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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로 산다는 것 - 우리 시대 작가 17인이 말하는 나의 삶 나의 글
김훈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11년 9월
평점 :
거의 십년 만에 알고 황당했다. 여덟 장 짜리 컴필레이션 앨범 중 두 장은 비닐포장도 뜯지 않은 채 CD사이에 꽂혀 있었다. 잡스런 CD와 빈 케이스를 버리려고 정리하다가 발견한 여덟 장 사이의 두 장은 들어보지도 않았다는 말이니 선물한 사람에게 미안해졌다. 컴필레이션 앨범은 개인적으로 가장 싫어하는 뷔페와 흡사하다. 맛있는 음식을 푸짐하게 잔뜩 쌓아놓았지만 뭘 먹었는지 알 수가 없고 무엇보다도 각자 먹는 속도와 양이 달라 수시로 오로지 ‘먹는’ 행위에만 집중하는 방법도 내키지 않는다. 좋은 것만 골라 놓는다고 해서 최고가 되지는 않는다. 문제는 전체적인 어울림이다.
이런 방법은 음악뿐만 아니라 책도 가능하다. 목적과 방향에 따라 다르게 기획되고 편집될 수 있지만 독특한 아이템이 아니면 잡탕 찌개가 될 수도 있는 위험을 안고 있다. 문학사상에서 나온 『소설가로 산다는 것』은 월간 <문학사상>에 연재됐던 ‘우리 시대의 이야기꾼’이라는 작가의 창작 노트를 한데 모은 책이다. 동시대의 소설가들에게 듣는 창작론은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들에게 매력적인 읽을거리다. 한 두 명도 아니고 열일곱 명의 작가를 한 번에 만날 수 있으니 매력적이지 않은가. 다만, 한 작가의 목소리가 너무 짧다는 아쉬움은 뷔페의 모든 음식을 무한정 없는 것과 비슷하다.
한 권의 책으로 만나는 여러 작가의 창작론은 서로 비교하며 읽을 수 있는 색다른 장점이 생긴다. 김경욱부터 함정임까지 가나다순으로 배열된 작가들의 나이와 개성이 제각각이다. 자신의 소설에 대한 창작론이라니 본문에서도 밝히고 있지만 많이들 곤혹스런 눈치다. 작가들은 나름의 방식대로 자신의 소설을 이야기하고 창작의 과정을 들려준다. 독자들은 맛있는 커피 한 잔과 함께 소설가들의 편안한 형식의 진지한 이야기를 즐길 수 있는 책이다. 사건을 떠올리고 인물을 만들어내는 서로 다른 방식과 소설에 담아내고자 하는 이야기들이 어떻게 다른지 즐기면 되는 책이다. 숱한 질문과 심각한 고민은 필요 없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날것 그대로의 목소리를 들어보자. 혹시 읽지 않은 작가라면 그의 소설에 흥미를 가질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다. 첫 번째 주자로 나선 김경욱은 자신의 창작론을 이렇게 결론짓는다.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실존적 전언을 떠올려본다면 화자와 주인공의 타자성이라는 지옥을 작가가 견뎌낼 때 실존의 문학은 문학의 실존을 견인하지 않았는가. - 김경욱, 25쪽
사르트르의 말을 인용하며 스스로 다짐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작가의 또 다른 자아인 화자와 주인공은 분명 작가에게 지옥일 것이다. 그것을 견뎌낼 때 문학의 실존보다 먼저 드러나는 것은 우선 독자들의 기쁨이다. 살아 숨쉬는, 손에 잡히는 또 하나의 세계와 마주하는 기쁨을 욕망하는 독자들은 기꺼이 작가들을 지옥의 구렁텅이에 밀어 넣는다.
이외에도 김애란, 김연수, 김인숙, 김종광, 김훈, 박민규, 서하진, 심윤경, 윤성희, 윤영수, 이순원, 이혜경, 전경린, 하성란, 한창훈, 함정임이 생생한 목소리를 들려준다. 자신의 삶에서 우러나온 소설과 영혼의 목소리를 담아낸 작품들이 어떻게 탄생하는지. 나열하고 보니 그들이 보여주었던 소설의 세계가 중첩되며 펼쳐지고 저마다 다른 소리를 지르는 것 같다. 그 즐거운 비명은 독자들을 위해 충분히 질러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조금 아쉽다. 지난 90년대, 2000년대 소설들의 치열함이. 개인적인 소회겠지만 현실 사회에 대한 분석과 이해 치열한 고민이 감동으로 다가오는 소설을 만나기 힘들다. 또 하나의 세계를 창조해 내고 또 다른 인물을 만들어 인간의 삶과 보이지 않는 세상의 비밀을 보여주는 데 성공한 작가들은 과거와 현재를 종횡무진 누비면서 새로움을 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금 여기의 현실적인 고민과 아픔들을 성찰하는 이야기에 조금 더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 소설은 여전히 현실을 반영하는 가장 선명한 거울이 아닌가.
‘삶은 잠이고 사랑은 꿈이다. 자는 동안에는 계속 꿈을 꾸고 싶다.’는 김연수의 말은 창작론을 넘어 삶에 대한 반성이 아닌가 싶다. 자는 동안에도 사랑하고 싶다는 욕망은 인간에 대한 작가의 분석이기 전에 작가의 소설에 대한 욕망이 아닐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언제나 사랑을 외친다. 누구나 사랑을 말하고 어디서나 사랑을 욕망한다. 그러나 그보다 지독한 미움과 분노와 폭력이 난무한다. 나르시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지극히 이기적인 사랑과 세속적인 조건과 관계를 고려한 사랑을 꿈꾸는 작가는 없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사랑과 이별이든 삶과 죽음이든 친구와 가족이든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또 만들어내는 작가들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너무나 뻔한 스토리의 삶을 견디고 있는지 모른다. 보다 새로운 삶을 꿈꾸는 것이 아니라 보다 새로운 이야기를 욕망하는 독자들을 위해 작가들은 어떤 창작론이든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줄 의무가 있다. 수많은 독자들은 여전히 소설을 통해 잠을 자고 꿈을 꾸기 때문이다.
120208-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