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워드 진의 만화 미국사 다른만화 시리즈 1
마이크 코노패키 외 지음, 송민경 옮김 / 다른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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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의 역사는 민주주의 역사다’라는 동경과 선망의 눈으로 바라보던 시절이 있었다. 평등과 자유가 가치가 실현된 복지 국가로 정의를 위해서만 주먹질을 하는 착한 나라 미국에 대한 환상이 깨지기 시작한 건 언제부터일까? 스스로에게 묻지만 답을 구하기 모호하다. 공교육 기관을 통해 전해진 지식 속에는 분명 미국은 우방이며 6.25전쟁에서 한국을 구해 준 고마운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안심이 되지 않아 아직도 우리를 지켜주기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는 나라가 미국이다.

  가깝고도 먼 나라는 일본이 아니라 어쩌면 미국일지도 모른다.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노른자위 땅 용산. 배산임수의 기막힌 자리에는 2008년 현재 아직도 미군이 자리 잡고 있다. 철수가 확정되었지만 철수비용을 둘러싼 소음과 잡음은 끊이질 않고 미군철수 문제나 SOFA문제는 여전히 뜨거운 감자로 남아 있다. 미국은 과연 대한민국의 친구일까?

  자선사업가도 날개 없는 천사도 아닌 미국에 대한 환상은 도대체 언제부터 그리고 누구로부터 시작되었을까? 단순히 경제적 원조, 무역의존도 때문이었을까? 정치적 민주화때문이었을까? 미군정의 한반도 분할 통치정책과 이승만의 집권은 지구 전체를 상대로 한 미제국의  패권주의 때문은 아니었을까? 미국은 우리에게 어떤 나라인가에 대한 논의는 역사가 말해 줄 것이고 앞으로도 지속적인 분석과 고민이 필요한 문제이다. 온정주의와 맹목적 사대주의 모두 우리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유 없는 반미도 문제지만 조선시대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에 버금가는 미국 섬기기는 더더욱 문제다. 경제나 군사 분야뿐 만 아니라 사회 각 분야와 학문에서도 미국 위주의 패권은 계속된다. 경계해야 할 것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미국은 미국이고 한국은 한국이다. 두 눈을 바로 뜨고 미국을 투명하게 바라보자.

  촘스키나 하워드 진이 한국인이라면 아마 오래 전에 국가보안법으로 장기수 신세가 되었을 것이다. 미국이라는 나라의 추악한 이면과 진실을 드러내기 위해 쏟아낸 그들의 말과 글은 결코 만만치 않은 분량이다. 그 성과 또한 간과할 수 없다. 단순하게 비판을 위한 비판이나 색다른 시각 정도로 보아 넘길 수 없는 이들의 발언에 전 세계인이 주목하는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는 것이다.

  행동하는 양심이 아니라면 지식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존경받지도 못했을 것이고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지도 못했을 것이다. 넓은 의미로 이들의 존재를 인정하고 포용할 수 있는 사회가 미국이라면 나는 미국을 부러워하고 싶다. 타인의 생각을 인정하고 나와 다른 견해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열린 가슴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선물이 아니다. 힐러리를 끌어안은 오마바에게 박수를 보낼 일이 아니라 민주당이 집권해도 공화당이 국무장관을 할 수 있는 미국인의 정치 풍토가 부럽기는 하다. 하지만 미국은 미국일 뿐이다.

  역사는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하워드 진의 만화 미국사>는 미국 역사를 접근하기 쉽게 접근하고 있는 만화책이다. 그 소통의 수단과 도구는 접근 대상과 방법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학교에서 아무것도 배울 수 없는 아이들에게 혹은 멍청이로 졸업한 성인들에게 미 제국주의 역사를 알려주기 위해서라도 꼭 권하고 싶은 책이다. 관점이 달라지고 색다른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나는 안다. 한 번 고정된 시각과 뿌리박힌 고정관념은 총보다 무섭다. 죽어도 그것을 바꾸기 어려운 것이 신념인데 그 신념을 깊이 고민하거나 다양한 측면에서 바라보았는지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특히 국가와 국민의 관계에서 민족주의 관점에서 나와 국가의 관계를 생각하는 것은 이성적 판단 이전의 문제로 생각하기 쉽다. 애국적 민족주의는 근대 이후 형성된 가장 두려운 이념이며 개인을 옭죄는 보이지 않는 쇠사슬이다. 그것은 어느 나라 국민이든 소속 국가에게 빚지고 있는 마음의 감옥이다. 자유주의 혹은 민주주의 국가의 대명사로 불리는 미국도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콜롬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했다고 외쳤지만 원주민인 인디언들 입장에서는 참 어이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무인도를 발견한 것도 아니고 자기들이 모르던 땅에 대해 알게 된 것이 그리 큰 일이었을까마는 인디언들에게는 큰일이었다. 400년 쯤 후 1890년 운디드니 학살 사건은 미국의 본질을 보여주는 잔혹함 그 자체였다. 영국의 산업혁명 여파로 미국에도 자본주의와 산업화가 밀어닥치고 노동자에 대한 비인간적이고 가혹한 자본의 횡포가 시작된다. 미국의 역사는 자본주의의 역사이며 노동자 탄압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스페인과의 전쟁, 필리핀 침공, 1, 2차 세계대전, 베트남전, 니카라과, 쿠바, 이라크 침공에 이르기까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세계사의 전쟁에 미국이 빠진 적이 없다. 석유와 산업화를 위한 원료 기지, 군수산업과 긴밀히 연결된 정치인들의 연결고리는 애국주의와 맞물린다. 백인 기독교로 대표되는 미국인과 달리 흑인들의 인권과 자유는 철저하게 외면당했고 더구나 다른 나라와 다른 민족은 전쟁과 억압의 대상이었을 뿐이다.

  바로 보기 위해서는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이면의 숨은 진실을 보아야한다. 삐딱하고 왜곡된 시선은 맹목적인 믿음과 표면적인 현상에 대한 신뢰만큼 두렵기도 하다. 하지만 사실과 진실은 다르다. 아니 왜곡된 사실이나 과장된 사건들에 이념의 옷을 입힐 때는 끔찍한 결과가 찾아온다. 바보가 되어버린 대중은 파시즘에 경도되고 전체주의에 함몰되며 그것을 민주주와 미국적 가치라는 이름으로 미화되기도 한다. 과연 누구에 의한, 누구를 위한 전쟁이며 정책인지 가만히 들여다보라. 물처럼 투명한 진실이 드러난다. 눈 감지 않고 똑바로 쳐다보는 일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워드 진은 미국의 역사를 통해 미국의 참 모습을 드러내고 있으며 지나간 과거보다는 현재와 미래를 위해서라도 우리는 미국에 대한 환상이 아니라 진짜 미국이 어떤 나라인지 제대로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역사조차 제대로 배울 기회가 없는 현실에서 미국의 역사를 만화로라도 살펴보자는 말을 하자니 슬픔이 밀려온다. 금성출판사 ‘근현대사 교과서’는 오늘도 안녕하신가? 아니, 검인정제도는 오늘도 안녕하신가? 아니, 공정택에게 불려간 교장들은 오늘도 안녕하신가? 한국보다 미국, 미국보다 한국이 더 걱정이다. 아니, 오십보백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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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문화사
로저 에커치 지음, 조한욱 옮김 / 돌베개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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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루 해가 지고 완전한 어둠이 내리기 전까지의 시간. 그 푸른 시간을 나는 좋아한다. 빛과 어둠의 경계이며 낮과 밤의 고비를 넘어가는 순간이기 때문이 아니라 파스텔톤 여명의 그림자 때문이다. 어둠이 사라지고 파란 새벽이 밝아오는 시간보다 고즈넉한 해질녘이 훨씬 편안하고 여유롭다. 개인적인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 하루의 노동이 끝나고 휴식과 안정을 취할 수 있는 밤을 맞이하는 것을 누가 반기지 않겠는가. 밤은 그렇게 우리에게 또 하나의 세계를 선사한다.

  낮이 노동과 의무의 시간이라면 밤은 휴식과 자유의 시간이다. 사회적 관계로 얽매인 시간이 낮이라면 개인적인 행복을 찾을 수 있는 시간이 밤이다. 밤은 한마디로 정의되지 않는 모호함과 마술의 시간이다. 현대인에게도 밤이 주는 의미는 각별하다.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는 진부한 말이 아니어도 개인이든 사회든 밤은 낮보다 대담하다.

  낮이 이성의 시간이라면 밤은 감성의 시간이다. 만천하에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낮의 시간보다 모든 것을 신비로움 속에 감추어 두는 밤은 그 속을 알 수 없는 인간의 내면을 닮았다. 밤은 인간에게 어떤 의미였으며 어떤 역할을 했고 인류 역사에서 두려움의 존재로만 인식되었을까? 도대체 밤에는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이렇게 인류 역사의 반쪽에 대한 궁금증은 당연해 보인다. 로저 에커치는 밤의 역사를 기막힌 솜씨로 풀어 정리했다. <밤의 문화사>는 근래 보기 드문 재밌는 책이다. 호기심을 충족시켜주는 것은 물론 정보와 재미를 선사한다. 인류 역사에 대한 이해와 통찰을 전해준다.

  역사적인 사건과 영웅 중심의 거시적인 흐름에서 벗어나 일상 속으로 걸어 들어가면 참 재미있는 일이 많다. 생활사 혹은 미시사로 명명되는 이야기들은 우리들의 과거가 어떠했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진짜 역사에 대한 궁금증은 그들만의 리그가 아니라 바로 이런 이야기들 속에 숨어 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저자는 20여 년간 준비해온 자료와 연구를 통해 근대 이전의 ‘밤’이 어떠했는지 상세하게 밝혀놓았다. 그간의 노고에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어진다. 이 책의 진가는 읽는 동안 한 마디, 한 장면이 풍부한 상상력과 철저한 역사적 사료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이 비록 산업혁명 이전 서양 사회로 한정되어 있더라도 의미가 축소되는 것은아니다. 다른 지역의 밤에 대한 역사가 쓰여진다면 그 또한 흥미로운 일일 것이다. 기대해 본다.

  이 책은 공포로부터 시작된다. 1부의 ‘죽음의 그림자’는 밤의 위험에 대해 상세히 설명되어 있다. 가로등도 없고 통금이 있던 시절 치안은 어떻게 유지되었을까. 야경꾼과 도둑 사이의 흥미진진한 관계는 한 편의 영화처럼 아득하다. 경찰이 만들어져 시민들을 통제하고 억압하는 것보다 도둑맞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의 생각이 옳다는 것을 현대사회가 반증하고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이다. 약탈, 폭력, 방화로 대표되는 밤의 그림자는 죽음과 맞닿아 있었지만 말이다.

  ‘자연의 법칙’은 교회와 국가로 대표되는 공적인 기관에서 밤을 대하는 태도와 민간에서 밤을 맞이하는 방법은 조금 달랐다. 당국은 나약했고 가정은 요새가 되었다. 밤은 사람들에게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었을 것이라고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지금처럼 가로등도 없고 불빛도 없는 거리를 생각해 보면 과거의 밤은 지금과 밤과 많이 달랐으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양초로 대표되는 불빛은 이제 인간의 노동시간 연장을 의미하기 시작한다. ‘밤의 영토’는 점점 넓어지며 모든 사람에게 사교와 성과 고독을 선사한다. 평민들에게도 밤의 시간이 주어지는 시대가 오는 것이다. 여유와 휴식의 시간으로 활용되기도 하고 방종과 쾌락에 빠지기도 하며 영주와 귀족에게는 그들만의 리그가 열리는 시간이기도 하다.

  완전한 ‘사적인 세계’로 밤을 인식하기 시작하는 것은 18세기 이후의 일이다. 잠을 두 번에 나누어 잤다는 사실은 흥미롭기만 하다. 첫 잠을 깬 후 담배를 피우고 대화를 나누고 사색에 잠기기도 했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든 과거의 밤이다. 지금과는 삶의 리듬이 달랐고 인공 조명의 피해가 훨씬 덜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중세말기부터 19세기 초반에 이르는 밤의 역사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공포로부터 점차 밝은 빛의 세계로 나아간다. 하지만 과연 낮의 연장이 완전히 실현된 24시간 체제의 현대가 그때보다 발전되거나 진화되었다고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어둠이 줄어들면서 사생활과 친밀감과 자아 성찰의 기회도 훨씬 드물어질 것이다. 기어이 그 밝은 날이 오는 순간, 우리는 시간을 뛰어넘는 소중한 우리 인간성의 절대 요소를 잃게 될 것이다. 이는 어두운 밤의 심연에서 지친 영혼이 숙고해봐야 할 절박한 전망이다. - P. 436

  밤은 여전히 우리에게 휴식과 안정의 시간으로 여겨진다. 직업과 상황에 따라 밤은 전혀 다른 얼굴을 하고 있지만 인간의 오랜 습성을 인공조명으로 바꾸어야 하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고 즐거운 일도 아니다. 삶의 시간이 연장된다는 측면에서 밤을 이해할 수도 있지만 밤이라는 특별한 시간에 벌어지는 온갖 삶의 다양한 모습들이 이제는 당연하기만 하다. 그것이 낮이든 밤이든 개의치 않는 것은 자본과 욕망뿐이다.

  독서와 사색을 즐기고 명상에 잠기는 밤은 매우 사적인 시간이다. <밤의 문화사>는 인류가 걸어온 한 시대의 밤을 이해할 수 있는 책이며 지금 현재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밤’에 대한 오래된 기억들이다. 아버지의 할아버지, 그 할아버지의 아버지는 밤에 무엇을 했으며 하루 일을 마치고 어떻게 지냈을 지 궁금하다. 미루어 짐작할 수는 있겠지만 이렇게 꼼꼼한 자료와 꾸준한 연구를 통해 생생하게 살펴보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동양의 밤이라고 해서 무어 그리 특별했을까마는 문화의 차이만큼은 다르지 않았을까 싶다. 그것이 낮이든 밤이든 모든 인간에게 공평하게 주어지는 시간인 것만은 틀림없다. 여전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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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체론 살림지식총서 246
이종오 지음 / 살림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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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서는 저자와의 대화다. 글을 읽으면 그 글을 쓴 사람의 영혼을 이해하게 된다. 말보다 글이 더 깊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새겨진다. 사용된 낱말과 문장의 구조 그리고 담고 있는 내용에 따라 글을 이해한다는 것은 글을 쓴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과 같은 말이 될 때가 있다. 그래서 글을 함부로 써서는 안 되고 그렇다고 글을 쓰지 않아서도 안 된다. 가장 솔직한 영혼의 고백이고 거울에 자신을 비춰보는 행위가 글쓰기다. 독자는 글을 쓴 사람과 말없이 이야기를 나누며 소통한다. 서로의 생각을 나누고 다른 부분을 확인하며 때로는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이기도 한다.

  속 깊은 친구와 이야기를 나눠도 미진한 부분들까지 들춰내는 글을 만나면 부끄러워진다. 마음의 갈피들을 집어 낸 문장들을 읽다가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 얼굴이 화끈거리기도 한다. 이런 문학적인 글들은 이성보다는 감성을 자극하고 드러낸 내용보다 그것을 말하는 방식이나 문장의 구조, 사용된 어휘에 따라 전혀 다른 느낌을 준다.

  지식이나 정보를 전달하고 사유의 방식을 설명하는 책들도 마찬가지다. 행간을 건너뛰는 의미가 없다면 책은 컴퓨터를 비롯한 다른 매체에 비해 비효율적이고 가장 지루한 도구가 될 것이다. 하나의 어휘, 하나의 문장이 이루어내는 의미를 포착하고 단락의 의도를 확인하고 글 전체의 내용을 유추하는 과정은 능동적이고 지속적인 사고 활동이 수반되어야 한다. 끊임없이 저자에게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가 답을 구해야 한다. 수동적으로 내용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독자는 같은 책을 통해서도 가져가는 것이 별로 없을 수 있다.

  동일한 내용을 다르게 표현하는 방식이 문체가 아닐까 싶다. 우리가 흔히 문체라고 하면 작가의 개성을 드러내는 글의 형식을 말한다고 이해한다. 그러나 문체라는 것이 쉽게 정의되지도 않거니와 쉽게 파악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물론 문체 자체에 관심이 없거나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면 이종오의 <문체론>은 의미가 없는 책이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에서부터 출발한 문체론이 갑자기 궁금해진 것은 아니고 그것을 파악하는 방식이 궁금했다. 이 책에서는 세 가지 방식에 대해 설명하고 있지만 실제 독자들이 쉽게 적용하거나 누구의 문체가 어떠하다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문장이나 글을 독해하고 분석하는 방법론으로 활용할 수는 있겠으나 실용적인 분야는 아니다. 학문적인 접근으로 이해하고 대강의 의미를 파악하는 정도로 충분한 내용이다.

  이 책을 통해 글을 쓰는 사람의 스타일이나 글의 형식을 정밀하게 분석할 수는 없다. 하지만 문체론에서 주로 다루는 것이 무엇인지, 그 대상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글을 다르게 보일 수 있겠다. 이론적인 접근이 다소 딱딱하긴 하지만 호기심을 채우는 정도의 관심이라면 충분하다.

  문체론의 기원과 발전과정을 간략하게 살펴보고 수사학에서 문체론까지의 간략하게 설명한다. 본격적으로 바이이의 ‘표현 문체론’, 스피제의 ‘관념 문체론’, 리파테르의 ‘구조 문체론’에 대해 살펴본다. 기준과 관점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문체론의 기능과 종류를 살펴보는 것으로 이해하면 된다. 누구의 무슨 이론이든 목적과 방법에 따라 형식적 특성과 기능을 살피면 그만이다. 이론적 고찰과 규명은 글을 이해하기 위한 도구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 않겠는가.

  타인의 글을 살필 때 그가 사용하는 어휘의 빈도수나 저자의 영혼과 직관을 통해 그 글을 전체로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독자들은 내용에 바탕을 두겠으나 감각적으로 저자의 스타일을 받아들인다. 그것은 고스란히 작가나 저자의 개성이며 그것을 문체라고 이해한다면 그리 틀리지 않을 것이다. 다만 그것을 어떤 문체적 특징이라고 표현해야 한다면 얘기가 조금 달라진다.

  문체론은 이론적이고 학문적인 틀을 제공하기 이전에 글을 쓰는데 있어 하나의 가능성과 방향을 제시하는 데까지 나아갈 수도 있을 것 같다. 이미 쓰여진 텍스트에 대한 분석과 접근일 수밖에 없는 분야지만 그것을 통해 보다 구체적이고 객관적인 글의 형식적 틀을 제시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주마간산으로 읽어 내려가면서 지나치게 약술해 놓은 책이기 때문에 그 이상을 생각하면 오히려 오류에 빠질 가능성이 있다. 기회가 되면 좀 더 깊이 고찰해 볼 내용이다. 여하튼 글을 쓰는 저자의 영혼의 반영이라는 ‘관념 문체론’에 가장 공감했다. 직관과 통찰은 객관적 사실보다 우선할 때가 많다는 편견이 내 안에 숨어있기 때문이다. 나를 표현하는 것은 외모나 목소리가 아니라 내가 사용하는 문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문체는 존재를 드러내는 정체성의 다른 이름일까?


081118-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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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권력전쟁 - 사이버 세계를 조종하는
잭 골드스미스 외 지음, 송연석 옮김 / NEWRUN(뉴런)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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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신기술은 누구나 금방 손쉽게 다른 사람과 의사소통을 할 수 있게 해주고, 정치적 국경을 사실상 지워버릴 것이며, 자유무역을 보편화시킬 것이다. 기술 발전 덕분에 이제는 더 이상 외국인이란 없으며, 우리는 점차 공동의 언어를 채택해나가게 될 것이다.

  인터넷에 대한 찬사가 아니라 19세기 후반 전보가 발명되었을 때 나온 말이다. 그로부터 100년쯤 후에 우리는 인터넷을 만난다. 1990년대 중반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첫 출근부를 인터넷에 찍어야했던 문화적 충격은 아득한 옛 추억이 되어버렸다. 넷스케이프 2.0의 아이콘은 등대였다. 캄캄한 정보의 바다를 비추는 등대는 상징적이었다. 10여년 만에 인터넷 세상은 상전벽해를 이루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인터넷이 걸어온 길을 살펴보는 일은 미래를 예측하는 방법이 될 수 있겠다. 어느 것의 역사든 과거는 늘 현재를 점검하고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가장 확실하고 튼튼한 디딤돌이 되기 때문이다. <인터넷 권력 전쟁>은 눈에 보이지 않는 사이버 세계를 조정하는 권력에 대한 역사를 정리하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인터넷은 미국의 국방부에서 탄생한 네트워크 시스템이다. 이것이 발전되면서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살펴본다. 도메인 네임과 프로토콜 그리고 루트 서버에 관한 이야기는 마치 공상 과학 영화를 보는 것처럼 흥미롭다. 현실 세계의 강력한 실력자가 있고 그들에 의해 사이버 세계가 조금씩 확장되었다는 사실은 세상을 창조한 후 무한히 팽창되어 나가는 또 하나의 우주와 유사하다.

  이 무질서한 세상에는 항상 실제 권력과 자본들의 쟁탈이 치열했다. 현실 세계와 사이버 세계의 충돌은 인간의 이상과 현실의 괴리만큼이나 복잡하고 다양하며 흥미롭다. 각국의 법률과 문화는 국경 없는 인터넷에 어떤 영향을 미쳤으며 현실적으로 발생한 문제들을 어떻게 풀어나갔는지 처음 듣는 이야기가 많았다.

  프랑스 법정에 선 야후 이야기로 시작되는 이 책은 현실적인 국경과 영토로부터 해방을 시도하고 인터넷 혁명을 꿈꾸지만 결국 현실에 의해 지배되는 인터넷의 모습을 보여준다. 창조주 존 포스텔의 루트 권한 달환 시도는 싱겁게 끝나버린다. 결국 미국 정부 소유가 되어버린 인터넷은 국경 없는 아나키즘이 실현된 민주적인 유토피아가 아니다. 검은 그림자와 숨은 권력은 어느 곳에나 존재하고 더구나 사이버 공간의 자유와 질서는 보이지 않는 통제가 이루어지고 있다.

  현실적인 공간 개념과 지리적 구분은 인터넷에서도 통용된다. 서로 다른 문화와 법률이 충돌을 일으키면 분쟁이 생기고 각국의 제도와 법률에 따라 통제된다. 가장 극명한 예로 중국을 보여준다. 외부로부터 차단된 네트워크를 어떻게 운용하는지 알게 되었고 특히 자유주의를 표방했던 야후가 중국 정부의 통제 시스템의 하수인 역할을 하게 되는 과정은 우울해 보인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돈과 권력의 힘은 현실을 너머 이미 사이버 공간을 장악한 지 오래라는 이야기다.

  결국 양립할 수 없을 것 같은 민족주의와 인터넷의 결합은 교묘하게 결합되어 시너지 효과를 일으킨다. 적절한 통제와 눈부신 발전 속도는 중국 인터넷의 아이러니다. 재미를 너머 우려와 슬픔을 자아낸다. 소위 ‘통신비밀보호법’이라는 미명 아래 진행되고 있는 우리의 현실은 중국의 그것과 크게 달라보이지 않는다. 통제와 관리는 자유롭과 자율적인 인터넷의 특성과 상극이다. 그 한계와 자정능력에 대해 모르는 바 아니지만 악화가 양화를 구축해서는 안된다.

  우리에게도 익숙한 미국판 소리바다 냅스터 이야기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파일 공유 운동의 시작과 결말은 음반업계의 막강한 로비와 자금력, 미국적 풍토, 저작권 등과 어우러져 쉽게 판단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았다. 객관적인 사실들만을 나열하지는 않았으나 비교적 많은 정보과 고민거리를 얻었다.

  이 문제도 결국은 정부의 규제와 법률을 통한 정리가 필요하다. 수많은 사람들이 생활하는 공간이므로 당연한 부작용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인터넷의 영향력과 발전 속도는 단순하게 현실 생활과의 관계만으로 풀어낼 수 없는 대단히 복잡하고 다양한 문제들이 상존한다. 생각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할 정도로 진화하는 세상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는 지속적이고 꾸준한 연구와 관심이 필요해 보인다.

  역으로 정부의 통제를 이용하여 성공한 이베이ebay를 저자는 승자라고 칭하고 있다. 무정부 상태와 독재 사이에서 늘 고민하는 것이 인터넷을 이용하는 사람들이나 전자상거래를 하는 사람들의 딜레마라면 결론은 쉽지 않다. 그 다양성을 토대로 각기 다른 룰을 적용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하지만 여전히 국경은 중요하다고 말한다. 특히 역외 적용성 문제에 대해서는 공감이 간다. 세계법의 필요성과 한계를 통해 앞으로 정부의 통제와 세계화의 충돌 사이에서 어떻게 균형을 이루고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는 우리도 관심을 갖고 지켜보아야 한다.

  남의 나라 문제가 아니라 바로 고도로 발달된 인터넷 강국, 통신 인프라가 거의 완벽하게 갖춰지고 있는 대한민국의 현실에도 고스란히 적용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우리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다른 나라와의 문제 특히 국가 간 분쟁의 소지가 있는 문제들에 대해서도 고민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인터넷의 권력 전쟁은 현실 세계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다. 치열하고 살벌하기까지 하다. 결국 인터넷은 또 하나의 세상을 꿈꾸었지만 현실의 연장선일 뿐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러나 여전히 인터넷은 혁명을 꿈꿀 수 있는 공간이고 보다 자유롭고 변화 가능성이 풍부한 가상 현실이라고 믿는다. 앞으로도 그 꿈은 어떻게 전개 될 지 알 수 없으며, 변화의 진폭은 가늠하기조차 힘들다.


081114-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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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노래한다
김연수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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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사랑을 하라. 네가 살아 있다면 그 무엇이든 사랑을 하라.” …… “서로의 심장을 꺼내놓고 싸우고 나면 세계는 어떤 식으로든 정리될 테니까. 역사책이란 그런 사람들의 심장에서 뿜어난 피로 쓴 책이야.” - P. 25

  불가해한 인생을 소설로 읽는다는 것은 하나의 허상에 불과하다. 그 허상은 눈에 보이지 않는 가상현실이며 매트릭스이고 심리적 실재인지도 모른다.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허구를 만나는 일은 그래서 불편하다. 현실을 허구로 만들고 공허한 이야기가 오히려 세계와 유사하다. 특히 역사적 사실은 또 하나의 세계를 구성한다. 시간의 씨줄과 공간의 날줄이 만나 사실적 세계를 만든다. 역사와 소설이 만나면 완벽한 상상적 허구의 세계가 되거나 보이지 않는 진실의 세계를 더듬어보거나 당대에 도저히 알 수 없는 것들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소설이 읽을 만한 것이 되려면 단순하게 두 가지 조건만 충족하면 된다. 재미있거나 진실을 건드리거나. 두 가지가 결합된 책을 우리는 고전이라고 부른다. 한 권의 소설을 통해 인생을 통찰하고 역사를 이해하며 삶의 진실을 들여다 볼 수 있다면 독자들은 더없이 만족스러울 것이다. 개인적 취향이나 입맛에 따라 기호가 나뉘기도 하고 그 재미라는 것도 사실 기준과 성격이 모호하기는 하다. 어쨌든 ‘진실’에 관한 문제가 훨씬 복잡하다. 그것이 개인의 진실이든 역사적 진실이든 말이다. 단순한 사실의 나열이 아닌 바에야 보여줄 수 있는 것은 늘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김연수의 소설은 감수성의 표현이 탁월하고 문장이 생생하다. 구석구석 감정의 말초를 건드리고 사실을 드러내는 방법이 정확하고 세심하다. 특히 사적인 영역의 감정이나 상황에 부딪힌 인물들의 심리 묘사가 뛰어나다. 누구나 어떤 상황에서나 소설을 쓰는 사람에게는 당연히 필요한 미덕이겠으나 김연수의 그것은 잘 벼려진 칼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벤다. 그래서 서늘하고 시린 느낌이다. 나는 그 발랄함과 경쾌함 혹은 어눌하고 찌질한 감상의 편린들이 마음에 든다. 물론 개인적인 취향이겠지만.

  작년에 나온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과 확연하게 다른 이 소설이 1년 만에 나올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작가 후기에서 사정을 알게 되었지만 고민과 고통이 만만치 않았으리라는 것은 읽는 동안 짐작할 수 있었다. 1930년 만주를 이야기하는 것은 아물지 않은 근대사의 상처를 기억하자는 것이다. 민생단이라고 하는 생경한 이야기를 들춰내는 것은 역사가의 몫으로만 돌리기에 감춰진 아픔이 너무 크다. 아직도 진행형인 분단의 역사와 좌우 이념 갈등은 우리에게 해결되지 않은 숙제다. 어떤 소설가든 이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적어도 한반도의 문제를 인식한 작가라면.

  그 문제는 분단이나 식민 통치 혹은 한국전쟁이나 4.19와 같은 역사적 사실들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이고 애정이다. 과거는 단순히 현재의 기억에 불과한 것이 아니지 않는가. 작가에게 짐을 지워 주려는 것이 아니라 독자들이 읽고 싶은 혹은 읽어야할 소설이라는 게 있다면 나는 주저없이 이런 종류의 소설들이 반드시 쓰여져야 한다고 믿는다. 역사적으로, 문학적으로 의미가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들의, 아니 나의 지금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궁금하기 때문이다. 어제가 없는 오늘은 없다.

  1932년 9월 용정에서 소설은 시작된다. 1933년 4월 팔가자를 거쳐 7월 어랑촌 그리고 41년 8월 다시 용정에서 끝난다. 중국공산당과 일본 제국주의 사이에서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은 무엇이었을까? 인간에게 가장 큰 두려움은 불안이다.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처절한 사상투쟁이나 눈에 보이는 뚜렷한 적에 대한 분노보다 비참한 것은 불신이며 불안이다. 이 소설은 그 불안의 정체를 말하고 있다. 자신들조차 자신들의 정체를 몰랐던 그들은 아직도 역사의 그늘에서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있다. 아니 어쩌면 영원히 자신들이 누구인지 모를지도 모른다.

  희망과 비극이 교차했던 간도. 그곳에 살았던 네 명의 중학생과 화자인 김해연은 이 소설에서 각자의 역할에 충실하다. 시대의 진실을 드러내기 위한 전형적인 인물이라는 거창한 타이틀보다 오히려 당대의 삶을 가장 치열하게 보여줄 수 있는 주변 인물들이다. 누가 그런 시대를 만들어 냈는지 시대의 진실은 어디에 숨어 있는지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듯하다.

  작가의 의도가 어디에 있든 무엇을 말하려 했든 나는 이 소설에서 오래된 기억과 현재의 아픔을 함께 읽었다. 희미한 등불처럼 저기 멀리서 비추는 작은 빛의 알갱이들이 모여 현재를 만들어냈다. 나는 지금을 살고 있고 소설속의 주인공들은 과거를 살았지만 보이지 않는유리 큐브에 갇힌 진실의 미로 게임을 하고 있다고 믿는다. 사람들은 하나의 세계를 완벽하게 믿고 싶어한다. 부끄러움도 모른 채.

그때까지 내가 살고 있었고, 그게 진실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세계가 그처럼 간단하게 무너져 내릴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그건 이 세계가 낮과 밤, 빛과 어둠, 진실과 거짓, 고귀함과 하찮음 등으로 나뉘어 있다는 사실을 그때까지 나는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게 부끄러워서 나는 견딜 수가 없었다. - P. 42

  이 소설의 그 부끄러움의 세계를 조금 보여 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김해연에게 그리고 이정희에게 사랑은 무엇이었으며 그들의 죽음은 어떤 것이었는지 그리고 오늘의 우리에게 사랑과 죽음은 과연 어떤 것인 생각해 보는 기회를 제공했다면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하나의 세계와 그 곳의 사랑과 죽음. 우리에게, 아니 나에게 그것은 무엇인가?

사랑이라는 게 우리가 함께 봄의 언덕에 나란히 앉아 있을 수 있는 것이라면, 죽음이라는 건 이제 더 이상 그렇게 할 수 없다는 뜻이겠지요. 그런 뜻일 뿐이겠네요. - P. 325


08111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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