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당신 문학동네 시집 71
김용택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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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당신


잎이 필 때 사랑했네

바람 불 때 사랑했네

물들 때 사랑했네

빈 가지, 언 손으로

사랑을 찾아

추운 허공을 헤맸네

내가 죽을 때까지

강가에 나무, 그래서 당신


‘그래서’는 앞뒤의 문장을 인과 관계로 연결할 때 사용하는 접속사다. 원인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결과가 ‘당신’일 경우 독자는 당혹스럽다. 혹은 그 결과에 대한 원인으로 ‘당신’을 지목한 경우에는 결과에 주목하게 된다. 섬진강 시인 김용택의 새 시집 <그래서 당신>의 표제작은 두 어휘의 사소한 부딪힘으로 상상의 힘을 발휘하게 한다. 위 시를 읽고나도 물론 쉽게 고개를 끄덕이기 힘들다. 논리적 관계를 무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장과 문장 사이에 불거진 의미들은 영원한 사랑에 대한, 혹은 사랑의 고통에 대한 시인의 통찰을 단순하게 상상하기 쉽다. 쉽지 않다는 얘기는 당신과 사랑 사이의 의미다. 지금까지 사랑을 찾아 헤맸지만 결국 죽을 때까지 강가에 서 있는 나무처럼 움직이지 않는 사랑을 곁에 두고 허공을 헤맸다는 이야기인가 하면 영원히 찾지 못하다가 결국 강가에 나무처럼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삶이라고 말하는 것인지 사랑과 당신의 의미를 찾아내는 일은 물론 독자의 몫이다.

또 하나, 이 시의 특징은 한 행이 한 연을 이루고 있는 긴 호흡이다. 한 연에서 다음 연으로 읽어나가는 동안 한 호흡을 가다듬고 한 행을 읽는다. 긴 세월의 흐름이나 오랜 기다림의 시간으로 느껴진다. 시의 형식은 단순히 짧은 문장 구조 뿐만 아니라 내적 깊이와 의미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차분하고 정갈한 마음으로 음미하면서 읽어도 좋고 한줄 한줄 새겨 읽어도 좋겠다.

이렇게 이 시집의 대부분의 시들은 짧은 문장과 절제된 언어로 대상과 감정을 묶어 놓는다. 그 대상이라는 것이 다양하지 않고 선명한 데서 우리는 맑은 물과 같은 감동을 전달 받을 수 있다. 시인의 삶이 곧 시가 된다고해서 시인의 삶을 경의롭게 바라보거나 강가의 초등학교 교사라는 외적 조건이 시의 의미를 규정짓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다만 삶을 대하는 태도와 방법이 투명하고 정갈한 것만은 분명하다. 거기에는 자연과의 호흡이 혼연일체를 이루고 있다. 나무와 바람과 강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흰 종이 위의 먹물이 번지듯이 자연스럽게 배어 있다. 작위적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그 마음들을 읽어내는 능력의 탁월함이 김용택 시의 진경이다.


그리움

바람이 불면

내 가슴속에서는 소리가 납니다


문학 소년, 소녀 시절 한 번씩 연습장에 끄적여 보았을 ‘그리움’에 대한 그 무한한 상상력과 감수성들을 시인은 두 줄로 말한다. 바람이 불면 내 가슴속에서 소리를 내는 자연스러움과 긴 설명이 필요없는 공감대가 그것이다. ‘사랑’이라는 다음 시도 마찬가지다.


사랑

밤길을 달리는데
자동차 불빛 속으로 벌레들이 날아와 유리창에 부딪혀 죽는다

필사적이다



목숨을 걸고 달려드는 벌레들의 맹목적 죽음은 자동차의 속도에 기인한다. 그러나 발상의 전환은 사랑을 부른다. 必死 - 반드시 죽겠다는 말이다. 목적도 없이 왜인줄도 모르고 목숨을 거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외치는 벌레의 말없는 죽음들이 인간의 사랑을 돌아보게 하는 것이다. 추상적 관념에 대한 명확한 제시는 의미를 한정시킬 수 있다는 단점이 있지만 보다 명확하게 시인의 목소리를 전달한다. 표현속에 도드라지는 생각이 낯설고 감각적이다. 하지만 그 감각이 선동적이거나 톤이 높지는 않다. 잔잔하고 조용한 목소리로 우리들 삶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이 이 시집의 장점이다.


화무십일홍

앞산

산벚꽃

다 졌네

화무십일홍, 우리네 삶 또한 저러하지요

저런 줄 알면서 우리들은 이럽니다

다 사람 일이지요

때로는 오래된 산길을 홀로 가는 것 같은 날이 있답니다

보고 잡네요

문득

고개 들어

꽃,

다 졌네


꽃이 다 질 때까지 누군가 문득 보고 싶은 것이다. 삶이다. 권불십호년權不十年이고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는 말은 생의 덧없음을 빗대는 흔한 표현이다. 그래서 더 큰 울림을 가져온다. 오래된 산길을 홀로 걷듯이, 누군가 보고 싶은 날들이 있는 있는 것처럼 그렇게 쉽게 생은 지고 만다. 그래서 시인은 마지막으로 ‘삶’이라는 제목의 시를 겁?없이 네 줄로 마감한다. 하지만 우리들 생이 도달하기 힘든 경지에 서 있다. 이런 모습으로,



내가 가는 길에
눈길 닿을 티끌 하나
겁먹은 삭정이 하나
두지 마라



060601-0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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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8-08-14 2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 포털 사이트 블로그 안부게시판에 시인 추천 해 달라고 한 1인 들렸다 갑니다.ㅡ,.ㅡ
일단 안도현씨 하고 김용택씨 대표작 부터 쭈욱 한 번 훑어 볼라고욥. (원래는 추천해 주신 분들 시집 중 대표작들 다 사려고 보관까지 해 놨는데, 다른 책들의 유혹 또한 못이겨 그만..ㅡ_ㅡ;;)추천보단 땡쓰2가 더 좋겠죠?!..ㅋㅋ 그런데, 이런....본의 아니게 백수 수준에 걸맞는 보답만 해 드리고 가는 듯...-_-;; 그나저나 이 책 리뷰 중에 힘님 꺼 바로 아래 있는 분의 리뷰도 참 인상적이었다는. 그래서 그 차이에 더 땡겼다죠~~~~^3^ 사진 또한 시라죠.. 시집을 좀 읽고나면 한 때 전공했던 사진도 취미로나마 본격적으로 다시 시작 해 보려고 한답니다. 그래서 시가 땡겼던 듯... 패션디자인과 사진... 둘 중 하나만이라도 잘하자 해서 사진과는 안녕했는데, 그 인연을 완전 끊어내지 못하고 있었나 봅니다. 아~ 문득 힘님은 구름 겹이 드리워진 저 푸른 하늘을 사진에 담으면서 어떤 시상을 탐하려 했을까 라는 생각 또한 감히 해 보고 갑니다. 그럼, 이만. ^_-

sceptic 2008-08-18 21:09   좋아요 0 | URL
반갑네요...^^

사진 전공하셨으면 한 수 배울 기회를...만들어봐야겠는데요...

때로는 사람보다 하늘이 좋아서요...
 
피버 피치 - 나는 왜 축구와 사랑에 빠졌는가
닉 혼비 지음, 이나경 옮김 / 문학사상사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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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를 좋아하는 사람 중에도 축구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 모든 스포츠가 그렇겠지만 축구만의 독특한 게임 방식이 나름의 특성과 재미를 전해 주기도 하고, 지루함과 답답함을 전해주기도 한다. 공 하나를 놓고 스물 두 명의 성인 남자들이 목숨을 건다. 축구의 룰이 다른 스포츠에 비해 간단하다는 것은 큰 매력이다. 손을 사용하지 않고 온 몸을 이용해서 상대방의 골대 안에 집어넣으면 된다. 얼마나 단순하고 깔끔한 규칙인가. 전문 용어를 몰라도 전술을 이해하지 못해도 좋다. 서로 뺐고 뺐으려는 일련의 충돌과 집착, 열정과 몰입이 보는 사람에게 전이된다. 축구를 전쟁에 비유하기도 하고 인생에 비유하기도 한다. 물론 많은 스포츠가 세상사에 비유되기도 하지만 축구만큼 인간의 전쟁과 닮은 경기는 없다. 영국에서 출발한 축구가 전 세계로 확산되기 시작한 것은 제1차 세계대전과 무관하지 않다.

영국인들에게 축구는 종교와 유사하다고까지 할 수 있다. 특히 <비버 피치>의 저자 닉 혼비같은 열성 팬의 경우는 종교보다 축구가 우선한다. 태어나면서부터 각 지역 연고팀과 끈끈한 유대관계 속에서 국가대표 팀보다 지역 연고 축구 클럽에 대한 애정과 정성이 훨씬 더 강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모습처럼 보인다. 생활과 축구가 분리되지 않는 상태인 저자에게 객관적인 시선과 축구에 대한 다양한 즐거움을 찾아내는 것은 부질없다. 이 책을 통해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축구를 얼마나 좋아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저자 닉 혼비는 말한다. 나만큼 축구 좋아하는 사람 있으며 나와 바라고. 없을 것 같다.

캠브리지 출신의 작가 닉혼비가 축구에 대한 열정이 어느 정도인지, 축구를 좋아한다고 말을 하려면 어느 정도가 되어야 하는지 반성(?)하게 하는 책이다. 쉽게 말하면 닉 혼비는 축구에 미친 놈이다. 어느 분야든 매니아는 있게 마련이다. 정도가 다르고 몰입의 깊이가 다를 뿐이지만 우리 주변에는 자기 생의 한 부분을 차지하는 아주 중요한 면을 가진 사람을 보면 충분히 행복해 보인다. 그것은 돈과 명예와는 무관하다. 물론 경제적인 부분이 뒷받침되어야 하지만 그걸로 해결되지 않는 나름의 독특한 즐거움을 찾아내고 즐기는 사람들이 가장 부럽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그것이 생의 즐거움이나 인생의 목적과 직결되기도 하니까. 닉 혼비는 인생과 축구가 혼연일체다. 그가 응원하는 아스날의 경기결과와 시즌 성적이 그의 생활과 인생과 기분을 좌우한다. 이 정도면 그에게 아스날은 축구 클럽이 아니라 하나의 종교다.

닉 혼비는 스스로 말한다. 나는 강박증 환자라고. 주변 사람들이 얼마나 힘들어하는지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고치거나 바꿀 생각은 없다. 왜냐면 노력한다고 해서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스스로 알기 때문에 미안할 뿐 노력하지 않는다. 축구가 그럴 수 있는 요소를 충분히 가지고 있다고 독자들에게 설명하거나 유혹하지 않는다. 다만 자신의 축구 사랑과 자신의 인생을 축구 경기와 함께 풀어내고 있는 그의 이야기들을 읽어나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독자들도 축구를 한 번 보고 싶다. 특히 아스날의 경기를 꼭 한 번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그것이 이 책의 목적은 아니다. 닉 혼비는 그저 축구가 내 인생에서 어떤 의미인지 고백하고 있을 뿐이다. 솔직하고 진지하게. 아니다, 진지하게는 아니다. 이 책의 또 다른 매력은 작가인 닉 혼비의 재치있는 문장에 있다. 유머와 축구와의 결합이다. 그렇다고 해서 가벼운 농담이 아니라 짙은 페이소스를 자아내게 하는 블랙 코미디다. 순간순간 자신이 얼마나 기뻤고 행복했는지, 아스날의 경기 결과에 따라 얼마나 불행하고 우울했는지를 저자는 적절한 비유를 통해 익살스럽게 표현하고 있다. 그것이 독자들에게는 더 진한 공감대를 형성하게 한다. 읽는 사람 입장에서는 그것이 축구가 아닌 자신이 좋아하는 다른 분야와 치환해서 읽어도 감정이 이입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닉 혼비에게는 그것이 모두 축구인 것이 문제다. 그것도 아스날이라는 축구 클럽의 경기 결과 하나 때문에.

미하이 칙센트 미하이의 <몰입의 즐거움>에 보면 하루에 ‘몰입’하는 시간의 비율이 성공의 척도라고 말한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닉 혼비처럼 ‘축구’에 완전히 ‘몰입’하는 사람들이 인생에서 성공할 확률이 높은 것일까. 부인보다 축구를 선택하겠다는 수많은 영국 남자들에게 축구는 단순한 경기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월드컵 시즌의 ‘축구과부’를 위한 호텔 패키지 상품이 불티나게 팔리는 나라 영국에서도 특별히 축구이 ‘미친’ 저자의 책은 객관과 이성으로 축구를 접근하고 싶은 사람에게은 절대 읽지 말아야 한다.

결국 아스날의 홈구장인 ‘하이버리’ 근처로 이사하게 된 저자의 생활이 지금은 어떤지 궁금하? 무언가 미치게 할 수 있는 것을 갖고 있는 사람은 행복하지 않을까. 그런면에서 닉 혼비는 누구보다도 행복한 축구팬이다. 그간 벌어진 수많은 축구장 참사를 들먹이며 훌리건에 대한 사회정치적 분석을 시도하는 것도 닉 혼비 앞에서 무기력 해 보인다. 경계를 규정 지을 수 없으나 약간의 폭력사태를 축구팬의 열정으로 축구장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장면으로 인정하면서도 죽음을 부른 일부 과격 훌리건들에 대해서는 분노와 차가운 비판을 서슴지 않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의 축구에 대한 순수한 열정과 사랑이 퇴색하거나 부정적인 면으로 비쳐지지는 않는다. 왜냐면 그는 가장 순수한 아스날의 팬이며 축구를 사랑하는 한 남자의 모습을 가장 솔직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조금 다른 측면에서 축구에 대한 관심과 열정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를 찬양하거나 비난할 필요는 없다. 축구에 대한 그의 열정만큼 우리에게 몰입할 수 있는 그 무언가를 가지고 있는지 그것이 궁금하다. 나이가 들면서 지정 좌석을 가진 시즌권을 끊는 등 몇 가지 변화가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그는 여전히아스날을 응원하고 있을 것이다. 축구장을 의미하는 ‘피치’와 열정을 의미하는 ‘피버’가 모여 <피버 피치>라는 제목이 탄생했다. 우리들 인생에서 열병을 앓게 하는 무엇인가를 발견한 사람은 얼마나 행복할까하는 생각이 다시 한번 들게 하는 책이다.


060605-0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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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격하고 서툰 사랑 고백 우리시대의 논리 1
손석춘 지음 / 후마니타스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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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대와 세상살이를 묶어 보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책으로 보는 세상살이는 더욱 느낌이 새로워진다. 먼 과거의 이야기도 아니고 미래에 관한 전망도 아닌 불과 얼마 전에 벌어진 일들에 대한 철저한 망각과 혹은 세밀한 분석은 관계자들만의 몫으로 돌려버리기 쉽다. 군중 혹은 민중의 입장에서 보면 머나먼 이야기 일 수도 있고 내 이야기지만 하릴없이 속으로만 분노하는 경우도 많다. 세상 모든 일이 나와 무관한 일이 어디 있을까. 더구나 바로 우리가 살아가면서 직접 만나게 되는 현장속의 일들일 경우에는 더욱 문제가 된다. 토인비의 말처럼 인간의 가장 큰 불행은 역사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않는 데 있는 지도 모른다.

신문의 칼럼은 가장 첨예한 문제들을 담아내는 현실적 문제의 돋보기다. 사설이 아니라 기명칼럼의 경우 개인적인 식견과 관점이 두드러지기 때문에 특정인의 칼럼만을 가지고 하나의 문제를 다양하게 바라볼 수는 없다. 하지만 모두 같은 수준의 칼럼을 방향만 달리 한 채 쓰는 것도 아니다. 소위 ‘조중동’의 사설과 칼럼들을 조목조목 반박하고 평가하면서 꼬장꼬장한 목소리로 자신의 의견을 끝까지 뱉어내는 것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의 입장에서 본다면 특별한 용기임에 틀림없다. 본업이 작가나 대학에 몸담고 있는 교수가 아니라 언론인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런 면에서 손석춘의 칼럼들은 특별함을 가진다.

세상에 대한 끊임없는 발언과 결기있는 자세는 결국 이 땅에 사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라고 말하는 손석춘을 어떻게 볼 것인가는 독자의 몫이다. <과격하고 서툰 사랑고백>은 소설이나 시집 제목으로도 손색없다. 그러나 이 책은 세상과 소외된 이웃들에 대한 진정한 ‘사랑고백’임에 틀림없다. 2004년과 2005년 한겨레의 칼럼들을 모아놓은 이 책은 가장 역동적인 시기를 살았던 우리의 기억들을 새롭게 한다. 정치적으로는 대통령 탄핵과 17대 총선이 절정을 이룬다. 미국의 이라크 침략과 한국군 파병은 고 김선일씨에 대한 아픈 상처를 덧나게 한다. MBC 이상호 기자의 X-파일을 어떻게 되었나?

불과 얼마전까지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일들을 우리는 때때로 까맣게 잊고 지낸다. 기억력의 한계 때문이 아니라 실제 생활과의 거리감때문일지도 모른다. 주변에 가까운 누군가의 죽음도 시간이 가면 잊혀지기 마련이지만 현실의 문제들은 잊혀지더라도 끝나지는 않는다. 우리의 삶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모든 문제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와 모습은 어떠해야 하는지 돌아본다. 이 땅의 노동자들은 왜 아직도 ‘조중동’의 논리를 자신의 논리로 착각하며 살아가는지, 자신의 사회경제적 계급과 지위를 잊고 불합리한 이데올로기를 선택하는지, 그것이 5․31 지방선거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 확인하는 일은 서글프다. 무상교육, 무상의료가 천국의 이야기이라고 착각하는 건 아닌지, 스웨덴을 벤치마킹하고 싶다던 노무현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 수 없다. 탄핵과 17대 총선의 결과를 열린우리당은 지금까지 어떻게 활용했으며 그 결과가 어떠한지 확인하는 일은 답답함을 넘어 분노가 된다. 대안없는 비판에 대한 비판을 멈출 때가 아닌가 싶다. 손석춘의 칼럼들이 이야기하는 2년간의 한국 사회의 자화상은 우울하다 못해 비참하다. 그대로 사람들의 삶은 계속되었고, 앞으로도 계속 될 것이다. 다만 그 깊이와 넓이를 돌아보아야 할 때가 아닌가. 비정규직의 양산과 미군기지 이전에서 보여준 정부의 태도를 생각하면 부자신문이라 불리는 수구보수 언론의 대명사 ‘조중동’의 협잡과 동맹으로 여겨진다. 논리의 비약이 아니라 이제 노무현 정권의 소임은 실패로 끝났다는 결론이 자연스레 나온다. 무엇이 다른가 생각해 볼이다. 아직도 노무현이 좌파라고 외치는 정신나간 사람은 없겠지만 미래 사회에 대한 대안과 희망은 누구에게 어떻게 찾을 것인가. 역사의 수레바퀴가 거꾸로 굴러가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현실 정치에 참여하거나 그것을 감시하고 비판해야 하는 사람들이 제대로 서지 않는다면 미래는 암담하다. 더더욱 암담한 것은 그것은 그들만의 몫이 아니라 세상의 주인인 우리들의 책임이라는 사실을 잊고 사는 것이다. 겁 없이, 혹은 조롱하듯 내뱉은 정치인들의 말 속에 숨은 뜻을 헤아려야 한다. 우매한 국민들, 멍청한 민중들이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 모두가 투사나 독립군이 되라는 선동이 아니다. 최소한 세상을 바라보는 기본적인 시각과 자신의 태도가 어떠한가를 점검해 보는 정도를 손석춘은 요구하고 있는 것일까

내가 바뀌어야 세상이 바뀐다. 목소리 칼칼한 진보 언론인 한 사람이 세상을 바꿀 수는 없다. 다만 그 목소리들이 모이고 모여야 한다.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더라도 행동으로 보여줘야 하지 않는가. 침묵하는 다수의 고민과 성찰은 그대로 부자신문의 비이성적인 목소리와 대중들의 심리 속에 똬리를 틀고 있는 파시즘과 결합되어 현실로 나타난다.

‘사랑’은 참 다양한 방법이 있다. 특히 세상과 사람을 사랑하는 방법은 제각각이다. 그것이 ‘과격하고 서툰’ 것일지라도 그 진정성을 의심하거나 부정할 수는 없다. 마치 전사의 목소리로 세상에 대한 격문을 발표하는 심정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높이는 손석춘의 외침들이 불편하고 부담스럽지 않고 당연한 이야기로 읽힐 수 있는 시대가 올 것이다. 어느 시대에나 부정과 모순이 존재한다. 그걸 바라보는 관점이나 무게가 다를 뿐이다.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는 우리 모두의 지혜를 모은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는다. 혁명보다 힘든 ‘개혁’을 말하는 현실이 서글프다.


060607-0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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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이기주의자
웨인 W. 다이어 지음, 오현정 옮김 / 21세기북스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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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적으로 텅 빈 공간에 앉아 커피향을 느낀다. 창밖의 시원의 바람이 뺨을 스치고 녹음이 우거진 나무숲이 고요하다. 시간이 멈춘듯한 정적과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을 바라본다. 행복이 무엇이냐고? 무념무상의 지금 이 순간!

행복의 다양한 정의와 나름의 방식을 떠들어대는 무수한 책들은 심하게 말하면 거의 쓰레기에 가깝다. 왜냐하면 모르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을 간과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경우 자신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왜 불행한지 너무 잘 알고 있다. 다만 그것을 고치거나 해결할 방법들을 행동으로 변화시키지 못하는 데 아픔이 있다. 읽다보면 똑같은 소리의 반복들이다. 자기 개발 프로그램이나 처세술에 관한 책들은 별 효용을 가지지 못한다. 물론 방법을 모르거나 자신을 분석하기 어려운 경우 지인의 충고를 달갑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책을 도구로 사용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다. 하지만 생각과 감정은 계량화할 수 없다는 데 논의의 초점을 맞춰야 한다.

저자 웨인 다이어는 <행복한 이기주의자>에서 단계와 상황별로 그 이유를 점검하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전략들을 제시한다. 이 책을 관통하는 주제를 저자는 두 가지로 선언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첫째는 감정은 선택 가능한 것이고, 둘째는 현재의 순간들은 통제 가능한 것이라는 점이다. 이것이 저자가 주장하는 대전제이다. 대전제를 부정하면 다음의 이야기들은 의미가 없어진다. 그러나 이론과 실제가 일치할 수는 없다. 다만 부단한 노력으로 어느 정도 개선되거나 변화할 수 있다는 점에는 동의할 수 있겠다. 이성적으로 판단해서 자신을 위한 감정을 선택하고 순간 순간 벌어지는 상황들을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얼마나 될까?

1976년에 ‘당신의 오류지대your erroneous zones’라는 제목으로 출판된 책이 아직도 번역 출판된다는 것은 물론 의미있는 일이다. 이 책이 가지는 폭넓은 공감대가 첫째 이유가 되겠지만 그것은 일반론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특별함은 없다. 다만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현실에서 느끼는 불편함과 답답함을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일 수는 있겠지만 자기 반성의 시간과 기회를 갖는 것 이외에 특별한 효과(?)를 보기는 어렵다. 신지식으로 선정되었던 심형래의 말처럼 ‘못하니까 안하는게 아니라, 안하니까 못하는 것’이라는 평범한 진리! 그것 이상의 말을 찾기 어렵다. 전체 11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책의 내용은 보면,

1. 남보다 먼저 자신을 사랑하라
2.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지 말라
3. 자신에게 붙어있는 꼬리표를 떼라
4. 자책과 걱정은 버려라
5. 미지의 세계를 즐겨라
6. 의무에 끌려다니지 말라
7. 정의의 덫을 피하라
8. 결코 뒤로 미루지 말라
9.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지 말라
10. 화에 휩쓸리지 말라


마지막 11장이 행복한 이기주의자이다. 위의 10단계를 거쳐 완성되는 새로운 인간형 행복한 이기주의자! 틀린 말이 별로 없어 시비걸고 싶진 않으나 남는 것이 없는 맹물같은 책이다. 다만 ‘행복한 이기주의자’가 주는 함의는 두고두고 책내용과 상관없이 되새겨 볼 만하다. 우리가 행복해지는 수많은 방법들을 누구에게 배우겠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일 뿐이다.

행복한 이기주의자는 겉으로 드러낼 수 있는 자신의 정체성이 아니라 세상을 살아가기 위한 나름의 방편으로 여겨야 한다. 더불어 잘 살아야한다는 도덕 교과서 같은 말씀 때문이 아니라 타인에게 불행을 주는 이기주의자가 느끼는 행복은 오만과 아집이다. 행복과 이기주의라는 서로 양립할 수 있는 개념의 조합이 인간의 이기심을 보여주는 또다른 모습인 것 같아 씁쓸하기도 하다.

저자의 주장과 책의 방향과 무관하게 우리들 삶에서 행복은 빼놓을 수 없는 삶의 목적이 아닐 수 없다. 어떤 행복을 어떻게 찾을 것인가는 물론 개인의 선택이다. 스스로 행복해지는 수많은 방법들 중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고 자신과의 사소한 싸움에서 번번이 지는 사람들에게 유용한 심리적 처방전이 될 수는 있겠으나 문제를 알면서도 해결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쓸데없는 잔소리에 불과할 수 있겠다.


060609-0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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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난새와 떠나는 클래식 여행 - 개정판, 우리가 아직 몰랐던 세계의 교양 14 우리가 아직 몰랐던 세계의 교양 14
금난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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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에 대한 인간의 반응은 참 다양하다. 같은 소리에 대한 정서와 이성에 대한 느낌이 다른 것은 본능적인 면과 훈련에 의한 면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훈련이라는 것은 문화적 영향과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 소음에서부터 영혼을 울리는 음악에 이르기까지 인간이 태어나 귀를 통해 듣는 수많은 소리들을 생각하면 즐거움과 고통의 이중주를 들려준다. 보고 싶지 않은 것은 눈을 감아버리면 그만이다. 그래서 우리의 오감중에 유일하게 취사선택이 가능한 감각이 시각이다. 나머지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특히 소리는 더더욱 그러하다.

음악은 인간이 만들어내는 가장 아름다운 소리이다. 악기의 연주와 노래로 크게 나누어지는 음악은 어느 것이 우월하다고 할 수는 없다. 또 어떤 악기가 가장 훌륭한 소리를 내는 악기인지 이야기하는 것은 어떤 음식이 가장 맛있다는 것을 객관화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설령 음악이 아니더라도 잠자는 아기의 숨소리, 사랑하는 연인의 두근거리는 심장소리, 눈을 가만 감고 듣는 바람소리, 산사의 밤에 들려오는 개울물 소리 등 주관적으로 판단되는 최상의 소리는 가늠하기 조차 어렵다. 그 모든 소리가 음악이 아닐까?

세계적인 지휘자의 반열에 오른 금난새가 청소년들을 위한 서양음악 가이드 북을 낸 것은 의미있는 일이다. <금난새와 떠나는 클래식 여행>은 딱딱하고 어렵게만 느껴지는 클래식의 대중화에 기여하고 있다. 이 책에 ‘서양 음악사의 라이벌’이라는 부제를 부치고 싶다. 바흐와 헨델에서 시작해서 모차르트와 하이든, 베토벤과 로시니, 슈베르트와 멘델스존, 쇼팽과 리스트, 브람스와 바그너, 차이코프스키와 림스키-코르사코프, 드뷔시와 라벨에 이르기까지 서양 음악사에서 빛나는 거장들을 소개하고 있다. 소개하는 방식이 단순한 이론과 지식에 머물지 않고 동 시대인 두 사람씩을 시대별로 묶어 비교하는 방법을 취하고 있다. 색깔과 개성이 뚜렷한 음악가들의 차이점을 통해 자연스럽게 그들의 음악에 반영된 정신을 읽을 수 있는 배경지식을 제공한다. 음악가들의 초상화와 관련 그림들을 풍부하게 삽입해서 지루하지 않게 읽히려는 배려가 눈에 띤다. 청소년을 예상 독자로 설정했기 때문에 전체를 조망하는 책으로는 부족하지만 클래식에 한 발 다가서고 듣고 싶게 만드는 데는 성공했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이래 고전주의 음악을 선도했던 서양의 음악가들을 중심으로 한 우리의 음악교육은 여전히 ‘오리엔탈리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학창 시절 미국의 민를 배웠고, 서양 음악가와 작품들을 암기해서 음악시험을 본 기억이 있다. 판소리나 꽹과리, 징, 북소리의 깊은 울림에 관한 설명과 감상의 기회는 전무했다. 대학의 사물놀이패와 민속음악에 대한 관심은 자발적인 노력 없이는 불가능하다. 학교교육에서 조차 차별받는 동양, 특히 한국의 음악은 설 자리가 별로 없어 보인다. 동양의 고전 음악은 말할 나위도 없다.

얼마 전 중국의 전통 음악을 현대화해서 세계적으로 성공을 거두고 있는 ‘여자12악방’의 연주회에 다녀왔다. 팝과 클래식을 넘나들며 퓨전음악을 들려주는 여성 연주단이었다. 물론 상품화의 논란을 비껴갈 수는 없다. 미모의 여성들을 내세워 중국 전통 악기인 비파와 구젱이 주류를 이루는 연주팀으로 영화음악과 팝음악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대중에게 쉽게 다가서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연이 끝나고 주저하지 않고 CD를 사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들었다. 공연장에서의 감동과 현장감은 떨어지지만 뉴에이지라는 장르가 우리나라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끈 사실을 감안한다면 앞으로의 행보가 주목된다. 돌아오는 길에 못내 아쉬웠던 것은 김영동이나 김수철 등 국악의 현대화를 위해 개인적인 노력을 했던 사람들의 음악적 실험들이 대중성을 확보하지 못하면서 사장되어 버린 것 같은 기억들이 떠올랐다. 김덕수 사물놀이패를 제외하면, 우리 전통 음악의 현대화는 멀게만 느껴진다. 단순히 현대음악과의 결합만을 위해 노력하자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숙제처럼 여겨진다.

그에 비해 서양의 클래식은 폭넓은 교육과 교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어 있다. 장르와 기원을 가리지 않고 좋은 음악이 주는 감동과 삶의 기쁨들을 즐기는 것이 일차적인 목표이겠지만 클래식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와 지식이 밑바탕이 되는 것이 사실이다. 알지 못하면 잘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는다는 고정관념은 옳지 않지만 그저 듣고, 본다고 해서 사랑할 수 있을까?

쉽고 흥미있는 내용을 위주로 음악가들의 생애와 음악적 특징을 사회문화적 배경과 함께 설명하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없는 내공의 결과다. 가장 대표적인 음악가들과 친숙해지는 일은 클래식의 세계로 입문하는 좋은 방법으로 여겨진다. 전국을 뒤흔든 함성소리도 아름답지만 창밖에 소리없이 내리는 빗소리처럼 부드러운 클래식의 바다에 풍덩!


060614-0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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