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공 창비시선 292
고은 지음 / 창비 / 2008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시를 50년쯤 쓰면 어떤 기분이 들까? 연필을 들면 저절로 시가 써질 것만 같으다. 모든 언어가 조화를 부려 종이에 펜을 대는 순간 막힘없이 자유롭게 배열될 것만 같으다. 고은의 50주년 기념 시집을 읽으며 내가 태어나기도 훨씬 전부터 시를 쓴 사람에 대한 경의로움에 젖는다.

  시간은 모든 것을 사라지게 한다. 그리고 여백을 남길 것이다. 모든 관계와 모든 사물들을 무화無化시킨다. 신작 시집 제목은 그래서 <허공>일까?

빈 공간에 그려내는 절제된 언어의 진경은 예사롭지 않고 나이를 넘어 그의 전성기가 어디인지 독자들을 당황스럽게 한다. 고은이 보여주는 시는 지금부터까 아닐까?

추억 하나

사랑이든
사랑의 밑창
미움이든
그것 뛰어넘어서

너 거기 허공에 대고
총을 쏘아보았어?

나는 열일곱살 때 용케 살아남아
미 육군 이탈사병 오웰의 M1소총으로
허공
거기 대고
세 발
네 발 연발로 쏘아보았어

허공은 적이 아니더군
그 총알들 어디로 갔을까
오 킬로미터쯤
육 킬로미터쯤 갔을까
가는 동안의 직선이 포물선으로 바뀌어
끝내
검불 하나도 건드릴 힘 없이 툭 떨어질 때
거기가 내 저승일까 어디였을까

아직도 나 이승의 은산철벽(銀山鐵壁) 여기 줄곧 처박혀 있어


땅끝

해남 땅 끝에 왔습니다
살아온 날들
잘못 살아온 날들도 함께 왔습니다

천근의 회한 내버리고
여기 술 먹은 밤 파도소리에 먼저 온 누구의 이승이 혼자 떠 있습니다


  추억은 모든 것을 뛰어넘는다. 사랑도 미움도. 시간 속에 녹슬어 버린 기억의 편린들을 더듬어보는 老詩人에겐 무엇이 보였을까? 경험한 것 이상은 쓸 수 없는 것이 작가의 한계라지만 사유의 진폭은 직접 경험을 뛰어 넘어 환상과 상상의 공간을 오가기도 하고 생각의 갈피들을 헤집고 다니기도 한다.

  고은의 시는 땅끝에서 다시 하늘로 날아오른다. 술 먹은 밤 파도소리를 들어 본 사람은 지난 날들과 회한에 대해 고개를 끄덕여 줄 것이다. 단정한 시들이 뿜어내는 조용한 목소리는 듣기 좋게 공명된다.

갈망

혼간 허울 바람에 날리는 영광들의 한 생애 얼룩졌다
번뇌들
맹신들
다 두고
여기 왔다

서해 저녁 밀물 앞에서 한동안 나는 올데갈데없다.


밤비 소리

천년 전 너는 너였고
천년 후 너는 나이리라 어김없으리라

이렇게 두 귀머거리로

너와 나
함께 귀 기울인다

밤비 소리


  자연에 몰입하는 노년의 일반적 경향으로는 볼 수 없다. 선시처럼 의미의 충돌과 비약이 없고 가볍거나 즉흥적이지 않다. 깊은 사색의 결과이며 언어 이전의 세계와 마주하는 느낌이다. 손에서 놓여난 모든 욕망들, 삶과 죽음들 속으로 천천히 산책하고 싶어진다.

  추적추적 내리는 가을비의 무거운 발걸음 소리가 아니어도 좋다. 가랑잎에 부대끼는 낮은 곳으로 흘러드는 모든 물소리, 소리들. 바다에 모이자는 약속들일지도 모르겠다. 한 편의 시는 끝없는 상상의 세계로 혹은 환상의 나라로 이끌어 주는 동화의 나라가 되기도 한다. 내게.

후배에게

국가는 섬세할 수 없단다 국가는 그냥 왈패란다
그럴수록 문학은 섬세해야 한단다
자네 문학이
행여나
떠밀리고 떠밀려
변방 읍내 호프집에 처박히게 될지라도
낙담 말게

더더욱 외따로 고개 저어 섬세하고 섬세할 노릇일세

장차 그 섬세함의 장관이라니


  고은의 작은 문학론은 그의 세계관을 반영한다. 국가가 왈패라면 문학은 섬세함이라는 단순한 언명이 깊이 울린다. 문학의 역할과 의미에 대해 고은이 보여준 이력들은 묵언으로 보여준다. 그가 노벨상 후보에 오르든 말든 중요한 것은 그의 시를 읽는 것이다. 세간에 관심은 노벨상이 아니라 그의 시에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

  마지막으로 ‘죽음’, ‘여생’, ‘무한’을 골랐다. 이쯤 되면 시인도 생의 황혼에 대해 죽음과 허무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탐욕과 허욕으로부터 자유롭고 안과 밖이 구별되지 않는 두려움의 끝에 대해 가만가만 생각해 보았을 것이다. 시인은 자유를 얻었을까?

죽음을 보며

오랜 두려움 끝
이제 두렵지않다
오전의 하늘에 없던 구름이 슬쩍 와 있다
구름 밑
산이 간다
산 밑
산그늘이 간다
그동안 내가 나에게 목숨 바쳤다

정말이지
죽음은 남이 아니다 아니구말구


여생

감히 고백하건대
저는 안이 아닙니다
밖입니다
저는 이 나라 안의 고아가 아닙니다
무한 밖의 미아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렇습니다


무한

이 무한가능 하염없는 백지 없이는
저의 여생 하루도 한나절도 숨막혀 살 수 없습니다
탐욕이 아닙니다
허욕이 아닙니다
절절히 현실 뒤켠 아스라이 백척 낭떠러지입니다


  나는 자주, ‘하늘’을 바라보며 ‘자유’에 대해서 생각한다. 무엇으로부터, 어떻게 생기는 것인줄도 모른채 반편이처럼 자유에 대해 늘 고민한다. 자유는 어떤 상태나 상황이 아니라 완전한 무애無碍의 상태를 말하는 것은 아닐까? 자유롭다는 의식조차 없어진 마음의 상태가 가능한지 모르지만 50년쯤 시를 쓰고 나면 혹여 그런 상태가 되지 않을까 하는 엉뚱한 상상을 해 보았다. 고은의 詩와는 무관하게.


081028-12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쓰레기가 되는 삶들 - 모더니티와 그 추방자들 What's Up 4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정일준 옮김 / 새물결 / 2008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람이 살아가는 과정을 소비의 과정으로 보면 참 재미있다. 무엇인가 사기 위해 열심히 일하고 그것을 버리고 또 사기 위해 땀나게 돈을 번다. 또 사서 버리고 또 사고 버리고……. 지구를 빌려 쓰는 인간에게 무한한 특권이 부여된 적이 없으나 오만한 인간은 오늘도 땅 속은 물론 바다 속까지 샅샅이 훑어내고 있다. 영원히 살 것처럼 오늘을 살고 내일을 생각하지 않는다. 먼 미래에 대한 전망들이 난무하지만 오늘의 소비 욕망을 절대로, 멈출 생각은 없다.

  나도 마찬가지지만 익숙한 생활 패턴 속에서 문제점을 발견하지만 쉽게 고쳐지지 않고 소비는 또 다른 소비를 부르고 욕망은 끊임없이 재생산된다. 어찌할 것인가? 지금 이대로의 삶은 영원히 지속될 수 있을까? 지구는 인간을 위해 영원히 무한한 화석 에너지를 공급하고 인간은 자연을 정복했으니 지배할 수 있을까? 지속 가능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계속 되어야 한다. 바로 지금 여기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이제는 고인이 되신 전우익 선생이 살아 생전에 TV 인터뷰 하는 장면을 우연히 본 적이 있다.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를 통해 선생이 말씀 하셨던 이야기들을 우리는 얼마나 가슴에 새기며 살아가고 있는지 모르겠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쓰레기가 되는 삶들>은 인간 종족의 사회생활에 대한 통렬한 자아비판서이다. 삶의 방향과 목적에 대한 수많은 질문과 대답 속에서 보다 큰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우리의 현실을 바라보는 일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저자는 21세기를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조망한다. 매우 우울하고 슬픈 목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오지만 부정할 수 없는 현실 때문에 가슴이 서늘하다. 어디쯤 가고 있는지 우리 삶의 조감도를 볼 수 없어 답답할 때 이 책은 유용한 안내서가 될 듯하다. 그 효용가치를 다 하고 쓸모없는 것을 우리는 쓰레기라고 부른다. 세상에 널려 있는 쓰레기들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본다. 우리가 쓰레기라고 분류하는 것들 중에 정말로 쓰레기라고 할 수 없는 것은 없을까?

  현대성(modernity)에 기초한 철학적 성찰로부터 출발한 이 책은 인간의 삶을 조망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앞서 언급한 일상생활의 쓰레기와 무관하다. 생산과 소비적 측면의 인간을 비난하거나 생태학적 관점에서 쓰여진 책으로 오해하기 쉬운데 놀랍게도 인간 자체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난민을 비롯한 최하층 계급에 속해 현대 사회의 주류에서 밀려난 사람들을 ‘쓰레기’로 비유하고 있다. 제목은 바로 그런 의미이다.

  자연과 하나가 되어 삶을 영위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시스템 안에서 추방당한 사람들의 이야기는 우리들 이웃들의 삶을 보여주는 듯하다. 도심 재개발과 뉴타운으로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사람들, 난민수용소에서 철저하게 분리된 채 넘어설 수 없는 장벽 안에서 고립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바로 ‘쓰레기가 되는 삶들’이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현대 사회 정보의 쓰레기부터 인간 쓰레기까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쓰레기’들에 관한 비참한 이야기가 낱낱이 고발된다. 우리는 쓰레기가 되는 삶을 살지 않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지만 과연 개인의 노력만으로 가능한지 의심스럽다. 저자의 진단은 모더니티에서 추방된 사람들이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예측이 아니라 그 과정을 파헤치고 있다. 질서 구축 과정이 만들어내 쓰레기, 경제 발전이 만들어낸 쓰레기, 지구화가 만들어낸 쓰레기로 대별하여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는데 결국 쓰레기가 하나의 문화가 되어버린 현실을 고발하고 있다.

  “What's up?" 시리즈의 하나인 이 책은 “별 일 없었지?”라는 미국 흑인 노예제도의 폭력성에 대한 비극적 증언에서 출발한다. 안부 인사라고 하기엔 공포스럽다. 이 말이 이제는 우리에게도 적용된다. 비정규직을 포함한 고단한 삶의 형태를 아우르는 말이 되고 있다. 감시와 처벌 속에 몸부림 치고 있는 우리에게 법의 준수와 제도적 안정이라는 말로 준엄한 심판을 내리고 있는 현실적 모순을 어떻게 볼 것인가.

  연대와 우정이라는 가치로 폭력적 제도의 정당성을 깨트릴 수 있을지 의문이다. 하지만 모른척 외면할 수는 없는 일들이 일상화되어가고 있다. 내 한 몸 아무 일 없기를 바라다가는 나를 포함한 모두가 “What's up?"이라고 아침 인사를 해야 할 날이 멀지 않았는지 모른다. 그린스펀이 20년간의 경제 정책의 실수들을 고백하고 있지만 그 책임과 결과를 개인에게 돌릴 수만은 없는 노릇이고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면 더더욱 암울하기만 하다.

  긍정적인 시선과 내일의 희망을 삶의 가치로 삼아야 한다는 원론적인 사탕발림이 아니라 보다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움직임들이 드러나야 한다. 실천적 지식인과 행동하는 대중들이 연대하지 않는 한 견고한 현실의 벽은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 점진적 변화든 급진적 개혁이든 목표와 방향을 잃고 헤매는 우리들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고민이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가공할 만한 두려움으로 미래 사회가 진행될 것이라는 경고와 진단은 언제나 있어왔다. 비판적 관점과 문제점을 드러내는 방식보다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해결 방안을 내어 놓으라고 외치고 싶을 때가 많다. 답답한 상황이 지속되어도 원인을 모르고 참담한 결과를 확인하고서야 다시 시작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한 사람의 견해로 결정되지는 않는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What's up?"이라는 인사말이 사라진 세상을 꿈꾸어야 한다. 이 책에서 인용한 폴 발레리의 말처럼 “우리에게는 스스로의 생각을 다른 이의 표현을 따라 이해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 우리는 스스로 생각하고 표현할 수 있는 힘부터 길러야 하는 것이 아닌가?


081026-12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국 정치 웹 2.0에 접속하다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118
강원택 지음 / 책세상 / 2008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다.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은 곧 정치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다른 말일 것이다. 지배와 피지배 개념으로서 인간의 특징을 정의하는 말일 수도 있고 수평적 개념으로서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을 수직적 개념으로 이해하는 말일 수도 있다. 사회적 관계를 정교화하고 법과 제도가 개입되어 조화를 이루도록 하는 제도가 정치라고 말할 수도 있다. 인간은 한 순간도 정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고 모든 행위가 정치적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정치는 현실 생활과 너무 멀게만 느껴진다. 정치인들의 행위를 통해서나 신문이나 방송 등 언론을 통해서만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선거 행위를 통해 실제 생활 속에서 우리가 정치인들을 만들어내지만 스스로 만들어가는 참여 행위가 아니라 간접적이고 대의적인 수단으로 이용되기 때문에 선출된 정치인들의 행위를 굳게 믿어야하는 상황이 대부분이다. 생업에 종사하다 보면 직접 민주주의가 가능하다는 생각을 하기 어렵다. 왕정이나 군주정을 통해 민주정이 자리를 잡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정치가 멀게만 느껴진다.

  한국 정치의 일천한 역사를 돌아보면 국민들의 참여와 의식은 더욱 소극적이며 수동적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정당 정치가 자리 잡지 못하는 있는 우리의 현실은 계보 정치나 지역에 기반을 둔 토호 정치가 맹위를 떨쳤고 정책 중심의 정치가 아니라 인물 위주의 정치가 자리를 잡고 있다. 어떤 정부나 정당이 집권을 해야 우리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것인가에 대한 고민보다 이 사람이라면 잘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정치는 국민을 위한 봉사라는 생각보다 권력이며 자본이라는 믿음은 여전히 굳건해 보인다. 시대가 변하고 사람들의 의식이 발달해 가면서 한국의 정치는 일대 혁신을 맞이한다. 그 주역은 바로 인터넷이다. 웹 2.0 시대를 맞이하여 바야흐로 한국 정치는 진일보 했으며 그 위험서과 우려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목소리와 직접 민주정의 가능성을 활짝 열어 놓았다. 인터넷은 이제 우리의 현실 생활은 물론 멀게만 느껴지던 정치까지도 각 가정까지 파고 들었다.

  그 출발은 물론 2002년 대선이었다. 노무현의 당선은 불가능해 보이던 현실 정치의 벽을 넘어 선 축제처럼 여겨졌다. 누군가의 표현대로 노무현의 최대 업적은 ‘당선 그 자체’에 있는 지도 모른다. 월드컵의 열기와 효선, 미선을 위한 촛불 집회를 거쳐 노무현의 당선으로 마무리된 현상들은 21세기의 새로운 변화를 예감했다. 그것은 참여와 소통 그리고 연대 가능성에 대한 희망이었다. 국민들의 열망과 달리 참여 정부가 보여주었던 실망스러움은 접어두고라도 개혁과 변화가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라는 믿음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고 생각한다.

  2008년 대한민국의 정치가 어떠하든, 경제라는 실체가 불분명한 괴물의 모습이 어떠하든 웹 2.0 시대의 한국인들은 과거의 정치 형태와 권력자로서 정치인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이미 정치 권력은 ‘시장’이 아니라 ‘시민’에게 넘어 왔다고 믿고 싶다. 그것이 대한민국의 미래를 이끌어 갈 힘이다.

  강원택의 <한국 정치 웹 2.0에 접속하다>는 바로 이러한 한국의 정치 현실에 대한 정확한 진단서다. 인터넷을 통해 대의민주주의의 단점들이 어떻게 보완될 수 있는지 살펴본다. 인터넷을 통한 참여의 한계와 문제점들은 당연히 지적될 수 있다. 하지만 변화하는 정치 환경에서 웹 2.0에 대한 현재와 미래는 결코 가볍게 취급할 수 없는 대상이 되었다.

  이 책에서는 의제 설정의 민주화, ‘대중의 지혜’, 선거와 프로슈머 유권자라는 핵심 개념들을 알기 쉽고 간단하게 진단하고 있다. 한국 정치의 진화를 위해서 법과 제도를 살펴보고 발상의 전환을 요구하고 있다. 과연 한국 정치는 진일보 할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정치 행위에 참여하는 네티즌의 참여와 선거를 통한 정치 행위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은 쉽게 정치인들을 욕하고 안주삼아 씹어대지만 내가 지금 어떻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지는 반성하지 않는다. 당연한 것일 수도 있지만 내 생각이 과연 어디에서 왔으며 누구를 위한 것인지 이기적 욕망인지 대다수를 위한 방법인지 깊이 고민하지 않을 때가 많다. 누구나 그렇다고 쉽게 말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인터넷을 통한 정치 지형의 변화를 쉽게 기대할 수만은 없어 보인다. 그곳에도 소수의 활동가와 다수와 눈팅족과 무뇌충의 저항들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건전하고 올바른 방향으로만 모든 사람들이 질주할 수는 없어도 현재 상황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내 행동에 대한 책임은 분명하다. 어쩌면 세상은 소수의 정치인이나 권력가, 자본가에 의해서 굴러간다는 패배의식에서부터 변화 가능성이 사라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내가 서 있는 여기에서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반성과 작은 실천들이 모여야 한다. 그것이 웹 2.0시대를 열어가는 우리들의 바람직한 모습은 아닐까 싶다. 정치는 정치일 뿐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웹의 영역을 확장하고 즐거운 놀이의 공간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변화는 시작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081025-12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소립자
미셸 우엘벡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3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우울한 환상과 성적 자극들이 모여 빚어내는 회색빛 소묘. 미셸 우엘벡의 <소립자>는 최근의 내 감정 상태만큼 극도로 불안하고 우울한 무채색으로 가득하다. 그 원인은 차치하고 내면의 풍경을 드러내는 방식과 현실에서 발현되는 모습들이 무성영화 시대의 흑백필름을 보는 듯했다. 우엘벡의 이 소설이 낳은 수많은 논란은 지극히 당연하다. 누가 이 소설의 의미를 제대로 읽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끝없이 복잡한 미로를 찾아 헤매는 사람은 출구라는 뚜렷한 목표가 있어 오히려 행복할 것이다. 마음의 갈피 사이로 난 오솔길들, 상처 난 길섶의 들풀들, 흐린 하늘 아래 비추는 한 줄기 해살과 같은 형언할 수 없는 이미지와 숨결들이 배어나오는 소설이었다. 어떤 작품이든 마찬가지겠지만 독자의 감정이 이입되거나 영혼이 투영되거나 이도저도 아니면 고개를 끄덕이며 동경한다. 이 책은 독자들에게 다양한 효과를 나타내고 상반된 평가를 받기에 충분할 것 같다.

  작가의 말대로 이 책은 삶의 대부분을 20세기 후반기에 서유럽에서 보낸 한 남자의 이야기다. 최고 수준의 생물학자 미셸 제르진스키가 실종된다.

그리하여
오늘 처음으로,
우리는 옛 시대가 어떻게 종말을 고했는지 돌이켜보고자 한다.


  는 말로 프롤로그가 끝나면서 한 남자가 이야기는 시작된다. 형이상학적 돌연변이를 대표하는 이 인물은 기독교로 설명될 수 없는 시대정신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20세기 말의 특별한 인물 유형을 보여준다. 아버지가 다른 미셸의 형 브뤼노는 정상적인 결혼 생활을 통해 자라난 아이가 아니다. 동생 미셸 또한 한 어머니에게서 서로 다른 아버지의 아이들이 태어났으니 평범하다고 볼 수 없는 삶을 예고한다. 그들 형제는 만나게 되고 서로의 생을 위로하기도 하고 바라보기도 하며 고독과 우울 속에서 생을 버텨낸다.

  어린 시절 기숙사에서 당한 브뤼노의 모욕도 그토록 사랑했던 아나벨을 잡지 못하는 미셸도 결국 다른 몸에 숨어 있는 두 개의 영혼처럼 보였다. 그들이 드러내는 삶의 방식은 우리에게 너무도 낯설다. 68세대와 그들의 공동체 그 안에서 벌어지는 허위의식과 개인의 부조리는 우리에게도 많은 시사점을 남겨준다. 길가에 떨어진 동전 지갑을 줍듯 탄핵사태에 대한 반발과 분노로 국회의원이 된 386들의 정치 행태가 떠 오른 이유는 무엇일까?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정치적인 것은 아니다. 지극히 개인적이고 사색적인 소설이다.

  적확한 심리 묘사와 내면 풍경은 기막힌 묘사와 적절한 어휘에서 기인하지 않는다. 오힐 냉정하고 객관적인 사실들을 건조하고 냉랭한 목소리로 독자에게 뱉어내듯 한다. 프랑스 소설에서는 보기 힘든 장면들로 기억될 것이다. 우엘벡이 의도적으로 논란을 예고했는지 알 수 없으나 성적인 부분에 대한 묘사나 등장인물의 취향뿐 만 아니라 그 원인과 삶의 과정들이 때론 불편하게 때론 어색하게 소설 속에 녹아 있다.

  한 인간에게 있어 고통이란 숙명과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을 의식하지 않고 사는 사람이 있는 반면 잘 견디지 못하고 극한적인 반응을 드러내기도 한다. 자살을 하기도 하며 과장된 목소리로 울부짖기도 한다. 그러나 섣불리 그만큼의 고통은 누구에게나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것은 비교가 불가능하며 실존적 고민의 깊이는 개인마다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타인의 아픔과 상처를 이해하지 못하는 인간에게 우리는 오히려 연민을 느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과거 회상과 현재의 삶을 연결시키는 연대기적 서술에 의존하면서 미래 사회까지 진단하는 이 소설을 쉽게 규정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를 통해 보여준 미래 사회를 이 소설에서도 언급하고 있다. 그 탁월한 예지력은 이 소설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는데 재미있는 것은 1998년에 출판된 이 책의 미래는 불과 몇 달 앞으로 다가왔다는 것이다. 10년 만에 커다란 기술의 진보나 생물학적 변화를 예고 했다기 보다는 현대 사회의 패러다임 자체가 변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표현한 것일 수도 있겠다.

  시인으로 데뷔한 작가라고 하는 데 읽어 본 적이 없으니 뭐라 말 할 수는 없지만 서사와 사건 중심의 소설이 아니라 섬세한 개인의 내면 묘사, 때때로 과거의 기억을 들추는 건조한 목소리가 오히려 읽는 사람을 답답하게 만든다. 땀과 태양이 엉겨 붙은 바람 한 점 없는 바닷가의 적막감. 작가는 이 소설에서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지 독자는 소설의 한 복판에서 허우적거리게 된다. 당장 책장을 덮고 시원한 맥주를 목구멍에 들어붓고 싶은 욕망을 느끼게 하는 그 무엇이 이 소설의 백미다.

  이 책은 시간의 모래 속에 사라져갈 우리 모두에게 경의를 바친다. 우리의 삶이 어떤 형태로 이어질 것인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다만 한 인간의 과거와 현재를 통해서 그 삶의 결들이 보여준 무늬들을 통해 짐작해 볼 수는 있다. 제르진스키가 사라진 곳이 궁금한 것이 아니라 그가 어떻게 살았는지를 돌아보는 것이 작가의 의도일 것이다. 우엘벡이 무엇을 보려주려 했든지 이 책은 내게 고통과 우울의 진한 페이소스를 안겨주었다. 자, 이제 밤하늘을 향해 기지개나 한 번 켜볼까?


081022-12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경쟁은 어떻게 내면화되는가 問 라이브러리 5
강수돌 지음 / 생각의나무 / 2008년 9월
평점 :
품절


  적자생존의 논리는 인간의 유전자에 내면화 되어 있는 것일까? 경쟁은 피할 수 없는 삶의 방법일 지도 모른다. 자연 상태에서 벗어난 인간이 생존의 본능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상태로 사회를 유지하기 시작한 것은 얼마나 오래된 일일까? 아니 어쩌면 지금도 태어나는 순간부터 생존하기 위한 몸부림은 계속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본능만이 아니라 현대 사회에서는 보다 더 낳은 삶의 조건을 유지하기 위한 경쟁이 끊임없이 계속된다. 그것은 물질과 문명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고 무한 경쟁 체제에 온몸을 내맡긴 채 끝없는 욕망을 재생산한다.

  삶의 목적과 방법은 사람마다 조금씩 다를 수 있다. 사람이 사는 사회마다 시대적 가치가 있고 거대한 흐름이 존재한다. 그것을 만들어가는 주류의 흐름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사는 방법도 있고 <꽃들에게 희망을>을 준다고 믿는 애벌레처럼 끝없이 남을 밟고 올라서는 경쟁에 뛰어드는 삶도 있다. 우리는 어디쯤 걸어가고 있을까? 그 흐름과 방법으로부터 자유로운 삶을 살고 있는 과연 몇이나 되는지 궁금하다.

  신안1리 마을 이장 강수돌이 <경쟁은 어떻게 내면화 되는가>라고 질문을 던진다. 최근에 생각의 나무에서 問라이브러리 시리즈 5권으로 펴낸 책부터 손에 집힌다. 짧은 분량에 많은 내용을 함의하고 있지는 않은지 의심스러웠지만 제목부터 강렬하다. 하지만 책장을 펼치기도 전에 강수돌 교수의 이전 책들의 내용을 바탕으로 제목의 의미를 고민해 본다. 어렵지 않게 답이 찾아진다. 그렇다고 해서 새로운 정보와 지식만을 확인하는 책읽기를 고집할 수도 없다. 읽기도 전에 책의 내용을 짐작한다는 것 또한 건방지지만 말이다.

  끊임없는 경쟁으로 얼룩진 한국사회와 한국인의 삶에 대한 대안을 모색하기 위해 쓰여진 이 책은 21세기 대한민국의 자화상이다. 우리들의 삶과 일에 대한 이야기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일중독 벗어나기>에서 보여주었던 우리 사회의 우울한 자화상에서 출발한다. 자아실현을 일에서 찾고 일하지 않는 자여 먹지도 말라는 논리가 사회 전체를 지배하지만 과연 일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한 번이라도 제대로 해 보았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마르크스의 사위 폴 라파르그가 <게으를 수 있는 권리>를 주장했고, 버트런드 러셀이 <게으름에 대한 찬양>을 이야기하지만 귀 기울여 듣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근대화 사회로 이행과정에서 게으름은 악이고 근면은 선이었다. ‘새마을 운동’으로 잘살아 보세를 외쳤지만 그 혜택이 모두에게 돌아가지는 않았다. 전체의 파이를 키워 함께 나눠 먹자는 달콤한 유혹은 계속되지만 신자유주의 물결 이후 양극화는 심화되고 경쟁은 더욱 치열해졌다. 가정에서 발원한 부모들의 교육 방식과 대학의 서열화 사교육을 통한 무한 경쟁 체제는 적자생존의 자연법칙이 유효한 사회를 만들어가고 있다. 80은 20에게 지배당하고 교묘한 논리로 정당화된다.

  우리의 삶은 어느 순간부터 행복해 질 수 있을까? 명문 대학에 입학 하는 순간, 대기업에 취업하는 순간, 고시에 합격하는 순간, 강남에 아파트를 구입하는 순간? 죽을 때까지 경쟁의 덧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이것을 내면화하기 위해 이제 지자체와 국가가 앞장선다. 초등학생을 한 줄로 세우기 위한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고 일제고사의 망령은 다시 부활했다. 가진 자를 위한 국제중, 특목고는 확산되고 건설과 토목만이 살길이라는 믿음은 여전하다. 삶과 사랑에 대해 깊이 고민하고 일과 직업에 대해 살펴보는 시간을 갖는 것은 사치에 불과한가.

  이른바 ‘팔꿈치 사회’라는 섬뜩한 표현으로 대표되는 우리 사회의 모습은 자기소외가 시작되는 경쟁 사회의 단면을 보여준다. 소통과 연대가 대안이 된다는 저자의 주장을 도대체 현실적으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 때때로 책장을 덮고도 막막해진다. 실천적 대한이 아니라 한낱 이상적 주장에 불과한 것인가 하는 자괴감이 든다. 눈을 들어 현실을 보면 가슴에 무거운 돌덩이를 얹어 놓은 것 같다. 무비판적이고 맹목적인 속도로 달려드는 부나방처럼 우리는 어디를 향해 질주하고 있는 것인지.

  저자가 주장하는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는 것 열 가지’는 우리를 아프게 한다. 결국 경쟁은 학교에서 내면화되고 가정에서 공고화된다. 혹자는 학교의 실정을 잘 모르는, 학부모의 요구를 잘 모로는, 무한 경쟁시대에 큰 일 날수 있는, 지나치게 부정적인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자. 우리의 아이들이 학교에 무엇을 배우러 가는지.

  첫째, 공부의 궁극적 목적이 행복한 삶이란 것을 일관되게 가르치지 않는다.
  둘째, 대학이란 그 자체로 공부의 끝이 아니라 비로소 ‘큰 공부(大學)’를 시작하는 곳이라는 점을 가르치지 않는다.
  셋째, 우리 사회가 ‘상중하’라는 사다리 질서로 되어 있고, 우리가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하는 이유가 깨 놓고 보면 결국은 상층부로 진입하여 기득권을 많이 차지하려는 것이라는, 삶의 진실을 있는 그대로 가르치지 않는다.
  넷째, 학교와 부모는 아이들이 ‘인재’가 되고 ‘영재’가 되고 ‘천재’가 되는 것을 바라지만, 이런 인재, 영재, 천재와 같은 말들이 결국은 아이들을 삶의 주체가 아니라 누군가 써먹기 좋은 자원, 즉 수단으로 보는, 잘못된 철학에 기초해 있음을 가르치지 않는다.
  다섯째, 초중고에서 수백 번 반복하며 ‘국기에 대한 맹세’를 하지만, 진정으로 ‘조국’과 ‘민족’을 사랑하기 위해 몸과 마을 바치는 구체적 방법에 대해서는 가르치지 않는다.
  여섯째, 초중고 학생들도 단지 아직 어른이 아니라는 뜻에서 미숙한 학생이 아니라, ‘나날이 자라는 과정에 있는 하나의 인격체’임을 가르치지 않는다.
  일곱째, 각종 시험에 대해 무조건 잘 보아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지만, 실상 이런 시험문제야 시간이 흐르면 대부분 잊어버릴 것이고 나아가 참된 삶에 별로 필요도 없는 허황된 것들이 대부분이라는 사실을 가르치지 않는다.
  여덟째, 입시 경쟁이 결국은 기업들이 써먹기 위한 노동력 경쟁으로 연결되고, 노동력 경쟁은 결국 상품 경쟁, 생존 경쟁으로 연결된다는 사실을 학교는 가르치지 않는다.
  아홉째,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타인에 대해 친절하고 우애와 환대의 정신을 갖는 것이 교과서 내용을 외우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학교는 일관성 있게 가르치지 않는다.
  열 번째, 개인적으로 정직하고 우애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지 않는 것을 넘어, 사회질서 자체가 더 이상 사다리 질서가 아니라 ‘원탁형 질서’로 되어야 사람이 참으로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구조가 만들어진다는 것을 학교는 가르치지 않는다.

  <학교 없는 사회>의 저자 이반 일리히를 직접 만났던 저자의 경험담과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이야기, 앙드레 고르와 도린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는 오래 기억될 만하다. 특히 나비처럼 날아가신 어머니의 임종에 관한 이야기는 누구나 경험했거나 경험하게 될 일이기 때문에 ‘경쟁’과 무관하게 진한 감동을 남긴다.

  나를 알고 싶다면 가정과 사회 그리고 내가 살고 있는 국가를 보면 된다. 통시적 관점에서 과거와 현재의 모습을 조망하면 우리는 씨줄과 날줄로 얽힌 거미줄 속에 살아가고 있다.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라고 자포자기하는 것이 과연 온당한가. 저자처럼 연대지향적 사회의 밑그림은 도저히 그릴 수 없는 것인가. 이제 우정과 환대의 사회는 영원히 불가능한 것인가?


081019-119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08-10-20 07: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8-10-22 20:51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