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읽기의 달인, 호모 부커스 인문학 인생역전 프로젝트 5
이권우 지음 / 그린비 / 2008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책은 아직도 유효한가? 각종 위기설 속에서 책의 위기는 하루 이틀의 이야기가 아니다. 인문학의 위기는 곧 책의 위기를 의미한다. 눈부신 기술의 발전과 영상 매체의 진화 속도는 지식과 정보의 수단을 보다 편리하게 만들었다. 시간과 노력을 줄이고 보다 많은 지식을 얻기 위한 방법들이 등장했다. 하지만 책이 가진 가치와 위력에 대적할 만한 것은 아직 찾기 힘들다.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상상력이다.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생각은 인간의 지적 능력과 통찰력 그리고 사유의 범위를 무한하게 팽창시킨다. 인간의 사고 능력을 개발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책을 읽고 생각하고 토론하고 글을 쓰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다. 어쩌면 너무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방법을 우리는 에둘러 가고 있는 지도 모른다. 보다 쉽고 간단한 방법을 찾아보지만 요령부득이다.

  책 좀 읽는다는 무림의 고수 중에 이권우라는 사람이 책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 놓은 책을 내 놓았다. 그린비에서 인생역전 프로젝트 시리즈로 출판되어 <호모 쿵푸스>와 <호모 루덴스>에 대한 좋은 추억으로 별 고민 없이 주문했다. 책은 단순하게 2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왜 읽어야 하는가’, 2부는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이다. 가장 단순하지만 책에 관한 본질적인 물음에 답하고 있다. 간단하고 알기 쉽게 풀어내는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독자들은 책을 읽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들게 한다. 그럼 아주 잘 쓴 책이라는 뜻이다. 게다가 읽는 방법까지 제시한다. 기존의 상식을 뒤집는 이야기들을 통해 진짜 책읽기가 무엇인지 그런 방법을 통해 우리가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 설득하고 있다.

  이 책의 목적은 단순해 보인다. 책을 읽게 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1차적인 목표는 달성한 듯 하지만 중요한 것은 책을 읽지 않는 사람들이 이 책을 읽을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내가 항상 딜레마에 빠지는 문제는 안 읽어도 되는 사람들 즉, 책벌레들이 이런 종류의 책에 관심과 흥미를 보인다는 것이다. 읽으면서 깊이 공감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짓는다. 정작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사람들은 이 책을 얼마나 읽을 것인가 그것이 궁금하다.

  저자가 말하는 바,  책을 읽는 이유와 목적 그리고 방법론을 거의 그대로 따라하는 나 같은 종류의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모두가 지킬 수 없는 방법들이란 결국 이상적인 방법에 불과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과정을 처음부터 모두 해 보자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상황과 업무 혹은 관심과 목적에 따라 다양하게 변형할 수 있다. 결국 한 권의 책을 읽고 토론하고 겹쳐 읽으며 확장시키고 글쓰기를 통해 정리하는 삶은 풍요로울 수밖에 없다. 전문가에게만 해당하는 일이 결코 아니다. 누구나 즐겁고 재미있게 접근할 수 있는 일이다. 다만 우리의 교육 환경과 구조가 그것을 가르치지도 배울 수도 없게 만들어 놓았을 뿐이다.

  책의 말미에 ‘책 읽는 학교가 되어야 한다’는 제목을 보다가 깊은 한 숨을 내쉰다. 참으로 척박한 대한민국의 학교 현실 때문이다. 부모들의 요구 사항이나 학생들이 책에 대해 가지고 있는 관심 정도를 감안하고 대학 입시와 결부되어 고민하면 절대 답이 나오질 않는다. 논술 광풍이 몰아쳐 초등학생용 논술 대비 도서가 출판될 정도이니 무한 경쟁과 생존의 본능을 위한 책읽기 외에 다른 대안이 제시 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쓰기 위한 읽기 교육을 향해’라는 에필로그는 벌떡 일어나 박수를 보내고 싶다. 한 두 사람의 교사나 그에 뜻을 같이 하는 학부모 몇 명이 모여 대안 학교를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다. 너무 오버한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학벌없는 사회’를 지향하고 ‘대학평준화’가 이루어지지 않는 한 참으로 멀고도 험한 길이며 이상적이고 꿈같은 목표이기도 하다. 2008년 대한민국의 현실을 직시하면 이 책은 참으로 불온하다.

  표정훈이나 조희봉을 통해 고수들의 일면을 들여다 본 사람이라면 이 책을 통해서 그리 큰 호기심이나 특별한 충격을 받을 일은 없다. 다만, 구체적이고 다양한 방식으로 책을 다루는 법에 대해 공감하고 이해하며 미처 생각해 보지 못한 부분들에 대해 고개를 끄덕일 정도의 책으로 읽을 수 있겠다. 책의 목적 자체가 읽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니 당연한 것일 수도 있겠다.

  나는 혼자 생각한다. 인문학 분야에 두루 통달한 사람이 초보들을 위해 철학, 역사, 문학, 사회, 예술 등 다양한 분야의 안내서가 나왔으면 좋겠다고. 수준과 내용을 일괄해주고 분야별로 정리해주며 차근차근 기본적인 특징과 방법을 설명해 주는 책은 없을까? 출판 관계자가 계시다면 혹 여쭙고 싶다. 그런 저자를 하루 빨리 발굴하고 탁월한 기획과 편집으로 하루 빨리 그런 종류의 책을 만나고 싶다고 말이다.

  이 시리즈의 부제처럼 따라 붙은 ‘책읽기의 달인’은 필요 없다. 한글만 알면 누구나 읽는다. 문맹이 아니라 책맹이 늘어가는 세상에서 도대체 왜 아직도 책 타령인지 모르겠다는 사람들에게 이 책을 억지로 읽힐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적어도 세상에 수많은 즐거움 중에 책도 한 자리 할 수 있다는 공감 정도는 얻어내야 할 것 아닌가. 책읽기의 달인은 아니어도 많은 사람들이 그 달인을 부러워하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가 아닌가 말이다.

  막연하게 책을 읽어야한다고 생각하는데 정작 필요성과 방법을 모르는 동생에게, 책보다 재미있는 것이 훨씬 많은 세상에서 왜 굳이 책을 읽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친구에게, 책만 보면 알러지 반응으로 얼굴이 벌개지는 후배에게, 드라마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외치는 어머니에게, 지금 이 나이에 책은 무슨 책이냐고 말하는 할아버지에게 은근슬쩍 선물해 볼 수 있는 유쾌한 책이다. 

  책읽기는 기본적으로 혁명이다. 지금 이곳의 삶에 만족한다면 새로운 것을 꿈꿀 리 없다. 꿈꿀 권리가를 외치지 않는 자가 책을 읽을 리 없다. 나를 바꾸려 책을 읽는다. 애벌레에서 탈피해 나비가 되려 책을 읽는다. 세상을 바꾸려 책을 읽는다. 우리의 삶을 억압하는 체제를 부수고 새로운 공동체를 이루려 책을 읽는다. 그러하길래 책읽기는 불온한 것이다. 지배적인 것, 압도적인 것, 유일한 것, 의심받지 않는 것을 희롱하고, 조롱하고, 딴죽 걸고, 똥침 놓는 것이다.
  변신을 꿈꾸는가. 그렇다면 책을 읽어야 한다. 다른 세상을 상상하고픈가. 그렇다면 책을 읽어야 한다. 보라. 혁명전선에 뛰어든 체 게바라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지 않은가. - P. 76


080923-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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웽스북스 2008-09-23 2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저는 이책 서평단으로 받아서, 읽어야 되는데... 또 왠지 손이 안가고 있어요. 인식의 힘님 리뷰 덕에, 읽을 마음이 좀 나네요 ^_^

sceptic 2008-09-25 19:18   좋아요 0 | URL
그냥 편안하게 읽히던데요...^^ 손대면 금방 책장 넘어갈 거예요.
 
찔레꽃
정도상 지음 / 창비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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찔레꽃 붉게피는 남쪽나라 내고향
언덕위에 초가삼간 그립습니다
자주고름 입에물고 눈물 젖어져
이별가를 불러주던 못믿을 사람아,

달뜨는 저녘이면 노래하던 동창생
천리객창 북두성이 서럽습니다
작년봄에 모여앉아 배긴사진
하염없이 바라보니 즐거운 시절아.


  인터넷을 뒤적거려 패티 김과 백난아가 부른 ‘찔레꽃’을 들었다.

엄마의 가는 길에 하얀 찔레꽃
찔레꽃 하얀 잎은 맛도 좋지
배고픈 날 하나씩 따먹었다오
엄마 엄마 부르며 따먹었다오

밤깊어 까만데 엄마 혼자서
하얀 가루 아프게 내려오시네
밤마다 꾸는 꿈은 하얀 엄마꿈
산등성이 나무로 내려오시네

가을밤 외로운 밤 벌레 우는 밤
초가집 뒷산길 어두워질때
엄마품이 그리워 눈물 나오면
마루 끝에 나와 앉아 별만 셉니다.

  이어서, 정하나와 이은미가 부른 ‘찔레꽃’을 들었다.

  정도상의 연작소설 <찔레꽃>은 처음부터 익숙한 찔레꽃의 선율이 떠올랐다. 다만 ‘찔레꽃 붉게피는 북쪽나라 내고향~’이라고 가사를 바꾸어 부른다면 이 소설에 더욱 잘 어울린다. 고향과 어머니는 도시의 삶에 익숙한 우리들에게도 따뜻하고 편안한 느낌을 전해준다. 언젠가 어딘가로 돌아갈 수 있는 곳이 있는 사람은 그리움을 안다. 파편화된 삶의 조각들이 또 하나의 퍼즐처럼 연결된 곳에서도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최소한 물질적 풍요로움을 누리게 때문이다.

  기본적인 생활 여건으로부터 추방당한 사람들의 신산스러움을 겪어보지 않는 나로서는 공감의 능력만을 최대한 발휘해 볼 뿐이다. 6.25와 1.4후퇴를 기억하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이야기에 공감하지 못하는 것은 후세대의 잘못은 아니다. 다만 동시대에 벌어지고 있는 현실에 대한 외면은 조금 다른 시각으로 접근해야 한다. 분단 50년 세월이 훌쩍 지났지만 남과 북의 관계는 지구상의 어느 곳보다 첨예한 대립을 유지하고 있다. 도대체 무엇때문인가?

  정권이 바뀔 때마다 대북 정책은 일관성을 잃었고 2008년 9월 현재 북한은 핵연료봉 폐기를 정지한 상태이다. 한반도의 문제는 여전히 우리의 손을 떠나있고 6자회담이라는 주변국들과의 역학 관계 속에서 풀어낼 수밖에 없다. 미국의 주도권 아래 나머지는 들러리에 불과하다. 이명박 정권은 한 술 더 뜨고 있다. 무조건적 퍼주기를 중단하겠다는 선언과 북한의 인권 문제를 거론하고 나섰다. 남북관계는 경색국면으로 접어든 지 오래고 평화와 화합의 노력은 중단된 지 오래다. 반목과 질시로 민족의 통일이 가능한지 궁금하다. 이데올로기의 문제가 아니라 이제는 생존의 문제가 되어버린 남북 문제에 접근하는 방법과 태도가 달라져야 하지 않은가. 위정자들이 바라보는 남북관계는 정책의 일관성 없이 5년마다 바뀌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국민들도 모두 동의하고 있는지 먹고 사는 일이 바빠 관심이 없는 것인지.

  황석영의 <바리데기>를 통해 독자들은 무엇을 읽어냈는지 모르겠다. 정도상의 <찔레꽃>은 우리에게 또 어떤 의미를 던져주었는지 알 수 없다. 단순히 탈북 여성 문제를 다룬 이색적인 소설로 비춰지는지 아니면 우리 형제와 부모들이 겪고 있는 진행형의 아픔인지. 단편들이 모여 연작의 형태를 이루고 있는 이 소설은 북한의 주민들이 겪고 있는 삶의 모습이 여실하게 드러난다. 작가의 직간접적 경험이 고스란히 녹아 있어 현장감 넘치는 묘사와 생생한 표현들이 소설의 긴장감을 더해준다. 겨울 압록강변에서 시작되는 이 이야기는 충심이었다가 메이나였다가 소소였다가 은미로 탈바꿈하는 한 여성을 통해 이 시대의 비극을 극명하게 전달하고 있다.

  생존의 문제인 탈북자에게 정치적 이념과 종교적 시혜 문제로 접근하는 모든 주변 상황들을 비웃고 있기도 한 이 소설은 그들이 과연 한국 사회에서 어떤 사람들로 화합하는 지의 문제를 거론하기보다 현재 상황의 심각성과 그들의 과연 우리와 무관한 사람들인지 되묻고 있는 듯하다. 독자 일반의 각성을 촉구하는 프로파간다가 아니라 조금 더 넓은 시각과 열린 마음으로 그들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작가의 메시지가 고스란히 전해진다.

  소설의 감동은 기발한 아이디어와 감칠맛 나는 문장으로 전해지는 경우도 있지만 이렇게 시대현실을 투명하게 비춰주는 거울의 역할을 할 때가 더 많다. 정도상의 소설은 아프고 쓰린 생채기를 눈앞에 정면으로 드러내고 있어 독자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그 불편함을 잊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부지런히 그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야 한다.

  진정으로 인간의 존엄과 권리를 생각한다면 21세기의 유랑민이 되어버린 그들의 삶과 가족의 의미를 되새겨 보아야 한다. 정치적, 군사적 역학 관계는 미국의 패권주의의 들러리에 불과함을 직시해야 한다. 개방과 호혜의 원칙만이 우리 민족이 공생할 수 있는 유일한 대원칙이라는 사실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순진하고 이상적 대안이 아니다.

  반인권적 반평화적 행위를 서슴지 않는 정부와 국가권력이야말로 민족의 화합을 더디게 하며 더불어 함께 공존해야 한다는 당연한 진리로부터 국민들을 멀어지게 하고 있다. 한 권의 소설로 사람들의 생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작가가 믿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우리들 삶의 중요한 부분들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함께 고민하고 해결 방안을 모색하고 그것을 감동적인 소설로 형상화해내는 작업이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면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정권이 바뀐 지 1년도 지나지 않았지만 모든 분야에서 우려할 만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근현대사 교과서가 좌편향이라 손을 봐야겠단다. 국민 대다수가 노동자로 살아가는 데도 노동자의 권리나 노동법에 대해 제대로 가르치지 않는 비정상적인 나라에서 이제 또 다시 국가 지배이데올로기의 망령이 살아나고 있다. 박정희, 전두환 시절의 부활이 멀지 않았다. ‘용비어천가’를 달달 외워 대학에 입학하고 신경림이나 김지하의 작품을 빨갱이의 시로 몰아 문학 교과서에서 삭제하는 날이 머지 않았다. 우리는 가만히 손놓고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저들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리라. 오, 필승~ 대.한.민.국!

  10년 후에, 아니 지금 이 시대의 작가들은 도대체 무엇을 쓰고 있으며 이 시대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그것이 궁금해졌다. 갑자기.


08092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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끌리고 쏠리고 들끓다 - 새로운 사회와 대중의 탄생
클레이 셔키 지음, 송연석 옮김 / 갤리온 / 2008년 6월
평점 :
절판


  가끔 아날로그 시대를 그리워한다. 사람들은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시절에 대한 그리움을 본능처럼 만들어낸다. 그 시절은 선악과 오호의 판단을 넘어 아련한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미화된다. 디지털과 네트워크로 무장된 신인류의 삶을 과거와 비교할 때 단순히 진보했다거나 행복해졌다고 말하지 않는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그때는 그 시절의 문법이 있었다. 손으로 꾹꾹 눌러쓴 편지가 있었고, 연락이 닿지 않아 애태우는 밤이 존재했으며 친구나 가족의 소중함은 지금과는 다른 형식으로 다가왔다. 인관관계는 전면적이었고 타인에 대한 애정과 호기심은 진지하고 깊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하지만 이제 즉흥적이고 감각적이라고 할 만큼 관계를 맺는 방식은 빠른 속도로 변화하고 있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맺는 관계의 수가 아니라 관계의 질을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관계의 수가 많아지면 질적 변화가 일어나기도 하고 관계 맺는 방식에 따라 그 의미도 달라진다. 네트워크 세상은 시간과 공간의 벽을 허물었다. 지구의 끝에 사는 사람들과도 커뮤니티를 형성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빛의 속도만큼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 세상의 흐름을 간파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노력이 요구되는가.

  클레이 서커의 <끌리고 쏠리고 들끓다Here comes everybody>는 우리말 동사를 활용하여 인터넷의 특성을 감각적으로 표현한 제목을 사용하고 있다. 원제에서 알 수 있듯이 이제 모든 사람이 모인 곳은 시장이나 교회가 아니라 인터넷이다. 네트워크 공간을 맹신하라는 뜻이 아니라 필수적인 관계망의 현장으로 그리고 세상의 변화가능성의 중심으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뜻이다. 이제 이곳을 떠나서 상상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어졌다.

  무엇을 상상하든 우리는 그 이상을 인터넷에서 확인하고 있다. 상상만으로 그치지 않고 시도해보고 부딪혀 보고 대화를 나누고 행동에 옮겨보는 과정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생각의 속도를 뛰어넘을 듯이 빠른 속도로 변해가는 세상에서 우리는 정확한 흐름을 읽어내야 한다. 그 방향과 목적에 따라 거시적인 안목에서 변화의 흐름을 감지하지 못한다면 눈뜬 장님처럼 살아야 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현실세계와 구별되는 네트워크 세상을 정확하게 분석하고 있다. 미래에 대한 전망과 과거의 기억이 아니라 지금 현재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정확히 해석함으로써 다음 세대와 모호한 미래를 에둘러 짐작하게 한다. 비판적이고 예리한 판단력은 현실에 대한 철저한 검증과 사례를 통해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법이다. 저자는 이런 면에서 높은 점수를 받을 만하다.

  새로운 사회는 결국 새로운 인류의 탄생을 말한다. 세대를 점검하는 말들이 유행처럼 퍼진다. X세대, 신세대, 386세대, 네트워크세대…. 사회적 의미와 정치적 목적에 따라 다양한 명칭이 붙었지만 실상 우리의 머리에 떠오르는 감각적 이미지는 쉽게 바뀌지 않는다. 사람들은 깊이 있게 분석하거나 그 이면을 들여다보려는 노력에 익숙하지 않다. 대부분의 경우 피상적인 이미지와 감각적 분위기로 그들을 파악한다. 그래서 선입견과 편견은 죽순처럼 자라나고 긍정 혹은 부정처럼 흑백논리로 그들을 재단한다.

  가장 최근의 예로 촛불시위를 들 수 있다. 배후에 전교조가 있다는 말에서부터(전교조가 정말로 그렇게 다양하고 많은 국민들을 동원할 수 있다면 세상은 확연히 달라질 수도 있을 것이다) 경찰이 유모차부대까지 수사하는 현실에 이르면 할 말을 잊게 한다. 변화의 흐름을 읽어내지 못하고 현실을 읽어내려는 무지한 사람들이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또 다른 그들을 양산하기 위해 조중동과 기득권 세력은 얼마나 피눈물나게 노력하고 있는지 모른다.

  이 책의 서두에서 변화의 신호탄을 쏘아 올리는 사람들의 사례가 등장한다. 그것은 인테넷을 통해서 가능한 일이고 21세기가 아니면 불가능한 변화들이다. 시대의 흐름과 변화의 속도를 따라잡기 위해서 네트워크를 이해하는 것은 필수가 되었다. 특히 대한민국의 경우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인터넷 보급률이 높다. 노무현은 당선된 것만으로도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 결국 역사의 물결이 거꾸로 흐르고 있지만 그 현실을 뼈저리게 느껴야 하는 국민들의 댓가는 너무 크다. 요즘 입버릇처럼 말한다. 당신들이 뽑은 대통령, 5년간 온몸으로 느껴보라. 물론 대통령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다. 노란 고름처럼 터지지도 않고 고여서 딱딱하게 굳어가는 상처의 주변이 더욱 심각하다.

  새로운 사회와 새로운 대중의 탄생은 공유의 혁명과 실천하는 커뮤니티로부터 출발한다. 브리태니커를 비웃는 위키피디아 방식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다음 세대 혹은 현실 세계의 큰 부분에 대해서 눈을 감게 되는 것이다. 혁명에는 반드시 손해 보는 사람이 있다. 모두가 행복한 세상은 절대 도래하지 않는다. 커다란 행복을 누리는 소수의 몰락은 필연이다. 그들의 세금정책과 부동산 정책, 교육 정책과 대북 정책을 들여다보라. 누구에 의한 누구를 위한정책인가? 새로운 사회는 실천하는 대중 없이는 불가능하다. 이기적 욕망의 절제와 사적 소유에 대한 반성이 없이는 ‘공유’할 수 없다. 공유하고 실천하는 커뮤니티가 활성화되고 현실에서 변화 가능성을 점검하는 일이 필요하다. 우리는 누구나 미래를 준비한다. 미래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지만 바람직한(?) 혹은 행복한 미래는 저절로 다가오지 않는다. 타인과의 경쟁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가치도 아니다.

  저자는 변화의 과정을 점검하고 분석하는 데 그치고 있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지만 사실 그 다음은 독자들의 몫이다. 이 책이 현실을 분석하는 가장 훌륭한 틀로 기능하지는 않는다. 인터넷이라고 하는 공간에서 벌어지고 있는 변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는 직업과 계층과 세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현실에 적용 문제는 당연히 개인적인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네트워크 세상은 끊임없이 진화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다. 그것이 어떻게 어떤 방향으로 알고 싶다면 이 책은 좋은 길잡이가 될 것 같다. 여전히 끌리고, 쏠리고, 들끓고 있는 이 공간에서 우리는 어떤 현실과 미래를 꿈꾸는가?

  나는 이 책에서 ‘공유와 실천’이 없는 혁명은 불가능하다는 아주 작지만 중요한 사실 한 가지 키워드를 뽑아냈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들을 확인하거나 미처 분석하지 못했던 부분들에 대한 정보는 차치하더라도 얼마나 소중한 말인가?


08092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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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는 폭력이다 - 평화와 비폭력에 관한 성찰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조윤정 옮김 / 달팽이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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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가라는 대상에 대해 깊이 고민해 본 것은 군대에 가서였다. 비무장지대에서 니콘 쌍안경으로 북한군의 표정까지 바라보며 생활했다. 이십대 중반의 나이에 도대체 이게 무슨 짓인가를 생각하며 군대의 조직과 남북 관계, 힘의 논리와 참담한 근현대사에 대해 또 다른 시각으로 고민했다. 수많은 책 속에서도 답을 구하기는 힘들었고 작계 5027도 정답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거대한 폭력 조직의 말단 조직원으로 참여한 기분은 참담했다. 이후 최근에 벌어지고 있는 양심적 병역거부 문제는 우리 사회의 비극으로 보인다. 당연한 인간의 권리가 이제야 논란거리가 된다는 것은 친일파의 청산 문제보다 심각했다. 그들이 사회의 요직을 그대로 승계하고 해방 이후 극단적인 이념 대립으로 레드 콤플렉스를 조장하며 기득권을 유지해 오고 있는 현실은 21세기에도 계속되고 있다.

  지금 우리의 현실을 보라. 경찰 국가, 병영 사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대한 민국은 군대라는 말은 과장이나 허풍이 아니다. 언제쯤 세대가 교체되며 억압과 폭력과 논리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학교에서 재생산되는 계급과 순종적이고 억압적인 지배 이데올로기는 고스란히 다음 세대에 전수되고 있다.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의 폭력 집단은 영원할 수 있을까? 다소 과격한 질문이라고 생각하는 당신의 생각은 어떤가?

  피카소가 살아생전 공산당원이었음을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했고 헬렌 켈러는 삼중고를 이겨낸 철인이 아니라 사회 운동의 선봉에 섰던 여성으로 기억하는 사람은 드물다. 페르 톨스토이가 비폭력적 아나키스트였으며 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한 굳은 신념을 가진 사람이었음을 기억하는 사람은 더더욱 드물다. 지금 우리가 <국가는 폭력이다>는 톨스토이의 외침에 귀기울여하는 것은 올봄 광화문을 뒤덮었던 촛불시위 때문이 아니다.

  국가는 집중되고 조직된 형태의 폭력을 대변한다. - 마하트마 간디

  세계적인 작가의 작품과 사상은 후대 인류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마하트마 간디는 톨스토이의 평화와 비폭력에 대한 신념을 온몸으로 실천한다. 영국의 식민지배에 저항하기 위한 수단으로 선택된 비폭력 무저항 운동이었지만 톨스토이의 외침은 여전히 유효하다. 왜냐하면 지금도 여전히 국가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보이지 않는 폭력은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가 거두는 세금과 그것이 사용되는 방법과 그 방법을 결정하는 과정을 보면, 군대가 지금까지 국민들에게 어떤 존재였으며 어떤 역할을 했는지 뒤돌아보면 톨스토이의 주장이 헛된 망상이 아님을 알게 된다. 100여 년이 지났지만 19세기에 그의 생각은 21세기에도 달라지지 않았고 우리에게 많은 교훈과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정부와 국가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수많은 일들이 우리를 오히려 불행하게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굳이 외면한다. 공교육 기관인 학교에서부터 아니, 유치원에 다닐때부터 애국가를 배우고 태극기 그리는 법을 배우며 맹목적인 충성심과 국민의 의무를 가슴 깊이 새긴다. 공교육 기관인 학교에 입학하면 너무나 당연하게 국민의 권리보다는 의무를 가르치고 순종적이고 억압적인 습관에 길들여진다. 지시하는 대상과 그것에 순종하는 학생이 있고 졸업 후에는 명령하는 상관과 복종하는 병사가 있다. 사회인이 되어서도 몸에 밴 노예근성은 쉽게 사라지지 않고 장유유서와 서열에 의한 위계질서는 피부처럼 편안하게 우리를 감싼다.

  톨스토이는 이런 모든 국가의 폭력으로부터 자유를 외친다. 세금도 내지 말고 정부기관에서 일하지 말아야 하며 군대에 가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철저하게 평화적인 방법으로 그리고 비폭력적인 수단을 동원해서 소극적 저향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국가와 정부에 협력하지 않음으로서 그 기능을 마비시키고 자연스럽게 국가와 정부를 없어지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나키스트와 사회주의자를 비판한 것은 단순히 그들의 선전선동과 급진적인 폭력 때문이었다. 그것은 또 다른 사람들에게 국가보다 두려움의 대상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혼란스런 무정부주의가 아니라 기독교적 공동체를 꿈꾸었던 톨스토이의 신념이 여전히 실현 가능한 것인가에 대한 논의는 차치하더라도 그가 주장했던 자족적 공동체, 상호 호혜적이고 이타적인 작은 농촌 공동체는 우리들 삶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기독교의 교리를 통해 우리들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해 그리고 애국심과 정부, 아나키즘에 대해 톨스토이의 사상을 읽어낼 수 있다. 살인, 노예제, 사회주의, 기독교도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일관되게 평화를 주장한다. 다가오는 혁명의 기운에 대해 말하는 마지막 장에서 우리는 톨스토이가 왜 여전히 우리 인류의 사상을 지배한 위대한 작가로 추앙받는지 확인할 수 있다. 그 변혁의 과정과 역사의 현장을 온몸으로 겪어내면서 그는 어떤 형태의 폭력도 거부했으며 ‘평화’에 대한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책머리에 하승우가 쓴 ‘우직한 바보, 국가를 거스르다’는 글은 최근에 그가 쓴 <군대가 없다면 나라가 망할까?>와 겹쳐지면서 다시 한 번 톨스토이의 사상을 일괄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세상은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부정적이고 암울한 시선으로 바라보자는 이야기로 몰아가는 외눈박이들과 대화하는 것 자체가 힘들겠지만 건전한 비판정신과 역사적인 관점에서 길어올린 통찰력은 독자들에게 덤으로 주어진다.

  과연 톨스토이는 왜 그렇게 평화와 비폭력에 관해 깊은 사색에 잠겼을까? 사람들은 왜 권력의 폭력에 순응해야만 하는가? 국가와 정부가 없다면 우리는 살아갈 수 없을까? 이런 종류의 고민들이 황당한 질문이 아니라 ‘국가에 저항하라’고 외치는 톨스토이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고전은 시대를 넘어 명불허전이다. 인류에게 말할 수 없는 감동과 깊은 통찰력을 제공한 톨스토이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일단, 국기에 대한 맹세부터 없애야 하지 않겠는가? 학교에서는 아직도 애국조회가 거행된다면서요? 오호! 통재라!


080916-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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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반하다 - 자기성공을 이룬 나르키소스 12인
안병찬.안이영노 지음 / 도요새 / 2008년 8월
평점 :
품절


수선화에게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검은 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퍼진다


  안치환이 불러 유명해진, <외로우니까 사람이다>라는 시집에 수록되어 있는 정호승의 시이다. 잠언 형태의 구절들이 수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시인은 이 시에서 외로움을 말했다. 그러나, ‘수선화’라는 꽃을 통해 외로움의 정서를 독자들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했는지는 의문이다. 수선화의 학명은 Narcissus.

  도도한 자기애(自己愛)로 인해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사랑하게 되어버린 나르키소스의 운명은 외로움과 조금은 거리가 멀어 보인다. 그것은 자신이 스스로 선택한 길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정신분석학에서 사용하는 나르시즘의 어원이 되기도 한 이 신화 속의 주인공은 결코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에코를 외면한 죄로 네메시스의 저주를 받았다고 하지만 결국 나르키소스는 단 한 번도 진정한 사랑에 빠져 보지 못했다. 신화의 내용에 따르면 자신을 사랑하는 일은 불행의 시작이다.

  하지만 현대인들에게 나르시즘은 자신감의 상징이며 경쟁력의 출발이 되기도 한다. 타인에 대한 사랑은 자신에 대한 사랑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은 채 타인을 사랑하게 되면 맹목과 집착이 되고 그가 없으면 자신의 존재는 소멸하고 말 것이라는 두려움만 키우게 된다.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스스로 홀로 설 수 있는 존재만이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이 시대를 살아가는 진정한 나르키소스는 과연 누구일까? 쉽게 말할 수 없을 수도 있고 너무 많아 헤아리기 어려울 수도 있다. 언론인이자 언론학자 안병찬과 그의 아들 안이영노는 그들을 찾아 나섰고 그들을 만났으며 만나고 돌아와 대화를 나눴다. 그 결과물이 <나에게 반하다>라는 책으로 태어났다.

  이 책은 형식과 내용면에서 몇 가지 특별함을 갖고 있다. 안이영노가 세운 문화기획자들의 모임 ‘기분좋은 QX'에서 기획하고 80세 청년 안병찬의 인터뷰로 진행된 프로젝트이다. 인터뷰가 끝나고 아들 안이영노와 후일담을 나누며 인물들을 다시 분석한다. 그 과정과 책이 나오는 과정이 하나의 놀이처럼 유쾌해 보인다. 힘겹고 어려운 작업이었을 것으로 짐작하지만 인터뷰를 준비하는 저자와 그들을 묶어내는 일들이 즐거움으로 여겨진다. 이렇게 색다른 작업이 가능한 것은 안병찬의 에너지와 열정을 전제로 하고 있다. 나이를 무색케 하는 그의 추동력은 삶에 대한 열정과 나르시즘 때문은 아닐까?

  아들의 취재 명령에 아버지가 현장을 뛰는 형식의 이야기를 들어본 적도 없다. 책 제목처럼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 책에 소개된 열 두 명의 나르키소스는 다양하다. 스물 여섯 살의 아가씨 이꽃별, 지천명의 나이가 넘어서 예술가의 길에 전부를 건 씨킴, 세상을 누비는 1인 프로덕션 김진혁, 언제나 화제의 중심에 섰던 백지연, 가수협회 회원인 한나라당 국회의원 정두언, 우리를 즐겁게 했던 야동 순재 등 한 사람 한 사람 각자가 가진 끼와 개성을 유감없이 발휘하며 종횡무진 시대를 질주하는 사람들이다.

  이들과 함께했던 시간이 인터뷰어에게는 더없이 행복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치밀한 준비와 꼼꼼한 분석이 뒷받침되어 인터뷰를 했겠지만 다만 아쉬운 것은 분량의 소략함이다. 지나치게 요약하고 대강의 인상만을 적었으니 독자들의 입장에서는 아쉬움이 크다. 분량과 형식의 제약이 선행되는 신문매체의 특성을 잘 알지만 책으로 묶어낼 때는 후일담이나 보다 풍부한 내용을 담아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열 두 명의 초상에서 나르키소스를 읽어내고 그것을 세상과 예술 혹은 타인에 대한 열정으로 승화시키는 모습들이 깊은 인상을 남긴다.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사람이든 아니든 그들의 인생은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재미있는 것은 마지막 주자로 나선 안병찬이다. 스스로를 나르키소스 열 두 명 중 한 명으로 포함시킨 것은 어쩌면 당연하게도 이 책의 주제를 강변하고 있다.

  사람을 읽어내는 것은 세상의 어떤 텍스트보다 소중한 것일지도 모른다. 이 책 한 권이 지니는 소중함이나 책 자체의 의미보다 나는 이 책을 만들어 낸 과정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그리고 그들의 색다른 열정과 실험에 큰 박수를 보내고 싶다. 우리 모두 나르키소스가 되어 미칠 듯이 자신을 사랑하고 여세를 몰아 자신의 삶은 물론 세상을 살아나갈 힘을 얻어내는 것은 독자들의 몫으로 남겨진다.


08091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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