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신 - 21세기를 사는 지혜 인터뷰 특강 시리즈 5
김용철 외 지음 / 한겨레출판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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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떻게 네가 나한테 이럴 수 있니?”

  살아가면서 누구나 한번 쯤 하게 된다는 말이다. 누구나 한 번쯤 듣게 된다는 말이다. 2008년을 뜨겁게 달군 화두는 단연코 ‘김용철’과 ‘촛불집회’가 될 것이다. 벌써 아득하게 잊혀진 과거처럼 생각된다면 당신은 무척 바쁘게 살거나 세상을 등지고 사는 사람이다. 먹고사는 문제도 바쁜데 나와 무슨 상관이냐고 말하는 사람이라면 왜 바쁜지, 계속 바쁘면 잘 먹고 잘 살게 되는지 묻고 싶다. 이명박을, 한나라당을 찍었는데 어떻게 이럴 수 있지?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수가 늘어가지만 악화는 꾸준히 양화를 구축해 가고 있다.

  인간 관계에서 가장 심한 절망감을 느끼게 하는 것은 실연이 아니라 배신이다. 배신背信은 믿음을 등지다, 믿음에 등을 돌린다는 뜻이다. 사람이 사람을 믿는다는 것은 서로 다른 의미일 수 있다. 서로에 대한 ‘믿음’이 서로에 대한 ‘기대’와는 다른 의미로 파악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여기서 말하는 배신이란 객관적 사실에 대한 확고한 약속이 전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배신당한 수많은 사람들만 찾을 수 있다. 배신한 사람은 찾을 수가 없다. 왜 그럴까?

  답은 간단하다. 정혜신의 말대로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행동은 동기부터 이해하고 타인의 행동은 현상을 중심으로 판단하기 때문이다. 배신에는 수동태만 있고 능동태는 존재하지 않는다. 사적인 관계에서부터 공적인 관계에 이르기까지 두루 적용되는 공식이다. 그리고 또 하나 이기적인 인간은 누구나 내 눈으로만 모든 것을 판단한다는 동어 반복의 결론 때문이다. 타인의 입장에 대한 고려나 내 행동에 대해서는 결코 돌아보지 않는다. 내가 아픈데 다른 사람을 돌볼 겨를이 있겠는가?

  2004년부터 교양, 상상력, 거짓말, 자존심에 이어 올해는 배신이라는 주제로 한겨레신문사에서 특강이 이루어졌다. 시의 적절한 주제를 중심으로 인터뷰 특강이 이루어진다. 3월에 이루어지는 이 특강에 한 번도 참석하지 못하고 매년 가을 책으로 만난다. 아쉽지만 놓칠 수는 없는 책이다. 5년째 꼬박꼬박 사서 읽는 이유는 내겐 소화제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답답해서 뉴스를 끊은 지 1년이 되어 가지만 그것이 대안은 될 수 없다.

  고민보다 행동, 참여와 연대만이 살 길이다. 이 책은 내게 매년 자극과 함께 용기를 준다. 사면초가 - 홀로 서 있는 막막함을 느낄 때가 있다. 살아가다 보면. 그때마다 멀리 있지만 공감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말할 수 없는 기쁨이며 위안이다. 사람들 사이에서 외로움을 느낀다는 것은 개인적으로 대단히 불행한 일이다. 제자리에 엎드려 닥치고 있으면 손해 볼 일은 없다는 사실을 직장 생활 3년만 지나면 강아지도 안다. 하지만,

  김용철은 왜 그랬을까? 검사 출신의 삼성 구조본부 팀장. 그의 선택에 의혹의 눈초리를 보냈던 ‘카더라 통신’들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돌아보자. 삼성은 무엇이 달라졌으며 검찰은 어떻게 변했는지 점검해 보자. 국민들의 의식과 생활은 조금 변했는지 살펴보자.

  자신이 속한 단체나 조직의 이익에 반하는 행동과 말이 더 큰 사회적 이익을 위한 것이었다면 우리는 쉽게 그것을 ‘배신’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전근대적 사고 방식이 뿌리 깊은 우리에게 배신자가 되려는 사람들은 과연 개인적 이익 때문이거나 배신의 유전자를 타고 난 사람들일까? 내부 고발자를 비롯한 수많은 양심선언을 한 사람들의 심리와 행동을 연구한 책을 기다려 보지만 감감 무소식이다. 김용철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초헌법적 기관인 삼성과 맞서려고 했을까?

  2008년 한겨레신문의 인터뷰 특강 주제인 <배신>은 우리에게 또 한 번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반성하게 한다. 하종강의 말대로 본능적 유전자인 불평등에 대한 저항은 용기가 필요하고 생존을 넘어 선 실존적 고민에는 성찰이 필요하다. 나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배신 할 용기는 갖추고 있는가? 눈감고 귀막고 벙어리로 개인의 이익만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김용철은 결코 스스로 배신자라고 인정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영웅이 되고 싶지도 않았겠지만 말이다.

  이 책에는 김용철 외에도 정혜신의 ‘배신의 정신 분석’이 특별하다. 사람들이 느끼는 배신감을 객관적으로 들여다보는 부분은 고개를 끄덕이며 읽었고 배신의 개념을 구별하라는 조언이 인상적이었다. 진중권은 언제나 대중을 배신하며 한 길을 걷고 있다. 그의 논리와 오호의 감정이 어찌되었든 개인적으로 가장 유사한 성향의 인간으로 혼자서 친근감을 느낀다. 과학자 정재승의 이야기도 재미있다. 뇌과학의 입장에서 이마 뒤쪽에 있는 전전두엽에 위치한 자존심과 배신에 대해 좀 더 고민해 볼 수 있는 시간을 주었다. 다른 책에서도 여러차례 반복적으로 읽었지만 정태인의 FTA 이야기와 이명박 경제 이야기는 이제 저질 코미디에 가깝다. 그래도 사람들은 여전히 웃고 있다. 슬프다. 계속 미루고 있는 조국의 강연도 인상깊다. 앞당겨 차근차근 그의 책을 보고 싶어졌다. 법은 여전히 평등과 서비스가 아니라 권력과 부정의 수단으로 우리 사회에 검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어둠이 내린 창밖을 바라보다 즐겁고 발랄한 책 한 권이 읽고 싶어졌다. 내가 발딛고 선 이 현실에서 조금씩 움직여보지만 쉽지 않다. 더딘 발걸음이지만 불빛을 저버릴 수는 없다. 묵묵히 걷다 보면 길이 생길 것이라고 믿는다. 지식인도 투사도 아닌 나같은 사람의 정체성과 실존적 고민들은 언젠가 다수와 대중의 이름으로 기억될 것이다. 이 강연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 그리고 이 책을 읽는 모든 사람들이 같은 꿈을 꾸고 그것이 현실이 되는 세상을 상상해 본다. 그랬더니 슬몃 미소가 새어나왔다. 벌떡 일어나 뛰어야겠다. 또 다시.


081005-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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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의 세계
막스 피카르트 지음, 최승자 옮김 / 까치 / 200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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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알의 모래 속에서 세계를 보고,
한 송이 들꽃 속에서 천국을 본다.
손바닥 안에 무한을 거머쥐고
순간 속에서 영원을 붙잡는다.

                                                 - 윌리엄 블레이크, ‘순수를 꿈꾸며’중에서

  프랙탈 구조는 전체 구조가 부분 속에 나타나고, 부분의 자기 증식이 전체 형상을 만들어 내는 것을 말한다. 무한 반복의 구조 속에서 순환의 논리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끊임없는 자기 증식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시작도 끝도 없다. 한 알의 모래 속에서 세계를 본다는 말을 처음 접했을 때의 충격은 한 마디로 표현하기 어렵다.

  물론 개인적인 감동과 사색이겠지만 한 번 날개 짓으로 구만리를 날아간다는 붕새보다 길가의 핀 풀꽃의 흔들림이 더 큰 울림을 준다. 세상의 어떤 음악보다도 아름다운 소리를 정의할 수는 없다. 객관적일 수 없는 일에 기준을 마련하는 일만큼 무모한 일은 없다. 사람마다 다른 소리의 즐거움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침묵은 소리의 반대편에 있는 것이 아니다. 소음의 반대편, 잡음의 반대편에 서 있는 것이 침묵이다. 침묵은 단순히 소리가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침묵은 분명한 하나의 소리이며 우리에게 많은 말을 건넨다. 막스 피카르트의 <침묵의 세계>는 비트겐슈타인의 말을 빌리자면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상기시켜 주고 있다.

  물론 그 침묵은 무언의 말과 보이지 않는 메시지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절대 평화의 경지이며 무소음의 세계이고 정적이고 평화로운 세상을 뜻한다. 소리가 없다는 것은 움직임이 없다는 것이니 모든 사물이 그 자리에 정지화면으로 멈추어 선 상태를 말하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단순한 소리 없음이 아니라 말과 말 사이를 가로지르는 침묵에 대해 깊은 사색과 다양한 관점을 소개한다.

  침묵의 모습은 어떠한지에 대해 시작해서 인간을 둘러싼 말과 침묵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다시 이야기하고 침묵의 의미에 대해 생각한다. 말로 이루어지지 않은 모든 소통과 의미의 전달이 사실은 침묵의 다른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 발성 기관을 통해 언어로 표현되는 입말만이 소리라고 정의한다면 범위가 너무 좁아진다.

  그렇다고 해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소리가 침묵의 반대편에 서 있는 것은 아니다. 자연에서 들려오는 새들의 노래나 바다가 들려주는 파도소리 그리고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바람소리를 통해 우리는 살아 있음을 확인하고 소리가 만들어내는 생의 감각을 절감한다. 우리에게 소리는 삶의 조건이며 이유이고 확인이다.

  하지만 영원히, 끊임없이 소리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릴 수는 없다. 만약 침묵이 없다면 소리도 의미가 없다. 우리에게 침묵은 휴식이고 안정이다. 놀라운 것은 저자가 이 책에서 보여주고 있는 ‘침묵’에 대한 집중력과 자유로운 사유의 세계이다. 하나의 주제에 천착하는 수많은 작가들을 보아왔지만 <침묵의 세계>의 저자는 집요하다. 깊은 사색과 오랜 사유의 결과가 아니라면 쉽게 쓸 수 없는 이야기들을 풀어 놓는다. 고개를 끄덕이며 때로는 공감하고 때로는 갸웃거리며 이 책을 읽다보면 자연스럽게 침묵의 세계에 빠지게 된다.

  자아, 사물, 역사, 형상, 사랑을 주제로 침묵을 이야기하던 저자는 자연과 농부로 시야를 넓히고 ‘詩’와 침묵의 관계를 밝히고 있다. 조형 예술은 물론이고 잡음어로 표현된 소리와 침묵의 관계는 마치 살아 있는 대상과의 한 판 승부를 보는 듯하다. 라디오는 침묵의 절대악이 아닌가! 저자는 주제에 걸맞게 ‘라디오’가 지닌 속성을 통해 침묵을 돌아본다. 침묵이 없는 세계는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마지막으로 신앙과 침묵의 관계는 제목만으로도 사람들에게 많은 말을 하고 있다. logos와 pathos의 세계를 넘나드는 하느님의 말씀은 신앙의 전부가 아니지만 저자에게 신앙은 곧 하느님과 일치한다. 어쨌든 이 세상을 구성하는 본질은 말에서, 즉 소리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침묵은 더 큰 세계를 감싸고 말과 소리까지 감싸 안을 수 있는 훨씬 더 큰 의미로 여겨진다. 한계를 말할 수 없는 침묵의 세계에 대해 저자 막스 피카르트는 조용하고 낮은 목소리로 그러나 단호하게 말한다. 그 이야기를 가만히 따라가다 보면 침묵은 단순하게 소리가 없는 상태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어둠은 침묵과 닮아있다. 하루에 두 마디만 하고 살았던 학창 시절도 있었지만 침묵하고 싶을 때 말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부딪히기도 한다. 창밖에 내린 어둠은 대체로 말이 없고 소리를 흡수하며 휴식과 안정을 준다. 침묵에 대해 한번쯤 돌이켜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면 이 책은 충분한 의미를 가질 것이다. 아니 우리 주변의 모든 소리를 다시 듣게 되었다면, 내가 뱉어내는 말들의 의미를 돌아보는 기회가 되었다면 이 책은 책 이상이 된다. 소리없는 세상은 침묵조차 소음일까?


081003-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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썰레꽃 2009-03-17 0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 잘 보고 갑니다. 친구의 추천으로 이 책을 찾게 되었는데 '인식의 힘'님의 글을 읽으니 책이 확 당겨지네요. 군더더기 없는 문장, 참 인상적입이다.

sceptic 2009-03-24 23:02   좋아요 0 | URL
천천히 음미하며 읽어야하는 책입니다. 즐거움으로 가득하시길...
 
놀이, 마르지 않는 창조의 샘 - 생각하는 인간에서 놀이하는 인간으로 창조와 상상력의 원천으로서의 놀이 탐구
스티븐 나흐마노비치 지음, 이상원 옮김 / 에코의서재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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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놀아보지 않은 사람은 놀 줄 모른다는 말이 있다. 맞는 말이다. 그보다 우선 우리는 놀이가 무엇인지 모른다. 아니 잊고 산다. 가끔 어린아이를 통해서 놀이를 재발견한다. 기억의 한계 때문에 우리는 놀이의 즐거움에 대한 기억을 잊은 것이다. 유년 시절을 거쳐 성인이 되는 과정에서 놀이가 죄악시 되는 교육을 받은 것은 아닌가 모르겠다. 놀이보다 일이 우선시되는 사회는 피곤하다. 살아남기 위해서 달려야 하고 남들보다 앞서 달여야 한다는 강박관념!

  끊임없는 경쟁을 부추기는 사회, 생존경쟁이라는 말이 지상 목표인 삶은 암울하기만 하다. 대충 살자는 말이 아니라 꼭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는 것일까? 삶의 목표가 달라지고 방법을 조금 바꾸면 나라가 망하고 사회가 유지되지 않는 것일까? 지구상에 대한민국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놀이를 놓친다면 지루하고 딱딱한 결과물이 나올 것이다. 성스러움을 놓친다면 우리가 딛고 선 대지와의 연결성이 상실되어 버린다. - P. 17

  스티븐 나흐마노비치의 <놀이, 마르지 않는 창조의 샘free play>은 놀이와 우리들의 삶을 연결시켜 예술의 의미를 살펴보고 있다. 딱딱한 예술론 책은 물론 아니다. 편안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빡빡한 현실에서 벗어나 모든 걸 ‘놀이’의 관점에서 바라볼 순 없을까 싶은 생각을 하게 한다.

  창조성은 놀이에서 출발한다. 예술적 감성과 상상력은 저절로 만들어지거나 천재적 감성에 의해 돌출되는 하나의 사건이 아니다. 물론 개인차가 존재하지만 그것을 즐길 수 있는 마음과 열린 환경이 만들어내는 조화로움이 아닐까 싶다. 놀이는 인간의 본능이다. 알타미라 동굴에 벽화를 그리던 인류의 조상부터 현생 인류에 이르기까지 인간은 늘 놀기 위해 일했다. 일하기 위해 노는 불행한 인류의 모습은 얼마나 비참한가. 그것은 바로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이 책에서 말하는 창조성과 상상력은 호모 루덴스의 본능이며 특권이고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이자 목표이다. 놀이에서 출발하는 이 모든 즐거움을 우리는 잊고 사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 아니라 보다 더 많은 부의 축적과 승리를 위해 맹목적으로 달리는 경주마같은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지는 않은지 모르겠다.

똑같이 반복되는 것은 하나도 없다. 우주의 역사 속에서 모든 것은 단 한 번 일어날 뿐이다. - P. 41

  놀이의 원천, 과정, 극복, 결실이라는 네 개의 주제로 풀어낸 저자의 글을 풀어내는 솜씨는 탁월하다. 각 장마다 인상적인 선언들과 함께 열정, 의식의 흐름, 직관, 영감, 황홀경, 중독, 실수, 배움, 성숙, 확장, 생명, 예술에 관한 다양한 설명들이 설득력 있게 전개된다. 공부가 아니라 평범한 일상 속에서 마주하는 신선함으로 읽어내려 갈 수 있다.

  21세기에는 생각하는 인간이 아니라 놀이하는 인간이 살아남지 않을까? 창조와 상상력의 원천은 놀이에서 출발한다는 저자의 생각에 동의한다면 내 삶의 방식이 달라지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도 수정되어야 한다. 내가 하고 일을 즐기고 행복한 마음을 열수 있는 능력은 나와 타인을 위한 배려이며 놀이를 위한 전제 조건이다. 세상은 넓고 하늘은 푸르다.

  고개를 들어 푸른 하늘을 바라보면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있다. 그리고 웃을 수 있다. 소유데 대한 욕망을 버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를 선택한다면 인생은 더없이 풍요로워진다. 시간은 흘러가고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바라보노라면 때때로 사는 게 별로 즐겁지 않을 것 같다는 드는 사람이 많아 보인다. 즐긴다는 건 단순히 돈이 있어야 충족되는 즐거움이 아닌데도 말이다. 관점과 방식의 차이일 뿐! 그것은 어쩌면 선택의 문제이고 보이지 않는 안타까움이다.

놀이는 우리를 속박에서 해방하고 행동 영역을 넓혀준다. 놀이를 통해 반응이 풍부해지고 유연한 적응력도 길러준다. 이는 놀이의 진화적인 가치이기도 하다. 현실을 재해석하고 새로운 시각을 얻음으로써 우리는 고정된 사고에서 벗어난다. 놀이는 자신의 능력을 재확인시키고 전례 없는 방식으로 그 능력을 사용하도록 한다. - P. 65

  고정관념에서 탈피하려는 노력으로 오히려 강박증에 시달리던 시절이 있다. 모든 억압과 순종적 사고 방식으로부터 자유롭게 사유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아니 그 안락함으로부터 먼저 벗어나야 한다. 창조성과 상상력은 바로 그 지점에서 비롯된다. 놀이는 진정한 자유의 출발이며 자신의 능력을 확인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하다.

  누구나 예술가가 되고 싶어하진 않지만 모든 사람은 놀고 싶어한다. 그 놀이의 의미를 어디서 어떻게 풀어내는 가는 개인적 취향뿐만 아니라 인간관계, 사회적 환경에도 영향을 받는다. 이 책에서는 그것을 창조성과 상상력이라는 키워드로 묶어 냈지만 예술과 무관한 일상에서도 매우 중요한 요소이며 충분한 의미와 가치를 지닌다.

  과연 우리는 어떤 과정을 거쳐 이 자유를 얻을 수 있을 것인가? 저자는 책의 말미에서 이렇게 역설한다. 이 단계를 연습하자는 말이 아니라 성장과 진화를 통해 얻은 ‘창조의 자유’를 즐겨보자는 말이다. 자, 한번 놀아보자. 제대로!

창조의 자유는 성장과 진화가 가져다준 열매다. 창조적인 삶의 순환에서 우리는 최소한 세 단계를 거친다. 순수(혹은 발견) 단계, 경험(혹은 몰락) 단계, 통합(혹은 회복) 단계다. 탄생, 장애, 돌파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이 과정은 물론 단순하지도 선형적이지도 않다. 각 단계는 인생 전체에 걸쳐 복잡하게 전환되고 서로 얽힌다. - P. 239


08093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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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청소년에게 - 2.0세대를 위한 기성세대의 진실한 고백 대한민국 청소년에게 1
강신주 외 지음 / 바이북스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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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웹 2.0세대. 신인류가 다가온다. 세대를 뛰어넘는 시대정신을 대표하는 말이 있다. 각 세대의 특징을 한 마디로 정리하기는 어렵지만 21세기의 주역이 될 새로운 세대에게 적용되는 첫 번째 특징은 웹 2.0세대라는 말일 것이다. 대한민국의 청소년은 2008년을 기억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참여’와 ‘개방성’을 특징으로 한 세대의 진경을 보았기 때문이다.

  역사는 촛불집회의 의미를 기억할 것이며 이명박 정권의 검역 주권 포기와 근현대사 역사 교과서 왜곡시도, 경쟁 지상주의 교육 정책으로 인한 황폐화된 공교육의 책임을 물을 것이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며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오지만 국가는 항상 대다수 국민의 뜻을 외면했고 기득권 세력의 집단 이기주의에 복무했으며 그들의 헤게모니를 강화하는 정책을 일관되게 펼쳐왔다. 왜 80이 20에게 지배당하는지 고민해 보지 않을 수 없는 시점이 되었지만 대다수 국민들은 이를 외면하고 왜곡 보도와 지배 이데올로기에 세뇌 당한 채 자신의 계급적 위치와 국가의 정책 목표 사이에서 길을 잃고 헤매고 있다.

  그러나, 희망은 발랄하고 즐거운 상상력으로 무장한 청소년들에게 있었다. 지식과 정보의 무한한 확장과 공유가 가능한 세대에게 웹을 통한 진화 속도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대한민국 청소년에게>라는 책은 기성세대가 대한민국의 청소년들에게 바치는 축사와도 같다. 어설픈 충고와 비전의 제시가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소년들에게, 현실에 눈을 뜨고 억압과 순종의 관습적 사고에서 벗어날 것을 호소하는 간곡한 당부와 진심어린 충고들이다.

  관점과 세대에 따라 그들을 바라보는 눈이 다를 것이다. 유모차를 밀고 나온 엄마들에게까지 시비를 거는 사법 권력은 법이라는 보호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사람들에게 그 칼날을 겨누고 있다. 국가는 폭력이므로 국가에 저항하라는 톨스톨이의 말이 떠오르는 것은 어제 오늘의 일 때문만은 아니다. 미래의 주역이 될 청소년들은 과연 이 시대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진화하는 청소년들의 시선과 시대의 흐름을 읽어내지 못하는 기성세대의 판단과 대책은 불쌍하기까지 하다.

  아직도 머리카락이나 치마의 길이로 학생들을 억압하는 교사들과 규율와 질서라는 미명아래 기존 질서에 순종하고 복종하는 시스템이 건재하는 한 즉흥적이고 창의적 상상력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19세기 교실에서 20세기 교사들이 21세기 아이들을 가르치는 한 대한민국의 미래는 어둡기만 하다. 교사들조차 무비판적인 사고 방식으로 과거의 틀을 답습하고 ‘왜’라는 질문을 하지 않으며 복지부동과 매너리즘에 길들여져 있는 한 대한민국의 청소년에게 할 말이 없어진다. 그것은 교육이 아니라 훈련과 훈육에 불과하다.

  이 책은 2008년 촛불집회를 계기로 웹 2.0 시대를 당당하게 열어젖힌 청소년 세대에게 던지는 기성세대들의 말잔치에 불과하다. 세대 간 통합이나 연대, 교육에 대한 기본적인 틀에 대해 고민하지 않은 채 청소년들에게 올바로 자라주기를 바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들은 슈퍼맨이 아니며 스스로 자가 증식하는 아메바가 아니다.

  인문학 정신을 기대하는 강신주, 홍세화, 김성동, 김조년, 고은의 발언들은 이름 모를 불특정 다수인 청소년들에게 말을 걸고 있으나 그들이 이 한 권의 책을 통해 얼마나 현실을 올바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이들의 글과 말이 빚어낸 슬픔이 아니라 대한 민국의 경쟁적, 억압적 교육 현실에 대한 반성과 성찰 없이는 미래도 있을 수 없다는 냉정한 현실 인식에 기인한다.

최열, 박승옥, 김낙중, 김규동은 생명과 평화에 대해 이야기한다. 환경과 문화라는 21세기의 거대 담론에 대해 과연 청소년들이 고민할 시간과 기회가 주어지기는 하는지 의심스럽다. 부정적 현실에 바탕을 둔 삐딱하게 보기가 아니라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대안의 마련과 현실 타개의 모색이 필요하다. 내일의 역사를 담당할 청소년들에게 합리적이고 비판적인 판단 능력과 다양한 관점의 세상을 보여줘야하는 것은 기성 세대의 의무이며 책임이기도 하다.

  이 책의 마지막에서 ‘2.0 세대와 시대정신’이라는 제목으로 이이화, 우석훈, 권오성, 기세춘, 하종강, 이현주의 글을 싣고 있다. 각자의 입장에서 그리고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바라보는 비판적 관점에서 이들은 청소년들에게 ‘희망’을 걸고 있는지도 모른다. ‘열정’이라는 젊음의 특권을 포기하지 않고, 이기주의와 왜곡된 물신주의에 저항하며 어떤 세상을 만들어 가는지는 지금 기성세대의 치열한 고민에서 비롯될 것이다.

  책임을 미루듯이 그들에게 맡기는 태도는 비겁한 기회주의에 불과하다. 이른바 좌파 지식인들에 해당할 만한 사람들의 글을 모아 한 권의 책을 만들고 그 작은 열망과 신념들이 모여 미래의 희망을 만들어 갈 수만 있다면 이런 책을 얼마든지 쏟아져 나와도 좋다. 하지만 그들의 희망대로 청소년들이 이런 종류의 책을 얼마나 읽어 줄 것인가? 누가 이 책을 읽힐 것인가? 그들의 부모와 교사들을 과연 이 책을 읽힐 만 하다고 판단할 것인가?

  기성세대의 생각이 어떠하든 그들은 지금도 진화하고 있으며 참여와 연대를 경험하고 있다. 개방적이고 상호 작용이 가능한 그들의 힘은 결코 그 크기를 짐작조차 할 수 없다. 그들이 꿈꾸는 세상은 지금과는 달라야 하고 그들이 만들어 갈 세상은 ‘더불어 함께’ 갈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대한민국이라는 좁은 사회에서 벗어나 보다 넓고 큰 세상을 바라보고 인류가 걸어온 역사에서 교훈을 얻어 우리가 나아갈 방향을 다시 세웠으면 좋겠다. 세대가 교체되고 미래 사회의 아젠다가 다시 설정되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즐겁고 명랑하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 갈 것이라는 믿음조차 없다면 현실은 견디기 힘들다.

  긍정적인 사고방식과 순종적이고 기회주의적인 태도를 혼동하면 안된다. 이기적인 욕망과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희생을 현대적 삶의 길이요 진리라고 인식해서도 안된다. 어떻게 살 것인가? 무엇을 위해 어디로 걸어가고 있는가? 청소년들에게 매일 던지고 싶은 질문이다. 나는 누구인가? 이제, 마음의 눈으로 거울을 볼 시간이다.


080928-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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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다보면 문득 창비시선 291
정희성 지음 / 창비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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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의 흐름을 확인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이다. 나는 시인들의 나이듦을 통해 내 나이를 확인하고 세월을 절감한다. 가끔씩 그들의 사진을 통해 변해가는 모습을 확인한다. 나도 그렇게 변해갈 것이다. 눈에 보이는 나이가 아니라 시를 통해 확인되는 변화의 흐름은 가슴이 아리도록 슬프기도 하고 때로 낄낄거리기도 하고 한숨을 내쉬기도 한다.

  정희성의 <저문강에 삽을 씻고>(1978)를 대하고,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1991)를 거쳐, <詩를 찾아서>(2001)을 다시 꺼내 뒤적여 본다. 책꽂이에 먼지가 쌓여가고 시인은 나이를 먹는다. 오랜만에 시집을 읽다가 웃었다. 편안하고 친근한 구절들은 결코 쉽게 나오지 않았다. 물론 단순히 시간이 모든 걸 해결해 주지 않지만 그만한 연륜과 여유는 또 젊은 시인들에게 찾아보기 힘든 것이다. 어느 쪽이든 날카롭고 첨예한 감각만큼 중요하고 아름다워 보이는 것은 이제 내 나이의 무게 때문이기도 하다면 지나치게 주관적 판단일까 모르겠다.

  시가 보여줄 수 있는 아름다운 진경 속에서 길어 올린 맑은 시들이 언제나 그의 시를 기다리게 했다. 다작은 아니지만 나올 때마다 충분히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시에 흠뻑 취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아직 시간이 남았지만 올해 읽은 최고의 시집으로 주저없이 이 시집을 꼽겠다.

희망

그 별은 아무에게나 보이는 것은 아니다
그 별은 어둠속에서 조용히
자기를 들여다볼 줄 아는 사람의 눈에나 모습을 드러낸다

  서시의 힘은 강렬하다. ‘희망’이 무엇인지 간결하게 말한다. 희망은 원하는 자의 눈에서나 읽어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눈 속에 주관적이고 다양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희망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어쩌면 당연한 말이지만 희망은 별이다. 별은 어둠 속에서만 빛나며 찾는 사람에게만 보이는 특별한 존재이다. 살아가면서 그 별은 눈에 보일 수도 보이지 않을 수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을날

길가의 코스모스를 보고
가슴이 철렁했다
나에게 남은 날이
많지 않다
선득하니, 바람에 흔들리는
코스모스 그림자가 한층 길어졌다


  이 시를 읽고 내가 철렁했다. 미래를 예견하는 듯한 작가들의 글을 읽는 것은 불편하다. 오규원이 그랬고 이청준도 그랬다. 세월의 흐름 속에 사람이 죽어가는 것은 당연한 이치지만 그것을 예견하거나 스스로를 돌아보기만 하는 시는 섬뜩하기까지 하다. 서글픈 아름다움이 묻어나는 시로 읽혔다.

  이 가을에 코스모스 그림자가 길어지면 예사롭게 보이지 않겠다. 벌써 피어있을 코스모스를 보지도 못하고 가을을 보내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아, 하루가 다르게 찬바람이 분다. 또 하늘빛이 달라졌다.

해골

저 몸서리치는
캄캄한 눈구멍이
이를 악물고
세상을 내다보고 있다
한때는 저 눈에
별이 빛났으리


  가슴이 철렁했다가 이제는 아득해지는 법이다. 시간의 풍화작용. 우리는 언젠가 무화無化된다. 존재는 소멸하고 마는 법이다. 먼지가 되어 사라져 버릴 육신의 허망함이여. 이를 악물고 세상을 내다보지 말고 허허로운 눈빛으로 한 세상을 짊어지고 가자. 거기 그렇게 놓여있는 채로.

  누구나 해골이 되어 만난다. 허무혼의 노래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아주 먼 미래에 대한 후일담으로 읽었다. 한 때는 모든 사람의 눈에도 별이 빛났으리라. 살아있는 지금도 눈에 별 하나 없는 사람들과 더불어 오늘도 우리는 저 험한 정글을 향해 뛰어가고 있다.

희망공부

절망의 반대가 희망은 아니다
어두운 밤하늘에 별이 빛나듯
희망은 절망 속에 싹트는 거지
만약에 우리가 희망함이 적다면
그 누가 이 세상을 비추어줄까


  그래도 희망공부를 멈출 수는 없다. 여전히 시는 희망이며 시를 쓰고 읽는 일은 희망공부와 다름없다. 어두운 곳에서 더욱 빛을 발하는 별처럼 희망은 절망 속에서 피어나는 법이다. 이 세상을 비춰줄 마지막 불빛은 희망이다. 그래서 우리는 평생 공부해야 한다. 잠시도 쉬지 말고 게으르고 누추한 곳에서 벗어나 희망을 비춰줘야 한다.

  그 희망이 때로는 먼 미래의 시간일 수도 있고 가까운 사랑일 수도 있겠다. 까만 밤하늘에 오늘도 별이 빛나는 이유는 아득한 그리움 때문이거나 보이지 않는 희망에게 기대기 위해서일 것이다. 모은 아픔과 상처를 보듬어줄 어둠에게 속삭여 본다. 작은 희망들이 모여 강을 이루고 바다를 이루어 밤하늘의 별이 되고 은하수가 될 것이라고.



가까이 갈 수 없어
먼발치에 서서 보고 돌아왔다
내가 속으로 그리는 그 사람마냥
산이 어디 안 가고
그냥 거기 있어 마음 놓인다


  산은 사람이 아니다. 사람은 산이 아닌 것처럼. 그냥 거기 있는 사람은 영원이라는 기준으로 보면 찰나에 불과하다. 부질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의뭉스런 몸짓을 하는 것은 시인의 넉살이거나 정교한 희망이거나.

  주위를 둘러봐도 산은 보이지 않고 그저 야트막한 능선들이 이어져 있다면 또, 그 아니 즐거운가. 산이 사라진 자리에는 아무것도 놓일 것이 없으므로.


080925-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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