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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와 시간 - 인간은 죽음을 향한 존재, e시대의 절대사상 004 ㅣ e시대의 절대사상 4
이기상 지음 / 살림 / 2006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철학이 무언지 모른다. 그것이 모든 학문의 근원이든 아니든 중요하지도 않다. 지난 인류의 역사에서 종교와 과학의 틈바구니에서 어떤 역할과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는지도 큰 관심이 없고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다만 내게 철학은 삶이란 무엇인가 하는 화두를 해결해 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동경의 대상인 것만은 틀림없다. 과거에 명멸했던 수많은 철학자들의 논리와 주장은 화석처럼 굳어져 박물관에 버려져도 아쉬운 생각이 들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그것이 ‘지금, 여기에’ 문제를 생각해보고 미래를 조망해 볼 수 있는 작은 기회를 제공한다면 대장장이의 생각이라도 존경할 마음의 준비는 되어 있다. 철학은 그저 사유의 방식이며 사람과 사회를 바라보는 나와 세상 사이의 창문과 같다고 생각한다.
거창한 담론과 인식의 틀을 제공했던 많은 철학자들의 이론과 주장도 결국엔 인간과 사회의 문제로 돌아올 수밖에 없을 테니까. 사람이 산다는 것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의미를 물을 수밖에 없다. 단순히 먹고 사는 문제와 직결된 생존뿐만 아니라 나의 존재를 확인하고 싶은 욕구와 삶에 대한 호기심과 궁금증은 생을 마감할 때까지 지속되는 것은 아닐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루하루 현실에 충실하며 최선을 다하고 있겠지만 살아온 시간과 쌓여온 세월들이 현재를 만들었고 미래를 위한 준비에 골몰하고 있다. 우리는 그것을 ‘희망’이라고 부른다. 어떤 형태로든 모두들 내일과 태양을 바라본다.
그렇다면 우리가 흔히 입버릇처럼 말하는 우리들의 ‘존재’란 무엇일까? 철학이 종교의 시녀 역할을 도맡았던 중세를 거쳐 과학적 실증의 시대가 도래했지만 철학의 역할과 위상이 흔들리지는 않았다. 철학의 문제를 ‘언어’에서 출발시킨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이나 단 한번도 의심의 대상이 된 적이 없는 ‘존재’ 자체에 대한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한 하이데거의 노력도 이러한 철학적 탐구의 과정일 뿐인지도 모른다. 우리들의 ‘존재’는 과연 ‘실존’보다 앞서는 것일까?
끊임없이 이어지는 물음에 대해 명쾌한 해답을 얻기에는 내 머리가 너무 짧다.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은 그러한 물음에 대한 길찾기이다. 길은 쉽게 찾아지지 않겠지만 포기할 수는 없다. 길을 걸어가며 부딪히는 나무와 풀잎들, 숲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멀리 바라 보이는 푸른 하늘이 삶이 과정일지도 모른다. 답은 없고 결론도 없다. 모든 것은 과정이 말해 줄 뿐이다. 결과보다 과정을 즐기라는 말이 아니라 그 모든 궁극은 스스로 찾아내야 하는 지난한 과정의 연속일 뿐이다. 하이데거는 그 과정에서 작은 불빛을 제공한다. 저자 이기상의 말을 빌리자면 ‘존재는 시간 속에서 주어진다’는 한 문장이다. 아리스토 텔레스가 말한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다”라는 말의 ‘이성적’이란 말은 ‘언어적 능력이 있음’을 뜻한다고 한다. 결국 모든 사유의 과정과 길찾기는 ‘언어’를 통할 수밖에 없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인간 ‘존재’에 대한 사유와 탐구도 ‘언어’에 의한 틈새 찾기에 불과한지도 모르겠다.
하이데거가 '실존'이라는 주제 아래 이야기하려는 것은,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든가, 그렇지 않으면 '그들' 혹은 '사람들'이 하는 대로 따라 하면서 자기 자신이기를 포기하는가 하는 것이다. 대개 인간은 '그들'이 하라는 대로 따라 하며 살고 있다. 스스로 결단내리지 않는 것, 그것이 인간에게는 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이를 '비본래적'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본래적인가, 비본래적인가 하는 것이 하이데거의 실존개념에서 나오는 두 가지 존재함의 양태이다. 이 둘의 양태는 끊임없이 맞물려 있다. - P. 186
다시 말해 과거도 떠맡지 않고 자기 자신의 본래적인 존재가능을 미래로 던지지도 않으면서 '그들'이 살듯이 그저 그렇게 일상의 삶의 문법을 따르면서 거기에서 통용되는 인식의 틀을 가지고 사는 것이다. 그것이 일반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 P. 192
이 책 전체를 통틀어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 중의 하나다. 일반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비본래적 자아를 가지고 일상의 삶의 문법을 따르는 것이나 그러한 인식의 틀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옳지 못한 방법인가하는 문제는 개인의 선택의 문제로 남는다. 물론 그것조차 깨닫지 못하거나 사유의 방식조차 갖고 있지 못하는 나같은 우매한 사람들에게는 더욱 난감한 문제일 수도 있다.
철학은 그들만의 리그가 아니라 시장과 거리로 쏟아져 나와 우리들 삶의 모습을 일깨우고 일상에서 만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아카데미즘에 갇힌 모든 논의들을 부정하자는 것이 아니다. 실제적 유용성만이 최고의 선이라는 말도 아니다.철학의 흐름과 학문적 대상으로서만 이야기되는 방식은 옳지 않다고 본다.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을 통해 유럽철학에서는 의심하지 않았던 ‘존재’의 문제를 깊이 사유하게 되었고 하이데거 개인의 뛰어난 능력과 사유 방식은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다.
그 영향이 현재적 유용성으로 되살아나길 바랄 뿐이다. 한 평생을 하이데거 연구에 골몰하는 이기상과 같은 대부분의 학자에게 개인적으로 경의를 표한다. 얼마만한 애정과 관심과 노력이 있어야 그것이 가능할까 싶다. 대부분의 경우, 논의의 중심에서 동양은 제외되어 있다. 철학자 하이데거 몰두했던 ‘존재’의 개념과 ‘시간’과의 관계가 보편성을 획득하고 인류의 사상사에 보다 깊은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은 후대 철학자들을 통해 어렵지 않게 확인된다.
대가의 사상에 감탄하는 개인의 관심이 아니라 사유 방식과 인식의 틀을 변화시키려는 노력들이 지속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언어’에 관한 철학적 관심들을 읽어봐야겠다. 유리벽 안에 갇힌 철학적 주제들과의 적절한 거리두기가 힘겹다.
060728-0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