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타닐 - 기적의 진통제는 어쩌다 죽음의 마약이 되었나
벤 웨스트호프 지음, 장정문 옮김 / 소우주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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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자본주의를 통제하기 어렵다면, 신종 마약 거래를 통제하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 37쪽

2023년 8월, 신모씨는 오후 8시쯤 서울 강남구 신사동 압구정역 4번 출구 인근 도로에서 롤스로이스 차량을 운전하다가 인도로 돌진해 20대 여성을 뇌사 상태로 만들고 도주했다. 검찰에 따르면 신모씨는 사고 전날 오전 11시부터 오후 8시까지 성형외과에서 시술을 받은 뒤 미다졸람, 디아제팜 등 향정신성의약품을 두 차례 투약하고, 정상적인 운전이 불가능한 상태에서 차량을 운전한 것으로 조사됐다.

비판적 관점으로 언론을 바라보면 가짜뉴스의 함정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팩트체크 능력을 스스로 기를 수 있다. 한스 로슬링은 『팩트풀니스』에서 전문가와 지식인조차 속기 쉬운 팩트와 확증 편향에 대해 점검한 적이 있다. 인지부조화를 극복하기 위해 자신의 정치적 신념, 종교적 믿음에 부합하지 않는 객관적 사실을 거부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주변에서 자주본다. 학력, 직업과 무관하게 타인과 세상을 바라보는 왜곡된 시선은 짤막한 뉴스에서도 예외가 될 수 없다.

마약 사건과 뉴스가 자주 등장하는 건 언론사 데스크의 선택과 집중 덕분일 수 있다. 매일 벌어지는 비슷한 사건, 사고 중 뉴스의 헤드라인을 장식할 주인공, 신문에 실리지도 않는 기사가 어디 한 둘인가. 중요한 건 과거에 비해 최근들어 마약 중독자의 수가 급격하게 증가했거나, 사회적 영향이 심각해졌는지의 문제다. 신모씨 뿐만 아니라 재벌 2세, 정치인 자녀 등 마약에 접근할 수 있는 능력과 재력을 보유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복용자를 늘리기 위해 싼값의 마약류, 향정신성 의약품이 할인 판매를 하거나 다량으로 살포됐다는 흔적은 발견하기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변에서 이제 어렵지 않게 마약 복용과 관련된 사람들, 뉴스를 접하게 됐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탐사 전문 기자 벤 웨스트호프의 『펜타닐』은 언론의 역할과 기능을 상기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문제의 원인, 사건의 본질을 따라가며 객관적 사실을 확인하고 인과관계에 합리적이고 이성적 판단을 돕는 사회의 등불 역할을 해야 할 언론을 비교, 평가해 보면 우리 사회의 현재와 미래가 선명하게 보인다.

미드 <페인킬러PainKiller>는 옥시코돈으로 억만장자가 되는 퍼듀제약 회사의 실화를 다룬다. 이 책에도 소개되는 이야기의 일부다. 펜타닐Fentanyl은 마리화나, 대마초처럼 자연에서 채취한 환각제가 아니라 실험실에서 제조된 오피오이드를 일컫는다. 마약성진통제로 개발된 약품의 오남용을 지적하기 위한 책이 아니라 펜타닐로 대표되는 새로운 약물의 등장 메커니즘을 파헤치고 다크웹과 결합된 유통, 공급 과정을 파헤치는 르포다. 중국 현지까지 찾아가는 위험을 감수하며 모스크바, 뉴질랜드, 멕시코에 이르는 마약류의 과거와 현재를 살핀다.

미국은 오늘도 ‘좀비마약’ 펜타닐 제조, 유통 중국 기업과 개인에 대해 무더기 제재를 발표했다. 펜타닐은 모르핀보다 50~100배 강력한 마약성 진통제다. 카펜타닐 등 수많은 변종을 양산했으나 시작은 선한 목적이었다. 고통을 덜기 위한 약물. 그것이 펜타닐의 본래 기능이었다. 그러나 오펜하이머가 살상용 핵무기를 만든 것처럼 어떤 과학, 기술의 발전도 오히려 인간에게 죽음과 고통을 줄 수 있다.

때때로 차라리 죽음을 원할 만큼 커다란 고통을 경험한다. 육체적 고통보다 잔인한 정신적 고통을 주는 타인 혹은 세상을 향한 반항으로 자살을 선택하거나 반사회적 행동을 하는 경우도 있다. 펜타닐은 우리 시대, 인류가 겪는 고통을 상징하는 게 아니라 피폐해진 영혼과 바늘이 고장난 삶의 나침반을 불안하게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는 희망이 아닐까. 아니러니하게도 환각의 세계는 현실보다 행복하고, 현실은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의 고통을 선물하기 때문이다.

1959년, 벨기에 천재 화학자 폴 얀센이 개발한 펜타닐은 말기 암 환자의 극심한 통증을 완화하는 기적의 진통제로 칭송받았던 펜타닐. 그러나, 치사량은 단 2mg! 선악의 저편을 넘나드는 두 얼굴의 약물. 결국 인간의 선택과 자유의지 문제로 치부할 수만은 없다.

놀랍게도 여러 법 집행관과 마약 딜러를 포함한 대다수가 피해 감소의 필요성에 대해 이야기했다. 마약 금지론자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면서, 사용자를 투옥하는 것보다 NPS의 부정적인 영향을 제한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표라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 3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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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과 바람과 별과 인간 - 원자에서 인간까지
김상욱 지음 / 바다출판사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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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 중 하나인 환원론은 전체는 부분의 합보다 크다는 논리 앞에 무력하다. 급기야 에드워드 윌슨은 ‘통섭consilience’을 들고 나왔으나 번역어에서부터 논쟁이 여전하다.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만물의 끝판왕인 원자는 인간은 물론 산과 바다 하늘과 우주를 이해하기 위한 출발 지점이다. 김상욱은 만물의 근원인 원자를 들여다보는 물리학자다. 원자가 사는 세상은 수학이 지배하는 차가운 곳이지만 『떨림과 울림』에서 보여준 그의 온기와 상상력은 이 책에서도 여전하다. 윤동주의 시집 제목에 인간을 보탠 아이디어가 누구의 것이든 물리학적 상상상력이 인문학과 만났을 때 얻을 수 있는 효과는 ‘시선’ 혹은 ‘관점’이다. 낯설게 보는 연습도 필요하지만 이미 전혀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려는 ‘노력’과 ‘태도’가 중요하다는 걸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책의 구성과 체계는 명확하다. 1부에서는 원자 이야기로 시작한다. 2부에서는 지구와 태양, 3부에서는 생명, 4부에서는 인간을 다룬다. 1, 2부가 물질의 세계라면 3, 4부는 우리들의 이야기다. 인문학적 상상력이 결여된 과학은 공허하고, 과학적 사고가 부족한 인문학은 허무하다. 물리학자도 결국 질문의 끝은 말할 수 없는 부분, 어쩌면 밝혀지지 않을지도 모르는 경계 지점에 닿기 마련이다. 오직 알 수 없을 뿐이라는 선문답을 하자는 게 아니다. 물질과 비물질, 양성자와 전자, 인간과 세상 사이를 가르는 경계뿐 아니라 기본 입자에서 원자로, 원자에서 분자, 분자에서 생명으로 창발하는 과정의 신비는 여전하다.

과학이 호기심의 영역이라면 철학은 질문은 영역이다. 비슷한 듯 다른 두 영역은 스스로 묻고 답하거나 관찰하고 연구하며 인과관계를 밝힌다. 분명한 근거와 합리적 설명은 군더더기 없이 논리의 세계를 아름답게 만든다. 그것은 과학과 철학 어느 쪽이든 마찬가지다. 버트런드 러셀은 “과학은 우리가 아는 것이고, 철학은 우리가 모르는 것”이라고 말했으나 과학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우주의 먼지만큼도 안 된다. 당연히 우리가 모르는 것이 훨씬 많다. 겸손은 태도가 아니라 경험과 배움의 자연스러운 결과다. 알 수 없는 것을 인정하는 태도가 아니라 알고자 하는 욕망과 의지가 더 필요하다. 물리학자 김상욱은 나름 독자들을 배려하려 ‘쉽게’ 설명하고 있으나 물리, 화학, 생물, 지구에 관한 지식과 구조는 흘려들어도 좋다. 사람마다 이 책을, 아니 어떤 책이든 읽는 목적이 다르다. 읽은 후에 얻는 것과 잃은 것도 다르다. 호기심과 질문으로 가득한 김상욱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인간은 원자에서 출발해서 인간에 이르는 머나먼 여행이다. 동참 여부는 독자의 몫이겠으나 여행 후에 느낀 감상 또한 제각각일 터.

대개 읽을 만한 글을 쓰는 사람들은 분야와 상관없이 벽을 타고 오르는 담쟁이와 같다. 창을 통해 자신이 속한 세계 ‘너머’가 궁금한 사람들이다. 책은 창이다. 벽으로 가로막힌 경계를 넘어 이쪽과 저쪽이 어떻게 다른지, 어떤 관계인지 살피려는 자들의 고민이다. 물리학과 인문학을 통섭하기 위해 이 책이 필요한 건 아니다. 김상욱은 돌멩이와 인간이 결국 원자 수준에서 다를 바 없고 인간은 결국 흙으로 돌아간다는 지극히 과학적인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 이 책을 쓴 것 같지는 않다. 스스로 자기 안에서 길어 올린 질문을 따라간다. 호기심과 질문의 답을 찾는 고민의 과정에 동참을 호소하는 듯 보인다. 다 알고 있는 이의 자만이 아니라 여전히 질문하는 자의 답답함이 느껴진다.

과학은 인간을 다른 존재와 구별하는 이성적 사고의 결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라는 유기체는 지극히 불합리하고 비논리적으로 행동한다. 인간의 한계를 인정해도 일상에서 부딪치는 사람들의 이해할 수 없는 비과학적 사고와 행동에 자주 놀란다. 가방끈의 길이, 직업, 나이, 성별, 종교와 무관하다. 믿음의 영역으로 치환시키거나 인지부조화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자기 합리화를 시도하는 사람들의 말과 행동은 타인과 세상을 불행하게 만든다. 그런 짓을 저지를 수밖에 없는 이유, 상대를 향한 분노와 비난, 억울함과 변명으로 일관하는 태도는 법정에서뿐만 아니라 일상에서 비일비재하다. 과학과 철학의 경계만큼 모호한 옳고 그름, 합법과 불법 사이에서 길을 잃을 수도 있지만 결국 사실은 진실을 밝히며 상황과 맥락은 논리를 뒷받침하기 마련이다.

물리학자의 상상력과 호기심을 위해서가 아니라 내게는 ‘떨림과 울림’의 작가로 기억되는 김상욱의 진지함과 탐구심을 배우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하늘과 바람과 별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인간을 이해할 수는 없다. 그러나 자연과 다른 인간의 놀라운 이야기를 계속 들여다보는 것만큼 흥미진진한 일이 있을까. 사람 사는 세상은 언제나 과학적 상상력을 뛰어넘는 일들로 가득하다. 오늘도 내가 아닌 너, 우리가 아닌 그들이 사는 세상은 많이 다르다. 그러나 너와 나, 우리가 합의할 수 있는 최소한의 세계는 제대로, 단단하게 만들어가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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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대왕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9
윌리엄 골딩 지음, 유종호 옮김 / 민음사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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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악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으며 인간의 도덕 체계가 근본적으로 천박하다는 사실의 새로운 발견이다.” - E. L. 엡스타인

인간과 세상을 보는 상반된 시선은 어느 시대나 갈등과 충돌을 일으켰다. 긍정과 부정, 낙관과 비관, 희망과 절망, 기대와 실망 사이에서 사람들은 서도 다른 말들로 설득한다. 철학자, 사회학자, 소설가, 정치가 등 각자의 위치에서 현재를 살피고 미래를 전망하는 관점이 다르다. 같은 직업, 같은 시기에도 성향과 기질, 경험과 생각에 따라 인간 존재에 대한 평가, 사회 구성체의 향방이 엇갈린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서 있을까.

인간은 언제든 ‘악’을 행할 수 있는 존재다. 생물학적 DNA나 이기적 유전자 때문인지 타고난 본성인지 알 수 없으나 지루한 성선설과 성악설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인간 ‘악’의 본성은 지울 수가 없다. 생존에 위협을 느끼는 상황이 아닐 때, 나와 무관한 일이어도 마찬가지다. 합리화할 수 없는 악행과 사건 사고가 없는 날은 단 하루도 없다. 법과 질서로 통제된 규율 사회가 악을 제거할 수는 없다. 인간 내면의 선한 아이가 숨어 있지만 그 아이들은 대체로 그 존재를 숨기거나 활동 의지가 없는 경우가 더 많다. 한 인간의 선악 갈등, 공동체 내의 선한 인간과 악한 인간이 뒤섞인 사회를 살면서 ‘인간의 도덕체계가 근본적으로 천박하다’라는 엡스타인의 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책꽂이 한쪽 구석에 나란히 서 있는 에드워드 윌슨의 『인간 본성에 대하여』와 스티븐 제이 굴드의 『인간에 대한 오해』를 한참씩 쳐다본다. 생물학자가 바라본 ‘인간’은 데즈먼드 모리스의 말대로 ‘털 없는 원숭이’에 불과한 건 아닌지 모르겠다. 외딴 섬에 불시착한 소년들의 무리는 짐승에 가까운 본성을 드러낼 가능성이 크다. 겨우 초등학생 정도의 나이라면 합리적 이성보다 생존 본능이 앞설 가능성이 높다. 규율과 통제는 인간의 본성과 거리가 멀다. 법과 질서는 군집 생활의 효용 때문이다. 윌리엄 골딩은 이 소설을 통해 “인간 본성의 결함에서 사회 결함의 근원을 찾아내려는 것이 이 작품의 주제다.”라고 말했다. 인간은 완전하지 않다. 의도치 않은 실수를 하고, 누군가는 의도적으로 범죄를 저지른다. 평등하고 정의로운 사회는 상상에 불과하다. 인류는 한 번도 그런 공동체를 유지한 적이 없다. 그 이유가 근본적으로 인간 본성의 결함 때문이라는 윌리엄 골딩은 『파리 대왕』이라는 우화소설로 증명하려 애쓴다.

소설은 대립하는 두 소년 랠프와 잭을 통해 인간 본성의 어둠을 들여다본다. 도덕적 우화이자 정치적 우화소설로 읽으면서 개별 독자들은 무슨 생각을 할지 궁금하다. 인간과 사회의 본질에 대한 깊은 통찰이 이 소설의 미덕이라면 작가의 회의적이고 비관적인 인간관과 사회관에 대한 상찬과 비판이 엇갈릴 것이다. 그러나 그의 말대로 “가장 위대한 생각이란 가장 단순한 법이다.”(194쪽) 절망적인 공포 상황에서 인간의 본성이 드러난다. 자기 안에 숨어 있는 ‘악’이 발현되고 타인에 대한 태도가 드러난다. 사회적 가면인 페르소나가 없는 무인도의 소년들은 점점 본능에 따라 행동한다. 생존에 필요한, 약육강식의 논리대로 움직이는 인간 본성을 비난할 수는 없다. 파괴적이고 잔혹한 충동은 모든 인간의 내면에 숨은 기질일까.

도덕적 알레고리로 가득한 장편소설의 스토리는 단순하다. 점점 가열되는 폭력과 잔인한 행동에 놀랄 무렵 ‘어른’들이 섬에 도착한다. 영국 해군이 문제의 해결사로 등장하는 건 아니지만 소년들만의 세계는 끝이 나고 무인도에서 구조된다. 양계초는 인간이라면 ‘신독愼獨’에 힘써야 한다고 했다. 공적인 장소나 다른 사람과 함께 있을 때가 아니라 방안에 혼자 있을 때가 자신의 본모습이다. 신독은 혼자 있을 때야말로 삼가고 조심해야 한다는 의미다. 타인과의 관계와 시선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말과 행동의 주인으로 살려면 극기하고 신독하여 ‘악’의 본성을 억눌러야 한다는 충고가 아닐까 싶다. 소년들의 리더로 선출된 랠프는 “잃어버린 천진성과 인간 본성의 어둠과 돼지라고 하는 진실하고 지혜롭던 친구의 추락사가 슬퍼서 마구 울었다.” 지도자의 전형을 보여주는 주인공 랠프는 소년이라고 보기 어렵다. 우화소설의 특성상 개별 인물에 대한 몰입도는 낮고 개연성이 떨어지는 묘사가 많다. 행동이 둔하고 겁이 많으며 천식을 앓는 안경 쓴 ‘돼지’, 공포의 대상인 짐승은 소년들의 내면 모습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사이먼, 잔혹한 사형 집행인으로 친구를 고문하는 로저는 랠프나 잭 메리듀와 또 다른 모습으로 다양한 캐릭터를 잘 소화한다.

소설을 읽는 내내 한가지 거슬렸던 점은 번역문의 표현과 문장이다. 문학평론가 유종호의 번역은 가독성을 떨어뜨릴 때가 많았다. 현재 사용하지 않는 한자어, 우리말 어휘는 얼마든지 새로 번역하거나 손봐야 하지 않을까. 예를 들어, “귀쌈을 질러박았다” “납덩이 같은 감정을 치지도외하고” 같은 표현이 무인도에서 겪는 소년들의 심리와 행동 묘사에 어울리는지 의문이다. 얼마든지 편하고 쉬운 우리말로 번역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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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없는 세상 - 개정판
앨런 와이즈먼 지음, 이한중 옮김, 최재천 감수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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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는 숱한 패러디를 낳았습니다. 누군가는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라고 변명하고, 누군가는 그때도, 지금도 맞거나 틀리다고 고집을 부리거나 신념을 지킵니다. 허경은 『나는 맞고 너는 틀리다』에서 “내로남불은 자신의 행위에 대한 판단과 남의 행위에 대한 판단에 일관성이 결여된 경우를, 곧 ‘자신의 행동과 타인의 행동을 재는 잣대가 다른 경우’를 도덕적으로 비판하는 담론이다.”라고 일갈합니다. 인간은 합리적인 존재가 아니라 합리화하는 존재라는 말을 수없이 되새깁니다. 물론 이 자명한 사실조차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만. 인간은 옳고 자연은 틀렸을 리 없습니다. 과학기술과 문명 발달은 선이고 이를 가로막는 생각과 태도가 악일 리도 없습니다.

인간도 동물이고 자연의 일부라는 사실조차 부정하면 논의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나(인간)는 맞고 너(자연)은 틀리다는 논리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특별한 존재라는 자만은 혹독한 대가를 치를 것입니다. 환경의 역습은 기후 변화로 실감하고 있습니다. 그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추측과 주장이 난무합니다. 위기의식은 각자 다르고 일이 터질때까지 비관과 낙관은 교차하기 마련입니다. 물론 그 후에도 인간은 서로의 이기심과 욕망에 따라 전혀 다른 태도를 보일 것입니다. 아비규환은 공포와 불안을 숙주로 삼아 세상을, 아니 인간을 절망에 빠지게 합니다.

앨런 와이즈먼이 인류의 미래를 디스토피아로 그리기 위해 고민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과학자의 위기의식, 자료와 통계가 뒷받침된 이론적 접근으로 가득했다면 독자들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 어렵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해석의 오류, 또다른 자료, 통계의 이면을 들여다보는 반론이 제기되고 후속 논의가 이어졌을 테니까요. 하지만 저널리스트의 글쓰기에는 설득의 힘이 있습니다. 상상력과 스토리텔링의 효과를 적절하게 사용할 줄 아는 저자의 글쓰기 전략은 성공적입니다. 인간이 사라진 지구라는 가정법은 발상 자체가 독특합니다. 실현 가능성이 없는 공상에 불가하지 않다는 사실에 오히려 독자들의 모골은 송연합니다. 인간 없는 세상은 정말 끔찍할까요?

그건 오로지 인간의 관점일 뿐입니다. 우주와 지구의 시간을 다시 돌아볼 필요는 없습니다. 빅뱅부터 현재까지 벌어진 일들을 추억할 수도 없고 겨우 100년을 채우지 못하는 인간은 그렇게 거시적인 안목이 필요치 않으며 하루하루 일상을 견디기 버거울 때도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과학은 단순한 기술의 발전과 달리 인간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조망하는 힘을 가집니다. 인류가 걸어온 시간, 우리가 견디는 삶, 남은 미래가 오로지 과학에 기댈 수는 없지만 저자는 우리에게 관점의 이동을 촉구하는 듯합니다. 인간 없는 세상은 지구에서 그저 하나의 종種이 사라지는 일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인간이 주인이라는 착각, 우리가 지배한다는 오만, 나는 맞고 너는 틀리다는 생각은 고칠 수 없는 역병처럼 인간 세상에서 사라진 적이 없습니다.

‘미지의 세상으로의 여행’은 재밌습니다. 상상의 영역이니까요. 그러나 ‘그들이 내게 알려준 것들’과 ‘인류의 유산’은 동어반복과 익숙한 이야기들로 조금 지루합니다. 마지막 4장, ‘해피엔딩을 위하여’이 인상깊지만, 그리고 당연하지만, 대안과 해결책은 없습니다. 모임에서는 개인의 노력과 한계에 대해 많은 이야기가 오갔습니다. 우리 사회, 아니 공동체가 지향해야할 지점과 자본주의와 기술발달의 장단점에 대해서도 다양한 의견이 오갔습니만, 결론이나 기발한 해결책은 물론 없었습니다. 문제를 인식하고 깊이 고민하며 대화를 나누고 세계를 이해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을 지도 모릅니다. 독서 모임의 한계는 늘 ‘여기까지?’인가 싶기도 합니다. 책이 주는 기쁨과 슬픔, 행복과 고민을 누구보다 잘 아시는 분들과 나눈 소중한 시간을 늘 감사하게 여깁니다. 그럼 또 뵙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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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
브라이언 헤어.버네사 우즈 지음, 이민아 옮김, 박한선 감수 / 디플롯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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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를 찾고자 하는 과학자가 의지해야 할 것은 회의적 태도와 실증적 토론이다. - 303쪽

안씨 집안 셋째 딸 다정이는 첫째 가정이, 둘째 나정이와 달리 차갑기 그지 없다. 안다정이라는 이름만으로도 캐릭터가 분명하게 전달되겠으나 유행하는 MBTI 성격 검사에서도 최상급 ‘T’를 확인했다. 이해와 공감은 다르다. 다정이에게 이해는 이성과 합리의 영역이지만, 공감은 추론과 가능성의 영역이다. 그렇다고 다정이가 소시오패스는 아니다. 단지, 맞장구에 서툴고 립서비스에 약하며 팩트 체크가 분명할 뿐이다. 틀린 게 아니라 다른 걸 모르는 걸까. 안다정은 다정하지 않다는 사람들의 말이 서운해 오늘도 서럽게 눈물짓는다. “야, T발 너 C야?”

감정이 배제된 의사소통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모든 말과 행동에 주관적 해석을 덧붙이거나 개인적 감정을 얹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의 왜곡과 과장에 혀를 내두른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누구든, 어느쪽이든 ‘이해’가 선행되지 않으면서 편을 들거나 욕을 하는 사람들, 인터넷 게시판, 정치인들을 보면 혐오감이 생긴다. 다정함은 감정이 아니라 객관적 이해가 선행되어야 하는 타인과 세계에 대한 ‘태도’가 아닐까.

진화인류학자 브라이언 헤어와 버네사 우즈가 쓴 책, 제목이 이목을 끈다.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와는 다른 형식과 내용이지만 제목이 주는 첫 인상은 그러하다. 제목과 표지에 끌려 책을 사거나 읽는 다수의 독자의 필터링은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지에 대한 심리학적 분석은 논외로 하더라도 모든 책이 널리 읽히려는 욕망에 충실하다는 공통의 목표가 있다는 점에서 충분히 성공했다고 평가받아 마땅하다.

또 다시 등장한 머그샷 장인 트럼프의 등장으로 책의 대부분을 뜯어 고치는 대공사를 감행했다는 설명은 내가 오독한 것일까. 인류의 진화 과정에서 저지른 실수와 오류, 혹은 의도된 사고와 불행에 관한 이야기들을 평생 읽어왔고 앞으로도 읽을 예정이다. 인간이 스스로 자기가축화에 성공하며 정착생활을 통해 공동체의 질서를 만들고 문명을 발달시켜 온 과정은 경이롭지만 박수를 보내고 싶지는 않다. 왜냐하면 이 책의 저자들이 말하듯 ‘Friendiest’가 생존의 유일한 이유도 아니었을뿐더러 친화력이나 협력적 의사소통이 제대로 작동했던 시대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단언할 수 있을만큼 인류의 역사는 개인 혹은 소수에 의해 그 힘과 권력이 작동하는 현실을 수용하거나 저항하는 일상의 반복으로 점철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기가축화 ⇨ 친화력 상승 ⇨ 협력적 의사소통 ⇨ 인지능력 발달 ⇨ 자제력 향상

인간이 진화과정에서 자연선택을 넘어 적자생존의 원리가 적용될 수 있는 요인 중 하나는 ‘친화력’이라는 설명이다. 군집 생활을 하는 동물들의 특징과 장단점, 생존을 위한 그들의 질서와 이기적 유전자와 달리 ‘Friendiest’로 인류의 과거와 현재를 조망하는 아이디어는 이채롭다. 하지만 동전의 양면처럼 가족과 친구, 부족을 향한 편협한 친절과 다정함이 다른 외집단에 대한 차별과 편견으로 이어지며 살인과 제노사이트를 가능케한다. 박한선은 ‘the Friendiest’를 ‘다정多情한 것’으로 번역하면 정분이 넘친다는 뜻으로 오해할 수 있으니, ‘우優’를 제안한다. ‘넉넉하며 도탑고 인정많고 부드럽고 품위있고 뛰어남’은 다정함과 의미 차이가 크다. 감정적 애착, 따뜻하고 부드러움 뿐 아니라 상대를 헤아리며 마음을 쓰는 태도를 포함하기 때문이다. 국어 사전에 정의된 말장난이 아니다. 번역의 실수나 오해가 아니라 한국어의 묘한 뉘앙스 차이가 진화인류학자가 전하고 싶은 깊은 의미를 친절한 웃음과 다정한 말투로 착각하면 곤란하지 않은가.

인류가 걸어온 길, 우리가 지금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과 걷고 있는 목적지가 같을 수는 없다. 그래서 최소한의 합의를 법과 질서로 표현한다. 물론 권력이 집중된 소수에 의해 법은 제멋대로 해석되고 그 법을 다루는 사람들은 법이 자기의 도구인양 커다란 착각에 빠져 허우적대지만 시간은 대체로 ‘진실’의 편에 선다고 믿는다. ‘다정한 것’의 반대말은 ‘냉정한 것’이 아니라 ‘이기적인 것’, ‘일방적인 것’, ‘적대적인 것’ 정도가 아닐까.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 태도, 자신의 말과 행동이 옳다는 오만, 실수와 잘못이 없다는 자만, 반성과 성찰을 모르는 일상이야말로 ‘다정한 것’과 거리가 먼 삶이다. 살아 남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어떻게 살았는지 그 과정과 태도가 더 중요한 게 ‘인간으로서의 삶’이 아닐까.

“사람 자기가축화 가설은 우리가 친화력을 지닌 동시에 잔인한 악행을 저지를 수 있는 잠재력도 지닌 종임을 설명해준다.”라는 말은 제목과 상치된다. 디스토피아를 그린 전망들 속에서 희망을 찾고 싶은 사람들의 욕망에 부합하는 ‘다정함’은 노력하지 않아도 힘들지 않게 마음만 쓰면 되는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확인한다. 친화력은 타자에 대한 이해와 겸손을 바탕으로 환대와 평등의 손짓이다. 진정성을 담은 말과 태도는 아무나 가질 수 있는 삶의 자세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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