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의 기별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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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조선 시대 임금의 명령을 들이고 내는 관청이었던 승정원에서는 그 전날 처리한 일을 적어서 매일 아침마다 널리 반포했다. 일종의 관보라고 할 수 있는 이것을 ‘기별(寄別)’이라고 불렀고, 기별을 담은 종이를 ‘기별지(寄別紙라)’고 불렀다. 그러므로 어떤 일이 확실히 결정된 것을 확인하려면 기별지를 받아야 알 수 있었다. 애타게 기다리던 결정이 기별지에 반포되면 일의 성사 여부를 알 수 있었으므로 그때서야 사람들은 기쁨과 안도의 숨을 쉴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도 사용하는 ‘기별이 왔는가?’ 하는 말의 기원이 여기에 있다.

  사람들은 여전히 기별이 올 것을 기다린다. 그것이 사람이나 소식일 수도 있고 막연한 그리움일 수도 있다.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의사 소통 불능 상태를 보여준다. 현대인의 부조리한 삶의 모습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단절된 관계로 인해 인간은 근원적 외로움을 확인한다. 고도는 어디에나 있으며 아무곳에도 없다. 그들은 고도를 기다리지만 고도가 무엇인지 언제 올 것인지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다만 그 기다림 자체가 목적이다. 희망은 그렇게 인간들을 잔인하게 고문해 왔다. 고도는 기별을 보내지 않을 것이다. 영원히.

  모든, 닿을 수 없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모든, 품을 수 없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모든, 만져지지 않는 것들과 불러지지 않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모든, 건널 수 없는 것들과 모든, 다가오지 않는 것들을 기어이 사랑이라고 부른다. - P. 13

  김훈에게 바다는 고도와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바다의 기별>은 ‘사랑의 기별’일지도 모른다. 누구에게나 바다가 있고 고도가 있고 사랑이 있다. 그러나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는 것처럼 닿을 수 없는 슬픈 거리를 유지한다. 아니 어쩌면 실체 없는 대상에 대한 영원한 그리움의 다른 이름인지도 모른다.

  일상에서 길어올린 감상들을 형식이나 서사 구조와 무관하게 써내려간 이런 종류의 글들을 통해 독자들은 두 가지를 얻는다. 하나는 소설이 아닌 작가를 읽는다. 그의 생각과 감성, 생활인으로서 일상과 인간적인 면모와 접하게 된다. 친근감을 느끼게 되고 그의 작품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으며 소설의 형식으로 풀어내지 못한 수다를 들을 수 있다.

  또 하나는 낯설게 하기다. 시인과 마찬가지로 소설가는 사람과 사물의 차이를 읽어내고 그 틈을 들여다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다. 물론 그것은 언어라는 모호한 매체를 통해 독자에게 분명하게 전달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김훈의 문장은 탄력있고 아름답다. 그 아름다움은 정확한 문장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언제나 그의 글을 읽고 나면 군더더기 없는, 단백한 음식을 먹고 난 후의 느낌이다.

  이번 산문집도 마찬가지다. 생활인으로서 혹은 언어를 사용하는 작가로서 즐거움과 괴로움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 특히 ‘말과 사물’ 한 편의 글로도 이 책을 읽을 충분한 이유가 있다. 우리가 얼마나 더 김훈의 소설을 읽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의 소설을 이해하는 혹은 의도를 읽어내는 혹은 재미를 느낄 수 있는 단서 하나를 발견했다.

  하지만 아쉬움이 남는다. 김훈의 산문집은 잡문집이다. 구체적인 대상과 일관된 생각의 흐름을 읽어내기에 부족하다. 한 권의 책으로 묶이기에 부족하다면 기다려야 할 것이다. 부록으로 책들의 서문과 수상소감들을 모아 겨우 분량을 채웠다. 상업 출판의 극단을 보는 듯하다. 의미없는 책은 없겠지만 이런 책은 독자를 슬프게 한다. 김훈의 문장은 정확하고 분명하다. 모호한 흐름이나 지나친 수사가 거의 없다. 감성이 풍부하지만 의미가 불분명하게 전달되지 않는다. 문제가 되는 것은 내용이 아니라 한 권의 책이다.

  에세이가 누구나 가볍고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에 동의하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이런 종류의 책을 혐오한다. 내용과 물리적 형식이 어그러져 김훈의 글들이 허공을 맴돈다. 출판사는 과작(寡作)의 작가인 김훈의 책을 팔고 싶은 욕망을 자제할 필요가 있다. 그것만 아니라면 이 책을 혐오할 이유가 없다. 시간이 날 때 서점에 서서 읽기에 좋은 책이다. 물론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다.


09020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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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 : 역사 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
남경태 지음 / 들녘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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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칠 동안 시간 여행은 참으로 행복했다. 무릇 책은 온 영혼을 바쳐 써야 한다고 믿는다. 그래야 독자가 몰입할 수 있고 감동할 수 있다. 내용과 무관하게 저자의 내밀한 고백과 진정성을 느낄 수 있는 책은 좋은 책이다. 가볍고 즐거운 방법이라도 그것이 독자의 내면을 일깨울 수 있어야 한다. 그러자면 독자와 작가의 궁합도 필요하다. 독자의 취향과 안목에 따라 책이 선택되고 좋아하는 작가가 생기고 서로 소통하며 독서의 과정이 이루어진다.

  일면식도 책꽂이에 좁은 책등을 내보인 채 일렬로 서 있는 책들을 볼 때마다 반추한다. 제목과 저자를 떠올리고 내용을 더듬으며 고개를 갸웃거리기도 하고 흐린 기억을 떠올리기도 한다. 소파에 앉아 책장을 훑어보는 일은 그래서 즐겁고 시간 가는 줄 모르게 한다. 그것은 내가 지내온 시간의 역사이기도 하며 흘러온 과거의 추억이기도 하다.

  한 개인에게도 삶의 굴곡이 있고 결정적 순간이 있으며 변화의 시점이 존재한다. 하물며 인류의 역사는 말해 무엇 할까. 과거를 돌아보는 일은 단순한 호기심과는 다르다. 역사를 알아야 하는 이유는 우리들의 존재를 확인하는 일이다. 내가 여기에서 살아가는 방식과 나의 사유 방식 그리고 나의 미래를 말해준다. 토인비의 말대로 역사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은 끊임없이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역사를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남경태의 <역사>는 탁월하다. 수많은 역사책을 뒤적여보았지만 내게 필요한 책은 바로 이런 책이었다고 감탄하며 책장을 넘겼다. 이 책은 우리가 지금까지 보아왔던 역사책이 아니다. 연대기적 서술이나 사실의 확인을 위한 역사책은 부지기수다. 하지만 시공간을 가로질러 웅장한 교향곡과 같이 연주하는 일은 대단히 어렵다. 저자의 역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탁월한 안목이 아니라면 이런 책은 쓸 수 없을 것이다.

  역사 자체의 의미를 묻거나 역사의 관점에 대한 논의, 역사적 사실들에 대한 평가, 유사한 사건이나 개별적 인물들의 공통점 등 역사는 우리에게 무한한 지식의 보고이며 확대 재생산이 가능한 학문의 저장고이기도 하다. 하지만 무엇을, 어떻게 풀어낼 것인가에 대한 방법은 결코 쉽지 않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새로운 안목과 특별한 관점을 선보인다.

  스스로 ‘문외한’이라 칭한 저자의 겸손은 지나치다. 전문 역사가의 몫은 따로 있을지 모르겠지만 저자의 지적대로 크로스오버나 퓨전을 전문으로 하는 역사가는 거의 없다. 그래서 이 책의 가치는 돋보이는 지도 모르겠다. 지극히 개인적인 판단과 평가지만 이 책은 저자의 노력에 값하는 평가를 받아야 마땅하다.

  680여 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 때문에 작년에 구입하고 유일하게 읽지 못한 책이었다. 집중해서 시간을 들여 읽고 싶었기 때문이다. <철학>, <개념어사전>, <스토리철학18> 등을 통해 보여준 인문학적 지식과 활용 능력은 굳이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 저자를 믿고 구입하고 읽고 기대 이상을 충족한 기쁨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이 책의 면면을 살펴보자. 크게 4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1부 탄생은 역사가 시작된 단계와 문명 이전의 선사시대를 다루고 있다. 2부 성장에서는 제각각 걸어온 시기를 다룬다. 13세기 무렵까지의 역사가 되겠다. 가장 중요한 3부 만남과 섞임에서는 두 문명이 본격적으로 조우하는 과정을 그리고 문명의 중심축이 이동하는 과정들을 밀도 있게 그려낸다. 마지막 4부에서는 두 문명의 차이와 오늘날의 영향 관계에 대해 이야기한다.

  흥미진진한 영화를 보는 것 같기도 했고 잘 짜인 대하 역사 드라마를 본 것 같기도 하다. 단순한 역사적 사건에 대한 재해석이나 중요했던 순간들을 다룬 것이 아니라 동양과 서양이라고 하는 두 개의 문명 축을 중심으로 그 성격을 규명하고 차이점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게다가 현실적 관점에서 그 연원을 밝히는 논평은 작가만의 시각을 개성적으로 드러낸다.

  마지막에 연표가 붙어 있다. 시기별로 연대별로 정리된 중요한 사건들을 훑어 볼 수 있으며 내용의 흐름에 따라 찾아 볼 수 있지만 개별적 사실들을 확인하고 정확한 연대기가 필요하다면 잘 정리된 다른 책을 참고하면 될 듯싶다. 이 책은 역사의 중심축이 이동하는 경로를 따라 유목한다. 연대를 거슬러 유사한 사건과 인물들을 배치하기도 하고 동서양을 넘나들며 정치제도와 경제적 토대를 비교하기도 한다. 문화적 차이와 삶의 토대는 역사적 관점이 없다면 그 연원을 밝히기가 힘들다. 단순한 사건과 개별적 사실들이 한 데 어우러져 씨줄과 날줄처럼 얽히고 하나의 유기체처럼 살아 숨 쉬는 역사를 읽고 싶다면 이 책을 권한다.

  동양 문명의 중심은 중국의 중원이라는 땅 덩어리였지만, 그에 해당하는 서양 문명의 중심은 지중해하는 바다였다. 동양 문명과 서양 문명의 근본적인 차이는 바로 대륙 문명과 해양 문명의 차이다. - P. 50

  분열과 분산을 본성으로 하는 유럽 문명에 최소한의 통합성을 부여한 요소는 두 가지다. 하나는 로마제국의 전통이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교다. 그것들이 있기에 유럽의 중세 문명은 역사적․현실적 동질성과 함께 종교적․정신적 동질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 P. 148


  동서양 문명의 차이는 물론 유럽 문명의 본질적인 속성들을 한 마디로 짚어내는 것은 어렵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 배경과 역사적 사실들을 명확하게 밝혀내고 하나의 맥락으로 읽어내는 일은 쉽지 않다. 이 책은 맥락읽기가 가능한 책이다.

  문제는 독자의 입장에서 단순한 흥미와 호기심의 차원이 아니라 저자의 관점에 동의할 수 있느냐에 달려있다. 특히 오늘날 벌어지는 사회 경제적 문제들의 연원을 밝히는 데 그 연결고리를 제대로 이어져 있는지 그 원인과 결과에 대해 공감할 수 있는지 그것이 중요하다. 내가 이 책을 높이 평가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기본적인 태도와 관점의 유사성 때문일지도 모르겠지만 역사는 오늘도 반복되고 있으며 하나의 커다란 수레바퀴처럼 그 흔적들을 따라가고 있다. 전철을 밟는다는 표현은 부정적으로 사용되지만 변화의 속도는 느리고 힘겹기만 하다. 그래서 저자는,

역사에는 지름길이 있을 뿐 결코 비약은 없다. - P. 547

고 말한다.

개인의 의식적 행위가 역사적 무의식의 결과로 이어지는 과정은 민간 부문의 활성화를 축으로 하는 서양 역사의 자연스러운 흐름에서 볼 수 있는 현상이다. 그것이 바로 서양 문명을 세계 문명으로 이끈 힘이다. - P. 285

  동양의 역사에서는 국가 체제가 아주 일찍부터 발달했으나 묘하게도 ‘국민’이라는 개념이 부재했다. ‘백성’은 언제나 있었어도 ‘국민’은 20세기의 산물이자 서양식 근대화의 결과다. 그 이유는 통치의 룰이 달랐기 때문이다. 동양의 지배자는 권위에 기반해 국가를 경영한 반면 서양의 지배자는 계약에 기반에 국가를 경영했다. - P. 328

  국가를 유기체처럼 여기고 개인 위에 군림하는 것으로 받드는 생각은 역사적으로 형성된 관점이다. 동양의 역사와 우리 역사에서는 늘 정치, 즉 나라의 경영이 모든 것보다 우선했고 일찍부터 관이 민을 지배하는 체제가 자리 잡았다. 공화국 전통 60년이 넘은 지금도 우리는 그런 생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 P. 638


  의도된 역사는 없다.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과거를 토대로 할 뿐이다. 저자는 그것을 무의식의 결과라고 표현했다. 서양의 문명은 물처럼 흘렀고 자연스럽게 확산되었지만 동양의 문명은 인위적으로 통제되었으며 하나로 수렴되었다. 얼마나 큰 차이가 벌어졌겠는가. 그 결과는 오늘 우리가 확인하는 그대로이다.

  시민혁명의 경험 - 그 소중한 경험이 우리에겐 없다. 백성과 국민은 있었지만 시민은 없었다. 불행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과거 그리고 현재를 생각할 때 가장 아쉽고 통탄할 일이지만 그것은 우리가 겪어온 시간의 흔적이다. 가정법 없는 역사에서 안타까움을 찾아내기 보다는 미래를 위한 비전을 읽어내야 한다고 믿는다.

  정치와 사회, 경제 등 모든 면에서 저자의 평가를 부정할 수 없다. 역사는 평가해야 한다. 그것은 오늘의 우리를 거울에 비춰보는 행위이며 내일의 지표를 설정하는 준거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자의 에필로그가 더없이 뼈에 사무친다. 우리는 역사를 아직도 호기심의 대상으로만 읽을 것인가에 대한 반성이 필요하다. 역사적 관점은 인문학적 관점이다. 문제의 발견과 인식에 필요한 가장 근본적인 질문들을 도대체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현실의 문제는 누가 무엇으로 풀어낼 수 있는지 이 책을 통해 심각하게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인문학은 문제의 해법이 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문제의 발견과 인식에는 대단히 유용하며, 보이지 않는 지름길을 찾는데도 큰 역할을 할 수 있다. 문제는 인문학이 그에 마땅한 주목을 받지 못하는 풍토다. - P. 657

09020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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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급 비타 악티바 : 개념사 4
이재유 지음 / 책세상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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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유와 평등을 모토로 한 현대 사회에서 계급이란 말에 고개를 갸우뚱하기 쉽다. 나는 어떤 계급에 속하는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해보지 않았다면 더욱 그렇다. 봉건질서가 무너지고 신분 사회가 철폐되면서 계급도 사라졌다고 믿는 것은 순진한 생각이다. 계급은 어디에나 존재하며 지금도 여전히 보이지 않는 신분증의 역할을 한다. 명확한 증거와 분류가 어렵게 때문에 더욱 교묘하게 숨어 있는 구분선이다.

  사회학자들은 다양한 방법과 기준으로 계층이론을 제시한다. 경제적 수준이 기준이 되는 계층 이론과 달리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과 계급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원시 공동체 사회이후 소유 관계가 형성되면서 인류에게 계급은 필연이었는지 모른다. 문제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 계급사이의 모순이다. 인류의 역사는 그 모순을 해결하려는 지난한 과정이었다. 사회의 변화와 발전은 늘 계급 모순이 해결된 상태를 갈망해 왔다. 물론 지금도 그러하다고 믿는다.

  계급에 대한 관심은 나의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며 자유로운 관계와 행복한 삶을 위한 길찾기이다. 이재유의 <계급>은 이런 과정에 대한 가장 기초적인 아내서 역할을 한다. 계급이 무엇인지, 왜 중요한지, 계급의 역사는 어떠했는지, 그것을 둘러싼 논쟁은 무엇인지 그리고 새로운 사회를 꿈꾸는 계급 이론에 대해 이야기한다.

  사회적 불평등의 원인을 계급 문제에서 찾고자 하는 관점은 여전히 유효하다. 인간답고 행복한 삶의 기초를 마련하기 위해서 계급 문제를 인식하고 이것을 어떻게 풀어낼 것인가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저자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유와 행복의 의미가 무엇인지 독자들에게 질문을 던지면서 책장을 열게 한다.

  원시 공동체 사회에서 고대 노예제 사회를 거쳐 봉건제 사회를 지나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다. 사회의 형태가 변화한 것은 생산수단과 소유의 관계로 귀결된다. 수많은 사회 경제 학자들이 명멸했지만 또 그것을 분석해 냈지만 완전한 대안이나 해법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진행형인 역사에서 그것을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이후에 대해 정확하게 예견할 수 있다면 계급 문제 역시 논의가 쉽게 풀릴 수도 있겠지만 그리 만만치 않은 문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역사적 관점에서 계급의 문제를 올바로 인식하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지금까지 우리가 일궈온 사회와 경제 시스템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문제와 해결 방안도 요원할 수밖에 없다. 그런 측면에서 하나의 개념을 이해하는 일은 단순하게 인문학적 교양을 쌓는 것이 아니라 내 존재 의미를 확인하는 거창한 문제의 시작이다.

  정치체제로서 민주주의, 경제제도로서 자본주의가 세계사의 주류로 자리잡은 현재 시점에서 계급 문제는 미래를 위한 가장 치열한 담론으로 자리 잡아야 한다. 진보진영의 모임이긴 하지만 ‘세계 사회 포럼’은 브라질에 모여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실패로 인한 자본주의의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인류의 역사에 흐르는 무의식의 결과가 어떤 방향으로 진행될지 아무도 모른다. 다만 그 변화 방향에 대해서 고민해 보는 것 뿐이다. 지금 이대로 자본주의의 계급 모순이 축적된다면 결과는 예측할 수 없다.

  2009년 대한민국의 현실도 마찬가지다. 용산 철거민 사태는 명백한 국가 권력에 의한 살인행위이다. 고통 받는 다수가 연대하지 못하고 자신의 계급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분명 그것은 남의 일로 보일 것이다. 그런 상황에 빠지지 않기 위해 죽도록 일하고 가족 이기주의에 매몰되거나 자식들의 학벌에 올인하는 현실 인식은 우리의 미래를 어둡게 한다.

  근면한 일벌레가 찬양되고 휴식은 수치스러운 것이라는 이데올로기는 자연스럽게 노동하는 인간을 미화했다. 내면화된 지배계급의 헤게모니는 우리의 삶을 스스로 통제하도록 조정한다. 자본의 모순이 계급의식을 만들어내지만 우리는 애써 그것을 외면한다. 루카치, 그람시, 알튀세르의 분석과 대안들은 현실을 변화시키지 못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다수자와 소수자의 개념을 재정립했고 신베버주의는 중간계급에 주목했지만 토대의 변화는 먼 나라의 이야기로 여겨진다.

  우리는 늘 새로운 사회를 꿈꾸고 희망찬 미래를 가슴에 품는다. 변희재는 우석훈의 세대론에 물타기를 시도하고 조중동은 시민사회를 견제하기 시작했다. 전통적 지식인이 아니라 그람시가 제시한 ‘유기적 지식인’이 우리에겐 없는 걸까? 그렇지 않다. 억압적인 교육제도와 보이지 않는 자본의 헤게모니는 우리의 목을 조이고 있다. 여기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이것을 타계하기 위한 방법은 없는 것인가?

  계급의식의 싹은 가사 노동으로부터 출발한다. 가족으로 얽매인 우리의 생존 문제는 연대와 참여, 배려와 실천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한다. 과연 무엇이 문제인가? 계급은 어떻게 내면화되었으며 그것의 원인은 무엇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인간답게, 우리를 행복한 삶으로 이끌어 줄 수 있는 사회는 불가능한가? 지금-여기에 서 있는 나는 어떤 계급에 속해 있으며 내 생각과 행동은 그에 맞는 의식을 담보해내고 있는가? 끝없이 이어지는 질문들은 온전히 독자들의 몫이다. 하지만 행간을 건너뛰는 저자의 목소리는 분명하게 들린다.


09013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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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가르치는 기술
야스코치 테츠야 지음, 최대현 옮김 / 두리미디어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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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름 위에서 내려다는 설경은 기막히다. 환경과 개발에 대한 저항감에도 불구하고 겨울만 되면 여전히 스키를 버릴 수가 없다. 신념과 다르게 행동하는 겨울 스포츠 스키. 벌써 10년이 넘어버린 ‘미친스키’ 때문에 겨울을 많이 기다리기도 했다. 스피드와 테크닉을 모두 극복해야 스키의 즐거움을 제대로 즐길 수 있다. 모든 운동이 그러하듯이 단계별 훈련과 상위 기술 습득의 열망이 없으면 스키는 그저 경사면을 미끄러져 내려오는 따분한 운동이 된다. 스키의 즐거움은 기술 향상뿐만 아니라 정상에서 바라보는 장엄함이다. 인위적으로 기계의 힘을 빌려 리프트를 타고 올라 갈 수밖에 없지만 시야에 들어오는 경치는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다.

  처음 스키를 가르쳐 준 분은 선수 출신이었고 카빙스키가 막 보급될 무렵이었지만 노말 스키와 카빙 스키의 차이점은 물론 기본자세와 원리를 상세하게 가르쳐 주셨다. 물론 쉽고 재미있게 말이다. 다른 분한테 스키를 처음 배웠어도 내가 스키에 몰입할 수 있었을까 가끔 생각해 본다. 그러다 이번에서 만난 분이 10년 전 그분처럼 티칭 테크닉이 뛰어난 분이었다. 실행에 옮겨지지는 않았지만 그 원리와 문제점을 정확하게 배우는 기회가 되었다. 모든 분야가 마찬가지겠지만 전문가는 아름답다. 자신의 분야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다는 것은 쉽고 재미있게 배우는 사람의 수준에 따라 다르게 녹여낼 수 있는 능력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거의 매년 스키 캠프에 참가한다. 조금 더 잘 타기 위해 강습을 목적으로 캠프에 참가한다. 어떤 연수든 강연이든 배움의 기회가 있을 때마다 느끼는 일이지만 가르치는 일은 배우는 일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렵다. 스키 강사를 예로 들면 먼저 방법을 설명하고 시범을 보인다. 스키를 잘 못 타는 강사는 없다. 하지만 배우는 사람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한다. 설명은 책이나 다른 방법으로도 알 수 있고 시범은 지겹게 볼 수 있다. 시즌 전에 비디오 매체를 통해 이미지 트레이닝을 하기도 한다. 굳이 강사가 필요가 없는 부분들이다. 문제는 그것이 잘 안 되는 이유다. 잘 안될 때 쉽고 빠르게 익힐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고 다양한 개별적 문제들을 정확하게 지적해서 개선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야 한다.

  어떤 운동이든 마찬가지지만 초보자가 아니라면 원 포인트 레슨으로 충분한 경우가 많다. 단 하나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알지 못할 때 그것을 찾아주고 개선 방법을 가르쳐 주는 강사야말로 최고라고 할 수 있다. 가르치는 사람은 얼마나 스키를 잘 타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잘 가르치느냐의 문제로 귀결된다. 무언가를 가르치는 일은 그만큼 어렵다. 잘 하는 것과 잘 가르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가르치는 일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들은 더 말할 나위가 없겠지만, <쉽게 가르치는 기술>은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일상생활을 해나가면서 부모는 아이에게, 상사는 부하에게, 장교는 병사에게, 선배는 후배에게, 고수는 하수에게 끊임없이 무언가를 가르치고 또 배운다. 가장 확실하게 공부하는 방법 중에 하나가 누군가에게 설명하는 것이다. 보다 쉽고 정확하게 상대방을 이해시킬 수 있고 단시간 안에 알려줄 수 있는 능력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다.

  거꾸로 배우는 사람은 보다 쉽고 간단한 방법으로 배우려고 한다. 복잡하지 않고 단순하게 이해시켜주고 재밌게 즐길 수 있도록 가르쳐 주는 사람이 있다면 기꺼이 시간과 돈과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잘 가르치기 위해서는 우선 배우는 사람을 잘 알아야 한다. 글을 쓸 때 예상 독자가 중요하듯이 말이다. 일본인 야스코치 테츠야는 이 책을 통해 20여년간 쌓아 온 티칭 테크닉을 말한다.

  누구나 한 분야에서 10년 이상 일하다 보면 자신만의 노하우가 쌓이고 그것은 특별한 기술이 된다. 저자는 대학생부터 시작한 학원 강사 경험을 토대로 이 책을 썼다. 영어를 가르치며 자신이 겪었던 시행착오와 노력의 결과물 그리고 유명강사가 되기까지의 과정들을 자세하게 적고 있다. 그의 티칭 테크닉을 찬찬이 들여다보는 일은 단순히 테크닉을 배우는 일이 아니라 가르치는 일의 어려움에 대해 생각해 보고 누구든 무엇이든 가르치고 배워야 하는 일상의 문제들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가르친다’는 것의 의미를 생각해 보는 것으로 이 책은 시작된다. 가르치는 사람은 다섯가지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학자, 배우, 예언자, 엔터네이너, 의사가 그것이다. 공부하기보다 가르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조건이다. 사람마다 성격이 다르듯이 스타일이 있고 장점이 있겠지만 골고루 종합적으로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배우는 사람은 고통스럽다. 내가 배웠던 수많은 선생님들을 돌이켜 보았다. 테니스, 탁구, 배드민턴 등 운동을 가르쳐 주었던 코치들을 포함해서 무언가 가르침을 주었던 수많은 사람들을 하나하나 떠 올리며 이 책을 읽었다. 그리고 나를 돌아보았다.

  잘 가르치는 사람일수록 쉽게 가르친다는 말에 가장 깊이 공감했다. 먼저 배우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고 배우는 사람의 유형에 맞게 가르쳐야 한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말이다. 성공하는 사람들의 가르치는 기술에 대해서 이야기한 부분도 깊이 와 닿지는 않는다. 그것은 개인차가 존재하고 대상과 방법에 따라 다양하게 논의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좀 더 쉽고 재밌게 가르치기 위한 노력조차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책이다. 누군가를 가르치는 입장에 서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생각해 볼만한 경험담들이다. 태어나면서 죽을 때까지 무언가 배우고 가르치며 살아야하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라면 생존을 위해 가장 본능적으로 필요한 것들에 대한 이야기들이 아닐까 싶다. 다만 이 책은 일반화시킬 수 없는 내용과 특수한 분야에 한정되어 있는 내용이 많다는 사실을 알고 읽어야겠다. 나는 오늘 또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가르쳤는지 그리고 그 과정이 어떠했는지 돌아본다.


090129-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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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이매진 - 영화와 테크놀로지에 대한 인문학적 상상
진중권 지음 / 씨네21북스 / 2008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영화는 예술이다. 논쟁은 끝났다. 발터 벤야민의 ‘기술 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이 수없이 인용되며 끊임없이 논의되었지만 영화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 그 위상과 역할이 달라지고 있다. 하지만 그 의미와 기능은 변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 예술과 영화의 관계를 벤야민은 ‘아우라Aura’를 통해 설명했지만 사진과 영화의 복제 가능성 때문에 예술의 범위를 논하던 시대는 종언을 고했다. 대중문화로서 확고하게 자리 잡은 영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문제는 해결되지 않은 채 말이다.

  그것이 오락이든 예술이든 장르의 문제가 아니가 아니라 변화, 발전의 양상과 미래에 더 큰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영화는 기술의 발달과 더불어 우리에게 더 큰 즐거움과 충격과 미적 쾌감을 전해주리라고 굳게 믿는다.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단 한 순간도 정체되어 있지 않고 살아 움직이며 진화하는 영화는 여전히 21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문화 매체로 거듭나고 있다.

  영화를 즐기는 방식과 태도가 달라지고 있지만 스크린을 통해 전해지는 이미지와 메시지는 여전히 장르의 특성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한 프레임 안에 한 장면을 보여주던 방식은 한 장면에 여러 장면을 중첩시키거나 화면을 분할하여 같은 시간에 다른 장소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등 영화의 기본적인 전제를 무너뜨리기도 한다. 형식과 내용이 파괴가 영화의 발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지만 영화는 끊임없이 진보하고 있다. 다른 어떤 장르보다도 역동적으로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항상 형식보다는 내용에 관심을 갖게 된다. 형식을 벗어나서 논의될 수 없는 분야가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영화읽기는 내용에 집중된다. 이런 관심은 최근 철학자 김영민의 ‘영화와 인문’ 칼럼에도 잘 반영되어 있다. 영화도 결국 인간의 문제로 귀결되고 어떻게 살 것이며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한 관심의 반영이기 때문이다. 세상을 둘러싼 수많은 존재들에 대한 관심과 인간의 상상력은 무한히 증폭된다. 영화는 늘 일상에서 벗어나 있다. 소설과 달리 비루하고 속된 일상들을 집약적으로 보여주기도 하지만 대부분 영화는 일탈된 상황을 보여준다. 100분 내외의 시간동안 관객들을 집중시키기 위한 영화의 서사는 소설의 그것과 다를 수밖에 없다. 일단 보여주기로 시선을 끄는 데는 한계가 있다. 최근 CG의 현란한 기술들은 실사와의 구별을 모하하게 만든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영화가 완성될 수는 없다. 무엇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들은 영화의 오래된 숙제이기도 하다. 에이젠슈테인의 <전함 포템킨>부터 <300>에 이르기까지 영화의 역사는 시대의 흐름과 기술의 발전을 반영해 왔다.

  영화 이야기는 누구에 의해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또 다르게 이야기될 수 있다. <진중권의 이매진>은 ‘씨네 21’에서 재미있게 읽었던 연재물이다. 책으로 묶이는 순서는 당연해 보인다. 신문이든 잡지든 좋은 칼럼을 읽게 되면 언제 책으로 나오게 될지 기다리게 된다. 아직도 가장 편안하고 익숙한 매체가 책이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다. 어쨌든 이 책은 영화 잡지에 1년간 실렸던 칼럼을 모은 책이다.

  저자가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이 책은 영화에 대한 비평이라기 보다는 영화를 가지고 노는 이야기이다. ‘담론의 놀이’라는 말이 적절해 보인다. 영화가 좋다 나쁘다는 평가도 아니고 형식과 내용의 조화를 문제 삼지도 않는다. 이야기를 하다보면 당연히 언급하게 되지만 미학적 혹은 인문학적 관점에서 영화의 코드를 뽑아내는 식이다. 가령 친숙한 영화 <슈렉>은 ‘쿨미디어의 뜨거운 하이퍼리얼 효과’로 읽어내거나 ‘과거를 현재화하는 문화적 기억’으로 <화려한 휴가>를 읽어내는 등의 방법이다.

  이 방법은 영화를 통해 다양한 상상력과 시대와 상황들을 읽어내는 담론을 즐길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지만 영화 자체에 대한 깊은 논의와 몰입의 즐거움은 얻을 수가 없다. 이것은 영화비평의 몫으로 남겨두는 저자의 방법은 타당해 보인다. 전문가 수준 이상의 영화리뷰와 다양한 매체를 통한 영화 분석에 진중권이 굳이 뛰어들 까닭이 없지 않은가. 누구든 자신의 영역과 전문 영역이 있고 그 특징을 가장 잘 살려낼 수 있어야 한다. 이 책은 그런 측면에서 진중권의 색깔을 가장 명확하게 드러내면서 또 다른 영화의 재미를 읽어낼 수 있게 하는 영화이야기 책이다.

  마셜 맥루한의 <미디어의 이해>부터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에 이르기까지 영화 장르와 접속할 수 있는 수많은 담론들이 난무하여 영화를 읽어내는 재미를 더해준다. 한 편의 영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에 관한 문제는 단순히 그것에서 무엇을 얻었는가와의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영화적 상상력과 재미라는 것은 서사의 즐거움과 시각적 효과만으로 전달되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드라마와 영화의 차이는 아닐까 싶다.

  영화의 죽음, 복제에서 생성으로, 서사의 파괴, 기술과 신체, 시각에서 촉각으로, 미디어와 권력, 이성과 광기, 해석에 반대한다. 영원한 소년, 기억으로서 역사 등 열 개의 장으로 나누어 서너편의 영화를 묶었지만 주제별로 묶였다기 보다 하나의 관점으로 엮였기 때문에 그 영화들의 공통점을 살피는 것도 또 하나의 재미다.

  저자가 이미 <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에서 보여주었듯이 영화 또한 예술적 상상력이 동원한 놀이에 불과하다는 관점에서 즐겨야 한다. 얼마나 깊고 다양하게 바라볼 것인가의 문제는 영화의 재미를 배가시키는 요소가 된다. 책 한 권에서 얻을 수 있는 효용과 즐거움이 영화 한 편으로 환산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은 아닐까? 일단 재미있는 영화를 봐야 얘기가 된다. 저자는 우연에 기대고 있다고 하지만, 이 책에 소개된 영화 리스트가 일단 반갑다. 피터 그리너웨이의 <영국식 정원 살인사건>에서부터 빔 벤데스의 <베를린 천사의 시>에 이르기까지.


090127-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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