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일기
이승우 지음 / 창비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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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은 부재를 통해 그 존재를 가장 잘 드러낸다. - P. 17

  흑백 사진처럼 선명한 기억은 부재를 증명한다. 현존하지 않는 모든 것들이 그리움을 만들어 내듯이. 우리에게 지나간 시간은 다가 올 미래보다 찬란하다. 과거지향형 인간이 아니더라도 내가 발 딛고 서 있는 모든 것들은 과거의 결과물이라는 것임을 절감한다. 이 모든 삶의 비극은 일회성에서 비롯된다. 다시 돌이킬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아쉬움 혹은 간절함.

  단 하나의 문장으로 사유의 실타래가 자연스럽게 풀어지고 상황과 맥락에서 벗어나 몽환적 상상의 세계를 주유한다. 그래서 나는 소설을 읽다 창밖을 내다보며 하늘을 쳐다보고 길게 한숨을 쉬기도 한다. 고개를 끄덕이고 낄낄거리며 책장을 넘기는 즐거움을 무엇과 바꿀 수 있을까. 소설은 사건 전개의 흥미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지만, 어쩌면 그것은 아주 작은 부분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승우의 소설집 <오래된 일기>는 빛바랜 누런 일기장의 표지를 들추는 것처럼 아득하다. 타인의 삶이 보여주는 진정성을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는 그의 소설은 아름답진 않지만 독자를 사유의 세계로 안내한다. 과연 우리들 삶의 결에 배어있는 무늬들은 어떠한가. 수많은 빗금들과 켜켜이 내려앉은 먼지들 사이로 오래된 일기장을 넘기는 마음으로 그의 소설들이 읽혔다.

  소설집을 읽고 나서 다시 차례를 보면 단편의 제목들과 내용이 뒤섞이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이 책의 단편들은 선명하게 떠오르며 각 단편들이 분명한 목소리를 내고 있다. 충격적이고 특이한 사건들이 모여 독자에게 각인되는 소설들은 아니다. 소설 속 주인공들이 평범하고 전형적인 인물이 아닌 것은 분명하지만 사실 우리 주변에 평범한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찬찬히 들여다보면 각양각색의 인간 군상들이 모여 사회를 이루고 서로 부대끼며 상처받고 아파하며 서로 위로 받기도 한다.

  이 책에는 8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등장인물들은 ‘불행’의 친구들이다. 하지만 그 불행이 낯설지도 이물스럽지도 않은 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건 아마도 우리들 마음속에 똬리를 틀고 있는 보이지 않는 것들을 잘도 들춰내기 때문일 것이다. 세계는 부조리하다. 인생은 불편하며 삶은 신산스럽다.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운 우리들의 마음과 근원적인 외로움에 대해 불편한 심사를 드러낸다. 그 목소리는 불협화음이다. 행복을 가장한 생의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불행의 그림자들에 대해 생각해 보자.

  우리는 모두 행복을 기원하지만 아무도 불행의 밑바닥을 들여다보려 하지는 않는다. 그 원인과 과정을 정면으로 바라볼 자신이 없기 때문은 아닐까. 이승우는 그 마음들을 온몸으로 보여주는 인물을 보여준다. 나는 그들이 불편하지만 마음 한 구석이 애련하다. ‘오래된 일기’의 규가 그렇고 ‘무슨 일이든, 아무 일도’의 상규가 그러하다.

  ‘타인의 집’의 그녀는 ‘나’를 볼 수 없다. 세상은 거미줄처럼 얽혀있고 타인의 고통과 불행을 인식할 수 없다. 공감이라는 심리적 배려가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은 유추를 통해 그 마음을 짐작하는 정도에 불과하다. 나는 너가 될 수 없고 너는 나의 마음을 알 수 없다는 기본전제를 부정할 때 불행이 시작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전기수 이야기’와 ‘실종 사례’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사회 구조적 모순 속에 불행을 맞이하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본질적이고 근원적인 외로움과 내가 알지 못하는 나의 모습이 아니라 타인과 사회 속에서 겪게 되는 불행에 대해서는 속수무책일 때가 많다. 물론 작가는 그 불행을 맞이하는 사람들의 태도에 주목한다. 어떤 모습으로 그리고 어떤 자세로 그것을 맞이하느냐에 따라 우리 인생은 어쩔 수 없는 것과 있는 것으로 나뉜다. 인간의 의지로 감당할 수 없는 운명에 대해 혹은 불가해한 불행에 대해 성찰하기도 하는 것이 ‘방’의 할머니일 것이다.

  이 책의 말미를 장식하는 ‘정남진행’과 ‘풍장-정남진행2’는 만남과 떠남이라는 아주 오래된 주제를 변주하고 있다. 정동진이 아니라 정남진이라는 다소 생경한 공간을 통해 호기심을 유발하고 그곳에 가고 싶은, 그러나 가지 못하고 죽은 여자와 그곳을 벗어나지 못하고 ‘가슴앓이’라는 특이한 이름의 섬의 일부가 되어 버린 남자는 과거와 현재 속에서 씨줄과 날줄처럼 교차한다. 그것은 내게 운명과 우연의 차이로 읽혔다. 숙명처럼 느껴지지만 사실 인생은 ‘그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고 우연의 연속으로 이루어진 재미없는 연극일 뿐!

“내가 너에게 무슨 짓을 한 거지?” 나는 신음처럼 내뱉었다. 나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누군가 나로 인해 아파하는 사람이 있다면 내가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이 떳떳한 일일까. - P. 34

  그래서 문득 아무 짓도 하지 않은 것이라는 깨달음. 한없이 겸손해지고 한없이 작아지고 한없이 주위를 돌아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이 세상에는 단 한 사람도 떳떳한 사람이 없다는 비극의 확인. 오늘도 우리는 세계의 불행과 직면했으며 하루를 살아냈다. 소설가는 운명적으로 그 불행에 대해 말해야 한다면 이승우는 그 역할에 충실했다. 독자는 <오래된 일기>를 통해 작가의 일기를, 아니 우리가 차마 쓰지 못한 일기의 행간을 읽어내야 한다. 그것이 작가가 보여주려 했지만 우리가 읽지 못한 이 책의 나머지가 될 것이다.


08121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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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겹도록 고마운 사람들아 - 이소선, 여든의 기억
오도엽 지음 / 후마니타스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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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은 어쩌면 기억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가장 오래된 저장 장치일 것이다. 기록은 기억을 지배한다는 말이 있다. 누구나 아득한 기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지만 그 기억들이 고스란히 내 것인 경우는 없다. 편집되고 채색되며 과장되거나 축소되는 과정을 거치게 마련이다. 누구에게나 과거는 있다. 하지만 그것은 아름답게 혹은 지나치게 주관적으로 해석된다. 사실, 객관적 기억이란 건 없다. 심리적인 기재가 작동하기도 하고 왜곡된 감정이 개입되기도 해서 비틀어지고 희미하며 모호하다.

  한 사람의 삶이 고스란히 한 시대의 역사가 되는 경우, 우리는 그 삶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개인의 삶에 앞서 공적인 기록이며 기억할만한 역사이기 때문이다. 1970년 11월 13일 청계피복 노동자 전태일은 온몸에 불을 지른 채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고 외치며 죽어갔다. 그의 어머니 이소선은 아직도 살아있다. 그녀의 구술을 기록한 <지겹도록 고마운 사람들아>를 읽다가 여러 번 목이 메었다.

  이제는 할머니가 되어버린 이 시대 어른의 기억이 아니라 이 땅의 모든 노동자들의 어머니가 간직한 기록이고 역사이다. 신산스런 시대의 아픔이고, 피눈물로 새겨들어야 할 이야기들이다. 굴곡진 현대사의 한복판에 서 있던 모든 사람들 중에서 그녀를 주목해야 하는 것은 ‘전태일’이라는 이름이 가진 상징성 때문이다. 한 순간 불꽃처럼 살다 가버린 아들에 대한 부채감으로 살아온 세월의 무게가 견디기 힘들어 보인다. 어떻게 살아도 한 세상이었겠지만 그녀가 감당했던 모진 시간들 앞에서 저절로 경건하고 숙연한 마음을 갖게 된다.

  “엄마, 배가 고프다…….”는 전태일의 마지막 말에 엄마 이소선은 얼마나 가슴이 무너졌을까. 이땅의 가난한 노동자들이 가져야했던 당연한 권리와 당연한 임금을 우리는 경제발전이라는 말과 맞바꾸었다. 참 많은 사람들이 배가 고팠고 고통스러웠으며 말하지 못했고 잠들지 못했던 시간들을 견뎌왔다. 그 중심에서 우리들의 어머니 이소선은 묵묵히 그들에게 밥을 먹이고 혹독한 시간들을 살아냈으며 이제는 여든의 노인이 되어 지나간 시간들을 말하고 있다.

  구술한 내용을 정리해서 이 책을 쓴 오도엽은 ‘인간의 역사란 망각에 저항하는 기억의 투쟁’이라는 말로 이 책의 의미를 갈음한다. 우리들의 기억에 한계가 있다면, 그것이 언젠가 망각의 강을 건너기 때문에 우리는 역사라는 이름으로 그것을 기록한다. 이 책은 이소선 개인의 기억이 아니라 노동운동의 역사이며 잊어서는 안 되는 이 시대를 살아 낸 노동자들의 기억이다.

  전태일기념사업회에 찾아갔다가 이소선의 마지막이 아니겠냐는 인사가 인연이 되어 이 책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책의 앞부분에는 이소선의 날 것 그대로의 목소리가 그대로 구술되어 있다. 너무나 정감있고 친근한 그 목소리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할머니의 말투다. 그러나 그녀가 살아온 시간이나 지나온 흔적들은 결코 평범하지 않다. 남자도 감당하기 힘들었을 고통과 시련들을 견뎌낼 수 있었던 그녀의 힘은 무엇이었을까 책을 읽는 내내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의문이었다.

  가난한 날의 질긴 인연으로 결혼하고 전태일을 낳고 쌍문동에서 살다가 아들에게 근로 기준법을 배우고 그 아들을 먼저 보낸다. 그 이후 이소선의 삶은 많이 달라진다. 생활환경이 바뀐 것이 아니라 태일이 대신 아들들이 더 많아졌다. 가난에서 벗어난 것이 아니라 마음이 넉넉해졌다. 세상을 보는 눈이 넓어졌고 이 땅의 노동현실을 바로 보게 되었다.

  2008년에 이소선의 기억들을 더듬어 가는 것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에서 받아주지도 않는 현실이 되었다. 노동자들 사이에도 계급이 생긴 것이다. 국민 총생산은 늘었고 굶어 죽는 사람은 많지 않지만 부의 분배 문제와 노동 문제는 여전히 폭력적이다. 기륭전자, KTX 여승무원 문제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현재 진행형으로 이소선의 기억이 지속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얼마 전 하종강 선생님께 인사를 드리고 악수를 하다가 울컥했다. 몸이 약해지고 나이가 들어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이치다. 하지만 멀리서만 바라보던, 일당백의 역할을 해 오신 그분들의 모습은 이제 우리 시대가 기록해야 한다. 그분들이 떠나고 난 빈자리를 또 다시 이 땅의 후배들이 채워나가야 한다. 아니 어쩌면 그 자리를 더 이상 채울 필요가 없는 시대가 와야한다.

  그러나 이 시대를 돌아보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끝을 알 수 없는 무한경쟁 시대, 신자유주의 물결과 세계화는 양극화만 심화시키고 있다. 예를 들어 발 빠른 종부세 환급 등의 정책은 역사가 기억할 것이다. 누가 뽑은 대통령이며 누가 만들어준 정부인지 국민들은 기억이나 하고 있을까?

  영화 <월․E>에서 이브가 고장난 월․E의 부품을 갈아 끼우자 잠시 기억을 잃는 장면이 나온다. 기억은 그런 것이다. 살아온 삶의 무늬가 우리의 정체성이고 역사의 흔적이다. 그 딱딱하고 거친 숨결이 우리들의 기억이며 과거이다. 현재는 과거의 꿈이었고 미래의 흔적이 될 것이다. 지금 우리가 만들어가는 이 시대의 삶은 수많은 이소선에게 빚지고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소선의 여든이 기억하는 것은 현재와 미래가 아니라 오로지 과거였다고 믿고 싶은 것은 순진한 꿈에 불과하다. 현실은 혹독하다. 다만 ‘희망’이라는 환각제를 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니 우리들의 어머니 이소선의 기억을 통해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꿈 꾸어야 하는 의무가 있다. 우리에겐.

  언제가 떠나게 될 많은 사람들의 기억이 또 하나의 역사가 되고 지나간 시간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의심할 필요조차 없다. 개인의 미시적인 관점이 모여 역사가 된다. 대통령의 행적과 외교 문서가 아니라 바로 이소선의 삶의 흔적, 시대에 대한 기억이 역사와 기록의 가치를 지닌다고 믿는다. 우리는 더 많은 이소선들을 읽으며 현재를 확인해야 한다. 내가 서 있는 곳은 바로 그들이 만들어 낸 작은 진보의 발자국일 뿐이다. 그 흔적들을 돌아보고 발자국의 방향을 따라 걷는 것조차도 힘든 시대가 슬픔으로 다가온다.


081207-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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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뇌가 나를 움직인다 - 겉으로 보기엔 너무나 정상적인 사람들, 그들을 갑자기 돌변하게 만드는 마음 속의 숨겨진 욕구 5가지
데이비드 와이너.길버트 헤프터 지음, 김경숙.민승남 옮김 / 사이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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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들의 가슴 속엔 아이히만이 숨어산다.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보면서 나는 ‘악의 평범성’이란 말에 동의하고 말았다. 숨 쉬는 공기처럼 보편적인 이드는 에고를 지배한다. 끊임없이 길들여지고 교육받고 사회화의 과정을 거치지만 단 한 순간도 우리는 ‘비정상(?)’에서 자유롭지 않다. 평생 동안 실수하지 않고(?) 사는 사람은 없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순간순간 질서와 규칙에서 벗어나고 상식에 어긋난 생각과 행동을 하기도 한다. 그래서 인간은 영원히 불완전한 존재일 수밖에 없을까?

  기준이 모호하지만 우리가 정상에서 벗어났다는 말은 사회적 합의나 다수가 정해놓은 기준을 벗어났다는 말을 의미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은 이성적 판단이나 신념에 의해 행동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한 사람이 평소에 보이던 행동이나 생각에서 벗어나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일을 저지르는 경우를 우리는 주변에서 흔히 본다. 지나고 나면 본인 스스로도 왜 그랬는지 모르는 행동의 원인에 대해 궁금한 적이 있다면 <미친 뇌가 나를 움직인다>는 몇 가지 예시 답안을 제공해 줄 것이다.

  사람들은 환경과 유전으로 나누어 인간의 본성에 대해 아직도 논쟁중이다. 하지만 어느 한 쪽의 손을 들어 줄 수가 없다. 여전히 교육과 환경에 따라 인간은 만들어지는 존재이기도 하고, 유전적인 특성과 본능을 어쩌지 못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본래 태어나는 부분과 만들어지는 부분이 프로그래밍 되어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인간이란 존재, 특히 그 존재의 정체성을 만들어내고 행동을 지배하는 뇌에 대한 관심은 점차 증가하고 있으며 그 영역의 특성들에 대해 더 많이 알려지고 있다. 빠른 속도로 비밀이 밝혀지면서 우리의 생각과 행동의 원인과 결과에 대해 살펴보는 일은 <털없는 원숭이>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힌다.

 성선설과 성악설 그리고 백지설 사이에서 헤매기도 하지만 통상적으로 우리는 사회화 과정이나 교육을 통해 본능적 자아의 욕망들을 억압하고 타인을 배려하고 질서와 규칙들을 내면화한다. 이 과정에서 성격과 삶의 가치가 내면화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드의 지배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때때로 에고의 통제에서 벗어난 행동을 한다. 파충류의 뇌에서 변연계가 발달하고 다시 신피질이 둘러싸는 과정은 인간이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과정을 거쳤다. 이 변연계의 욕구는 쉽게 억제되지 않고 일상생활에서 말도 안되는 생각과 행동을 유발하는 것이다.

  이 책에서는 누가 보아도 겉으론 평범하고 정상적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돌변하는 이유를 찾는데 모든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즉 ‘원시적인 뇌’인 변연계와 ‘이성적인 뇌’인 신피질의 치열한 접전은 생존 기간 내내 인간의 뇌를 지배하는 싸움을 벌인다. 고집스럽고, 완고하고 원시적인 ‘이너 더미inner dummy'가 존재하는 것이다. 이 책은 바로 이 이너 더미의 존재를 밝히는데 주력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마음 속에 숨겨진 다섯 가지 욕구는 권력, 영역, 성, 애착, 생존에 대한 것이다. 각각의 욕구가 어떻게 발현되며 이것이 어떤 형태로 드러나는지 잘 설명하고 있다. 각 단계별로 1단계에서 10단계까지 사람마다 다르게 나타난다. 단계를 측정할 수 있는 설문지를 제공하는 것도 흥미롭다. 직접 사이트에 들어가 자신의 욕구 단계별 특성을 확인할 수 있어 어느 욕구가 어느 정도의 단계인지 알 수 있다. 단순한 심리 테스트와 달리 변연계에서 벌어지는 전쟁 상황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 이 책의 특징이다.

  그 욕구들이 어떻게 실생활에서 드러나는지 어떻게 충돌하는지 살펴보고 욕구의 형성 과정을 돌아보며 분노와 복수, 정신적 벌에 대해서 알아본다. 문제는 우리 안의 이너 더미를 치유할 수 있는가일 것이다. 저자는 이 방법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비이성적인 관점과 행동을 변화시키고 치료하는 방법을 설명하고 있는데 실제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례들을 보여준다. 환경을 변화시키고 자아를 방어하고 관점을 바꾸는 방법은 단순한 흥미 위주의 책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심리학자와 정신의학자의 공동 집필이 시너지 효과를 얻고 있다. 실제 생활에서 자주 부딪히는 문제들을 정확한 분석과 이론을 토대로 설명하고 있는 이 책의 원제목은 ‘Battling the Inner Dummy: The Craziness of Apparently Normal People'이다. 주목받기 위해 흥미로운 제목을 달았지만 원제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어쨌든 이 책은 다양한 심리학 서적 속에서 진지하게 성찰할 만하다.

  순간순간 변연계의 본능적 욕구를 제어하지 못하고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는 사람들, 단 한 번의 믿지 못할 실수로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받은 사람들, 마음속의 숨겨진 욕구들 때문에 괴로운 사람들은 이 책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고 그 치유 방법까지 고민해 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081205-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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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철학은 무엇인가 - 근대, 이성, 주체를 중심으로 살펴본 현대 한국 철학사
강영안 지음 / 궁리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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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한국적 철학의 풍토는 척박하기만 하다. 얇고 빈약한 사상의 토대를 둘러보면 관객의 입장에서 비판과 냉소를 보내는 것과는 다른 허전함이 느껴진다. 대부분 서양 사상의 번역 소개에 바빠 보인다. 지식인의 지도를 그려나가며 철학자들의 역할과 한계를 확인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지적 토양의 기저에는 항상 철학이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 토대는 허약하기 이를 데 없다. 개인적인 소회이긴 하겠지만 풍부한 지적, 학문적 토양이 형성되어 있다고 보기 어렵다.

  철학에 문외한인 일반인의 관점에서 토로하는 불만일 수 있으나 철학의 대중화와 글쓰기에 힘쓰는 몇 안 되는 사람들의 문제는 단순하게 논의될 수 없다. 전공자와 비전공자의 문제도 있고 전공자라 할지라도 대중화와 일반화는 다른 문제일 수도 있다. 어쨌든 철학에 관심을 가지고 서양철학자들의 논의에 관한 일반론을 체계적으로 공부하기도 쉽지 않고 철학자들의 주저를 번역서로 읽어나가는 데는 한계가 느껴진다.

  그래서 나의 경우 고등학교 시절 처음 접한 <철학의 기초이론>과 <철학에세이>로 철학에 입문했다. 지금도 입문 수준이지만 김용석, 강신주, 김용규, 남경태의 책들이 길잡이가 되었고 강유원, 이정우, 이기상, 김용환, 박홍규 등의 해설서를 통해 서양철학자들의 철학을 조금 맛보거나 번역서를 무턱대고 읽어보는 등의 노력으로 안개 속을 헤매기도 한다.

  이것은 다시 두 가지 문제에 부딪힌다. 첫째, 철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과 그에 대한 뚜렷한 목적과 방향이 없다는 점이다. 두 번째는 체계적이고 계통적인 접근과 깊이있는 관심분야를 읽어내기 어렵다는 것이다. 어느 하나 쉬운 것이 없겠지만 인문학에 대한 깊은 이해와 다양한 관점들에 대한 접근이 쉽지 않다. 게으르고 아둔한 탓도 있겠지만 정규교육과정에서 기계적으로 암기했다가 사라져버린 지식 이외에 생활 속에서 적용하거나 접근할 만한 ‘철학하기’를 배울 수 없다. 때때로 난감하기만 하다.

  강영안의 <우리에게 철학은 무엇인가>는 한국 철학사에 대한 개설서이다. 근대, 이성, 주체를 중심으로 살펴보고 있는 이 책은 한국 철학의 토대를 이루고 있는 사적 전개 과정을 더듬고 있다. 저자가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서양 철학이 도입된 후 이 땅에서 철학을 한 첫 세대들이 철학을 어떻게 하였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과학적 합리성에 대한 관심 그리고  현대와 탈현대 또는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사이에서 이성과 전통에 대한 한국 철학자들의 이해 정도를 다루고 있는 것이 이 책의 대강의 얼개이다.

  우리나라의 철학의 출발은 불행하게도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시작되었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더불어 세계사의 전환점에서 우리나라에서도 민족적 자각이 이루어졌고 1920년대 후반, 1930년대 초에 해외 유학파와 경성제국대학 졸업생들의 배출과 함께 형성된다. 이들은 초등학교 때부터 근대교육을 받았고 철학의 기본적인 도구인 어휘와 개념들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서양철학은 낯설지 않은 것이 되었다. 저자는 현실지향적 철학의 태도와 근대화, 이성적 경향과 감성적 경향을 띤 현실 파악 태도에 대해 실제 철학자들의 저서와 방법을 소개하고 있다.

  실증주의적 과학철학인 분석철학에 대한 관심과 반실증주의적 과학철학인 해석학과 현상학에 대한 논의를 집중적으로 설명한 2장, 전통, 근대, 탈근대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3장까지의 이 책의 주된 논의이다. 4장은 철학 용어에 대한 고찰로 서양철학에서 사용되는 용어들이 어떻게 한국어로 변화되었는지를 살피고 있다.

  일본에서 번역 수용된 용어와 개념들이 한국어로 정착되는 과정을 상세히 살피고 있는 4장은 전공자가 아니라서 대강의 과정과 흐름만을 훑어보는 정도로 만족했다. 철학자든 일반인이든 한국철학의 전개과정을 살펴보는 일은 의미 있는 일이다. 몇 가지 주제를 중심으로 어렵지 않게 정리하고 있어 읽을 만 했다. 현대 철학이 어떻게 자리 잡고 있으며 변화 발전하고 있는지 논의의 중심과 핵심을 살펴볼 수는 없지만 지금 여기에서 필요한 것이 무엇이고 전반적인 흐름이 어떠했는지를 알아 볼 수 있는 책으로는 충분하다.

  그 다음은 또다시 독자들의 몫으로 남겨진다. 철학은 실용적인 학문이 아니다. 실생활에 적용할 수 있다고 하지만 학문에 기본적인 토양을 제공하는 것이 1차적 기능이 아닌가 싶다. 분석틀을 제공하고 이론적 토대를 마련해 나가는 일은 모은 학문 분야에서 요구되는 일이고 그것의 현실 적용문제는 2차적인 문제일 것이다.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지적 호기심은 인간이 지닌 고유한 특성이다. 철학이 무엇인지 나는 아직도 모른다. 영원히 무어라고 정의내리기 어려울 수도 있다. 다만 ‘앎과 삶’의 문제를 어떻게 이해하고 어떤 깨달음을 얻을 것인가에 대한 관심은 계속될 것이다. 세상에 대한 통찰력과 존재에 대한 이해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표현하는 방법과 사용하는 용어가 다를 뿐 어쩌면 모든 사람들이 철학자이고 철학하며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오늘도 여전히 실존적 고민과 철학적 사유를 통해 인생에 대해, 세상에 대해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해 고민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면 욕을 먹을지도 모르겠다.


081203-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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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의 제국 산책자 에쎄 시리즈 1
롤랑 바르트 지음, 김주환.한은경 옮김, 정화열 해설 / 산책자 / 2008년 9월
평점 :
절판


텍스트는 이미지를 ‘주해’하지 않으면, 이미지가 텍스트를 ‘설명’하지도 않는다. 나에게는 각각이 일종의 시각적 불확실성의 시초이며, 선에서 깨달음이라 일컫는 의미의 상실과도 비슷하다. 텍스트와 이미지는 서로 엇갈리면서 몸, 얼굴, 글쓰기라는 기표를 확실하게 순환시키고 교환하며 그 안에서 기호의 퇴각을 읽으려 한다.

  구조주의자가 쓴 일본 여행기. 롤랑 바르트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없다면 이 책은 지루하고 따분한 텍스트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롤랑 바르트를 이해하기 위해서 이 책을 읽을 필요도 없다. <기호의 제국>은 이미지와 텍스트의 간극을 보여주는 훌륭한 교과서로 보인다. 위에 인용한 글에서 보여주듯 텍스트는 이미지를 주해하지 않고 이미지가 텍스트를 설명하지도 않는다.

  1970년에 쓴 롤랑 바르트의 <기호의 제국>은 프랑스식 에쎄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한 편 한 편의 글이 모여 전체를 구성하고 한 권의 책으로 일본에 대한 저자의 이미지를 완성한다. 텍스트와 이미지가 교차되어 있어 이 책은 입체적인 감각으로 독자들에게 호소한다. 낯선 언어가 주는 기표와 기의는 우리에게 어떻게 전달되는가. 번역을 통해 전달된 그 의미는 왜곡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며 생성되기도 한다. 저자의 이야기가 얼마나 전달되었는지 나도 알 수가 없다. 내 안에서 생성된 의미와 전달된 이미지가 다를 수 있겠지만 소통의 문제가 아니므로 중요하지 않다.

  이 책은 여행에서 담아낸 생소함과 일본의 이미지들이 저자에 의해 다시 재구성된다. 일본이라는 낯선 공간의 문화를 읽어내는 여행자에게 모든 이미지는 텍스트가 되었다. 그것을 하나 하나 설명하는 글이 아니라 대상 자체를 선택하고 그 특징을 드러내는 체계 자체가 이 책을 구성하고 있다. 선별되는 것은 저자의 몫이다. 무엇을 볼 것인가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표현대상을 선택하는 것 자체가 의미를 지닌다.

  당연하게도 프랑스 사람에게 일본을 전달할 목적으로 쓰여졌겠지만 당시의 독자들은 좀 어리둥절 했을 법하다. 전혀 낯설고 이질적인 문화에 대한 소개서로는 너무 불친절하다. 일본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우리가 이 책을 읽으며 번역된 글이지만 훨씬 더 잘 이해하고 공감할 만한 내용도 많이 있다.

  일본은 동양이다. 그 안에 서구지향이 있을지 몰라도 서양에서 찾아 볼 수 없는 특징을 내포하고 있는 것은 당연하다. 하이쿠를 인용하여 간결함과 눈에 보이지 않는 것까지 보여주려는 이미지를 통해 긴 여운을 만든다. 그들의 음식, 언어, 얼굴, 파친코, 젓가락 등 눈에 보이는 대상에 대한 이미지들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하다. 눈에 보이는 것 자체가 바로 글쓰기의 대상이 된다. 보는 것이 쓰는 것이다. 분리된 것이 아니라 역설적으로 둘은 하나가 되어버린다.

  하나의 개념은 상대적인 구조 속에서만 그 의미를 드러내고 전제 구조의 틀에서 벗어나면 모든 언어와 표상들은 기호에 불과하다. 그것이 의미를 지니려면 전체적인 맥락안에서 대상의 위치와 의미를 파악하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그것이 언어학적이든 철학적이든 문화인류학적이든 구조주의든 탈구조주의든 개념과 대상에 대한 인식 틀로서 완벽한 것은 없다. 롤랑 바르트가 일본을 어떤 방식으로 혹은 어떤 의미로 ‘기호의 제국’이라고 불렀는지 알 수 없다.

  다만 비교 문화적 관점에서 일본을 서구와 비교하지 못했고 타인의 시선으로 혹은 낯선 이방인의 관점으로 그것을 신비화, 기호화했을 뿐 그 심층적 의미를 읽어내지는 못한 듯하다. 대중적 관점에서 저자의 글쓰기와 일본에 대한 시선은 신선한 의미 이외에 다른 의미로 읽히지 않는다.

  텍스트는 풍부한 상상력과 환상의 세계로 독자들을 이끌어 낸다. 이미지와 텍스트가 교차되면서 저자의 시선과 독자의 의미는 상충되고 저자의 말은 독자가 받아들인 이미지와 뒤섞인다. 그것을 하나의 기호로 해석하든 문화로 읽어내든 의미를 어떤 식으로 풀어내든 불확실성에서 멀어지는 것은 아니다.

  의미가 면제되고 개념이 모호해진다면 기호나 구조가 또 다시 무의미해진다. 일본을 텍스트로 표현하려던 저자의 시도는 독자에게 무의미해지고 하나로 규정하려는 구조와 틀은 이후에 또다시 탈구조주의를 배태했지만 나는 여전히 그 혼란의 틈에서 어리둥절할 뿐이다.

  대상은 변함없이 그 자리에 놓여 있고 이미지는 다르게 인식되더라도 그것을 보는 눈은 달라진다. 어떻게 볼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말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지금 여기에서 다시 시작될 것이다. 롤랑 바르트의 눈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아니 나의 눈으로 말이다.

  선명한 이미지와 명료한 의미는 여전히 메트릭스 세계 너머의 이야기라고 할 지도 모르는누군가에게 의미가 없어 보인다. 소통과 전달의 문제에서 벗어나 기호는 여전히 모호함과 신비함으로 가득한 인생과 유사하다. 그것이 거기에 놓여 있거나 그렇게 표현된 것은 어떤 의미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일 뿐이다. 인위적이든 자연적이든 다른 해석과 의미부여가 왜곡된 또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 낼 수밖에 없다는 비극적 인식만이 머리 속에 가득하다.


081130-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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