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팬지 폴리틱스 - 권력 투쟁의 동물적 기원
프란스 드 발 지음, 장대익.황상익 옮김 / 바다출판사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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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자亡者에 대한 슬픔은 나이에 반비례한다. 어디 눈물 없는 장례식이 있을까마는 숱한 죽음들, 무덤과 화장터 사이를 떠도는 회한悔恨은 인간의 숙명이니 극복이 아니라 수용과 성찰이 필요하다. 한 시대가, 아니 한 계절은 잠시 머물다 떠난다. 하지만 우리 삶은 매 순간 어느 시대 혹은 어느 계절의 복판에 서 있다. 지금이 절정이다. 지나간 모든 것이 아름답지 않듯, 남은 시간이 두렵지만은 않기를.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정치’라는 관점으로 바라보면 인류 문명은 정치 발달의 문화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군주정에서 민주정으로 ‘발전’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각자의 욕망과 기대를 실현하기 위한 정치 행위의 반복이야말로 인간의 본질이 아니겠냐는 말이다. 우주에 발자국을 남기고, 인공지능 시대를 산다고 해도 인간은 어쩌면 ‘털없는 원숭이’에서 한발도 더 나아가지 못한 건 아닐까. 진화를 거듭한 현생 인류의 모습이 침팬지의 군집생활과 큰 차이가 없다는 점은 놀랍지 않다. 충분히 예상하고도 남을 만큼, 사회뉴스 정치인들의 정치 행태, 끔찍한 사회뉴스가 매일매일 이를 증명하지 않는가.

햄릿은 ‘to be or not to be’를 고민했으나 오늘의 한국인들은 이쪽이냐 저쪽이냐로 정의와 공정과 상식과 현재와 미래까지 판단하며 선택한다. 망국적 극단적 전체주의의 망령이 되살아나는 것은 아닌지 우려될 만큼 필터 버블이 작동하는 알고리즘에 반성은 없는 듯하다. 혹시 프란스 드 발의 『침팬지 폴리틱스』조차 이쪽과 저쪽을 구분하는 기준으로 삼으려는 사람이 있을 거라는 사실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으나 저자의 의도, 책 내용과 무관하지 부디 댓글만 남기지 않기를.

물론, 그 정치 행위의 근간에는 ‘욕망’이 자리잡고 있다. 성욕과 식욕, 즉 생존과 관련된 침팬지의 모든 정치 행위는 선악의 저편에 놓여 있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진화의 결과일 뿐이다. 그것을 인간의 관점으로 ‘해석’하려는 관찰자들은 다양하다. 제인 구달로 상징되는 1세대 동물사회학자들의 연구 결과가 없었다면 출발이 조금 어려웠을지 모르지만 수많은 영장류를 통해 인간의 본능과 욕망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멈추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우리를 모르고 내 안엔 내가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40여 년 전에 출간된 이 책의 핵심 내용은 단순하다. 침팬지의 사회구조가 인간과 다를 바 없이 인간사회와 매우 흡사하다는 결론을 향한 거대한 관찰의 기록물이다. 그것이 놀라운가, 아니면 반가운가. 그래서 어쩌자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 어떻다는 것도 아니다. 그저 “우리 인간의 정체는 무엇인가”라는 질문만 또다시 남는다. 인간과 동물의 차이, 침팬지와 인간의 유사성과 차별성에 논문은 과학자들의 몫이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이에룬의 보안관 행동이나 마마가 가진 모성의 힘에 대해 다시 한번 고민해야 한다. 100층이 넘는 빌딩 꼭대기에 앉아 있어도 한 인간의 개인적, 사회적 욕망은 라윗과 니키 혹은 마마, 이미, 테펄의 그것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뭐가 다르겠는가. 누구든 식욕과 성욕이 전부일 수 있으며, 누구든 더 큰 야망과 욕심의 허망함에 무너지지 않겠는가.

네덜란드 아른험에 위치한 뷔르허스 동물원Burgers Zoo(1971년 8월 개관)의 야외 사육장이 있다. 여기 사는 침팬지들의 이야기다. 집필시기는 1979~1980년(1982년 출간), 주요 침팬지는 수컷 에룬, 라윗, 니키, 단디, 암컷 마마, 호릴라, 프란예, 이미, 테펄, 파위스트 정도다. 이름으로 호명되는 각각의 침팬지의 행동은 인간과 다를 바 없다. 앞서 말했듯 이 책은 인간과의 유사성에 대한 호기심으로 읽을 필요가 없다. 98%의 유전자가 인간과 동일한 침팬지의 행동이 인간과 비슷하리라는 건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다만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인간의 정치적 행위란 무엇인가, 그 기저에 깔린 본능과 욕망은 사회적으로 용인될 수 있는가 등의 문제다.

권력투쟁과 기회주의, 호혜성, 전략적 삼각관계, 화해, 연합, 평화 협정, 중재, 분할 지배 등 인간사회에서도 매일 벌어지는 일들이 침팬지와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이 오히려 놀랍다. 크든 작든 모든 관계와 조직과 공동체와 국가에서 벌어지는 일들도 마찬가지다. 침팬지 폴리틱스는 호모 사피엔스폴리틱스의 축소판이 아니라 오히려 현대사회의 원형prototype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는 게 쉽지 않다는 건 생존 혹은 정치(관계)를 일컫는다. 쉽고 재밌는 일이 더 많은 인생을 꿈꾸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오늘도 안녕하지 않은 일들로 가득 채운 하루를 보내며 사람들은 또 어떤 내일을 꿈꿀까. 부디 시간으로 해결될 수 있는 일들에 매달리지 않기를. 자기 위로와 합리화를 위해 너무 애쓰지 않기를. 침팬지 폴리틱스도 협력, 호혜, 연합, 중재, 의존이 강력한 힘을 발휘할 때가 더 많다. 이해관계에 매몰된 걸 모두 아는데, 정의와 공정, 상식과 합리, 자유와 평화로 포장한들 사람들이 더 이상 속지 않는다는 걸 정치인들만 모르는 걸까. 아니면 우리는 알면서도 매번 속는 걸까. 이도저도 아니면 대안이 없거나 상상력이 부족한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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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우스트 1,2 세트 - 전2권 괴테 전집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전영애 옮김 / 길(도서출판)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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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고전으로 돌아가는 이유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마지막 절규에 가깝다. 책 숲에서 방황하고 지식과 정보를 넣어 자기만의 ‘지혜’를 얻으려는 욕망이거나 인간과 세계에 대한 통찰에 실패한 자들의 안식처가 고전이 아닐지 싶다.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으나 허명을 쫓아 『파우스트』를 뒤적이던 때가 있었다. 또 그렇게 껍데기만 핥던 시절의 고전은 얼마나 많았을까. 전영애의 번역본을 읽으면서 기억 속에 흔적조차 남지 않은 파우스트와 메피스토펠레스를 다시 만났다. 아니, 괴테가 만난 모든 지식과 세상을 인식하려 애쓴 흔적들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20대에 시작된 책을 80대가 되어 생을 마감하기 직전에 마무리했다는 사실이 감동적이지는 않다. 오래 살지 못했다면 그 깊이와 넓이에 한계를 드러냈을 테다. 그렇다고 해서 찬란하게 눈부시게 빛나는 몇 작품을 남고 요절한 작가들이 작품이 가볍다는 뜻은 아니다. 오랜 세월을 견뎌 여전히 당대성을 살피고 현재적 의미를 획득한 고전들은 공통적으로 근본적인 질문에 충실하다.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우리가 인식한 세계는 과연 그러한가, 시간 속에 명멸했던 존재들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여기에 더해 유럽 사회를 지배한 ‘신’의 존재와 의미 혹은 그리스 고전에 대한 동경과 문화적 영향을 고루 살필 수 있는 괴테 필생의 역작 『파우스트』는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이 통합된 유럽 문화의 정수에 관한 기나긴 고민이다. 물론 그 중심에 놓인 “인간은 지향志向이 있는 한 방황한다.”(Es irrt der Mensch, solang’er strebt.)라는 주제의 보편성이 시공을 뛰어넘어 우리에게도 읽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흔히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라고 번역되어 널리 기억되고 있으나 전영애는 다른 문장으로 재해석했다. 지향 없이 사는 현대인에게, 아니 오로지 물질만능주의에 매몰된 우리에게 ‘지향志向’ 그 자체를 고민하는 일이 우선이겠으나 그곳이 어디든, 그것이 무엇이든 ‘방황’과 고민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삶의 과정이자 방법이라는 사실부터 인정하면 파우스트가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서라도 궁구하고 싶었던 그 무엇을 찬찬히 다시 살필 수 있다. 아니, 각자 자기 삶의 지향점을 점검할 수도 있다.

이 책을 읽기 전에 여러 출판사의 판본을 비교했다. 이미 전자책으로 가지고 있는 김인순 번역본(열린책들)은 물론 세계문학 시리즈를 출간하는 대표적인 출판사의 정서웅(민음사), 이인웅(문학동네) 그리고 가장 최근에 번역한 안인희(현대지성)까지 고루 살폈으나 전영애 대역본(도서출판 길)을 다시 구입했다. 전영애는 독일어 판본에 관한 이야기와 운문 형식을 살려 새롭게 번역한 이유는 ‘옮긴이 해제’에 상세히 밝히고 있다. 일반 독자에게 대역본은 큰 의미가 없어보이지만 형식은 내용을 지배한다는 점에서 독일어 단어의 형태와 리듬만 확인하는 정도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다. 독일어는 성, 수, 격에 따라 정관사가 16개, 부정관사가 12개나 된다. 독일어 선택으로 학력고사를 치렀던 일이 전생의 기억처럼 흐릿하지만 여전히 정관사, 부정관사를 주문처럼 남아 있기는 하다. 그렇다고 해서 원문과 번역문을 비교하거나 그 차이를 감상할 수는 없다. 정성스레 실로 엮은 양장본을 넘기는 호사를 누리며 가독성보다 원전에 조금 충실한 번역을 원하는 독자들에게 좋은 선택지가 생겼다. 정경석의 작품해설에 파우스트 전설이 소개되어 있다. 듀얼모니터 한쪽 창에 띄워 놓고 각 장의 흐름과 내용을 미리 살피며 읽으면 어렵거나 이해되지 않는 부분은 거의 없다. 천병희가 아니었다면 그리스 고전을 다시 손대지 않았을 지도 모르고 김희영이 아니었다면 프루스트를 만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번역 때문이든 독자의 나이와 상황 때문이든 전영애는 파우스트를 새로운 관점으로 다시 바라보게 한다. 누군가의 수고로움과 노력들이 다음 세대의 출발선이 된다는 점에서 인간의 문명이 이어진다.

<여러 번역본들>

* 정서웅(민음사, 1999)

* 김수용(책세상, 2006)

* 이인웅(문학동네, 2009)

* 김인순(열린책들, 2009)

* 정경석(문예출판사, 2010)

* 정광섭(홍신문화사, 2011)

* 김재혁(펭귄클래식코리아, 2012)

* 장희창(을유문화사, 2015)

* 전영애(길, 2019)

* 안인희(현대지성, 2024)

비극 제2부 시작 부분 비교

- 정서웅(민음사, 1999)

쾌적한 장소

파우스트, 꽃이 만발한 풀밭에 누워 지치고

불안한 모습으로 잠을 청한다.

해질 무렵.

요정의 무리, 귀엽고 작은 모습으로 공중에서 떠돈다.

- 이인웅(문학동네, 2009)

우아한 고장

파우스트, 꽃이 만발한 풀밭에 누워 피로하고 불안한 듯 잠을 청하고 있다.

황혼이 깃들 무렵.

정령들의 무리, 우아하고 작은 모습으로 공중에 떠다닌다.

- 김인순(열린책들, 2009)

경관이 수려한 곳

파우스트, 꽃들이 만발한 풀밭에 누워서 지친 몸으로 불안하게 잠을 청한다.

땅거미가 내려앉는다.

우아하고 작은 요정의 무리, 대기를 떠돈다.

- 전영애(길, 2019)

우아한 지대

파우스트, 꽃이 만발한 풀밭에 누워 있다.

지쳐 불안하게, 참을 청하며,

어스름.

정령들의 무리가 둥둥 떠돌고 있는데, 우아하고 작은 자태들이다.

비극 제1부에서는 괴테의 경험에서 차용된 그레트헨(마가레테)가, 제2부에서는 그리스 고전에 등장하는 헬레나가 주요한 등장인물 중 하나다. 고대 그리스부터 근대에 이르는 시대적 배경, 신과 인간 그리고 사랑과 운명, 욕망과 죽음 등 삶의 총체적 문제를 고민하는 파우스트의 갈등과 번민을 관찰하는 동안 독자들은 각자의 답을 얻어야 한다. 위대한 고전으로 일컫는 파우스트에도 정답은 없고 질문만 남는다. 이 책을 번역한 전영애의 말대로 “문학작품은, 어떤 법칙을 찾아내어 정리로 귀납하는 논리적 사유나 과학적 논리와는 다르다. 후자를 복숭아의 씨에 비유한다면, 문학이 문장이란, 달고 신 온갖 맛이 배어 있는 과육 같은 것”이다. 온갖 감각이 깨어나게 하는 달콤 쌉싸름하고 시고 떫지만 그윽한 향으로 가득한 과육의 맛을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없고, 먹는 사람마다 그 맛도 다를 것이다.

죽음에 가까운 늙은 학자 파우스트가 평생 배우고 익히며 얻은 것은 무엇일까. 지식과 정보의 습득과 축적이 아니라 ‘지혜’로운 인간으로 살아가는 건 가능할까. 사랑과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죽음으로 귀결되는 생의 허무를 극복할 수 있을까. 장마라기보다 우기에 가까운 날씨 탓이 아니다. 이해할 수 없는 사람으로 가득한 세상, 놀라운 거짓과 탐욕으로 가득한 뉴스, 읽지 못한 책과 어차피 도달할 수 없는 경지에 다가가려는 욕망이 충돌하는 것은.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영혼을 팔아 얻고 싶은 게 과연 남아 있긴 한 걸까.

나는 놀기만 하기에는 너무 늙었고

소망 없이 지내기에는 너무 젊단 말이야.

- 비극 제1부 서재 Ⅱ, 파우스트, 1546행 1권 223쪽


* 그리스 고전 『일리아드』, 『오디세이아』를 읽지 않고 『파우스트』나 『율리시스』를 읽을 건 쫌 거시기합니다.

* 첨부한 PDF 파일은 인터넷 서점에 공개된 미리보기 부분으로 상업적 목적으로 사용하지 않았음을 밝혀둡니다.

첨부파일
파우스트 해설_정경석, 문예출판사, 2010.pdf
파일 다운로드

* 비극 제1부 ‘그레트헨의 방’을 읽을 때는 슈베르트의 「실 잣는 그레트헨」을, ‘감옥’을 읽을 때는 「죽음과 소녀」를 찾아 들어도 좋다. 베토벤의 레퀴엠, 파가니니 바이올린 협주곡 등 클래식과 함께 읽으면 무대와 배우들을 상상하며 읽는데 도움이 된다.

비극 제1부 그레트헨의 방

Wallis Giunta - Gretchen am Spinnrade (Schubert)【HD】

비극 제1부 감옥

슈베르트 - 현악4중주 제14번 죽음과 소녀. Schubert - String Quartet No.14 Death and the Maiden [Alban Berg Quartet]

you're a hopeless romantic in the dating app era - classical music

<몇 개의 문장들>

문학작품은, 어떤 법칙을 찾아내어 정리로 귀납하는 논리적 사유나 과학적 논리와는 다르다. 후자를 복숭아의 씨에 비유한다면, 문학이 문장이란, 달고 신 온갖 맛이 배어 있는 과육 같은 것일 게다. - 옮긴이 해제, 1권 14쪽

단테의 『신곡』이 유럽의 기독교적 중세의 세계관을 집약한 작품이라면, 『파우스트』는 고대의 그리스 로마 신화로부터 중세를 거쳐(성서가 배어들어 있다) 근대에 이르기까지 “3,000여 년”의 유럽 남북방을 다 아우르는 작품이다. - 옮긴이 해제, 1권 15쪽

인간은, 지향(志向)이 있는 한, 방황하느니라.Es irrt der Mensch, solang’er strebt. - 천상의 서곡, 주님, 317행 1권 90쪽

지옥도 악마도 날 겁나게 하지 않는다―

그 대신 내개선 모든 기쁨이 사라졌고

뭔가 바른 걸 안다고는 망상하지 못하겠고

뭔가 가르칠 수 있겠다고는 망상하지 못하겠다,

사람들을 보다 낫게 만들고 바꾸어놓겠다고는.

또 나는 재산도 돈도 없고

세상의 명예와 영화도 없고

개라도 이 꼴로 더 살고 싶지는 않으리!

- 비극 제1부 밤, 파우스트, 369행 1권 101쪽

오 맙소사! 예술은 길고!

우리의 인생은 짧습니다.

비판적인 추구 가운데서도 저는

자주 머리와 가슴이 두려움에 찹니다.

참으로 어렵지 않습니까,

근원까지 이르는 방도를 구하는 일은!

- 비극 제1부 밤, 바그너, 558행 1권 119쪽

근심은 항시 새로운 가면을 쓰고

집과 뜰로, 아내와 아이로 나타나고

불, 물, 단검과 독약으로 나타난다.

아직 닥치지도 않은 모든 게 두려워 너는 덜덜 떨고

결코 잃지도 않을 것, 그런 걸 두고도 노상 징징 운다.

- 비극 제1부 밤, 파우스트, 647행 1권 129쪽

나는 놀기만 하기에는 너무 늙었고

소망 없이 지내기에는 너무 젊단 말이야.

- 비극 제1부 서재 Ⅱ, 파우스트, 1546행 1권 223쪽

대지여, 너 지난밤에도 굳건했구나,

이제 새 힘 얻어 내 발치에서 숨 쉬며

벌써 나를 즐겁게 에워싸기 시작하는구나,

힘찬 결심을 네가 북돋우고 어루만져 주는구나.

가장 높은 현존을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게 하는구나.―

- 비극 제2부 제1막 우아한 지대, 파우스트, 4681행 2권 19쪽

이 무지개, 인간의 지향(志向)을 반영하는 구나.

이를 따라 생각하라, 하면 그대는 더 정확히 이해하리.

색색깔로 비친 모습에서 우리는 인생을 포착한다.

- 비극 제2부 제1막 우아한 지대, 파우스트, 4725행 2권 23쪽

공덕과 행복은 얽혀 있다는 것,

그 생각이 저 바보들에겐 절대로 안 떠올라.

그들에게 설령 현자의 돌이 있더라도

그 돌에는 현자가 없어.

- 비극 제2부 제1막 제국령 팔츠. 옥좌가 있는 홀, 메피스토펠레스, 5063행 2권 59쪽

하지만 경직됨 가운데서 나의 안녕을 찾진 않겠다,

전율은 인간의 최상의 부분,

세상이 제아무리 인간에게 그런 느낌을 쉽사리 안 줄지라도,

감동되었을 때, 엄청난 것을 가장 깊이 느끼지.

- 비극 제2부 제1막 어두운 회랑, 파우스트, 6272행 2권 195쪽

(*전율을 느낄 수 있는, 즉 놀라며 세상과 사물을 바라보고 받아들일 수 있는 열려 있음을 인간이 지닌 ‘최상의 부분’으로 보는 것은 괴테의 중요한 생각이며, 또한 파우스트의 추동력의 핵심이다.)

그 그 소리의 여운은 남았는데, 이렇게 들렸다―궁핍(Not)

그다음에 음산하고 운이 맞는 단어가 따랐다,―죽음(Tod).

- 비극 제2부 제5막 한밤중, 파우스트, 11400행 2권 809쪽

그가 인식하는 것, 붙잡힌다.

지상의 날을 따라 그렇게 거닐지라,

유령이 출몰하면, 걷던 걸음을 그냥 걷거라,

계속 걸어가는 가운데서 고통과 행복을 찾으리,

그, 그 어느 순간에도 만족하지 않는 자!

- 비극 제2부 제5막 한밤중, 파우스트, 11448행 2권 815쪽

그 힘을 겪어보세요, 제가 얼른

저주를 내리며 당신을 떠날 테니!

인간은 평생토록 맹목(盲目)이니,

이제, 파우스트! 당신도 종국에 눈머시오.

- 비극 제2부 제5막 한밤중, 근심, 11495행 2권 819쪽

모든 무상한 것은

다만 하나의 비유.

다다를 수 없는 것이

여기서 이루어지네.

형용할 수 없는 것이

여기서 행해졌네.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우리를 이끌어가네.

- 비극 제2부 제5막 심산육곡, 신비의 합창, 12104행 2권 889쪽

<차례>

헌사

무대 위에서의 서연(序演)

천상의 서곡(序曲) 연극

비극 제1부(현재)

성문 앞에서

서재 Ⅰ

서재 Ⅱ

라이프치히의 아우어바흐 술집

마녀의 주방

길거리 Ⅰ

저녁

산보

이웃 여자의 집

길거리 Ⅱ

정원

정자

숲과 동굴

그레트헨의 방

마르테의 정원

우물가에서

성벽 안 좁은 길

성당

발푸르기스의 밤

발푸르기스 밤의 꿈 혹은 오베론과 티타니아의 금혼식

흐린 날. 벌판

밤. 트인 들판

감옥

비극 제2부

제1막(중세 궁정)

우아한 지대

제국령 팔츠. 옥좌가 있는 홀

부속실이 딸린 드넓은 홀

궁전 정원

어두운 회랑

환하게 불 밝힌 홀들

기사의 홀

제2막(고대 그리스)

높고 둥근 천장의 좁은 고딕식 방

실험실

고전적 발푸르기스의 밤

[페네이오스 강 상류에서]

[페네이오스 강 하류에서]

[페네이오스 강 상류에서]

[에게 해의 바위 만(灣)]

제3막(고대 그리스)

스파르타의 메넬라오스 궁전 앞

[성 안뜰]

[그늘진 숲]

제4막(전장)

고산 지대

앞산 위에서

대립 황제의 막사

제5막(근대)

트인 지대

궁전

깊은 밤

한밤중

궁전의 큰 앞뜰

매장

심산유곡

<등장인물>

비극 제1부

단장 DIREKTOR

시인 DICHTER

광대 LUSTIGE PERSON

라파엘 RAPHAEL

가브리엘 GABRIEL

미카엘 MICHAEL

주님 DER HERR

메피스토펠레스 MEPHISTOPHELES

파우스트 FAUST

대지의 영 GEIST

바그너 WAGNER

브란더 BRANDER

프로쉬 FROSCH

알트마이어 ALTMAYER

지벨 SIEBEL

마녀 DIE HEXE

마가레테 MARGARETE

(그레트헨 GRETCHEN)

마르테 MARTHE

발렌틴 VALENTIN

악령 BÖSER GEIST

마법사 HEXENMEISTER

장군 GENERAL

장관 MINISTER

벼락부자 PARVENU

작가 AUTOR

제르비빌리스 SERVIBLIS

극단장 THEATERMEISTER

해설자 HEROLD

오베론 OBERON

퍽 PUCK

에이리얼 ARIEL

티타니아 TITANIA

비극 제2부

제1막

황제 KAISER

재상 KANZLER

국방대신 HEERMEISTER

재무대신 SCHATZMEISTER

내무대신 MARSCHLK

천문학자 ASTROLOG

의전관 HEROLD

푼치넬라 PULCINELLE

희망 HOFFNUNG

지혜 KLUGHEIT

소년, 마부 KNABE, LENKER

플루투스 PLUTUS

인색 GEIZ

건축가 ARCHITEKT

제2막

학사 BACCALAUREUS

바그너 WAGNER

호문쿨루스 HOMUNKULUS

에리히토 ERICHTHO

그라이프 GREIF

아리마스펜 ARIMASPEN

스핑크스 SPHINX

페네이오스 PENEIOS

케이론 CHIRON

만토 MANTO

세이렌들 SIRENEN

세이스모스 SEISMOS

피그미들 PYGMÄEN

다크틸로이들 DAKTYLE

라미에들 LAMIEN

엠푸사 EMPUSE

오레아스 OREAS

아낙사고라스 ANAXAGORAS

탈레스 THALES

드리아스 DRYAS

포르키아스 세 자매 PHORKYADEN

네레이스들과 트리톤들 NEREIDEN UND TRITONEN

네레우스 NEREUS

프로테우스 PROTEUS

텔키네스들 TELCHINEN

프실레와 마르시들 PSYLLEN UND MARSEN

도리데들 DORIDEN

제3막

헬레나 HELENA

합창대 CHOR

판탈리스 PANTHALIS

포르키아스 PHORKYAS

망루지기, 린케우스 TURMWÄCHER, LYNKEUS

에우포리온 EUPHORION

소녀 MÄDCHEN

제4막

총사령관 OBERGENERAL

황제 KAISER

막때려 RAUFEBOLD

바로뺏어 HABEBALD

얼른챙겨 EILEBEUTE

꽉쥐어 HALTEFEST

친위병들 TRABANTEN

대원수 ERZMARSCHALL

대시종 ERZKÄMMERER

대궁정집사 ERZTRUCHSESS

대헌작관 ERZSCHENK

대주교 ERZBISCHOF

대재상 ERZKANZLER

성직자 DER GEISTLICHE

제5막

나그네 WANDERER

바우키스 BAUCIS

필레몬 PHILEMON

망루지기 린케우스 LYNKEUS DER TÜRMER

세 용사 DIE DREI GEWALTIGEN GESELLEN

결핍 MANGEL

빚 SCHULD

궁핍 NOT

근심 SORGE

레무레스들 LEMUREN

천사의 무리 HIMMLISCHE HEERSCHAR

파터 엑스타티쿠스 PATER EXTATICUS

파터 프로푼디스 PATER PROFUNDUS

파터 세라피쿠스 PATER SERAPHICUS

천사들 ENGEL

마리아누스 박사 DOCTOR MARIANUS

마그나 페카트릭스 MAGNA PECCATRIX

사마리아의 여인 MULIER SAMARITANA

이집트의 마리아 MARIA EGYPTIACA

영광의 성모 MATER GLORIO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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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 질서 - 긴축이 만든 불평등의 역사
클라라 E. 마테이 지음, 임경은 옮김, 홍기훈 감수 / 21세기북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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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여우가 말했다.

“이리 와 나하고 놀자. 난 정말로 슬프단다.” 어린 왕자가 제안했다.

“난 너하고 놀 수가 없어. 난 길들여지지 않았거든.” 여우가 말했다.

“길들인다는 게 뭐지?”

“그건 ‘관계를 맺는다’는 뜻이야.” 여우가 말했다.

“넌 아직까지 세상에 다른 수많은 아이들과 다를 게 없는 한 아이에 지나지 않아. 그래서 난 네가 필요 없어. 너도 물론 내가 필요 없겠지. 나도 세상에 흔한 여러 여우들과 다를 게 없는 한 여우에 불과하니까. 그러나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우린 서로 필요하게 될 거야. 너는 나한테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것이 될 테니. 나도 너한테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것이 될 거구......”

너무 자주 보면 감동도 의미도 사라진다. 어린 왕자의 여우의 대화가 그렇다. 관계를 맺는다는 건 서로 길들이는 것일까. 누가 누구를 길들이고 길들여지는 걸까. 현실에는 소혹성 B612호에 살던 어린 왕자 같은 사람이 거의 없다. 반복해서 말해도 듣지 않는 귀 없는 사람이나 상대방의 기준과 무관하게 선을 넘는 사람들은 대개 부모, 형제, 연인, 친구처럼 사랑과 우정과 친밀감을 내세운다. 그건 길들이고 길들여지는 자발성이 아니라 강요와 순응이 아닐까.

비록 사람은 아니지만 어떤 제도와 규정도 다르지 않다. 시대와 상황과 선택의 결과일 뿐 언제든 고치고 바꿀 수 있다는 생각보다 적응과 생존에 초점이 맞춰진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그렇고 자유와 평등이 그러하며 공정과 정의가 그러하다. 질서를 잘 지키는 사람, 법 없이도 살 사람은 피해를 보는 세상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러나 그 질서와 법은 누가 왜 만들었을까. 변하지 않는 진리가 아니라 합의된 선택이라면 비판적 관점을 유지하며 개선의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자본의 질서에 순응하는 삶이 아니라 그 질서의 모순과 문제를 들여다보는 노력이 필요하다.

클라라 E. 마테이는 ‘긴축’이라는 프리즘으로 자본주의를 톺아본다. 자본주의 체제가 공고해진 20세기 이후 경제의 흐름을 연구한 결과물로 그 깊이와 넓이가 충분하며 관점과 기분이 명확하다. 지나간 경제 상황에 대한 평가와 해석은 지극히 주관적일 수 있으나 원인을 진단하고 결과를 살피는 일은 현재와 미래를 위한 필수 코스다. 주로 유럽, 특히 영국과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1차 세계대전 이후의 상황을 살피고 있으나 정부의 개입 여부, 재정 건전성, 경제 민주화 등 신자유주의 이후 세계 경제의 방향과 목표를 고민하는 데 매우 중요한 지식과 정보를 제공한다. 저자의 고민과 연구가 자본 질서를 개선하는 데 중요한 역할과 의미를 찾을 수 있으려면 각국의 경제 상황과 정책에 대한 방향을 먼저 점검해야 한다. 대한민국의 경제는 안녕하신지, 그 목표와 지향점은 합의할 수 있는지, 정부의 정책 방향에 동의할 수 있는지, 특히 ‘긴축 재정’에 대한 철학과 현실은 조화를 이루고 있는지 다 같이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은 충분히 의미 있는 논쟁을 촉발할 수 있다.

자본주의의 두 기둥은 ‘사유재산’과 ‘임금 관계’다. 생산 수단과 노동력이라는 거대한 축을 이해하지 못하면 일상에서 벌어지는 고민의 원인을 들여다보지 못한다. 이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설명한다. 1부 전쟁이 만든 불평등의 역사는 1차 세계대전 후 1918~1920년 영국과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대다수 노동자, 즉 국민들의 삶을 들여다본다. 불평등이 어떻게 공고해졌는지, 전쟁 이후 새로운 질서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살펴볼 수 있다. 2부에서는 긴축의 탄생과 배신을 설명한다. 경제 전문가들의 생각과 긴축 설계도가 어떻게 현실에 적용되었는지 설명한다. 긴축의 3가지 지표인 ‘노동 분배율, 착취율, 이윤율’을 통해 긴축의 작동 방식을 들여다본다.

언제나 중요한 건 우리의 삶이다. 자본 질서는 다수의 권리를 박탈하는 경제이론이다. 왜 사람들은 반민주적이고 독재적인 경제 질서와 제도에 순응하는가. 다수는 소수의 이익에 복무하는가. 낙수 효과? 전문가의 지식과 정보? 경제 성장에 대한 신화? 그 이유가 무엇이든 ‘긴축으로 이익을 보는 자가 누구인가?’라고 묻는 저자의 서문에 답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그 답은 개별 독자의 몫은 아니지만, 문제를 인식하고 해결하려는 의지가 없으면 ‘경제의 비정치화’라는 긴축의 슬로건을 내면화하게 된다. 인류는 아주 오랫동안 “자본의 노예로부터 노동의 해방으로” 나아가기 위해 지난한 투쟁을 반복했다. 정치적 이념과 무관하게 경제 논리 앞에선 모두가 냉정해지고 이해관계를 따지는 일은 본능에 가깝다. 그러나 목소리 높여 자기 이익에 반하는 이율배반적 생각과 태도를 주장하는 놀랍기만 하다. 인터넷 게시판에, 부동산 카페에, 다양한 경제학자들의 칼럼에 반영된 기준과 목표를 통합할 수는 없다. 그러나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한 선택과 결정인지에 대해서는 ‘쿠이보노’를 살펴야하지 않을까.

계급 갈등과 경제 지배는 최상위층의 개인이 이윤 추구라는 더 큰 경제적 미덕을 발휘해 모두를 이롭게 한다는, 이른바 조화를 탈바꿈한다. 이런 식으로 경제이론은 수직적 생산관계를 비판할 여지를 허용하지 않고, 자본주의를 정당화하며, 대중에게 순응하라고 설득한다. - 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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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집 소시오패스의 사정 앤드 앤솔러지
조예은 외 지음 / &(앤드)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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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가 촉발한 ‘무의식’에 대한 관심과 열정으로 현대인의 말과 행동은 ‘이해’와 ‘오해’를 넘어 ‘분석’과 ‘해석’의 대상으로 탈바꿈한 지 오래다. 타인은 지옥이라는 사르트르의 말이 속담처럼 인용되지만 근대가 탄생시킨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삶의 영역, 자유의 한계, 평등의 기준은 여전히 논쟁적이다. 대접받고 싶은 대로 타인을 대접하라는 금칙은 ‘타인’의 재산, 권력, 성별, 직업, 나이 등에 따라 달리 적용된다. 타인에 대한 이해는 불가능하며 타인은 오로지 오해의 대상이라는 사실에 동의하지 않아도 우리는 항상 진상, 빌런, 벤(도리스 레싱의 『다섯째 아이』)과 함께 산다. 주변에 그런 사람이 없다면 바로 당신이 ‘그’라는 경고는 모골이 송연하다. 흔히 그를 ‘사이코패스’ 혹은 ‘소시오패스’라 부른다.

둘의 차이는 정신분석학이나 의학적 관심의 대상이니 현실 혹은 소설의 캐릭터를 구별할 필요는 없다. 반사회적 인격장애 정도로 해석되는 소시오패스는 선천적이고 충동적이며 공격적인 사이코패스보다 덜 위험하지만 후천적 환경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25명 중 하나, 전체 인구의 4%가 가정과 사회적 환경에 따라 소시오패스가 될 수 있다는 건 흥미로운 진단이며 심각한 현대인의 질병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혹은 이웃과 동호인 중에 반드시 ‘그’가 있다. 우리는 소시오패스와 함께 산다.

앤솔로지 『이웃집 소시오패스의 사정』에는 다섯 명의 소시오패스가 등장한다. 인터넷 게시판을 만들어 익명의 소시오패스를 소개하는 코너를 만들면 소설보다 흥미로운 사례가 넘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직업별로 살펴보면 정치인이 소시오패스 비율이 가장 높지 않을까. 사회면 뉴스에 소개되는 사이코패스에 가까운 범죄자와 각종 인터넷 게시판에 화제가 되는 소시오패스는 일일이 떠올리기도 어렵다. 오로지 제목에 이끌려 선택한 책 한 권을 읽는 동안 현실에서 만난, 간접적으로 경험한 실존 인물들이 떠올랐고, 그들에 비하면 소설 속 소시오패스들의 말과 행동은 애교 수준으로 느껴질 만큼 오히려 현실이 더 참담하다.

소설같은 현실을 외면할 수 없고, 개연성 없는 픽션은 취향과 거리가 멀어 SF나 장르 소설에 몰입하기 어려운 개인적 취향이 문제일까. 아니, 다이내믹한 대한민국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다가올 미래가 소설보다 현기증을 유발하기 때문이라는 핑계를 대 본다. 요즘 유행하는 MBTI는 인간을 16가지 유형으로 분류한다. 4가지로 규정하는 혈액형보다 세분화한 듯 보이지만, 사실 E/I, S/N, T/F, J/P처럼 양자 택일에 가깝다. 문제 해결problem solving이 중요한 T 성향은 대개 남성, 정서적 지지emotional support가 우선인 F 성향은 여성들의 속성에 가깝다. 상황과 사람에 따라 다르게 반응하지만 일반적 성향은 비율이 큰 쪽을 선택하는 흑백 논리를 강요한다. 자연스럽게 사이코패스 혹은 소시오패스의 비율이 높은 MBTI가 궁금해서 검색했다. 확률과 통계 그리고 편견은 어떤 식으로 작동할까. 궁금하신 분들은 직접 확인하시길.

앤솔로지는 출판사와 작가에게 각각 장, 단점이 있다.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부분들이다. 독자 입장은 조금 다르다. 옴니버스 영화처럼 뷔페를 즐기는 독특한 매력이 있으나, 작품마다 차이가 심할 때는 불편함도 크다. 책임 분산 효과라고 하면 지나치겠으나 소설가의 역량이 확연히 구별된다. 영화나 드라마의 옥의 티처럼 세심하지 못한 실수가 아니라 상식에 벗어난 설명과 구성은 독자를 황당하게 한다. 특정 장면을 소개하고 싶지는 않다. 습작은 습작으로 끝내야 한다. 자꾸 고친다고 완성도가 높아지진 않는다.

반면 “설득보다 속이는 게 쉽고, 속이는 것보다 죽이는 게 더 편하다.”라는 클리셰 같은 문장을 훌륭하게 변주한 「없는 사람」처럼 구성과 내용이 모두 흥미로운 단편을 만난 즐거움을 놓칠 수는 없다. 다섯 편의 소설에는 소시오패스, 나르시시스트, 히키코모리, 경계선 인격장애, 리플리증후군, 사이코패스 등 다양한 주인공이 등장한다. 농도의 차이가 있을 뿐 그들은 우리 안에 있고, 우리는 또 그들의 부분을 이루고 있는 게 아닌지 싶은 생각이 들었다. 흥미로운 사건과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단편을 쓰는 건 어느 작가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장편보다 단편이 주는 재미를 찾는 독자도 많다. 앤솔로지 소설집이든 장편소설이든 유튜브와 짧은 영상이 범람하는 시대의 작가들에게는 만만치 않은 작업일 듯싶다.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들은 작가들에게 응원과 박수를 보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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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가 바꾼 역동의 세계사 - 강대국을 만드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폴 몰런드 지음, 서정아 옮김 / 미래의창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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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의 결과는 다양하고 지속적이며 심층적이지만 그 원인 역시 마찬가지다. - 19쪽

2023년 출생아 수는 23만 명으로 2022년에 비해 7.7% 감소했다. 인구 절벽이라는 표현에 걸맞은 현실이다. 1959년~1971년생은 동갑내기가 100만 명이 넘는다. 그들은 이제 은퇴 시기를 맞는다. 대한민국은 급격하게 늙는 중이다. 결혼, 육아, 주택, 사교육, 연금, 노후를 스스로 책임질 수 있는 개인은 아무도 없다. 각자도생을 위한 몸부림조차 무의미해지는 시대를 맞았다. 정부의 대책, 사회적 책무, 개인의 선택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이 흐르는 듯하다. 계층 이동의 사다리를 걷어차며 세습 자본주의를 공고히 하는 세상에서 결혼과 출생은 곧 특권이 될 수도 있다. 누가 감히 이 험한 세상에서 행복을 꿈꾸는가. 디스토피아를 예견했던 숱한 소설과 영화는 미래에 대한 경고로 그치지 않고 현실이 되고 있다.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나. 정말 이대로 괜찮을까.

폴 몰런드의 ‘The Human Tide’(『인구가 바꾼 역동의 세계사』)는 제목으로 인해 오해받기 쉬운 책이다. 이 책은 역사책이 아니라 심각한 사회과학의 한 분야로 정치, 경제, 문화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다뤄야 할 인류학의 보고서다. 지나간 역사로 한정하거나 치부될 수 있는 ‘세계사’라는 협소한 제목이 안타깝다. 오랜만에 누구에게나 권하고 싶은 좋은 책을 만났다. 새로운 관점, 알지 못했던 정보, 현실 적용 가능성, 실천과 변화를 위한 고민이 모두 담겨 있어 직업, 나이, 성별, 세대와 무관하게 진지하게 일독을 권하고 싶은 책이다.

인류의 역사에서 결정적 역할을 했던 ‘인구’는 역사적 사건과 문명사의 변화에 따른 결과가 아니라 변화를 이끌고 국가와 민족의 운명을 추동하는 힘으로 작용했다. 인과관계를 뒤바꿔 생각했던 편견을 버리자. 거대한 인구 물결의 변화를 이해하지 못하면 과거도 현재도 그리고 미래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책을 읽는 내내 출생과 사망, 결혼과 이주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남아 있는 한 인구는 역사의 경로를 결정할 것이라는 저자의 생각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인구는 밀물과 썰물처럼 시간과 공간에 따라 변해왔다. 인구 물결 혹은 인구 전환은 언제나 중요했고 앞으로도 중요할 예정이다. 물론 인구가 전부는 아니다. 하지만 인구의 변화와 흐름이 인류 문명사의 흐름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살펴보는 동안 특별한 영웅이 아니라 평범한 개인의 삶에 주목하게 된다. 그들은 바로 우리들이다.

폴 몰런드는 출산율 하락의 원인으로 ‘경제 발전, 여성 문해율 상승, 도시화’을 꼽는다. 아이를 낳지 않고 사는 사람도 많은 시대에 인구 문제는 못 배우고 가난했던 시절의 이야기로 치부될 수 있으나 자연스러운 인구 감소가 초래할 미래는 밝지 않다. 인위적으로 인구를 늘리자는 대안과 거리가 먼 이 책은 앵글로색슨인, 독일과 러시아, 1945년 이후 서구와 동구권, 일본, 중국, 동아시아, 중동, 북아프리카까지 지구 곳곳의 인구 변화와 그 영향을 톺아본다.

부록으로 수록된 기대수명, 합계출산율 산출 방법을 알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 의미를 간과할 수는 없다. 대한민국의 인구 소멸은 괜찮은지,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인지, 장기적인 대책은 무엇인지 묻는 듯하다. 인구 문제는 정부에만 맡겨놓기에는 너무 중요하지 않은가. 아이는 온 마을이 키워야한다는 오래된 금언을 되새기며 출생, 육아, 교육, 취업, 주택, 연금, 노후 문제까지 폭넓게 전 생애의 과정을 들여다보지 않으면 쉽게 답이 나오지 않는다. 이것은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행복한 삶이 가능한지에 대한 질문으로 읽힌다. 어쩌면 이 책은 미래의 꿈과 희망에 대해 묻고 있는건 아닐까.

인구 고령화와 인구 후퇴를 겪는 일본의 상황을 반면교사 삼지 않으면 우리 역시 같은 길을 걷게 된다. 아니 이미 그 길에 접어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역사는 오래된 미래다. 단순히 옛날엔 그랬었지 정도의 회고담이 아니라 여전히 우리 삶에 가장 중요하고 직접적인 문제를 일으킬 수 있는 ‘인구’의 안부를 물을 때다. 저자는 단순하고 일원론적이며 결정론적 역사관을 내세우지 않는다.

오지 않는 미래를 걱정하지 말고 현재를 즐기며 인생을 낭비하지 말라는 토닥임에 현혹될 때가 아니다. 장기적이고 거시적인 안목 없이 원빈처럼 오늘만 살 수는 없지 않은가. “니들은 내일만 보고 살지. 내일만 사는 놈은 오늘만 사는 놈한테 죽는다.”

미래에 어떤 일이 기다리든 한 가지 확실한 점이 있다. 과거에 그러했듯이 인구와 인류의 운명은 앞으로도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을 것이다. 출생과 사망, 결혼과 이주가 우리 삶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남아 있는 한 인구는 역사의 경로를 결정할 것이다. - 4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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