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루만지다 - 사랑의 말, 말들의 사랑
고종석 지음 / 마음산책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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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너를 어루만지고 싶다. 부드럽고 따스하게 온몸으로 전달되는 너를 느끼고 싶다. 손 뿐만 아니라 모든 감각 기관이 동원되어 오감으로 너를 만난다.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러하듯이.

  어루만진다는 말 속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상처를 위로한다는 뜻부터 성적인 의사를 전달하려는 의도까지. 우리말 특유의 어감과 뉘앙스를 알고 있는 모국어 사용자라면 어루만진다는 말이 편안한 안정감으로 전달될 것이다. 게다가 조용한 온기를 느끼게 하며 천천히 교감한다는 뜻이 자연스럽게 배어 나온다. 추상적인 감정이나 구체적인 행위를 한마디 말로 표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어의 한계를 절감하고 때로는 보이지 않는 감정을 기막힌 언어로 표현하기도 한다.

  일상에서 무심코 스치는 말들 속에서 사랑을 찾아낸 고종석의 <어루만지다>는 독자들의 영혼을 어루만진다. 저자의 말대로 사랑은 결국 위로이고, 배려이고, 무엇보다도 열정이니까 어루만짐은 곧 사랑을 의미한다. 1996년에 문학과지성사에서 나온 <사랑의 말, 말들의 사랑>은 이 책의 부제가 된 사연이다. 속편처럼 쓰였지만 체제와 내용이 전혀 다른 책에 어울리는 적절한 제목으로 보인다.

  이 책에는 마흔 개의 단어가 나온다. 입술로 시작해서 주름으로 끝나는 사랑의 변주곡들이다. 모국어에서 길어 올린 사랑의 말들은 우리에게 익숙하면서도 깊이 생각해 보지 않은 말들이 대부분이다. 어원을 밝혀 그 언어의 기원을 찾아보고 옛 문헌을 뒤적이며 현재의 말과 비교를 통해 역사적 변천 과정을 살핀다. 그 과정을 통해 우리말은 그 의미를 제 스스로 드러낸다. 사전적 의미를 곱씹고 관련 어휘들을 훑어보는 것도 적절해 보인다. 말 한마디로 시작해서 잘 차린 밥상처럼 우리말의 어휘들은 풍성하기만 하다.

  하나의 단어로 시작해서 펼쳐지는 자유 연상과 저자의 경험과 단상들을 따라가는 일은 즐거운 산책과 같다. 작은 잘 짜인 한 편의 글들이 모여 전체 책을 이루는 구성은 단순한 병렬적 나열에 불과해 보이지만 유기적인 관계가 단단해서 잘 지은 집을 연상 시키는 책이다. 무신경한 듯 싶지만 내용들이 엮어내는 통일성과 ‘사랑’과 ‘말’이라는 두 개의 핵심어에 접근하는 방식이 눈에 보이지 않으면서 두드러진다.

  각각의 글들은 주제어에 대한 단상에서 출발해서 앞서 말한대로 어원을 밝히고 역사적 과정을 통해 현재적 의미를 반추한다. 그러면서도 작가가 경험한 혹은 깊이 생각한 내용과 연결되어 구체적이고 일상적인 느낌을 준다. 편안하면서도 공감할 수 있는 말의 깊이와 색깔이 담백하다. 작가 특유의 문체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또 다시 고종석의 이야기에 흠뻑 빠질 만하다.

  ‘미끈하다’ 처럼 점액질의 어감을 드러내는 말 뿐만 아니라, ‘발가락’이라는 꼼지락거리는 관능, ‘밴대질’이라는 민망한 단어까지 속속들이 순우리말을 나열한다는 원칙을 지켜가며 재미있게 풀어내고 있다. 글들은 일단 킬킬거리며 어깨에 힘을 빼고 읽을 수 있는 내용이어서 읽는 내내 휴식을 취하는 느낌이었다. 때로는 ‘속삭임’으로 다가오고 때로는 ‘한숨’을 내쉬기도 하며, ‘거품’을 물기도 하고 ‘그대’를 그리워하기도 한다.

  순 우리말들이 이어지는 동안 우리말에 대한 지식과 관심에 대해 부끄러워졌다. 이렇게 아름답거나 혹은 생소한 말들이 펼쳐 보이는 풍성한 밥상은 먹기도 전에 배가 부르다. 한 단어, 한 단어 갈고 닦아 빛이 나도록 만들어 놓은 작가의 노고에 다시 한 번 감사드린다. 덕분에 우리는 어느 배우의 수상 소감처럼 밥숟가락만 들고 떠먹기만 하면 된다.

  세상에 누가 ‘사랑’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없겠는가. 아니, 누구나 책 한 권씩은 쓸 만한 이야기 거리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방식은 제각각이다. 과학적으로 풀어내기도 하고 소설이라는 형식을 통해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하고 <어루만지다>처럼 아주 특별한 방식으로 다양한 시선으로 ‘사랑’을 에둘러 표현하기도 한다. 독자들은 충분히 즐겁고 훈훈하다.

  조금은 특별한 방식으로 ‘사랑’에 대해, 그리고 그것을 표현하고 드러내는 ‘말’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는 책을 만났다. 고종석의 책을 사서 크게 후회하는 일은 없다. 눈길을 끌기 위한 표지와 제목이 조금 못마땅하기도 하지만 책을 읽다보면 그런대로 잘 어울린다는 느낌을 받는다.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사랑 이야기가 아니라 누구나 한번쯤 호기심을 가졌을 법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알지 못했던 말에 대한 이야기도, 희미했던 내 사랑에 대해서도 확인할 수 있는 이야기도 쓰여 있다.

  그래서 작가는 어루만진다는 말을 이렇게 한 마디로 정의한다.

어루만짐은 일종의 치유이고 보살핌이고 연대다. - P. 233


09021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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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스터디 - 미국대학 교양교육 핵심과정과 한국에서의 인문학 공부안내
마크 C. 헨리 지음, 강유원 외 편역 / 라티오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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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문예창작 고등학교, 인문학 특성화 고등학교를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요즘 특목고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지만 정말 특수한 목적을 가진 고등학교가 있나 싶다. 과학 영재를 위한 과학고를 시작으로 외국어고, 자립형 사립고 등이 수월성 교육이라는 명목으로 또 다시 그들만의 리그를 구성하고 있다.

  모 대학이 2009학년도 2학기 수시전형에서 보여준 무원칙, 무논리, 무소신은 대학의 자율성을 스스로 훼손했다. 궁색한 변명으로 일관하고 아무도 납득할 수 없는 말만 되풀이 하고 상식을 벗어난 결과들이 많은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하고 있다. 현 정부를 흉내 내고 있는 것 같아 입맛이 쓰다.

  대한민국의 교육 과정은 대학 입시를 정점으로 맞추어져 있다. 초, 중, 고등 학교에서 학생들과 학부모들이 원하는 교육은 명확하다. 내 자식만 원하는 대학에 보내 달라. 그러기 위해서 사교육이 필요하고 학교는 부화뇌동 그들의 눈치를 살핀다. 교사들도 소신 없이 복지부동하거나 승진을 위한 점수 따기에 혈안이 돼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왜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인지, 무엇을 공부할 것인지, 어떻게 공부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모든 것이 점수로 환산되어 수치로 나타난다. 결과가 모든 것을 말해준다. 그 경쟁은 온 국민에게 내면화되고 살아남기 위해 오늘도 치열한 전쟁이 계속된다.

  대학에 입학해서도 마찬가지다. 취업 기관으로 전락해 버린 대학의 기능을 논하는 것은 적어도 대한민국에서 우습게 여겨진다. 대기업의 이름을 따서, 재벌의 이름을 붙인 건물들이 들어서고 그들의 요구에 따라 맞춤형 인간이 배출된다. 단 한 순간도 냉혹한 자본주의 현실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러하다. 대략.

  이런 현실에서 인문학을 거론하는 것은 때로 철지난 유행가를 부른다고 생각하거나 현실 감각이 없는 사람으로 취급되기 쉽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마크 C. 헨리의 <인문학 스터디>는 강유원 외 편역자들의 노고가 고스란히 배어있다. 분야별 참고 도서 목록을 선정하고 한국에서의 인문학 공부에 대해 적절하게 안내하고 있는 이 책은 적어도 내게는 꼭 필요한 책이다.

  나는 어쩌면 매년 대학 신입생의 마음으로 새해를 시작한다. 도대체 세상은 어떤 곳이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무엇이 옳고 그른지. 그 판단 기준은 무엇이며 지금 여기에 서 있는 나는 누구인지. 타인과의 관계는 어떠해야 하며 내가 살고 있는 이곳의 상황은 어떠하며 미래는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한 노력은 올 해도 계속될 것이다. 가장 적절한 안내서 한 권을 만났으니 그 기쁨은 말할 수 없이 크다. 150페이지 분량의 작은 책이지만 그 내용은 결코 작지 않다. 어쩌면 보잘 것 없는 안내서로 보이지만 내게는 그렇게 읽히지 않았다. 미국대학 교양교육에 대해 통렬하게 비판하고 그 핵심과정을 정확하고 날카롭게 정리한 이 책을 강유원을 비롯한 편역자들은 한국적 상황에 맞게 적용시키고 있다. 특히 영역별로 수록되어 있는 도서 목록과 참고도서들은 앞으로 책을 선택하고 체계적으로 읽어나가는데 대단히 유용한 지침서가 될 것 같다.

  작년에 강유원의 <서구 정치사상 고전읽기>를 통해 한 수 배웠던 공부에 대해 다시 마음을 가다듬게 되었다. 그래서 강유원이나 남경태 등 몇몇 사람들의 책은 저자 혹은 번역자의 이름만 믿고 사도 후회하는 법이 없다. 개인적으로 매우 고마운 책을 오랜만에 만나 기쁘다.

  이 책은 문학 · 예술, 철학 · 정치, 역사학, 기독교 사상 등 크게 네 개 영역으로 구분되어 있다. 이 책의 원제는 ‘학생들을 위한 핵심 커리큘럼 안내’(A Student's Guide to the Curriculum)이다. 미국의 일반 대학에서도 고전과 서구문명을 공부하는데 어려움을 겪는 학생들을 위해 이 책을 썼을 것이다. 당연히 우리나라 실정이나 인문학을 공부하려는 사람들과 무관한 내용이 있었을 것이다. 편역자들을 이것들을 다시 정리하고 편집하여 이 책을 만들어냈다. 적절하고 고마운 부분이다. 책꽂이에 두고 책을 구입할 때마다 참고할 만하다.

  <아이네이스>가 가진 커다란 장점은, 고등학교 문학 시간에 가지게 되었을지도 모르는 잘못된 관념을 깨뜨릴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문학이란 근본적으로 개인과 사회의 투쟁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 P. 40

  이런 식으로 고전이 지닌 의미나 해석 방법에 대해 이야기 하고 충고하기도 하며,
 
  문학 공부에서 초심자가 접하는 가장 심각한 오류가 있다. 전문적인 강의에서 교수의 텍스트 해석이 학생들을 압도해버린 나머지, 학생들이 다르게 해석하고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을 닫아버리는 것이다. 각자 견해가 있으면서도 학생들은 교수의 해석을 앵무새처럼 따라하게 된다. 이러한 경향을 극복하는 좋은 방법은 텍스트의 여러 다른 번역판을 참조하면서 거기에 실린 해제들을 읽는 것이다. - P. 41

  철학적 탐구에서 아주 중요한 사실은 진리를 발견할 가능성이 늘 열려있다는 점이다.

  플라톤에 대한 가장 좋은 입문서는 바로 플라톤의 저작이다. 플라톤에 관해 쓴 다른 저자의 책, 즉 2차 문헌을 거치지 말고 먼저 원전을 읽는 것이 좋다. - P. 72

  동일성을 부여하려는 시도는 차이를 찾아내려는 노력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다.
  초인적 신의 지배에서 벗어난 근대의 인간은 다양한 시각과 통로로써 세계를 보려 하였으나 그러한 시도들은 대체로 ‘이성 중심주의’로 귀결된다. - P. 76


  이와 같이 책을 읽어나가면서 주의 사항을 지적하기도 하고 태도와 마음가짐에 대해 조언하기도 한다. 문학이나 철학 서적을 대할 때 우리의 자세는 달라져야 한다.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독자의 입장이 아니라 나를 중심으로 텍스트를 재해석하고 그 의미를 궁구하는 일이 중요하다. 이 책은 그 과정에서 벌어질 수 있는 문제점을 지적하고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기도 한다.

  인문학에 대한 체계적인 독서를 위한 안내서가 필요한 사람이나 고전이나 서양 문화의 기원에 대해 궁금한 사람이라면 이 책을 꼭 권하고 싶다. 두께와 표지, 디자인이 아니라 책은 여전히 꼼꼼하게 그 내용을 살피고 구입하고 아껴두고 읽고 싶어야 한다.

  이 책은 나에게 의미 있는 자극제가 되었다. 또 다시 힘내고, 가열차게 달아오를 준비를 해야겠다. 어쩌면 책을 읽는 이유에 대해 다시 한 번 고민해 볼 수 있는 기회도 마련해준 책이다. 대학 신입생 수준에서 교양 교육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으로 시작된 책이겠지만 제대로 된 교양 교육이 이루어지지 않는 대한민국의 대학 졸업자의 비애를 확인한 책이기도 하다. 대학원에서 조차 전공을 심화시키지 못하고 있다는 자괴감은 더 깊어만 간다. 얄팍한 이 한 권의 책에서 이 한마디가 오래 가슴에 남는다.

지적 균형감각은 교양교육을 받은 인간이 얻을 수 있는 위대한 열매다. - P. 123


090210-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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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하는 이들의 다섯 가지 즐거움 - 2009년 제33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김연수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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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李箱)에게 빚을 졌다면 갚아야 한다. 그는 우리 문학사의 화수분이다.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 된 그의 이미지들을 보라. 화려하고 다양하게 분석되고 해체되는 그의 작품들을 보면 알게 된다. 이상이 누구인가를. 아니 어쩌면 영원히 그를 몰라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을지도 모른다. 이상 김해경은 우리에게 불가해한 존재로 남았으면 좋겠다.

  그렇게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처럼 흐릿한 존재로 남아 있을 수는 없을까. 일관성 있는 목소리나 통일된 주제의식을 드러내는 모범적인 작가들과 달리 그는 럭비공처럼 튀어 오르는 방향을 알 수 없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시간이 지날수록 더 다양하고 입체적으로 살아 숨 쉬었으면 좋겠다. 그것이 당대 유행하던 혹은 유럽에서 흘러든 기법이든 유행이든 상관없이 아무도 걷지 않은 길을 홀로 걸었든 그 쓸쓸함과 외로움 곁에 서 있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면 한번쯤 작가의 길을 꿈꾸었음에 틀림없다.

  2009년 ‘이상문학상’은 김연수에게 돌아갔다. 2000년 이인화가 받았을 때처럼 당황스러웠던 적이 없다. 남의 문학상에 뭐라 끼어들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이상문학상’이 가진 위상과 의미를 생각할 때 오래전 황당한 기억이 떠오른다. 보는 각도와 방향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게 문학이지만 김연수는 최근의 작품들이나 활동으로 보아 충분히 예견된 수상이었다. 문학상은 김연수의 말대로 그저 칭찬이고 위안일 수 있다. 더 잘하고 잘해 보라고. 종착점에서 걸어주는 꽃다발이 아니라 마라톤 도중 마시는 탁자위에 생수 같은 게 아닐까 싶다. 힘들고 지친 발걸음을 내딛는 작가에게 격려와 칭찬이 필요하다. 누구에게나 그러하듯이. 김연수가 이제 조금 더 힘을 내고 행복한 작가가 되었으면 좋겠다.

  수상작 ‘산책하는 이들의 다섯 가지 즐거움’은 새로운 서사적 기법도 ‘메타적 글쓰기의 방법에 의해 상호 텍스트적 중층성을 확립’한 것으로도 보이지 않는다. 내가 읽은 수상작은 그저 문학에서 가장 일반적으로 활용되는 상징에 다름 아니다. ‘코끼로’로 상징되는 인간 내면의 고통은 현실과 무관하지 않으며 소설 안에서 단순하게 상징화 되었을 뿐이다. 누구에게나 고통은 있다. 그렇다면 소설에서 이야기하듯이 그것이 코끼리가 아니라도, 동물이 아니라도 좋다. 추상적 대상을 구체화 시킬 수 있는 상징적 메타포가 필요할 뿐이다.

  나는 이 단편을 통해 김연수 소설의 미래를 가늠해 보았다.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겠지만 그것은 각 심사위원들의 중점적 심사평에서는 조성기만이 언급했고 작품론에서 김형중이 언급한 ‘촛불’이다. 소설 말미에 ‘그것’이라는 고딕체의 글씨가 선명하다. 과연 그것이 무엇일까?

  이 소설을 읽어내는 키워드는 그것이 아닐까? 구체적 대상을 보여주지 않고 다양한 함의를 내포하고 있는 지시어 그것을 김형중은 ‘촛불’이라고 읽었다. 무릎을 치며 공감했다. 개인의 고통은 분명한 이유가 있다. 특히 소설에서 보여주는 인물들에게 고통은 대부분의 경우 자신의 존재 이유를 분명하게 밝히는 장치가 된다. 이 개인적 고통이 사회로 확대되는 일은 현실 참여 문학이 아니고서는 좀체로 찾아보기 어렵다.

  최근 90년대 이후 한국 소설의 지향은 철저하게 개인적이고 내면적 세계관에 함몰되어 있다. 아니면 지나간 역사에게 소설의 방향을 묻고 있다. 사회적 삶을 영위해 나가고 있는 인물들에 대한 철저한 분석이 부족하다. 고통의 근원에 도사리고 있는 사회 구조적 문제나 교묘한 틀과 구조들을 살펴보는 소설을 찾기 어렵다. 철지난 노래를 부르자는 게 아니다. 인간의 삶은 영원히 반복되고 또 지속될 것이다. 하지만 그 아픔과 고통은 쉽게 치유되지 않고 원인이 밝혀 고통을 나누기도 쉽지 않다.

  김연수에게 과연 ‘촛불’이 어떤 의미로 그리고 어떤 형태로 밝혀질 수 있을지 그의 다음 소설들에게 관심을 갖는 이유이다. 지금까지 보여준 작가의 역량이라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남음이 있을 것이다. 작가론에서 손정수는 ‘소통’으로 김연수의 소설을 이야기했지만 그 소통은 내면적인 고통이나 아픔을 드러내는 타인과의 소통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소통에 실패한 주인공의 내면의 풍경을 그린 것은 아닌가 싶다. 소통을 넘어 연대와 참여로 나설 수 있는 역사적 주체로 홀로 설 수 있는 사람들이 등장할 것을 기대해 본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한 ‘여자’일 수도 있고, ‘사랑’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유령작가입니다>에 수록됐던 ‘다시 한 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을 다시 읽었다. 새로운 느낌으로 작가 자선 대표작이라는 이름으로 읽었다. 그가 찾으려는 혹은 헤매고 있는 곳이 어디쯤인지 혹은 무엇인지 어렴풋이 짐작해 보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다. 쓰는 일 자체가 즐거움으로 시작해서 책임감과 의무가 되고 또 다른 세계를 만나고 자신을 극복하는 과정이라면 행복한 작가가 아닐까 싶다. 대중들의 사랑을 받는, 내게 읽는 재미를 주었던 작가의 수상을 축하한다.

  우수상 수상작으로 선정된 작품들 중 박민규의 ‘𪚥’가 주목을 끝다. 예의 발랄하고 풍자적인 어법으로 현실을 풍자하는 수법이 독자들을 한없이 즐겁게 한다. 현실을 비틀고 풍자하는 많은 방법 중에 무림의 고수를 선택한 것은 무협의 세계라는 아련한 추억과 더불어 진정한 고수의 의미를 중첩시키고 있다. 윤이형의 ‘완전한 항해’ 또한 주목을 끌었지만 새로움 이상을 보지 못했다. 이혜경, 정지아, 공선옥, 전성태, 조용호의 소설들도 나름의 개성과 탄탄함을 갖추고 있지만 눈에 띠는 신선함이나 깊은 감동으로 이어지지 못한다.

  수상작을 읽어며 윤대녕을 떠 올렸는데 심사평에서 김윤식이 한 번 언급해서 반가웠다. 누군가의 영향과 교집합을 읽어내는 것도 소설 읽는 또 다른 재미다. 상찬으로 끝나지 않고 더욱 정진할 것을 믿는다. 깊이와 넓이라는 상호 모순된 두 마리의 토끼를 잡는 작가가 되기를 바란다. 독자들의 입맛은 점점 까탈스럽다. 작가도 독자와의 만남은 다른 방식으로 진행되더라도 소설은 영원히 새로움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새로운 삶, 새로운 인물, 새로운 기법 그리고 새로운 사회를 꿈꾸어야 한다. 우리 모두의 그것처럼.


090208-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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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9-02-08 2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잘 읽었습니다.^^ 다 읽고 리뷰 제목 이해했어요.

sceptic 2009-02-20 12:09   좋아요 0 | URL
김연수의 소설이 재미있죠...변하지 않더라도 계속 읽고 싶죠...그래도 내일이 더 기대되는 작가이기도 하구요...^^
 
조선을 훔친 위험한 冊들 - 조선시대 책에 목숨을 건 13가지 이야기
이민희 지음 / 글항아리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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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데올로기의 종착역은 행동이다’라는 J. 네루의 말을 패러디 하자면 책의 종착역도 행동이다. 책은 사상의 집합체이며 인간 지식의 결정체다. 누가 뭐래도 인간의 호기심은 책을 통해 확인될 수밖에 없다. 책은 가장 은밀하고 수준 높은 영혼의 교류였으며 말없는 혁명가였다. 아무나 책을 쉽게 접할 수 없던 시대에 책은 지식이었고 권력이었다. 사람들의 생각은 책을 따라 흘렀고 책을 통해 펼쳐졌으며 책을 통해 변했다.

  성리학을 국시로 삼았던 조선의 경우는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이 책의 문화사를 정리할 만하다. 이민희의 <조선을 훔친 위험한 책들>은 기득권 세력이나 왕의 입장과 달랐기 때문에 화를 입었던 책이나 저자의 생각이 시대와 불화하여 일어난 사건들의 중심에 있었던 책 이야기를 적고 있다. 책은 어느 시대에나 불온하며 위험하다. 고난과 역경을 이겨낸 책의 운명들보다 더 눈길을 끄는 것은 책을 이용한 정치와 기득권 세력과 왕의 장난이다.

  근대 이전의 시기였기 때문에 책의 의미와 역할은 더욱 컸다. 글을 알고 책을 읽는 과정을 배울 수 있었던 사람들은 선택받은 사람들이다. 그래서 책은 양반들의 이야기이고 정치의 이야기이며 권력의 이야기이다. 글 모르는 대다수 서민들은 이 책에서 철저히 배제된다. 끼어들 틈이 없다. 한글이 의사소통과 문자 생활의 일부로 자리잡는 18세기 이후에나 책의 소비자로 참여하게 되는 현실을 감안하면 책의 역사는 슬픔과 고통의 역사다.

  방각본 소설이 나와 전기수가 활약했다는 것은 책이 그만큼 귀하고 글 아는 사람이 적었다는 반증이다. 누구나 쉽게 책을 살 수 있고 읽을 수 있는 시대는 긴 인류의 역사에서 정말 얼마 안 되는 시기의 이야기다. 국방부의 불온서적 발표로 책 판매량을 급증시켜주었듯 이제는 금지도서나 불온서적은 오히려 관심을 증폭시키고 호기심을 높여줄 뿐이다. 책 뿐만 아니라 여전히 노래 가사를 검열하고 영화를 심의하는 나라에서 옛날 이야기를 하자니 좀 우습기는 하다.

  조선시대의 책 이야기는 현재의 관점에서 흥미롭다. 책이라는 하나의 키워드로 조선의 역사를 읽어내는 방식을 취한 이 책은 두 가지 관점에서 읽힐 수 있다. 하나는 책의 ‘문화사’라는 측면에서 또 하나는 조선의 ‘역사’라는 측면에서 접근할 수 있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실록이나 다른 사료 등을 통해 드러나는 숨겨진 이야기들이 많다.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역사의 갈피들 속에 씨줄과 날줄처럼 이야기들이 얽혀있고 교묘하게 중첩되는 경우가 많다. 이 책은 그 틈을 정확하게 읽어주고 있다.

  단순히 저자의 상상력이나 추측성 발언으로 흥미를 끌어내는 책은 아니다. ‘책’이라고 하는 하나의 주제를 중심으로 역사적 사건들과 사회적 맥락, 역사적 인물들이 보여준 태도 등 다양한 측면으로 접근하고 있기 때문에 잘 알려진 사건들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기회를 제공한다. 역사는 평면이 아니고 입체적이다. 역사는 죽은 미라가 아니라 오늘도 살아 숨쉬는 유기체와 같다. 

  사실에 대한 재해석이 역사라면 책은 해석의 기준과 잣대로 훌륭한 역할을 한다. 한 권의 책에서 보여주는 저자의 세계관이나 학문적 깊이 혹은 내용의 새로움은 지금과 달랐을 것이다. 어떤 관점으로 보느냐에 따라 다르게 해석 가능한 것이 책이지만 그 책이 탄생하게 된 맥락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고전의 경우 그 책이 갖는 의미를 절반 밖에 읽어냈다고 볼 수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이와 같은 책의 문화사는 지속적으로 관심을 갖게 될 것 같다.

  열 세가지 ‘이야기’ 형식으로 구성되어 누구나 쉽고 편안하게 읽을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이야기보다 더 흥미 있는 형식은 없다. 채수의 ‘설공찬전’이 사림의 훈구파 사냥으로 비화되는 과정을 상세하게 보여주는 것으로 이 책은 문을 연다. ‘조선책략’을 통해 구한말을 들여다보는 일은 답답하고 슬프기까지 하다. 500여 년을 이어온 왕조에 대한 애틋함이 아니라 500년 동안 그 모순과 질곡의 세월을 견뎌온 서민들의 삶이 원통함이 읽힌다.

  이 책을 덮으면서 책과 무관하게 이렇게 모진 역사를 지탱하고 견뎌낸 것은 기득권의 모략과 우국충정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책조차 읽을 수 없었고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민중들의 생각은 이 책들에서 단 한 줄도 언급되지 않았다. 나는 그들을 읽고 싶어졌다.

  지식이 곧 권력이던 시절이 있었다.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다. 지식에 접근하는 경로조차 차단되고 비밀에 부쳐지던 역사를 견뎌온 21세기의 관점에서 과거를 돌아보는 일은 단순한 재미로 그칠 일이 아니다. 아직도 상식 밖의 일들이 당연하다는 듯이 벌어지고 있다. 책 속에는 길이 없다. 현실의 길을 책에서 고민하는 것 뿐이다. 책은 여전히 우리에게 모든 지식을 전해주지만 어떤 길도 제시하지 않는다. 그 안에서 길을 찾는 것은 살아있는 사람들의 몫이다.

  정치적 목적으로 활용하고 사리사욕을 위해 이용하고 세상을 변화시킬 목적으로 쓰인 책들을 다시 한 번 살펴보자. 그것을 고찰하는 일은 단순히 역사에서 교훈을 읽어내는 일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온 과정과 지금 우리의 자화상을 그려내는 일이다. 역사는 반복되고 책은 여전히 남아있다. 그 의미가 퇴색하고 세상이 달라졌지만 그 안에 살아 숨 쉬는 선인들의 삶까지 퇴색하지는 않았다. 푸르게 살아 숨 쉬는 정신들을 본받거나 되새기는 일이 중요하다. 한 권의 책을 둘러싼 무협영화 같은 주변 이야기는 흥미와 호기심을 위한 당의정일 뿐이다.
 
  각 이야기들 사이에 삽입되어 있는 일곱 개의 ‘조선의 책이야기’는 책의 흥미와 여백을 훌륭하게 이어준다. 조선 시대 전체를 망라할 순 없지만 대표적인 책과 관련된 사건들을 통해 당시의 사상과 문화, 정치와 외교를 읽어내는 재미는 이 책이 지닌 가장 큰 특징이다. 더구나 ‘책에 미친 사람들’의 이야기는 개인적인 호기심을 충족시키기에 충분했다.


090204-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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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7-27 01: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sceptic 2024-08-06 19:02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글쓰기의 최소원칙
도정일 외 지음 / 룩스문디(Lux Mundi) / 2008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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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보화 사회라고 명명되는 네트워크 시대로 접어들면서 글쓰기가 일반화 되었다. 나같은 사람도 목적 없이 끄적이고 있을 정도로 글쓰기는 이제 보편화되었다. 지식인의 전유물도 아니고 특수한 계층만이 지닌 특권도 아니다. 이제 누구나 쓰고 누구나 읽는다. 불과 100여년 만에 천지가 개벽하듯이 근대화의 물결 이후 지식은 보편화되었다. 책을 통해 지식인과 기득권 계층의 비밀이 공개되었다. 이제는 누구나 지식에 접근할 수 있다. 사회는 개방되었다. 칼 포퍼는 <열린사회와 그 적들>을 통해 전체주의에 대항하는 개념으로 ‘열린사회’를 이야기했지만 자유로운 비판이 가능하고 점진적인 변혁이 가능한 진정한 열린사회는 아직도 요원하다. 읽기와 쓰기는 그것이 가능하게 하는 가장 첨단의 도구이다. 컴퓨터와 IT 기술이 아니라 가장 고전적인 방식인 책 읽기와 글쓰기를 통해서만 열린사회는 가능하다고 본다.

  앨빈 토플러가 말한 제3의 물결은 이미 현실을 장악했다.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특히 블로그의 확산과 1인 미디어 시대는 미래 사회를 예측하기 위한 중요한 단서가 된다. 우리가 주목할 것은 바로 그들이 가지고 있는 가능성이다. 누구나 읽고 쓸 수 있다는 가능성. 더 이상 고 읽었다면 생각하고 쓰고 싶은 욕망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개인 블로그의 확산과 더불어 글쓰기의 욕망은 점차 증가하고 있다. 최근 글쓰기에 대한 관심은 당연한 현상이고 앞으로도 지속될 것이다.

  이것을 대학 입시에서는 ‘논술’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현행 대한민국의 입시 논술은 글쓰기 능력에 대한 평가라고 보기 어렵다. 무엇보다도 객관성을 확보하기 위한 출제와 정답이 있는 논술이 글쓰기라고 볼 수 있을까? 그것은 주관식 평가에 다른 이름이다. 모범답안과 점수로 환산되는 글쓰기가 가능한가라는 지극히 원론적인 문제에서부터 논술은 접근되어야 한다. 최근 들어 자체적인 시행착오와 시행상의 어려움들이 문제시되면서 통합논술이라는 괴물도 주춤하고 있다. 강수돌의 <경쟁은 어떻게 내면화되는가>를 통해 그 근본적인 원인을 살펴볼 수 있다. 글쓰기를 배울 수 없는 핑계를 대자면 대입제도 때문이며 대입 제도는 학벌과 헤게모니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사회 시스템의 문제로 귀결된다. 오버했나?

  <글쓰기의 최소 원칙>은 절반의 성공을 거둔 책이다. 일단 여러 명이 공저한 책은 찬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목적과 의미가 분명하지만 필자들의 논의가 제각각이기 때문에 다양성을 확보할 수도 있지만 잡탕이 될 수도 있다. 이 책은 후자에 가깝다. 절반의 실패를 인정해야 하는 책이기도 하다는 뜻이다. 2007년 경희대학교 교육대학원 특별강좌로 마련되었다면 학교 현장의 교사들에게 필요한 이야기일 뿐 아니라 글쓰기를 욕망하는 모든 사람에게도 귀중한 이야기들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몇 사람이 산보를 나간다. 다른 사람이 무슨 말을 해도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한다. 청중과 질문자를 외면하는 내용에 또 다시 울컥.

  도정일의 이야기를 김수이가 이끌어내는 첫 번째 이야기 ‘무엇을 쓸 것인가’와 김훈의 ‘문학적 글쓰기는 하나의 전략이다’, 배병삼의 ‘고전, 현재형으로 끊임없이 다시 써야 할 ‘오래된 미래’’, 김영하의 ‘존재․삶․글쓰기’가 읽을만하다. 표지에는 열네명이나 적혀있지만 전공분야의 이야기나 글쓰기와 아주 먼 이야기들을 하고 있다. 그런 식의 이야기라면 도대체 글쓰기와 무관한 이야기가 어딨나?

  제목은 구미가 당기지만 책의 내용과 거리가 멀다. 대담자나 강사로 나온 분들의 면면이나 내용이 읽을 만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다만 글쓰기의 최소 원칙은 몇 가지 얻지 못한다. 이름난 분들의 경우 이 책 저 책에서 반복되는 이야기로 개인적으로 지루한 면이 많았다.

  특별하고 새로운 방법이야 어디에 있겠는가. 다만 현실에서 벌어지는 현상을 정확하게 짚어내고 문제점을 파악해서 대안을 고민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글쓰기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다시 한 번 고민해 보아야 한다는 말에는 백번 공감한다. 보다 구체적인 내용과 기본적인 원칙들에 대한 고민들로 채워졌다면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핸드폰 문자, 이메일, 댓글에서부터 보고서, 기획안, 논문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매일 읽고 쓰며 살아간다. 무엇을 쓸 것인가와 어떻게 쓸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글쓰기의 시작이다. 정확하고 바른 문장부터 시작해서 읽을 만한 글이 되기 위한 과정들은 누구나 알고 싶어 한다. 글쓰기에 관한 무수한 책들이 나왔고 나올 것이다. 나에게 맞는 책을 찾아 단 한 줄의 영감이나 도움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글쓰기는 즐거움이어야 한다는 대원칙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책읽기든 글쓰기든 문학적인 글이든 실용적인 글이든 스스로 즐기지 못한다면 건강에 해롭다. 의무감에 해야 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스스로를 자유롭고 행복한 일로 만드는 일이 글쓰기의 최소 원칙이 아닐까?


090203-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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