뭉크 - 노르웨이에서 만난 절규의 화가 클래식 클라우드 8
유성혜 지음 / arte(아르테)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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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은 시간과 공간의 좌표 위에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한다. 관점을 달리하고 안목을 넓히는 일은 쉽지 않다. 자기 삶의 목적과 가치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데도 대개 직업과 연봉으로 비교 지옥에 스스로 몸을 던진다. 지금 당신은 어디에 서서 무얼하고 있는가. 지금-여기here and now에서 ‘나’를 지탱하는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나는 보이는 것을 그리는 게 아니라 본 것을 그린다.”라는 뭉크의 말은 왜 우리 삶에 통용되지 못할까.

1863년에 태어난 뭉크의 시간은 노르웨이 크리스티아니아(오슬로)에서 파리, 니스, 베를린을 지나 에켈리에서 1944년에 멈춘다. 그가 관통했던 시간과 공간들 - 세기말 데카당스, 벨 에포크, 제1차 세계대전, 나치 점령, 노르웨이 피오르, 니스의 햇빛, 몬테카를로의 카지노, 북유럽의 추위와 강렬한 햇빛 등. 알콜 중독과 도박, 불안과 고독으로 절규했던 뭉크는 행복이나 성공과 거리가 멀다. 어머니와 누이가 죽고 아버지의 학대에 가까운 종교적 규율로 죄책감이 가득했던 유년 시절의 흔적 때문인지 거의 모든 인간 관계에 실패한다. 오로지 그림에 대한 열정 하나로 80년을 버틴 삶이 경이롭다.

뭉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절규>보다 <아픈 아이>를 한참 들여다봐야 한다. 말년에 그린 <별이 빛나는 밤>, 다그니 율을 그린 <마돈나>, 강렬한 첫사랑의 추억으로 남은 유부녀 밀리와의 <키스>가 뭉크의 절규다. 붉은 석양이 인상적인 에케베르그 언덕의 <절규>는 자연의 비명이다. 유성혜는 『뭉크』에서 “절규. 누가 처음 한국어로 번역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노르웨이어 스크리크Skrik는 있는 힘을 다하여 부르짖는 ‘절규’보다는 너무 놀라 지르는 외마디 소리인 ‘비명’으로 해석하는 게 더 적절하다. 이 그림을 더 정확히 이해하는 데도 ‘비명’이라는 단어가 도움이 된다. 많은 이들이 오해하듯, ‘절규’라고 번역한 사람 역시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이 소리를 내는 것으로 생각한 것 같다. 그러나 뭉크의 노트에 따르면, 소리를 내는 쪽은 인물이 아니라 자연이다.”라고 설명한다. 기나긴 겨울의 혹독한 추위와 더움을 견뎌야 하는 노르웨이라는 공간적 상상력을 배제한 채 뭉크를 이해할 수는 없다.

불안과 공포, 외로움과 고독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뭉크는 공황 장애, 불면증, 정신 분열, 불안 장애, 환각, 피해망상 등 거의 모든 정신병적 증상들을 그림에 담아냈다. 낸 뭉크에 열광하는 사람은 위험하다. 뭉크의 그림을 통해 무엇을 읽어내든 그의 그림이 어떠하든 사람들은 각자의 관점으로 ‘본다.’ 에피파니epiphany는 ‘우연한 순간에 귀중한 것과의 만남이 주는 깨달음’을 의미한다. 호르몬이 우리 삶의 실질적 지배자라는 의학적 관점은 서글프지만 부정하기 어렵다. 의사 안철우는 호르몬과 미술의 만남을 에피파니가 아니겠냐는 듯 뭉크 씨에게 도파민 과잉이라는 처방을 내린다. 분노조절이 힘든 사람, 모든 게 남탓이고 자신의 말과 행동에 오류가 없는 줄 아는 사람, 언제나 주변 사람의 감정을 살피는 사람, 허무와 고독으로 무기력한 사람……. 이 모든 증상들은 어떤 호르몬이 부족한 걸까. 그림과 함께 적절한 음식과 처방을 달아놓은 『뭉크 씨, 도파님 과잉입니다』는 개인적 감상과 의학적 처방이 더해져 새롭지만 특별함은 없다.

『Edvard Munch』는 질 좋은 도록으로 충분하다. 김기태의 글에 대해서는 말하고 싶지 않다. 이리스 뮐러 베스테르만의 글은 그림과 어울려 『뭉크, 추방된 영혼의 기록』을 읽을만한 책으로 갈무리하게 만든다. “나는 자신의 심장을 열고자 하는 열망에서 태어나지 않은 예술은 믿지 않는다. 모든 미술과 문학, 음악은 심장의 피로 만들어져야 한다. 예술은 한 인간의 심혈이다.”라는 말로 뭉크를 설명한다. 뭉크는 심장을 열고자 하는 열망으로, 심장의 피로 그림을 그렸다는 의미다. 좋은 글은 뭉크의 그림과 어울려 읽고 보는 즐거움을 배가 시킨다. 수많은 자화상을 통해 인간 뭉크와 그의 예술 세계를 들여다본 이리스 뮐러 베르테르만의 색다른 관점과 통찰력이 빛난다.

석판화가 아닌 유화 <절규>를 보고 싶었으나 경매가 1,200억이 넘는 그림이 예술의 전당에 걸렸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텍스트에 곁들여진 그림 혹은 그림에 설명으로 붙은 텍스트를 읽고 보며 뭉크의 <아픈 아이>, <키스>, <마돈나>, <뱀파이어>, <별이 빛나는 밤>만큼 자화상이 보고 싶어졌다. 이미경의 『뭉크의 별이 빛나는 밤』에서는 현지인으로 답사를 통해 뭉크의 흔적을 더듬으며 디테일하게 써내려 간 유성혜의 『뭉크』가 미처 담지 못한 이야기를 살펴볼 수 있다. 객관적인 정보와 설명이 충분하고 뭉크 전시회에 맞춰 출간한 책이라서 어렵지 않게 살펴볼 만하다.

화가의 삶에도 ‘사랑’만큼 강렬한 경험은 없다. 김연수는 『청춘의 문장들』에서 “청춘은 들고양이처럼 재빨리 지나가고, 그 그림자는 오래도록 영혼에 그늘을 드리운다.”라고 썼다. ‘청춘’을 ‘사랑’으로 바꿔 읽으면 뭉크의 그림에서 밀리, 다그니, 툴라의 그늘을 읽을 수 있다. 어머니와 누이 소피에, 아버지와 동생 안드레아스, 라우라 뿐만 아니라 어머니를 대신했던 카렌 이모까지 먼저 떠나보낸 뭉크의 생은 막내 여동생 잉게르가 정리한다. 숱한 메모와 기록들, 그가 몸담았던 크리스티아니아 보헤미안 그룹, 검은 새끼 돼지 클럽 사람들이 뭉크에게 준 영향과 흔적들까지 꼼꼼하게 살펴보면 뭉크와 그의 그림은 물론 당대의 사회, 문화를 함께 읽을 수도 있다. 지식과 정보가 넘쳐 그림 주변만 살피다 정작 스탕달 신드롬을 느낄 수도 있는 뭉크의 그림 앞에서 길을 잃을 수도 있다. 아무튼, 예술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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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미술관 - 생각을 바꾸는 불편하고 위험한 그림들
김선지 지음 / 브라이트(다산북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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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지는 ‘인간은 무엇일까.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떤 곳인가. 이 물음이 내가 글을 쓰는 이유다.’라는 말로 이 책의 프롤로그를 시작한다. 그림책이다. 예술은 인간과 사회를 빗겨 나간 자리에 놓인 특별한 대상이라는 착각. 작품마다 내뿜는 아우라에 눈이 부셔 관객의 생각과 감정을 누군가가 대신 설명해 줄 거라는 혼란. 아마 이런 몇몇 편견 때문에 그림 읽어주는 사람들이 등장한 게 아닌가 싶다. 아니, 그런 분들의 혜안을 빌려 빛과 그림자, 형태와 색채를 조금 더 오래 지켜보는 지도 모르지만.

개인의 취향이겠으나 사랑 운운하며 감정을 쏟아내는 그림 에세이에 부정적 반응이 심하다. 예술은 대개 한 인간과 사회의 현실과 이상 혹은 꿈과 무의식의 경계에 놓인다고 믿는다. 어느 쪽도 포기하지 않은, 혹은 어느 한 편에 완벽히 호응하는 작품이야말로 관객들의 갑론을박을 이끌어내는 문제작인 경우가 많다. 이진숙의 『인간다움의 순간들』과『위대한 고독의 순간들』이 인문학적 사유로 잘 차려진 성찬이라면 김선지의 『뜻밖의 미술관』은 맛과 영양을 포기할 수 없는 사람들이 바쁠 때 챙겨먹는 간편식 같은 느낌이었다. 한 권 분량의 책을 염두에 두고 쓴 글과 신문 칼럼 등 한 편의 글로 소비될 글을 쓰는 사람의 마음가짐이 같을 수 없다. 독자는 취향과 자기 필요에 따라 어느 쪽을 선택하면 그뿐이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그림에 대한 단편적 지식과 에피소드가 아니라 필자 나름의 ‘관점’과 깊은 ‘사유’가 바탕이 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그런 면에서 김선지의 글을 짧지만 분명한 메시지로 독자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다.

책은 크게 ‘명화 거꾸로 보기’ 파트와 ‘화가 다시 보기’ 파트로 나눴다. 예술 분야의 책을 처음 보는 독자가 아니라면 모두 익숙한 그림들이고 기본적인 배경 지식도 갖춰져 있을 터. 중요한 건 그래서 필자는 무엇을 보았다는 건지, 아니면 어디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지에 관심이 간다. 김선지는 얼굴이 하얀 예수가 이상하지 않느냐고 묻는다. 고다이바는 정말 나체로 말을 타고 마을을 돌았을지, 황금비는 정말 아름답게 보이는지, 비너스의 모델은 매춘부가 아니었을지 살핀다. 고증을 거쳐 나름의 근거를 제시한 이야기가 신선하다. 물론 익숙한 이야기도 있다. 모두 처음이라서가 아니라 그림을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는 재미를 가지라는 권유다. 당연히 예술도 아는 만큼 보인다. 작품은 묻는 만큼 답한다.

“예술은 인간의 삶과 역사를 비추는 거울”이라는 저자의 생각은 역사 전공자로서 세계에 대한 인식 틀이 무엇인지 말해준다. 인간과 세상을 떠난 예술은 불가능하다. 빌렌도르프의 비너스부터 인공지능이 그려낸 그림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축적된 지식과 정보, 꿈과 욕망, 무의식과 환상을 드러낸 작품일지라도 인간의 삶과 역사 속에서 그 의미를 읽어낼 수 있으며 예술가의 의지와 작품의 아름다움을 즐길 수 있다고 믿는다. 미적 기준에 대한 사회적 기준이 시대마다 빠르게 변한다. 새롭고 기발한 아이디어가 빚어낸 신선함이나 놀라운 상상력으로 창조한 산업 디자인은 자본주의 시대의 예술과 신제품의 경계를 허물기도 한다. 우리가 즐기는 세상이 그대로 놀라운 창조물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간혹 미술관을 찾는 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떠나는 추억 여행이다. 인류가 걸어온 길, 먼 옛날의 추억이 내 기억 속에 어떻게 자리 잡고 있는지 확인하는 시간이다. 혐오와 증오가 시대 정신이 된 건 아닌지 혼란스런 시간을 지나고 있다. 정답을 가진 자들의 목소리가 드높다. 네가 틀렸다는 아우성에 귀가 아프다. 침묵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또 다른 무언가가 조금 보일 수도 있을까. 날마다 새로울 순 없어도 가끔 고개를 들고 지는 해를 바라볼 때 어제와 다른 노을이 아니라 처음 만나는 절멸의 시간이었으면 좋겠다. 완벽한 어둠이 존재하는 세상에 대한 그리움. 아직 때가 아니라면 조금 더 기다리더라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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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지금껏 몰랐던 신화의 비밀, 명화의 비밀 - 풍요롭고 지적인 삶을 위한 교양 수업
제라르 드니조 지음, 배유선 옮김 / 생각의길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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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없다. 우리는 모두 상승과 하강 곡선을 그리며 산다. 사람들은 기복 없이 평탄한 인생을 꿈꾸지만 그런 인생은 없다. 멀리서 바라보면 남들은 평온한 일상을 즐기는 듯한데 왜 나는 이렇게 힘들게 사는지 억울할 때가 많다. 그것이 경제적인 문제이든 정신적 고통이든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건 타인의 삶을 속속들이 들여다볼 수 없다는 한계 때문일 뿐 누구나 당신만큼 힘들다. 쉬운 인생이 어디 있겠는가.


아주 오래전, 그러니까 인간이 겨우 직립보행을 시작했을 무렵부터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갈망하는 인간의 욕망은 본능처럼 꿈틀거린 게 아닐까. 오로지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는 생명체의 연약함은 외부 세계를 모두 경계와 공포의 대상으로 삼아 차츰 이성이 발달하는 계기가 되었으리라. 다른 동물에 비해 특별한 능력이나 경쟁력 있는 신체를 갖추지 못했으니 당연한 생존 전략이었을 것이다. 천둥 번개가 치고 폭우가 쏟아지고 혹한의 겨울을 맞거나 가뭄을 견뎌야 했던 호모 사피엔스에게 자연은 경외의 대상이 아니었을까. 그 두려움은 눈에 보이지 않는 대상의 존재를 믿어 의심치 않게 했으리라. 세계가 저절로 작동하거나 자연현상이 누군가에 의해 지배된다는 생각은 그 시절 지나치게 합리적이서 의심할 수 없는 상식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신화는 어쩌면 잃어버린 인간의 오랜 꿈이거나 호기심과 질문을 쏟아내던 시절을 살아낸 인간의 흔적기관 같은 게 아닐까 싶다. 우리에겐 과거 혹은 고통과 슬픔을 견디는 기적의 물질이 분비된다. 그것은 ‘망각’이다. 지나간 모든 것들이 아름다워지는 게 아니라 선택적 기억으로 남은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만 떠오르기 때문이다. 그 어떤 막장 드라마나 현대판 콩가루 집안의 서사를 모두 합쳐놓아도 신화를 능가하지는 못한다. 하늘과 바다, 삶과 죽음, 산과 강, 비와 바람 등 인간이 사는 세상 어디에나 신은 존재한다. 아니, 신이 존재한다는 믿음을 가질 권리는 누구에게나 있다.

지나치게 인격화된 신은 당혹스럽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인간은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존재라는 점을 외면할 수 있다. 다소 이타적 속성이나 특이한 개체가 없지 않으나 신도 인간을 닮았을 것이라는 오만함이 놀랍다. 명화 속에 등장하는 모든 신은 매우 인간적이다. 간을 뜯어먹히는 프로메테우스부터 자식을 삼키는 사투르누스까지 대부분 그렇다. 구름과 비 혹은 거위가 되어 욕심을 채우는 신도 없지 않으나 신도 결국 창조자인 인간의 삶에 복무하기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닐까 싶어 오히려 인간적으로 느껴진다. 합리의 세계, 과학적 사고를 바탕으로 21세기를 사는 인간의 오만일 수도 있으나 지금-여기에서 바라보는 신화 이야기 혹은 명화 속 신들의 모습이 내게는 그렇게 보이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신화>를 주제로 한 책 읽기가 이어지는 중이다. 이 책은 신화를 처음 시작하든 충분한 지식이 있든 상관없다. 그림 자체로도 충분한 예술적 감동을 선사하며 저자가 설명해주는 신화 이야기가 더욱 풍성한 그림 읽기를 가능케 한다. 도상학에 관심을 갖게 된 건 단 한 장의 그림으로 2시간을 ‘순삭’시켜버린 어떤 강의 때문이었다. 그림의 메인 테마뿐 아니라 구석구석 배치된 디테일을 보는 즐거움을 알게 된 계기가 됐다. 이후 그림도 아는 만큼 보인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화가도 사람이다. 당대의 화풍, 문화적 흐름, 사회정치적 변혁 등은 자연스레 그림에 반영된다. 자기만의 문체를 갖고 싶은 게 모든 작가의 꿈이듯 자기만의 그림을 그리려는 화가들의 부단한 노력으로 우리는 누구의 그림을 좋아한다, 어떤 화가의 색감에 매료됐다는 이야기를 할 수 있다. 각자 마음에 드는 그림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새롭게 들여다 본 그림이 많다. 내가 꼽은 그림 두 개는 프란시스코 고야의 <자식을 삼키는 사투르누스>와 피터르 브뤼헐의 <추락하는 이카루스가 있는 풍경>이다.

산비탈에서 밭 가는 농부의 한가하고 평화로운 일상, 물에 빠져 두 다리만 허우적거리는 이카루스를 신경조차 쓰지 않는 낚시꾼, 바다가 아닌 산 쪽을 향해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긴 목동...이 모든 무신경과 평온함이 신화 따위와 무관한 인간의 일상을 전하고 있는 듯해서 처음 볼 때부터 한참을 들여다봤다. 다시 봐도 브뤼헬은 T발 C가 맞다. 이카루스가 아니라 평범한 사람이 물에 빠져도 이렇게 표현했을까. 아니 다이달로스의 아들이라서 특별히 무심한 걸까. 추락하지 않으려면 낮게 기어라, 높이 오르지 말고 중간에서 서성여라, 빨리 올라가면 빨리 내려온다, 튀지 않게 중간만 해라...세상을 사는 지혜를 가르치고 싶었던 게 아니라면 충동 조절이 어려운 아들에게 왜 밀랍으로 만든 날개를 달아줬단 말인가. 한 권의 책이 오롯이 독자의 몫이든 그림도 보는 사람 마음이라면 끝없는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그림들이 이 책 한 권에 가득하다.


각자 선택한 그림에 끌린 이유만큼 사람들은 각자의 방식대로 세상을 살아간다. 그래서 마티스는 붓을 잡을 수 없는 지경에도 가위를 들고 물감 대신 색종이를 오려 빨간 심장이 달린 이카루스를 창조했을까. 포기하지 않고 힘겨운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려는 의지가 아니라 무언가 ‘표현’하려는 욕구가 마티스의 존재 이유였기 때문이 아닐까. 수많은 이카루스 사이에서 우리는 여전히 ‘날개’를 달고 하늘을 날고 싶은 욕망과 부와 명예, 사랑과 우정, 건강과 행복이 언제든 ‘추락’할 수 있다는 두려움 사이에서 서성거리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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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러의 방 - 내가 사랑하는 그 색의 비밀 컬러 시리즈
폴 심프슨 지음, 박설영 옮김 / 윌북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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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를 읽었을 때 까마득한 나이였지만 얼른 서른 일곱이 되고 싶었다. 혼란과 방황에서 벗어난 진짜 어른이지만 세상에 찌들지 않은 냉소적 태도로 당당하게 홀로 설 수 있는 가장 완벽한 나이처럼 보였다. 무라카미 류의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 책장을 넘기면서 내용과 상관없이 바다와 하늘을 섞어 놓은 색이라고 상상했다. 투명하게 맑은 민트를 떠올렸을까. 그렇게 회색으로 가득한 10대를 지나 초록과 파랑 같은 20대가 떠올랐다. 폴 심프슨의 『컬러의 방』은 지난 삶을 돌아보게 하는 기이한 미술책이다. 색의 연대기 같은, 빛의 역사를 기억하는 책은 어떻게 쓰게 된 걸까.

‘색은 영혼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색은 건반이고, 눈은 해머이며, 영혼은 수많은 현을 가진 피아노’라는 바실리 칸딘스키의 말에서 색의 자리에 그림 혹은 그, 그녀라는 단어를 놓아 보았다. 보는 것이 믿는 것이라는 신념은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자각의 순간을 위해 예비 된 절망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 귀와 눈이 예민한 만큼 코와 입이 둔한 나는 가끔 흑백으로 세상을 본다는 개의 눈을 부러워한다. 미혹함이 없이 명암의 이분법적 세계가 오히려 분명하고 정확한 판단에 도움이 될 듯하다. 예민한 감각은 지나치게 많은 정보를 흡수하고 영혼을 쉽게 지치게 한다. 백색 소음 너머에 떠도는 말의 뉘앙스와 태도가 보이고 보이는 것 너머에 현상과 분리된 본질이 드러나는 순간은 생각보다 참담하다.

‘빨강의 방’으로 시작해서 노랑, 파랑, 주황, 보라, 초록, 분홍, 갈색, 검정, 회색, 하양 등 이 책에는 모두 11개의 방을 소개한다. 어느 방이 마음에 드는지 어느 방을 싫어하는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각각의 방에 잠시 머물러 그 방의 색이 내는 소리를 들어보자. 소리가 보이고 색이 들리는 경험은 비현실이 아니라 초현실적 체험이다. 저자는 세상에 존재하는 색의 역사와 의미를 단편적으로 소개한다. 거대한 벽에 다양한 에피소드와 사물들의 꼴라주. 저자는 형형색색 어지럽게 전시된 세상을 색으로 분류한다. 과거와 현재, 사람과 사물, 이미지와 상징, 상상과 현실을 뒤섞어 놓는다. 단편적인 이야기가 나열되지만 파편화된 조각이 아니라 같은 색을 향한 나름의 질서를 갖고 있다.

자연과 사물을 인식하는 방법은 학습된 개념과 언어를 도구 삼아 구별된 방에 정리된 장난감처럼 뒤죽박죽인 경우가 많다. 매우 기능적이고 효율적인 방법으로 외부 세계를 감각하고 인지 영역을 확장하는 사람도 있으나, 흘러가는 물처럼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사람도 많다. 관심과 재능에 따라 달라지는 개인의 취향 혹은 타고난 감각과 재능의 차이다. 절대음감이나 미각처럼 절대 시각이 있다면 색의 채도와 명도를 구별하는 능력이 아니라 각각의 색이 드러내는 아름다움과 비명을 구별하는 타고난 능력이 아닐까.

폴 심프슨은 사람들이 각자 좋아하는 색의 비밀을 가르쳐주려는 의도보다 사회적, 개인적 상징으로 기능하는 색의 역할과 의미를 나열하는 데 재미를 붙인 듯 수많은 이야기를 쏟아낸다. 역사, 종교, 스포츠, 비즈니스에 이르기까지 각각의 ‘색’과 연관된 스토리가 끊임없이 이어진다. 그래서 무슨 색을 좋아하시나요? 아니, 그래서 왜 그 색이어야 하며, 그 색은 왜 그런 의미를 갖게 되었는지 찾아 헤맨다.

이 책은 고흐, 모네부터 나폴레옹, 비틀스까지 수많은 사람이 등장한다. 지난 시대의 추억은 오늘을 사는 나, 혹은 우리의 삶을 위해 전제 조건이다. 영상과 사진의 시대다. 개인이 브랜드가 되고 차별화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현대사회에서 색에 얽힌 이야기들은 인간의 심리와 욕망뿐 아니라 대중문화와 놀이 문화를 이해하는 데 필요한 지식과 정보에 해당한다. 어느 분야든 그러하듯 타고난 재능과 감각에 지식과 노력을 더하면 빛을 발한다. 눈부시지 않아도 자기만의 방, 내가 좋아하는 색으로 가득한 방 하는 필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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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사회학적 읽기 - 우리는 왜 그 작품에 끌릴까
최샛별.김수정 지음 / 동녘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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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탄생은 우연이다. 우주적 필연이나 숙명 따위는 없다. 부모를 선택할 수도 없고, 원하는 자식을 낳을 수도 없다. 주어진 양육환경과 교육을 통한 사회화 과정을 거쳐 공동체에 적응한 성인으로 거듭날 뿐이다. 유전적 요소를 무시할 수도 없으며 부모의 문화자본과 상징자본을 수용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지금 현재 당신의 삶의 목표, 인생관이나 가치관, 문화적 취향까지 자유 의지에 의한 고민과 선택의 결과물이라고 하기 어렵다. 피에르 부르디외는 고야의 《자식을 잡아먹는 사투르누스》를 선택한 사람의 지적이고 고급 취향은 개인의 노력만으로 가능하지 않다고 지적한다. 중간계층이 선호하는 레오나르드 다빈치의 《모나리자》는 문안하며, 하층 계급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두 자매》를 선택했다고 해서 부끄러할 필요도 없다. 인터넷에 떠도는 각종 심리테스트와 달리 예술적 상상력과 개인의 취향에는 사회 계급의 문화, 상징 자본이 막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유디트’를 해석한 다양한 작품들을 살펴보는 일은 예술을 이해하기 위한 사회학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한다. 단순히 배경지식과 역사적 맥락, 즉 작품 외적 요소를 통해 예술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할 이유는 없다. 지극히 사적인 영역인 개인의 미적 감각과 세계를 이해하는 맥락에 대한 구조적 이해가 작품 감상에 큰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허나, 그림 뿐 아니라 공연, 전시, 음악, 무용, 문학에 이르기까지 예술작품의 탄생부터 감상에 이르는 과정은 총체적이고 집합적인 형태를 이룬다. 이것이 예술과 사회를 관계를 이해하기 위한 충분한 이유가 아닐까.

세상은 인간 사회보다 더욱더 촘촘하고 세밀한 그물망으로 짜여 있다. 네트워크 시대의 사회는 온, 오프라인을 넘어 빈틈없고 복잡한 구조를 이룬다. 그러니 죽음을 바라보는 두 개의 시선의 차이를 살피는 건 현대사회의 복잡성에 비하면 매우 단순한 감상법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다비드의 〈마라의 죽음>(1793)과 보드리의 〈샤틀로트 코르데>(1860)는 시대적 거리만큼 남녀 예술가의 ‘관점’의 차이가 분명하게 극명하게 드러난다. 사회적 사건에 대한 해석이 아니라 ‘마라’의 인물에 대한 평가, 죽음 자체가 가진 미학적 선정성을 독자는 어떤 시선으로 바라볼까. 사회학의 시선으로 예술을 읽는다. 기본적인 틀은 「보완된 문화의 다이아몬드」다. 문화 다이아몬드cultural diamond는 미국의 문화사회학자 웬디 그리스올드Wendy Griswold 가 처음 고안하고, 빅토리아 알렉산더Victoria Alexander에 의해 보완됐다. 문학 비평의 기본 구조인 표현론, 반영론, 수용론, 절대론처럼 시대를 거듭하며 작품을 둘러싼 해석의 주체와 방법에 무게가 달라진다. 두 사회학자는 철저하게 선행 이론에 근거해서 예술을 바라보는 사회학적 시선을 정리하고 개별 작품에 적용하며 구체적인 방법을 보여준다.

하지만 대학교 교양과목으로 흥미진진한 이론과 지식수준, 문화 다이몬드의 틀에 대한 해석에 머물고 있어 마지막에 추가된 대한민국의 문화양상에 대한 분석은 특별해 보이지 않는다. 그래도 소쉬르의 ‘랑그와 빠롤’, 레비스트로스의 ‘양자 대립 구조’, 즉 구조주의로 이해하는 ‘007 시리즈’를 설명하는 움베르토 에코 – 선과 악의 영원한 갈등 구조 등은 다양한 인문학적 개념과 예술작품을 환기하는 즐거움이 있다. 아도르노는 “우리를 늘 깨어 있게 하는 음악”인 불편하고 기괴한 무조음악 쇤베르크의 〈달에 홀린 피에로〉, 친숙한 멜로디와 화음이 아름다운 스트라빈스키의 〈불새〉를 들어보자.

책을 입체적으로 읽는 방법은 다양하겠으나 저자가 소개하는 그림과 음악을 직접 감상하며 개별 독자가 주체적으로 해석하는 방법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현대인의 예술 감상 태도다. 아도르노의 평가와 무관하게, 구조주의와 같은 이론적 토대를 이해하지 못해도 좋다. 우선 각자의 문화자본의 총량, 상징자본의 크기가 경제 자본과 균형을 이루지 못할 때 발생하는 문제는 심각하다. 삶의 목적과 방향과 태도를 포함한 한 인간의 성숙도는 단기간에 길러지기 어렵고 경제 자본으로 일시에 거머쥘 수 있는 물적 토대와 조금 다른 양상이다. 각자의 삶에 가중치, 무게 중심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예술을 바라보는 관점과 태도가 바뀌고 취향이나 교양이 달라진다. 애들 손잡고 억지로 호퍼 전시장에 달려간다고 해결될 문제도 아니지만 트로트만 듣는 귀를 가진 채 성인이 되는 환경 또한 권할 만한 일은 아니다. 사회학의 관점으로 예술을 읽는다는 건 단순히 ‘안다’ 혹은 ‘보았다’와 ‘들었다’를 가로질러 인류의 역사와 전통, 문화와 예술에 대한 이해와 공감 그리고 현재와 미래 읽는 또 하나의 즐거움이다. 늘 그러하듯 조각을 모으는 일도 중요하지만 전체를 조망하며 구조와 시스템을 파악하는 거시적 안목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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