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나비와 전사 - 근대와 18세기, 그리고 탈근대의 우발적 마주침
고미숙 지음 / 휴머니스트 / 2006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지금 이 순간도 곧, 과거가 된다. 현재가 과거가 되고 미래가 금방 현재가 되어 버린다. 시간의 모든 주름들 사이로 시간은 하나가 되고 일직선상의 모든 흐름들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순환의 고리가 되는 순간을 경험해 본 사람들은 기차를 타고 공간을 탈주하라. 우리가 발딛고 서 있는 모든 시공간의 의미에 대해 해체와 분석을 시도하고 싶은 욕망이 있는 사람에게 고미숙의 <나비와 전사>는 좋은 지침서가 될 것이다. 근대를 넘어 탈근대 이후의 삶과 앎의 의미를 고민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들이 한번쯤 거쳐 가야할 텍스트로 손색이 없는 훌륭한 책이다.
‘푸코가 고고학적 탐사를 무기로 근대성의 지축을 뒤흔든 전사라면, 연암은 그 위를 사뿐히 날아올라 종횡으로 누비는 나비’라는 저자의 표현은 이 책의 의미 전반을 투사하는 조명등이다. 18세기와 근대 그리고 탈근대가 이루는 세 개의 그물망이 이 책을 가로지르는 의미망이다. 그런데 이 의미망이 만만치가 않다. 그리고 대단히 혼란스러울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고미숙의 의도는 텍스트 전체가 하나의 의미를 전달하는 책이 아니라 사유의 틀을 제공하고 각 장의 의미들이 엮어내는 경계들을 넘나들며 나비처럼 자유롭게 ‘앎의 혁명’을 꿈꾸고 있다.
‘연구공간 수유+너머’의 지식 코뮌에서 숙성된 고미숙의 글은 ‘그 밖의 것들’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학문적 틀 안에 갇힌 아카데미즘과 학술 보고서에 기초한 죽은 지식들의 파편들을 해체한 후, 죽어버린 지식과 인식의 틀을 바로 잡고 인공호흡을 통해 생명의 따스한 온기를 불어 넣는 신통력을 발휘한다. 이 신통력은 사이비나 이단, 사파로 분류될 수 없는 강렬한 흡인력을 갖는 이유는 당연하게도 뛰어난 글쓰기 능력 때문이다. 이 능력은 독자에게 충분한 설득력과 긴장감을 동시에 공급한다. 18세기의 동양사를 가로지르는 깊이와 넓이는 설득력을 높이는 지적 헛기침이 아니라 자유롭게 확대 재생산된다. 적절한 인용과 글의 흐름에 탄력을 붙이는 솜씨가 일품이다. 같은 재료를 가지고 고미숙만한 성찬을 준비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자신의 스타일을 만들어가는 스타일리스트의 일면을 여지 없이 보여주는 글이다.
‘나비’로 상징되는 박지원의 글쓰기에 숨어있는 유쾌하고 발랄함을 기본으로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를 인용하면서 ‘근대’가 우리에게 무엇이며 어떤 방식으로 다가 왔는지 흥미진진하게 근대의 접힘과 펼침을 반복한다. 이런 방식은 각 장 첫머리에 인용되는 ‘푸코’를 통해 재확인된다. ‘전사’의 냉정함과 날카로움은 고미숙이 꿈꾸는 이중적 방식 중의 하나였겠지만 내용이 아니라 전체를 구성하는 틀과 근대를 바로보는 인식 방법으로 재현된다. 그래서 명확하게 드러나지는 않는다. 연암에게서 춤사위를 빌려 왔으나 안무는 푸코에게 맡긴 것 같다.
느림 또는 시간의 유목주의란 이 ''얼빠진'' 일정표로부터 빠져나오는 것을 의미한다. 코드화된 방향을 벗어나 새로운 리듬을 만드는 것. 삶과 지식의 새로운 배치를 구성하고, 상상력의 새로운 지평을 열고, 이질적인 집단들의 네트워크를 만들 때 속도, 균질화, 화폐의 삼중주는 깨어진다. …… 느림의 또 다른 표상은 자기속도를 지니는 것이다. 순간속도가 강렬도의 문제라면, 자기속도는 이질성과 관련된 사항이다. 노마드의 여정에는 목적지가 없다. 아니, 여정 그 자체가 목적이라고 해야 맞다. 따라서 그는 여정마다에서 마주치는 온갖 대상들과의 능동적 접속을 시도한다. - P. 84
이 책의 출발은 우리가 인지하는 시공간에 대한 개념이다. 여기에서부터 일탈이 시작된다. 직선상의 펼쳐진 팽팽한 긴장감. 이것이 우리의 일상에서 부딪히는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다. 이곳으로부터 탈주해야 우리는 그녀가 안내하는 여행에 동참할 수 있게 된다. 책의 전체 구성은 ‘시공간-인간-성-몸-앎-글쓰기’으로 되어 있다. 11장으로 각 장이 구분되어 있으나 말과 사물들이 두서 없이 충돌하는 자유로운 해방의 공간이다. 여정 자체가 목적인 노마드는 이 책을 관통하는 핵심이다. 인간의 존재와 성(性) 그리고 그것을 가능케하는 몸에 대한 성찰이 안을 들여다보는 과정이라면 앎과 글쓰기는 밖으로 표출되는 존재 방식이다. 고미숙은 인간의 존재 방식으로 글쓰기를 택했다고 스스로 선언한다. 공부해서 글쓴다. 그것이 내가 존재하는 이유라고 당당하게 외친다. 부럽다! 젠장!
그러나 그 당당함과 유쾌함에 독자들은 두 손을 들 수 밖에 없다. 최근에 읽었던 수잔 손탁의 <은유로서의 질병>, 홍대용의 <의산문답> 등 근대를 이야기하는 중요한 주제와 관심사, 필수적인 저작들이 절묘하게 녹아 있기 때문에 편안하고 쉽게 쓰여진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완전히 소화해내고 적절하게 버무리는 솜가 일품이다.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이 바로 여기에 있다. 600페이지에 달하는 두꺼운 텍스트가 이렇게 재밌게 읽히는 것은 독립적인 장과 절들의 재미와 유기적인 연관성 때문일 것이다. 그러면서도 특별한 주장이나 핵심적인 요소도 두드러지지 않는다. 지식들간의 합종 연횡, 주름들 사이를 가로지르는 여유, 깔끔하고 탄력적인 문장들의 조합은 이 책의 가치를 배가 시켜준다.
이 책의 고별사에 적힌 다음 글에 공감하며 나도 평생 공부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공부는 더 이상 취미나 교양이 아니다. 더 이상 소위 전문가 집단이 독점하는 사적 소유물이 아니다. 한번 생각해보라. 우리네 삶에서 날마다 하고, 평생을 해도 변함없이 삶을 풍요롭게 해줄 수 있는 것이 공부 말고 달리 무엇이 있는지를. 그러므로 대학 안에 있건 없건 누구나 평생 배워야 한다. 아무런 실용적 목적이 없어도 공부할 수 있을 때, 그때 공부는 비로소 최고의 지식이면서 동시에 자기 삶을 통찰하는 지혜의 수행이 된다.
공부와 일상이 이렇게 오버랩될 때, 지식은 비로소 근대적 표상으로부터 탈주하여 삶의 역동적 흐름 속으로 진입할 수 있으리라. "마음을 비워 공부함에 있어 사해(四海) 안에 모두가 형제(兄弟)이며, 중생(衆生)이 모두 깨달음의 스승들이다." 고로, 공부에 외부는 없다. 공부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 P. 592
060512-0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