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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제국 ㅣ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르네 마그리트의 ‘빛의 제국’을 보면 어둠 속에 빛이 아름답다. 저물어가는 하늘을 배경으로 숲속의 외등에서 퍼져나가는 부드러운 빛은 손에 만져질 듯 따뜻한 온기를 전해준다. 그림은 이미지다. 하나의 이미지가 우리의 감각을 자극하고 이성적 판단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르네 마그리트의 다른 그림들처럼 비현실적이지도 충격적이지도 않지만 ‘빛의 제국’은 우리들 인식의 틀을 또 한번 두들기게 한다.
푸르고 맑은 하늘과 평화롭게 떠 있는 하얀 구름은 가장 일반적인 하늘에 대한 이미지이다. 그에 비해 어둠속에 웅크리고 있는 검은 그림자들의 배후에는 무엇이 숨어있는지 알 수 없다. 외롭게 서 있는 외등은 겨우 어둠을 몰아내고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 보는 것같다. 어둠과 희미한 빛의 조화로움 때문에 눈이 부시지도 않고 특별히 주목을 받지도 못한 외등의 불빛은 푸른 하늘과 묘한 대조를 이룬다. 과연 빛은 주변의 조건과 긴밀하게 관련된 개념일 뿐이다. 상대적이고 가변적인 의미의 빛은 우리에게 많은 질문을 던지는 것 같다. 네가 서 있는 그 곳이 어디냐고. 어떤 모습으로, 어떤 형태로, 왜 서 있는지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는 보호색에 불과한 빛의 이미지는 부드럽고 편안하지만 본질을 알 수 없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은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에 등장하는 이데아의 빛과는 다르다. 맹목적인 삶의 형태와 집단적 무의식 속에 자리잡고 있는 빛은 어떤 강렬함을 우리에게 전해줄 수 있을까? 김영하의 장편소설 <빛의 제국>은 다른 소설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기준을 어디로 잡아야 하는가에 따라 다르겠지만 현실에 대한 반성과 성찰로 읽힌다. 그것을 어떤 방식으로 보여주느냐가 작가의 능력이라고 믿는다. 그런 면에서 <빛의 제국>은 절반의 성공을 거두고 있다.
<빛의 제국>은 이인화의 <영원한 제국>에서 사용했던 시간을 사용한다. 표절했다는 말은 아니다. 하루동안 벌어지는 사건을 통해 장편의 긴 호흡에 긴장을 불어넣지만 독자들을 긴장감있게 밀어붙이거나 다른 생각을 할 틈과 여유를 주지 않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주인공 김기영을 따라 다니며 그의 생각과 사고한 행동들을 통해 우리의 80년대를 반추하게 한다. 후일담 문학과는 거리가 멀지만 21세기 초반의 한국 사회를 분명하게 보여주려는 작가의 의도는 80년대와의 비교를 통해 이루어진다. 남과 북의 분단상황에 대한 비극과 민족과 통일이라는 거대 담론에 대한 고찰은 이 소설과 무관해 보인다. 이 소설에 대한 오독일 수 있으나 남파 고정간첩인 김기영의 신분은 중요한 소재와 흥미로운 요소일 수 있으나 소설 전체를 장악하지는 못한다. 그의 아내와 중학생 딸을 중심으로 파편화된 가족과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통찰이 엿보인다. 논의의 중심은 언제나 인간의 삶에 대한 통찰이다. 폴 발레리의 시구를 인용한 부분을 보자.
생각한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될 것이라는 폴 발레리의 시구처럼, 그는 운명을 잊고 있었지만 운명은 그를 잊지 않고 있었다. - P. 200
아주 오래 전부터 기억하고 좌우명처럼 가끔씩 되내이는 말이다. 하지만 이 소설속에서 이 말은 역설적으로 읽힌다. 자신의 인생과 운명에 대한 오만을 지적하고 있다고 극단적으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자신의 운명과 생에 대한 선택권은 개인에게 주어진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통찰은 신선하고 놀랍다. ‘생각한 대로’ 산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 것인가? 더구나 ‘사는 대로’ 생각하는 것이 자신의 삶에 끌려가는 수동적인 자세로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아니다. 그렇지 않다. 생각한 대로 사는 것만큼 사는 대로 생각하는 것도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어쩌면 많은 사람들의 생활 속에는 알면서 지키지 못하는 ‘운명’이나 ‘숙명’같은 것이 존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사회의 시스템 속에서 벌어지는 현상이나 개인의 선택은 우습게 보이기도 한다.
알 수 없는 괴물같은 대상이 우리를 감시하고 통제하는 악몽을 꾸는 것은 푸코가 말한 ‘판옵티콘’을 떠올리지 않아도 누구나 한 번쯤 경험하게 된다. 심지어 내 집으로 들어가는 아파트 엘리베이트에서 내리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지켜보는 그들의(?) 눈을 우리는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한 편의 소설을 통해 무엇을 느끼고 배우고 확인하는 것은 모두 개인 독자들의 몫이지만 이 소설은 단편이나 중편으로도 충분할 수 있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김영하의 다른 소설과는 다른 종류의 다른 맥락의 시도는 신선하지만 개성을 벗어난 새로움이 늘 성공적일 수는 없지만, 현재 보다는 앞으로의 소설을 기대해 본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작가의 이런 말들이 오히려 소설 전체를 압도하는 생활의 재발견이 된다.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과 헤沮?돌아오는 길은 슬픈데, 그것은 그들이 자신의 어린 모습을 간직한 채로 늙어가기 때문이었다. 소년이 늙어 노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소년은 늙어 늙은 소년이 되고 소녀도 늙어 늙은 소녀가 된다. - P. 285
060918-1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