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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 질서 - 긴축이 만든 불평등의 역사
클라라 E. 마테이 지음, 임경은 옮김, 홍기훈 감수 / 21세기북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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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여우가 말했다.

“이리 와 나하고 놀자. 난 정말로 슬프단다.” 어린 왕자가 제안했다.

“난 너하고 놀 수가 없어. 난 길들여지지 않았거든.” 여우가 말했다.

“길들인다는 게 뭐지?”

“그건 ‘관계를 맺는다’는 뜻이야.” 여우가 말했다.

“넌 아직까지 세상에 다른 수많은 아이들과 다를 게 없는 한 아이에 지나지 않아. 그래서 난 네가 필요 없어. 너도 물론 내가 필요 없겠지. 나도 세상에 흔한 여러 여우들과 다를 게 없는 한 여우에 불과하니까. 그러나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우린 서로 필요하게 될 거야. 너는 나한테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것이 될 테니. 나도 너한테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것이 될 거구......”

너무 자주 보면 감동도 의미도 사라진다. 어린 왕자의 여우의 대화가 그렇다. 관계를 맺는다는 건 서로 길들이는 것일까. 누가 누구를 길들이고 길들여지는 걸까. 현실에는 소혹성 B612호에 살던 어린 왕자 같은 사람이 거의 없다. 반복해서 말해도 듣지 않는 귀 없는 사람이나 상대방의 기준과 무관하게 선을 넘는 사람들은 대개 부모, 형제, 연인, 친구처럼 사랑과 우정과 친밀감을 내세운다. 그건 길들이고 길들여지는 자발성이 아니라 강요와 순응이 아닐까.

비록 사람은 아니지만 어떤 제도와 규정도 다르지 않다. 시대와 상황과 선택의 결과일 뿐 언제든 고치고 바꿀 수 있다는 생각보다 적응과 생존에 초점이 맞춰진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그렇고 자유와 평등이 그러하며 공정과 정의가 그러하다. 질서를 잘 지키는 사람, 법 없이도 살 사람은 피해를 보는 세상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러나 그 질서와 법은 누가 왜 만들었을까. 변하지 않는 진리가 아니라 합의된 선택이라면 비판적 관점을 유지하며 개선의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자본의 질서에 순응하는 삶이 아니라 그 질서의 모순과 문제를 들여다보는 노력이 필요하다.

클라라 E. 마테이는 ‘긴축’이라는 프리즘으로 자본주의를 톺아본다. 자본주의 체제가 공고해진 20세기 이후 경제의 흐름을 연구한 결과물로 그 깊이와 넓이가 충분하며 관점과 기분이 명확하다. 지나간 경제 상황에 대한 평가와 해석은 지극히 주관적일 수 있으나 원인을 진단하고 결과를 살피는 일은 현재와 미래를 위한 필수 코스다. 주로 유럽, 특히 영국과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1차 세계대전 이후의 상황을 살피고 있으나 정부의 개입 여부, 재정 건전성, 경제 민주화 등 신자유주의 이후 세계 경제의 방향과 목표를 고민하는 데 매우 중요한 지식과 정보를 제공한다. 저자의 고민과 연구가 자본 질서를 개선하는 데 중요한 역할과 의미를 찾을 수 있으려면 각국의 경제 상황과 정책에 대한 방향을 먼저 점검해야 한다. 대한민국의 경제는 안녕하신지, 그 목표와 지향점은 합의할 수 있는지, 정부의 정책 방향에 동의할 수 있는지, 특히 ‘긴축 재정’에 대한 철학과 현실은 조화를 이루고 있는지 다 같이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은 충분히 의미 있는 논쟁을 촉발할 수 있다.

자본주의의 두 기둥은 ‘사유재산’과 ‘임금 관계’다. 생산 수단과 노동력이라는 거대한 축을 이해하지 못하면 일상에서 벌어지는 고민의 원인을 들여다보지 못한다. 이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설명한다. 1부 전쟁이 만든 불평등의 역사는 1차 세계대전 후 1918~1920년 영국과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대다수 노동자, 즉 국민들의 삶을 들여다본다. 불평등이 어떻게 공고해졌는지, 전쟁 이후 새로운 질서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살펴볼 수 있다. 2부에서는 긴축의 탄생과 배신을 설명한다. 경제 전문가들의 생각과 긴축 설계도가 어떻게 현실에 적용되었는지 설명한다. 긴축의 3가지 지표인 ‘노동 분배율, 착취율, 이윤율’을 통해 긴축의 작동 방식을 들여다본다.

언제나 중요한 건 우리의 삶이다. 자본 질서는 다수의 권리를 박탈하는 경제이론이다. 왜 사람들은 반민주적이고 독재적인 경제 질서와 제도에 순응하는가. 다수는 소수의 이익에 복무하는가. 낙수 효과? 전문가의 지식과 정보? 경제 성장에 대한 신화? 그 이유가 무엇이든 ‘긴축으로 이익을 보는 자가 누구인가?’라고 묻는 저자의 서문에 답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그 답은 개별 독자의 몫은 아니지만, 문제를 인식하고 해결하려는 의지가 없으면 ‘경제의 비정치화’라는 긴축의 슬로건을 내면화하게 된다. 인류는 아주 오랫동안 “자본의 노예로부터 노동의 해방으로” 나아가기 위해 지난한 투쟁을 반복했다. 정치적 이념과 무관하게 경제 논리 앞에선 모두가 냉정해지고 이해관계를 따지는 일은 본능에 가깝다. 그러나 목소리 높여 자기 이익에 반하는 이율배반적 생각과 태도를 주장하는 놀랍기만 하다. 인터넷 게시판에, 부동산 카페에, 다양한 경제학자들의 칼럼에 반영된 기준과 목표를 통합할 수는 없다. 그러나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한 선택과 결정인지에 대해서는 ‘쿠이보노’를 살펴야하지 않을까.

계급 갈등과 경제 지배는 최상위층의 개인이 이윤 추구라는 더 큰 경제적 미덕을 발휘해 모두를 이롭게 한다는, 이른바 조화를 탈바꿈한다. 이런 식으로 경제이론은 수직적 생산관계를 비판할 여지를 허용하지 않고, 자본주의를 정당화하며, 대중에게 순응하라고 설득한다. - 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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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와 빈곤 - 산업 불황의 원인과, 빈부격차에 대한 탐구와 해결책 현대지성 클래식 26
헨리 조지 지음, 이종인 옮김 / 현대지성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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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보다 앞선 다른 시대에 유토피아를 동경하는 사람들이 없었다면 인간은 아직도 동굴 속의 비참하고 벌거벗은 상태에서 살고 있을 것이다.” _아나톨 프랑스

뉴기니에 사는 원주민의 질문이 제레드 다이아몬드에게 『총, 균, 쇠』를 쓰게 했듯, 전신 뉴스 권리를 얻고자 뉴욕 출장을 갔던 언론인 헨리 조지는 샌프란시스코로 돌아와 진보와 빈곤이 어깨동무를 하는 이유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정치경제학이 답을 주지 못하는 질문에 스스로 답을 찾아나가는 과정이 바로 위대한 저작 『진보와 빈곤』을 탄생시켰다. 학문적 호기심이나 학자적 양심이 아니라 오롯이 인간과 사회에 대한 답답함과 가슴에서 우러나온 질문으로 시작되는 이 책은 우리가 반드시 읽어야 할 현대 고전 중 하나다.

제1권 2장에서 밝히고 있듯이 “나는 경제학 교과서를 쓰려는 게 아니고, 단지 어떤 중대한 사회적 문제를 지배하는 법칙을 찾아내려고 한다.” 중대한 문제는 경제성장을 거듭하는 사회의 가난이고, 법칙은 가난을 물리치기 위한 해결책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저자는 자본주의 내부의 심각한 문제인 빈부 격차의 심화와 불평등을 해결하기 위한 고민을 경제학자가 아닌 일반 시민들을 향해 털어놓는다. 무엇이 문제인가. 왜 그러한가. 그렇다면 해결책은 무엇일까. 이 책은 그에 답한다.

임금은 자본이 아니라 상품으로부터 나온다는 생각은 헨리 조지의 주장은 상식이다. 이 말이 상식이 되어 노동자의 단결권, 단체교섭권, 단체행동권이 헌법에 기초한 정당한 권리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 스스로도 노조에 대하 부정적 시선을 거두지 않는 타당한 이유를 알 수 없다. 그 운영에 문제가 있다면 개선할 일이다. 말썽부리는 자식을 죽이는 부모는 없다. 잘 가르쳐 사회의 일원으로 건강한 시민으로 성장하도록 온 사회가 돕는다. 그래서 한 아이는 온 마을이 기른다는 말이 있다. 절대 다수인 노동자들의 권리를 보장하고 인간다운 삶을 지키기 위해 제정한 헌법과 법률을 무시하고 노조 자체를 불순한 집단으로 매도하거나 그 활동을 제한하는 말과 행동이야말로 노동 자체를 존중하지 않는 천박한 인식이다. 그들은, 아니 노동자인 우리는 자본가의 자본으로부터 나온 임금을 받는 게 아니라, 스스로 힘써 만든 상품과 서비스에서 창출한 부의 일부에서 나온 당연한 권리를 갖는 것이다. 임금은 자본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노동에 의해 생산된다.

직업과 상관없이 누군가에게 고용되어 시간을 팔아 돈을 사는 모든 임금 노동자는 일에 대한 대가, 즉 월급이나 연봉이 어디에서 나온 것인지 직시할 필요가 있다. 또한 그것이 합당한가를 살핀다.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겪는 상대적 박탈감과 빈곤감의 원인은 무엇일까. 엄청난 부를 거머쥔 사람들을 향한 태도와 생각은 어떤가. 선동적인 계급 투쟁의 시대를 거쳐 자본주의가 숨 쉬는 공기처럼 편안해지고 민주주의가 보편적 가치가 된 세상에서도 가난과 빈곤은 사라지지 않는다. 식량과 물품이 부족해서 여전히 굶어죽는 사람이 생기고 일가족이 투신하는 상황이 벌어지는 걸까.

헨리 조지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토지 공유제를 주장한다. 세금 또한 토지세 하나면 충분한 이유를 설명한다. 사실 토지 공유제는 새로운 사상이 아니다. 멀리 플라톤의 『국가』에서 오비디우스의 황금시대를 거쳐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에 이르기까지 수천 년 동안 이어온 생각이다. “토지 사유제는 비교적 최근에 생겨난 것으로서 왕권신수설만큼이나 인위적이고 근거 없는 사상이다.”(384쪽)라는 말은 “역사적으로나 윤리적으로 볼 때, 개인의 소유로 둔갑한 토지는 일종의 장물이다.”라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이미 사적 소유가 허용된지 오래 된 토지를 공유지로 다시 환원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저자는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토지 단일세를 제안한다. 그러면 형식상 토지 소유권은 현재 그대로 유지되도 상관없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땅 주인으로부터 소유권을 빼앗는 일도 없고, 사람들이 소유할 수 있는 땅의 한도에 제약을 가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국가가 세금의 명목으로 지대를 가져가기 때문에, 토지는 누구 명의로 되어 있든 어떤 방식으로 분할되어 있든 실제로는 공동 재산이 될 것이고,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그 소유권의 혜택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라고 제안한다.

600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지만 헨리 조지의 핵심 사상은 명쾌하고 단순하다. 과학기술과 문명발달이 계속되는 현대사회에서도 왜 가난은 사라지지 않는지, 빈곤은 역사의 진보에서 필연적인지에 대한 의문에 대해 토지 공개념과 토지 단일세를 주장하며 개인의 좋은 삶과 공동체의 보편적 가치를 종교적 관점에서 살피며 책을 맺는다. 이후 애덤 스미스-데이비드 리카도-토머스 맬서스-J.S. 밀 등으로 이어지는 고전경제학의 대가들에 맞선 마르크스의 등장으로 재야 경제학자 헨리 조지의 아이디어는 외면받았지만 진보와 빈곤 사이에서 고민하는 후세들에게 여전히 영감을 제공한다. 치열한 경쟁과 끝없는 욕망 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과 비극이 인간사의 숙명일까. 여전히 가난하고 대책없는 삶은 오롯이 개인의 책임일까. 능력주의에 대한 반성, 자유와 평등에 대한 해석, 노동과 임금에 대한 생각이 깊어질 때마다 이미, 아주 오래 전부터 비슷한 고민들의 흔적을 뒤적인다.

주기적으로 부동산 광풍이 불때마다 대통령이 바뀌고 사람들은 삶의 목적과 방법을 바꾸고 아이들에게 무엇이 중요한지 가르치지 못한다. 토지 공개념이 등장할 때마다 소환되는 헨리 조지는 공산주의자도, 빨갱이도 아닌 독실한 기독교인이다. 성실하게 열심히 살았으나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한 가장으로서 너무나 당연한 질문이 생겼을 뿐이다. 도시는 매일 발전하고 누군가는 아주 잘 사는데 어떤 사람들은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이렇게 가난할까. 뉴욕의 마천루와 할렘 가를 목격한 헨리 조지는 엄청난 빈부격차의 원인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고전경제학에서 일관되게 주장하는 지대, 이자, 임금의 관계와 그 설명에 문제는 없을까. 현실은 이론을 뒷받침하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현실을 이해하고 개선하기 위한 이론이 등장하기 어려울 뿐이다.

미국의 인쇄소 식자공이었던 아일랜드 사람 헨리 조지의 최종 학력은 중학교 중퇴다. 가방끈이 한 인간의 면면을 말해주지 못한다는 걸 알면서도 우리는 출신학교와 학위, 직업과 이력으로 한 인간의 삶을 평가하기 일쑤다. 그가 걸어 온 길과 흔적을 무시할 수 없으나 대개 한 사람의 본질과 내면을 들여다보는 데는 한계가 있다. 학력이나 직업을 떠올리기 어려운 헨리 조지의 글은 깊은 울림을 준다. 그것은 진보와 빈곤에 관한 열정적 탐구심, 학문적 호기심, 주제에 천착하는 끈기에 문학적 감수성과 인간에 대한 연민이 보태졌기 때문일 것이다. 어렵지 않게 설명하면서도 깊이와 넓이를 확보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기존의 이론을 살피고 주장의 근거를 제시하며 차근차근 설명하는 노력이 많은 사람들을 설득하는 힘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공부‘도’ 잘한 사람이 좋은 삶을 살 가능성이 높고, 그 다음은 공부‘는’ 못한 사람이다. 공부‘도’ 못한 사람이 세 번째라면, 최악은 공부‘만’ 잘한 사람이다. 공부도 못한 사람이 아니라 공부만 잘한 사람들이 대개 세상을 망치고 타인에게 더 큰 해악을 끼치는 경우가 많다. 스스로 궁구하여 질문하고 탐구하는 사람의 자유로운 생각과 한계없는 상상력이 인류에게 더 큰 꿈과 희망을 준다고 믿는다. 사유재산 자체를 부정한 아나키스트 프루동의 급진적이고 자유로운 생각이 내겐 더 매력적이지만 실현 가능성 측면에서 헨리 조지의 주장이 조금 더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말년의 톨스토이의 삶을 생각하면 지식인의 태도와 실천이 어떠해야 하는지 알게 된다. 여러 칼럼에서 톨스토이가 수없이 인용했던 『진보와 빈곤』은 그의 생을 마무리하는 데 깊은 인상을 남겼으며, 대표작 『부활』에서도 네흘류도프의 입을 통해 이 책의 내용을 언급하며 개인 영지를 모두 농부들에게 나눠주며 자신의 삶을 부활하는 발판으로 삼는 장면이 나온다. 무언가 바꿀 수 없다는 생각을 바꾸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이 책의 미덕은 노동가치와 잉여가치, 차액지대와 절대지대의 차이를 몰라도 괜찮다는 점이다. 경제학 용어와 이론과 통계 수치가 아니라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의 이치를 알기 쉽게 설명하며 보편적 상식을 보여준다. 우리가 살아가는 방법, 세상이 나아갈 방향은 정답이 없다. 어느 시대에나 현재를 사는 사람들의 공통된 아이디어와 합의에 의해 결정된다. 지금, 여기에서 오늘을 사는 우리들의 제도와 법률, 경제 체제는 언제든 바꿀 수 있다. 바뀔 가능성을 내포한 미래를 준비하는 모든 사람이 ‘왜’라는 질문을 하지 않는다면 주어진 조건에 충실한 노예와 다름 없다. 생각은 다른 곳을 보게 한다. 질문에 답하는 대신 감정적 반응을 보이거나 침묵하고 외면하며 자신의 이익만 돌보는 사람들이 더 많다는 걸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켤코 옳지 않다는 것도, 고쳐 나가야 한다는 사실 또한 더 잘 알고 있다고 믿는다. 토지 공유제, 지대 수익의 국가 환수, 불로소득의 근절이 철지난 유토피아의 꿈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함께 꿈을 꾸면 현실이 된다고 더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면 그것이 곧 진짜 현실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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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치와 자본주의
베르너 좀바르트 지음, 이상률 옮김 / 문예출판사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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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과 사치품을 구별해야 할 필요는 없다. 밴드왜건 효과의 극대화가 유행을 만들고 ‘인싸’와 ‘아싸’를 구별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스놉 효과를 노리는 사람들만 명품을 소비하는 건 아니다. 고가의 물건은 나름의 효용 때문에 그만한 값을 지불하고 구매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믿지 않으면 팔리지 않는다. 그것이 타인의 부러움과 시샘이든 자기 만족과 인쟁 투쟁이든.

자유와 평등이 보장된 민주주의 사회에서 ‘사치’는 왕과 귀족의 전유물이었다는 철지난 유행가 같은 소리에 한번쯤 귀 기울여보는 건 어떤가. 1913년, 베르너 좀바르트는 사치가 자본주의를 촉발했다는 신박한 주장을 내 놓는다. 인간의 허영심과 상위 계급에 대한 모방이 사치를 조장했고 그것이 서민들에게 유행하면서 자본주의에 활력을 불어넣었다는 주장은 초기 자본주의 모델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참고가 될 만하다. 장에 가는 어머니의 에코백과 영부인의 명품백은 장소와 상황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로 해석된다. 때로는 마트에 들고가는 명품백과 대통령 전용기에 오르는 에코백이 자리를 바꾼다. 계급과 계층에 따른 소비와 자본주의적 욕망에 시비를 걸 사람은 많지 않다. 아니, 우리 시대의 자본주의는 이를 흠모하며 삶의 목적과 보람이 되기도 한다. 100년도 지난 베르너 좀바르트의 사치와 자본주의가 새롭게 읽히는 건 숨쉬듯 편안한 자본주의의 출발과 중세 계급 사회의 사치가가 근대사회로 전환되면서 어떻게 일반적인 생활방식으로 자리잡게 되었는지 살펴보는 생각의 실마리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중세와 근대의 강은 넓고도 깊다. 자본주의가 확고하게 자리잡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고 우리가 아는 자본주의는 시대와 국가에 따라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변해왔다. 그러나 인간의 욕망과 자본주의의 메커니즘은 본질적으로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궁정에서 출발한 사치는 시민의 부와 새로운 귀족, 즉 신흥자본가의 등장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저자는 16~18세기를 집중적으로 조망한다. 대도시의 발생은 사랑을 세속화했고 고급 창녀의 등장 배경이 되었다. 1~3장은 4~5장을 위한 사적 전개 과정이다. 사치가 어떻게 자리잡게 되었으며 사치에서 자본주의가 배태된 배경을 추적한다. 그러면 이 책의 제목이 된 ‘사치’란 무엇일까.

“사치란 필요한 것을 넘어서는 모든 소비이다. 이것은 분명히 상대적인 정의이기 때문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 때에만 명료한 내용을 지닌다. 이것을 확실하게 하는 데에는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우선 그것을 주관적으로 어떤 가치판단(윤리적인 것이든, 심미적인 것이든, 또는 그 어떤 조류의 것이든지 간에)에 근거할 수 있다. 아니면 그 필요한 것을 잴 수 있는 어떤 객관적인 척도를 찾으려고 시도할 수 있다.” 좀 당황스런 기준이지만 주관적 가치판단과 객관적인 척도를 살피자는 주장이다. 지극히 당연한 말이지만 ‘필요한 것을 넘어서는 모든 소비’라는 간단한 정의도 문제다. ‘필요’의 기준과 수준이 다르다. 사람들이 입버릇처럼 말하는 ‘상식’이 서로 다르듯, 필요는 ‘욕망’에 근거하기 때문이다. 베르너 좀바르트는 이 기준을 저 멀리 왕과 귀족에서, 가깝게는 도시생활에서 찾는다. 순수한 사치산업과 혼합산업, 사치소비의 혁명적인 힘으로 마무리되는 일련의 과정은 근대 자본주의를 추동하는 힘으로서 사치의 역할과 힘을 보여준다.

1899년 소스타인 베블런은 『유한 계급론』을 통해 자본주의가 작동하는 방식에 새로운 안목을 보탰다. 개인적으로 매우 인상깊었던 관점 중의 하나다. 주류 경제학자들이 자본주의를 이해하고 해석하는 방식은 정치가 배제된 형태의 통계와 결과론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미 벌어진 현상에 대한 해석은 현실을 이해하고 다가올 미래를 예측하는 데 생각보다 큰 도움을 주지 못한다. 만약 그랬다면 노벨 경제학상 수장자를 대통령이나 경제관료로 활용해야 하지 않을까. 여전히, 경제학 전공자들이 실물 경제를 움직이는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으나 살림살이가 나아지는 경우는 드물고 불황과 공황을 예측할 수도 없었다. 정치와 심리가 경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고 각종 지표들로 무장한 예측들이 난무하지만 ‘인간’의 삶을 중심으로 생활밀착형 경제학을 들고 나온 사람은 많지 않다. 아마르티아 센이 불평등과 빈곤에 대해 깊이 고민했으나 ‘자유로서의 발전’은 여전히 요원하다.

이제 다시, 아니 언제나 그러하듯 왜곡된 자본과 개인의 이기적 욕망은 비정상적인 괴물을 양산해왔다. 합리적 선택과 이성적 판단으로 작동하지 않는 경제는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일들이 난무한다. 오래 전 베르너 좀바르트도 자본주의의 ‘현재’를 고민하기 위해 통시적 관점으로 과거를 돌아보며 미래를 전망했으리라. 현재는 과거의 결과다. 도미노처럼 쓰러지는 시간의 연속성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니 우리는 현재의 결과로서 미래를 맞이할 뿐이다. 지금, 여기서 우리는 어떤 선택과 행동으로 미래를 만들어가고 있는지 알 수 없다. 그것이 개인의 노력과 한계라고 해도 흐름을 짚어내고 전체를 조망하는 안목이 필요하지 않은 건 아니지 않은가.

이렇게 해서 그 자신이 ―이미 우리가 본 바와 같이―비합법적인 사랑의 합법적인 자식인 사치가 자본주의를 낳은 것이다. - 28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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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하준의 경제학 레시피 - 마늘에서 초콜릿까지 18가지 재료로 요리한 경제 이야기
장하준 지음, 김희정 옮김 / 부키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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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지붕 혹은 텐트 천정에 쏟아지는 빗소리는 후라이팬 위에 기름이 튀는 소리를 닮았을까. 장마철 파전에 막걸리조차 건강을 걱정해야 할 것 같다. WHO가 인공감미료 아스파탐을 발암가능 물질로 분류한다는 소식이 전해진다. 치킨에 맥주든, 와인에 치즈든 “인생은 나에게 술 한잔 사주지 않았다”라는 원망과 분노가 전해지는 정호승의 시가 떠올랐다. 시인은 ‘술 한잔’은 사랑의 비유적 표현이라고 했으나 팍팍한 세상과 황당한 뉴스가 입맛을 쓰게 한다. 사는 일이 모두 먹고사니즘을 향한 맹렬한 전쟁이라면 음식 그 자체가 ‘경제’의 바탕일 것이다.

식탁 위의 세계사부터 장하준의 경제학 레시피까지 인간의 삶은 음식과 뗄 수 없는 활동이다. 생존을 위한 기본조건이며 생물학적 욕망의 근원인 식욕은 거의 모든 욕망의 근원이다. 가히 마늘의 민족이라 할만큼 전세계 어느 국가와도 비교불가인 한국인의 마늘 소비량. 그 알싸하고 냄새나는 마늘 이야기와 한국인의 식습관으로 시작하는 장하준의 경제학 레시피는 맛을 표현하기 어렵다. 달콤 쌉싸름하다가 쓰고 떫은 맛을 느끼게 하기도 한다. 요리에 진심인 경제학자의 18가지 재료와 요리 이야기는 읽을만하지만 그와 얽힌 지구 곳곳의 경제 이야기는 입맛을 돋우는데 실패한다. 재미와 의미를 함께 잡을 수 있는 독특한 책이지만 결국 문제는 경제다.

동종교배를 반복하면 환경 변화에 취약해진다. 미국 유학파 교수와 경제 관료들이 모여 신고전주의 경제학 이론으로만 대한민국을 요리하거나 자유 시장경제의 명암을 무시한 채 여전히 신자유주의 경제 시스템을 옹호하는 정치인들이 가득한 대한민국 사회는 성장, 발전 가능성이 그리 커보이지 않는다. 세계적인 경제학자 장하준을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않은 이유와 그의 이야기가 대한민국 주류 경제학계에서 외면당하는 현실은 우리가 사는 세상의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다. 경제학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닌 선택의 문제일 뿐이다. 정치경제학으로 출발한 학문이라는 사실을 몰라도 경제는 정치와 뗄 수 없는 관계라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정경유착이 문제니 정치와 경제는 멀수록 좋다는 착각은 정부가 경제에 개입하는 것은 좋지 않다는 황당한 논리가 성립할 수는 없다. 자본주의가 계속 변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완벽한 시스템이 아니기 때문이다. 경제학은 자본주의 뿐만 아니라 다양한 경제 제도와 시스템을 들여다보고 정부 정책과 시장 개입이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고민한다. 결국 자기 이익에 충실한 개인들에게 경제를 안다는 것, 경제의 중요성을 이해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장하준은 경제학이 “개인적이건 집단적이건 경제적 변수에만 영향을 끼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정체성, 다시 말해 우리 자신에 대한 규정 자체를 변화시킨다.”라고 말한다. 먹고 사는 문제 뿐만 아니라 우리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것이 경제다. 정답이 없다면 토론과 타협이 필요하고 우리 사회가 나아갈 지향점을 고민하는 데 보다 많은 시간과 노력을 보태야 한다. 노조를 해체하고, 실업급여를 폐지하면 경제가 살아날까. 낙수효과의 희망고문과 기업하기 좋은 나라의 신화는 이루어졌는가. 선별복지와 보편복지의 논쟁의 전제 조건인 ‘복지의 필요성’은 어디까지 합의가 된 건가.

폴 크루그먼과 나심 탈레브, 토마 피케티와 장하준을 통해 거시적 관점에서 경제 문제를 조금 다른 시각으로 살펴보는 지혜를 가질 수는 없을까.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학자의 이야기든 유럽의 경제학자든 우리가 다함께 잘 살 수 있는 의견과 방법을 제시한다면 귀 기울여 들어봐야하지 않을까. 이 책은 편견 넘어서기, 생산성 높이기, 전 세계가 더 잘살기, 함께 살아가기, 미래에 대해 생각하기로 나뉘어 경제학을 더 잘 먹는 법에 대해 이야기한다. 머리말에 놓인 마늘만큼 지독한 냄새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좀 더 많은 사람들이 함께 식탁에 모여 경제를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고 싶게 한다. 학문적 성과 뿐 아니라 대중적 글솜씨가 최고인 경제학자 장하준의 책은 기다리지 않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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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론 3 - 상 - 2015년 개역판, 정치경제학비판 자본론 3
카를 마르크스 지음, 김수행 옮김 / 비봉출판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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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관심은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도록 방치한다. 잉여가치율과 이윤율은 다르다. 그 전환과정에서 총자본과 가변자본 그리고 잉여가치의 비율과 변화에 주목하며 마선생님은 자본론 3권을 시작한다. 이윤율이 불변일 때와 변동하는 경우에 따라 경우의 수를 짚어보는 목적이 무엇일까. 결국 가변자본인 노동력에 대한 관심이다. 노동일, 노동시간, 노동강도는 잉여가치과 이윤율로 직결된다. 여기에 연간 회전율은 생산성의 영향을 받고 이것은 자본가의 이윤과 노동자의 임금, 노동강도와 노동일, 노동시간에 영향을 준다. 어느쪽이 우선하든 이 복잡한 수식 속에 숨은 뜻을 찾아내는 일이 자본론 공부의 핵심이 아닐까. 그것은 다른 경제학자와 다른 마선생님만의 독특한 '관점'이다.

​어떤 사회현상을 바라보는 수백개의 눈이 있다. 아니 수만, 수억 개의 카메라가 있다. 있는 그대로 비추지도 못하는 거울부터 뼈와 살을 꿰뚫어 X-ray처럼 객관적 사실을 투영하는 기계뿐만 아니라 그 원인과 결과를 찬찬히 헤아려보는 인식과 사유의 눈도 있다. 어떻게 볼 것인가, 무엇을 향해 어디로 갈 것인가. 중심축이 없는 회전은 어지럼증을 유발한다. 단단히 뿌리내리지 못한 생각들이 부유하며 세상을 어지럽힌다. 논리적인 근거와 이성적 판단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 수 있을까.

하지만, 적어도 거짓과 선동을 걸러내고 현상과 본질을 구별하는 안목이 필요하다는 문제의식 정도는 공유할 수 있지 않나? 합의는 어렵지만 기준과 잣대마저 제각각이라면 그야말로 세상은 난장판이 될 것이다. 과학적 태도가 필요한 건 오히려 정치와 사회 그리고 경제 분야가 아닌가. 때때로 흘러가는 구름에 태양이 가려져 흐린 날도 있고 비가 오는 날도 있다. 곧 장마가 시작되면 청명한 가을 하늘을 기다리는 성급한 사람들도 있다. winter is coming. 무엇을 할 것인가, 레닌도 체르니셰프스키도 했던 고민을 우리가 계속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 그리고 거기에서도.

​자동차는 구입하는 순간부터 감가상각이 시작된다. 10년 동안 한번도 타지 않고 중고차로 팔아도 제값을 받을 수 없음은 물론이다. 농산품은 말할 것도 없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거래되는 거의 모든 상품이 그렇다. 자본가의 입장에서는 불변자본 사용을 절약한큼 이윤이 높아진다. 더 많은 노동력을 투자해서 초과임금을 지불해도 기계가 노는 꼴을 보고 싶지 않은 것이다. 노동자를 희생시키는 노동조건을 절약할 수도 있고, 생산폐기물을 이용할 수도 있으며, 발명에 의한 절약도 가능하다. 이윤을 높이는 또 하나의 요인은 가격변동이다. 원료가격의 변동은 이윤율에 직접 영향을 미친다. 자본의 가치가 증가하거나 감소하는 경우도 이에 해당한다.

잉여가치와 이윤, 잉여가치율과 이윤율 사이에는 다양한 요소가 놓여있다. 이들의 변화, 통제, 조절에 의해 자본가의 이윤율이 달라진다. 단순히 노동자에 대한 착취 뿐만 아니라 불변자본의 변화도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마선생님은 3권에서 구체적인 이윤 발생 과정의 변화요소를 점검한다. 1편에서 주로 다룬 내용은 잉여가치율과 이윤율의 함수관계다. 어떤 요소 때문에 잉여가치율과 이윤율이 달라지면 그 요소들이 노동자에게는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서는 행간에 숨어 있는 의미를 읽어내야 한다. 퍼즐을 맞추듯, 레고블럭을 쌓듯 분석과 해석을 통해 하나의 거대한 형상이 만들어지는 걸까.

여러 단계, 혹은 여러 분야의 일반적 이윤율이 형성되는 과정은 상품의 가치가 생산가격으로 전환되는 과정과 다름없다. 마선생님은 여전히 우리가 어떤 상품을 구매할 때 숨어 있는 노동력, 즉 잉여가치의 의미를 되묻고 있는 듯하다. 이제 기업 간에, 상품 상호간에 경쟁이 시작되면 이윤율이 균등화되는 상황이다. 시장가격은 시장가치와 다르다. 초과이윤을 향한 수요, 공급의 자명한 논리도 작용한다. 여기에 임금의 변동이 생산가격에 영향을 미치면 이야기가 복잡해진다. 자본가들의 초과 이윤을 향한 열망은 이윤율 저하경향의 법칙 앞에서 좌절한다. 흥미롭다. 일반적인 이윤율이 점차 저하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자본주의 시스템의 필연성이라니. 나의 관심사는 노동력과 임금 그리고 잉여가치와의 관계다. 불변자본의 증가로 인한 이윤율이 낮아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일까. 규모의 경제를 통해 현대 자본주의는 다양한 방식으로 이를 극복하고 노동력을 착취하며 인간의 삶보다 자본의 욕망에 충실한 견고한 체제를 구축해왔다는 점을 우리는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이윤율 저하를 막기위한 몸부림은 다양한다. 노동력 착취가 증가하고, 임금을 인하하며, 불변자본을 낮추고, 상대적 과잉인구를 이용하며 대외무역을 활용한다. 그런 후에는 상품자본과 화폐자본이 상인자본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살핀다. 상품거래자본과 화폐거래자본을 합쳐 상인자본으로 부른다. 이것이 산업자본과 어떻게 다른지 살펴보는 과정은 자연스럽게 상업이윤의 특징을 들여다보게 한다. 상업자본의 회전과 가격이 노동자의 삶에는 어떤 영향을 미칠까. 유통은 전체 자본주의 생산양식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지만 여전히 그 중요성이 간과되기도 하고 폭리를 취해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각종 포털 사이트, 인터넷 서점, 홈쇼핑이 그렇다. 마선생님이 지금 이 꼴을 본다면 이들이 착취하는 대상이 노동력 뿐이라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거대 상업자본이 상품거래와 화폐거래에 지나치게 집중하고 있는 현실이 떠올랐다. 결국 이윤율을 높이기 위한 경쟁과 소상공인, 산업자본의 피해는 각 분야의 노동자들에게 돌아간다. 대체로 산업 구조와 자본의 형태만 달라졌을 뿐, 오늘 우리가 겪는 현실도 이윤 창출의 도구와 그 수혜자는 극소에에 몰려 있다는 사실에는 다름 없다. 기업 상장 후 분할 매각으로 천문학적 거금을 손에 쥔 몇몇 자본가 외에 누가 첨단 산업의 꿀물을 빨고 있는가.

아주 오래된 옛날 이야기에 빠져 생산, 산업, 상업 자본의 구조를 들여다보는 과정이 메마르고 냉혹하다. 감정없는 서술, 마선생님의 분석에 주관적 해석이나 오해가 덧붙여질까 극도로 자기 검열을 하듯 냉정하게 서술하는 엥선생님의 서술 태도가 칼날처럼 예리하다. 1권과 같은 냉소와 문학적 비유도 없고, 행간의 숨은 탄식도 줄었다. 2, 3권의 차분한 분석을 1권과 비교할 순 없지만 자본주의 전체 구조를 살피기 위해서는 반드시 살펴야 하는 대목들이다. 세상은 그때나 지금이나 생각보다 복잡하다. 그리고 철저하게 각각의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인다. 푸른 하늘도 잠시, 하늘은 금세 잿빛이다.

생산수단의 소유 여부와 노동력이 문제가 아니라 이제 화폐거래자본에 대한 이야기는 상업거래자본처럼 자본 그 자체가 살아있는 유기체로 기능하듯 생산물과 노동력 사이에서 꿈틀거리기 시작하는 느낌이다. 상인자본의 역사적 고찰을 통해 아주 오랫동안 유통과정에서 발생하는 상업자본의 존재를 고찰한다. 근대적 중상주의도 여기에서 비롯된다. 이자를 낳는 자본으로 인해 이제 이윤은 모두 기업가의 이득으로 돌아가지 않게 되었다. 잉여가치의 양적인 분할에서 질적인 분할이 생기고 그것이 또 다른 방식으로 이자율과 가치 사이의 관계를 형성한다.

이자는 이자를 낳고 불황기에 이율이 더 높아지던 '지금 이대로!'를 외쳤던 IMF 시절이 떠올랐다. 결국 호황이든 불황이든 가진 자는 더 큰 혜택을 얻고, 피해는 최소화한다. 제도가 바뀌고 경제상황이 달라져도 마찬가지다. 현실은 자본주의 시스템을 이해한 자와 이용하는 자 그리고 무지한 자와 용감한 자에게 지나치게 가혹하다. 선한 얼굴로 '자유'의 가치와 '평등'의 미소를 짓지만 현실은 칼날처럼 냉혹하다. 누구에게 이익이 돌아가며 그 분배는 어떻게 이루어지는 살피는 제5편의 이야기는 그 원리와 무관하게 여전히 바뀌지 않은 기본적인 체제와 시스템의 구조에 대한 의문을 갖게 한다. 우리는 과연 괜찮은 방향으로 걷고 있을까? 이대고 괜찮은 걸까?

기능자본가에게 귀속되는 산업이윤 또는 상업이윤은 총이윤에서 이자를 제외한 부분이다. 자본이 인격화되어 자기 자본으로 사업을 할 때는 자본의 사용자는 자본의 단순한 소유자와 자본의 사용자로 나뉜다. 이자는 자본과 노동 사이의 대립이 아니라 두 자본가들 사이의 관계로 나타난다. 드디어 이자낳는 자본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이제 본격적으로 자본은 신용을 바탕으로 가공의 자본을 창출한다. 화폐자본은 끊임없이 축적되고 신용에 의한 자가 발전이 가능해진다. 신용제도는 생산력의 물질적 발전과 세계시장의 창조를 촉진한다. 이는 현대 금융자본주의의 시금석이 되었으리라.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에서 출발한 화폐는 어떻게 자본으로 탈바꿈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이자를 낳고 산업자본, 상업자본으로 변화 발전하는지 살피는 동안 잉글랜드 은행과 금융시스템 전반을 돌아보게 된다.

이미 초기 산업화사회를 지나 돈이 돈을 버는 시스템으로 발전하고 그것이 전세계를 지배하는 과정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마선생님의 분석과 엥겔스의 정리는 냉정하게 현실을 꼼꼼히 들여다보며 기존 정치경제학이 해명하지 못한 부분을 분명히 짚고 그 원인과 결과를 분석한다. 이 지난한 과정을 통해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분명하다. 예상되는 문제점, 말하자면 경제공황이나 노동력 착취, 산자본가와 금융자본가에게 집중된 부의 편중이 합법적으로 이 세상이 굴러가는 시스템으로 정착되었으나 문제는 끊이지 않았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과거를 돌아보며 현실을 살피는 안목을 가져야 하는 건 정치인, 기업가가 아니라 바로 우리와 같은 노동자와 평범한 시민이다.

​은행자본은 화폐와 자본으로 구분되어 있다. 화폐가 질제로 가장 뛰어난 자본이라는 주지의 사실을 통해 자본주의적 생산이 발달한 나라들에서 은행의 준비금이 얼마나 막강한 위력을 발휘하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화폐적 자본과 현실적 자본의 차이는 분명하다. 신용을 바탕으로 한 현대 금융의 초기 버전도 지금과 다르지 않다. 산업활동과 상업활동에 '신용'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상상의 질서체계를 통해 인간의 이룩한 문명과 경제 체제는 감탄스럽다. 공황기와 불황기에 화폐자본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이자율이 상승하면 증권의 가격이 하락 이유는 무엇인지에 대한 분석은 자본주의 구조의 근간을 들여다보는 일이다. 화폐가 대부자본으로 전환되고, 신용제도 아래 유통수단으로 활용되는 어음과 은행의 준비금은 어떤 식으로 경제를 움직이는가. 통화주의자들의 주장, 1884년 영국의 은행법 등은 당대 현실에 대한 세밀한 분석으로 지루하다. 자본주의의 발생지인 영국과 스코틀랜드의 은행법 제정과 문제점이 오늘에도 시사하는 바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거시적 관점으로 이 책을 살피고 싶은 개인적인 이유로 빠르게 넘어갔다.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 종교, 화폐, 제국, 자본주의 등 '상상의 질서'를 통해 인류 문명을 발전시켜왔다고 분석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걸 믿는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그 힘이 왜곡되면 맹목적 신념, 성찰없는 편견을 맹신하게 된다. 당대 정치경제학에 대한 분석과 비판을 통해 걸어야 할 길과 방향을 점검했다는 점에서 마선생님의 자본 이야기는 여전히 숙고할 만한 게 아닌가 싶다. 누구나 각자 옳다. 팩트fact 조차 크로스체크가 안되는 일들이 허다하다. 들은 이야기, 본 이야기, 경험한 이야기, 학문적 이론, 과학적 실험도 그렇지 않은가. 눈을 크게 뜨고 생각을 열어 놓는 태도야말로 한 인간이 죽기 전에 도달해야 할 목적지가 아닐까.

금본위 화폐제도에서 귀금속의 보유량은 수출과 수입에 의해 물가에 영향을 미치고 퇴장화폐을 좌우한다. 환율은 국가경쟁력과 GDP와 국제 신용등급의 영향을 받는데 그 기능과 역할은 18세기부터 조금씩 자리잡아온 질서에 바탕을 두고 있다. 자본주의 이전에 고리대는 '악'의 표상이었다. 교회가 그 거래를 금했하기도 했고 이자낳는 화폐유통을 용인하지 않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본은 그 모든 금기를 무너뜨렸다.

이제 초과이윤이 지대로 전환되는 차액지대설을 살펴보며 마선생님은 농업생산이 자본가에 의해 추친되며 벌어지는 일들을 분석한다. 차액지대의 형태와 생산가격이 불변, 하락, 상승하는 경우에도 자본은 손해보는 일을 하지 않는다. 차지농업가farmer는 공장의 노동자와 어떻게 다를까. 자기 토지를 소유한 자작농과 다른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기 위해 이 복잡하고 지루한 경우의 수를 따져가며 이익이 누구에게 돌아가는지 따지는 건 아닐까.

인간은 이기적 동물이며 자기 본능을 이기기 어렵다. 눈부신 성취를 이루거나 대다수에게 존경받는 이는 인간적 극기를 통해 범상치 않은 욕망을 가진 사람이다. 자본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어디 한군데 '이윤'을 따지지 않아야 하는 곳이 없다. 타인과의 관계, 용기와 절제, 기쁨과 슬픔의 표현마자 그러하다. 누군가는 무엇을 향해 어떻게 살 것인지 묻고 있으나 그것이 팔릴 물건인지 대다수 사람들의 관심과 욕망에 닿아 있는지가 관건이다. 돈이 되지 않으면 만들진 않는 게 자본주의의 속성이다. 무엇을 할 것인지 물었던 수많은 사상가들이 여전히 우리에게 질문을 멈추지 않는 이유는 각자 다르게 생각하지 않을까.

리카도는 토지의 지대가 생산물의 가격과 생산비를 초과하는 이윤이 발생할 때 지급된다는 생각이었으나 마선생님은 토지 소유 자체만으로도 지대가 발생한다는 절대지래를 주장했다. 최열등지에서 차액지대가 발생한다는 것은 자연이 가치를 결정하는 건 토지의 위치와 비옥도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생산가격을 넘는 가치의 초과분에서 절대지대가 발생한다는 생각은 토지소유자가 초과이윤을 지대로 환수한다는 분석이다. 차액지대와 절대지대는 토지의 위치와 비옥도 혹은 노동력이라는 초점의 극명한 차이를 드러낸다.

생각의 차이는 관점을 차이를 만들고 보는 눈이 다르면 세상의 빛깔과 향기도 다르게 느껴진다. 하나의 고정된 프레임을 깨고 다른 프레임으로 한번쯤 세상을 바라볼 수는 없을까. 이제 이념을 내려놓고 설익은 도덕과 윤리를 벗고 옳고 그름을 따지기 전에 조금 다른 방식으로 인간과 세상을 바라보는 여유를 가질 때도 되지 않았나. 언제까지 '불안 마케팅'에 시달리며 위기를 넘어 또 다른 위기가 온다는 협박으로 자기 삶을, 타인과 국민의 삶을 어둡게 할 텐가. 진짜 위기와 절망 때문이 아니라 더 큰 욕망을 채우고 함께 살아가려는 노력이 부족해서 그런건 아닐까.

​개개인의 사적 소유는 인간에 대한 인간의 사적 소유와 마찬가지로 불합리한 것이라는 마선생님의 지적이 뼈아프다. 숱한 반론이 있을 수 있으나 가족, 근대국가의 탄생 기반이 된 사적 소유는 인간의 본성도, 필수불가결한 문명의 성립 조건도 아닐 수 없을까. 무한대로 증식되는 인간의 욕망과 실제 현실로 나타나는 빈부격차의 심화가 낳을 결과는 뻔하다. 자본주의는 인류가 발명해 낸 최고의 경제체제가 아니다. 미국과 스웨덴의 자본주의가 다르다. 자본주의적 지대의 기원에서 노동지대, 생산물 지대, 화폐지대로 나누어 분익소작과 소농민적 분할지 소유는 결국 자본, 토지의 소유 여부로 판가름난다. 마지막 7편 수입들과 그들의 원천으로 자본론은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48장 삼위일체의 공식에서 '자본-이윤(기업가이득+이자), 토지-지대, 노동-임금; 이것은 사회적 생산과정의 모든 비밀을 지니고 있는 삼위일체의 공식이다.'라는 지적은 고전 경제학과 속류경제학에 대한 지난한 연구 결과에 대한 잠정적 결론이다. 애덤 스미스도 이윤, 지대, 임금을 분석하지만 그 잉여가치의 발생원인과 과정에 대한 해석은 마선생님과 다르다. 자본 나리와 토지 마님이 지배하는 세상은 영원할까.

자본론이 출간된지 150여 년이 지난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얼마나 달라졌을까. 산업구조와 문명의 발달은 눈부시지만 자본과 토지 그리고 인간의 노동력이 창출하는 이윤, 지대, 임금의 트라이앵글은 변함없다. 조금 더 상상력을 발휘하는 제도와 체제는 불가능할까. 현실 부정이 아니라, 목적지와 방향을 다르게 설정하는 건 가능하지 않을까. 모두 함께 꿈을 꾸면 현실이 된다. 실현 가능한 다수의 행복, 경쟁보다 나눔과 배려가 먼저인 세상은 불가능하지 않다. 결국 고전은 현실을 들여다보는 현미경 혹은 망원경이다. 지금-여기에서 우리 삶의 모습을 돌아보고 내일을 전망하며 마선생님의 고민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다시 한번 돌아보고 있다.

3권 마지막 부분은 생산과정을 다시 분석한 후, "상품의 가치는 상품에 포함되어 있는 노동량에 의해 결정되며, 임금의 가치는 필요생활 수단의 가격에 의해 결정되고, 임금을 넘는 가치초과분이 이윤과 지대를 형성한다는 것"이라는 말로 경쟁이 더 큰이익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생각은 접으라고 충고한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다른 생산양식과 구별하는 두 가지 특징은 첫째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은 생남을 상품으로 생산한다는 점이며, 둘째는 잉여가치의 생산이 생산의 직접적 목적이고 결정적 동기라는 점이다. 물물교환과 잉여 생산물의 교환에서 시작한 기나긴 인류역사의 경제 체제가 자본주의라는 견고한 시스템으로 완성된 후 우리는 얼마나 행복해졌을까.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졌고 과학기술의 발달로 노동조건이 개선되었다는 사실은 틀림없다. 하지만 숨어있는 1인치를 발견하고 그 가치를 확인한 마선생님의 노고가 여전히 자본주의 미래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정치와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 먹고사니즘의 문제로 귀결되는 현실이다. 우리의 모든 관심사는, 가장 인간다운 삶이어야 하는 부분까지도 블랙홀처럼 경제가 빨아들인다. 비인간적인 시스템인 자본주의의 중심에는 언제나 인간이 놓여 있다.

기나긴 여정을 마쳤다. 꼬박 석달동안(12주) 3,000쪽 분량의 자본론을 조금씩 공부하면서 지난 시간을 정리하고 남은 시간을 살폈다.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데이비드 실즈)라는 명제 앞에서 익숙하게 죽음의 그림자와 마주앉아 저녁을 먹고 술 한잔을 거넨다. 2022년, 대한민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예술, 노동, 환경, 과학 등 거의 모든 분야가 위기와 기회를 맞고 있다. 비단 특정 정치세력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의 삶이라는 자각이 없는 천박한 철학 앞에서 자주 절망한다. 정치와 연예인, 인플루언서에 대한 팬덤도 좋고, 불행이 없는 인스타그램의 마취적 행복 코스프레도 좋다. 현실을 바라보는 내정한 시선과 미래를 고민하는 대안 모색이 없는 세상은 절망에 취약하다. 때때로, 마선생님이 인용한 셰익스피어, 냉소적 위트, 당대 경제학자들과 속류 경제학에 대한 비판정신, 엥겔스의 노고와 든든한 지지, 인간과 사회에 대한 애정, 미래 사회에 대한 희망까지도 다시 돌아볼 생각이다. 이론의 발뒤꿈치라도 만져봤으니 그 이론을 통해 도달하고 싶었던 세상, 꿈같은 시대를 상상해 본다.

오지 않아도 좋다, 꿈꾸고 상상하며, 기다릴 수 있는 여유가 오늘을 살게 하는 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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