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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속는 이유 - 똑똑한 사람을 매혹하는 더 똑똑한 거짓말에 대하여
대니얼 사이먼스.크리스토퍼 차브리스 지음, 이영래 옮김 / 김영사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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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속는 건 속이는 사람이 나쁘지만 두 번 속는 건 속는 사람에게 문제가 있다는 지적은 타당한가. ‘속는다.’라는 우리 말에는 사기, 착각, 오류 등 다양한 상황을 함유한다. 살다 보면 사기꾼에 속거나 보이스피싱을 당하고, 스스로 상황을 오판하기도 하고, 단순한 실수와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사람과 상황에 속거나 자기 자신을 속이거나 결과는 다르지 않아도 해석과 대책은 명확히 구별해야 한다. 인지 심리학자 대니얼 사이먼스와 크리스토퍼 차브리스는 이와 같은 인간의 ‘심리’를 세밀하게 들여다본다. 대상은 ‘속는 사람들’이다. 속이는 사람이나 속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아니다. 속는 사람들의 속성과 심리 상태 분석은 평범한 일상에서 흔히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고민과 자책의 실마리를 덜어준다.

속임수의 출발은 ‘진실 편향truth bias’이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처음 보는 사람을, 그 사람의 말을 믿는다. 디폴트 값인 인간의 각종 ‘편향’은 생존을 유리하게 진화했을 거라는 추정들에 힘이 실린다. 말콤 글래드웰은 『타인의 해석』에서 “우리는 이 결정이 아무리 끔찍한 위험을 수반하더라도 진실을 기본값으로 놓는다.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지 않으면 사회가 굴러가지 않는다. 그리고 신뢰가 결국 배신으로 끝나는 드문 경우에 진실을 기본값으로 놓은 것 때문에 피해를 입은 사람들은 비난이 아니라 동정을 받아 마땅하다.”라고 진단한다. 이것은 “진실기본값과 거짓말의 위험 사이의 상충 관계trade-off는 우리에게 대단히 중요하다. 이따금 거짓말에 취약해지는 대가로 우리가 얻는 것은 효율적 의사소통과 사회적 조정이다. 이득은 대단히 크고 그에 비해 비용은 사소하다. 물론 가끔 기만을 당한다. 이는 일처리의 비용일 뿐이다. - Timothy R. Levin, Duped: Truth-Default Theory and Social Science of Lying and Deception(University of Alabama Press, 2019), Chapter 11.”라는 주장에 대한 단순한 해석이 아니다. 인류 사회의 문명을 이룩하며 숱한 시행착오를 겪는 과정에서도 변하지 않는 인간의 속성이었다. 그래서 투명성은 일종의 신화라고 일갈한다. 인간 사회에서 공정성과 투명성은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양궁 국가대표 선발시스템을 어디에나 적용할 수 없다니 안타까울 따름이지만 사기와 속임수는 진실편향에 대한 일종의 일처리 비용이라고 주장을 반박하기는 어렵다.

지나치게 많이 받아들이고 너무 적게 확인하려는 우리의 성향을 점검하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다. 저자들은 사기를 당하는 사람의 인지심리, 즉 우리 모두를 취약하게 만드는 사고와 추론의 패턴을 설명한다. 누구나 가끔은 속는다는 전제다. 빈도의 차이일 뿐 속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 이유를 크게 두 가지로 나눈다. 습관과 후크가 그것이다. 습관은 집중, 예측, 전념, 효율의 문제이고 후크는 일관성, 친숙함, 정밀성, 효능의 문제다. 어느 쪽이든 덜 받아들이고 더 확인하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관습적 사고가 큰 재앙을 부른다. 비판적 사고가 결여된 개인과 사회에는 반드시 문제가 생긴다. 위정자들에게 속는 국민이 문제이듯, 맹목적 수용 태도가 비판 기능을 상실하게 한다. 긍정적 사고, 낙관적 태도의 위험은 ‘진실 편향’과 다르다. 인지 심리학으로 분석할 수 없는 개인차가 심하다. 학습과 토론, 사유하는 능력은 가방끈의 길이로 좌우되지 않는다. 인간의 속성을 넘어 사회심리학으로 확대 발전시킬 수 있는 연결고리가 조금 아쉽다.

사기가 판치는 시대, 속임수에 말려들지 않는 법이라는 부제는 후크다. 똑똑한 사람을 매혹하는 더 똑똑한 거짓말에 대한 사례가 이 책에 충분히 설명되어 있다. 지식과 정보가 부족해서 속는 게 아니고, 전문지식이 부족해서 사기를 당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의 믿음은 욕망과 기대에 근거하며 자기 자신조차 속이는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이 늘 곁에 있다는 게 문제다. 선과 악, 빛과 어둠, 거짓과 진실은 법정 다툼에서 실체적 진실을 따질 때나 구별해야 하는 이분법적 논리가 아니다. 우리가 겪는 일상은 매 순간 선택의 갈림길에 서 있으며 하얀 거짓말과 사기의 거리를 가늠하기도 어렵다.

그렇다고 개인의 삶에 레드팀을 운영할 수도 없고 외부인의 객관적 조언을 수시로 요청할 수도 없다. 인간의 인지심리를 안다고 해서 덜 속을까 싶기도 하다. 아주 오래된 ‘보이지 않는 고릴라’ 실험에 관한 이야기로 명성을 얻은 저자들은 연장선에서 지극히 인간적인, 너무나 당연한 사고 패턴과 인지 편향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을 교묘하게 활용하는 기업, 이용하는 개인과 사회에 속지 않으려는 노력은 필요하지 않을까. 그것이 아마도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의 작은 바람이겠으나 저자의 조언대로 “수용과 확인 사이에의 적절한 균형을 찾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속이기 힘든 사람이 된다는 것은 모든 속임수를 피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속임수가 언제 발생할 수 있는지 인지하고 중요한 순간에 그것을 피하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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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민함의 힘 - 세상을 다르게 감지하는 특별한 재능
젠 그랜만.안드레 솔로 지음, 고영훈 옮김 / 21세기북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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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민함은 축복일까, 저주일까. 내성적인 성격보다 외향적 성격을 선호하는 것처럼 우리는 둥글둥글하고 무던한 사람을 좋아한다. 그러나 심리학계에서는 “꽤 예민한 사람들highly sensitive person, HSP”이 전체 인구의 15% 정도 된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된 적이 있다. 조직과 집단의 크기와 상관없이 파레토의 법칙처럼 예민함의 비율은 상대적이다. 사회생물학자들도 비슷한 주장을 한다. 예민한 개미들이 위험을 감지하고 외부의 침입을 누구보다 먼저 눈치챈다. 서로 다른 성격의 장점과 단점에 대한 오해와 편견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달리 나타난다.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상대적 예민함을 비난받아 본 사람은 ‘세상을 다르게 감지하는 특별한 재능’이라는 부제에 끌려 이 책을 집어 들 수도 있다.

젠 그랜만과 안드레 솔로는 상담 플랫폼 SR,sensitive refuge의 공동 설립자이자 저널리스트라고 한다. 오랫동안 예민한 사람들을 관찰하고 상담한 결과를 담고 있다. 심리학 실험이나 논문의 결과를 풀어 쓴 이론 위주의 책이 아니라 예민한 사람들을 위한 실전편에 해당한다. 타고난 기질과 성격도 시간이 흐르고 생활 환경이나 상황에 따라 변하기 마련이지만 본질은 크게 변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예민한 사람을 향한 손쉬운 비난 중 하나가 “예민하게 굴지 말라, 과민반응 아니냐, 왜 너만 그렇게 느끼느냐……”라는 등의 말이다. 튀지 마라, 모난 돌이 정 맞는다, 중간만 해라 등과 비슷한 맥락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정규분포곡선의 중앙에 자신을 맞출 수는 없지 않은가.

저자들은 예민함이 약점인지 특별한 재능인지 묻는다. 물론 예민함은 ‘재능’이라는 관점이기 때문에 이 책을 썼다. 예민한 사람들의 특징, 장단점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그들의 몸과 마음을 챙기는 법, 공감 능력, 인간관계와 사랑, 예민한 아이 양육법까지 폭넓게 이어진다. 이해받지 못하는 소수가 틀렸다고 비난받는 사회는 건강하지 못하다. 그들의 목소리를 외면하면 ‘지금 그대로’ 유지된다. 변화는 느리고 문제는 개선되지 않으며 새로운 시도를 꺼린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든 예민한 사람들이 유행을 선도하고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제시하며 현실의 문제점을 짚어내기 때문이다. 사회적 업무, 개인적 관계에서 오는 불편함은 예민한 사람들의 몫이다. 어느 신혼부부가 집 청소는 더럽다고 느끼는 사람이 하자고 정하는 게 옳은지 논쟁하는 걸 들은 적이 있다. 번갈아가며 하는 게 합리적인가에 대한 감정적, 객관적 주장이 오갔다. 물론 정답 없는 싸움에 끼어들 만큼 바보가 아니라서 즐겁게(?) 관전만 했으나 예민한 사람들이 겪는 불편함에 대한 부분을 읽다가 그 신혼부부가 떠올랐다.

예민함은 진화적 이점이라는 저자들의 주장에 동의하든 그렇지 않든 우리 주변의 15% 정도는 예민한 사람들이다. 부모, 자식, 연인, 친구, 동료, 동호회원 등 어디에나 있다. 책을 읽는 동안 나를 포함한 예민한 사람들과 그 반대편에 서 있는 15%를 떠올렸다. 서로 다른 사람들의 장점과 단점, 넘치고 모자란 부분들이 서로 어울려 사는 세상일 수는 없을까. 나와 다른 건 틀린 게 아니다.

사회적 학습력은 공감이 필요하다. 3루에 태어난 사람이 타석에 선 같은 팀 선수를 이해하지 못하는 장면을 우리는 매일 목격한다. 공감은 연민의 전제 조건이다. 연민은 슬픔과 고통과 닿아 있다. 외면과 부정이 오히려 현명한 태도일까. 감정은 감기처럼 한 사람에서 다른 사람으로 쉽게 퍼진다. 사실 심리학자들은 감정의 확산을 공감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들은 이를 ‘정서 전염emotional contagion’이라고 부른다. 친한 사이일수록 정서가 전염된다. 이것은 공감과 다른 문제다. 긍정적 정서든 부정적 정서든 공감을 하든 말든 정서 그 잡채는 전염된다. 물론 세월호, 이태원 사고 같은 사회적 참사는 사회적 전염이 발생한다. 잘잘못을 따지고 대안을 마련하는 일만큼 중요한 건 공감이나 정서 전염에 대한 이해다. 개인적 태도는 그에 따른 결과이며 그러한 태도가 모여 결국 자기 삶의 무늬가 된다.

카나리아는 새장에 갇혀 살며 자신을 희생하는 방식으로 메시지를 전달한다. 예민한 사람들은 그동안 그 일을 충분히 해왔다. 이제 예민한 사람들을 너무 오랫동안 가둬두었던 새장을 부숴야 할 때이다. 예민함을 약점이 아닌 강점으로 보기 시작해야 한다. 예민함과 그것이 제공하는 모든 이점을 포용해야 할 때이다. - 29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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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견 - 사회심리학으로 본 편견의 뿌리
고든 올포트 지음, 석기용 옮김 / 교양인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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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랫동안 중립과 객관에 대해 생각했다.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는 판단과 선택은 누구에게나 중요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누구나 가장 합리적 선택을 위해 노력하지만 결과에 따라 자기 선택을 평가한다. 자신을 객관화하고 신중하게 상황과 맥락을 파악하려는 ‘태도’는 삶의 모든 장면에서 결정적 역할을 한다. 인생은 결국 그 선택의 총체적 결과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무언가를 듣고 보고 생각하는 과정을 통해 배우지 못하거나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몰라서 저질렀던 실수와 달리 알면서 반복하는 말과 행동은 한 인간의 됨됨이를 결정한다. 인지부조화를 겪으며 자신을 합리화하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자기 성장을 통한 마음의 평화와 안정을 얻지 못하면 타인과의 비교, 경쟁에서 이겨야 성공한 삶이라고 착각한다. 이는 자신뿐 아니라 타인의 삶을 평가하는 잣대로 기능한다는 데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사회심리학의 고전으로 평가받는 고든 올포트의 『편견The Nature of Prejudice, 1954』은 편견의 뿌리를 파헤친다. 언제나 그렇듯 당대의 문제를 반영한 역작들은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고 미래를 준비하는 데 혜안을 제공한다. 인종의 용광로인 미국의 가장 큰 힘은 ‘다양성’에서 나온다. 무지개처럼 어울려 저마다 다른 빛깔로 조화를 이루는 세상은 상상만으로도 아름답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하고 기득권을 거머쥔 계층과 계급의 사다리 걷어차기는 혁명을 꿈꾸는 자들의 의지보다 굳세다. 백인과 흑인은 단순히 피부색의 차이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인종 차별의 역사를 극복해온 과정이 인류의 문명화 과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성, 장애인, LGBT 등 현대판 흑인에 대한 차별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우리에게 ‘편견’은 심각한 사회 문제이기 전에 개인의 심리 문제다.

고든 올포트는 편견은 모든 나라에서 모든 세대에 걸쳐 존재해 왔으며 편견은 사실상 심리 문제에 해당한다고 분석한다. 도덕적 분노가 어느 정도 유발되느냐 하는 문제와는 무관하다는 것이다. 부정적 행동의 강도는 ‘1. 적대적인 말antilocution 2. 회피avoidance 3. 차별discrimination 4. 물리적 공격physical attack 5. 절멸extermination’의 순서로 전개된다. 편견을 구성하는 두 가지 기본 요소는 ‘잘못된 일반화와 적개심’이다.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에 기인한 적개심과 분노는 단단한 고정관념으로 굳어진다. 개인적 경험을 일반화하고 간접 경험과 관찰의 결과를 토대로 위험을 회피하고 생존했던 습관은 공정한 세상, 민주적 태도와 거리가 멀다.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는 습성을 옹호하고 무엇이든 힘들게 얻을 것을 내놓기 싫어하는 손실회피 경향을 가진 인간의 공동체 질서를 바로잡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누구든 무지의 베일veil of ignorance을 전제로 정책을 입안하고 법률을 입안하며 판결을 내리기 어렵다. 삼권 분립은 이상일 뿐이며 가정과 직장 혹은 어떤 조직이든 자기 이익에 충실한 욕망을 제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어쩌면 인간의 속성에 해당하는 편견은 순기능과 역기능을 함께 지닌다. 생존을 위해 위험을 외피하고 안전을 담보하기 위한 진화생물학적 습성이 기인했을 수도 있다는 온갖 실험과 본능에 절망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배우고 익히며 세상을 살아가고 한발씩 앞으로 나아가며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왔다고 믿고 있지 않은가. 자유, 평화, 평등 같은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인류가 흘린 피와 땀을 떠올리면 폭력과 절멸 전 단계에 해당하는 편견과의 싸움이 왜 현재진행형인지 깨닫게 된다. 나 혹은 우리와 달라 품게되는 적개심 그로 인한 회피와 단절은 일상에서도 반복된다. 그것이 개인의 평온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된다면 나쁘지 않은 방법일 수 있으나 타인과 사회를 향한 태도, 즉 말과 행동으로 표현되는 순간 ‘문제’가 된다. 주변을 돌아보라, 정답을 말하는 사람과 나만 옳은 사람과 해봐서 안다는 사람과 누구보다 확신을 가진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편견의 반대편에 놓은 소중한 가치가 관용이다. 관용적 태도를 갖기 위해서는 ‘공감 능력’이 필요하다. 저자는 ‘다른 사람을 파악하는 능력’, ‘사회적 지능’, ‘사회적 감수성’이라고 할 수도 있고, 풍부한 의미가 담긴 독일어 단어를 빌리자면 ‘인간 이해Menschenkenntnis’라고 할 수도 있는 태도가 바로 관용이라고 설명한다. 개인의 심리 역동을 살피고 역사, 사회문화적 요소들을 점검하며 편견과 차별의 뿌리와 작동방식은 물론 그 해결방법까지 제안하는 과정은 놀랍다.

개인은 물론 사회 공동체가 발전하는 과정에는 이렇게 꾸준하고 진지한 고민이 디딤돌 역할을 한다. 어느 방향을 위해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근본적인 문제를 다루고 논의하는 시간이 절실하다. 대증요법으로 던지는 정치인들의 생각없는 말 한마디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함께 읽고 생각하며 신중하게 토론하는 과정에서 편견을 바로잡고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건 불가능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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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에 관한 생각 - 우리의 행동을 지배하는 생각의 반란!
대니얼 카너먼 지음, 이창신 옮김 / 김영사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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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다. 그보다 감정이 앞서는 동물이기도 하다. 통상 좌뇌는 물리적이고 이성적 판단에 관여하고 우뇌는 창의적 사고의 뇌로 직관적 판단에 관여한다고 알려져 있다. 신피질과 변연계는 그 기능과 역할이 각각을 담당하고 있으나 그 역할과 기능은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유전 형질, 교육환경, 성장 과정이 생각과 감정 통제 시스템에 영향을 미친다. 시간과 공간마다 다른 요소가 작동하니 한 인간의 생각과 감정이 고정되어 있을 수 없다. 판단과 선택도 계속 변한다. 그러니 “어떻게 사람이 변하니?” 따위의 영화 대사는 설 자리가 없다.

대개 우리는 누구보다 자기 자신을 가장 잘 이해한다고 착각한다. 타인보다 자신을 잘 알고 있다는 생각은 자아 정체성이 사회적 관계, 정성적 평가, 객관적 능력의 종합적 판단과 차이가 있다는 의미일까.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냐고 울부짖던 리어왕이 아니라도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고 알에서 껍질을 깨고 다른 세상으로 나아가고 싶었던 싱클레어와 같은 욕망은 없어도 우리는 스스로 자기 인식의 오해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운명이다.

그 오해와 변명에 대한 고찰이 심리학의 연구 영역일 것이다. 실험심리학의 아버지 분트 이후 인간의 마음이 증명될 수 있는 과학적 진리의 영역에 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수많은 사람의 일관된 오류, 불합리한 선택, 비이성적 행동은 우리가 자기 자신을 이해하려는 눈물겨운 노력이다. 끝내 우리는 우리를 이해할 수 있을까.

고전 경제학에 마침표를 찍고 행동경제학의 도래를 알린 사건이 벌어졌다. 2002년 심리학자 대니얼 카너먼이 노벨 경제학을 받으며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존재로서 경제행위를 하는 인간은 없다는 사실이 증명되는 듯했다. 부동산 가격이 오르니 ‘영끌’했던 사람들은 ‘영털’이 되었다. 집값이 바닥을 찍어도 매수하지 않는 실수요자들은 곧 후회와 아쉬움의 술잔을 기울이리라. 그러나 노여워하거나 슬퍼할 필요가 없다. 인간의 생각은 원래 그렇다. 디폴트 값이니 개인의 실수나 잘못이 아니라는 위로는 가능하다.

한발 더 나아가 『넛지』의 저자인 리처드 탈러는 오바마 행정부의 경제 자문이었다. 현실 정치에 행동경제학이 뛰어든 사례다. 나심 탈레브는 『블랙 스완』으로 인간의 속성과 경제 체제를 까발렸다. 누구나 멍청하다. 똑똑한 ‘척’하는 사람의 설명과 판단을 좇는 순간 망한다. “누구나 나름대로 계획이 있다. 링에 올라와 처맞기 전까지는.”이라는 타이슨의 다소 과격한 조롱이 미래를 예측하고 정답을 외치는 사람들에게 울리는 경종은 아니었을까.

우리 머릿속에는,

* 시스템 1 : 빠르게 생각하고 직관적인 반응체계

* 시스템 2 : 느리게 생각하고 고심하면서 시스템 1을 감시하고 제한된 자원으로 최대한 통제력 유지

이렇게 두 개의 시스템이 들어 있다. 대개 시스템 1은 본능에 가깝다. 생존을 위해 움직인다. 생각보다 혀가 먼저 움직이고 눈이 손보다 빠른 이유다. 대개 변연계가 담당하는 영역이리라. 시스템 2는 논리와 이성의 영역이다. 가장 마지막에 진화한 신피질에 해당하는 영역이다. 대니얼 카너먼은 「불확실한 상황에서의 판단Judgement Under Uncertainty : 어림짐작과 편향Heuristics and Bias」에서 기나긴 인간의 착각에 마침표를 찍었다. 「선택, 가치, 틀짜기Choices, Values, and Frames」와 함께 이 책의 부록으로 실린 두 편의 기념비적 논문은 숱한 논란의 출발이 되었고 경제학뿐만 아니라 인간 존재에 대한 성찰을 촉발했다. 우리는 ‘이콘Econ : 합리적 이론의 토대에 발을 딛고 사는 허구의 존재’일까 아니면 ‘인간Human : 실제 세계에서 행동하는 비이성적 존재’일까.

대체로 ‘기억하는 자아 : 삶의 점수를 기록하고 선택하는 자아’가 ‘경험하는 자아 : 실제로 살아가는 자아’를 압도한다. 인간의 뇌에서 벌어지는 숱한 오류가 시스템 1과 시스템 2, 즉 이콘과 휴먼의 충돌과 어색한 화해 때문이라면 인간의 행복과 불행은 대개 기억하는 자아와 경험하는 자아의 간극 때문이다. 매 순간 선택의 순간이 온다. 어림짐작과 편향은 일상이 되어 한 인간의 정체성이 되고 성향과 성격을 좌우한다. 이 책은 그 모든 순간, 그 모든 자유 의지를 회의적 시선으로 바라본다. 당신의 판단, 당신의 결정, 당신의 선택은 과연 괜찮으냐고.

지식 생산자 사이에 유통되는 논문이 아니라 대중적 글쓰기가 어떠해야 하는지 보여주는 좋은 사례에 해당하는 책이기도 하다. 어쩌면 부록에 해당하는 짧은 논문 두 편의 해설에 해당하는 본문 670쪽은 너무 방대해 보인다. 하지만 충분한 사례와 설명, 관련 논문과 저작들이 고루 소개되어 읽는 즐거움은 배가 된다. 경제학의 프레임을 뒤엎은 심리학자의 실험과 설명이 언제나 그 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생각의 방향과 깊이를 바로잡아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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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의 과학 - 혐오 범죄를 일으키는 인간 행동의 어두운 비밀
매슈 윌리엄스 지음, 노태복 옮김 / 반니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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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과 사회학에 관한 대다수 연구가 ‘평균적인’ 백인 중산층 소년, 또는 더 일반적으로 서양의Western, 교육을 받은 Educated, 산업화된Industrialized, 부유하고Rich, 민주적인Democratic 사회―WEIRD 사회―의 구성원들이 인간 행동에 관한 과학 연구의 주된 피실험자들이다. 그래서 인간 행동에 관한 지식의 대부분은 세계의 모든 사람들에게 일반적으로 적용할 수 없고 WEIRD 사회의 구성원들만을 대변한다는 주장이 나왔다.(J. Heinrich er al., ‘The Weirdest People in the World?’, Behavioral and Brain Sciences 33(2010), 61-83.) 실험심리학의 아버지 분트부터 프로이트를 거쳐 최근의 다양한 심리실험에 이르기까지 대상은 주로 WEIRD가 아닐까. 단순한 의심을 넘어 대체로 우리 사회의 주류(술 좋아하는 아재들?)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한국 사회의 기준이 될 수는 없지 않을까. 586으로 과대 상징되는 50대가 그렇다.(신진욱은 『그런 세대는 없다』에서 이 문제를 적확하게 짚어낸다. 1~2%에 해당하는 80년대 대졸 엘리트 5060세대와 2030 세대와의 갈등의 본질일 수 없다는 지적이 그것이다.) 혐오, 불평등, 공정과 정의에 대한 숱한 논쟁과 주관적이고 감정적 해석들이 대체로 그러하다. 우리 사회의 갈등 구조가 단순히 성별과 세대로 표현될 수는 없다. 경제적 세습을 넘어 문화, 상징자본의 격차, 세대 내 교육 환경, 비정규직, 노인 빈곤, 에너지와 환경 문제 등 심각한 사회 문제에 대한 인식과 태도가 ‘혐오’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게 아닐까. 

범죄학 교수 매슈 윌리엄스는 대학 졸업 즈음에 게이 바 앞에서 혐오 폭행을 당한 경험으로 이 책을 시작한다. 사람의 정체성에 대한 공격은 깊고 고통스런 상처를 남긴다. 선택할 수 없는 모든 생래적 조건에 대한 비난과 폭력은 자기검열과 자기부정으로 이어질 만큼 위험하다. 여자, 아재, 노인, 성 소수자, 인종, 장애, 지역 등 거의 모든 차이가 차별로 이어지고 혐오로 표현되는 과정은 ‘왜?’라는 본질적 의문을 남긴다. 인간이 그런 존재로 태어나는지, 사회화 과정에 의한 편견일 뿐인지 그 논쟁은 여전히 결론을 내지 못하고 있는 상태다. 우리가 가진 혐오 능력은 모든 인간에게 공통되는 특질이다. 진화를 통해 얻은 신체적, 심리적 구조가 그러하다. 다만 이 속성이 촉진되는 요소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게 저자의 관심사다. 어느 사회, 어느 시기에 혐오에 노출되어 편견이 혐오 범죄로 이어지는지 살피는 과정은 내 안의 나와 또 다른 나를 이해하는 일과 다름없다. 

혐오에 대한 범죄학 지식의 상당수는 편견에 관한 연구에서 나온다. 편견은 고정관념, 즉 조잡한 일반화와 범주 나누기를 바탕으로 한 개인 또는 사람들의 집단에 부여된 특징을 먹고 자란다. 편견은 어떤 이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와 감정이 그 사람이 속한 집단을 바탕으로 결정될 때 생겨난다. 그러므로 편견은 심리학 용어로 외집단(‘그들’)과 내집단(‘우리’)에 초점을 맞춘다. - 29쪽

저자 스스로 경험한 혐오에 대한 물리적 폭력만큼 보편적인 혐오의 형태는 외면과 냉소와 침묵이다. 구별 짓기가 생존을 위한 유전적 본능과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은 이 책에서도 여러 차례 언급하며 실험결과를 통해 입증된 태도를 설명한다. 그러나 그것이 맹목적 내집단에 대한 충성과 우월감으로 자리 잡는 순간 편견과 혐오가 무럭무럭 자란다. 성별, 세대, 지역, 종교, 인종 등 그 분화 과정과 미묘한 차이에 따른 심리적 거리는 분류나 증명이 불가능하다. 지극히 개별적인 데다 미묘하고 복잡한 요소가 복합적으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차이와 다름의 다른 표현인 편견과 혐오는 어쩌면 인간의 본능에 영역에 속한다는 한계를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옥시토신은 혐오 범죄 발생에 관여할지 모르는데, 특히 가해자가 그걸 생성해낼 가능성이 높을 때(가령, 어린 아이를 돌보는 부모일 때) 그리고 이질적 외집단(가령, 다른 인종)한테서 위협을 느낄 때 그렇다.”(181쪽)라는 지적이 이를 증명한다. 호르몬에 내재된 생존 본능에서 촉발된 혐오가 정당화될 수 있을까. 태어난 그대로, 본능적 자연인으로 세상을 사는 사람은 없다. 혐오의 과학은 사실 부단한 노력으로 이룰 수 있는 문명사회에 대한 희망의 메시지다. 

야만의 시대를 지나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환경의 토대가 마련된 민주주의는 차별을 넘어 자유와 평등, 정의와 진리, 공정과 상식을 추구하려 애쓴다. 저마다의 옳고 그름이 분노와 증오와 차별과 폭력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혐오가 벌어지는 실세 상황을 통해 뇌에서 벌어지는 현상뿐 아니라 개인과 집단의 혐오를 면밀하게 들여다본다. 그런 다음 ‘촉진제’에 집중한다. 무엇이 혐오 폭력을 일으키는 촉진제 역할을 하는가. 왜 일부만 그 폭력을 실행에 옮기는가. 이는 물리적 혐오와 폭력에서 더 나아가 대한민국의 댓글로 빚어지는 키보드 워리어들의 혐오문화를 성찰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나는 맞고 너는 틀릴까. 

저자가 제시하는 혐오를 멈추게 할 해결책 일곱 가지가 추상적으로 들린다. 핵심은 ‘관심’이다 의식적 노력 없이 변화는 불가능하다. 혐오는 고정관념과 편견에서 싹튼다. 관습적 사고 습관적 행동이 무의식적 혐오에 동조하는 방법이 아닌가. 생각하지 않고 사는 삶은 얼마나 편안하고 안전한가. 물이 흐르는 대로 따라갈 줄 몰라서 매슈 윌리엄스가 평생 혐오 범죄에 매달렸을까. 불편과 불안은 타인이 아니라 내 안의 무엇이 만든다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 자주 잊고 산다. 

혐오를 멈추게 할 일곱단계

1. 가짜 경보를 알아차려야 한다.

2. 우리와 다른 이들에 대한 섣부른 판단에 의문을 던져야 한다.

3. 우리와 다른 사람들이 접촉하는 것을 꺼려서는 안 된다. 

4. 시간을 내서 ‘다른 사람’의 처지가 되어보아야 한다. 

5. 분열을 조장하는 사건이 우리를 노리지 못하게 해야 한다. 

6. 필터 버블을 터뜨려야 한다.

7. 우리 모두는 혐오 사건에 가장 먼저 반응을 보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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