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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의 국가론
플라톤 지음, 최현 옮김 / 집문당 / 1990년 4월
평점 :
인류의 진화가 끝난 것은 언제일까하는 바보같은 의문이 든다. 생물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인간은 여전히 진화를 거듭하고 있으며 보다 우수한 종의 선택적 생존이 이루어지고 있을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인간 이성의 정점은 오히려 퇴보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방법들이 동원되었고, 알고 싶은 대부분은 것들에 대한 사유는 이미 끝나 버렸다. 과학과 기술의 발달은 그 결과물들의 실현 가능성을 입증하는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21세기를 살아가면서 아니 앞으로 펼쳐질 미래의 시간들 속에서 의미있는 삶은 어떤 것일까에 대한 해답을 찾고 싶다는 허황된 꿈을 꾸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이 시대에 플라톤을 읽는 것은 허망하다.
도대체 2,500여년의 기나긴 시간동안 인간은 ‘발전’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내딛지 못하고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원을 그리며 그 자리에서 맴돌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생활은 편리해졌을지 모르지만 사람들은 조금씩 더 바빠졌고 산다는 것이 무엇이고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들에 대한 결론은 더욱 어려워져 가고 있다. 양적 질적 측면에서 눈부신 진화를 거듭하고 있는 현생 인류의 모습을 플라톤은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플라톤의 <국가>는 인간이 실현할 수 있는 혹은 실현해야할 가장 이상적인 <국가>의 형태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과 설득의 과정이다. 물론 그것은 ‘국가’라는 것이 꼭 필요하다는 전제하에 이루어지고 있다. 철인 정치로 대표되는 플라톤의 이상적인 국가의 형태는 공산주의 사회와 가장 유사하다. 국가를 통치하는 지배자 혹은 수호자들은 사유 재산도 없고 가족도 없다. 아내와 자식을 공유하며 사사로운 재산 때문에 자신의 이익을 위해 정책에 흔들림이 있어서는 안된다. 아내와 자식, 혹은 사유 재산은 공정하게 국가를 운영하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다.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국민들을 위해 일할 수 없다는 것은 정의로운 일이 아니며 그러한 덕성은 수호자 혹은 지배자에게는 치명적인 결함이다. 그것을 막기 위해서는 아내도 자식도 사유재산도 없어야 한다. 급진적인 혁명적인 플라톤의 생각은 현실로 드러난다.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의 아들들을 보라! 김지하가 ‘오적’이라 지칭한 사람들이 풍기는 악취와 썩은 하수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혁명보다 힘겨운 ‘개혁’을 하겠다는 사람들은 기득권의 목숨 건 집단 이기주의에 맥을 못추고 있다.
토마스 모어의 ‘utopia’는 ‘세상에 업는 곳’이라는 뜻이다. 플라톤이 주장했던 ‘이상 국가’는 어쩌면 인류가 도달할 수 없는 영원한 꿈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가장 유사한 형태로 접근할 수 있는 방법들은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러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고 양보하고 합의하는 나라들도 분명히 존재한다. 부정적 시각으로 현실을 바라보아서가 아니라 어떤 형태로든 ‘나’만을 위해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을 거울에 비춰보아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플라톤이 말한 이상국가는 꿈같은 곳이 아니다. 철인 즉 철학자가 나라를 다스려야 제대로 된 나라가 된다는 것을 비판하는 어리석음을 범할 필요도 없다. 항상 그러하듯이 공시적이고 통시적인 관점에서 플라톤이 살아가던 시대의 가장 이상적 형태의 국가가 시대가 변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현재적 유용성을 갖는 의미만을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철인이 통치해야 한다고? 김영삼은 우리에게 유일한 철학과 출신의 대통령이 아니었던가. 결과가 어떠했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이론과 실제는 다를 수 있다. 정치 체제와 제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가 어떻게 적용하는가에 달려있다는 사실은 초등학생들도 안다. 그것이 철인 정치이든 뭐든 간에 통치자의 역량과 진정성에 대해 검증할 수 있는 방법들이 필요한 것이다. 자신이 믿는 모든 가치가 선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얼마나 위험한 도박인가. 자기 나라의 작전통제권을 갖기 싫다고 다른 나라가 대신 우리를 위해 우리를 지켜야 한다는 사실을 국민들에게 묻겠다는 사람들도 그들의 입장에서는 최선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올바른 판단과 이성이 필요한 철인에 의해 국가가 통치되어야 한다는 플라톤의 생각이 어쩌면 이상적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국가’의 형태와 제도 자체가 국민 혹은 시민들에게 얼마나 불편하고 억압적인 구조로 작용하는 지에 대한 반성과 성찰도 이제는 간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주민 자치를 일컬어지는 지방자치제도가 실현된다고 해서 모든 이 해결되지는 苛쨈? 유급제로 바뀐 그들의 입장과 겸직이 가 ?상태에서 벌어지고 있는 각종 이권의 개입과 정책 결정 과정에서의 문제점들을 우리는 대부분 외면해 버린다. 플라토의 주장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들이 먼저 국가에 대해가져야 하는 생각과 그 생각들을 실천하기 위한 노력과 과정들이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형인 글라우콘의 대화 형식으로 되어있는 <국가>는 대화법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깨달음을 주겠다는 목적으로 쓰여졌을 것이다. 어쩌면 집필 목적보다 현대인들의 관점에서 토지의 공적 개념이나 철저한 남녀평등 같은 개념을 주장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할 수도 있겠다. 선각자나 철학자들의 몫은 전체를 통찰하는 눈과 그것을 읽어내는 힘에 있다. 쉽지 않은 일이고 공감을 얻을 수 없어도 우리가 나갈 미래의 방향을 제시하는 일이 그들의 역할이 아닐까 싶다. 그런 의미에서 플라톤은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인류의 영원한 사유의 출발점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가 서양인이든 동양인이든 상관없이 말이다.
주제 사라마구의 <동굴>에서 인용한 ‘동굴의 비유’가 가장 극적이고 중요한 플라톤의 사상을 드러낸다. 참된 선의 실체인 ‘이데아’를 설명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신과 연관지어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해석하든 그 논의 자체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다만 이데아와 현실 그리고 그것을 모방한 예술 사이에 벌어지는 겹침과 펼침들이 중요하다. 그 사이를 뛰어넘는 사유의 틀을 마련하는 것은 플라톤 이후의 세대들이 짊져야 할 몫이 아닐까 싶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서 ‘이데아’를 찾기보다 세 번째 모방인 ‘예술’을 통한 간접적이고 모호한 방식의 접근이 더 행복한 이유는 실체를 알기 위한 호기심도 없고 노력도 하고 싶지 않은 개인적 성향 탓일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행복하다면 할 수 없는 노릇이다. 철학은 일단 자신만의 방식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는다. 이론과 실제의 적용 문제, 즉 앞서 말했던 삶의 태도와 방식에의 적용 문제는 통합이 필요하다. 아직 갈 길은 멀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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