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마이크로 소사이어티로 간다 - 세상의 변화를 읽는 디테일 코드
팔란티리 2020 지음 / 웅진윙스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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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소 티비를 보지 않는다고 하지만  평일 9시와 일요일 12시가 되면 티비를 켠다. MBC 9시 뉴스, 출발 비디오 여행 때문이다. 그런데 평일에는 이제 더 이상 뉴스를 안본다. 처음에는 답답했지만 이젠 견딜만하다. 1시간이 여유로워졌고 뉴스를 보며 받는 스트레스로부터 해방되어 정신 건강이 좋아졌다. 조간 신문만으로 답답할 때가 있지만 굳이 네이버나 다음 뉴스를 기웃거리지 않고 오마이 뉴스 등 인터넷 매체도 기웃거리지 않은 지 한참 되었다. 그래도 살만하다.

  세상에 진실은 애초부터 존재하지도 않는 것인지 모른다. 우리가 믿었던 모든 것들은 그렇게 허망하게 무너졌고 다가올 미래는 늘 불안하기만 하며 현실은 모래 위에 지은 성처럼 위태롭기만 하다. 그래도 환상이나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사람들은 하루하루를 견뎌내고 있다. 하지만 과연 그건 게 존재하는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정작 자신은 90이 넘을 때까지 살다가 죽은 쇼펜하우어의 권유대로 자살을 선택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현재의 모습과 미래에 대한 호기심은 떨쳐버릴 수 없는 유혹이다. 우리가 살아 있는 한. 그에 대한 무수한 분석들이 난무하고 혜안을 가진 지식인이나 종교인에게 기대기도 한다. 때로는 앨빈 토플러와 같이 탁월한 미래학자에게 기대기도 하고 신내림을 받은 무속인을 찾기도 한다. 그러한 노력은 오늘도 내일도 계속될 것이다. 우리가 살아 있는 한.

  NHN이 만든 오픈 네트워크형 연구조직 NORI(New Media Open Research Info-Net)의 쳇 프로젝트 그룹인 ‘팔란티리 2020’은 인터넷을 비롯한 매체환경의 변화에 주목하면서 네트워크 시대를 사는 현대인들의 삶의 변화를 주시하고 있다. 토론 연구 그룹의 성과물을 담아낸 <우리는 마이크로 소사이어티로 간다>는 개인의 정체성과 프라이버시, 지식의 변화상을 비롯해서 구너력과 경제활동, 놀이문화, 예술문화 등 다양한 분야의 변화를 조망하고 있다.

  적어도 나에게는 연구 그룹의 구성원들이 현직 교수라는 것은 이 책의 최대 단점으로 보였다. 학문적 관점이나 객관성을 확보하고 싶은 의도는 충분히 이해되지만 현실 감각이 떨어지고 이론적 토대와 인과관계의 해명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현실을 읽어내는 탁월한 감각과 시대를 앞서가는 능력을 검증 받을 수는 없지만 시도나 의도만큼의 성과를 읽어내기는 어려웠다.

  일곱 개의 키워드를 잡아 낸 일이나 그것을 풀어내는 발랄함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먼저 ‘나는 몇 개인가?’는 개인의 정체성에 대해, ‘여기가 너희 집 안방이냐?’를 통해 프라이버시를, ‘네가 아는 것은 나도 알고 있다’를 통해 지식의 개념을, ‘클릭의 경제학을 읽어라’에서는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을, ‘나는 논다, 고로 존재한다’에서 게임과 현실의 관계를, ‘누구나 파워 게임의 승자가 될 수 있다’를 통해 현대 사회의 권력을, ‘당신도 앤디 워홀이 될 수 있다’에서는 현대예술에 대해 면밀한 검토가 이루어지고 있다.

  현대 사회를 가로지르는 중요한 키워드를 통해 시대를 읽어내고 트렌드를 잡아내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판타지 소설 <반지의 제왕>에 나오는 ‘미래를 내다보는 돌’이란 뜻을 가지니 고대의 신석 이름에서 빌려온 ‘팔란티리’는 2020년을 내다보려는 욕망을 드러낸다. 이 욕망은 특별한 목적과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다. 물론 현재 상황에서 미래에 대한 통찰력을 가지려는 것은 당연한 준비이자 기득권자들의 여유로 여겨질 때도 있다. 10년 후에도 우리가 돈을 잘 벌 수 있을까? 어디가 돈 되는 곳일까? 상대방의 의도를 비하하자면 이쯤 되겠다. 사람들의 의식과 변화의 흐름을 읽어내는 일은 보다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초석이 된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제 NHN은 산학 협동의 이름으로 미래 사회의 아젠다를 만들어가고 있다. 그 의도가 순수하고 선한 것일지라도 결과까지 긍정적으로만 볼 수는 없다. 이 책에서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KT나 현대자동차와 맞먹는 10조원의 자산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네이버나 한게임 사용자들은 알지 못한다. 아니 안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 것은 없다. 다만 이렇게 비대해진 조직과 어마어마한 수익구조를 지닌 기업이라면 그 사회적 책임에 대해서도 깊이 고민해 보아야 할 때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작고 사소한 힘이 큰 변화를 이끌어 낸다는 사회를 예감했다면 뉴스 편집과 정치적 스태스를 명확하게 하는 것이 좋다. 네트워크 환경은 빛의 속도로 변해 갈 것이고 누구든, 언제든, 어디서나,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세상이 펼쳐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그 힘의 원천과 근원이 되는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어떻게 살아가고 싶은지에 대한 관심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인문人紋적인 관점이 필요하다. 기업의 철학과 역사 의식은 지속가능한 경영의 초석이 된다. 거창하게 말했지만 진리는 단순하다. 사람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예민한 촉수를 뻗쳐야 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들이 지향해야 하는 것을 찾아내고 제시할 수 있을 정도의 기업을 사람들은 원하게 될 것이다. 녹색은 생명이며 희망이며 자연이고 환경이다.

  시뮬라시옹의 시대에 구현해내는 시뮬라크르들은 어쩌면 완벽한 환상일지도 모른다. 그 환상과 현실 사이에서 끝없이 고민하며 미래를 구현해내야 하는 것이 우리들의 과제이며 ‘팔란티리 2020’이 고민하는 주제가 될 것이다. ‘지금-여기’가 아니라 ‘내일-거기’를 알고 싶다면 과거와 현재를 통해 먼저 변화의 흐름을 읽어내기 보다 변화의 주체들에 대한 관심과 길 안내가 필요하다.

  앞서 질펀하게 흘려놓은 고민들은 개인이든 기업이든 시민단체든 정부든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의 것들이다. 하지만 그것들의 해법은 제각각이고 바라보는 관점 또한 상이하다. 그것들을 어디에 어떻게 쓸 것인가는 더더욱 난망스럽다. 어쨌든 한 기업의 시도와 노력은 일단 가상하다고 평가할 수 있으며 이러한 노력과 연구는 지속되어 마땅하고 그 결과물과 소통과정은 열린 체계로 지평을 넓혀가야 할 것이라는 데 중점을 두어야 한다. 그래야 식상한 표현이 ‘보다 더 나은 미래’가 펼쳐질 것이 아닌가?


080728-0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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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랑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 '명랑'의 코드로 읽은 한국 사회 스케치
우석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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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사회를 바라보는 눈은 그 사회의 구성원 수만큼 많다. 우석훈의 책을 계속해서 읽고 있었다. <촌놈들의 제국주의>를 읽고 <직선들의 대한민국>을 거쳐 <명랑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를 통해 최근의 생각들을 일괄하고 있다. 기획 의도와 내용상 <명랑이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앞의 두 책과 구별되지만 전체적인 맥락으로 볼 때는 함께 묶여도 무관하다. 잡지나 신문 등에 실린 칼럼과 비평문을 모아 낸 모음집이니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된 흐름으로 읽히지는 않는다.

  사회적 이슈들을 다루었던 민감한 문제들과 정부 정책이나 경제, 사회 문제를 통해 노무현 정부 시절을 돌아보는 추억담처럼 읽힌다. 벌써! 이제 이명박 정부가 아닌가. 책을 읽는 동안 격세지감을 느낀다. 작년에 출판된 책이 1년 만에 아련한 추억처럼 읽히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물론 책에 실린 내용이 그 이전에 쓰인 글들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전혀 다른 방식으로 운영되는 주식회사 대한민국에 대한 우려와 걱정이 앞서기 때문일 것이다.

  잇달아 한 사람의 책을 읽다보면 행간에 숨은 정보들을 많이 읽어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밝히지도 않은 나이와 이력들 그리고 그간의 행적들이 씨줄과 날줄처럼 교묘하게 얽혀 마치 퍼즐을 맞춰 전체 그림을 감상하는 즐거움을 맛본다. 개인적인 호기심이 아니라 그의 생각과 사유 방식들이 어디에서 발원한 것인지, 어떤 과정과 경로를 통해 지금에 이르렀는지, 앞으로 그의 행동 방식과 관심사까지 두루 살펴 볼 수 있다.

  이것은 한 개인에 대한 탐구가 아니라 우석훈의 글을 통해 바라보는 대한민국의 현주소이다. 대단한 문학적 감수성을 숨기고 지극히 냉철한 경제학을 전공했으며 일찍이 관료 사회에서 공무원들과 국제 기구에서 일했던 경험들이 우석훈으로 하여금 현실을 거시적인 관점에서 그리고 사회와 개인을 보다 미시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사유의 틀을 제공한 것이 아닐까 싶다. 어쨌든 우석훈의 글들은 탄탄하고 매력적이지는 않지만 솔직하며 합리적이다. 그래서 계속 읽힌다.

  사람들의 술버릇 중에 같은 말을 반복하는 사람이 있다. 중언부언 - 곁에서 듣는 사람에게 이것만큼 괴로운 것도 없다. 우석훈의 이야기 중에는 이렇게 중복되는 부분도 있다. 세 권의 책을 짧은 기간 동안 읽어서 그런 느낌 일 수도 있지만 이것이 술주정으로 들리지는 않는다. 생태와 환경 그리고 평화로 요약될 수 있는 거대 담론들은 실제 현실 속에서 어떤 형태로 나타나야 하는지 구체성을 담보하지 못해 조금 답답한 면이 있기는 하다. 책의 목적과 기능이 개별적인 사례와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하는 데 있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할 목적과 방향에 대한 희망이나 합의가 부재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21세기가 훌쩍 넘어섰다. 20세기에 넘어온 사람과 넘어오지 못한 사람을 분류하는 ‘인물열전’ 부분은 경제학자 우석훈이 아니라 인문학자 우석훈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박노자와 진중권에 대한 평가 강금실과 김지하에 대한 비판은 우리 시대를 가장 선명한 눈으로 바라보는 ‘진정성’을 느낄 수 있었다. 공감할 수 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고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은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석훈은 목하 열애중이다. 대한민국을 사랑한다고 하면 민주주의적 관점에서 거부할 것이고 동북아 중심국가론을 주장하는 손학규와 김지하와 한통속으로 몰아갈 염려가 있겠지만 녹색환경과 생태 경제학이라 불릴 만한 일관된 관심과 주장은 평화 경제학을 가능하게 하는 토대가 된다. 이름이 거창하고 그럴듯해서가 아니라 우석훈이 주장하는 미래는 분명 희망의 메시지가 전해지고 환한 미소가 떠오른다.

  우리는 최소한 그렇게 선명하고 밝은 미래를 그리며 이 사회를 만들어가고 경제를 생각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위정자들은 최소한 그만한 청사진과 철학적 신념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어둡고 암울하다. GNP 2만불 혹은 3만불이 대한민국의 지향점이어야 할까? 숫자놀음에 불과한 단순한 경제지표를 볼모로 우리 모두는 부나비처럼 제 날개가 타오르는지도 모르고 달려드는 것은 아닐까? 1% 혹은 10%를 위한 정책을 하위 50%가 지지하고 열광하는 이유를 우석훈은 아직 이해하지 못한다.

  빌헬름 라이히는 <파시즘의 대중심리>라는 탁월한 저서에서 이 비합리적인 정치 성향에 대해 ‘성정치학’이라는 분석틀로 이론화했다. 다양한 분석들이 적용되고 있으며 지금도 여전히 조중동의 기사를 자신의 신념으로 믿고 있는 대다수 비규정규직과 세입자들이 문제라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미래의 희망과 비전이 분명하지 않고 사회적 타협이나 지향이 일치하지 않는 사회는 불안하기만 하다. 우리는 지금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일까?

  ‘명랑’이 우리를 자유케 할 수 있을까? 우석훈은 스스로를 ‘명랑 좌파, C급 경제학자’라고 명명한다. 우울하고 비관적인 전망이 미래를 만들 수는 없다. 하지만 비합리적인 낙관과 막연한 믿음, 모든 게 잘 될 거라는 환상은 현실적으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절대, 쉬운 일은 아니지만 모두 함께 움직일 수 있는 구심점, 공동의 이익을 위한 접속 코드가 필요하다. 이제 우리는 그것을 찾고 접속하고 현실을 재편하려는 작은 노력과 실천들이 필요하다. 매우 명랑하고 즐겁게 말이다. 세상은 즐거움으로 가득한 곳이라는 믿음이 아니라 내가 즐실 수 있는 곳으로 만드는 실천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우석훈의 외침은 계속될 것이다. 그것은 메아리 없는 아우성이 아니라 멀리서라도 작고 힘찬, 수많은 울림들을 하나로 모으는 확성기가 될 것이라고 믿고 싶다.


080725-0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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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선들의 대한민국 - 한국 사회, 속도.성장.개발의 딜레마에 빠지다
우석훈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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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모난 침대에서 일어나 눈을 떠 보면
네모난 창문으로 보이는 똑같은 풍경
네모난 문을 열고 네모난 테이블에 앉아
네모난 조간신문 본 뒤
네모난 책가방에 네모난 책들을 넣고
네모난 버스를 타고 네모난 건물을 지나
네모난 학교에 들어서면 또 네모난 교실
네모난 칠판과 책상들
네모난 오디오 네모난 컴퓨터 TV
네모난 달력에 그려진 똑같은 하루를
의식도 못한채로 그냥 숨만 쉬고 있는걸
주위를 둘러보면 모두 네모난 것들뿐인데
우린 언제나 듣지 잘난 어른의 멋진 이말
세상은 둥글게 살아야 해
지구본을 보면 우리 사는 지군 둥근데
부속품들은 왜 다 온통 네모난건지 몰라
어쩌면 그건 네모의 꿈일지도 몰라
네모난 아버지의 지갑엔 네모난 지폐
네모난 팜플렛에 그려진 네모난 학원
네모난 마루에 걸려있는 네모난 액자와
네모난 명함의 이름들
네모난 speaker 위에 놓인 네모난 tape
네모난 책장에 꽂혀 있는 네모난 사전
네모난 서랍속에 쌓여 있는 네모난 편지
이젠 네모같은 추억들
네모난 태극기 하늘높이 펄럭이고
네모난 잡지에 그려진 이달의 운수는
희망이 없는 나에게 그나마 기쁨인가봐
주위를 둘러보면 모두 네모난 것들뿐인데
우린 언제나 듣지 잘난 어른의 멋진 이말
세상은 둥글게 살아야 해
지구본을 보면 우리 사는 지군 둥근데
부속품들은 왜 다 온통 네모난건지 몰라
어쩌면 그건 네모의 꿈일지도 몰라



  갑자기 화이트의 ‘네모난 꿈’을 듣고 싶었다. 가사를 천천히 들여다보며 노래를 들었다. 네모는 궁글게 사는 꿈을 꾸었을까? 아니면 둥근 지구가 네모난 꿈을 꾸었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우리가 살고 현실은 여전히 모호한 환상과 꿈이라는 환각제를 통해 현실의 고통을 잊게 한다. 마약처럼 몽롱하게 먼 미래를 부정하고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들은 뒤로 밀린다. 눈앞의 이익과 단기간의 손익 계산에 머릿속은 컴퓨터처럼 돌아간다. 잘 산다는 것, 행복한 삶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그다지 크게 신경 쓰고 있지 않은 것 같다. 주변을 돌아보면 모두가 열심히 사는 것 같은 데 행복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적다. 행복해지는 방법에 대해서도 고민하지 않고 그것이 왜 중요한지 비웃기까지 한다.

  이렇게 21세기의 대한민국은 몇 가지 형태의 삶의 형태로 수렴되었다. 아이를 키우는 방식과 학교를 다니는 목적, 대학을 선택하는 기준, 배우자를 결정하는 관점, 직장을 선택하는 방법이 이미 결정되어 있는 것 같다. 최선은 중요하지 않고 이유도 물을 필요가 없다. 자명한 논리처럼 너무 분명해서 그것들에 대한 질문조차 우습게 들린다. 우리는 과연 제대로 살고 있는 걸까?

  우석훈은 네모난 세상보다 무서운 <직선들의 대한민국>에 경고장을 날리고 있다. 생태 경제학이라 명명될 만한 기준과 관점을 유지하면서 우석훈이 진단하는 대한민국은 끔찍하기만 하다. 과연 어떤 기준으로 무엇을 바라보느냐에 따라 세상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면 이 책은 21세기를 살아가는 대한민국 사회에 던지는 경고장이자 진단서에 해당된다.

  속도가 승패를 좌우하는 시대를 살면서 ‘느림의 미학’을 말하고, 전 국토의 80%가 도시화되었으면서 친환경적인 삶을 외치고 있다.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수돗물로 청계천을 복원했다고 대국민 사기극을 쳐도 사람들은 박수를 친다. 이거라도 어디냐! 비판을 위한 비판이 아니라 현실에 대한 정확한 진단만이 대안을 찾고 미래의 길을 모색하는 토대가 된다는 사실은 너무 자명한 일이다.

  비판 정신이 긍정의 힘이라는 사실을 다시 깨닫는다. 거대한 어항이라고 표현된 청계천을 필두로 토목공화국의 몰락에 대한 경제학자의 우려는 이상적인 관점이나 좌파의 논리가 아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에 대한 자화상이다. 그것을 어떻게 이야기할 것인가에 대한 방법과 고민이 진지하다면 언제든 우리는 귀기울여야 하는 것이 아닐까?

  경제학자 우석훈은 생태와 환경을 화두로 이야기를 풀어낸다. 그 이야기는 단순하게 경제 논리와 숫자 놀음이 아니다. 우리들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며 미래 사회에 대한 우려와 냉정한 조언이다. 저자가 말하듯이 최소한 ‘경제 이성’만 가지고 있어도 우리 사회가 선택한 것들이 이렇게 엉망이 되어 가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대중은 선택 능력이 없다는 것인가? 판단 능력이 마비되어버린 감각의 제국 대한민국의 미래는 과연 부정적이기만 한 것인가?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은 아마도 참 다양한 반응과 대안과 비판과 미래를 그려 낼 것이다. 그것이 어떤 것이든, 좌파든 우파든 무관하게 최소한 이성적인 논의와 방안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지극히 단순한 생각에서 출발했다고 평가할 수 있겠지만 과연 현실 정치와 경제를 보는 관점에서 통용될 것인가의 문제는 씁쓸함을 넘어 분노를 만든다.

  우리가 가는 길이 비록 멀고 험해도 가야할 길이고 지속 가능한 삶을 유지하는 것이라면 행복하겠다. 문제는 그 길조차 모호하며 보이지도 않을 뿐더러 지금 우리가 서 있는 곳은 이미 갈림길을 지나쳐버린 것은 아닐까 싶은 생각마저 든다. 생태적 사회를 위한 변화는 가능한가? 세상을 바꾸는 힘은 과연 아름다움에서 나온다고 믿어도 될까?

  이 책에서 우석훈 거시적 관점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경제학자의 역할에 충실하고자 한다. 때로는 좌파는 우파든 거침없이 하이킥을 날리고 그들의 한계와 역량을 난도질한다. 간만에 속이 좀 풀리고 시원한 느낌이다. ‘래디컬radical'이라는 단어를 좋아한다는 강유원을 만났을 때처럼 큭큭거리며 읽었지만 단순히 공감대가 형성되었다고 해서 기뻐할 수 있는 문제들은 분명 아니다. 현실적인 대안이나 미래에 대한 아젠다가 제시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어찌보면 읽고나서 더 가슴만 답답해졌다.

  그래도 지금 이대로는 아니다. 아닌건 아닌거다. 이런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이 읽었으면 좋겠는 책이다. 책은 어쩌면 필요없는 사람들에게 자꾸 읽히고 정작 읽어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외면 당하는 물건인지도 모르겠다. 고민의 끝자락에는 ‘실천’이 남는데 쉽지 않다. 아니 게으르다.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동차 키를 챙기고 기름값에는 아예 눈감아 버리고 정몽준도 아니면서 버스비를 모르고 사는 생활 패턴에는 문제가 있다. 바쁘다는 핑계만으로 용서되지 않는 부분들이 누구에게나 있겠지만 책 한 권 읽고 고개만 끄덕인다고 될 일이 아니다. 하지만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면 미래는 더욱 참담하다. 더구나 주식회사 대한민국의 CEO 이명박을 보라. 걱정되지 않는다면, 그럭저럭 잘 해나가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노무현이 그리웁다면 당신은 이 책의 필독자이다!!!


080723-0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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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 경제를 말하다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42
홍기빈 지음 / 책세상 / 200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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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알고 있는 삶의 모습은 도대체 어디에서 시작된 것일까? 한없는 궁금증에 목마를 때가 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대단히 ‘철학적’이다. 인간의 본성과 역사에 대한 고찰 없이는 말할 수 없으며 간단하게 한 마디로 정리할 수도 없다.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로 요약되는 그 실체 없는 삶에 복무하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을 가만히 들여다보자.

  그 한 복판에 서 있는 것이 ‘경제’이다. 일본의 번역어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용어에 대한 개념이 잘못되었다는 지적이 있다. 하지만 우리에게 경제는 생활이며 생존의 조건이며 때로는 생의 궁긍적인 목적이다. 일상에서 사용하는 경제라는 용어는 맥락에 따라 전혀 방식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경제를 말하는 방식이 경제학자나 공무원이 다르고 시장 상인이 다르며 월급쟁이가 다르다.

  경제를 살려야 한다고 외치는 대통령에게는 또 다른 것일 수도 있다. 누가 죽였는지 모르지만, 언제부터 병들어 죽어가고 있는지 모르지만 초지일관 경제를 살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대통령에게 경제를 살린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궁금하다. 누구를 위한 경제이며 어떤 방식으로 경제를 살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그 주장과 논리를 듣고 있노라면 경제와 더불어 역사와 정치가 함께 죽어가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경제를 누구에게 물을 것인가? 홍기빈은 <아리스토텔레스, 경제를 말하다>를 통해 고대 그리스 철학자에게 경제를 묻고 있다. 경제는 도대체 무엇인가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에게 답을 줄 수 있을까? 홍기빈이 희랍의 현자에게 경제를 묻는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볼 만하다.

  이 책은 경제학에 관한 역사적 고찰에 바쳐지고 있다. 학문적 관점에서 이론적으로 풀어내는 경제학은 실생활에서 적용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거시적 관점이든 미시적 관점이든 경제학은 실제 운용되는 과정에서 인간의 삶을 지배할 수 있을 만큼 현대사회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다. 또한 독립적인 분과학문으로 기능할 수도 없다. 정치와 사회 현상을 떠나서 경제를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논리이다.

  이 책은 현대 경제학의 정의에 대해 알기 쉽고 설명하고 있으며 그 문제점들에 대해서도 고려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에게 경제는 무엇이며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 것인가에 대해서도 스스로 질문을 만들어낸다. 물론 독자의 몫이지만 해답이 쉽지만은 않다. 경제라는 말을 역사적으로 고찰해 보는 부분도 유용하지만 시장을 발명한 그리스인들의 생활과 ‘행복’에 대해 그리고 민주주의의 발생과 폴리스의 정치적 상황들을 통해 경제 문제를 풀어내는 부분이 인상적이다.

  아리스토텔레스와 인간의 경제 부분은 이 책에서 핵심적인 부분에 해당한다. 이미 다른 책을 통해 화폐의 기능과 자본주의의 함수 관계에 대해 이해한 독자라면 흥미있게 접근할 수 있다.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한 조건으로서 화폐와 인간의 욕망에 대해 고민해야 하고 당연히 유한한 재화 속에서 무한한 욕망을 발견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활동을 프락시스praxis와 포이에시스poiesis로 구별한다. 후자는 ‘무언가를 생산하는 행위’이고 전자는 ‘행위 그 자체를 목표로 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 P. 111

  인간의 욕망은 프락시스든 포이에시스든 하나로 귀결될 수 없다. 두 가지 욕망의 덩어리로 엉키고 뒤섞여 시너지 효과를 발휘한다. 하나의 욕망이 채워졌다고 해서 갈증이 해소되지도 않고 완성되지도 않는다. 어차피 채워질 수 있다면 ‘욕망’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워지지도 않았을테지만 말이다.

  어쨌든 최소한의 노력으로 희소한 가치를 얻으려는 유한한 가치에 대한 무한한 욕망이 인간의 경제 행위의 기본 조건이 된다는 생각은 여전히 유효하다. 하지만 과연 그것만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조건 지워지고 많은 사람들의 삶을 ‘행복’하게 할 수 있을까? 물론 불가능하다.

  그래서 저자는 중농주의자들과 애덤 스미스, 독일 역사학파, 마르크스, 베블린, 폴라니, 케인스의 이론들을 소개하며 과연 우리에게 지금 현재의 관점에서 필요한 관점과 행동에 대해 간접적으로 고민을 요구한다.

경제를 바라보는 서로 다른 시각이 존재하고 때로는 정책 입안자와 실물경제를 움직이는 사람들 사이에 갈등이 생기게 된다. 비정규직으로 대표되는 우리 사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점을 간과하고 있는 지금 우리에게 과연 어떤 경제가 필요하며 진짜 경제를 살리기 위한 방법이 무엇인지 다같이 고민만 한다고 해결될 일인가?

  아리스토텔레스가 다시 살아난다 해도 대한민국의 경제를 살릴 수 없고 그 시대에 요구되던 상황과 정신을 오늘에 되살릴 수도 없다. 다만 과거에게 길을 묻고 가장 현명하고 지혜로운 방법과 가치는 이미 오래전부터 모두가 알고 있지 않았을까? 방법을 몰라서가 아니라 목적이 다르게 때문이 아니었을까? 서로의 이익이 다르고 지향점이 다르기 때문이었을까?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 책은 과거의 오래 된 경제에 대한 기억을 들추고 있다. 당대의 삶과 생의 목적을 돌아보는 엉뚱한 작업을 통해 혹은 화폐와 자본주의의 기원에 대해 살펴보는 일이 지금 우리의 삶을 돌아보고 진짜 경제가 무엇인지 고민해 볼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다.


080721-0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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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네인 스파르타인 살림지식총서 173
윤진 지음 / 살림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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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트로이>로 강한 인상을 남긴 그리스와 트로이의 전쟁을 기억할 것이다. 그 전쟁에서 트로이에 맞선 그리스는 연합군이었고 그 중심에는 스파르타가 있다. 스파르타는 공교육의 창시, 국가에 대한 충성심, 소박한 생활 방식 등으로 알려진 대표적인 도시 국가이다. 이에 비견되는 아테네는 수준 높은 문화와 예술로 후대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두 도시 국가는 정치 공동체인 폴리스는 ‘민주’와 ‘공화’라는 개념의 출발점이기도 하다. 지금까지도 우리가 이 정치 체제를 모델로 하고 있다는 것은 아득한 역사 속에서 영향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고 그들의 삶과 문화를 이해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찾게 된다. 역사는 과거에 대한 기억이며 먼저 살았던 사람들이 남긴 유산인 현재에 대한 확인 작업이다. 두 나라에 대한 기억은 인류 문화의 기억이며 정치 제도에 대한 반성이다.

  발전이라는 당위적 측면에서 우리의 삶을 바라볼 때 과거보다 행복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그렇다고 쉽게 말할 수는 없다. 복잡하고 다양한 삶의 형태를 보이는 현대 사회에서 일종의 패턴을 보여주는 자본주의라는 경제 제도와 대의적 민주제도는 반성과 변화를 모색하며 끊임없이 갈등과 충돌을 보여준다. 이것은 개인과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물론 국가와 국가의 문제이다.

  윤진의 <아테네인, 스파르타인>은 고대 그리스 도시 국가의 특징을 요약적으로 잘 정리해 준다. 살림지식총서 시리즈의 특징을 잘 살려 쓰고 있다. 제한된 분량에서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상식 수준에서 벗어나 그들의 수호신과 종교, 축제와 운동경기를 비교하고 있다. 사회구성과 교육, 정치와 군사 등 당대의 모습들을 특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으며 간략하지만 잘 정리된 그들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

  대표적인 인물들을 통해 당대 사회와 문화, 정치 그리고 각종 제도를 확인할 수 있다. 쉽게 접할 수 있는 사항들이 아니기 때문에 고대 그리스 철학이나 서양의 고전을 접할 때 후륭한 전제가 될 수 있는 책이다.

  현재의 관점에서 당대의 사상이나 역사, 문화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때대로 힘겨울 때가 있다. 소크라테스나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를 이해하기 위해 보다 세심한 노력과 풍부한 배경지식이 필요하다. 그들의 사상은 결국 당시의 사회문화적 배경에서 배태되었을 것이고 그 사상의 효용 또한 그들이 살았던 시대정신을 뛰어넘지는 못했을 것이라는 추측은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이다.

  서로 대립각을 세우고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준 나라가 아니라 문화와 예술, 교육이라는 측면에서 두드러진 특징을 지니고 있는 두 나라를 아우를 수 있는 생활과 현상들을 이해하기 위한 책으로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그리스 도시 국가의 특징과 생활은 그 어느 때보다 찬란한 문화적 전성기를 구가했고 후대 인류 문화에 지대한 공헌을 한 것이 사실이다. 그 그림자는 길게 드리워져 현재에 이르고 있기 때문에 한 번쯤 관심을 갖게 된다.

  전공자가 아닌 일반인의 입장에서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비교해 보고 당대의 제도와 종교, 정치와 운동 경기를 살펴보는 일 만으로도 재미있다. 문화사나 풍속사가 중요한 것은 그 자체로도 중요성을 가지지만 그것이 바탕이 되지 않은 사상과 학문의 접근은 어쩌면 무의미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서구 정치사상 고전읽기>를 통해 소개받은 이 책은 다른 책을 위한 레시피로 적당하다. 다양한 지적 토대를 가지고 폭넓은 관점으로 과거 인류의 삶을 이해한다면 또 다른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게 될 것이며 그렇게 탄생한 학문과 사상도 다른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쉽지 않겠지만 앎의 방식과 태도는 이렇게 다양하게 종횡무진 시대와 공간을 뛰어넘어야 하는 일임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다른 책을 위한 디딤돌이나 발판의 역할 만을 위해 필요한 것은 물론 아니다. 아테네와 스파르타라고 하는 두 도시 국가의 두드러진 특징을 통해 그 나라에 살았던 사람들에 대한 바른 이해는 통상적으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선입견과 상식에 대한 상세한 분석이며 정확한 이해이기도 한 것이다.

  가장 찬란했던 문화와 강성했던 국가를 건설했던 두 나라. 플라톤의 이상적인 국가의 근원이 되기도 했던 그들은 인류의 문화와 역사에 지워지지 않는 뚜렷한 족적을 남겼으며 현재에도 그들에 대한 호기심과 관심이 사라지지 않을 정도록 강력한 흡인력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현재는 단순한 과거의 미래가 아니라 당대를 살아가는 인간들의 노력과 변혁의 힘에 의해 달라질 수 있음은 물론이다. 이것이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전해주는 고대 아테인과 스파르타인의 전언은 아닐런지.


080720-0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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