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치심은 혁명적 감정이다
프레데리크 그로 지음, 백선희 옮김 / 책세상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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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어로 아이도스aidos, 라틴어로 푸도르pudor라 불리던 수치심의 어원은 중요하지 않다. 시대와 공간을 초월한 채 모든 인류가 알고 있는 그 감정에 대한 이야기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아니, 어쩌면 ‘수치심’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한 레시피를 쓰고 싶었거나 지나친 수치심이 자기 모멸로 이어지지 않기를 바람이었을 수도 있겠다. 그 목적이 무엇이든 저자는 우리에게 각자의 수치심을 꺼내 탁자에 올려놓고 오래도록 응시하라고 재촉한다. 무엇이 부끄러운가, 아니 그 부끄러움의 원인이 무엇인가.

부끄러움은 왜 나 혹은 우리의 몫인지에 생각한 본 적이 있다면 프레데리크 그로의 “수치심의 진영이 바뀌어야 한다!”라는 외침에 동의할지도 모른다. 프랑스의 철학자는 무엇이 다를까. 제국주의 중심에 서 있으나 세계 경제, 문화, 사상을 이끄는 국가에 서서 바라보면 미국과 아시아 남미와 아프리카의 현실이 조금 달리 보일까. 이렇게 좁은 대한민국에도 자기가 가진 것들-이를테면 자본, 권력, 명예, 인맥 등등-에 따라 전혀 다른 감정을 ‘소유’하고 ‘학습’하게 된다. 상식과 법률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활용될 뿐 공동선을 추구하거나 사회적 합의와 다수의 의견조차 필요에 따라 달리 해석한다. 비단 정치인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어느 자리에 있는지에 따라 관점이 달라지고 자기만의 논리와 주장으로 합리화한다. 인류 문명사의 변하지 않는 특성이지만 진영에 따라, 서 있는 자리에 따라 그것을 공정과 정의라고 외치거나 상식과 합리라고 주장하니 ‘수치심’이 설 자리가 없다.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다. 모든 관계에 적용되는 말이다. 거리 두기는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부모자식, 형제자매뿐만 아니라 친구, 연인, 선후배, 직장동료에 이르기까지 마찬가지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들은 혈육이라서, 사랑하니까, 친한 사이라는 이유로 ‘선’을 넘는다. 각자의 선이 다르니 문제가 생긴다. 인간관계는 교집합이다. 여집합의 욕망이 선을 넘게 하고 관계를 망치며 범죄를 저지르게 한다. 인간에 대한 예의는 배움과 가르침도 중요하지만 서 있는 자리와 이해관계가 우선인 듯하다. 사회학적 상상력, 성인지감수성, 예의 바른 무관심을 입으로 주어섬겨도 일상적 ‘관계’에 적용하고 실천하지 못하면 무용지물이다. 물론 이 앎과 삶의 간극이 수치심을 유발하지만 그조차 인식하지 못하면 수치심조차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 듯하다. 남 탓하기 바쁘고, 자기변명에 심혈을 기울이며 내 사전에 반성과 성찰은 없다고 항변한다.

이 책은 수치심의 중요성에 대해 독자 개인의 앎과 삶을 돌아보라고 재촉한다. 수치심의 종류와 성격을 지식으로 담아둘 필요는 없다. 어차피 육화되어 변화, 성장하지 못한다면 ‘감정’에 관한 숱한 철학적 담론과 심리학적 토대는 무용지물이다. 물론 이해한 만큼 공감하고, 공감도 연습과 훈련이 필요하다. 그러나 수치심은 조금 다른 영역이다. 다양성의 존중은 합의된 질서의 존중 아래 가능한 분명한 공적 책무다. 다수가 항상 옳은 건 아니듯 개인차의 존중도 틀린 건 아니다. 그 불문명한 공백을 무엇으로 채울 것인지에 대한 분분한 의견은 사람과 조직마다 많이 다르다. 갈등은 거기서 시작된다. 대개 수치심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으로 구별할 수 없고 그 대상과 상황에 따라 뻔뻔함으로 무장하는 사람이 생길 뿐이다. 그걸 가능하게 하는 건 성격과 습관뿐만 아니라 삶의 태도와 방법의 차이다.

* 속옷 차림의 여성의 뒷모습을 담은 에곤 실레의 표지 그림은 저자가 말하는 '수치심'과 무관하여 당혹스럽다. 출판사의 의도와 표지디자인에 딴지 걸고 싶지 않으나 의도적 오류라 해도 수치심은 혁명적 감정이라는 제목과도 전혀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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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힐리스트로 사는 법 - 삶이 무겁고 힘든 사람에게 니체의 니힐리즘이 전하는 지혜
문성훈 지음 / 이소노미아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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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힐nihil은 ‘없다無’라는 의미의 라틴어에서 유래한다. 기존의 가치 체계와 이에 근거를 둔 일체의 권위를 부정하는 니힐리즘을 실천하는 사람이 니힐리스트라 하겠다. 임승수는 『사회주의자로 산다는 것』에 대해 그 이유와 태도를 설명한 적이 있고, 지승호는 유시민을 ‘소셜 리버럴리스트’로 규정한 적이 있다. 라벨링 혹은 낙인이론은 한 인간을 프레임에 가두는 못된 방법인지 모른다. 그러나 스스로 자기 삶의 가치와 목표를 설정하고 인간과 세계를 향한 삶의 방법을 결정할 수 있다는 건 숭고한 일이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신념과 선택의 문제라면 나름대로 의미 있는 삶의 태도가 아닐까.

자기 삶의 창조자가 되어 삶이 예술이 되는 순간으로 가득 채우려는 주체적인 사람은 아름답다. 그것은 학벌과 직업, 명예와 권력, 부의 척도로 가늠할 수 없는 인간적 향기와 가치를 드러내기 때문이다. 특정 이념에 가두거나 몇몇 프레임으로 가두기보다 나름대로 각자 만들어가는 삶의 방법과 태도는 그래서 소중하다. 인상 깊게 들여다봤던 악셀 호네트의 『인정 투쟁』의 번역 소개자라는 사실에 고개를 끄덕였던 철학자 문성훈의 글은 단단하게 여며져 있다. 합리적이고 빈틈없는 논리로 무장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깊은 사유와 오랜 경험이 녹아있지만 주관에 치우치지 않고 담담하게 저자의 생각을 사례와 함께 풀어내고 있어 누구에게나 권할 만한 에세이다. 좋은 글은 결국 깊이와 넓이를 통해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

“니힐리스트는 세상의 허무함 속에서도 ‘사자의 꿈’을 꾼다!”라는 문장과 함께 시작하는 이 책은 니체 철학에 바탕을 두면서도 쇼펜하우어와 키르케고르, 공자와 마르크스, 김예슬과 푸코, 법정 스님과 존 롤즈까지 다양한 사상가들과 실제 사례가 소개되어 현실적인 삶의 지침으로 삼기에 충분하다. 한 사람의 생각과 주장이 독자에게 미치는 영향을 가늠할 수는 없다. 그가 가진 이력과 삶의 궤적과 무관하게 개별 독자의 현실 적용 가능성은 헤아리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삶이 무엇인지, 그 태도와 방법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없는 사람은 없다. 각자 선택한 길을 따라 걷다 보면 가족과 연인, 절친과도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할 때가 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누적된 말과 행동의 결과는 그대로 자기 인생이 되고 돌이킬 수 없는 거리를 만든다.

삶이 무겁고 힘들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특별히 ‘니힐리스트’가 되기로 결심하지 않더라도, 아니 그 어떤 이념과 주의, 주장으로 설명할 수 없더라도 왜 사는지, 무엇을 위해 사는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어디를 향해 걷고 있는지 점검하고 성찰하지 않는다면 배부른 돼지와 다를 바 없을 수도 있다. 그래서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자는 건 아니다. 문성훈은 자기 삶의 주인으로 사는 법에 대한 철학적 성찰을 통해 자유 정신을 되찾고 자기 창조적 삶을 권한다. 아모르 파티Amor Fati! 김연자도 외치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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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은 날씨를 바꾼다
서동욱 지음 / 김영사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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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구름이 몰려오니 조심하라 인간들이여!

이렇게 그대가 말할 때,

창조하는 자들은 모두 가혹하다,

이렇게 그대가 가르칠 때,

오 차라투스트라여

그대는 날씨의 조짐에 대해 얼마나 조예가 깊은지!

_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칼 슈미트의 『땅과 바다』는 인류사를 땅과 대양의 힘이 부딪치는 ‘투쟁’으로 요약한다. 자연을 극복하려는 인간의 노력이 곧 문명의 역사다. 생각하는 존재로서 인간은 이성과 합리성의 지배를 받지만 인식론과 존재론으로 모든 걸 설명할 순 없다. 여전히 ‘감정’ 혹은 ‘감성’의 영역에서 벗어날 수 없는 한계, 아니 특징과 개성을 전제로 선택과 판단을 가늠할 수 있으며 삶의 목적과 가치, 즉 “뭣이 중헌디?”를 결정한다.

바람이 머물 순 없다. 오늘처럼 구름 낀 하늘에도 별은 사라지지 않는다. 철학은 날씨를 바꾸는 게 아니라 오히려 날씨가 철학적 관점을 흔드는 게 아닐까. 서동욱의 에세이는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 밀란 쿤데라의 『불멸』, 황지우의 〈거룩한 식사〉, 플라톤의 『국가』, 로베르트 발저의 『산책자』, 장자크 루소의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헤로도토스의 『역사』, 마틴 버낼의 『블랙 아테나』등 고전과 문학과 사회학의 명저가 망라한다. 풍요로운 지적 산책에 동참하면 눈과 귀가 즐겁고 시야가 트이며 생각은 깊어지고 생각은 맑아진다. 현실을 벗어난 자리에 철학이 놓이는 게 아니라 철학적 사유로 현실을 긍정 혹은 부정하려는 태도가 낯설어 보이지만 자기 삶을 향유하고 그 깊이를 더하는 건 순전히 독자의 몫이 아닌가.

달콤한 말 한마디의 위로는 적지 않으며, 공감을 이끄는 한 문장이 힘을 주기도 하지만 시시각각 변화무쌍한 현실과 매번 좌절하고 마는 연약한 결심과 ‘노오력’의 결과를 차분히 살피려면 생각의 근육이 필요하다. 닭가슴살과 계란을 챙겨 먹는 노력만큼 중요한 철학적 사유는 어떻게 채워질 수 있을까. 대개 책을 읽는 행위가 가장 무용하지만 아름답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현실을 도피하거나 망각을 위한 독서를 즐기는 사람도 나쁘지 않다. 그러나 가장 치열한 투쟁의 도구로서 책, 자기 삶의 문제 해결을 위한 독서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서동욱의 에세이는 기생충과 예술, 우울과 여행, 남녀관계, 인공지능, 근대와 주체, 염세주의, 느림과 환생, 나이듦과 죽음 등 매우 현실적이며 철학적인 주제를 고루 다룬다. 형식과 내용에 갇히지 않고 다양한 이야기가 두서없이 펼쳐지지만 각각의 주제에 천착하는 사유의 밀도는 단단하다. 끝끝내 밀어붙이지 못하고 ‘타협’하는 게 옳은 선택이 아닐 때가 많다. 언제나 경계에 서성이다 금을 밟고 후회한 적이 많다. 그 결정적 순간들, 선택의 무게와 책임 앞에서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를 찾거나 적당한 합리화 과정을 거쳐 인지 부조화를 극복한다. 그래야 살 수 있으니까. 내일을 포기할 수 없으니까.

위안의 말 대신 산책을 권한다. 걷고 움직이며 생각을 정리하고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면 죽는다. 의학적 죽음이 아니라 성장을 멈추면 존재론적 사망 선고를 받는 법이다. 아무도 손 내밀지 않아도 혼자 걸을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한다. 현실은 잔인하고 미래는 암울하다. 누구도 알 수 없는 내일은 결국 지금, 여기 각자의 생각과 태도가 결정하는 게 아닌가. 흐린 날이다. 이런 날 황지우는 “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앉아 있을 거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온갖 고생에서 서리 같은 귀밑머리가 많아짐을 슬퍼하니,

늙고 초췌해져 이젠 흐린 술잔마저 멈추었네.

_두보, 〈등고登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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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에릭 와이너 지음, 김하현 옮김 / 어크로스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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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음악가 마일스 킹턴Miles Kington은 이렇게 말했다. “지식은 토마토가 과일임을 아는 것이다. 지혜는 과일 샐러드에 토마토를 넣지 않는 것이다.” 지식은 안다. 지혜는 이해한다. - 6쪽

에릭 와이너는 「들어가는 말」에서 지식과 지혜의 차이를 설명하려 애쓴다. 정보와 지식을 개인이 암기하고 저장했던 노하우know-how 시대를 지나 노웨어know-where 시대에 접어든 지 오래다. 그러나 아날로그의 추억은 레트로 감성으로만 소비되는 게 아니라 실생활의 습관과 태도로 각인되어 사고방식과 일상생활을 지배하기도 한다. 디지털 세대에게 정보와 지식은 검색의 대상일 뿐이다. 숙련된 기술과 전문가의 권위를 인정받는 각종 자격증과 시험 제도는 인간의 어떤 능력을 측정하기 위해 남아있는 걸까. 인공지능과 chatGPT로 인한 변화와 기술 발달의 속도에 적응하지 못한 인류 사회의 낡은 제도는 아닐까. 이제 인간의 능력은 무엇으로 그 차이를 구별할 수 있을까.

인터넷 알고리즘과 추천 영상에 갇힌 현대인의 일상은 시공을 초월한 듯 보이지만 거대한 그물에 포획된 일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미 정해진 길만 달리는 기차의 지루함은 안정성의 다른 이름이다. ‘일관성은 상상력 없는 자들의 마지막 피난처’라는 오스카 와일드의 충고가 자주 떠오른다. 습관적 사고와 행동, 일상의 루틴, 기차 레일이 모두 상상력의 부재를 증명하는 게 아닌가. 과거에 비해 상상할 수 없는 지식과 정보를 양산하고 활용하며 속도전을 치르는 인류의 삶은 조금 더 나아졌을까.

철학은 때때로 앎이 아니라 이해와 통찰의 중요성을 확인시켜 준다. 안다는 착각만큼 위험한 생각도 드물다. 내가 너를 안다, 그 사건은 내가 좀 안다, 그걸 아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소크라테스는 문답법을 통해 무지를 깨닫게 했다는데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의심과 질문을 이어가고 있는가. 지식과 정보를 찾아서가 아니라 지혜를 찾아 떠다는 저자의 기차여행은 따분하고 지루하다. 분명한 해답, 확실한 깨달음, 차별화된 비법을 전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14명의 철학자를 찾아 떠나는 긴 여정에 동행한 독자들은 각자의 삶을 ‘성찰’하지 않았을까. 기억과 회고만큼 부정확하고 주관적인 사유 방식은 없다. 이것이 때로는 마르셸 프루스트처럼 거대한 문학적 성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자기만의 생각의 방에 갇히는 지름길이 되기도 한다. 어차피 객관적 진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믿는 모든 사실fact은 자기 합리화 과정일지도 모른다. 수학에 바탕을 둔 과학적 세계관으로 무장해도 우리는 길을 잃고 헤맨다. 루소처럼 걷는 법을 배우고, 간디처럼 싸우는 법을 익히며, 보부아르처럼 늙어가는 법을 터득해도 모든 순간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후회와 아쉬움을 남기지 않기 위해 몸부림치지만 어제는 돌아오지 않고 내일의 일은 아무도 알 수 없다.

촉촉하게 내리는 봄비가 그치면 벚꽃이 필 테다. 소크라테스를 소환하지 않는 시대가 도래할까. 자기 삶의 목적지가 아니라 방향과 태도를 점검하는 일은 실천과 행동으로 확인할 뿐이다. 어쩌면 에릭 와이너는 기차를 타고 여행을 하는 동안 철학자들을 소환한 게 아니라 함께 여행하는 딸 소냐에게 건네는 사랑과 응원의 당부가 아니었을까. 아주 조금 먼저 살아본 자들의 경험적 꼰대론이 아니라 같이 고민하고 각자의 길을 찾으려는 과정이 소중해 보인다. 길을 잃어도 괜찬다, 시간은 언제나 부족하다. 다만, 작은 변화와 새로운 도전이 없는 지루한 삶에서 행복을 찾는다면 가끔은 에피쿠로스나 시시포스의 조언도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스마트워치와 퇴직연금은 점점 나아지고 있다는 환상, 삶이 유의미하다는 환상을 준다. 우리는 방금 태운 칼로리와 모아둔 돈을 들여다보며 어딘가로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내 삶은 유의미해. 내 손목 위의 작은 스크린 속에서 의미가 환하게 빛나고 있는 게 보여. 하지만 스마트워치를 찬 시시포스의 삶은 스마트워치 없는 시시포스의 삶과 똑같이 부조리하다. - 4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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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용론 한길그레이트북스 144
볼테르 지음, 송기형.임미경 옮김 / 한길사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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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이후 벌어졌던 참혹한 살육과 잔인한 복수는 ‘아우슈비츠’로 상징되는 제노사이드의 기원이 아닐까 싶습니다. 가톨릭과 개신교 그리고 유대교는 모두 하느님을 섬깁니다. 한 부모에게서 태어난 자식들 간의 처절한 증오와 절멸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인간의 행동이라고 믿을 수 없는 끔찍한 일들이 수없이 벌어졌습니다. 야만의 시대를 지나 이성의 빛이 스며듭니다. 볼테르는 ‘이제 그만!’이라고 외칩니다. “고마 해라, 마이 묵읏다 아이가.” 영화 <친구>의 대사가 생각났습니다. 철저한 가톨릭 신자인 볼테르는 개신교를 이해할 수도 수용할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이건 아니다 싶었던 거죠. 그러나 생각이 조금 다르다고 해서, 하느님을 믿는 방법이나 성경 해석 몇 줄 때문에 폭력과 살인을 계속할 수는 없지 않느냐는 이성적 호소이자 애타는 절규입니다. “진짜 그만들 하라고!!!”

물론 볼테르의 이야기를 귀담아 듣는 사람이 얼마나 있었을까요. 한 사람의 목소리가 세상을 울리고 한 사람의 행동이 변화를 일으키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타인의 공감과 변화를 이끌어내는 건 설악산 흔들바위를 옮기는 일보다 어렵습니다. 지지하는 정당을 바꾸고 응원하던 프로야구 팀을 바꾸는 일보다 훨씬 힘듭니다. 그러니 그만 싸우고 이제 나만큼 너도 중요하다는 사실만큼만 인정하자. 이해할 수 없어도 서로 죽이지는 말자. 맘에 들지 않는다고 칼로 찔러서야 되겠느냐.

나는 당신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그 의견 때문에 박해를 받는다면 나는 당신의 말할 자유를 위해 끝까지 싸울 것입니다. - 볼테르

우리가 자주 인용하는 볼테르의 이 말 한마디가 똘레랑스tolérance의 본질이 아닌가 싶습니다. 민주주의의 기본질서는 획일과 강요가 아니라 다양성에 대한 존중입니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토론과 타협의 길을 찾아야 합니다. 1534년 마르틴 루터가 독일어로 신약을 번역 출간합니다.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인쇄술은 불의 발견, 직립보행, 농경으로 인한 정착생활 이후 가장 강력한 혁명적 변화였습니다. 지식의 독점 시대가 종말을 고했습니다. 라틴어로 된 성경을 읽고 하느님의 말씀을 해석해주던 성직자들의 충격보다 다이렉트로 하느님의 음성을 듣게 된 사람들의 감동이 훨씬 컸습니다. 그러니 이제 누구나 자기 생각과 믿음을 갖는 시대가 열립니다. 종교적 도그마는 종파와 무관하게 한 개인을 넘어 집단적 무의식으로 자리잡습니다. 신들린 사람들의 말과 행동을 이성으로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볼테르는 지난 역사를 돌아보며 피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칼라스 사건이 기폭제가 되어 써내려간 이야기는 한숨과 울분이 뒤섞여 있고 이성과 감정이 엉켜 있습니다. 무엇보다 놀라운 건 종교를 떠나 현재 우리가 사는 대한민국의 현실이 별반 다르지 않다는 점입니다. 모임에 참석하신 분들이 들려주신 이야기들이 각자의 상황과 위치에서 어떻게 타인과 세상이 작동하고 있는지 간접적으로 설명해 줬습니다. 특히 자본주의 시스템을 무너뜨리는 경제사범이나 유아 성범죄에 대한 불관용, 편견과 불안은 인정욕구에 대한 부작용이라는 지적,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생존 수단으로서의 의도적 냉소와 본능적 구별짓기 등에 대한 이야기가 가슴 한켠을 두드렸습니다.

관용은 남의 잘못 따위를 너그럽게 받아들이거나 용서한다는 뜻입니다. 똘레랑스와는 맞지 않는 번역어입니다. 개념 자체가 다르니 새로운 한국어 단어를 만들거나 번역어를 그대로 사용해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컨실리언스consilience라는 개념을 ‘통섭’으로 설명한 최재천과 이후의 논쟁들이 대표적입니다. 잘못 사용되면 ‘용서’ 혹은 ‘너그러운 태도’ 쯤으로 해석될 수 있으나 똘레랑스는 상대방을 향한 존중입니다. 타인의 생각과 태도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내가 존중받는 건 불가능합니다. 전제조건은 아니겠으나, 개무시 당하지 않으려면 어느 누구도 어떤 이유로도 무시하지 않아야 합니다. 성별, 종교, 인종, 나이, 직업, 학력, 장애, 성적지향, 출신지역에 따라 ‘차별’하는 마음과 태도가 내안에 숨어 있다면 드러나지 않도록 조심하고 티나지 않게 숨겨야 하는게 세상을 살아가는 최소한의 예의입니다. 그것이 인간에 대한 기본 도리이며 스스로를 지키는 방법입니다.

사회심리학자 고든 올포트는 “관용의 한 중요한 요인은 우리가 그리 잘 알지 못하는 어떤 능력이다. 이 능력은 때때로 공감empathy이라고 불리는데, ‘다른 사람을 파악하는 능력’, ‘사회적 지능’, ‘사회적 감수성’이라고 할 수도 있고, 풍부한 의미가 담긴 독일어 단어를 비리자면 ‘인간 이해Menschenkenntnis’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공감하지 못하면 차별과 편견이 생기고 똘레랑스와도 멀어집니다. 말하자면 사회적 감수성은 인간의 본능이 아니라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한 인간의 능력에 해당하므로 부단히 노력하고 꾸준히 학습해야 하는 태도일 것입니다.

키케로는 “Cui bono(누가 이득을 보는가)?”라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누구에게 이익이 돌아가는 지 살피라는 말입니다. 이해관계에 따른 관용과 불관용이 결정된다면 이기적 욕심과 똘레랑스를 착각하는 일일 겁니다. 모임에 참석하신 분의 지적대로 똘레랑스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박해’하지 않는 정도의 합의도 이뤄지기 어려운 실정입니다. 일상생활은 물론 정치,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는 불관용의 정신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 사람들이 인식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유튜브 알고리즘에 길들여져 점점 좁고 깊은 자기만의 프레임 속에 갇혀 살게 됩니다.

19세기 말에도 볼테르처럼 용감하게 ‘나는 고발한다’라고 외친 에밀졸라는 드레퓌스 사건을 다시 한번 세계사의 중심으로 끌여들입니다. 프랑스의 지적 전통과 지식인들의 단호한 목소리가 부러울 따름입니다. 홍세화의 『나는 파리의 텍시 운전사』(1995)가 출간된지 30년이 다 되어 갑니다. 당시 똘레랑스에 대한 관심만큼 우리의 생각, 말과 행동은 조금 나아졌을까요. 우리 사회는 나와 다른 타인의 생각과 태도를 ‘인정’하고 대화하며 타협하는 문화를 갖게 됐을까요. 기득권의 카르텔에 침묵하며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눈감고, 주변 사람들과 내 일상에 변화를 가져오지 못한다면 우리가 사는 내일은 또 어떤 모습일까요. 일요일 밤 늦은 시간까지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이런저런 생각에 늦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오늘 아침 모두들 각자의 삶 속으로 또 치열하게 달리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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