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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지러운 세상 인연의 배를 띄워 - 최척전 ㅣ 국어시간에 고전읽기 (나라말) 7
황혜진 지음, 박명숙 그림 / 나라말 / 2006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고전의 바다를 헤매는 일은 인류의 축적된 삶의 양식에 대한 최고의 인식 방법이다. 특히 우리 고전 문학은 선조들의 삶의 모습에 대한 적나라한 표현이며 삶의 재현 과정을 여실히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우리가 살아온 과정이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에 낄낄거리며 때로는 탄식하며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조선 후기에 급속히 발달하는 소설 문학의 양상은 한국 문학의 전통을 풍요롭고 다채롭게 해 주었다. 자생적인 문학의 전통이 일천했던 것이 아니라 근대화 과정에서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식민 통지로 근대 문학으로 개화하기 전에 많은 풍랑을 겪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눈에 띄는 성과는 오롯이 한국 소설 문학의 전통이 된다.
그 대표적인 작품 중에 하나가 바로 조위한의 <최척전>이다. 이 소설은 조선후기의 전쟁문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임진왜란(1592년) 이후 정묘재란(1597년)이 일어날 무렵부터 시작해서 난이 평정된 1600년경까지를 시대적 배경으로 삼고 있다. 500여년에 이르는 조선의 역사에서 가장 혹독했고 참혹한 시련을 겪었던 전쟁을 배경으로 하는 <최척전>은 민중들의 삶이 모습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주인공 최척과 옥영을 내세워 두 사람의 사랑과 기구한 운명을 사건의 중심축으로 삼고 있지만 두 남녀간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로만 볼 수 있는 소설이 아니다. 전쟁 중에 헤어져 안남(베트남)에서 해후하는 장면이나 이역만리 중국땅에서 살다가 고향인 남원에서 재차 상봉하는 장면은 질긴 운명과 인연을 내세운 한 편의 휴먼 드라마로 읽힌다. 그러나 이런 기막힌 우연과 운명 뒤에 배경처럼 깔린 어두운 전쟁의 그림자와 민중들의 애끊는 사연들은 한숨을 자아내게 한다.
역사 속에서 전쟁은 언제나 승리자의 입장에서 지배자의 입장에서만 서술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객관적 사실조차 왜곡되는 역사에서 평범한 백성들의 눈물과 한숨을 전달하는 것은 문학의 몫이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참혹하게 왜적에게 도륙당하고 불태워지는 장면은 그 어떤 역사보다 생생하게 그려져 있어 후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다. 우리 민족의 정서를 부정적인 한의 역사라고 일컫는 이유를 이 소설을 통해서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나라말 출판사의 ‘국어시간에 고전읽기’ 시리즈 중 하나로 출판된 이 책은 ‘지러운 세상 인연의 배를 띄워’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다른 어떤 판보다 내용이 충실하고 문장이 바르다. 황혜진의 글은 현대적인 감각을 살려 고전문학의 분위기를 전하면서도 현대소설같은 긴장감이 느껴진다. 박명숙의 그림 또한 적절하게 삽입되어 다소 지루하고 딱딱하게 전개될 수 있는 부분의 분위기를 살려준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정보 쌈지 부분이다. 책 중간에 ‘정유재란과 남원함락, 전쟁 포로 이야기, 강홍립은 역적이다와 충신이다. 최척전의 우연성, 지로로 보는 최척전, 작가 인터뷰’ 등 여섯 개의 도움글이 들어 있다. 각각 두 페이지를 넘지 않는 분량이지만 고전을 읽는 재미를 배가시키며 소설의 이해를 돕는 충실한 도우미 역할을 한다. 고전은 어렵고 딱딱하다는 선입견을 갖고 있는 학생들이나 일반들이 재미있고 감동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특별한 장치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나라말의 ‘고전읽기’ 시리즈는 가장 뛰어난 고전소설 시리즈라고 평가할 수 있다. 누군가에게 추천한다면 자신있게 추천해도 될 만하다.
책의 말미에 ‘최척전 깊이 읽기’는 감동적인 인간 드라마를 현대적 의미에서 새롭게 이해할 수 있는 차분한 설명이 더해진다. 읽지 않아도 그만이지만 우리가 고전 문학을 읽어야 하는 이유쯤으로 보아도 무방할 듯하다.
우리 땅 남원에서 시작해서 일본과 중국, 베트남 등 동아시아 전반을 무대로 한 최척과 옥영의 고된 여정은 우리 민족의 신산스런 역사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듯하다. 그러나 이 소설이 다른 소설과 구별되는 가장 뚜렷한 특징은 방대한 스케일과 기막힌 우연성에 있지 않다.
그것은 바로 인간에 대한 믿음과 신뢰로부터 출발한다. 최척이 만났던 명나라 장수 여유문과 주우, 옥영을 도왔던 일본사람 돈우 등 국적과 인종을 불문하고 관계를 맺어간다. 일본과의 전쟁 문학이라면 민족적 자존심을 세우거나 비현실적 요소가 강하게 드러나는 한풀이 소설이 될법하지만 <최척전>은 그렇지 않다. 인간적 연대감이 형성되고 차별이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의 관계망이 이렇게 기막힌 감동 드라마를 만들어 낸 것이다. 소설보다 기막힌 작가 조위한의 기막힌 삶과 주인공 최척의 유사한 상황들은 이 책을 읽으면서 덤으로 얻게 된다.
시대가 달라지고 세상이 변해도 변하지 않는 가치는 무엇일까? 21세기에도 여전히 존재하는 유랑민과 평등, 인권 측면에서 살펴봐야하는 전쟁의 의미는 이 책을 통해 비추어 보아야 할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침략적 제국주의와 폭력을 앞세운 헤게모니 전쟁은 끊이질 않는다. 인간의 역사는 오늘도 되풀이 되지만 영원한 평화와 공존의 시대는 요원하기만 한 슬픈 시대를 살고 있다.
061025-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