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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라니, 선영아 ㅣ 작가정신 소설향 18
김연수 지음 / 작가정신 / 2003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람이 산다는 것은 그립다는 말 한마디 때문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사춘기 시절이 떠오른다. 축제기간 시화전에 다녀갔던 여학생이 톱으로 두 동강을 내서 개칠을 해 놓은 시화 판넬 위에 노란 국화 한 다발을 걸어 놓고 돌아갔다. 열일곱의 가을이었고 세상은 온통 초록빛이었다. 남녀간의 사랑은 지금까지 태어났던 사람의 수만큼 다양한 종류와 방법이 있을 것이다.
소설 속에서 마주치는 사랑은 그래서 진부하다. 아직까지 남녀간의 사랑을 읽기 위해 소설책을 뒤지는 부류는 두 종류다. 이제 막 사춘기에 접어든 여중생이거나 지난 시간을 곱씹어 추억의 빈 자리를 메우고 싶어하는 중년. 더 있을까? 그러나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사랑에 관한한 전문가인척 하면서도 연애 이야기에 관심을 갖는다. 본능적으로. 대부분의 경우 가장 흔하면서도 그 많은 경우의 수에 호기심을 가지게 되는 이상 심리를 발견하게 된다. 아니 어쩌면 그것은 내 사랑의 부피와 크기에 대한 비교 심리 때문인지도 모른다. 남들의 사랑도 크게 다르지 않지만 쉽게 안심이 되지 않는 나만의 그것을 위해.
오래전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던 광고가 있었다. ‘선영아, 사랑해’라는 티저 광고는 이목을 집중시켰다. 골목길 여기 저기 나붙은 ‘선영아, 사랑해’는 이 땅의 모든 선영이들과 선영이 아닌 여성들까지도 흥분시켰다. 호기심을 자극하는 감성적 광고 기법의 하나였지만 가장 단순하면서도 선명한 ‘사랑해’라는 말은 ‘선영이’라는 지극히 평범하고 일상적인 이름과 결합되어 커다란 시너지 효과를 거두었다. 김연수의 소설 <사랑이라니 선영아>는 제목을 보는 순간 그 광고가 떠올랐다.
90년대 초 사회적 이념 공방이 가라앉고 방황하던 무렵 유하가 들고 나온 <바람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한다>라는 시집이 주목받았다. 물론 내용 자체가 가볍고 덜떨어진 신인류의 삶을 표방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압구정동’이라고 하는 코드 자체가 이슈가 되었다. 동명의 영화로 감독 데뷔를 한 유하의 영화를 보러 간 기억이 새롭다. 엄정화와 홍학표 주연의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향후 10년간 한국영화를 다시는 보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기억이 난다. 유하는 실제로 10년만에 <결혼은 미친짓이다>로 재기에 성공한다. 아무튼 ‘키취세대’로 불리웠던 세대들의 사랑 이야기를 감각적으로 그리고 있는 김연수의 연애소설은 흥미롭다.
89학번과 86번 사이의 갭을 설명하는 책 뒤의 해설은 쓰레기다. 사회적 공방과 이념 대결의 골을 넘어 단순한 시간 개념으로서 3년의 차이가 아니라 사회를 보는 관점이나 운동권을 바라보는 등장인물들의 발언 등을 앞세운 해설은 한 작가의 연애소설에 대한 지나친 오역이다. 운동에 대한 개념과 시선을 작가의 그것이라고 판단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전형적 개인들의 발언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싶다.
잡다한 컴퓨터 오락과 상업 광고, 만화와 싸구려 읽을거리를 제공하는 잡지들을 접하며 성장했던 70년대 신인류의 연애와 사랑 그리고 결혼 이야기를 김연수는 감각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레비스트로스와 울리히 벡을 인용하는 분석적 태도가 현학적이기 보다는 빠른 호흡을 조절하고 개별적 사건을 일반화시키는 사고 과정을 이끌어 낸다.
드물게 주목할 만한 작가 김연수의 힘은 끝임없는 새로움에 대한 도전이다. 새로운 어휘에 대한 적절한 배치와 차용, 즉 ‘쫀쫀함’과 ‘얼멍함’의 대척점에 서 있는 두 남자 광수와 진우는 선영이를 사이에 두고 벌이는 삼각관계가 아니다. 사랑싸움이나 삼각관계가 이 소설의 중심 축에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서술자의 창조적 상징에 의한 비유들, 인간과 인간의 관계들 사이에 놓여 있는 외로움을 포착하는 데에 나는 개인적인 관심을 두었다. 깔끔하고 담백한 말맛을 통한 유쾌함과 사려깊고 예리한 감정에 대한 분석적, 선언적 태도가 오히려 몰입에 대한 즐거움을 반감시킬 수 있지만 이 소설의 재미를 덜어 낼 수는 없다.
사랑과 결혼 그리고 추억이 뒤얽힌, 누구나 유사 체험이 있을 듯한 평범한 이야기지만 같은 이야기를 다른 방식으로 풀어내는 작가의 능력은 탁월하다. 결국 동일한 이야기의 끊임없는 변종들을 우리는 새로움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라면 이 소설은 김연수의 다른 작품에 관심을 가지게 하는 충분한 매력이 있다. 영원한 사랑은 없지만 영원은 기억은 가능하다. “기억이, 아름다울까, 사랑이 아름다울까? 물론 기억이다. 기억이 더 오래가기 때문에 더 아름답다. 사랑은 두 사람이 필요하지만, 기억은 혼자라도 상관없다.”라고 말하는 작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다가 사랑보다 기억이 소중한 나를 발견하는 일은 서글픈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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