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력과 가스통 바슐라르 살림지식총서 182
홍명희 지음 / 살림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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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를 흔히 암흑기라 부른다. 이 명명법에 대해서도 논란이 많지만 우리가 중세를 암울한 시기로 여기는 까닭은 인간 이성의 암흑기였기 때문이다. 종교와 신학의 가치가 모든 것에 앞섰고, 인간의 이성과 합리적 정신은 존중받지 못했다. 철학과 과학은 신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는 범위 내에서 추구될 수 있는 가치였다. 그러다가 계몽과 이성중심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눈에 보이는 것, 증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면 객관적 지식으로 인정 받지 못하는 시기를 맞이한다. 근대로의 이행기에 인류는 과학과 이성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게 된다. 그것은 지금까지 크게 달라지지 않았고 객관적 지식이라는 측면에서 문제를 제기할 수도 없다. 다만 한 부분을 강조하다보면 분명히 소홀해지는 부분이 있게 마련이다.

인간의 이성을 객관화 시킨다는 것도 엄밀한 의미에서 보면 부정될 수 있는 말이다. 객관성이라니? 모두가 그렇다고 말할 수 있는 부분은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진실이라고 믿고 사는 대부분의 사실들이 그러하듯이 주관적 판단과 가치가 개입된 문제일 경우가 많다. 어쨌든 인간을 이루고 있는 부분은 바람직하지 않더라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눈다. 이성과 감성이 그것이다. logos와 pathos로 구분하기도 하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이분법적으로 나누어본다. 어느 한 쪽이 우위에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20세기를 전후해서 과학기술의 급격한 발달로 감성의 역할과 위상이 축소된 것은 사실이다. 바로 이때 ‘상상력의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을 일으킨 사람이 가스통 바슐라르이다.

바슐라르의 힘겨웠던 삶의 과정으로 시작되는 <상상력과 가스통 바슐라르>는 한 인간의 삶의 역경이 그의 학문과 사유 방식을 지배할 수 없다는 숭고함까지 느끼게 한다. 자신의 삶과 그의 업적은 분명히 깊은 관련을 맺고 있지만 절대적인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사실을 바슐라르를 통해서 확인하게 된다. 그는 인간의 상상력과 주관적 가치를 극대화시킨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철학자 중 한 사람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객관성을 추구하면서도 사실은 주관적인 가치들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P. 30)"라는 말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바슐라르는 우리들 주변을 가득 채우고 있는 주관적 가치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규명해내는 데 일생을 바쳤다. 인간에게 상상력은 크게 두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꿈과 몽상이 그것이다.

인간은 몽상 속에서 꿈을 꾸고, 그 꿈속에서 상상력이 활동한다. 이 몽상은 완전한 의식의 상태도, 완전한 무의식의 상태도 아니라는 점에서 인간의 독특한 정신활동이다. 밤에 꾸는 꿈이 완전한 무의식의 상태에서 무의식 속의 에너지가 활동하고, 사색은 명료한 의식의 집중상태에서 이루어지는 데 비해서 몽상은 이 두 활동의 중간지대에서 이루어진다. - P. 43

밤에 꾸는 꿈이 현실적 자아를 벗어난 주체에 의해 실현되는 상상력이라면, 몽상은 낮에 꾸는 꿈이라고 볼 수 있다. 바슐라는 이 독특한 인간의 상상력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이 상상력이야말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임을 밝히고 있다. 모든 예술 활동의 근간이 되며 동물과 구별되는 가장 확실한 차이이지만 눈으로 확인될 수 없는 가치이기 때문에 주목받지 못하고 많은 오해와 편견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그의 주장들을 살펴보면 이미지의 역할들을 새롭게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는 흔히 이미지와 상상력을 이성과 합리보다 낮은 것으로 바라본다. 활자의 보조수단으로서 이미지의 역할에 관심을 보이는 정도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혁명적인 변화를 보였던 이미지의 힘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컴퓨터의 도스환경에서 윈도우의 출현은 놀랄만한 것이었다. 컴퓨터를 대하는 사람들의 기본 자세와 습득, 활용 속도는 비교할 수 없을만큼 확산되었다. 단순히 쉽고 빠른 방법을 추구하는 것이 이미지와 상상력이 아니라 인간이 가진 독특한 능력을 적용시킨 예라고 볼 수 있다. 엉뚱한 예로 여겨질 수 있으나 우리가 주변에서 확인할 수 있는 이미지와 상상력은 이성과 논리를 넘어선 자리에 자리 잡고 있다.

특히 현대사회에서 감각적 이미지와 정신적 이미지와 같은 다양한 부분들은 홍명희 말대로 미래에 대한 전망을 확인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바로미터가 된다. 미래는 이미지와 상상력의 시대가 될 것이라는 것을, 그 미래가 어떤 미래일지라도 바슐라르의 탁월한 직관적 눈을 빌려야 한다. 그의 이미지와 상상력이 지니는 현대적 의미에 대한 저자의 말이 의미심장하다.

현대 사회에서 갈수록 감성적인 부이 사라져 가고, 개인들은 분별없이 육체적 자극에만 중독되어 가는 - 그럼으로써 갈수록 타율적 인간이 되어가는 - 지금의 현상은 결국 활발한 상상력의 퇴와 창조적 이미지의 화석화에 의한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현대의 이미지 사회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갖추지 못한다면, 우리의 미래에 대한 장밋빛 전망들은 결국 환상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다. - P. 81

결국 문제는 이미지들의 어떠한 양과 질이 우리의 지배적인 문화를 생산해 내는가를 아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차원에서, 우리가 이미지를 과연 진정한 창조적 상상력의 발현으로 활성화시킬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 P. 91


스무살 무렵 <촛불의 미학>으로 처음 만났던 그를 오랜만에 다시 만났다. 재회는 즐거웠고 몽상은 달콤했다. 공상과 망상이라도 좋다. 백일몽이라고 불러도 좋다. 끝없는 상상력과 감각적, 정신적 이미지의 확산은 우리의 미래를 전망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척도가 될 것이다. 지금 이 순간, 꿈을 꾸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앞날에 축복 있기를. 꿈은 이루어진다니까.


060731-0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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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의 기원
르네 지라르 지음, 김진식 옮김 / 기파랑(기파랑에크리)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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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하나의 주제에 대한 기나긴 논증’이라는 저자의 서문은 르네 지라르의 가장 중요한 이해의 척도다. 내용보다 서문의 제목이 눈에 선명하다. 각 장에서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을 인용한 것은 저자의 다윈에 대한 존경심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문학에서 비롯된 지라르의 지루한 여정은 인류학을 넘어 문화의 기원으로까지 확산된다. 그가 말하는 <문화의 기원>은 물론 그가 지금까지 주장해온 희생양과 모방적 욕망에 대한 정리 작업에 해당된다.

그러나, 머나먼 옛 이야기를 경청하듯 그의 말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문화의 기원’을 알게 되는 것은 아니다. 대담집 형식으로 되어 있는 이 책을 읽다보면 무수한 의문들과 부딪치게 된다. 케임브리지 대학 이탈리아어과 교수인 피에라올로 안토넬로와 리우데자네이루 대학 비교문학 교수인 조앙 세자르 데 카스트로 로크는 르네 지라르와의 대담을 통해 그가 지금까지 이룩한 학문적 성과를 정리하기 위한 질문들을 던진다. 물론 논쟁적 질문과 그에게 반기를 들었던 학자들의 견해를 인용하기도 한다. 지라르는 첫 저서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을 비롯해서 <폭력과 성스러움>등을 통해 보여주었던 일관된 주장을 하나의 흐름으로 설명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것은 다름아닌 희생양과 모방적 욕망에 대한 끈질기고도 집요한 탐구의 결과물들이다.

기독교를 통해 본 예수의 모습은 지라르에게 집단의 폭력과 무책임한 모방에 대한 희생양으로 인식된다. 그가 말하는 예수의 모습을 한 마디로 정의하는 것은 조심스럽다. 다양한 문화적 풍토와 인간의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무의식들을 확인하는 작업은 어쩌면 현재형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인류가 쌓아온 수많은 역사적 사건과 인간의 행동들을 토대로 그가 읽어내고 싶었던 것은 당연히 인간과 사회적 관점에서 바라본 ‘폭력’이다. 그것을 읽어내는 방식에 전적으로 동의하기는 어렵다. 특히 에피큐러스 학파를 제외한 무신론에 대한 언급과 이슬람 문화권에 내재한 폭력적 성향을 최근의 9.11테러와의 관련성 측면에서 해석하는 이야기들은 논란이 많을 수 있다. 종교와 폭력을 상징적으로 이해하는 방식은 정답이 있을 수 없다. 논의의 주변부에서 핵심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나같은 얼치기에게도 많은 문제점이 보인다. 무엇이 문제인지는 스스로 확인할 일이다.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을 모방한 제목 <문화의 기원>은 폭력과 희생양에 대한 모방이론을 토대로 지속되고 있는 르네 지라르의 작업에 대한 총결산에 해당된다. 인문학적 관심의 정점에는 항상 현실이 자리잡아야 한다고 믿는다. 아카데미 프랑세즈 ‘불멸의 40인’에 선정됐다는 옮긴이의 친절한 해설은 그의 주장과 이야기에 권위를 부여할 수는 있겠지만 그의 주장에 대한 논쟁점들을 제공하지는 못하고 있다. 특히 한국어판을 위해 뒤에 덧붙혔다는 레지 드브레에 대한 반론은 ‘레지 드브레’의 글을 읽지 않은 상태의 나에게는 무용지물이었다. 지라르가 반박하는 글임에도 불구하고 레지 드브레의 글에 흥미가 생겼다. 지나친 반골 기질 때문일까?

흔히 우리들 주변에서 발견할 수 있는 현실의 문제들을 ‘세상의 기원’을 탐구하기 위한 지라르의 견해와 연구를 통해 확인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여기서 말하는 세상의 기원은 인간의 기원으로 바꾸어 이해해도 상관없다. 아니, 인간과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에 대한 기원을 탐구해온 저자의 목소리로 이해해야 좋을 것 같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속성과 지나온 시간들과의 싸움은 언제나 지루하고 공허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한 권의 책과 한 명의 천재적인 인간이 통찰해낸 이야기는 우리에게 무엇을 전해줄 수 있을 것인가. 학문의 의무와 역할에 대한 새삼스런 의문이 쏟아진다. 나름의 방식으로 세상을 판단하고 재단하는 모든 개인들에게 ‘객관’과 ‘주관’의 기준이 있기는 한 것인가. 숭산 스님의 말대로 오직 모를뿐!인가.

세상의 기원이든 문화의 기원이든 지금도 여전히 우리들 주변에 널려 있는 희생양들과 모방적 욕망에 대한 그의 견해에는 동의할 수밖에 없다. 다만 그것을 논증하는 방식에 대한 논의는 그들의 몫이다. 우리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욕망의 부피와 크기를 확인하는 일보다 더 큰 고통은 없다. 그 고통이 타인의 고통을 통해서라면 더욱 암담하다. 발딛고 서 있는 현실의 모순들을 해결해 줄 수 있는 특별한 처방이 아니라 그 모순들을 확인하는 1차적 과정 자체에 목적과 의미를 둔다는 측면에서만 이 책은 나에게 의미가 있다.


060802-0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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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콘서트 1 - 노자의 <도덕경>에서 마르크스의 <자본론>까지 위대한 사상가 10인과 함께하는 철학의 대향연 철학 콘서트 1
황광우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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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을 한 마디로 규정할 수는 없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모든 행위와 사고 방식의 총체적인 이름을 철학이라고 불러도 무방하고 인간 스스로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 행위를 철학이라고 정의해도 좋다. 그 중심에 항상 ‘인간과 사회’가 놓여 있기만 하다면. 우주와 자연의 순환 고리에 대한 의문들도 결국엔 인간의 호기심에 의한 끝없는 탐구 행위에 불과하기 때문에 철학은 이 세상 모든 것들에 대한 줄기찬 의문 부호이기도 하다. 어쨌든 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우리가 궁금한 것은 모두 담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철학을 가장 어렵고 따분하고 관념적인 학문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학교 교육에서 비롯된다. 내가 중․고교를 거치면서 도덕과 윤리라는 과목을 통해 접했던 철학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대표적인 철학자의 주장과 철학사를 연대기적으로 요약 정리해서 암기하는 일이었다. 우리들 삶과의 관계를 묻거나 생각하는 힘을 기르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것을 외워서 어쩌자는 것인가 하는 의문은 부질없는 것이었다. 다른 과목도 별반 다르지 않았으나 철학이 정말 쓸데없는 것이라는 사실만은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시간이 이렇게 한참 흘러 이제는 모든 것이 철학으로 통한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수많은 책들 속에, 수많은 관계 속에, 수많은 시간들 속에 자리잡고 있는 풀리지 않는 의문들에 대한 고민은 이미 많은 철학자를 거쳐왔다는 사실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하게 되었다. 결국 우리에게 철학은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궁극적인 해답을 얻기 위한 과정이다. 어떤 철학자의 어떤 생각이든 ‘현재적 유용성’ 측면에서 바라보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어렵고 딱딱한 ‘철학’에 대한 고정 관념을 깨뜨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쉽지 않지만 꼭 필요하며 의미있는 일이다. 왜냐하면, 여러 철학자들의 사유의 핵심을 짚어내는 일은 호기심을 넘어 우리들 사유의 폭을 넓혀주기 때문이다. 생각의 폭이 넓고 깊어지면 삶의 목적과 방향이 달라지고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우리 주변에서 그 방법을 찾는 것 또한 쉬운 일이 아니다. 제대로 된 철학자를 만나 대화를 나누거나 좋은 책을 읽으며 스스로 깨달음을 얻어가는 방법이 있겠지만 전자는 현실적으로 매우 어렵다. 문제는 좋은 책과의 만남인데 어렵고 긴 시간들을 감내하며 한 권, 한 권 우리 인류의 고전이 되어버린 책들을 읽어나가는 일을 즐기지 않은 한 용기를 내기도 어렵다. 그렇다고 해서 참고서를 읽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러한 어려움을 해결해 줄 만한 좋은 책을 만나는 것은 참된 벗을 만나는 일처럼 행복한 일이다. 황광우의 <철학 콘서트>는 철학이 무엇이며 왜 필요한 것인가를 알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권해주고 싶은 책이다. 특히 철학에 호기심을 느낄 무렵의 청소년들에게 좋은 안내서가 될만한 책이다. 어설픈 요약본으로 쉽고 간편한 방법으로 한 철학자의 생애와 사상을 내것으로 만들고 싶은 안일한 욕망을 가진 논술 세대들도 이 책을 통해서라면 철학의 즐거움을 맛볼 만하다. 문학과 철학에 관련된 수많은 책들이 ‘논술’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나온다. 출판사들의 상업적 욕망과 학부모와 청소년들의 불안감이 상승 효과를 일으키는 출판 시장에서 제대로 된 책을 골라내는 혜안을 갖는 것이 더욱 어려운 실정임을 감안하면 <철학 콘서트>가 갖는 의미는 새로워 보인다.

한 권의 책이나 한 사람의 철학자를 제대로 소화해서 뱉어내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단순한 요약 정리를 넘어 과거와 현재의 시간 여행을 가능하게 해 줄 수 있는 능력은 깊은 사색과 꼼꼼한 책읽기 그리고 오래 축적된 세상에 대한 올곧은 시선이 있어야 가능하다고 믿는다. 그런 의미에서 황광우의 <철학콘서트>는 추천할 만한 책이다.

특히, 마르크스와 노자에 대한 부분은 학교에서 많은 학생들에게 읽히고 싶은 글이다. 시대가 변하고 시간이 흘러도 ‘고전’이라는 이름으로 영원히 기억될만한 열 명의 철학자와 그들의 대표적 저서에 대한 저자의 분석과 해설은 독자들을 행복하고 편안하지만은 않은 철학의 세계로 안내한다. 그런데도 그의 설명은 쉽고 재미있다. 직설적이고 구어적인 표현들은 가볍게 느껴지기 쉽지만 내용의 흐름과 탄탄한 문장은 그러한 우려가 오히려 장점으로 돋보이게 한다. 제한된 분량과 철학자들의 캐리커처는 친근하게 다가설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수박 겉핥기식의 풍성한 시식 코너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철학과 고전을 위한 에피타이저 정도로 선택한 독자라면 흐믓한 미소를 지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철학이란 무엇인가’를 한 권의 책을 통해 해결하고 싶은 얄팍한 욕망을 가진독자라면 이 책으로도 채워지지 않을 것이다. 책을 읽는 목적과 방법에 따라 다양한 의미를 줄 수 있는 책이다. 최근에 생각의 나무에서 나온 <최고의 고전 번역을 찾아서>를 전폭적으로 신뢰할 순 없지만 고전을 읽는 나같은 우매한 독자에게 좋은 참고가 되듯이 이 책은 고전과 철학의 입문서로서 손색이 없는 책이다. 황지우 시인의 동생이라는 사실이 특별함을 더할 수는 없지만 그 형제들의 삶이 주는 의미는 또 하나의 작은 ‘철학 콘서트’이다.

인간의 의식이 자신의 존재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인간의 사회적 존재가 자신의 의식을 결정한다.(마르크스, ‘정치 경제학 비판을 위하여’중에서 재인용) - P. 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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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한 번도 나를 비껴가지 않았다 - 비전향 장기수 허영철의 말과 삶
허영철 지음 / 보리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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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10 고배율 쌍안경으로 건너다보는 북녘의 하늘은 고즈넉하다. 겨울에는 남녘을 향해 초소 옆에 앉아 한가롭게 담배를 피우는 모습이나 초소 넘어 보급소에서 작업을 하는 모습도 자주 관측된다. 아침 저녁으로 유행가처럼 울려 퍼지는 대남 방송이 친근하기까지 해진다. 비무장지대(DMZ) 안에 무기를 반입하고 초소를 설치해서 경계 근무를 하는 것은 분명한 정전 협정 위반이다. 수색중대 GP장으로 두 개의 GP에서 적 관측 및 경계 근무를 수행했던 기억의 저편이 떠오른다. 누구나 한 번쯤 경험하는 군대라는 통과의례를 혹독하게 경험했다고 생각했던 순간들이 먼저 떠올랐다.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넘어선 해석은 불가능한 것이므로.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된 이후 52년째 휴전 상태인 지구상의 유일무이한 나라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일은 어떤 것인가?

비전향 장기수 허영철이 자신의 삶을 구술하고 기록한 <역사는 한 번도 나를 비껴가지 않았다>를 읽다가 여러 번 흐르는 눈물을 애써 감췄다. 주변 상황 때문에 책장을 넘기다 눈물을 흘리는 일도 쉽지 않은 경험이었다. 1955년에 수감되어 1991년에 석방될 때까지 무려 36년간 세상에서 배제된 한 인간의 삶은 시간의 무게만으로도, 그것이 동시대인이라는 사실만으로도 가슴을 먹먹하게 했다. 만 36년의 세월동안 그가 지켜온 것은 무엇일까? 꼭 내가 살아온 인생만큼 한 평 남짓한 독방에서 홀로 지켜온 그의 신념은 오히려 궁금하지 않았다. 슬라보예 지젝의 말처럼 그것은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이었을까?

1920년생인 허영철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은 우리 민족의 근대사를 또 다른 방식으로 조망해 보는 일이다. 한 개인을 통해 우리가 겪었던 시간의 무게를 덜어보려는 것은 부질없어 보이지만 전형적 개인이 아닌 한 인간의 삶이 우리의 근현대사를 반증하고 있다. 온몸으로 고스란히 일제와 해방, 한국전쟁과 21세기를 살아내고 있는 한 인간의 삶은 나를 숙연하게 한다.

파란만장하고 굴곡진 인생은 많다. 내 인생이 소설 한 권쯤 된다고 말하지 못할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마는 허영철의 삶은 소설이 아니라 그대로 ‘역사’가 된다. 해방 공간의 이념 대립과 혼란을 수습하지 못한 채 분단 된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무감각한 역사 인식을 반성하자는 상투적인 의미와는 사뭇 다른 가슴 한구석의 결림으로 다가오는 이 책은 참으로 사람을 불편하게 하는 책이다. 그래서 누구에게나 꼭 한 번은 권해줄 만한 책이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리웁다는 말 한마디 때문인지도 모른다. 전북 부안이 고향인 허영철은 2000년에 송환된 비전향 장기수보다 불행한 것일까? 통틀어 6개월도 함께 살아보지 못한 아내와의 40년만의 만남은 어떤 것일까? 이제는 정년을 앞두었을 고등학교 교사인 아들과 미국으로 건너간 딸이 보고 싶지 않았을까? 가족들의 설득은 그 어떤 모진 고문보다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다분히 인간적인 면에서 형이하학적인 욕망을 떨쳐 낼 수 있었던 한 인간의 신념과 생애는 ‘혁명’에 바쳐지고 있었다.

그가 이루지 못한 ‘혁명’은 언제 이루어질 것인가. ‘공화국’이 있었기 때문에 견뎌낼 수 있었다고 말하는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이성적이고 공식적인, 혹은 논리적이고 분석적인 태도로 그의 삶을 들여다보는 일은 부질없다. 항상 ‘인간’을 중심에 두고 세상과 사회에 눈 뜰 무렵의 한 혁명가가 변하지 않고 늘 푸른 소나무처럼 지켜낼 수 있었던 신념을 이야기하는 것도 무의미하다. 내가 숙연해진 것은 오로지 시간이다. 36년을 견뎌낼 수 있었던 무기를 우리는 무엇이라 이름 붙일 수 없을 것이다. 이념도 사상도 이데올로기도 광기도 집착도 아닌 그 무엇을 읽어내는 것은 쉽지 않다. 80대 노인의 목소리는 덤덤하고 차분하다. 소리 높혀 자신의 주장을 펼치지도 않는다. 그가 살아온 세월과 쌓아온 시간들을 풀어놓는다. 이것이 우리가 겪었던 삶이었다고.

“국가란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착취, 억압하고 지배하기 위한 독재기구다.” - P. 172

북의 체제를 비판하거나 결과론적 입장에서 소련과 동구권의 붕괴를 이야기하며 허영철의 삶을 단정짓거나 평가하는 것은 미친 짓이다. 체제의 우월성을 이야기하는 것도 그에게는 우습다. 자유 민주주의라고 말하는 이 땅의 민중들의 삶을 보라. 그리고 아직도 꿈꾸고 그 꿈을 실현하고 싶을 한 혁명가의 생각의 언저리를 반추해 보는 것이 이 책을 읽는 목적이다. 국가에 대한 허영철의 젊은 날의 발언은 아나키스트의 목소리로 들린다. 당과 공화국은 그에게 국가가 아닌 이상향이었다. 그의 말이 틀렸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을까?

아내와 두 자식이 담장 너머에 살고 있는 남쪽 출신의 炷徨?장기수. 때때로 면회와 편지를 통해 그들의 고통스런 삶을 지켜보아야하는 허영철의 가슴 속엔 무엇이 들어 있었나. 자신의 선택과 판단을 단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을까? 끊임없이 쏟아지는 의문과 불편함은 이 책을 읽는 내내 지속될 것이다. 문제는 그가 짊어지고 감내한 세월 속에 켜켜이 묻어 있는 고민들이 어쩌면 아직도 지속되고 있다는데 있다. 자본주의 이후의 문제 말이다. 단순히 이상향을 꿈꾸던 몽상가의 허망한 말로쯤으로 여길 수 없는 분명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김산과 님웨일즈의 <아리랑>을 통해 그리고 조정래의 <인간연습>으로 인상 깊었던 실존 인물의 이 막막한 한 생애를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온몸으로 역사의 소용돌이 한 복판에 서 있었던 그의 삶이 지금 현재도 이어지고 있다는 데 그 고민의 핵심이 묻어난다. 불꽃처럼 살다가 산화한 체 게바라의 극적인 삶이 ‘20세기의 가장 완벽한 인간’이라는 다소 거북한 사르트르의 평가로 대표된다면 이 땅에서 ‘역사는 한 번도 나를 비껴가지 않았다’고 스스로 고백하는 허영철의 삶에 대한 평가는 우리들의 몫이 아니다. 근현대사를 위한 어떤 훌륭한 텍스트보다도 우선 이 책을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이제는 사상 문제가 아니고 양심의 문제이지.(1990. 1. 8 친지 허종규, 허춘과의 면회) - P. 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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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국가론
플라톤 지음, 최현 옮김 / 집문당 / 199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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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진화가 끝난 것은 언제일까하는 바보같은 의문이 든다. 생물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인간은 여전히 진화를 거듭하고 있으며 보다 우수한 종의 선택적 생존이 이루어지고 있을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인간 이성의 정점은 오히려 퇴보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방법들이 동원되었고, 알고 싶은 대부분은 것들에 대한 사유는 이미 끝나 버렸다. 과학과 기술의 발달은 그 결과물들의 실현 가능성을 입증하는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21세기를 살아가면서 아니 앞으로 펼쳐질 미래의 시간들 속에서 의미있는 삶은 어떤 것일까에 대한 해답을 찾고 싶다는 허황된 꿈을 꾸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이 시대에 플라톤을 읽는 것은 허망하다. 

도대체 2,500여년의 기나긴 시간동안 인간은 ‘발전’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내딛지 못하고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원을 그리며 그 자리에서 맴돌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생활은 편리해졌을지 모르지만 사람들은 조금씩 더 바빠졌고 산다는 것이 무엇이고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들에 대한 결론은 더욱 어려워져 가고 있다. 양적 질적 측면에서 눈부신 진화를 거듭하고 있는 현생 인류의 모습을 플라톤은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플라톤의 <국가>는 인간이 실현할 수 있는 혹은 실현해야할 가장 이상적인 <국가>의 형태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과 설득의 과정이다. 물론 그것은 ‘국가’라는 것이 꼭 필요하다는 전제하에 이루어지고 있다. 철인 정치로 대표되는 플라톤의 이상적인 국가의 형태는 공산주의 사회와 가장 유사하다. 국가를 통치하는 지배자 혹은 수호자들은 사유 재산도 없고 가족도 없다. 아내와 자식을 공유하며 사사로운 재산 때문에 자신의 이익을 위해 정책에 흔들림이 있어서는 안된다. 아내와 자식, 혹은 사유 재산은 공정하게 국가를 운영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다.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국민들을 위해 일할 수 없다는 것은 정의로운 일이 아니며 그러한 덕성은 수호자 혹은 지배자에게는 치명적인 결함이다. 그것을 막기 위해서는 아내도 자식도 사유재산도 없어야 한다. 급진적인 혁명적인 플라톤의 생각은 현실로 드러난다.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의 아들들을 보라! 김지하가 ‘오적’이라 지칭한 사람들이 풍기는 악취와 썩은 하수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혁명보다 힘겨운 ‘개혁’을 하겠다는 사람들은 기득권의 목숨 건 집단 이기주의에 맥을 못추고 있다.  

토마스 모어의 ‘utopia’는 ‘세상에 업는 곳’이라는 뜻이다. 플라톤이 주장했던 ‘이상 국가’는 어쩌면 인류가 도달할 수 없는 영원한 꿈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가장 유사한 형태로 접근할 수 있는 방법들은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러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고 양보하고 합의하는 나라들도 분명히 존재한다. 부정적 시각으로 현실을 바라보아서가 아니라 어떤 형태로든 ‘나’만을 위해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거울에 비춰보아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플라톤이 말한 이상국가는 꿈같은 곳이 아니다. 철인 즉 철학자가 나라를 다스려야 제대로 된 나라가 된다는 것을 비판하는 어리석음을 범할 필요도 없다. 항상 그러하듯이 공시적이고 통시적인 관점에서 플라톤이 살아가던 시대의 가장 이상적 형태의 국가가 시대가 변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현재적 유용성을 갖는 의미만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철인이 통치해야 한다고? 김영삼은 우리에게 유일한 철학과 출신의 대통령이 아니었던가. 결과가 어떠했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론과 실제는 다를 수 있다. 정치 체제와 제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가 어떻게 적용하는가에 달려있다는 사실은 초등학생들도 안다. 그것이 철인 정치이든 뭐든 간에 통치자의 역량과 진정성에 대해 검증할 수 있는 방법들이 필요한 것이다. 자신이 믿는 모든 가치가 선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얼마나 위험한 도박인가. 자기 나라의 작전통제권을 갖기 싫다고 다른 나라가 대신 우리를 위해 우리를 지켜야 한다는 사실을 국민들에게 묻겠다는 사람들도 그들의 입장에서는 최선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올바른 판단과 이성이 필요한 철인에 의해 국가가 통치되어야 한다는 플라톤의 생각이 어쩌면 이상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국가’의 형태와 제도 자체가 국민 혹은 시민들에게 얼마나 불편하고 억압적인 구조로 작용하는 지에 대한 반성과 성찰도 이제는 간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주민 자치를 일컬어지는 지방자치제도가 실현된다고 해서 모든 이 해결되지는 苛쨈? 유급제로 바뀐 그들의 입장과 겸직이 가?상태에서 벌어지고 있는 각종 이권의 개입과 정책 결정 과정에서의 문제점들을 우리는 대부분 외면해 버린다. 플라토의 주장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들이 먼저 국가에 대해가져야 하는 생각과 그 생각들을 실천하기 위한 노력과 과정들이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형인 글라우콘의 대화 형식으로 되어있는 <국가>는 대화법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깨달음을 주겠다는 목적으로 쓰여졌을 것이다. 어쩌면 집필 목적보다 현대인들의 관점에서 토지의 공적 개념이나 철저한 남녀평등 같은 개념을 주장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할 수도 있겠다. 선각자나 철학자들의 몫은 전체를 통찰하는 눈과 그것을 읽어내는 힘에 있다. 쉽지 않은 일이고 공감을 얻을 수 없어도 우리가 나갈 미래의 방향을 제시하는 일이 그들의 역할이 아닐까 싶다. 그런 의미에서 플라톤은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인류의 영원한 사유의 출발점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가 서양인이든 동양인이든 상관없이 말이다. 

주제 사라마구의 <동굴>에서 인용한 ‘동굴의 비유’가 가장 극적이고 중요한 플라톤의 사상을 드러낸다. 참된 선의 실체인 ‘이데아’를 설명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신과 연관지어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해석하든 그 논의 자체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다만 이데아와 현실 그리고 그것을 모방한 예술 사이에 벌어지는 겹침과 펼침들이 중요하다. 그 사이를 뛰어넘는 사유의 틀을 마련하는 것은 플라톤 이후의 세대들이 짊져야 할 몫이 아닐까 싶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서 ‘이데아’를 찾기보다 세 번째 모방인 ‘예술’을 통한 간접적이고 모호한 방식의 접근이 더 행복한 이유는 실체를 알기 위한 호기심도 없고 노력도 하고 싶지 않은 개인적 성향 탓일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행복하다면 할 수 없는 노릇이다. 철학은 일단 자신만의 방식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는다. 이론과 실제의 적용 문제, 즉 앞서 말했던 삶의 태도와 방식에의 적용 문제는 통합이 필요하다. 아직 갈 길은 멀기만 하다.

 060815-0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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