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이야기 살림지식총서 89
김성윤 지음 / 살림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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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한 유리잔에 커피를 마신다. 인스턴트 커피로 ‘테이스터스 초이스 부드러운 블랙 오리지날’이다. 이제 커피믹스는 대부분의 한국 사람이 즐기는 음료가 되었다. 이 커피믹스는 커피와 설탕과 크림의 혼합비가 1 : 3 : 2로 소위 다방커피라 불린다. 커피가 전 국민의 기호식품이 되는데 기여한 일등공신은 당연히 커피믹스다. 동서식품에서 세계 최초로 개발한 커피믹스는 불과 40여 년 만에 전 국민을 커피잔에 빠뜨렸다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커피는 그만큼 우리 생활의 일부가 되어버린 중요한 필수 기호 식품이 되어버렸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커피에 중독된 사람들은 하루 한 잔으로는 택도 없다. 커피를 마시는 이유는 담배를 피우는 이유처럼 다양하다. 맛 때문에, 혹은 분위기에 맞추어, 혹은 특별한 대안 음료가 없어서…… 그러나 가장 큰 이유중의 하나는 카페인 성분 때문이다. 담배의 니코틴 성분만큼 중독성이 강하지는 않지만 각성 효과를 주기 때문에 머리가 맑아지고 기분이 상쾌해지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그래서 일찍이 이슬람문화권에서 시작된 커피는 본래 약재로 쓰였다. 만병통치약처럼 영험한 효과가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후 유럽과 인도네시아, 남미로 확산되면서 세계인의 음료가 되었다. 이제 커피는 단순한 기호식품이 아니라 세계 여러 나라의 문화와 고유한 생활방식과 결합되어 독특한 맛과 향을 발하고 있다.

우리가 마시는 커피는 보통 로부스타라고 하는 싼 커피로 맛과 향에서 질이 낮다. 맛과 향이 좋지 않다는 것은 커피 원두인 체리가 잘 익지 않았거나 건조과정과 볶는 과정인 로스터 과정에서 구별되기도 한다. 아라비카라고 하는 고급 커피는 당연히 맛과 향이 뛰어나다. 고추를 말리는 방식과 유사한 건식법이 아니라 12.5%의 적정 수분을 유지하고 커피 원두를 상하지 않도록 습식법으로 건조시켜 풍부한 맛과 다양한 향을 만들어낸다. 커피의 귀족으로 불리우는 아라비카는 고산지대에서 적당한 온도와 햇볕을 받고 자란 연약한 커피를 말한다. 우리가 흔히 즐기는 로부스타 커피와는 태생부터 다른 것이다. 자메이카의 블루마운틴이 대표적인 커피다.

1999년 스타벅스 이대점이 오픈하면서 바야흐로 제 2의 커피 전성시대가 도래했다. 대학시절 한끼 식사를 해결할 수 있었던 자장면과 라면의 가격을 훌쩍 뛰어넘는 에스프레소 커피 한 통씩을 손에 들고 다니며 마시는 장면을 어렵지 않게 마주하게 된 것이다. 에스프레소는 이탈리아말로 빠르다는 뜻으로 뜨겁고 강한 압축기에 의해 커피 원두를 순간적으로 걸러낸다. 물론 여기에 우유를 섞고 휘핑크림을 얹거나 캐러맬을 혼합한 커피를 대부분의 사람들 선호한다. 테이크 아웃 커피 위주인 스타벅스는 우리나라에서 매장에서 마시고 갈 수 있는 분위가 더 선호된다.

차와 커피는 대화를 이끌어주기도 하고 한가로움을 같이하는 친구가 되기도 한다. 하나의 문화현상이자 실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커피가 주는 즐거움은 조금씩 다른 방식으로 이해할 것이다. 하지만 커피에 대한 지식이 맛을 배가시키지는 않는다. 하지만 깊은 이해는 깊은 애정을 낳는다. 특히 계절과도 깊은 상관관계가 있는 것이 모든 음식의 특징이 아닐까 싶다. 비오는 날은 커피의 향이 특히 진하고 강하게 느껴진다.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하며 연인과 마셨던 자판기 커피 한 잔의 추억은 강렬한 미감으로 남겨지는 것이다.

커피 탄생의 간략한 역사와 제조 과정 그리고 각 나라의 커피 문화를 간략하게 소개하고 있는 책이지만 매일 마시던 커피에 대해 궁금한 독자라면 왼손에 <커피 이야기>를 오른손에 커피 한 잔을 들고 읽을 만한 책이다. 다만,

커피의 맛뿐만 아니라 커피를 재배하는 사람들의 땀, 커피 생산을 위해 희생되는 환경에 대해서도 한 모금쯤 음미해 보는 것이 어떨까. - P. 85

는 말은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공정거래 커피에 대한 의미를 돌아보게 한다. 커피 1잔당 4원이라는 잔인한 가격은 커피 재배 노동자들의 땀을 착취하고 있다. 대규모 중간 거래상과 다국적 로스터들이 대부분의 수익을 거둬가는 자본의 논리는 커피에도 여지없이 적용된다. 노동자들의 최저 생계비를 지불하고 구입했음을 인증해주는 공정거래 커피가 널리 확산되길 바랄 뿐이다. 자본주의는 결국 소비자의 손에 의해 좌우되는 구조일 수밖에 없다. 올바른 소비자 운동과 더불어 커피의 맛을 잃지 않길 바란다. 물론 차가 아니라 커피를 고집하는 사람들에게 적용되는 말이겠지만.


060714-0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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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자 이야기
조경란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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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세상과의 거리는 얼마나 될까?

“토론과 논쟁에 자신이 없다면 상대방의 인신을 공격하라!”는 세네카의 일갈은 토론과 논쟁에 대한 반어이자 역설이다. 상대의 인격을 모욕하거나 인신 공격을 시작하는 순간 게임은 끝난다. 자신의 패배를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을 살다보면 그런 일이 있다. 신념과 주관대로, 마음이 시키지 않는 일에 대해 굽히느니 차라리 부러지는 편이 낫다는 생각 자체가 자괴감을 가져 올 때가 있는 법이다. 산다는 일은 역시 녹록치 않으며 옳고 그름은 항상 법의 잣대 이전에 주관의 잣대로 모든 것이 재단된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느낌이 들 때 소설은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지 회의한다. 조경란의 <국자 이야기>는 나와 세상과의 이야기다. 나와 또 다른 나의 이야기는 문학에서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 되어 왔기 때문에 새로울 것도 없고 참신하지도 않다. 그렇다면 하늘아래, 아니 문학에 새로운 것이 남아 있기는 한 걸까? 없다고 한다면 그것을 드러내는 방식에 주목해야 한다. 조경란의 <국자 이야기>는 나와 ‘타자’의 이야기다. 여기서 타자는 내 안의 또 다른 나이며 가족이며 타인이다.

이 ‘타자’와의 불화가 소설의 모티브가 된 것은 하루 이틀의 이야기가 아니다. 다만 그것을 풀어내는 방식과 ‘타자’와 나와의 관계나 밀도가 문제일 뿐이다. 조경란은 <국자 이야기>에서 기본적으로 내 안의 나와의 만남을 이야기하기 위해 가족을 이야기한다. 아버지와 엄마와 동생들을 중심으로 그들의 삶을 관찰하고 나와의 관계를 설명한다. ‘나는 봉천동에 산다’와 ‘난 정말 기린이라니까’, ‘잘 자요, 엄마’는 부모와의 관계를 풀어낸다기 보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거주하는 인간에 대한 관찰을 보여준다. 그것은 봉천동이라고 하는 특정 장소에 얽힌 일화들이 뒷받침되어 사실감을 더해 준다. 현실 속에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사물과 사람들 사이의 관계 속에서 나를 발견하는 일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이 가족의 범위를 연장하면 ‘국자 이야기’의 외삼촌과 조카로까지 확대된다. 신체의 일부와 같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국자로 상징되는 외삼촌의 이야기는 타자와 구별되는 특징을 저마다 하나씩 가지고 있을 법한 현대인의 상징으로 비춰진다. ‘돌의 꽃’이나 ‘100마일 걷기’ 그리고 ‘입술’과 ‘좁은 문’을 하나의 범주로 묶을 수는 없으나 사람과 사물들 사이의 관계들을 통해 ‘나’를 확인하는 과정과는 사뭇 다른 양상의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소설의 말미에 해설을 부치는 방식을 이해할 수 없으나 안읽은 적도 없다. 손정수는 조경란의 이 소설집을 ‘나를 이야기하는 칼리그람으로서의 글쓰기’라고 명명했다. 칼리그람은 부분을 보면 전체를 볼 수 없고 전체를 보면 부분을 확인할 수 없는 점묘화와 같은 기법이다. 예를 들어 무수히 많은 龍자를 써서 용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멀리서 보면 용을 그린 그림이지만 수많은 ‘龍’이라는 글자는 확인할 수가 없다. 글자를 확인할 수 있을 정도의 거리에서 그림이 보이지 않는 것은 물론이다. 조경란이 ‘나’를 이야기하는 방식이 이와 유사한 방식이라는 평론가의 글에 공감할 수 없으나 전체적인 그림이 틀린 것도 아니다. 모더니즘 계열의 난해한 소설은 아니지만 사건 중심의 감상적 소설이 아니기 때문에 ‘재미있게’ 읽었다고 말할 수는 없겠다.

이전과 이후를 조금 더 살펴 볼만한 흥미로운 작가다. 소설을 읽는 재미가 타인의 생을 들여다보고 내 생을 돌아보는 데 그 목적이 있다고 한다면 색다른 방식을 경험할 수 있는 소설이다. 또한 차라리 철저하게 개인에게 매몰된 자세와 태도가 타인에게 훨씬 효과적인 화법이 될 수 있음을 확인했다. 어설픈 감상과 불완전한 몰입이 더 바람직하지 않다. 그런 면에서 조경란의 소설은 주목할 만하다.

미친듯이 세차게 퍼붓는 휴일 저녁의 비도 언젠간 그친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그 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해 보는 것뿐이다. “몇 번이라도 좋다. 이 끔찍한 생이여, 다시 한 번!”이라고 외칠 정도의 애착은 없지만 인간에 대한 애정 이 전에 세상에 대한 애정부터 가져 볼 일이다. 책을 읽는 행위 자체에 대한 자괴감을 지울 수 없는 밤도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자기 합리화를 넘어 그것이 내 한 부분을 지킬 수 있는 힘이라면!


060717-0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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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학의 탄생 - 철학, 종교와 충돌하다
미셀 옹프레 지음, 강주헌 옮김 / 모티브북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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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존재 여부를 아직까지도 논쟁의 중심에 두고 있는 바보 같은 사람이 있다면 놀랍다는 생각이 든다. 이미 끝난 이야기로 믿었으나 아직까지도 열심히 외치고 있는 사람이 있다. 프랑스의 철학교사 미셀 옹프레는 <무신학의 탄생>이라는 책을 통해 ‘신학’에 대한 전방위적이고 저돌적인 공격을 감행한다.

지구 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교와 신들이 그의 표적이 된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가 주된 목표물이다. 여기서 기독교는 프로테스탄트인 개신교를 포함하고 있으나 주로 카톨릭이 논의의 중심이다. 역자는 이것을 넓은 의미에서 기독교로 번역하고 있다. 아무튼 지구상의 가장 많은 신자를 확보하고 있다는 공통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세 종교의 대상이 모두 신이 아니라 인간의 형상을 닮았다는 데 있다. 그게 왜 중요하냐고? 이 책에서 주장하는 미셀 옹프레의 주장은 신의 허구성과 종교의 불합리성을 조목조목 비판하고 있다. 그 비판들은 학술 논문과는 다른 방식이다. 지금까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예수라는 인물의 실존 여부와 역사성을 검토해 왔던 모든 논의들을 아우르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철학과 과학의 입장에서 바라본 종교와 신의 진면목을 보여주고 있다.

작가가 밝히고 있듯이 지금까지 인류가 쌓아온 철학과 역사 그리고 고고학과 해석학, 언어학에 이르기까지 신화를 바탕으로 종교가 신의 존재를 어떤 식으로 만들어 왔는지 밝히고 있다. 그것은 단순히 호기심 차원의 논의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각 종교가 믿음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신의 존재에서부터 그들이 손에 들고 다니는 경전에 이르기까지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관점에서 철저하게 분석하고 있다. 이성과 과학, 논리와 철학의 눈으로 신과 종교의 문제를 바라본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것은 아닐까?

아니다. 그렇지 않다. 최근 ‘행복’에 관한 다양한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주관적이고 모호한 개념의 ‘행복’은 에피큐러스 학파의 ‘쾌락’의 개념으로부터 출발한다. 행복과 쾌락의 지속성 여부가 물론 중요하다. 또한 물질적 쾌락인지 정신적 쾌락인지 육체적 쾌락인지 그 대상과 범위, 종류는 헤아릴 수 없을만큼 다양하다. 이런 시대에 신과 종교는 오히려 현실적인 행복과 즐거움들을 억압한 대표적인 수단이라고 선언하는 것이 무신론이다.

무신론은 역사 속에서 큰 목소리를 낼 수도 없었고 체계적으로 연구된 적도 없으며 드러내 놓고 논의의 중심에 세워 진 적도 없다. 인류가 이룩해 온 수많은 진화 과정 속에서도 아직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중 하나가 종교와 신의 존재이다. 미셀 옹프레는 ‘무신론’이라 명명한 이야기들을 시간과 공간이라는 두 개의 축을 통해 그 진위를 드러내는 데 최선을 다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신의 존재를 믿고 믿지 않고의 문제는 제쳐두고 작가의 논의를 따라가 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우리 생활의 중심에서 그리고 인생 전체를 바라보는 관점 자체가 송두리째 흔들릴 수 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발상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나 패러다임의 대 전환을 이루기 위해 한 권이 책을 읽으라는 말이 아니라 또 하나의 고정관념이나 맹목적인 믿음과 신념에 대한 반성과 성찰의 기회를 제공한다는 이야기다.

작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유물론자이며 무신론자이고 급진주의자이며 냉소주의자’인 나같은 사람에겐 더위를 잊을 수 있는 아주 유쾌하고 즐거운 책이었다. 종교를 가진 사람에겐 큰 거부감이나 육두문자를 입에 달고 읽다가 팽개칠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종교의 유무에 따라서가 아니라 세상과 사람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일 수 있으니 그저 무심히 읽어보는 정도가 정신 건강에 좋을 것이다.

동아일보사에서 출판된 <예수는 신화다>는 책을 독실한 크리스찬들에게 적극 권장하던 때가 있었다. 물론 그 책을 읽는 사람은 많지 않았고 읽은 사람들은 책을 쓴 사람이 아니라 나를 욕했다. 그따위 책을 권해 줬냐고. 감리교와 가톨릭의 수장들이 ‘믿음’을 통해서냐 ‘선행’을 통해서냐 하는 논쟁을 끝내고 신의 구원에 대한 합의에 대한 선언문을 우리나라에서 발표할 예정이라 시점에서 <무신학의 탄생>이라는 책이 갖는 의미는 신선하게 느껴진다.

신과 종교도 인간과 사회 그리고 자연을 벗어나지 않는 범주에서 논의할 수는 없을까? 과연 인간에게 절대자가 필요한 것인지 궁금하다. 가까운 사람과 종교와 정치 이야기를 하지 말라는 충고는 이 책에도 적용될지 모르겠다. 아주 가까운 사람에게는 추천하기가 머뭇거려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어쨌든 개인적으로는 킬킬거리며 속시원하게 읽은 책이다.


060724-0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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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철학 살림지식총서 73
이정은 지음 / 살림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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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정현종의 <섬>이라는 시 전문이다. 단 두 줄로 표현된 인간관계에 대한 가장 뛰어난 통찰로 기억하고 있다. ‘사람들’ 속에는 부모와 형제는 물론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이성도 포함된다. 하나가 되기를 원하는 순간 영원히 분리될 원초적 ‘외로움’을 깨닫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리게 되는 법이다. 어떤 타인과도 영원할 수 없다는 단순한 사실에서 출발한다는 ‘사랑’에 관한 논의는 좀 더 쉬워 보인다.

모든 인간이 ‘사랑’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다. 그것을 확인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이정은은 <사랑의 철학>에서 그 이유를 결핍과 불완전성에서 찾는다.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결핍과 불완전성을 숙명처럼 안고 태어난 인간에게 ‘사랑’은 필수 불가결한 요소가 된다. 그래서 모든 인간은 그들의 반쪽을 찾아 나선다. 그것이 운명이다.

사랑의 원동력은 자신의 육체적, 정신적 결핍에 대한 자각이다. 왜냐하면 결핍을 자각할 때,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결핍을 보완해 줄 대상을 찾게 되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나의 결핍을 상쇄할 만한 풍족함과 장점을 지닌 대상과 결합하여 하나가 되고자 하는 열정이 에로스이므로, 에로스에는 기본적으로 나와 타인 간의 ''차이''가 전제된다. - P. 63

물론 정신적 결핍과 불완전성은 육체적 욕망과 결합되어 아름다운 이성에 대한 환상으로 발전한다. 그것은 ‘미’에 대한 본능적인 몰입으로 볼 수 있다. 내게 부족한 아름다움을 이성에게 찾는 노력은 가장 손쉬운 충족을 의미한다. ‘사랑’의 종류와 의미를 묻기 이전에 인간이 추구하는 ‘사랑’ 자체에 대한 이해와 분석을 시도하는 노력은 재미있다. 철학적 의미의 ‘사랑’이 특별한 것은 아니지만 <사랑의 철학>은 ‘철학의 관점에서 바라본 사랑’을 이야기하고 있어 흥미롭다.

사랑에서 ‘차이와 동등성’의 중요성에 대한 이야기는 특히 많은 사회적 현상들을 설명해 줄 수 있는 논리적 근거가 된다. 가정 폭력과 성폭력이 등장하는 가장 큰 원인은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데서 시작된다. ‘동등성’을 무시하는 사랑은 곧바로 폭력이 된다. 무조건적인 ‘희생적 사랑’도 마찬가지 범주에서 파악될 수 있다. 서로를 인정하고 차이를 확인하며 동등한 입장에서 나누는 사랑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사랑’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류의 사랑에는 이렇게 지극히 당연해 보이는 원리들이 숨어있다.

그러나 현실이 철학을 반영해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듯이 철학은 모든 ‘사랑’을 설명할 수 없다. 통상적으로 플라토닉한 사랑과 에로틱한 사랑으로 나누어 이야기하는 인간들의 사랑에 전제나 규칙이 있을 수 없다. 그것이 정신적이든 육체적이든 모든 상황과 개별성에 기초한 감정들을 일관된 틀 속에 집어 넣을 수는 없다. 이 책에서 이러한 틀과 방법을 이야기하고 있지는 않지만 자칫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다. 사랑의 분열과 공존을 위해서 작가는 인륜성과 상호 인정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지극히 당연한 보편적 사랑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다. 다만 이 땅에 존재하는 모든 사랑의 일반적 과정과 지루한 반복 과정에 대해 관심을 가질 독자 또한 많지 않다는 데 문제가 있다. 작가는 책의 말미에서 사랑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사랑은 생명체의 감정이며 생명체의 활동이다. 사랑은 감성과 이성 모두와 연관되어 있는 활동이며, 유한한 인간을 무한으로 고양시키는 원동력이며, 인간을 고귀하게 만들고 인간의 고귀성을 드러내는 통일 작용이다. 인간이 사랑의 힘으로 모든 고통과 역경을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바로 사랑이 담고 있는 생명성과 고귀성 때문이다. 사랑 속에서 인간은 결핍을 극복하고 무한성과 만나는 고귀한 존재가 된다. - P. 94

‘사랑’에 대해 우리가 알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궁금한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경우 확인과 인정을 원한다. 인간을 고귀한 존재로 만드는 사랑에 대한 탐구와 관심은 평생 지속되는 관심의 대상이며 삶의 목표가 될 수도 있다. 다만 그 사랑의 의미는 모두의 가슴속에 각기 다른 형태와 모습으로 나타날 것이다. 사회적 규범이나 도덕적 잣대로 재단할 수도 없고 철학과 이성과 논리로 규정지을 수는 더더욱 없다. 다만, 흔히 우리들이 살아가는 과정 속에서 부딪히는 ‘사랑이 뭘까?’하는 질문에 대한 가벼운 사색을 위한 지침서로 여겨질 만한 책이 바로 <사랑의 철학>이다. 물론, 이 책을 다 읽은 후에도 ‘사랑’이 뭔지 ?수 없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060727-0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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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와 시간 - 인간은 죽음을 향한 존재, e시대의 절대사상 004 e시대의 절대사상 4
이기상 지음 / 살림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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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철학이 무언지 모른다. 그것이 모든 학문의 근원이든 아니든 중요하지도 않다. 지난 인류의 역사에서 종교와 과학의 틈바구니에서 어떤 역할과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는지도 큰 관심이 없고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다만 내게 철학은 삶이란 무엇인가 하는 화두를 해결해 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동경의 대상인 것만은 틀림없다. 과거에 명멸했던 수많은 철학자들의 논리와 주장은 화석처럼 굳어져 박물관에 버려져도 아쉬운 생각이 들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그것이 ‘지금, 여기에’ 문제를 생각해보고 미래를 조망해 볼 수 있는 작은 기회를 제공한다면 대장장이의 생각이라도 존경할 마음의 준비는 되어 있다. 철학은 그저 사유의 방식이며 사람과 사회를 바라보는 나와 세상 사이의 창문과 같다고 생각한다.

거창한 담론과 인식의 틀을 제공했던 많은 철학자들의 이론과 주장도 결국엔 인간과 사회의 문제로 돌아올 수밖에 없을 테니까. 사람이 산다는 것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의미를 물을 수밖에 없다. 단순히 먹고 사는 문제와 직결된 생존뿐만 아니라 나의 존재를 확인하고 싶은 욕구와 삶에 대한 호기심과 궁금증은 생을 마감할 때까지 지속되는 것은 아닐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루하루 현실에 충실하며 최선을 다하고 있겠지만 살아온 시간과 쌓여온 세월들이 현재를 만들었고 미래를 위한 준비에 골몰하고 있다. 우리는 그것을 ‘희망’이라고 부른다. 어떤 형태로든 모두들 내일과 태양을 바라본다.

그렇다면 우리가 흔히 입버릇처럼 말하는 우리들의 ‘존재’란 무엇일까? 철학이 종교의 시녀 역할을 도맡았던 중세를 거쳐 과학적 실증의 시대가 도래했지만 철학의 역할과 위상이 흔들리지는 않았다. 철학의 문제를 ‘언어’에서 출발시킨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이나 단 한번도 의심의 대상이 된 적이 없는 ‘존재’ 자체에 대한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한 하이데거의 노력도 이러한 철학적 탐구의 과정일 뿐인지도 모른다. 우리들의 ‘존재’는 과연 ‘실존’보다 앞서는 것일까?

끊임없이 이어지는 물음에 대해 명쾌한 해답을 얻기에는 내 머리가 너무 짧다.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은 그러한 물음에 대한 길찾기이다. 길은 쉽게 찾아지지 않겠지만 포기할 수는 없다. 길을 걸어가며 부딪히는 나무와 풀잎들, 숲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멀리 바라 보이는 푸른 하늘이 삶이 과정일지도 모른다. 답은 없고 결론도 없다. 모든 것은 과정이 말해 줄 뿐이다. 결과보다 과정을 즐기라는 말이 아니라 그 모든 궁극은 스스로 찾아내야 하는 지난한 과정의 연속일 뿐이다. 하이데거는 그 과정에서 작은 불빛을 제공한다. 저자 이기상의 말을 빌리자면 ‘존재는 시간 속에서 주어진다’는 한 문장이다. 아리스토 텔레스가 말한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다”라는 말의 ‘이성적’이란 말은 ‘언어적 능력이 있음’을 뜻한다고 한다. 결국 모든 사유의 과정과 길찾기는 ‘언어’를 통할 수밖에 없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인간 ‘존재’에 대한 사유와 탐구도 ‘언어’에 의한 틈새 찾기에 불과한지도 모르겠다.

하이데거가 '실존'이라는 주제 아래 이야기하려는 것은,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든가, 그렇지 않으면 '그들' 혹은 '사람들'이 하는 대로 따라 하면서 자기 자신이기를 포기하는가 하는 것이다. 대개 인간은 '그들'이 하라는 대로 따라 하며 살고 있다. 스스로 결단내리지 않는 것, 그것이 인간에게는 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이를 '비본래적'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본래적인가, 비본래적인가 하는 것이 하이데거의 실존개념에서 나오는 두 가지 존재함의 양태이다. 이 둘의 양태는 끊임없이 맞물려 있다. - P. 186

다시 말해 과거도 떠맡지 않고 자기 자신의 본래적인 존재가능을 미래로 던지지도 않으면서 '그들'이 살듯이 그저 그렇게 일상의 삶의 문법을 따르면서 거기에서 통용되는 인식의 틀을 가지고 사는 것이다. 그것이 일반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 P. 192


이 책 전체를 통틀어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 중의 하나다. 일반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비본래적 자아를 가지고 일상의 삶의 문법을 따르는 것이나 그러한 인식의 틀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옳지 못한 방법인가하는 문제는 개인의 선택의 문제로 남는다. 물론 그것조차 깨닫지 못하거나 사유의 방식조차 갖고 있지 못하는 나같은 우매한 사람들에게는 더욱 난감한 문제일 수도 있다.

철학은 그들만의 리그가 아니라 시장과 거리로 쏟아져 나와 우리들 삶의 모습을 일깨우고 일상에서 만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아카데미즘에 갇힌 모든 논의들을 부정하자는 것이 아니다. 실제적 유용성만이 최고의 선이라는 말도 아니다.철학의 흐름과 학문적 대상으로서만 이야기되는 방식은 옳지 않다고 본다.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을 통해 유럽철학에서는 의심하지 않았던 ‘존재’의 문제를 깊이 사유하게 되었고 하이데거 개인의 뛰어난 능력과 사유 방식은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다.

그 영향이 현재적 유용성으로 되살아나길 바랄 뿐이다. 한 평생을 하이데거 연구에 골몰하는 이기상과 같은 대부분의 학자에게 개인적으로 경의를 표한다. 얼마만한 애정과 관심과 노력이 있어야 그것이 가능할까 싶다. 대부분의 경우, 논의의 중심에서 동양은 제외되어 있다. 철학자 하이데거 몰두했던 ‘존재’의 개념과 ‘시간’과의 관계가 보편성을 획득하고 인류의 사상사에 보다 깊은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은 후대 철학자들을 통해 어렵지 않게 확인된다.

대가의 사상에 감탄하는 개인의 관심이 아니라 사유 방식과 인식의 틀을 변화시키려는 노력들이 지속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언어’에 관한 철학적 관심들을 읽어봐야겠다. 유리벽 안에 갇힌 철학적 주제들과의 적절한 거리두기가 힘겹다.


060728-0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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