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자유주의의 기원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53
이나미 지음 / 책세상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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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른들은 문희준을 보고 웃지 않는다.

미국의 지성이라 불리우는 노엄 촘스키 교수의 잘 알려지지 않은 경력은, 그가 꽤나 업적있는 언어학자라는 사실입니다.
전에 어느 책에서, 노엄 촘스키 교수의 집필 내지는 활동과 그의 경력인 언어학자와의 필연성을 평한 것을 봤는데, 논리적이냐 아니냐를 떠나서 상당히 흥미로웠던 기억이 납니다.

구조주의나 언어학자들이 이룬 성과에 대해서 잘은 모릅니다만,
'언어'나 '개념'이 우리의 사고를 제약하고, 우리의 대화를 가로막는 것 즈음은 수긍할 만 합니다.

가수 문희준씨에 얽힌 일화들을 모르는 어른들은,
'무뇌중' 이나 '뷁' 이란 이상스런 단어에 낄낄거리며 웃기는 커녕, 고개를 갸우뚱 할겁니다.

그에 얽힌 '일화'들이란,
다름아닌, '언어나 개념의 사회적 맥락' 이라고 폼나게 말 할 수도 있겠죠.

# 자유주의를 보고 웃지 않는다?

한국 자유주의의 기원을 개화시기의 <독립신문>으로 보는 이나미씨는,
방대한 양이었을 당시 발행부들을 들추어보며 자유주의의 개념을 찾아갑니다.

그녀의 책을 읽는 독자는, 고개를 갸우뚱 하는 어른과도 같습니다.
갸우뚱 했다기에 뭐 좀 재밌는 표현이겠거니 했는데, 알고보니 늘상 사용하는 '자유' 라는 단어.
아니, '자유' 도 논쟁의 대상이란 말인가요? 우리는 이미 갸우뚱 하는 군인입니다.

그녀가 책의 말미에 한토막 소개하는 몇해전 자유주의 논쟁을 둘러보면,
'갸우뚱 할 만 하다' 는 것을 알게됩니다. 이 논쟁에는 꽤나 알려진 선수들이 등장합니다. 소설가 복거일씨, 공병호연구소 공병호 소장, 지금은 국회의원이 된 시사평론가 유시민씨, 한국일보와 어디 신문에 칼럼을 기고하고 있는 칼럼니스트 고종석씨와 진중권씨.

그들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를 떠나, 소위 선수들인데. 그들이 모여 하필이면 '자유주의'에 대해서 논하다니, 갸우뚱 할 만 한가요?

더 재밌는 사실은,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로 박정희 대통령을 무대 위로 끌어올린 자칭 자유주의자 복거일씨는, "민주주의의 위협을 줄이는 것이 자유주의자의 몫이다" 라 했고, 공병호 소장은 "대중민주주의 아래에서 폭력의 뿌리는 유권자 대중이다" 라고 했으며, 진중권씨는 이 두사람과 고종석씨를 비교해 가짜 자유주의자와 진짜 자유주의자를 얘기했답니다.

아 자유민주주의자들은 어찌 하란 말인가.

# 민주주의는 옵션이다?

뭐 이미 뱉은 말이니, 복거일씨와 공병호 소장은 자유민주주의자임에 앞서, 자유주의자 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들에게 민주주의란, 떼었다 붙였다 할 수 있는, 일종의 옵션(option) 과도 같아요. '민주적인 자유'는 없을 수 있어도, '자유' 만큼은 없어서는 안되는거죠.

감히 민주주의가 옵션이라니.
놀라는 분들은 십중팔구(十中八九) '자유'와 '민주' 모두가 보편타당한 가치라고 생각하는, 소위 '자유민주주의자' 일겁니다.

자 여기까지 따라온 분들 중,
되돌아가려는 분이 있다면, "민주주의가 어떻게 옵션일 수 있어?" 라고 반문 내지는 비판할 것이요,
그들의 얘기를 끝까지 경청할 분들은, 필연적으로 "그럼, 너희가 말하는 '자유'는 뭔데?" 를 질문하게 될겁니다.

전자는, 후자처럼 새삼스래 자유의 개념을 묻지는 않겠지만,
이미 그는 개념을 전제하고 있는겁니다. '자유'란 '민주'와 공존 가능한 보편적인 가치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 <독립신문>에 대한 상이한 평가

따라서, 전자와 후자의 논쟁은,
'자유'란 무엇인가를 질문하는 것으로 시작할 수 있을겁니다.

<한국 자유주의의 기원>의 저자 이나미씨는,
그 질문의 답을 개화시기 <독립신문>에 던지고 있습니다.

그녀는 <독립신문>이 역사에서 덜 중요하게 평가받는 것을 비판하며,
<독립신문>이야 말로, 한국에서 유교 이후에 자유주의를 처음 도입한 언론매체라고 합니다.

인용하자면, 한국에서 개화사상이 시작된 것은, 박규수가 신미양요를 겪고 1872년에 중국을 다녀온 뒤에 김옥균 등을 지도하면서 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서재필과 윤치호가 갑신정변 이후 미국으로 망명하였다가 귀국해서 발행하기 시작한 것이 <독립신문>입니다.
사회 교과서에 익히 출제되었을 법한 내용이군요. 허허

<독립신문>은 최초의 민간신문이자, 최초의 한글신문이고, 국문역사상 최초의 띄어쓰기가 시도된,
여튼 '최초' 신문이고, 대중적인 영향력 또한 막강했습니다. 최대 3천부까지 발행되었는데, 당시 신문을 돌려가며 읽었던 것 까지 고려하면 충분히 대중적이라고 할 수 있겠죠.

흥미로운 사실은,
<독립신문>에 대한 학계의 평가가 서로 모순된다는 점입니다.

이들의 개화운동이 민주주의와 자주독립을 주장함으로써 민중 계몽과 한국 사회의 발전을 가져왔다는 긍정적인 평가와,
이들은 사실 친일적, 반민중적, 반민족적이었다는 부정적인 평가입니다.

이나미씨는, 서로 대립적인 견해의 판 자체를 깹니다. 기준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거에요.
<독립신문>의 사상을 민족주의 내지는 민주주의와 관련해서 판단하면 분명 모순적인 요소가 존재한다는겁니다. 하지만, 자유주의 관련해서 판단하면, 독립신문의 모순적 요소 - 즉, 민족과 백성을 위하는 내용과 외세 의존적이고 민중 불신적인 내용의 공존 - 를 설명할 수 있다는겁니다.

이나미씨는 저 위 단락에서 말씀드린 바에 따라 구분하자면, 후자이군요.
민족주의와 민주주의는 자유주의의 원칙에 따르자면, 수용되기도 하고 배제되기도 한다는 겁니다.

" <독립신문>에서 가장 강조하는 사상은 자주독립과 문명개화 사상으로, 그것의 주요 개념은 자유권, 독립권, 교육, 개화, 진보, 법의 중요성, 군주에 대한 충성, 애국 등 다양하게 나타나지만, 그 내용을 보면 이익을 추구하고 재산권을 갖는 개인의 자유, 경제적 활동의 중요성 등 근대 자유주의의 내용들이 주를 이룬다. 교육과 법, 진보, 개화 등은 이러한 자유와 독립을 확보하기 위한 방법으로 제시되었다. "

# 자유주의를 말해보자.

'자유주의'는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만큼, 그 의미도 너무 다양해졌습니다.
이제 '자유'만으로는 자유주의를 설명할 수 없게 되었죠. 누구의, 무엇을 위한 자유인가를 좀 더 구체적으로 얘기하지 않으면 동상이몽(同床異夢) 하며 얼굴 붉히기 십상입니다.

사실, 이제껏 제 깜냥으로는, 해방 이후의 반공정국까지가 되짚어간 한국 자유주의사상의 끝자락이었습니다.
한국의 자유주의는, 해방 이후의 북한 사회에 대한 반정립적 성격이 강했고, 그 기준에 서있던 것은 바로 재산권, 경제적 자유주의였습니다. "개인의 재산권을 인정하느냐" 는 물음이 곧, 자유주의자이냐 아니냐를 결정했죠. 북한은 -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지만 법적으로는 - 개인의 재산권을 부정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이제 <한국 자유주의의 기원>에 따르면,
자유주의의 기원은 해방 이전까지 거슬러올라가 <독립신문>에 이르게 되는데, 그녀가 <독립신문>의 자유주의 사상에서 주목한 것 역시 경제적 자유주의에요.

# 무턱대고 자유주의?

경제적 자유주의는 재산권을, 정치적 자유주의는 집회의 자유, 결사의 자유, 사상의 자유를 뜻하는데,
무턱대고 '자유주의'라 했을 때는, 이 모든 것을 아우르게 되죠.

재산권이라는 경제적 자유주의는, 경제적 강자에게 필요해요.
경제적 약자는, 말 그대로 행사할 재산권이 미약하니, 특별히 자신의 재산권에 대한 보호를 주창할 필요가 없으니까요.

하지만, 집회의 자유니 결사의 자유니 하는 정치적 자유주의는, 정치적 약자에게 필요하죠.
정치적 약자는, 여럿의 약자가 모여서(결사) 요구(집회)할 수 있는 보호를 필요로 하니까요.

결국, 에둘러 '자유주의'라 했을 때는, 경제적 강자와 정치적 약자가 함께 할 자리가 마련되는 셈입니다.

상식적으로, '동맹'이란, 공통의 이해관계를 기본으로 할테니,
경제적 강자와 정치적 약자의 '자유주의' 동맹이 실로 자연스러운 것이라면, 분명 공통의 이해관계가 있을 것입니다.
경제적 강자가 정치적 자유를 필요로 해야하고, 정치적 약자가 경제적 자유를 필요로 해야하죠. 누가 손해보는 장사 하려고 하나요.

그런데, 제가 보기엔 둘 다 썩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부유한 사람들이 집회 결사의 자유를 주장하는 것도, 데모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재산권을 주장하는 것도, 도무지 어색하거든요.

이 '자유주의' 동맹엔 뭔가 문제가 있습니다.

# 에둘러 자유주의

누가 보기에도 부자연스러운 그들은, 당연하게도 '자유주의' 동맹을 맺은 적이 없어요.
다만, 누군가 한쪽이 에둘러 '자유주의'를 말 할 뿐이죠.

'자유주의' 동맹을 표방하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정치적 자유주의를 주장하는 정치적 약자 보다는, 경제적 자유주의를 주장하는 경제적 강자로 보여집니다.

경제적 강자가 가짜 동맹을 표방하는 이유 역시도 상식적입니다. 동맹상대 혹은 동맹상대에 동조하는 세력을 아우르기 위해서죠.
'자유주의' 동맹 아래 정치적 약자들의 동조 - 그것이 심정적이든 직접적이든 - 를 얻어내고자 함일겁니다.

'정치적 약자'는 누구일까요?
우리 모두가 정치적 약자입니다. 적어도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사회에서는 원칙적으로 '정치적 강자'가 있을 수 없으니까요.

# 나름의 비용

동맹과정이 일방적이었던 쌍방적이었든,
여하튼 동맹은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제 역할을 훌륭하게 해냅니다. 경제적 자유주의는 탄탄대로를 달립니다.

그런데, 에둘러 표방한 동맹일지라도, 동맹은 동맹인 법.
경제적 강자들도 나름의 비용은 치뤄야했습니다.

경제적 자유가 주된 목적이라 하더라도, 동맹을 깨지 않으려면, 적당히 정치적 자유주의도 이루어야 했으니까요.
못된 말로, 가끔 정치적 자유에게도 먹이를 줘야했겠죠.

저는 이 시점이 87년 6월항쟁이라고 생각해요.
87년 6월항쟁은 4ㆍ19와 함께 정치적 자유에 있어 상징적인 날이니까요.

6월항쟁의 가시적인 성과는 대통령직선제였죠.
그런데, 이 동맹의 성격을 이해하신 분이라면, 정치적 자유도 '대통령직선제'라는 당시로서는 꽤나 대단한 성과를 얻었는데, 경제적 자유는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으리라 충분히 짐작하실 수 있을겁니다.

아니나 다를까, 80년대 후반은 한국의 경제규모가 눈부시게 성장하던 특징적인 시기에요.
전에 후기를 올렸던 <한국재벌연구>에서 읽은거지만, 한국의 기업들에 '입법'이라는 제재가 가해진 것은 80년 중후반 들어서에요.
물론, 그 이전시기에는 기업의 해외진출로를 모색하는 것과 더불어 지원이 극에 달했었죠. 전성기라고나 할까요. 한국의 유수 기업들이 최고의 성장기를 구가한 것도 바로 이 시기입니다.

# 같지만 다른 두 사람

이나미씨가 먼지 묻은 <독립신문>까지 뒤적여가며 하고싶었던 얘기는 바로,
이 부자연스러운 동맹이었을겁니다.

처음에 잠깐 끌어썼던 지식인들의 논쟁으로 돌아가볼께요.
이 지식인들의 논쟁은 99년 한겨레21 특집기사로 다루어진 것이죠.

복거일씨와 공병호소장 모두 소문난 논객들인데, 두사람의 공통점은 경제적 자유주의의 관점을 견지한다는 것입니다.
집필분야만 조금씩 다르죠. 복거일씨가 좀 더 폭넓게 쓰는 편이고, 공병호소장은 경제 경영분야에 치중하는 편입니다.

진중권씨가 '진정한 자유주의'를 논한 것은 공병호소장이 아니라 복거일씨에 대해서에요.
진씨는 공병호소장이 쓴 <10년 후 한국>을 저평가하면서, 그의 논리는 '시장주의'가 아닌 '시장만능주의'라고 한 적은 있지만, '자유주의' 자체에 대해서 언급하지는 않았었거든요.

그가 유독 복거일씨 앞에서만 자유주의를 논하는 것을 보면,
그 역시 이나미씨와 마찬가지로 정치적 자유주의에 주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진씨가 유달리 '진정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면서까지 자유주의를 고집한다는 점입니다. 이는 이나미씨와는 사뭇 다른 태도이죠.
더구나, 이나미씨 역시, 책의 말미에 이 논쟁을 살짝 소개하며 진중권씨가 아닌 복거일씨의 손을 들어주고 있구요.

진씨가 말하는 '진정한' 이라는 기준은, 경제적 자유주의와 정치적 자유주의가 얼마나 적절하게 조화되느냐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의 시각으로 바라봤을 때는, '경제적 자유주의 아래 정치적 자유주의는 억압될 수 있다' 라는 공병호씨는 이 균형을 깬 것이고, 진정한 자유주의자의 자격을 잃은 셈이 됩니다.

하지만, 이나미씨는 경제적 자유주의와 정치적 자유주의의 동맹 자체가 온전하지 못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둘의 균형을 뜻하는 진씨의 '자유주의의 진정성'이라는 기준은 성립하지 못하는겁니다. 그녀는 복거일씨야 말로 자유주의자'다운' 자유주의자라며 손을 번쩍 들어줍니다. 재밌군요.

통속적인 관점에서 좌파논객으로 묶일 이나미씨와 진중권씨.
하지만, 제가 보기엔 이 두사람은 문제설정 자체를 달리 하고있을 뿐 아니라, 그 입장에도 현격한 차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 독립선언이냐 균형유지냐

기존의 자유주의는 신자유주의로 그 명칭을 변경했어요.
신자유주의가 버젓히 20:80의 사회로 자신을 홍보하는 것을 보면, 경제적 자유주의가 자유주의 동맹 내에서 노골적으로 큰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게 합니다.
물론 이것은, 동시에 정치적 자유주의의 입지가 여지없이 줄어들 것을 예고하기도 하구요.

독립선언이냐, 동맹내 자리다툼을 통한 균형유지냐.

여러분은 같지만 다른 이 두 사람의 입장을 어떻게 바라보세요?

# 더 읽어야 할 책 - <자유론>, <사회계약론>

암흑으로 비유되는 중세에서 벗어나게 한 근대 자유주의 사상들.
아무렇지 않게 그 진보성에 경탄해왔던 사람이라면,

<독립신문>은 물론, 밀의 <자유론>과 루소의 <사회계약론> 을 '자유주의의 기원' 이라는 관점에서 읽어보는 것도 흥미로울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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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역사인가 신화인가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93
정승우 지음 / 책세상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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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미지

많이 그리고 꾸준히 읽히는 소설들은 종종 영화화 되죠.

이렇게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의 경우,
감상평의 한축은 늘상, 소설의 독자가 그려낸 이미지와 감독이 만들어 낸 영상과의 차이입니다.

이를테면, 보리스 파스테르냐크의 <닥터 지바고>를 데이빗 린 감독이 65년에 영화화 했는데,
주인공 지바고 역에 오마 샤리프가 어울리느냐 안어울리느냐가 화두로 떠오른다는거죠.

그런데, 안타깝게도 소설을 읽지 못하고 영화를 먼저 본 분들은, 이런 논쟁에 끼어들기가 영 마땅치 않습니다.
논쟁은 둘째 치고서라도, 차후에 소설을 읽을 때에도 위의 독자들 만큼의 어색함을 느끼기란 좀처럼 쉽지 않죠.
물론, 원작을 심하게 변형시킨 경우는 제외한다면 말이죠.

# 원작

이렇듯, 영화의 영상이 관객에게 주입하는 이미지는 꽤나 강렬한 것입니다.
아니, 강렬한 것을 넘어서, 오히려 소설이라는 '원작'에까지 영향을 미치죠.

그런 점에서 '신화적 예수'는 영화의 영상과 같습니다. 전세계를 강타한 흥행영화인 셈이죠.
이 영화는, 1세기 팔레스타인 지방을 배경으로 하여, 인류의 죄를 사하기 위해 십자가를 짊어진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그리고 있습니다.

이 영화 역시 너무나 강렬한 나머지, '예수의 삶'이라는 원작에까지 영향을 미치는데요,
이 영화의 두터운 팬(Fan)층을 구성하는 사람들은, 원작을 시시해하거나 심지어 별 관심을 보이지 않기 일쑤입니다.

즉 예수가 인류의 죄를 사하기 위해 십자가에 매달렸음을 굳건히 믿는 기독교인들, 그 중 몇몇은,
부활 이전의 예수의 삶에 대해서 잘 모르거나 심지어 무관심하다는거죠.

# 예수 대 예수

'신화적 예수'가 전세계를 강타한 흥행영화라면,
'역사적 예수'는 같은 원작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개봉영화입니다.
두 영화는 '예수'라는 동일인물의 삶을 원작으로 하고 있지만, 엄연히 다른 극본을 바탕으로 하는 영화이죠.

같은 원작을 바탕으로 한 서로 다른 두편의 영화는,
" 과연 어느 영화가 더 원작에 충실했는가? " 라는, 원작에 대한 논쟁에 불을 붙일겁니다.

물론, 처음부터 승부를 가리기 힘든 논쟁임에 틀림없습니다.
어차피 원작이 영화라는 영상으로 변화되는 순간, 감독의 주관적인 이미지가 투영되기 마련일테니까요.

1940년대 살만(Warner Sallman)이 <그리스도의 머리(Head of Christ)>라는 작품에서 그려낸 아름다운 금발, 오뚝한 코, 부드러운 수염을 가진 예수와,
2001년에 영국의 BBC 방송이 기획한 한 다큐멘터리에서 법의학자이 그려낸 갈색피부와 뭉툭한 코 그리고 갈색 머리카락을 지닌 예수.

어느 편이 객관적 진실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 깨다

어차피, 객관적 승부를 가릴 수 없는 것이 영화의 세계라면,
같은 원작을 바탕으로 한 신흥개봉영화의 흥행조건은, 아니 흥행여부가 영화의 전부가 아니니 만큼, '주목여부'는 그 자체로 작품성이 뛰어나거나, 혹은 아주 깨거나 일겁니다.

한달에 한번 영화관을 기웃거리는 주제에 작품성 운운하기는 뭣하지만,
이 영화 아주 깬다는 것 만은 틀림없습니다.

'중세 서구교회' 라는 감독이 주연한 전편에서,
인류의 죄를 사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그리스도 예수는,
후편에서 유대교를 개혁하려 했던 개혁가로, 도덕 교사로, 여성해방을 주창한 운동가로, 율법을 가르친 랍비로, 심지어 혁명가로 그려지고 있으니까요.
아니 깬다 할 수 없을겁니다.

물론, 손벽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고,
'깬다'는 것은 깨어져야 할 고착화 된 이미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개봉영화의 진정한 공적은, 이제껏 그 이미지만으로 원작을 압도했던 '신화적 예수'에 대해,
원작에 대한 논쟁을 일으켰다는데에 있습니다. 이제서야 비로소, 관객들은 원작인 '예수의 생애'에 대해 돌아보게 될겁니다.

# 역사적 예수 연구

사실, 영화가 아닌, 역사적 예수 '연구'는,
저 멀리 근대의 시작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 서구는 계몽주의와 합리주의 시대를 거치면서 성서를 교회의 경전이라는 시각에서 벗어나 비판적 학문의 대상으로 보게 되었다. 이제 성서는 하느님의 계시라는 도그마적 관점이 아니라 역사성을 띤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책이라는 전망에서 다루어지게 되었다. 튀빙엔 대학 같은 독일 대학을 중심으로 성서를 역사적 비평적 전망으로 독해하려는 일련의 시도가 진행되었다.
19세기를 통해 역사비평적 연구의 성과들은 예수의 가르침과 행적을 묘사하고 있는 신약성서의 복음서들이 신의 영감을 받은 특정 저자가 한순간 기록한 신앙적 계시에 의한 책이 아니라 복잡한 구전 단계를 거친 수집물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

대략 200여년이 되어가는 긴 시간 동안, 역사적 예수 연구도 발전과 정체를 반복하는데요,
어차피 기억하지 못할 수많은 학자와 업적에 대해서는 속편하게 기억하지 않기로 하고, 그 흐름만을 대체로 살펴보면 시기적으로 나눌 수 있는 변화들이 있어요.
제 편의대로 그들을 각각, '1세대', '2세대', '3세대' 라고 부를께요.

1세대(라이마루스, 바이스, 슈바이처)는 말 그대로 깨는 사람들이었어요. 위에서 말씀드린 대로 예수는 유대교의 개혁가, 새 종교의 창시자, 종말론적 예언가, 혹은 도덕교사로 지칭됩니다.
2세대(불트만)는 이런 경향에 제동을 건 사람들이에요. 그렇다고 해서, 기존 서구 교회의 시각을 반영한 것은 아닌데, 이들은 1세대 연구가들의 약점을 꼬집어내며 역사적 예수 연구에 회의감을 불러일으킵니다. 기존의 신화적 예수가 중세 서구 교회의 입맛에 맞았다면, 도덕교사로 모아지는 근대 계몽주의자들의 입맛에 맞을 뿐이라는거죠. 객관적 연구는 불가능하다라는 회의감을 일으킵니다.
3세대(호슬리, 예수 세미나 그룹, 베르메스)는 로마식 도시 세포리스의 발굴, 팔레스타인 고고학의 발전, 쿰란 문서와 나그 함마디 문서의 발견과 같이, 실증적인 연구자료들이 많이 확충되면서, 역사적 예수 연구를 본격화 한 사람들이에요. 사회학적인 방법도 많이 도입되어 연구도 훨씬 체계화되었구요.

# 여전한, 아니 더 확실해진 거리감

흥미로운 점은,
역사적 예수 연구는 신화적 예수의 허구성을 지적하고 있긴 하지만, 예수를 탈신화화 하는 것에 강박적으로 집착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작품성의 특정 조건을 만족시킨 영화들을 두고 객관적으로 우열을 가리기 힘든 것 처럼,
역사적 예수와 신화적 예수 역시도 대립적인 구도를 가지고 있지는 않아요.

더구나, '예수 부활'이라는 사건을 전후로, 연구배경 역시도 달리 하고 있구요.
역사적 예수 연구는 부활 이후의 예수에 대해서는 나름의 침묵을 지키고 있는 듯 합니다.

연구가 신화적 예수와의 거리를 여전히 유지하고 있는데에는,
2세대 연구자들이 밝힌 '객관적 예수'에 대한 회의감이 자리하고 있는 것 같은데,

글쎄요.
역사적 예수 연구가들은 여기에서 멈추어 서는걸까요?

안개는 조금씩 걷히고 있지만, 아직도 강을 건너기엔 힘이 들어보여요.
실로 방대한 연구업적에 혀를 내두르면서도, 한편으로 아쉬움에 책을 덮어야 했던 이유입니다.

김규항씨가 오랜 침묵을 깨고 새 책 <예수이야기>를 낸다는데,
그가 과연 강 어디즈음에서 노질을 시작할런지 조심스레 기대를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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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주체성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6
탁석산 지음 / 책세상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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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매상 탁씨와의 유쾌한 만남

철학자 탁석산씨를 처음 만난 것은 <철학 읽어주는 남자>에서 였습니다.
그와의 만남은 굉장히 신선했어요. 그는 <경제학 카페>에서의 유시민씨와 비슷하게도, 소매상 역할을 자처했죠.

철학이든 경제학이든, 결국은 삶의 필요에 의해서 생겨난 것일진데,
전문적인 연구를 업으로 하는 철학'자', 경제학'자' 와 갑동이, 을순이와의 거리는 너무 멀었어요.

철학자, 경제학자들은 도매상이었어요.
갑동이, 을순이의 생활필수품을 판매하긴 하지만, 도매상에게는 장바구니 들고온 갑동이, 을순이가 여간 곤란한게 아니었거든요.

탁석산씨는 철학의 소매상을 자처합니다.
하지만, 흔히 하는 오해처럼, 이를 두고 '쉬운 철학'이라고 말하기는 힘들거에요. 철학은 전문적인 연구를 필요로 하는 하나의 '학문'이니까요.
철학의 소매상 탁석산은, 갑동이 을순이의 소비심리를 자처하는, 속된 말로 '장사꾼' 이라기 보다는, 도매상과 소비자의 서로 다른 유통구조를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하는, 엄연한 '소매상' 을 자처했습니다.

탁석산씨의 <한국의 정체성>, <한국의 주체성> 연재는, 여전히 - 사실, <철학 읽어주는 남자> 보다 더 일찍 쓰여졌습니다만 - 소매적인 유통구조가 돋보입니다.
그의 철학에는, 이름 모를 철학자 대신 갑동이 을순이가 등장하고, 표현 또한 부드럽고 자상해요.

" 어떻게 살 것인가 ", " 어떻게 살아야 잘 살았다고 소문이 날 것인가 " 를 고민하는 을순이 갑동이는, 그를 통해 자신의 일상적인 고민이 철학자들의 정체성, 주체성 논쟁과 다를바가 없다는 것을 알게될거에요.
그리고, 일상적인 고민이 하루하루 깊이를 더해갈 수록, 뭇 철학자들과의 만남도 가까워집니다.

# 이번에도 유감없는 소매상적 솜씨, 주인과 손님의 예시

한국인의 주체성을 문제 삼은 탁석산씨의 소매상적 솜씨는 이번에도 유감없이 빛을 발합니다. 그는, '주체적인 삶이란 삶의 주인으로 살아가는 것' 이라고 하며, 주인과 손님의 예를 들어요.

꽤나 근사한 친구집에서 최신형 전자기기를 가지고 마음껏 노는 '손님'과, 허름한 집에서 김치찌개에 밥말아먹는 '주인'.
하지만, 손님은 내심 눈치를 봐야하고, 주인의 마음은 마냥 안락합니다.

친구집이 꼭 근사하라는 법 없고, 우리집이 꼭 허름하라는 법은 없겠지만,
주체적인 삶이란, 물질적인 풍요에 우선해, 자기 의지와 필요에 따라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을 하고싶은지 한번 제대로 물어보지도 못한 채, 소위 잘 나가는 일만을 찾아 전전긍긍한다면,
친구집에서 내심 불편해하며 최신형 게임에 몰두하고 있는 손님의 마음은 아닐런지요.

주인과 손님의 예시는 계속됩니다.

우리는 마냥 주인노릇만 할 수는 없어요. 살다보면, 집은 동대문인데 저 멀리 신촌에서 밤 늦게까지 술자리가 있을 수도 있고, 친구녀석이 산 새 음악CD를 함께 듣고싶을 때도 있으니까요. 주인노릇 할 수 있는 우리집이 최고이지만, 친구를 집에 초대하기도 하고, 친구집에서 신세를 지기도 하는 것이 사람사이일꺼에요.

결국 우리는, 주인으로서의, 손님으로서의 예의에 모두 익숙해져야 합니다.
주인되는 삶이라 해서, 고립을 자처하며 주인이기만을 고집하는 것은 아닐테니까요. 우리는 열린 인간관계 속에서 혹은 열린 국제관계 속에서 자기 의지와 필요에 따라 행동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혹 이번에는, 집에 초대한 친구가 마치 제집인양 행동한다고 해요.
손님으로서의 암묵적인 규칙이 깨어졌어요.

주인이라면 이 손님을 제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친구에게 '제재'가 어울리지 않는다면, 좀 더 공식적인 인간관계나 국제관계를 떠올려보셔요.)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무가내인 손님이 있다면, 물리적인 방법도 사용할 수 있을거구요.

주인으로서.

# 철학과 경제의 만남

이처럼, 탁석산씨는 개인 혹은 국가의 주체성을 얘기하며 주인과 손님의 예시를 십분 활용하고 있는데요,
자신의 의지와 필요를 스스로 결정하는 것, 일정한 규정과 예의, 그리고 이것이 깨어졌을 때 강제할 수 있는 물리력.
이것들은 주체적인 삶의 조건들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제목이 <한국의 주체성>이니 만큼, 그가 국제관계에 이 조건을 적용하고 있다는 것 즈음은 눈치 채셨을텐데,
그는 각각의 조건에 맞추어, 한글전용, 국가기반시설의 보호, 공기업 민영화의 반대, 환경 이데올로기 비판, 등의 제안을 펼칩니다.

대부분은 첫번째 조건 - 국가가 정책을 스스로 결정하는 것 - 에 맞추어져 있어요.
(세번째 조건과 관련해서는 핵무장을 제안하기도 했는데, 민감한 사안이니 만큼 넘어갈께요.)

한글전용을 제외하면, 나머지 제안은 경제적 주권과 연관이 있습니다.
환경 이데올로기 역시도, 결국은 비용의 문제 - 친환경적인 생산공정에 필요한 추가적인 비용 - 로 돌아오니까요.

그는 철학자로서 주체성의 문제를 고민했지만,
고민의 결과물은 경제적 주권으로 귀결됨을 알 수 있습니다.

# 그런데, 불편한 만남

이제 철학과 경제가 만났습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엔 이 만남이 조금 불편해보여요.
철학의 사고는 자유롭게 이루어지지만, 경제는 말그대로 하나의 제도에요.

시험이라는 '제도' 아래에서는,
응시자의 능력을 평가하는데 있어서 아무리 다양한 방식이 도입된다 하더라도, 기출문제나 기출경향과 같은 '제도에의 이해'가 시험의 성적에 큰 영향을 미쳐요. 그 틀에서 벗어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죠.
경제라는 제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철학의 자유로운 사고와 경제의 규정된 제도와의 결합이란,
철학이 제도에 맞추어 왜곡되던지, 아니면 경제가 왜곡되던지, 둘 중 하나의 왜곡을 거치게되요.

논리정연하고 명쾌한 탁석산씨의 철학은,
후자에 속합니다. 그래서, 불편하구요.

# 독을 깨고 달아나는 제리(Jerry), 쫓는 톰(Tom)

경제문제는 경제적 관점에서 접근을 해야해요. 응당 경제주체를 기준으로 접근을 해야죠.
그런데, 탁석산씨는 '한국의 주체성'이라는 주제를 다루면서, '주권'이라는 관점으로 접근해요.

주권이란 '국가'를 기준으로 하는데,
'국가'는 엄연히 말하자면 경제주체와는 거리가 있어요.

우리가 중고등학교 교과서에서 배운대로 3대 경제주체가 '국가-기업-가계' 라면,
탁석산씨가 얘기하는 '주권' 역시도 경제주체인 국가의 주체성을 얘기하는 것이겠지만,
솔직히 국가의 역할이란 기업과 가계 사이의 중계자 역할이거든요.

더군다나, 오늘은 무역과 서비스교역, 금융거래까지 자유화 되어서,
국가가 기업에 미칠 수 있는 '규제' 자체란 이전보다 더욱 작아졌으니까요.

국가와 기업의 관계는, 만화영화 <톰과 제리>에서 처럼 고양이와 쥐의 관계와 같아요.
언뜻 보기엔 고양이는 쥐 보다 월등히 힘이 센 것 같지만, 원래부터 쥐를 먹이로 하는 고양이가 쥐 없이 하루도 연명할 수 없는데다,
이제는 '독안에 든 쥐'가 국가라는 '독'을 깨어버렸으니, 고양이로서는 더욱 수세에 몰릴 수 밖에요.

그런데, 탁석산씨는 이미 독을 잃어버린 국가를 두고 경제문제를 논하고 있거든요.
날이 갈 수록 선명해지고 있는, 기업-개인 이라는 경제구도가 그의 눈에는 잘 보이지 않는걸까요?

" 보고서대로 우리의 공기업들이 모두 외국 기업에 팔렸다고 해보자. 이제 공기업에 '주인'이 생긴 것이다. 한국전력을 매각했으므로 전기 사용료는 미국기업에 내야 하고, 미국인 사장이 우리의 전력 공급을 좌지우지한다. 요금도 미국인 사장이 판단하여 정할 것이다. 만약 요금이 지금보다 대폭 인상된다 하더라도 우리 정부는 시정하라고 지시하지 못할 것이다. 사기업에 대한 간섭은 자본주의 원칙에 어긋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통신은 어떠한가? 미국인들이 우리의 통신회사를 거의 인수한다면 한국의 정보 보안을 어떻게 유지될 수 있을까? 또 철도가 민영화되어 외국인이 주인이 되었다고 하자. 임금 협상이 결렬되어 외국인 주인이 직장 폐쇄를 단행해도 정부는 간섭할 권한이 없다. "

탁석산씨의 주장은 분명 그가 비판하고있는 시장만능주의자들에 비해 진일보 한 것이지만,
그가 손에 쥐고 있는 '국가'라는 기준은 사실 문제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아요.

미국인 사장 대신, 한국인 사장을 대입해보면 결론이 나오게되죠.
즉, '국가'라는 카드를, 아무리 바꿔도 같거나 비슷한 결론이 나와요.

국가가 변수역할을 못하고 있다는거죠.
'경제'라는 법칙에서 국가가 변수역할을 못하고 있다는거에요.

미국인 사장의 경제법칙과 한국인 사장의 경제법칙은 다르지 않으니까요.

#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지만, 낙제도 행복하지는 않다.

'한국경제'라는 시험지를 앞에 두고 학생들이 앉아있어요.

고액 과외를 통해서 기출문제와 기출경향을 빠삭하게 알고있는 학생은 시장만능씨에요.
물론, 시장만능씨는 높은 점수를 받겠지만, 그렇다고 그의 삶이 주체적이거나 행복하진 않아요.

우리의 탁석산씨는 어디즈음 앉아있을까요?
그는 마음에 드는 문제만 푸는 학생과 같아요.

물론, 컨닝을 하거나, 아는 문제만 푸는 학생들 보다 훨씬 나았지만,
그 역시 점수에 있어서는 여타 학생들과 다를바가 없어요.

그는 학생들의 참신한 사고와는 거리가 먼 채점 기준에 목을 매진 않았지만,
그 역시 시험장에 앉아있는 학생이니까요.

결국, 우리 불행한 학생들을 구출할 수 있는건 새로운 교육일 수 밖에 없듯이,
경제적 주권으로부터 나오는 주체적인 삶이란, 국가가 아닌 실제적인 경제주체 사이에서 고민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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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놀이터 삼아
강신주 지음 / 문예당 / 2002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 페미니스트 전업주부

페미니스트(Feminist) 강신주님은, 인터넷 야후(Yahoo) 에서 2달러에 100장을 찍어준다는 명함을 만들면서, 자신의 직업을 '홈메이커, 문필가, 박사' 이렇게 적었다고 합니다.

그녀는 이스라엘, 프랑스, 미국, 등지에서 영문학과 여성학을 오래도록 공부했는데, 지금은 벨기에 남자인 에릭, 그리고 두 자녀와 함께 전업주부로 살고있습니다.
가끔 대학에서 시간제로 강사노릇을 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아르바이트에 불과하고 자신의 진짜 직업은 전업주부라고 주장하는 그녀입니다.

<세계를 놀이터 삼아>는, 페미니스트 이론서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녀의 오랜 유학생활을 담은 여행기는 더더욱 아닙니다. 그녀의 시선은 다분히 그녀 자신을 향해 있습니다. - 이는 책의 목차를 보고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 전업주부와 전업주부 사이

목차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모두 네가지 큰제목 중에서, 그녀가 가장 많은 양을 할애한 것은 네번째 큰제목 '페미니스트 전업주부 - Ph.D' 였습니다. 나머지 큰제목들은 각각, '자매애(Sisterhood)', '건강한 성, 건강한 성 문화 - 내면으로부터의 자유', '먼 나라에서 본 우리 사회 - 내가 페미니스트로서 싸우고 싶은 것들' 이라는 제목을 붙이고 있구요.

네번째 큰제목은, 이전의 세가지 큰제목에서 소개한 그녀의 경험을 삶으로 받아들이는, 일종의 '결과' 로서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한국을 비롯해서 각국에서 만난 페미니스트, 혹은 잠재적 페미니스트 - 자신을 페미니스트라 부르지는 않지만, 이미 페미니즘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는 사람 - 들로부터 배운 것이기도 하고, 한국과 다른 외국의 성문화로 부터, 한국의 성문화 혹은 문화로 부터 배운 것이기도 합니다.

여튼, 결과로서 그녀가 선택한 것은 '전업주부' 이고,
그녀는, 한국의 일반적인 시각으로 봤을 때 다소 의아할 수 있는, 자신의 이유있는 선택에 대해서 충분한 얘기들을 풀어놓고 있습니다.

" 나는 페미니스트였기 때문에 전업주부를 직업으로 삼을 수 있었다. "
라고 그녀는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녀가 네번째 큰제목에서 풀어내고 있는 얘기들이, '전업주부' 와 '전업주부' 사이에 다리를 놓는 것입니다.
전자는 여성들의 굴레로 인식되는 그것이고, 후자는 그 굴레를 벗어나려는 페미니스트의 그것이겠죠.

# 영락없는 전업주부

전자의 전업주부와 후자의 전업주부가 하는 일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물론, 후자의 전업주부는, 전자처럼 남편과 자식에게 손수 하루세끼 밥을 해먹이지도 않고, 설겆이며 빨래, 청소와 같은 집안일들을 모다 맡아서 하지도 않고, 신문이며 TV를 보는 남편을 뒤로하고 혼자서 우는 아이를 달래지도 않지만,
이 모든 것들, 즉 가사노동을 일상으로 하는 영락없는 전업주부인 것입니다.

오히려, 전자와 후자의 사이에는, 노동에 대한 가치인정과 자긍심이 놓여있습니다.
전자에게는 힘들고 고된 뒤치닥거리이지만, 후자에게는 사랑하는 자식을 교육하고 삶의 행복을 체험하는 가치있는 노동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녀는 얘기합니다.
" 전업주부들이여, 우리도 잘나갑시다! " 라고.

" 너는 밥해. 나는 빨래할께. " 라고, 기계적으로 가사노동을 분담하는 것이 형식면에서의 여남평등이라면,
가사노동의 가치를 인정하여 기계적인 역할분담 자체가 스러지는 것이 형식과 더불어 내용을 아우르는 여남평등이라는 것입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첫번째 큰제목 '자매애' 에는, 그녀가 각국을 유학하며 만난 페미니스트 혹은 잠재적 페미니스트의 인물열전이라고 봐도 무방한데,
평생 가사노동을 해온 전형적인 한국의 장년여성 - 사실은, 강신주님의 어머니 - 이 '함경도 또순이 - 조화의 페미니즘' 으로 '자매애' 에 오른 것도 바로 그 이유 때문일겁니다.

# 무보수 가사노동

그런데,
한편으로는, 오래도록 페미니즘을 공부했고 삶 속에서 실천해 온 한 페미니스트의 즐거운 결말을 보면서도, 쉽사리 가시지 않는 아쉬움은 대체 무엇인지 생각해봅니다.

그녀의 즐거운 결말에서 굴레를 벗어난 것은,
'생각' 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삶이라는 결과가 달라진 것은, 그녀와 그의 생각에 '자부심 혹은 긍지' 가 더해진 까닭일 뿐, '무보수 가사노동' 은 여전히 상수로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 나는 돈 하나도 못 버는 주제에 가끔씩 '나 같은 파출부, 유모를 한 달에 5,000달러 주고 얻을 수 있나 찾아봐. 만약 찾을 수만 있다면 내가 당장 일하러 나간다.'고 하며 떵떵 큰소리친다. 웬 자화자찬이냐고 하겠지만, 그것은 남편과 나 자신에게 당당한 노동자로서의 내 값어치를 상기시키려는 자기 최면적 노력이다. "

누구나 한번쯤 들어봤을법한 그녀의 항변에서도 느낄 수 있는 것은,
가사노동에 분명히 존재하는 가치가, 무보수로 인해 은폐되고 있다는 사실일겁니다.
사실, 가사노동의 가치는 무시되는 것이 아니라, 은폐되는 것이죠.

은폐된 가사노동의 가치는, '가족'이라는 하나의 단위에서 생계비용을 벌어오는 구성원의 임금에 포함되어 있을 것입니다. 이런 것을 두고 '가족임금' 이라고 하는데, 그녀의 가족에서는 남편 에릭의 임금이 됩니다. 에릭이 매일 같이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그와 그녀의 가사노동이 있기 때문일테니까요.

# 또 한 페미니스트

그래서, 사회학을 전공한 페미니스트 조주은씨는, <현대 가족 이야기>에서 자동차업계의 가족임금제도를 문제삼고 있습니다.
( 그녀는 현대자동차에서 일하는 남편과 결혼한 페미니스트 전업주부로서, <현대 가족 이야기>에서 현대자동차와 소속 노동자 가족의 삶을 페미니즘의 관점으로 둘러보고 있습니다. )

노동을 하는 것과 다시금 노동력을 재충전하는 것은 분명히 동등한 것일진데, 임금이 한명에게 집중되고 있으니까요.
그녀는 임금을 한명에게 몰아주는 가족임금제도에서, 현대 가족 내에 존재하는 가부장성의 원인을 찾고있는 것입니다.

더욱이 사회학을 전공한 그녀답게, 현대자동차 노동자들의 부인들을 섬세하게 인터뷰 하는데, 그녀들에게 '전업주부'란 여지가 없는 선택이었다는 점을 상기시킵니다.

# 자기만족 혹은 자기최면

가사노동의 가치를 인정하는 것과 별개로,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전업주부가 되었고, 남편의 월급명세서에서 자신의 노동가치를 확인해야 하는 그녀들에게,
'자긍심과 긍지를 갖고 전업주부를 직업삼는 것' 이란, 어쩌면 조금 먼나라 이야기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세계를 놀이터 삼아>가 얘기하는, '가사노동에 대한 자긍심과 긍지를 느끼는 것' 만으로는 조금 아쉽습니다.
가사노동의 은폐된 가치를 스스로 확인하는 '자기만족'으로 끝나서는 안될 것입니다.
자기만족인지, 자기최면인지 따져봐야할거에요.

" 내가 좋으면 그만 " 이라고,
삶의 가치는 무엇과 비교하며 따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라지만,

오늘날의 노동은,
자아실현의 가치이기 이전에, 돈으로 환산되는 생계유지를 위한 수단임에 틀림없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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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백년의 역사를 갖는 기득권 세력의 아성
* 사회운동의 중심에서 전체 운동을 이끄는 것에 대해서 준비를 하고 있는가? 그것을 준비하는 모습이 안 보이는 점이 오히려 더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 . 조직 노동자가 11%가 안 되는 상황에서 89%의 노동자를 어떻게 할 것이냐. 임금교섭이 아닌 인권, 복지의 문제를 제기했어야 했는데 그런 문제에 대해서 여전히 수동적으로 대응했다? , 생산의 영역에서 재생산의 영역으로 한발을 내딛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
*주간동아(당시 뉴스플러스 99년 3월 4일자)에 실린 서영아기자
*탄핵반대국민행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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