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과 관련된 글에서 흔히 사용되는 NED라는 단어는 ‘질병의 증거 없음(No Evidence of Disease)'의 약어다. END, 즉 ‘질병 없음의 증거 (Evidence of No Disease)'라는 용어는 존재하지도 않는다. 나는 이 문제를 놓고 여러 의사들과 얘기를 나눠 보았는데, 상당수의 의사들이 이 같은 왕복 여행의 오류에 빠졌다. - P. 118


니체가 교양속물(buildingsphilister)이라고 꼬집었던 사람들, 학식 있는 속물들, 정신노동 분야의 블루칼라들은 당신이 박식하다고 부러워한다. 그러나 당신은 오히려 박식이라는 것이 자의적이고 인위적인 개념이라고 대답한다. 그래도 상대가 말뜻을 모르면 당신은 자신이 리무진 운전사라고 말해 준다. - P. 230

그러므로 동물보다 좀 더 고상한 삶으로 한 발짝 더 나아가기를 원한다면 이야기 짓기의 세계를 벗어나야 한다. 텔레비전을 끄고, 신문 읽는 시간을 줄이고, 인터넷을 무시하라. 경정을 내리는 이성적 능력을 훈련하라. 감각적인 것과 경험적인 것을 구분하도록 스스로를 훈련하라. 이렇게 함으로써 세계의 해악에서 벗어나면 보답을 얻게 될 것이니, 삶이 그만큼 풍요로워질 것이다. 덧붙여, 모든 추상적 개념의 어머니, 즉 확률에 관한 한 우리 인간이 천박한 존재임을 명심할 일이다. 우리는 주변의 사물과 사건을 더 잘 이해해 보겠다고 애쓸 필요가 없다. 가장 중요한 것은 ‘땅굴 파기’를 멈추는 일이다. - P. 233

예견의 문제에는 또 다른 측면이 있다. 즉 인간의 본성과는 관련이 없으되 정보 자체의 속성에 기인하는 고유의 한계가 그것이다. 앞서 나는 검은 백조 현상에 세 가지 속성이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예견 불가능성, 파급의 막대함, 사후 합리화 등이 그것이다. - P. 280

발명이란 골방에서 계획표에 따라 이것저것 조합한 끝에 얻어진 것이라고 여기는 사람이 있다면,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해야 한다. 발견과 발명의 대부분은 우연의 산물(serendipity)이다. - P. 283

정규분포곡선에 기초하여 불확실성을 평가하는 것은 불연속이고 급격한 비약이 일어날 가능성과 그 충격을 무시하는 것일 뿐 아니라, 극단의 왕국에서는 적용할 수도 없는 방법이다. 이런 식의 평가 방법을 채택하는 것은 풀밭만 들여다보다(거대한) 나무를 보지 못하는 우를 범하는 것과 같다. 비록 예견하지 못할 만큼의 대규모 편차가 발생하는 것은 희귀한 일이지만 그충격이 누적되리 경우 엄청난 결과가 나타날 것이므로, 극단점이라고 무시해 버려서는 안 된다. - P. 381

운명을 무시하라. 그 이후 나는 시간표에 맞춰 살겠다고 달음박질하지 않으려 애썼다. 테데스코의 충고는 사소한 것이지만 내 마음속에 자리 잡았다. 떠나는 기차를 쫓아가지 않게 되면서 나는 우아하고 미학적인 행동의 진정한 가치를 깨달았고, 자기의 시간표와 시간, 자기 인생의 주인됨의 의미를 느낄 수 있었다. 놓친 기차가 아쉬운 것은 애써 쫓아가려 했기 때문인 것이다! 마찬가지로 남들이 생각하는 방식의 성공을 이루지 못한다고 고통스러워하는 것은 남들의 생각을 추종했기 때문이다. - P. 463

인생의 기준을 스스로 설정할 수 있다면 이미 자기 인생의 주인 노릇을 하고 있는 셈이다. - P. 463

선물로 받은 말의 입을 열어 흠을 찾으려 애쓰지 말라. 기억할 것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바로 검은 백조라는 사실이다. - P. 4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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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도 이브도 없는
아멜리 노통브 지음, 이상해 옮김 / 문학세계사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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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사람에게 어린 시절이 있듯이 누구에게나 첫사랑은 아련하다. 그 사람을 누구인가로 규정하는 것은 개인의 선택이지만 애틋함이나 간절함은 홍역처럼 앓게 된다. 사랑의 방식도 다양하고 그 향기와 빛깔도 다르겠지만 소중한 기억으로 신화화하려는 노력은 비슷할 것이다. 의도적인 노력이 아니라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시간들에 대한 헌사라고 생각할 수 있다. 첫사랑은 누구에게나 그렇게 아득한 꽃잎처럼 흩어져 내리는 법이다.

  누구나 설레는 첫사랑에 대한 이야기. 아멜리 노통브의 신작 <아담도 이브도 없는>는 그 사랑 이야기를 쓰고 있다. 소설인지 일기인지 알 수 없는 사적인 내용으로 가득하지만 결코 지루하거나 심심하지 않은 것은 작가 특유의 패러디와 유머의 힘이다. 발랄하고 간결하며 깔끔하고 소박한 맛을 보여준다. 군더더기 없는 상큼한 문장은 의식적인 노력으로 만들어지지 않을 것 같다. 개성적인 문체로 드러나는 이 방식은 아멜리 노통브만의 분명한 목소리로 들린다. 선명한 자기 색깔을 가진 작가는 하나의 영역을 구축한 것이다.

  그것이 한계가 될 수 있는 우려는 그 다음 단계의 문제다. 개성도 없고 재미도 없는 소설은 견디기 힘들 것이다. 누가 두 번 다시 그런 소설을 읽겠는가. 함부로 작가의 노력과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옳지 않지만 그 수고로움을 예의로 참아줄 수 있는 독자도 흔한 것은 아니다. 아멜리 노통브의 성공에는 몇 가지 요소가 엿보인다. 대중성을 확보하기 위한 방법이 가벼움과 흥미라는 데는 이견을 달 수 없다. 일단 재밌고 쉽게 다가가야 한다. 그런 면에서 이 작가는 정확하게 포지션을 잡고 있다.

  현실을 비틀고 요리하는 솜씨가 만만치 않다. 문장들은 톡톡 튀며 웃음을 던져주고 다양하게 상황을 변주한다. 비유가 탁월하면서도 진부하지 않다. 매력적인 작가임에 틀림없다.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매년 보졸레 누보가 나오듯 1년에 한 권씩 소설을 써내는 그녀의 고정 독자층이 형성되어 있는 것이다.

  나는 열혈 독자는 아니다. <살인자의 건강법>을 비롯해서 몇 권을 읽었지만 기억이 가물거린다. 스무 살 언저리에 만났던 밀란 쿤데라 만큼 깊이 빠지지는 않는 모양이다. 하기사 지금 누구에게 깊이 빠질 수 있겠는가. 참 애매한 나이가 되어 버렸다. 어쨌든 객관적으로 매력적이지만 주관적으로 엄지손가락을 들어 줄 수는 없다.

  그녀의 열여섯 번째 소설 <아담도 이브도 없다>는 작가의 이력과 실제 삶의 궤적을 알고 있는 독자가 읽기에는 픽션과 넌픽션을 오간다는 느낌을 가질 만하다. 소설의 형식이 파괴된지 오래지만 그녀의 일기장을 훔쳐보듯 난감한 기분일 때가 많다. 마치 누군가의 사생활을 들여다보는 호기심 많은 사람이라면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 듯싶다.

  하지만 스무 살 남자와 스물 한 살 여자가 엮어내는 사랑과 이별의 과정을 감동적으로 읽어낼 재주가 이젠 내게 없어졌나보다. 아련한 환상과 추억들을 동원해 보아도 유추된 감정의 이입일 뿐 소설 속에 몰입할 수는 없었다. 사랑은, 특히 첫사랑은 소중하지만 지극히 개인적이고 구체적인 감정일 뿐 일반화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작가가 그걸 원한 건 아니겠지만 지극히 사적이고 특수한 상황으로 받아들여질 뿐이다.

  프랑스 여자와 부유한 일본 남자의 사랑. 그리고 이별. 작가가 된 여자의 일본 방문. 공교롭게도 프랑스 여자와 결혼한 일본 남자. 오랜만의 해후.

  가장 진부하고 대책 없는 재료를 가지고 이만한 요리를 만들어 낸 것은 작가의 역량이라고 보아야 하나? 이제 좀 천천히 쓰라고 충고라도 해야 하나? 아름답긴 하지만 감동적이지는 않는 소설이라고 말하면 가혹할까? 아무도 신경 쓰지 않겠지만 말이다.

  상황이나 인물과 무관하게 첫사랑을 만나는 과정이나 그 혹은 그녀와 함께 했던 시간들, 그 시간 속에 녹아 있는 떨림, 두려움, 애틋함 - 그 달콤 쌉싸름한 맛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진다면 이 소설은 성공이다. 개인적인 감정과 환상을 환기하거나 대리만족하고 싶은 사람에게 딱 어울릴 만한 소설이다.

  이국적이고 낭만적인 사랑 얘기를 싫어할 만한 사람은 없겠지만, 그것이 전부인 소설 또한 받아들일 사람이 많지 않을 것이다. 평가가 엇갈릴 수 있는 소설은 개인적인 취향에 맡길 뿐이다. 그녀의 전작들을 믿고 읽든가 각자의 후각에 맡기든가.


081219-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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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이 없는 십오 초 문학과지성 시인선 346
심보선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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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민한 철학자의 죽음은 사람들에게 안타까움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서정시인의 죽음은 사람들에게 슬픔을 준다. 서정시의 시대가 끝났다는 말이 끊임없이 반복되지만 여전히 서정시는 건재하다. 아니 더 이상 아무도 시를 읽지 않는다고 하지만 시는 계속 팔리고 읽히고 있다. 그것이 지적 허영과 자기 충족에 기인하든 흘러간 혹은 철지난 유행가처럼 소비되든 무관하게 시는 여전히 쓰여지고 있으며 팔리고 있고 읽히고 있다. 어쩌면 그것이 우리 시대의 가장 큰 비극이 아니겠는가.

  심보선의 <슬픔이 없는 십오 초>는 매력적인 제목을 달고 있다. 슬픔이 없다니? 그것도 십오 초? 저절로 손이 간다. 책장을 더듬고 어루만지다가 한 편씩 읽어 나간다. 음미하듯 천천히. 때론 빠른 호흡으로 넘기기도 하고, 때론 중간에 멈춰 긴 숨을 내뱉기도 한다. 어느 시집이든 그러하겠으나 여유와 안정이 없다면 시는 읽히지 않는다.

  심보선의 시는 익수하지만 생경하다. 인간의 감정이야 그리 큰 차이가 나지 않는 법이니 시에 담아낸 정서가 익숙하다는 말은 하나마나 한 말이다. 하지만 그것을 드러내는 방식이 진부해지기 쉬운 법. 조심할 것은 시인뿐이 아니다. 편안한 감상과 한 방울의 눈물을 원한다면 멜로드라마를 찾아 볼 일이다. 시를 통해 우리가 확인해야 하는 것은 비극과 절망이다. 희망과 기쁨은 그것을 둘러싼 후광처럼 자연스럽게 빛을 발한다.

  그러 면에서 심보선의 시는 메마름과 극단적인 슬픔이 주는 간절함이 없다. 그래야 좋은 시라는 말과는 다르지만 개인적인 취향과는 조금 거리가 있다. 정호승의 <새벽편지>나 <서울의 예수>는 이제 더 이상 울림을 전하지는 않는다. 오래 전 지나간 시간들에 대한 아련한 추억을 전해 줄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내 언어에는 세계가 빠져 있다
그것을 나는 어젯밤 깨달았다
내 방에는 조용한 책상이  장기 투숙하고 있다

세계여!
영원한 악천후여!
나에게 벼락같은 모서리를 선사해다오!

설탕이 없었다면
개미는 좀더 커다란 것으로 진화했겠지
이것이 내가 밤새 고심 끝에 완성한 문장이었다.
- ‘슬픔의 진화’ 중에서

  서시에 해당하는 ‘슬픔의 진화’ 중 일부다. 낯설게 하기와 새로운 시야의 확보는 시인의 전매특허이리라. 밤새 고심한 결과가 독자에게 닿지 않는 것에 대해 고심해야 한다. 독자를 위해 시를 쓰는 존재가 아니라는 데야 할 말이 없어지겠지만 생경한 시선 만으로 채워지지 않는 시절이 벌써 당도해 있었다.

그리고 어떤 결정적인 구토의 연도
내 몫의 비극이 남아 있음을 안다
누구에게나 증오할 자격이 있음을 안다
오늘 나는 누군가의 애절한 얼굴을 노려보고 있었다
오늘 나는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됐다
- ‘오늘 나는’ 중에서


  차라리, 철저하게 진부한 ‘오늘 나는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됐다’는 말은 무겁고 끈적하지만 군더더기가 없다. 누구나 하루치의 인생을 열심히 살아내지만 그 안에 담긴 문법들은 제각각이다. 상대적인 시간의 양과 담아내지 못한 슬픔들을 무엇으로 말할 수 있을까. 하루의 피곤이 덕지덕지 붙은 얼굴로 돌아가는 사람들에게 남겨진 비극과 증오는 무기가 될 수 없다.

  오늘 나는 누구의 얼굴을 노려보았나? 오늘 나는 누구를 사랑했나?

전날 벗어놓은 바지를 바라보듯
생에 대하여 미련이 없다
이제 와서 먼 길을 떠나려 한다면
질투가 심한 심장은 일찍이 버려야 했다
태양을 노려보며 사각형을 선호한다 말했다
그 외의 형태들은 모두 슬프다 말했다
- ‘아주 잠깐 빛나는 폐허’ 중에서

현기증이 만발하는 머릿속 꿈 동산
이제 막 슬픔 없이 십오 초 정도가 지났다
이디로든 발걸음을 옮겨야 하겠으나
어디로든 끝간에는 사라지는 길이다
- ‘슬픔이 없는 십오 초’ 중에서

  순간을, 아주 잠깐에 대해 말하는 시를 우리는 자주 발견한다. 그것은 찰나의 인상이 주는 기쁨이자 행복이다. 순간을 영원으로 기억하고 싶은 강렬한 충동과 그만큼 짙은 향기를 담보하기도 한다. 생에 대한 미련도 없고 슬픔도 없다면 그것이 가능하다면 원하는 사람이 있을까?

  천국이라고 말하는 곳에는 미련도 슬픔도 어떤 구체적인 형태를 띠고 존재하다가 사라지게 될지 모르겠다. 하지만 존재하는 모든 것은 소멸한다. 사라진 자리에는 흔적조차 남겨지지 않는다. 그것이 사람이든 사물이든 말이다. 비어가는, 사라지는 과정 속에서 흔들리는 불빛을 응시해 보자. 과연 누가 생의 슬픔에 대해 함부로 말할 수 있는가를.

구름이 내게 모호함을 가르치고 떠났다
가난과 허기가 정말 그런 뜻이었나?
- ‘착각’ 중에서

이제껏 도약을 꿈꿔본 적 없다
다만 사각형의 문들이 나를
공허에서 공허로
평면에서 평면으로 옮겼다
- ‘전락’ 중에서

  끊임없이 욕망을 부정하지만 그것은 거짓이다. 도약을 꿈꿔본 적 없는 인간이 있을까. 평면에서 옮겨지든 입체에서 평면으로 옮겨지든 그것은 크기의 차이일 뿐이다. 우리는 현실에서 그것을 ‘전락’이라고 말하지만 시에서는 ‘공허’라고 말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그리움과 안타까움은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법이다. 가난과 허기라니. 사랑과 슬픔처럼 동어반복으로 들리는 말이다.

  피와 눈물에 대해 그리고 생활과 심연에 대해, 그 바닥에 대해 한참 들여다 보고 있는 시인의 시들은 커다란 울림보다 작은 메아리에 머물고 있다. 슬픔이 없는 십오 초는 현실 밖에 존재하는 우리들의 영원한 꿈일지도 모른다. 도약을 꿈꾸어도 현실을 부정해도 흔들림없이 언제나 그 자리에서 우리에게 외치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구름처럼 모호하게. 그 소리는 이명처럼 들리다가 들리지 않다가, 보였다가 보이지 않았다가. 그렇게 사라진다. 모든 것이.


081216-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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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는 일본의 요시노 히로시라는 살마이 쓴 「생명은」이라는 제목의 시 한 편을 볼 기회가 있었는데, 그 안에 “생명은 그 가운데 결여를 안고, 이것을 타자가 채워주는 것이다”라는 구절이 있었습니다. 생명 곧 ‘낱생명’은 본질적으로 불완전한 것이어서 결여를 안고 있는데, 그것을 타자 곧 그 ‘보생명’이 채워준다는 저의 온생명이론을 아주 실감 있게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것들이 같이 가야 한다고 봅니다. - P. 58(장회익)

현상은 보는 위치에 따라 달리 보입니다. 그래서 보는 위치 곧 기준좌표의 전환에 따라 사룸이 어떻게 달라 보이는지를 분명히 구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을 좌표변환이라고 하는데, 여기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없으면 내게 보이는 것만 옳고 남이 다른 위치에서 달리 보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 P. 59(장회익)

여기서 중요한 점은 좌표변환이라는 것이 결코 간단한 작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또한 일상생활 속에서 늘 좌표변환을 통해 상대방의 입장을 이해하가며 살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내가 좌표변환을 해보는데도 상대방의 태도가 납득되지 않을 때 상대방이 틀렸다고 판정하고 분쟁이 발생합니다. 여기서 상대성이론이 주는 교훈은 내가 하는 좌표변환 그 자체가 불완전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그 간단한 물리현상들조차 4차원의 좌표변환을 해야 제대로 이해가 되는데, 복잡한 사회현상들이 단순한 상식차원의 좌표변환만으로 처리될 수 있을지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아마도 4차원 못지않은 고차원적 좌표변환이 요구될 것으로 보고 이 점에 대해 서로 간에 힘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 P. 60(장회익)

이분법적 양극화현상들인 전통과 혁신, 한반도의 세계, 보수와 진보, 남과 북, 동과 서, 빈 부, 아니든 세대와 젊은 세대 갈등 등이 불가피해 보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를 해소하기 위해 새로운 포월(匍越)의 전략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탈(脫/post-), 가로지르기(cross-), 사이(inter-), 횡단(trans-)의 전략들이 바로 그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와 문화는 학제적(interdisciplinary), 융합적(fusionist), 통섭적(consilient)이라는 말들이 가장 적합한 핵심어가 아닐는지요. - P. 76(정정호)

민주주의도 하나의 통치체제이기 때문에 권력이 민주주의를 통해 창출됐다고 하더라도, 그것 또한 권력이기 때문에 민주주의제도를 통해 견제되고, 민주적으로 통제될 수 있어야 합니다. 즉 권력의 창출과 권력의 견제는 민주주의의 두 개의 기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P. 118(최장집)

문학론에서도 문맥은 텍스트의 의미결정에 참여하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콘텍스트가 텍스트의 의미를 좌우하는 수도 많지요. - P. 211(도정일)

인간의 사상, 생각, 아이디어가 그처럼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죠. 그들의 ‘생각’이 아니었다면 근대 민주주의, 자유, 인권, 평등은 불가능했거나 한참 더 기다려서야 가능했을 겁니다. 사유와 행동, 지식과 실천을 결합하는 것이 인문학적 실천이고 이런 실천은 지금 이 시대에 절실한 요청이 되고 있습니다. - P. 231(도정일)

하나의 개념은 다른 여러 개념과의 연쇄 속에서만 진실에 가까이 간다는 것입니다. 하나만으로는 진리의 왜곡이 일어나지요. 통일을 절대화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 P. 261(김우창)

“답은 문제에서 나오기 때문에 문제를 어떻게 설정하느냐가 가장 중요하다” - P. 293(김우창)

종교의 문제 중 하나는 사람의 마음이나 존재를 열어주는 게 아니라, 어떤 도그마에 갇히게 하는 측면이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사람들에게 종교에 대해서 유보를 가지게 하는 이유의 하나일 것입니다. … 말이나 도그마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거나, 포괄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태도는 우리가 겸허하게 삶의 사실을 과학적으로 이해하는 데에 필요합니다. - P. 321(김우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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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환의 모색 - 우리는 어디에 있으며, 무엇을 할 것인가
장회익.최장집.도정일.김우창 지음 / 생각의나무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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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시대를 규정하는 것은 말이 아니라 사람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역사에서 어느 시대를 이야기하든 사람을 떠나서 불가능하다. 역사가 인물 중심이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사회적 맥락과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서 빚어내는 결과물이 우리들의 역사라는 말이다. 역으로,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사회, 문화, 정치, 경제 등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해 낸다. 그 결과물들이 시대정신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법과 제도는 한 사람에 의해 만들어질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수의 의해 모든 것이 결정되어 온 것이라고 할 수도 없다.

  소위 지식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은 시대를 성찰하고 새로운 삶의 방식에 대해 고민하며 인간의 지적 토대위에 미래를 설계하기도 한다. 사르트르는 <지식인을 위한 변명>에서 보편성과 일반성적인 지식을 추구하는 지식인들이 특수한 계층에 기댈 수밖에 없는 모순된 상황을 꼬집었다. 결국 지식인의 기능과 역할은 이러한 자기 계급의 모순성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말이다. 실천적 지식인이 필요하고 그 지식과 실천의 방향이 누구를 향한 것이며 어디에 그 지식이 사용되어야 하는지 너무나 자명한 사실이다. 그런 면에서 나는 늘 이 시대의 지식인이 아쉽다.

  존경할 만한 지식인을 가진다는 것은 그 사회의 축복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사회의 역량과 토대에서 길러지는 지식인의 수준은 단순한 주입식 교육이나 물적 토대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고 다시 태어나는 새처럼, 비상하기 위해서는 젖은 날개를 파닥이며 잠을 깨어야 한다. 잠들어 있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우리의 현실은 얼마나 또 절망적인가.

  모든 시대는 혁명을 배태하고 있으며 그 선택은 다수에게 있지 않았다. 전환을 모색하는 것은 소수였으며 그것을 추동할 수 있는 저력은 성찰과 신념으로부터 비롯된다. 통찰력은 저절로 생성되지 않는다. 의식적인 노력과 고통이 필요하다. 희망을 이야기하려면 고통과 절망의 얼굴과 대면해야 하는 법이다.

  이 시대에 <전환의 모색>은 어울리지 않는다. 아니 모든 시대에 전환을 모색해 왔다. 문제는 시기가 아니라 방법과 태도가 아닐까. 전환해야 한다는 인식으로부터 전환은 시작된다. 그럴 필요가 없다고 믿는 사람들에겐 어불성설일 뿐이다. 아니, 이전시대로 전환을 모색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작금의 현실을 보면 전환은 미래지향적이어야 한다는 기준 자체가 흔들린다. 과거로 돌아가는 것도 전환은 전환이니 말이다.

  인권은 축소되고 기업가는 살만하며 부자는 세금을 돌려받는다. 생각의 전환은 사물을 보는 방향과 목적부터 달라지게 한다. 과연 우리 시대는 전환인 필요 하느냐는 질문부터 마땅히 시작되어야 하는건 아닌가 싶다. 대담집 <전환의 모색>은 전제부터 잘못된 것은 아닌가 하는 한심한 투정부터 나온다. 그들(?)의 눈에 전환이 무엇으로 그리고 어떻게 비춰질 것인지도 궁금하다는 말이다.

  ‘온생명’ 사상을 주장하는 장회익, 민주주의는 곧 부패할 것이라고 말하는 최장집, 시장 유일주의에 대해 경고하는 도정일, 인간 실존의 구체성과 보편성을 탐구하는 김우창 등 이 시대의 지식인이라 할 만한 분들의 이야기는 특별하지 않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게 읽혔다. 몰라서 실천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 방법론과 실천적 의지가 부족한 것이라는 생각이 앞선다. 아니 어쩌면 그것들을 합의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하겠지만 그것은 초등학교 때 이미 배운 것들에 대한 덧칠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

  학문적 관점에서 그들의 사상과 의식의 흐름들을 살펴보는 일은 즐겁다. 대담자로 나선 분들도 각 분야에서 치열하게 고민하고 충분한 학문적 성과를 일구어 내고 있는 사람들이다. 어쩌면 그들이 네 분을 이어갈 만한 지식인이라 불리워질 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단순한 학력과 지식수준을 말하는 게 아니다. 세상을 통찰하는 눈과 그것을 만들어나가는 힘, 실천하는 태도를 말하는 것이다. 쉽지 않겠으나 이 시대는 영웅보다 작더라도 주변을 바꾸어나가는 리더가 많이 필요한 시대라고 본다.

현상은 보는 위치에 따라 달리 보입니다. 그래서 보는 위치 곧 기준좌표의 전환에 따라 사룸이 어떻게 달라 보이는지를 분명히 구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을 좌표변환이라고 하는데, 여기에 대한 분명한 인식이 없으면 내게 보이는 것만 옳고 남이 다른 위치에서 달리 보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 P. 59(장회익)

  일상에서 흔히 벌어지는 일이고 나는 좌표변환에 자신 있다고 생각했지만 상식 차원의 좌표변환만으로는 어림없다는 이야기에 가슴이 뜨끔했다. 아직 멀었다는 자괴감. 당연한 것에 부끄러움을 느낀다는 것은 지나친 자신감이 아니었을까 하는 반성을 해본다. 이 좌표변환의 힘은 자연스럽게 형성되지 않는다. 그것이 가능한가 그렇지 않은가에 따라 사람을 분류하는 오랜 버릇이 내 안에 있다. 열린 사람과 닫힌 사람으로 구별하기도 하는데 그 기준과 가능성에 대해 한참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현실에서 우리가 겪게 되는 상황뿐만 아니라 이 사회와 정치, 세계가 움직이는 방향과 사유의 흐름을 읽어내는 것은 쉽지 않다. 지식인은 이것을 쉬운 말로 안내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그것이 지식인의 책무이다. 권력과 지위를 얻고 개인적인 이익과 특수한 계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지식인을 우리는 쓰레기라고 불러 마땅하다. 그 기준과 잣대를 분명히 하고, 실천적 지식인을 분명하게 구별하는 태도가 정착된다면 함부로 정치판에 뛰어들거나 권력의 부나비가 되는 일은 없지 않겠는가. 정치와 지식인의 관계, 권력에 복종하는 지식인에 대해서는 단순하게 말할 수는 없다. 가장 효율적인 현실 개혁의 방법으로 선택한 선한 의지가 있을 수 있지만 개혁의 목적과 방식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점검할 필요가 있다.

  이 책은 네 사람의 대담을 모아 놓았기 때문에 육성을 듣는 효과와 대담 형식의 자유로움을 특징으로 한다. 그러나 집중력이 흐려지고 다양한 주제를 넘나들지만 깊이 있게 만족할 만한 수준까지 다루지 못한다는 당연한 한계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회오리같은 대선 정국이었던 2007년에 이루어진 대담이라는 시기상의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전환을 모색했지만 현실은 눈뜨고 볼 수 없어진다.

  ‘우리는 어디에 있으며,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부제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우리’를 ‘나’로 바꿔놓고 읽으니 막막하기만 하다. 걷고 있지만 저 멀리 불빛이 보이지 않는다.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리고 별빛이 그 길을 훤히 밝혀 주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라는 게오르그 루카치의 말은 이 시대에도 기묘하게 적용된다.

“답은 문제에서 나오기 때문에 문제를 어떻게 설정하느냐가 가장 중요하다” - P. 293(김우창)

  답을 구하고 싶은 시대가 아니라 문제를 설정해야 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하지만 서로 다른 문제를 들고 뛰어나와 서로 다른 목소리로 외치고 있으며 그 목소리를 외면하는 다수의 사람들이 섞여 있는 우리의 모습은 쨍한 겨울 하늘처럼 차갑기만 하다. 대담은 대담으로 끝났다. 아무도 답을 주지 않는다. 스스로 답을 구해 볼 밖에. 답을 구하기 전에 문제부터 만들어보자.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081214-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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