교부장 겸임)로서 국내외의 중요한 여러 문제를 해결하였다.


유인정 : 모스크바에서 중국으로 돌아오면서 독자적으로 활동을 전개한 인물


구추백[취추바이] : 독학으로 러시아어 ·프랑스어 ·영어를 익히고, 러시아 유명작가들의 알려지지 않은 작품을 많이 번역하였다. 1920년에는 《베이징천바오[北京晨報]》의 모스크바 주재 기자로 있었다. 1922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여 소련에서 개최된 극동민족대표대회 및 코민테른 제4차 세계대회에 참석하였다. 1923년 중국공산당 제3기 중앙위원 겸 선전부 부부장, 1924년 국공(國共)합작으로 중국국민당 후보 중앙집행위원, 1925년 중국공산당 제4기 중앙위원, 1926년 중국공산당 제5기 중앙위원 및 정치국 위원 등을 지냈다. 1927년 국공합작 결렬 후에는 코민테른의 지시로 중국공산당 중앙 8 ·7긴급회의를 개최하여 천두슈[陳獨秀]의 ‘우경 기회주의’를 비판하고 중국공산당 총서기로 취임하였다. 그러나 1928년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중국공산당 제6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좌경 모험주의자’라는 비판을 받아 중앙총서기직을 박탈당하고 모스크바로 소환되었다. 1930년에 중국으로 돌아와 중국공산당 코민테른 주재 대표, 코민테른 집행위원 등 당 지도부에서 활동하였으나, 1931년 ‘조화주의자(調和主義者)’라는 비판을 받고 당의 핵심기구인 정치국에서 물러났다. 그 후 1935년 2월 상하이[上海]로 도주(逃走)하다 국민당의 군대에 체포되어 그 해 6월에 처형되었다. 저서에 《아향기정(餓鄕紀程)》(1921) 《적도심사(赤都心史)》(1924) 《다여적화(多餘的話)》 등이 있다.


당생지[탕성즈] : 1915년 바오딩군관학교[保定軍官學校]를 졸업한 뒤, 후난 군벌의 자오헝티[趙恒?]의 부하로서 사장(師長)까지 진급하였다. 1926년 국민혁명군으로 전향하여 제8군장 ·후난성 주석으로서 우한 정부[武漢政府]의 무력적 배경을 만들었다. 우한 ·난징[南京] 정부가 합친 뒤인 1927년의 가을 장제스[蔣介石]의 배척으로 일본에 망명하였다가 곧 귀국하여, 1929년 반장전(反蔣戰)에 실패하여 홍콩으로 도망쳤으며, 1931년 광둥[廣東] 국민정부에 참가하였다. 광둥 ·난징 정부 통합 후 군사참의원장 ·훈련총감을 거쳐, 1937년 난징 위수사령관이 되었으나 일본군에 패하였다. 그 후 군사위원회 위원을 거쳐, 1948년 총통부 전략고문위원회 위원이 되었으나, 1949년 8월 중공군에 항복하였다. 그 뒤 후난성 부성장 ·전국인민대표대회 대표 ·중국국민당 혁명위원회 상무위원 등의 요직을 역임하였다.


무한정부 : 1926년 7월 국민당은 장제스[蔣介石]를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으로 하여 북벌(北伐)을 개시하였으며, 불과 수개월 만에 양쯔강[揚子江] 연안까지 진출하였다. 이때 북벌 진행상 보다 효율적인 수행을 위하여 정부 소재지를 광저우[廣州]에서 이전할 필요가 생겼다. 국민당좌파와 공산당은 난창[南昌]을 주장한 장제스에게 반대하여, 1927년 2월 우한 천도를 강행하여 혁명 주도권을 잡으려 하였다. 이러한 정세에 대항하여 장제스는 상하이[上海]에서 4월 12일 반공 쿠데타를 일으켜 공산당을 축출하고, 4월 18일 난징[南京]에 국민정부를 수립하여 우한정부와 대립하였다. 우한정부의 국민당좌파는 국민당의 경제 압박과 외국 제국주의 세력의 압력 밑에서 동요가 심하였다. 특히, 토지개혁문제를 둘러싼 공산당과의 대립이 심각한 우한정부는 6월 소련인 고문을 해임하였다. 7월 정부 수반(首班)인 왕자오밍[汪兆銘]이 공산당과의 관계를 단절하여 반공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9월 난징·우한·시산[西山]파가 국민당 임시중앙위원회를 개최하여, 양정부의 합류 및 난징을 국민정부의 소재지로 한다는 것 등을 결정함으로써, 결국 우한정부는 소멸하였다.


국민정부 : 중국 본토에서 1925~1949년까지, 본토가 공산화된 이후에는 타이완[臺灣]에서 현재까지 국민당이 장악하고 있는 정부. 국부(國府)라고도 한다. 중국국민당 제1기 전국대표대회 결의에 따라 1925년 7월 1일 광둥[廣東]에서 조직되었다. 쑨원[孫文]의 삼민주의(三民主義)를 건국이념으로 삼고 국민혁명을 군정(軍政)·훈정(訓政)·헌정(憲政)이라는 3단계 시기를 거쳐서 성숙시키려는 방침과 함께 연소연공정책(聯蘇聯共政策)을 취하여 중국공산당과의 합작을 실현하였다. 이와 같은 국공합작 아래에서 국민혁명군을 조직하여 1926년 7월 북벌전쟁을 개시하였다. 1927년 2월 정부를 우한으로 옮겼는데, 국민당 내의 좌우 양파가 항쟁함으로써 정부는 우한[武漢]·난징[南京]의 2개 정부로 분열되었다. 1927년 4월 국민혁명군 총사령관 장제스[蔣介石]에 의한 상하이[上海]쿠데타사건이 발생하자 이를 계기로 국공합작은 와해되었다. 이 사건 후 정부는 국민당 일당독재 아래 장제스가 정치·군사상의 실제적 독재자가 되었고 우한·난징 정부도 난징으로 합체되었다. 1937년 7월 발발한 중·일전쟁 중에는 정부를 충칭[重慶]으로 옮겼고 전쟁 중에 제2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졌다. 일본이 항복한 후 정부는 다시 난징으로 돌아왔으나 국공관계는 다시 결렬되어 중국 전토는 내전상태로 들어갔다. 4년간의 내전을 통하여 국민정부군은 괴멸상태에 빠졌고 장제스는 미군의 원조로 본토를 탈출, 타이완으로 건너가서 국민정부를 재조직하여 중국 본토에 대한 지배권을 주장하였다. 한편, 중국 본토에서는 1949년 10월 1일 중공정부가 탄생하여 중화인민공화국이라 하고 베이징[北京]을 수도로 정하였다. 중공정부는 타이완의 국민정부를 인정하는 국가와는 일체의 외교관계를 체결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였다. 1950년 이후 국제연합 총회 및 국제조직·기관들은 타이완·베이징 중에서 어느 쪽을 중국의 합법적 정권으로 인정하느냐 하는 문제로 논란이 거듭되었는데 1971년 국제연합 총회에서 중공이 승인되었다.


모택동[마오쩌둥] : 1911년 10월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혁명군에 입대하였다가 1912년 제대한 뒤 제1중학에 입학하였으며, 다시 제1사범학교에 입학하였다. 대학이나 외국유학을 하지 못한 그는 이 학교에서, 영국에 유학하고 돌아와 중국의 봉건사상 비판에 힘썼던 교사 양창지[楊昌濟]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재학 중인 1917년, 거의가 제1사범학교 학생들로 구성되고 후난성 혁명 지식인들의 본영이 된 신민학회(新民學會)를 조직하였다. 1918년 학교를 졸업한 뒤 베이징[北京]으로 가서 후난 청년들의 외국유학을 도왔다. 그해 10월 마오쩌둥은 소년중국학회에 가입하였고, 양창지의 소개로 베이징대학 도서관 주임인 리다자오[李大釗]의 조교로 일하면서 방청하였으며 철학회와 신문학연구회(新文學硏究會)의 활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또 양창지에게 유물론적 철학과 윤리학 강의를 받았고 비밀학생단체들과 접촉하면서 무정부주의에 관한 책을 많이 읽어 그의 사상은 마르크스주의로 기울게 되었다. 1919년 5·4운동 발발 후 후난학생연합회를 설립하고 《샹장평론[湘江評論]》을 펴냈으나 곧 폐쇄당하고 베이징으로 도망쳤으며, 러시아혁명에 관한 책을 많이 읽었다. 1920년 상하이[上海]에서 천두슈[陳獨秀]를 만났으며 다시 창사로 돌아와 1924년까지 창사 제1사범학교의 부속소학교 교장 겸 사범부의 어문(語文) 교사가 되었다. 1922년 양창지의 딸 양룬후이[楊閏慧]와 결혼하였고, 그해 7월 상하이의 중국공산당 창립대회에 참가하였으며, 후난성 대표로서 중국공산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에 출석하였다. 1924년 국공합작(國共合作)이 되자 공산당 중앙위원, 국민당 제1기 후보, 중앙집행위원, 선전부장 대리, 중앙농민운동 강습소장, 정치주보 사장 등을 겸임하였다. 1926년 장제스[蔣介石]의 숙청으로 상하이에 갔다가 1927년 우한[武漢]으로 가서 중국공산당 중앙농민부장이 되었고 국공분열(國共分裂) 뒤 농홍군(農紅軍) 3,000명을 조직하여 징강산[井岡山]에 들어가 근거지로 삼고 주더[朱德]의 군대와 합류하였다. 이듬해 공농홍군(工農紅軍) 정치위원이 되었고, 1930년 홍군 제1방면군 군사위원, 중국 공농혁명위원회 주석에 올랐다. 1931년 장시성[江西省] 루이진[瑞金]의 중화 소비에트정부 중앙집행위원회 주석이 되었고, 그 인민위원회 주석으로 뽑혔다. 1934년 10월 루이진에서 산시성[陜西省] 옌안[延安]까지의 1만 2,500km에 이르는 대서천(大西遷)을 시작하였으며, 도중에 구이저우성[貴州省] 쭌이[遵義]회의에서 당 지도권을 장악하였다. 시안사건[西安事件]을 거쳐 국공합작에 성공하자 항일(抗日)민족통일전선을 수립하고, 홍군을 국민혁명 제8로군으로 개편하여 일본군에 대항하였다. 그리고 《지구전론(持久戰論)》(1938) 《신단계론(新段階論)》(1938) 《신민주주의론》(1940)을 발표하였는데, 마지막 것은 중국공산당 강령으로 채택되었다. 1945년 4월 중앙 제7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정치보고로 연합정부론을 발표하였고, 중앙위원회 주석이 되었다. 전쟁이 끝난 뒤인 1945년 8월 충칭[重慶]에서 장제스와 회담하여 화평건국의 제원칙에 합의하였으나 실행이 불가능하게 되자, 1946~1948년 내전을 벌여 승리하였고,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를 베이징에 세우고 국가주석 및 혁명군사위원회 주석으로 뽑혔다. 1949년 12월 소련을 방문하여 1950년 2월 중소우호동맹호조조약과 기타 협정을 맺었다. 1957년 반우파(反右派) 투쟁과정에서 《인민 내부의 모순을 바로잡는 문제에 대하여》를 발표하였고, 1958년 제2차 5개년계획의 개시와 더불어 ‘총노선’ ‘대약진’ ‘인민공사’ 등 이른바 3면홍기(三面紅旗)운동을 폈다. 1959년 4월 국가주석을 사임하고 죽을 때까지 당주석으로만 있었다. 1964년 4월 《마오쩌둥어록[毛澤東語錄]》을 간행시켰고, 1965년 10월 이후에는 당내에서 완전 고립되어 연금상태에 있었으나 문화대혁명을 지휘하였으며, 1960년 이후의 중소논쟁과 문화대혁명 기간을 통하여 ‘마오쩌둥사상’을 높이 내걸었다. 1968년 10월, 1959년부터 국가주석으로 있던 류샤오치[劉少奇]를 실각시켰다. 1969년 마오쩌둥-린뱌오[林彪]체제가 확립되는 듯하였으나, 1971년 9월 린뱌오는 반(反)마오쩌둥운동에 실패하여 죽었다. 1970년 헌법수정초안을 채택하여 1인체제를 확립하고 중국 최고지도자로 군림하였다. 그러나 그가 사망하기 직전인 1976년 4월 대중반란이라고도 할 천안문사건(天安門事件)이 일어나 위대한 영웅 ·독재자 마오쩌둥은 완전히 고립된 채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의 전생애를 살펴볼 때, 중국의 독립과 주권을 회복하고, 중국을 통일하여 외세에 의해 국토를 유린당한 중국민들의 굴욕감을 씻어주며, 관료제도를 견제하고 대중의 정치참여를 유지하여, 중국의 자립을 강조한 그의 목표는 칭송할 만한 것이었으나, 2가지 개혁정책인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은 잘못된 것이었다.


진독수[천두슈] :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일본 및 프랑스에 유학하고, 1916년 상하이[上海]에서 《신청년》 잡지를 발간, 문학혁명을 주창하여 ‘5·4운동’의 사상적 근거를 마련하였다. 1917년 베이징[北京]대학 문과대학장으로 후스[胡適]와 함께 백화문(白話文)을 제창하는 한편, 《신청년》을 통하여 유교사상을 비판하는 글을 발표하였다. 1921년 7월 코민테른(제3인터내셔널)에서 파견한 마린의 지도하에 중국공산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를 개최, 중국공산당의 창당을 선포하고 중앙서기(中央書記)에 피선되었다. 1922년 당 제2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중국국민당과의 연합전선 수립과 코민테른 가입 등을 결의하고, 당 기관지 《향도주보(嚮導週報)》를 발간하였다. 그 해 11~12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4차 코민테른대회에 참석한 후 중국국민당과 합작하라는 코민테른의 지시를 마지못해 따랐다. 1925년 중국국민당 내부에 분열이 생기자 국민당에서 집단탈당하려고 하였으나 코민테른에 의하여 거부되었고, 당 제5차 전국대표대회까지 당 중앙총서기직을 연임하였다. 1927년 국공합작이 깨지자 코민테른은 합작실패의 책임을 물어 그를 총서기직에서 축출하였다. 1929년 당적을 박탈당하자 ‘전당 동지에게 고하는 글[告全黨同志書]’을 발표, 코민테른의 중국혁명 지도상에서의 오류와 당시 당 중앙의 오류를 규탄하여 트로츠키파(派)로 지탄받았다. 1933년 상하이에서 당 조직을 획책하다가 체포 ·구금되어 1939년 출옥하였다. 만년에는 사상적인 전환을 가져와 영 ·미식 민주주의를 찬성하고 공산주의를 반대하였다. 1942년 병사하였다.


향충발[샹중파] : 5·4운동의 영향으로 노동운동에 참가하였고, 뒤에 한예핑[漢冶萍] 청(淸)나라말기 중국 최대의 제철회사의 노동조합 간부가 되었다. 1921년 중국공산당이 결성되자 이에 가입하고 주로 후베이 ·후난성[湖南省]에서 당과 노동조합 조직에 종사하였다. 1925년 소련에 유학하고 1927년 귀국 후에는 후베이성 전성(全省)노동조합 주석이 되고, 1928년 중국공산당 제6차 대회에서는 취추보[瞿秋白]의 뒤를 이어 당의 서기장으로 선출되었다.

국민혁명 [國民革命] (북벌) : 1924~1928년에 걸쳐 중국국민당에 의하여 전개된 민족통일운동. 1920년대에 들어와서 쑨원[孫文]이 이끄는 중국국민당은 삼민주의(민족주의 ·민권주의 ·민생주의)에 반제국주의 ·반봉건군벌의 내용을 확실히 담고, 연소(聯蘇) ·용공(容共) ·노농원조(勞農援助) 등의 3대 정책을 함께 표방하여 1924년 제일차 국공합작을 성립시켰다. 이후 중국에서는 민족통일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1925년 3월 쑨원이 죽은 후에도 민족통일운동은 계속 추진되어, 5월의 5 ·30운동, 12월의 동정(東征), 즉 장제스[蔣介石]의 광둥성[廣東省] 통일을 거쳐 1926년 7월 장제스를 총사령관으로 하고, 중국공산당의 적극적 지원과 협력을 얻어 북방군벌의 타도를 위한 북벌전쟁을 개시, 국민혁명군을 북진시켰다. 민중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북벌군은 연내에 후난[湖南] ·후베이[湖北] ·푸젠[福建] ·저장[浙江] ·장시[江西] ·안후이[安徽]의 6성을 석권하고, 우페이푸[吳佩孚] ·쑨추안팡[孫傳芳] 등의 군벌을 격파하여 북방의 군벌 장쭤린[張作霖]과 대치하였다. 그러나 1926년 3월 장제스에 의하여 공산당원이었던 중산함장(中山艦長) 이지룡(李之龍)을 비롯한 국민혁명군 내의 공산당원 60여 명이 체포된 중산함사건으로 국민정부 내부의 좌우 대립은 심각한 단계에 이르렀다. 1927년 3월 상하이[上海]의 노동자들이 무장봉기하여 장제스의 북벌군을 맞아들였지만, 노동자들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두려워한 금융매판자본, 즉 저장재벌은 장제스에게 중국공산당과 관계를 끊을 것을 강권하고, 또한 제국주의 열강도 장제스에게 공산세력을 물리치고 혁명운동을 반대하도록 강요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1927년 4월 12일 상하이 ·난징 등지에서 중국공산당 탄압을 위한 쿠데타가 일어나, 제1차 국공합작은 분열하였다. 그 후 장제스의 중국국민당이 중심이 되어 1928년 7월 북벌을 완성함으로써 중국 통일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이 단계의 과업이 외부와 군벌의 제휴와 타협으로 이루어졌으므로, 국민혁명의 앞날에 많은 문제를 남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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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미디어참세상)

여름휴가, 책 한 권 갖고 떠나자 
풀무질 은종복 씨, "좋은 세상 올 때까지 책방은 내가 지킨다" 
  
김해숙 기자  
 
고속도로 빠져나가는 차량 행렬, 해변 가득 메운 인파, 휴가중 달랑 써놓고 문닫은 상가들, 한산한 공장 라인들... 7말 8초 본격 휴가철이다. 현실은 휴가를 여유있게 누리는 사람들과 휴가를 생각하는 것조차 스트레스인 사람들로 정확히 나뉘어진다.

휴가는 여유있는 사람들이 두 번, 세 번씩 돈 걱정 없이 바다도 가고, 계곡도 가고, 해외도 나가는 그런 것이다. 그래서 휴가는 남 일이거니 싶다. 가까운 곳을 다녀올라 쳐도 여건이 안 돼 주저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탓이다. 우리 사회 구성원의 절대 다수가 실업에, 불안한 비정규직에, 만성 부채에, 장기불황에 정신없이 시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눈 질끈 감고 단 하루라도 가까운 곳에 가서 시원한 계곡 물에 발이라도 담글 수 있을까? 나무그늘 밑에서 낮잠이라도 한숨 자고 올 수 있을까? 그렇게라도 떠날 수 있다면 떠나자. 기왕이면 떠나는 길 배낭 안에 책 한 권 넣어 가는 것 잊지 말고.

명륜동 풀무질 서점을 들러 은종복 씨를 만났다. 책방도 사람도 한결같이 옛날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수인사를 하고 올 여름휴가 때 들고 가서 볼만한 책 몇 권을 골라달라고 부탁했다.

노동자라면
'끝나지 않은 시다의 노래'(전순옥,한겨레신문사),
'말해요 찬드라'(이란주,삶이보이는창),
'맨발의 겐1-10'(나카자와케이지,아름드리미디어),
'세계는 상품이 아니다'(조제보베,울력),
'너의 이름은 희망이다'(제12회전태일문학상,사회평론) 중 한 권을 권한다.

학생이라면
'아름다운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헬렌니어링,보리),
'월든'(헨리데이빗소로우,이레),
'뜻으로 본 한국역사'(함석헌,한길사),
'스콧니어링자서전'(스콧니어링,실천문학사).
'자발적 가난'(E.F.슈마허 외,그물코) 중에서,

성 문제에 관심이 있다면
'페미니스트'(제인프리드먼,이후),
'아주 작은 차이'(아리스슈바르처,이프),
'행복한 패미니즘'(벨훅스,백년글사랑) 중에서,

반전과 파병을 생각한다면
'이봐 내 나라를 돌려줘'(마이클무어,한겨레신문사),
'미국의 세계재패전략'(알렉스캘리니코스,책갈피),
'미국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노엄촘스키,한울),
'미국의 이라크 전쟁'(하워드진 외,북막스) 중에서 한 권을 챙기면 좋겠다는 제안이다.

풀무질 서점은 1985년에 생겼고, 은종복 씨는 1993년 4월부터 지금까지 11년 간 풀무질을 지켜왔다. 지금은 투병중인 박준성 선생의 주례로 1996년 결혼해서 8살 된 아들과 살고 있다. 1997년에는 이적표현물이 문제가 되어 그날이오면, 장백, 풀무질 서점 대표가 구속된 사건도 있었다. 경기도 안 좋은 데다, 사회과학 서적이 많이 읽히지도 않는다며 아쉬움을 토로한 은종복 씨는 그래도 꾸준히 찾는 사람들이 있어 풀무질을 계속 이어간다고 말했다.

작년 9월, 풀무질에서 일한 지 10년을 맞으며 쓴 글에서 낡은 책방만큼이나 오래된 이력이 자연스레 베어있다.

"지난 4월 1일은 내게 뜻있는 날이다. 그날은 내가 이곳, 풀무질에서 일한 지 꼭 10년째 되는 날이다. 설날과 한가위를 빼고는 하루도 쉬지 않고 책방 문을 열었다. 단 한 차례 책방 일을 못 한 적이 있었다. 1997년 봄, 김영삼정권 말기에 불어닥친 공안바람의 첫 희생양이 되었을 때다.… 과거 인문사회과학 책방은 단지 책만 파는 곳이 아니었다. 책방에 자주 오는 학생들에게는 책을 외상으로 주기도 할뿐더러 돈도 빌려주고 가방이나 깃발, 정부 반대 유인물을 맡아 주기도 했다. 그리고 책방 앞에 작은 알림판은 학생들의 만남과 모임의 이정표 구실을 했다.…"

세월이 많이 흘러 새로 출판되는 책도, 책을 파는 서점도 바뀐 환경에 적응하느라 애먹는 시절이다. 몇 되지 않는 남아있는 인문사회과학 책방의 의미에 대해, 특히 풀무질의 의미에 대해 은종복 씨는 군더더기 없이 간명하게 말한다.
 
"자본주의 사회, 아니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를 기본으로 하고, 살아있는 것을 죽이는 문화가 계속되는 한 책방은 살아남아야죠. 책방은 책방에 오는 사람들에게 당대에 가장 첨예한 사회문제를 함께 고민하는 공간이 될 수 있어야 하니까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헌 책방 풀무질을 묵묵히 지키는 이유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인문사회과학 책방이 살아 남아 자연 친화의 문화를 일구고, 더러운 인간 착취 자본의 문화를 없애고, 죽임의 문화가 아닌 살림의 문화를 일구는 책방, 단순히 책을 파는 게 아니라 책을 사고 파는 사람 간에 작은 사랑방 기능을 하는 책방을 만들어가겠다는 이야기다.

한참 어려울 때는 부모님이 많이 도와주었는데, 지금은 돈을 모으지는 못 하지만 은행에서 빌려야 할 형편은 아니라고 했다. 쪼개고 쪼개서 이러저러한 단체에 풀무질 이름으로 후원하는 액수만 한 달에 약 15만원 정도라고 한다.

"2001년 미국의 아프칸 침공을 보며 마음이 많이 바뀌었어요. 요즘 학생들 신문도 잘 안 보잖아요.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더라고요. 그래서 이제는 뭔가 글로 하고싶은 이야기를 표현해야겠다고 생각했지요. 작년부터는 한 달에 한 번씩 꾸준히 글을 쓰고 있는데, 한겨레신문에 기고하기도 했고, 다음 달부터는 인권운동사랑방에도 보낼 생각입니다."
 
풀무질에서 책을 사면 부록을 끼워주는데, 다름 아닌 A4 한 장으로 된 은종복 씨 자신의 글이다. 매 달 한 편 정도 글을 쓰고, 그것을 복사해두었다가 서점에서 책을 사거나 들르는 사람에게 읽어보라며 전해준다. 6월 26일에는 '누가 김선일을 죽였나'를, 7월 24일에는 '송두율과 국가보안법'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썼다. A4 종이에 직접 복사해서 나눠주는 모습이 다소 고전적으로 보였지만, 오히려 받아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의미가 남다를 수 있겠구나 싶었다. 인터넷 매체나 홈페이지, 블로그같은 표현 공간과는 차원이 다른...

책은 인문사회과학이 10%, 수험서적이 3-40%, 교재가 40%, 기타 선물용 등이 판매된다고 했다.
"사회과학서점이란 말이 무색하네요?"
"그런 셈이죠."
"다른 서점들도 그런가요?"
"크게 다르지 않을 거예요. 논장 서점의 경우도 컴퓨터나 여성지 등이 많이 팔린다고 하거든요..."

한 달에 20권 정도 팔리면 풀무질 베스트셀러라고 한다. 일주일에 4-5권 정도 나간다는 이야기인데 그나마 종류도 많지 않다. 최근에 많이 팔렸거나, 읽을만한 책을 생각나는대로 찍어달라고 부탁했다. 물론 휴가갈 때 챙겨가도 좋다고 했다.

'자본을 넘어선 자본'{이진경,그린비), '전태일평전'(돌베개),
'9월이여 오라'(아룬다티로이,녹색평론사), '누가 세계를 약탈하는가'(반다나시바,울력),
'환경학과 평화학'(토다키요시,녹색평론사), '자본론'(맑스,비봉),
'경계인의 사색'(송두율,한겨레신문사), '알기쉬운 정치경제학'(김수행,서울대출판부),
'전쟁에 반대한다'(하워드진,이후), '생태도시 아바나의 탄생'(요시다타로,들녘),
'한티재 하늘1,2'(권정생,지식산업사), '잡초는 없다'(윤구병,보리)......

에어컨도 없는 좁은 풀무질 서점, 책을 뺐다 꽂았다 하기 두어 시간, 한 권 한 권 마다 책 소개를 빼놓지 않았다. 수북히 쌓인 책 너머에서 땀을 훔치고 있는 은종복 씨에게 앞으로도 이 일을 계속 할 거냐고 물었다. 10년 후쯤 미국의 침략 패권주의가 수그러들고, 신자유주의에 따른 문제도 해결되어진다면 시골 가서 살겠다고 한다.

은종복 씨는 '삼각산재미난학교'에 8살 아들을 보내고 있는데, 올 여름휴가도 변산에서 있을 공동체 프로그램에 다녀올 예정이다. '삼각산재미난학교'는 12가구 13명의 아이들이 다니는 대안학교다. 미래에 농촌에서 자연과 함께 나누며 사는 것이 꿈이라고 말한다. 하고 싶은 일 하면 될텐데 제국주의의 신자유주의라는 거대담론을 자신의 문제로 삼아 미래를 고민하는 은종복 씨를 보며, 풀무질은 앞으로도 좋은 세상 안내하는 든든한 가이드가 되겠구나 싶었다.

"통일이 되더라도 흡수통일이 되고, 자본에 의한 통일, 신자유주의가 관철되는 통일이라면 농촌 가는 일은 미룰 수밖에 없겠지요. 책방을 지켜야 할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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