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 핑거
김윤영 지음 / 창비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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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많은 소설을 읽어왔고 영원히 소설을 읽겠지만 이젠 좀 지친 느낌일까? 다치바나 다카시가 소설을 읽지 않는 것을 읽고도 피식 웃었을 뿐이다. 왜냐하면 소설은 때로 인간의 모든 지혜와 철학과 역사를 담아내는 가장 세련된 양식일 뿐 아니라 우리 삶의 이면을 다르게 해석해 볼 수 있는 만화경같은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개인적인 느낌이지만 소설은 여전히 힘이 조금 부족해 보인다.

  90년대 신경숙이나 은희경, 전경린, 공지영으로 대표되는 내면풍경의 섬세한 묘사를 넘어서고 있지 않은 것이 2000년대의 소설들이다. 소설가의 성을 구별할 필요는 없지만 칙릿으로 대표되는 최근의 작품 유형을 보면 대개 비슷한 구조와 성향과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는 듯하다. 그것이 시대정신으로 읽힐 수 있겠지만 사소설의 범주를 넘지 않을 수도 있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서사의 힘은 여전하다. 하지만 영화나 드라마 등 영상세대를 뛰어넘을 수 있는 서사의 힘은 조금 부족해 보인다. 소설은 거창하고 위대한 장르나 특별히 위엄을 갖추어야 하는 분야가 아니다. 때로 가볍고 흥미있게 그리고 미친듯 웃고 낄낄거릴 수 있으면 그만 일 수도 있다. 하지만 소설을 읽는 독자들의 취향과 목적은 다양하다. 한 권의 소설에서 우주를 발견하고 심오한 인생의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것은 아니지만 키취를 넘어 칙릿을 논하는 시대로 넘어오면서도 무언가 메워지지 않는 목마름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삼십대 후반 여성인 소설가 김윤영의 소설집 <그린 핑거>는 ‘사랑’에 대해 말하고 있다. 사랑에 대해 말하고 있다고 해서 진부한 것은 아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까탈스런 독자를 못 견디게 하는 것은 말하는 방식과 소설의 무늬이다. 똑같은 말을 어쩜 그리 달리 할 수 있을까 하는 느낌을 갖게 하는 소설가의 책은 다시 읽게 된다. 김윤영의 소설은 처음이지만 다시 읽고 싶어진다.

  잔재주가 지나쳐 문장이 춤을 추거나 내용과 어울리지 못하고 삐걱일 수도 있고, 지루하고 진부한 문장으로 책장을 돌처럼 무겁게 만드는 소설가도 있다. 옆집 아줌마나 처녀들의 수다를 재미있게 들어줄 만큼 시간이 남아돌지도 않고 참을성도 없는 나같은 독자는 그런 종류의 책을 읽고 나면 욕을 하고 만다. 어디 모든 독자를 만족시킬 수 있을까마는.

  식물을 잘 키우는 사람을 뜻하는 표제작 ‘그린 핑거’는 대상에 대한 관계부터 색다르게 설정하고 있다. 식물은 정성과 사랑을 주어 가꾸고 돌본만큼 풍성해진다. 토양이나 속성을 잘 이해하고 그것들을 만족시켜 주면 그만이다. 그래서 항상 그 자리에서 얼만큼 자랐는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은 다르다. 상대적이며 상호 관계속에서 다르게 반응하고 타인을 통제할 수도 없다. 아무도 그 불가해한 관계망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작가 김윤영은 이 소설집에서 ‘여성’만을 이야기하고 있지는 않아 보인다. 여성성을 드러내기 위해 노력한 흔적보다는 가장 잘 이야기할 수 있는 시선으로 타인과의 관계를 말하고 있다. 그것은 남성과의 관계를 의미하지만 결국 인간과 인간 사이의 소통과 내면의 풍경에 대한 가장 적극적인 관심과 애정이 필요한 작업이다. 그 작업이 소모적이거나 지루하지 않고 진부한 방식으로 말해지지 않으니 독자들은 즐겁다.

  ‘그린 핑거’와 ‘전망 좋은 집’은 전혀 일상적이지 않은 여성들이다. 언청이였던 여인이 수술을 하고 이민을 가 살아가면서 겪는 일과 거짓으로 임신 사실을 꾸미고 살아가는 여성은 주변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인물 유형이 아니다. 특별한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독자들은 안도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숨어 있는 일상성을 발견하고 가슴을 쓸어내리리라. 공감하며 분노하고 울먹이다 슬퍼지는 일들이 곳곳에 숨어 있다. 그것은 타인과의 관계 그리고 내가 타인에게 비춰지는 모습에서 찾아진다. 우리는 타인이라는 거울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거울아, 거울아 나는 누구니?

  ‘블루오션 연애학’, ‘너무 고결한 당신’, ‘Heartbreaking Love', ‘초콜릿’, ‘모네의 정원으로’라는 제목으로 묶인 다섯 편의 소설은 피카레스크 소설로 볼 수 있다. 각각 소설은 독립되어 있으나 그 주인공들은 다른 단편에서 만나고 다음 단편의 다른 인물들과 관계를 맺는다. 그래서 ‘내게 아주 특별한 연인’이라는 부제가 붙어 연작물임을 표시했다. 형식의 즐거움은 소설의 즐거움을 배가시킨다. 재목 또한 흥미롭다. 어디 특별하지 않은 연인이 있겠는가? 사랑하게 되면 모두 특별한 연인이 되는 것이다.

  이 시대의 사랑을 기록하는 일은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분명 의미있는 일이다. 그들의 사랑과 이별은 우리들의 자화상이며 삶의 방식을 보여주기도 한다.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방식과 소통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인간 사이에 소통이 가능한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소설이 아니라 그렇게 관계맺는 인간 군상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그려내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소통’과 ‘관계’의 문제에 천착하는 작품을 만나고 싶다. 근본적인 질문들을 던지고 그것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소설의 또 다른 재미이며 의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김윤영의 소설은 삶이란 타인의 시선은 내 존재감의 확인이며 정체성에 대한 이해라는 말로 들리기도 한다. 작가가 무엇을 원하든 독자들은 그 이상을 본다. 그것은 의미있는 오역이며 독자들의 반응은 당연히 제각각일 수밖에 없다. 다만 그 반응들의 공통점을 찾아내는 것도 중요하지 않을까 싶다.

  타인의 시선에 대한 인물들의 심리 변화, 분명하게 전달되는 섬세한 비유, 가볍지 않게 소설 전체의 주제를 담아내는 힘이 느껴지는 좋은 단편들을 읽은 느낌이다. 이 시대와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를 함께 담아낼 수 있는 다음 소설을 기다려 본다. 재미의 종류는 다양하다. 작가의 독자적인 영역을 찾아 하나의 문제를 집중적으로 파고드는 노력도 기대해 본다. 나는 너무 욕심 많은 독자이고 기다림의 자세를 갖춘 독자이기도 하다.


080905-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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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힘 - 역사의식, 기억과 상상력
하비 케이 지음, 오인영 옮김 / 삼인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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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우리가 살아가는 이 순간은 분명 과거의 기억이 될 것이다. 과거는 단순한 시간의 흐름이 아니다. 직선적인 세계관에서 출발한 개념적 환상에 불과할 지도 모르는 과거에 우리는 역사라는 의미를 부여한다. 그 역사는 단순한 과거의 기록이 아니다. 당연하지만 객관적 기록과 서술은 불가능하다. 역사는 모든 사실을 기록할 수는 없다, 따라서 특정한 사건이나 인물을 취사선택한다. 그 과정 자체가 주관의 개입이다. 그래서 모든 역사는 주관적 해석에 불과한 것이다.

  하비 케어의 <과거의 힘>은 역사를 자유와 평등 그리고 민주적 공동체의 이념을 특징으로 삼는다. 역사 연구는 현재와 다른 미래에 대한 전망으로 읽혀야 한다. 단순히 숨어 있는 사실을 발견하고 알지 못했던 과거의 기억들을 되새기는 것이 아니라 잘 알려진 사건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어떻게 적용할 것이며 현재의 관점에서 해석할 것이냐의 문제가 남는다. 그래서 정치와 사회적 관점에서 역사를 어떻게 인용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아니라 역사적 관점에서 그것들을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하비 케어는 진보적인 역사학자이다. 이 책은 ‘역사학의 위기’라는 1970년 중반 이후의 문제를 심도있게 살펴본다. 1991년에 발간된 책으로 주로 60년대와 70년대의 역사 문제를 집중 조명하고 있다. 특히 영국의 대처와 미국의 레이건이 보여준 현실 정치의 한계와 보수성이 역사에서 어떤 의미를 가질 것인지 고민하고 있다. 그것은 보다 진보적인 관점에서 비판적인 안목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과거와 현재에 대한 비판적 연구를 목적으로 쓰인 책이라는 점에서 이 책은 고리타분한 역사서와 거리가 멀다. 물론 2008년의 관점에서 보면 벌써 한 세대 이전의 이야기로 시의성이 떨어진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대한민국의 보수화 경향을 감안한다면 현재적 유용성 측면에서 살펴보아도 소중한 기록이라 할 수 있다.

  특히 1970년대 이래 미국과 영국에서 등장한 신우익(New Right)과 신보수주의 집단들은 공세적으로 역사의 위기를 공표했다. 그들은 역사 연구의 가치를 자유와 평등 혹은 민주적인 공동체의 발전에 비판적인 안목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현존하는 권력에 봉사하고 기껏해야 현상 유지를 뒷받침하는 데 있다는 견해를 나타냈다.

  이러한 현상은 대한민국의 ‘뉴라이트’를 돌아보게 한다. 역사와 경제 교과서를 통해 교육과 이데올로기 문제를 제기하는 그들의 기원에 대해 다시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저자가 이 책을 통해 제기하는 문제는 분과학문의 지위를 말하는 게 아니다. 역사 연구의 목적 및 전망 바로 그 자체와 현재는 물론 미래에 대한 비전을 말하고 있다.

  좀더 자세히 들여다 보면 전체 다섯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제 1 장은 역사학의 위기를 개관하고 있다. 학교 교육과 교양 측면에서만 다루어지는 문제점을 제기한다. 2장에서는 역사의 위기를 가져온 현대적 양상들을 60, 70년대 미국과 영국의 정치, 경제를 중심으로 살펴본다. 3장에서는 역사와 정치의 관계를 보다 직접적으로 고찰한다. 안토니오 그람시의 ‘헤게모니’를 중심으로 권력과 이데올로기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역사교육을 통해 과거를 이용 또는 남용하여 자본주의 헤게모니를 재창출하려는 레이건과 대처 그리고 그들의 동료 정치인들의 생각을 들여다본다. 4장에서는 현대의 전개양상들에 대해 살펴본다. 동유럽과 소련의 혁명적 양상들을 통해 ‘자본주의의 승리’, ‘역사의 종언’을 말하는 보수주의자들과 권력자들의 주장을 살펴본다. 아직 현실 사회주의가 건재했던 시대의 저술이기 때문에 읽으면서 감회가 새롭다. 1994년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를 목도했다면 이 책은 또 다른 양상으로 정리되지 않았을까 싶다. 마지막으로 5장에서는 급진민주주의적 비전과 부활을 강조한다. 역사가에게 필요한 정치와 사회 사상보다 오히려 역사를 만들어가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은 아닐까 하는 당연한 고민이 엿보인다.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 저자는 당연히 역사가를 비판적 지식인으로 볼 것을 제안한다.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과거의 힘’은 비판적 통찰력과 상상력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하나의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과 관점, 그것을 기억하는 방식은 역사를 바라보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 억압받고 고통받는 사람들의 시선으로 과거를 돌아보고 교육의 측면에서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은 차후의 문제로 남겨진다.

  역사는 여전히 우리에게 중요한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도구이다. 목적이 아니라 도구로 전락해버린 역사에 대한 연민보다 그것으로부터 올바른 교훈과 가르침을 얻지 못하는 우리들의 어리석음부터 반성해야 한다. 진정한 과거의 힘은 현실과 미래를 개척하기 위한 등대처럼 빛나야 한다. 현실과 유리된 먼 불빛이라는 뜻이 아니라 우리의 삶과 미래를 비춰줄 충실한 안내자의 역할과 고민과 의식의 각성제 역할을 함께 해내야 하는 것이 과거 혹은 역사의 힘이 아닐까?


모순적이고 전혀 다른 것처럼 보이는 것들 이면에서 진정한 동일성을 발견하고, 동일한 것처럼 보이는 것 이면에서 실질적인 다양성을 찾아내는 것은 매우 세심한 주의를 요하는데, 이것은 오해받고 있기는 해도 이념을 다루는 비평가들과 역사 발전을 다루는 역사가들에게는 가장 본질적인 재능이다. - 안토니오 그람시(P. 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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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80이 20에게 지배당하는가? - 작은책 스타가 바라본 세상 철수와영희 강연집 모음 1
하종강 외 지음 / 철수와영희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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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 고등학생들의 하루 일과가 유럽 방송에 소개된 적이 있다고 한다. <세상에 이런일이> 종류의 프로그램이었단다. 아침 8시에 등교해서 밤 10시가 넘어 하교하는 한국의 고등학생을 신기한 동물처럼 바라보았을 것이다. 사람이 사는 방법은 다양하지만 그 목적과 과정에 대해 우리는 고민하지 않는다. 1% 대통령에 이어 0.1% 교육감이 당선되어 교육은 경쟁이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수월성 교육이라는 미명하에 초등학생까지 지옥에 몰아 넣고 있다. 이제 곧 그 부작용과 휴유증이 나타날 것이다. 대한민국은 왜 기나긴 역사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는가.

  <작은책> 12주년 기념 노동자 7, 8, 9월 대투쟁 20주년 기념으로 마련한 여섯 개의 강좌를 책으로 묶어냈다. <왜 80이 20에게 지배당하는가?>는 강연 내용을 책으로 묶었기 때문에 가독성이 뛰어나고 이해가 쉽다. 주변 사람들에게 제발 꼭 한 번만 읽어달라고 애원하고 싶은 책이다. 이런 종류의 책은 한겨레신문사가 매년 봄 특강을 마련했다가 가을에 책으로 엮어내는 책이 시발점이 되었다. 그 전에도 비슷한 종류의 책이 있었겠지만 대중강연의 힘과 강사들의 열정을 고스란히 활자로 전할 수 있는 방법이어서 색다른 의미와 재미가 있다. 프레시안에서 <여럿이 함께>를 묶어냈고 이번에는 작은책에서 이 책을 엮었다.

  박준성은 과거를 기억하지 못해 되둘이되는 역사에 대해, 안건모는 세상을 바꾸는 글쓰기에 대해, 이임하는 이 땅을 살아가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정탱니은 한미 FTA 10년, 건강보험이 없어진다는 내용으로, 홍세화는 불확실한 미래 때문에 저당잡힌 오늘에 대해, 하종강은 불평등에 저항은 본능이라는 내용으로 강연했다.

  여섯 명의 강사들이 어떤 사람들인가는 책을 통해 확인할 수 있고 그들의 말과 생각은 고스란히 이 땅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채찍과 부채감으로 다가온다. 정태인이나 홍세화, 하종강이 강연한 내용은 이제 지겨울 정도로 읽고 고민하고 생각한 내용들이지만 현실에서는 모두가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실천에 옮기지 못하는 것들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한다.

  이런 종류의 강좌를 통해 확인하는 것은 두 부류의 사람들이다. 먼저 현실이 어떠한지, 내가 무엇을 잘못 생각하고 있는지, 그들은 과연 어떤 사람들인지, 내 삶과 생각과 행동은 왜 스스로를 배신하는지 모르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그 모든 사실을 알면서도 비겁하게 행동하지 않거나 개인적 이익을 위해 침묵하거나 20에 편입하기 위해 목숨 거는 사람들이 있다. 쉽게 분류하면 알고 사느냐 모르고 사느냐로 먼저 양분할 수 있다. 그 다음은 실천과 행동의 문제인데 현실적으로 그것은 대단히 복잡한 양상을 띤다. 홍세화의 말대로 노조 집회가 끝나고 꺼리낌없이 무노조 경영 삼성의 핸드폰을 구입하는 노동자들은 구체적으로 그들의 행동과 의식이 일치하지 않는다.

  자기자신이 노동자이면서 노동자라는 말을 싫어하고 노조가 빨갱이 단체라고 생각하며 내 자식들은 노동자로 살지 않을 거라고 확신하거나 노동자가 되지 않기 위해 공부하라고 다그치는 사람이 바로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그렇지 않은가? 과연 우리는 자본가인가? 노동자인가? 비행기 조종사, 대학교수, 의사까지 노조를 결정하고 세상에 노동자 아닌 사람은 누구인가? 사회책의 3분이 1일 노동문제, 노사관계를 다루고 있는 독일과 프랑스는 빨갱이의 나라인가?

  대학 등록금 1,000만원 시대에 도대체 마음 놓고 대학에 보낼 수 있는 대한민국의 중산층은 과연 얼마나 되는가? 인큐베이터에 있는 아이의 수천만 원 병원비 때문에 퇴원시켜 3일만에 죽어버린 아이의 부모는 누구인가? 심심찮게 뉴스에 등장하는 우리 이웃들의 모습을 보면서도 무상교육, 무료진료가 불가능한 꿈이며 빨갱이들이 외치는 구호라고 여기는 사람들의 생각은 누가 만들어 주었을까? 대학을 공짜로 다니는 프랑스, 병원비가 무료인 스페인은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돌아가는 사회이며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인지 생각해 본적이 없다면 이책을 가만히 들여다보자.

  우리는 모두 의식화될 필요가 있으며 탈의식화할 의무가 있다. 2008년의 대한민국은 정상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의 건강과 행복을 위해서 모든 사람이 노력하는 사회가 아니다. 누가 죽든, 나와 내 가족만 이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면 아무 상관없다는 생각을 가지지 않고 사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에게 기꺼이 박수를 보내겠다. 내 자식만이 아니라 남의 집 자식과 다함께 잘 살았으면 좋겠다고 진심으로 바라는 학부모가 있다면 고개 숙여 절하고 싶다. 엄친아의 망령은 아이들의 영혼을 잠식하고 있다. 미래는 암울하고 현실은 우울하다. 부정적 세계인식만이 살길이라고 외치는 것은 아니지만 이대로는 절대 안 된다.

  수없이 읽었고 거의가 중복되는 내용이지만 정태인의 글을 넘어 홍세화와 하종강의 강연을 읽다가 토요일 밤에 눈물이 맺혔다. 나는 슬픈 소설이 아니라 이런 이야기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세 살 남동생과 다섯 살 누가를 반지하방에 열쇠로 잠가놓고 밥상을 차려 놓고 일을 나간 엄마의 가슴은 어떠했을까? 불이나 동생은 이불에 코를 박고 누나는 바닥에 누워 질실해 죽었다. 가난은 대물림되고 교육은 사회적 계층 구조를 강화한다. 세습되는 계급사회 이것은 전근대로의 회귀를 의미한다. 대한민국은 전근대를 지향하고 있다. 그것도 빛의 속도로 말이다. 누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가?

  막막하고 답답한 마음으로 책장을 덮고, 침침한 눈으로 TV를 켜니 마침 <그것이 알고 싶다>는 프로그램이 방영되고 있었다. ‘국제중 거쳐 특목고로 - 엄마들의 전쟁’. 방금 읽은 홍세화의 강연 내용을 영상물로 제작한 것 같다. 교육당국의 대책을 요구하는 마지막 멘트가 허탈하다. 도대체 교육당국이 누구인가? 국제정과 특목고가 늘어나면 학생들이 얼마나 똑똑해지고 실력이 향상되는가? 누가 행복해지고 누구에게 도움이 되며 누구에게 혜택이 돌아가는가? 누가 절망하고 상대적 박탈감에 좌절하며 상상을 초월하는 사교육비 가계부담은 누구에게 돌아가는가? 그들은 부모가 되어 아이들을 어떻게 키울 것인가? 이 대한민국의 시스템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그렇다면 이 시스템을 바꿀 수는 없을까? 누가 그 일을 할 것이며 그 누군가가 바로 우리, 나라고 생각해 본적은 없는가?


080831-0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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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왜 80이 20에게 지배당하는가? - 불확실한 미래에 저당잡힌 오늘
    from 마인드맵 활용 가이드- 만득이 블로그 2008-09-03 13:33 
    불확실한 미래에 저당잡힌 오늘 이미지 출처: http://www.mediamob.co.kr/FDS/newBlogContent/2007/0829/apulsa/tunnelvision.JPG 홍세화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의 저자 한겨레 기획위원 프랑스 망명 홍세화의 아름다운 나라 http://www.hongsehwa.pe.kr/zbxe/ 교육은 계층 상승의 기회 '가난으로부터의 탈출' '교육을 통한 신분의 수직 상승을 통해 누구나 귀족이나 관료가 될..
 
 
에링 2008-09-01 0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막막하네요.

sceptic 2008-09-11 23:01   좋아요 0 | URL
막막하지만 길은 있겠죠...죽을 순 없으니까요.
 
군대가 없으면 나라가 망할까? 라면 교양 2
하승우 지음 / 뜨인돌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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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보느냐’가 ‘어떤 세상인가’를 결정한다.

책 표지를 넘기니 선명한 파란 색지에 검은 글씨로 한 줄 인쇄되어 있는 문장이다. 이쯤되면 제목과의 조합 속에서 어떤 관점으로 무슨 내용을 말하고 싶은지는 읽어보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청소년을 위한 ‘라면교양’이라는 재밌는 이름의 시리즈 중 하나이다. 1권이 <미국이 세계 최강이 아니라면?>이다. 단순한 가정법을 위한 문장이 아니다. 뒤집어 생각하고 관점을 달리하면 새로운 세상이 보인다는 뜻일 게다.

같은 하늘 아래 동시대를 살아가면서도 이 시대에 대한 해석과 분석은 제각각이며 대한민국을 규정하는 방식도 다양하기만 하다. 무엇을 볼 것인가, 어떻게 볼 것인가, 왜 보느냐에 따라 세상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이 문제는 세상은 살만한 곳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와는 거리가 멀다. 생각의 차이가 아니다.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는 개인적 가치의 문제가 아니라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이성과 논리의 문제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굴러가지 않으며 역사는 그것을 반증하고 있다. 역사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않는 인류의 건망증은 지금 여기 우리들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읽어보지도 않은 권인숙의 <대한민국은 군대다>는 읽고 싶지도 않다. 권인숙을 알고 대한민국을 알고 군대를 알고 있다면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종류의 책은 별 볼일 없다는 말이 아니라, 공감하기 위해 읽는 책이다. 고개를 주억거려 주고 때때로 한숨을 쉬고 씁쓸한 미소를 지어주는 것이 전부다. 미처 생각하지 않은 새로움이나 특별한 정보는 거의 얻을 수 없다는 게 나의 개인적인 판단이다. 왜냐하면 나는 대한민국의 군인이었으므로.

  청소년을 위해, 아니 더 정확히 말해 군대에 아직 가지 않은 사람들에게 던지는 질문일 수 있는 <군대가 없으면 나라가 망할까>는 텔레비전 프로그램 <스펀지>에 나올만한 질문이다. 짐작한대로 답은 아니올시다. 저자 하승우는 책세상의 <희망의 사회 윤리 똘레랑스>로 만난 적이 있다. 탁월한 솜씨에 감탄한 기억 때문에 저자에 대한 믿음과 제목이 주는 유혹에 넘어가 주기로 했다.

  대한민국 남자들에게 과연 군대란 무엇인가? 우스개 소리로 술자리에서 회자되는 군대에서 축구 한 얘기는 단군신화보다 유명하다. 간혹 확대 재생산되며 신화가 되기도 하고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전설이 되기도 한다. 그것은 풍자와 해학의 결정판이며 어떤 훌륭한 문학보다도 그로테스크하다. 웃어넘길 수 없는 군대 이야기들이 너무 많아 차라리 공상 소설 시리즈를 읽었다고 생각하는 편이 낫다. 그것이 내 경험이든 타인의 간접 경험이든 상관없이 말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그런 군대가 우리에게 무엇인지 실질적이고 친밀하게 접근한다. 왜 군대에 가기 싫어하는지, 남자들의 진짜 속마음은 어떤지를 말하다가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열변을 토한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라서 심드렁 할 정도이다.

  이 책에서 내가 주목한 것은 모두가 알고 있으면서 함께 흥분하지 않는 내용이다. ‘병역 거부’와 ‘병역기피’에 대한 사람들의 이중적 태도가 그것이다. 할 수만 있다면 마음 속으로 모두 병역을 기피하고 싶어 한다. 그러면서도 양심적 병역 거부에 대해서는 거부감을 나타내며 심지어는 심한 비난을 퍼붓는다. 환장할 노릇이다. 나만 손해 볼 수 없다는 이기적 태도의 반영이거나 노예근성에 대한 다른 방식의 표현이라고 하면 지나친 말일까? 그들이 병역을 거부하는 이유와 그것이 공시적, 통시적 관점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살펴보고 있다. 과연 우리는 그들을 비난해야 하는 걸까? 국적을 포기하고 돈을 처발라가며 갖은 방법을 동원해서 병역을 기피하는 ‘그들’보다 양심적 거부자들이 더 나쁜(?) 사람들인가?

  강한 군대가 평화를 지키고, 군복무는 시민의 절대적인 의무이며, 대체복무를 인정하면 군대가 약해지고, 먼저 총을 내리는 건 바보짓이라는 생각에 대한 오해 혹은 진실에 대해 알고 싶다면 이 땅의 예비역 혹은 미래의 군인들이여 이 책을 읽어보라. 아니 군대에 보낼 아들이 있거나 애인을 두었거나 형이나 오빠가 있는 사람은 한 번쯤 읽어보자. 그들의 눈물젖은 편지를 읽고 공감하고 위로하기 전에 이 책을 통해 우리가 상식이라고 믿고 있는 ‘군대’에 대해 다시 고민하자.

  남북 분단 상황에서 군대가 없다면 우리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생각만해도 끔찍하다는 생각을 버릴 수는 없는 것인가. 전쟁에 이기면 우리는 행복해지는 것인가. 국라라는 이름의 괴물을 짝사랑하게 세뇌시키는 ‘애국심’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평화의 길은 그렇게 멀고도 험난하기만 한가. 끝이 없는 질문 속에서 우리의 생각은 조금씩 자라고 세상은 조금 더 행복하게 변화지 않을까 싶다.

  저자는 맺는말을 이렇게 시작한다.

세상을 직선으로만 바라보면 시선에 잡히지 않는 다른 부분들을 보지 못한다. 지구도 둥글고 세상도 둥글고 사람의 삶도 둥글어서 우리는 유연한 곡선의 시선을 가져야 사물을 올바로 인식할 수 있다. - P. 176

  인식의 힘은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그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보지 못하는 것과 알고 있지만 동의하지 않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가 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그 모든 상식과 진실이라고 믿었던 그 모든 사실들이 과연 그러한 것일까 하는 의문이 생기는 순간 달라질 수 있다. 그때-거기가 아니라 지금-여기의 문제는 과거도 미래도 아닌 바로 우리들의 현실이다.

  자, 여러분 대한민국 군대에 다녀오셨습니까?  다녀오신 분들과 함께 살고 계십니까? 혹은 군대에 가야하는 사람입니까? 애인이 군인이거나 친구에게 위문 편지를 쓰는 중이십니까? 약장수처럼 외쳐 봅니다. 현실을 움직이는 힘은 바로 여러분에게 나옵니다.


080829-0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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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아나 여왕의 신비한 불꽃 -상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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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 이성에 눈 뜬 때가 초등학교 3, 4학년 쯤 될까? 긴 머리에 갸름한 얼굴, 웃을 때 초승달처럼 얇고 처지던 눈이 기억난다. 선영이였던가? 계몽사 세계 문학 전집을 읽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었을까? <흰고래 모비 딕>, <플루타아크 영웅전>, <비밀의 화원>, <모히컨족의 최후> 등이 떠오른다. 처음 야구 글러브를 사서 품에 안고 잔 기억이 선명하고 축구화를 신고 그물망에 축구공을 차며 등교하던 모습도 생각난다.

  여러 가지 선택적 기억과 자기 암시에 의해 사람들은 저마다 같은 장소에서 다른 기억을 갖게 된다. 살아온 생을 모두 기억하는 사람은 없으며, 망각은 삶의 필수적인 요소이다. 인간이 모든 것을 기억한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한 상상이다. 자신의 인생을 돌아 볼 시간이 누구에게나 오는 걸까? 그때 어떻게 살았는지 스스로 평가하는 것은 정당한가? 아니 정당성의 문제가 아니지만 객관적인 재구성 또한 불가능하다. 나는 누구이며 어떻게 살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독자에게 던지는 소설이 있다.

  움베르토 에코의 <로아나 - 여왕의 신비한 불꽃 상, 하>는 자전적 소설이다. 아무리 감추어도 표현과 묘사 사진과 기억들이 완벽한 허구로 읽히지 않는다. 작가가 그것을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독자인 나는 이 짧은 생을 돌아보았다. 노년에나 해야 하는 짓을 미리 해보는 것도 때로는 필요하지 싶다. 심각한 반성과 지나친 자만이 아니라면 재미있는 놀이가 되겠다. 아니 어쩌면 사람들은 매순간 모든 공간에서 뒤를 돌아보는 지도 모르겠다. 과거에 대한 기억과 아쉬운 미련은 ‘가지 않은 길’에 대한 호기심일 수도 있다.

  하지만 모든 인간은 시간을 되돌릴 수 없다. 고칠 수 없는 단 한 번 뿐인 연극 무대의 주인공으로 어떤 연기를 선보일 것인가? 모든 사람은 자신의 인생이라는 무대에서 주인공이 된다. 그것을 바라보는 관객 또한 자기자신 단 한 사람인 경우가 있다. 지나간 드라마를 다시 보듯이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일은 쓸쓸하기도 하고 때로는 따뜻하기도 하다.

1. 기억과 망각

과거를 잊기 위해서 술을 마시거나 마약을 복용하는 바보들이 있다는 게 놀랍다. 아, 할 수만 있다면 모든 걸 잊고 싶어, 하고 그들은 말한다. 하지만 나는 진실을 알고 있다. 망각이란 잔인한 것이다. 기억을 도와주는 마약은 없는 걸까? - P. 102

  주인공 얌보는 어느 날 사고로 모든 기억을 잊는다. 안개처럼 모호한 현실과 과거의 기억들이 혼재하지만 어떤 것도 분명한 것은 없다. 자신의 이름과 직업, 나이 그리고 아내와 딸, 손녀들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고서적 전문가. 그의 시간 여행은 안개처럼 불투명하다. 친구와 가족,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잃어버린 이 노인은 누구인가?

  고향에서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확인하게 된다. 오래된 책과 사진 할아버지와 아버지에 대한 기억과 이야기들이 스스로를 재구성하게 한다. 실존적 고민에 빠진 이 노인에게 정답은 없다. 어쩌면 모든 기억들이 퍼즐처럼 어지럽고 교묘하게 짜맞춰진 그림처럼 혼란스럽기만 하다.

  하지만 먼지 구덩이에서 발견해 낸 만화와 그림책은 그대로 얌보가 살아온 유년이며 이탈리아의 과거이고 인류의 역사이다. 기억은 현실의 조각들 속에서 발견된다. 흔적은 빛바랜 사진처럼 흑백으로 저장되지 않는다. 다만 사라지거나 분명한 증거를 가지고 있을 뿐이다. 얌보에게 주어진 삶은 과거의 현재의 연결 고리를 잇는 것만으로도 벅차기만 하다. 아련한 기억과 켜켜이 쌓인 세월의 먼지 속에서 퍼 올리는 추억들은 우리들의 그것과 같은 방식으로 재현된다. 파편화된 현대인의 삶은 이제 더 이상 50년 된 다락방을 허락하지 않지만 인간의 기억을 뛰어넘는 사물들이 간직한 기억은 확고부동하기만 하다.

인간에게 기억은 임시방편의 해결책일 뿐이다. 인생은 물처럼 흐르고, 한 번 지나간 것은 다시 오지 않는다. 나는 기억이 없는 대신, 인생 초년의 경이를 처음부터 즐기고 있었다. - P. 364

2. 소년과 사랑

  검은 교복을 입은 릴라는 얌보의 첫사랑이다. 어둠 속에서도 변치 않는 한 줄기 빛과 같이 그녀에 대한 환상은 집요하다.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그녀를 놓지 못하는 소년의 사랑. 그는 더 이상 노년의 얌보가 아니라 순수와 열정을 무기로 뜨거운 가슴을 식히지 못하는 소년이다. 안개처럼 사라진 그녀, 그리고 생의 마지막 순간에 알게 된 그녀의 죽음은 허망한 인생보다 더욱 더 그를 절망에 빠뜨린다.

세상일을 나 몰라라 할 때면, 당신은 이렇게 말했죠. 역사란 피로 얼룩진 수수께끼이고, 세계란 하나의 오류라고 말이에요. - P. 121

  그것은 그녀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그녀를 기억했던 시간에 대한 절망이다. 과거와 현재를 잇지 못하는 망각에 대한 슬픔이 아니라 사랑 그 자체가 스러지는 찰나이기도 하다. 얌보의 사랑은 우리들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구체적인 개인의 기억은 보편성을 획득하고 일반적인 패턴으로 전용된다. 누구나 그런 사랑은 있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소년은 소년이기 때문에 사랑은 사랑이기 때문에 서로 뜨겁게 껴안을 수 없다. 그것은 소년과 소녀의 사랑이 아니라 순수와 열정의 모순된 만남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겐 그렇게 영원히 풀리지 않는 숙제가 남겨진다. 다만 추억만이 가슴에 남아 꺼져가는 불씨를 되살리고 일렁이는 가슴에 돌을 던진다.

3. 죽음 혹은 그리움

  죽음의 순간은 내게 어떻게 다가올 것인가? 가끔 흥미진진하기만 하다. 그것은 생의 종착역에서 느껴야하는 두려움이라기보다 하나의 사건일 뿐이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은 연민이다. 누구나 걷게 되는 피할 수 없는 길에 호기심은 당연한 것이 아닐까? <임사체험>이나 <죽음, 또 하나의 세계>에서 보여주는 사후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 아니라 그 찰나에 대한 혹은 그것을 맞이하기 위한 과정을 즐길 수는 없을까? 죽음 앞에 모든 인간은 겸손해진다고 하는 데 이런 생각은 오만일까?

  얌보는 환상을 본다. 그것은 현실과 다른 세계에 대한 꿈과 희망이 아니라 스스로 재창조해 낸 세계에 대한 기억과 추억들이다. 과거의 증거들이고 자신의 역사로 만들어낸 시간들이다. 그 속에 릴라가 있다. 죽음을 맞이하는 얌보의 모습은 슬프지 않다. 다만 현실 속의 에코와 오버랩되는 상상만 하지 않는다면 이 소설은 그저 한 생에 대한 진실한 보고서이며 삶의 과정과 순간에 대한 기억이다.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미화된 모든 기억들을 쫓아낼 필요는 없다. 어떤 것이든 한 생애를 살아온 사람에게는 소중한 것일 수밖에 없다. 그것의 결과가 현재이므로. 오래된 미래를 확인하기 위한 얌보의 노력은 우리들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다. 노년 혹은 죽음에 대한 태도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비슷한 패턴과 방식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특별한 죽음은 없다. 숭고함에 대해 논할 필요도 없다. 다만, 얌보의 말대로, 태양이 검게 변하는 순간까지 살아 있음을 확인할 뿐.

나는 한 줄기 서늘한 바람이 건듯 불어오는 것을 느끼며, 올려다본다.
왜 태양이 검게 변하고 있지? - P. 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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