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워드 진, 세상을 어떻게 통찰할 것인가
데이비드 바사미언.하워드 진 지음, 강주헌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6월
평점 :
품절


잠을 깬 사자처럼 일어서라
쓸러지고 또 쓰러지더라도!
잠든 동안에 그대에게 떨어진
이슬처럼, 사슬을 벗어 던져라.
너희는 다수이고 그들은 소수이지 않느냐!   - 셸리, ‘무질서의 가면’중에서(P. 113)


  어른이 되면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질 줄 알았다. 나이가 많은 것을 해결해 줄 것이라고 믿었던 순진했던 시절이 오히려 행복했을까? 세상에 대한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지혜는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이라던 생각이 이제는 부끄럽다. 한 살 두 살 나이를 먹으면서 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한 것이라고 말하는 지도 알게 되었고 다양한 경험을 통해 나이를 통해 얻게 되는 세상살이에 대한 경험과 통찰의 깊이가 얼마나 깊어지는 것인지도 알게 되었다. 두 가지 말이 다 그럴만한 연유가 있지만 결론은 나이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백남준이 죽는 순간까지 ‘청년’으로 불린 이유를 생각해 보자. 나는 청년이라고 외칠 수 있는 사람이 우리 주변에 얼마나 있는가? 나의 꿈은 영원히 늙지 않는 것이다. 몸이 아니라 영혼이. 환갑을 넘긴 생각을 가진 아이들이 있는가 하면 흰머리 휘날리며 젊은이를 부끄럽게 생각하고 행동하는 어르신들이 계시다. 나이는 숫자일 뿐이라고 부끄럽지 않게 그리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물론 그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세상과 타협하거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불의를 외면하거나 말로만 외칠 뿐 행동하지 않거나 긍정적인 것과 순종적인 것을 구별하지 못하거나 부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을 혼동하거나 안정과 자본의 논리에 복종하거나 자신의 욕망을 은밀하게 감추거나 적을 만들지 않기 위해 신념을 저버리거나 아예 신념이 없거나 아무것도 배우려 하지 않거나 이제 모든 것이 만족스럽다고 말하거나 세상은 원래 그런 것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그를 늙은이라고 부른다.

  하워드 진은 좌파라고 불린다. 촘스키와 더불어 미국을 욕하는 대표적인 미국 백인이다. 욕만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하는 지성인으로 손꼽히는 사람이다. 역사를 전공한 그의 견해는 여전히 유효하며 자신의 신념을 지켜나가고 있으며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한 그의 꿈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참 아름다운 생이다.

  <하워드 진, 세상을 어떻게 통찰할 것인가>는 ‘청년’ 하워드 진을 다시 만나게 해준다. 역사와 정치의 대화라는 원제에 충실한 이 책은 미국이라는 나라의 환상을 걷어준다. 제2차 세계대전이후 이승만으로부터 촉발된 미국과 한국과의 관계는 미국과 다른 나라와 크게 다르지 않다. 지정학적 요충지, 이념 대립의 최전선에서 상호 이익을 위해 관계가 형성되었지만 언제나 우리는 그들에게 환상과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다. 지금도 여전히 미국이 없는 한국을 생각조차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오래된 동맹국과 정치적 역학 관계 속에서 미국의 역할과 외교관계가 불필요하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미국과 한국이 어떤 관계를 알 수 있는 방법은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보다 깊은 관심과 비판적 관점에서 출발할 수 있다.

  인터뷰 형식으로 이루어진 이 책은 데이비드 바사미언의 적절하고 충실한 질문의 내용과 하워드 진 특유의 날카롭고 분석적인 이야기가 어우러져 있다. 그의 생각을 잘 이끌어내고 정리하며 적절한 질문을 던지는 인터뷰어를 칭찬할 만하다. 인터뷰이가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그리고 자신의 생각을 충분이 드러낼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전적으로 인터뷰어의 능력에 달려 있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두 사람의 대화를 흥미롭게 따라갈 수 있다. 과연 세상을 통찰한다는 표현이 가능할 만큼 미국은 대단한 나라가 되었다. 세상을 이해하려면 미국을 알아야 한다.

  구 소련의 붕괴로 현실 사회주의가 사라지면서 힘의 균형이 깨지고 미국의 패권주의가 독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경찰국가를 자임하는 미국은 세계의 깡패 국가가 된지 오래다. 겉으로 내세우는 명분과 그들의 논리는 모순되며 거짓과 위선은 만천하에 폭로되었지만 그들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감추고 버티기를 계속하고 있다. 부시의 임기가 끝난다고 해서 새로운 세상이 열릴까? 김대중, 노무현 정권을 ‘잃어버린 10년’이라고 규정했던 이명박 정부의 지난 5개월을 돌아보라. 끔찍하기만 하다. 아직도 4년 7개월이 남았다. 국민은 자기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갖게 되어 있다는 김규항의 말이 이제는 저주로 들린다.

  대량 살상 무기로 이라크를 침략한 미국과 자원 전쟁의 더러운 내막을 알고도 모른채 최대 인원을 파병한 대한민국 정부는 영혼의 샴 쌍둥이에 불과하다. 이 책을 통해 미국의 추악한 뒷모습을 엿보는 게 아니라 우리의 자화상을 보는 것 같아 못내 씁쓸하다. 자본주의 위기는 구조적인 위기라는 자명한 이야기로 이 책의 인터뷰는 시작된다. 지배계급의 논리가 어떤 것인지, 전쟁에 반대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문화예술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역할은 무엇인지, 왜 비판적 사고와 의심하는 능력을 키워야 하는지 하워드 진은 진지하게 말하고 있다.

스터즈 터클은 미국인이 국가적 알츠하이머병에 걸렸다고 말했습니다. 한마디로 우리가 역사를 잊는다는 거지요. - P. 32

  역사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에 대한 충고를 잊지 않는 하워드 진은 역사를 통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하지만 어리석게도 사람들은 지나온 인류의 발자취 속에서 아무것도 기억하려 하지 않는다. 망각은 미래를 위한 시금석이며 디딤돌이다. 그래도 저자는 여전히 세상에 대한 믿음과 평화에 대한 신념을 버리지 않고 있다. ‘국경없는 세계’는 그렇게 하워드 진의 꿈이 되었다.

선생님은 아주 소박한 이유 때문에 역사를 공부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을 변화시키고 싶다.” 그 목표를 얼마나 성취했다고 생각하십니까? - P. 248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바로 이 책을 통해 드러난다. 한 사람에 의해 세상이 변화하는 것은 아니다. 하워드 진은 다수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힘을 믿고 있다. 역사는 그렇게 이어져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나아갈 것을 믿는다. 그렇지 않다면 그의 생애는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우리에게는 믿음직스럽고 존경할 만한, 행동하는 지성인으로 불리워질 만한 사람이 누가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지적 활동을 중단하신 리영희 선생님은 안녕하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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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터즈 터클은 미국인이 국가적 알츠하이머병에 걸렸다고 말했습니다. 한마디로 우리가 역사를 잊는다는 거지요. - P. 32

변화는 그런 식으로 일어난다는 걸 미국 국민에게 깨우쳐주기 때문입니다. 우연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계획되고 조직화된 운동을 통해서 변화가 시작된다고 말입니다. - P. 35

권력자는 폭력으로써 사람들이 비폭력적 행위에 참여하는 걸 방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진정으로 변화를 원한다면, 지배계급에 저항하는 행동을 보여줘야 한다는 겁니다. 어떤 식으로든 저항해야 합니다. 비폭력적으로 저항하더라도 말입니다. - P. 57

잠을 깬 사자처럼 일어서라
쓸러지고 또 쓰러지더라도!
잠든 동안에 그대에게 떨어진
이슬처럼, 사슬을 벗어 던져라.
너희는 다수이고 그들은 소수이지 않느냐!   - 셸리, ‘무질서의 가면’중에서(P. 113)

지식은 주관적이고 역사도 주관적이어서 수많은 해석이 가능합니다. 내 해석은 그중의 하나일 뿐이라고 분명히 밝힙니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관점, 즉 ‘생각을 파는 시장’에서 내 관점은 한 모퉁이를 차지할 뿐이라고요. 물론 ‘생각 시장’은 자유 시장이 아니라는 전제에서 출발합니다. 실물경제 시장처럼 ‘생각 시장’도 소수의 강력한 집단이 지배하고, 나는 그 시장에서 작은 수레를 밀고 다니며 학생 손님들에게 “이걸 맛보세요. 괜찮은지 맛보세요!”라고 외칠 뿐이라고 말합니다. - P. 214

회의주의(skepticism)는 교육을 통해 학생에게 심어줘야 할 가장 중요한 자질 중 하나입니다. 지금껏 신성하게 여겨왔던 것이 결코 신성한 것이 아니며, 지금껏 우러러 공경했던 것이 반드시 공경해야 할 것은 아니라는 점을 학생들에게 깨닫게 해줄 때 회의적 사고가 가능합니다. 지금까지 낭만적이고, 이상적이고, 훌륭한 행위로만 받아들였던 정부의 정책을 면밀히 조사하고 비판적으로 분석해야 마땅하다고 학생들에게 가르쳐줘야 합니다. - P. 216

내가 꿈꾸는 세계는 국경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세계, 예컨대 매사추세츠에서 코네티컷으로 이동하는 것만큼이나 쉽게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옮겨 다닐 수 있는 세계입니다. 여권이나 비자, 이민 할당량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옮겨 다닐 수 있는 세계입니다. - P. 246

인종과 종교와 국가라는 경계가 더 이상 반목의 원인이 되지 않는 세계입니다. 문화의 차이와 언어의 차이는 있더라도, 그런 차이가 서로를 미워하며 폭력을 휘두르는 원인으로 발전하지 않는 세계는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 P. 247

선생님은 아주 소박한 이유 때문에 역사를 공부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을 변화시키고 싶다.” 그 목표를 얼마나 성취했다고 생각하십니까? - P. 248

조라는 백인이 해주길 원하는 것도 하지 않고, 흑인이 해주길 원하는 것도 하지 않을 거라며 자신의 정체성을 주장했습니다. 조라의 어머니가 그녀에게 해줬다는 조언은 이렇습니다. 태양을 향해 뛰어 올라라! 태양에 닿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땅에서는 벗어날 수 있을 테니까. - P. 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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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현상적인 사랑들보다는 훨씬 원대한 어떤 것이다. 단테가 말하지 않았던가? 사랑은 태양과 모든 별들을 움직인다고……. - P. 10

사랑에 빠지면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서 빠져나와 타인을 향한 여정을 떠나야 한다. 그 대상이 나를 중심으로 내 주위를 도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 대상이 만든 궤도를 탄다. - P. 13

사실 진실한 사랑의 본질은 아픔과 고뇌에 있고, 그 크기가 클수록 진실의 크기도 더 클 가능성이 많다. 사랑에 빠진 여자는 남자에게서 아무런 고통 없는 무관심을 받느니 차라리 고통 받기를 원한다. - P. 14

“사랑은 한 영혼이 다른 영혼을 향해 나아가는 구심력이며, 그 힘은 지속적인 흐름 속에서 유지되면서 가공할 힘을 분출한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 대상과 하나가 되면서 그 존재를 인전하는 것이다.” - P. 18

잘못된 경험의 결과로, 스탕달은 사랑은 이루어지는 것이며 결론이 나는 것이라고 믿었다. 이 두 가지 속성이야말로 사이비 연애의 특징이다. - P. 35

온전한 사랑이란 일단 태어나면 소멸되지 않는다. 거짓말 같지만 이것이 진실이다. - P. 37

내 생각에 온전한 사랑이라면, 환경과 거리상의 장애가 충분한 애정을 공급하는 걸 방해하여 애정의 굵은 선이 가는 선으로 바뀔지는 모르지만, 말라비틀어진 상태에서도 감정의 동맥은 사랑을 끊임없이 담아 심장으로 옮기는 법이다. 그게 제대로 된 사랑의 운명이다. 결코 죽지 않는, 적어도 감정의 본질만은 손상되지 않는 바로 그런 사랑. - P. 38

플라톤이 여기서 말하는 미는 아름다움이라는 의미보다는 절대라는 의미에 더 가깝다. 플라톤은 모든 사랑에는 하나가 되려는 욕망이 내재하고, 이때 사랑은 보다 절대적인 대상, 즉 자신보다 우월한 대상을 찾아가는 여정이라고 말한다. - P. 40

본능이란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에 본능이며, 그렇기 때문에 절대니 완성이니 하는 개념도 적용되지 않는다. - P. 42

일단 이렇게 애정이 시작되면 내 안에는 자신의 개성을 그 사람에게 보여주고 싶은 절박함과 그 사람을 내게 흡수하고 싶은 다급함이 생긴다. 신비한 집착! 만약 누군가가 나의 개인적 영역을 그렇게 침범한다면 우리는 견딜 수 없을 텐데, 유독 사랑의 경우에만 우리는 그런 월권을 허용한다. 아니 허용할 뿐만 아니라 간절히 소망한다. - P. 42

나는 사랑이 아주 고귀한 행동인 동시에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낮은 행위라고 생각한다. 온전한 사랑을 하려면, 사랑한다는 것에는 정신의 가장 낮은 상태 혹은 일종의 백치 같은 면이 있다는 것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때로는 정신적인 것을 축소시키고 육체적인 것, 심지어 동물적 본능까지 작용해야 한다. 사랑의 어떤 성격이 높은 정신성과 관련이 있어 일상과 분리되어 있는 것처럼, 그 반대 성격에서 그런 본능이 작용하지 않고는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다.
  즉, 성적 본능이 없는 사랑은 없다. 성적 본능은 하나의 메커니즘며 자동적으로 움직이는 오토마티즘(automatism 英)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사랑에 빠짐은 본능의 메커니즘 없이는 성립되지 않는다. - P. 48

사랑에 빠진 사람에게 사랑하는 사람 역시 무엇을 하다가도 결국 돌아가게 되는 그런 존재가 된다. 모든 세상이 사랑하는 사람으로 귀결되는 것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사랑에 빠진 사람에게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이 그것을 대체해버리기 때문이다. - P. 53

사랑은 한 사람을 크게 변화시킨다. 사랑에 빠진 사람의 모습은 마술, 신들림, 몽유로 비유되어 왔다. 반복되는 말이지만 사랑은 결국 마술에 걸린 것과 같다. - P. 53

사랑에 빠진 여자는 자주 절망감에 빠지는데 왜냐하면 자기가 사랑하는 남자가 총체적으로 자기 마음속에 들어오지는 않는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반대로 민감한 남자라면 사랑하는 여자가 자신에게 모든 것을 기대고 있지 않다고 판단할 때 수치감을 느낀다. - P. 60

사랑은 한순간에 이루어지지만 그 과정은 은밀하고 조용하며 지속적이다. - P. 61

회의주의자란 풍부하고 다양하며 완벽한 삶을 누리고자 하는 사람이다. 회의주의자를 아무것도 믿지 않는 것으로 해석하는 태도는 잘못된 것이다. 회의주의자는 교리주의자의 반대에 있는 사람으로, 교리주의자가 한 가자 도그마를 신봉한다면 회의주의자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둔다. - P. 101

마치 천문학자가 태양을 바라보듯이 먼 곳에서 그것을 바라볼 수 있을 때에 사랑은 정확하게 논의될 수 있다. 사랑을 안다고 해서 사랑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사랑한다고 해서 사랑을 아는 것도 아니다. 무엇을 보기 위해서는 그것에서 떨어져 나와야 한다. 떨어짐은 그 대상을 지식이라는 범주 안에서 생생한 어떤 것으로 변형시킨다. - P. 117

사랑이란 본능에 가깝기보다는 작품을 창조하는 행위와 유사하다. 즉 사랑은 창작하는 행위이다. 야생의 인간들은 그 사실을 의심 없이 받아들였지만, 오히려 일찍이 문명을 이루었던 중국이나 인도인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 P. 125

인간이 살면서 겪어야 하는 수많은 상황 중에, 내면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경우는 사랑을 겪을 때다. 사랑하는 여자를 선택할 때 남자는 자신의 본질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이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여자가 남자를 선택할 때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원하는 인간성의 유형이 이때만큼 잘 드러나는 때가 없다. 사랑은 어느 날 지하실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유령과도 같다. 객관적으로 볼 때 그 선택이 우리의 상식에 어긋나는 경우는 무수히 많다. - P. 136

성적 욕망은 사랑을 유도하지만 그 결정은 사랑 자체에서 나온다. 그렇기 때문에 남자들의 경우 진정한 성적 본능은 오직 사랑하는 여자를 통해서만 느껴지고 채워진다. - P. 141

여자를 사랑하지 않는 남자는 그 여자의 얼굴과 몸매 같은 굵은 선만 보는 반면, 사랑하는 남자에게 그 굵은 선들은 이미 지워진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그가 보고 있는 것은 그 여자의 눈빛이나 윗입술과 아랫입술이 만나는 모양 혹은 목소리의 음조 같은 것들이다. - P. 142

결국, 사랑은 사랑에 빠진 이에게 너무나 특별한 한 인간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인간은 얼굴과 목소리와 표정과 태도에서 자신의 진정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 P. 144

남자들을 평가하는 기준은 그들이 만든 어떤 결과물이지만, 여자들을 평가하는 기준은 과정 자체에 있습니다. 결국 남자의 우수함은 행위(doing 英)에, 여자의 우수함은 존재(being 英)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지요. - P. 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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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관한 연구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 지음, 전기순 옮김 / 풀빛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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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아니 사랑에 대해 할 말이 없는 사람이 있을까? 의미의 진폭이 너무 크거나 모호해서 말할 수 없을 수도 있겠지만 그만큼 어렵고 추상적인 대상이라는 데는 모두가 동의할 것이다. 아무리 쉽게 말한다 해도 미진하고 정확하게 표현할 수 없어 답답한 것이 사랑이다. 그것을 표현하고 드러내는 방식이 문제가 아니라 느끼고 겪는 과정은 훨씬 복잡하고 다양하다. 모든 경우의 수를 나타내는 사랑은 인류와 함께 생성했으며 멸종되는 날까지 함께 할 것이다.

  인간은 과연 사랑 없이도 살 수 있을까? 가장 바보 같은 질문으로 시작하면 이 문제는 의외로 쉽게 풀리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그 사랑의 종류와 범위를 구별하지 않고 말하기 어렵지만 진화생물학적 관점으로 보더라도 사랑은 종족 보존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일 수밖에 없다. 그밖에 다양한 사랑들은 두 말할 나위도 없겠지만 말이다.

  <사랑에 관한 연구>라는 도발적인 제목의 이 책은 스페인의 철학자 가세트의 것이기에 주저 없이 선택했다. 명성에 기댔다가 X되는 경우도 많지만 안전한 선택의 유혹을 떨치기도 힘들다. 어쨌든 이런 종류의 책이 많이 팔릴 거라고 출판사는 믿지 않았겠지만 그 예상이 별로 빗나갈 것 같지도 않다. 철학자가 말하는 사랑이라니! 그러나 재밌다. 분량에 비해 지나치게 많은 밑줄로 책을 지저분하게 했을 정도이니 나에게는 개인적으로 의미 있는 책이었다.

  그것이 경험에 기댄 긍정과 공감이든 이성과 논리에 의한 개념이든 사랑에 관한 깊은 사유와 성찰을 만나게 된다. 옮긴이의 말을 통해 가세트의 삶과 사상을 먼전 읽는 것도 이 책을 읽는 또 하나의 방법이다. 사랑의 본질에 관하여, 남자의 심리와 본능, 무엇이 남자의 사랑을 완성시키는가? 라는 제목으로 1, 2, 3부가 구성되어 있다. 표면적으로는 싸구려 연애담에 불과한 책으로 보인다. 남자가 여자를 유혹하기 위한 실전 테크닉이나 방법론으로 잘못 알고 사는 사람이 있을 법하다. 또 그러면 어떤가? 어차피 가세트의 사랑은 남자가 여자가 사랑하는 방식에 대해 썼다는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으니.

  사랑의 본질에 관한 부분들은 한 문장 한 문장, 한 줄 한 줄이 모두 경구처럼 깊이 있고 분석적이다. 깊은 성찰과 사유가 없이는 불가능한 이야기들이다. 사랑은 고통의 다른 말이며, 대상을 향한 끊임없는 에너지라는 정의에서 출발한 가세트는 스탕달의 <연애론>을 비판하면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잘못된 경험의 결과로, 스탕달은 사랑은 이루어지는 것이며 결론이 나는 것이라고 믿었다. 이 두 가지 속성이야말로 사이비 연애의 특징이다.”라고 선언한 것이다.

  사랑은 태양과 모든 별들을 움직일 만큼 위대하기도 하지만 한 인간을 파멸로 몰고 가는 욕망의 근원이 되기도 한다. 쉽게 인정하거나 통용될 수 있는 하나의 정의나 개념으로 규정지을 수 없는 이 본능적인 감정에 대해 저자는 때로는 감성과 직관에 의존하기도 하고 때로는 경험과 사유에 의존하기도 하면서 생각의 실마리를 잘 풀어나가고 있다. 철학자가 바라본 ‘사랑’이라고 해서 특별할 것이 있을 거라는 기대보다는 그저 우리 주변에 널려 있는 수많은 사랑, 다양한 사랑들을 정리하고 규정짓고 있다는 데 의의를 두면 될 듯하다.

내 생각에 온전한 사랑이라면, 환경과 거리상의 장애가 충분한 애정을 공급하는 걸 방해하여 애정의 굵은 선이 가는 선으로 바뀔지는 모르지만, 말라비틀어진 상태에서도 감정의 동맥은 사랑을 끊임없이 담아 심장으로 옮기는 법이다. 그게 제대로 된 사랑의 운명이다. 결코 죽지 않는, 적어도 감정의 본질만은 손상되지 않는 바로 그런 사랑. - P. 38

  우리는 언제나 영원한 사랑, 완전한 사랑을 꿈꾼다. 어쩌면 그것은 모든 인간의 로망이며 삶의 이유일 수 있다. 이 시대의 사랑은 과연 어떠한가? 전 존재가 합일될 수 없는 순수한 사랑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상황과 조건, 현실과 미래가 복잡하게 계산된 사랑만이 결실을 맺는지도 모른다. 현실은 이상적인 사랑과 늘 상당한 거리가 있는 것이 당연하다고 사람들은 생각한다. 하지만 사람들 가슴속에 품고 있는 사랑만큼은 그렇게 쉽게 속단하기 어렵다.

  가세트는 19세기 말에 스페인에서 태어나 20세기 초, 혼란스런 세계사의 한복판에 서 있었다. 조국 스페인은 프랑코 독재정권에 신음하고 있었고 오랜 기간 동안 망명생활을 했다는 개인적 경험이 사랑에 대한 색다른 견해를 얻는데 일조했는지 확인할 수는 없지만, 그가 보여주고 말해주는 사랑은 남성이 여성에게 느끼는 감정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물론 사랑의 본질이나 일반론에 비추어 논의가 전개되지만 남성인 가세트의 한계를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그것을 한계가 아니라 하나의 관점으로 이해한다면 지나치게 관대한 평가일까?

  김영민의 책을 읽을 때처럼, 아니 대부분 철학자의 글들이 그러하지만 한 문장도 긴장을 늦추거나 편안하게 논의의 흐름을 따라갈 수가 없다. 집중력과 긴 호흡의 사유가 필요하다. 조용하고 1시간 이상 시간이 확보될 때 이 책을 꼼꼼히 읽고 공감하며 곱씹을 수 있다면 색다른 즐거움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단편적인 문장과 표현들로 새로움을 주기는 어렵다. 당연한 말이지만 사랑은 그렇게 쉽게 말해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복잡하고 어려운 감정을 쉽게 드러내고 표현하며 보여줄 수도 있겠지만 가세트는 자신의 사유와 경험들을 이전의 논의들에 대한 비판과 사례를 들어 정확하고 꼼꼼하게 정리해 내고 있다. 옮긴이의 말에서 밝히고 있듯이 어렵고 난해한 문장들은 의역을 하고 생략을 하기도 했다는데 약인지 독인지 알지도 못하고 먹은 독자들의 입장에서는 난처하다. 제대로 읽은 것인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이렇게 부분적으로 편집되거나 역자에 의해 재해석된 문장들이 주는 울림은 원저자의 그것을 넘어설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스페인어를 시작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쉬움은 남지만 그것을 상쇄할 만큼 충분히 가슴에 남을 만한 책이다.

온전한 사랑이란 일단 태어나면 소멸되지 않는다. 거짓말 같지만 이것이 진실이다. - P.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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촌놈들의 제국주의 - 한.중.일을 위한 평화경제학 우석훈 한국경제대안 3
우석훈 지음 / 개마고원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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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는 사람은 많지만 ‘아름다움’에 대한 정의는 사람마다 다르다. 당신은 어떤 세상을 꿈꾸는가?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지, 세상은 어떤 곳이어야 하는지 고민하게 되는 계기조차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아니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그리 많지도 않은 것 같다는 생각도 해 본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꿈을 꾼다면 그것은 곧 현실이 된다고 하는데 세상은 여전히 요지부동이고 현실은 희망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우석훈의 한국경제 대안 시리즈 세 번째 책인 <촌놈들의 제국주의>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에 대한 고민의 한 자락을 엿볼 수 있는 책이다. 자본주의는 이제 그 대안조차 모호해졌고 현실에서 거부할 수 있는 제도나 체제도 아닌 것이 되었다. 우려와 걱정으로 가득하지만 대안은 저마다 다르다. 자신이 속한 계급이 다르고 계급의 이익에 복무하는 방법이 다르므로 문제를 문제로 인식조차 하지 않는 극우 보수 세력이 여전히 건재하다. 건재할 뿐만 아니라 목소리도 크고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다. 도대체 누가 죽였는지 알지도 못하는 ‘경제’를 살리겠다는 신념은 광신적 종교 집단처럼 보이기도 한다. 설령 죽었다 하더라도 살려야 하는 목적과 방법은 대다수 서민들의 삶과는 한참이나 거리가 멀어 보인다.

  이명박 정부에 의해 차근차근 진행되고 있는, 아니 그 이전부터 꾸준히 그 실체조차 모른 채 한발씩 다가서고 있는 대한민국의 제국주의적 경제 체제는 이제 우려할 만한 수준이 되어 가고 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식민지를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는 우리에게 제국주의가 무슨 말이냐고 반문할지도 모르지만 저자가 지적하는 우려는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이 책은 단순히 현실에 대한 우려와 경고를 담고 있는 책이 아니다. 시리즈의 첫 번째, 두 번째 책을 보아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할 만큼 논리적이고 설득력있게 쓰였다. ‘한․중․일을 위한 평화경제학’이라는 부제가 잘 설명해 주고 있듯이 제국주의적 경제 체제를 닮아가고 있는 혹은 실행하고 있는 우리 경제의 모순과 위험을 경고하고 있는 책이다. 그 대안으로 저자는 ‘평화경제학’이라는 낯선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먼저 시리즈 전체의 틀을 네모니 스니켓의 ‘불행시리즈’에서 빌려왔고, 조안 로빈슨, 로자  룩셈부르크, 도넬라 메도우에게 영감을 받아 경제학에 대한 기본 개념과 관점을 전개하고 있다고 하는 저자의 말은 별로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다. 이 사람들의 책들을 한 권도 읽어보지 못한 사실에 대해 자괴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 전공자가 아니라면 이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는 게 정상이다. 다만 이들의 성향과 주장에 대해 책을 시작하면서 밝혀놓고 어떤 맥락에서 이 책의 주장들을 이해해야 하는지 밝혀 놓은 부분에 대해서 높은 점수를 주고 싶을 뿐이다.

  다른 사람의 생각을 빌리거나 내용을 가공하면서도 마치 자기 생각인 양 떠들어대는 인간들이 워낙 많은 세상이니 말이다. 우석훈의 태도는 일단, 신뢰감이 간다. 태도와 방법면에서는 나무랄 데가 없어 보인다. 외적인 문제를 하나 더 짚자면 문장이다. 어떤 내용의 책이든 그것이 읽을 만한 것이 되려면 간명하고 깔끔한 문장으로 진술되어야 한다. 더구나 문학서적이 아닌 다음에야 말해 무엇 하랴. 정확하게 전달되고 명료하게 자신의 생각을 전달할 수 있는 설득력 있는 문장이라면 금상첨화다. 아직 2% 부족하다고 느껴지지만 독자들은 읽을 만한 책을 계속 만날 수 있는 기쁨을 누려도 좋겠다.

  “나에게 누군가 학자로서 희망 단 하나를 말하라 한다면, ‘전쟁 없는 상태’라고 답하고 싶다.”는 이 소박한 경제학자의 말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고통이 없는 상태’를 ‘행복’의 기본으로 정의했던 에피쿠로스의 말이 먼저 떠올랐다. 그가 말하는 ‘평화경제학’이라는 것이 어떤 것이며 왜 중요한 것인지 책의 내용을 살펴보면 분명하게 드러난다.

  어쨌든 경제도 사람을 떠나서는 말해질 수 없는 것이고 특히 사회, 문화, 정치 상황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그러하다. 아니 이제는 경제가 한 나라의 사회, 문화, 정치를 이끌고 있다고 해야 옳은 말일 것이다. 식민지 없는 제국주의의 울분을 적절하게 보여주고 있는 1장 세계화 시대, 촌놈들의 제국주의는 우리를 왜 촌놈으로, 제국주의로 부르는지 한미FTA나 다이나믹 코리아와 같은 실제 사례를 중심으로 알기 쉽게 설명해 주고 있다. 내부 식민지 전략의 강화와 건설 자본형 제국주의로 명명된 2장 북으로 향하는 한국 자본주의는 작금의 대북 정책을 돌아보게 하는 대단히 현실적인 경제학이다. 우리가 실수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북한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에 대한 태도가 경제를 결정하고 미래를 좌우한다는 너무나 당연하고 중요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극우파 블록의 확대와 생태적 위기를 보여주는 3장  한․중․일을 기다리는 위기들은 미래에 대한 전망을 밝히고 있다. 과거의 경제 상황과 현재를 통한 미래의 전망은 우리가 귀담아 들어야 할 중요한 대목이다.

  그러나 저자는 대안은 없는가라고 묻는다. 마지막 4장에서 평화라는 이름의 공공재가 왜 중요하고 대안이 될 수 있는지 일본과 중국과의 경제 통합 문제 등을 논거로 제시하며 우리의 미래와 정책의 비전을 제시하고 있다. 결코 지루하지 않고 많지 않은 분량으로 이 많은 이야기들을 간명하게 풀어내고 있다. 저자의 바람대로 10대와 20대에게도 읽힐 만한 책이 되었다.

  특히 닫는 글로 제시된 ‘교육 파시즘의 시대, 학교 파시즘에 부쳐’를 읽다가 눈이 빨개졌다. 억압과 순종적인 시민의 재생산에 복무하는 수많은 교사와 학부모들에게 던지는 비난의 화살과 부끄러움의 글이 뼈에 사무친다. 알면서 그것을 극복하지 못하거나 대안을 찾기 위해 암중모색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혹은 무엇이 문제인지 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시계바늘처럼 오늘도 학교와 집과 학원을 순례하는 아이들이 눈에 밟힌다.

  이 책을 읽지 않아도 좋다. 닫는 글만 복사해서 학교 앞에서 학원 광고지 대신 나눠주고 싶다. 아니, 교사와 학부모가 먼저 읽어야겠다. 이 미친 굿판은 언제쯤 걷어 치워질 것인지 서글퍼지는 밤이다.

지금 진행되는 십대들에 대한 교육 파시즘과 이십대에 대한 착취, 이를 멈추는 길이 사실은 한구구 자본주의가 가지고 있는 많은 문제들을 당분간이라도 해소하는 거의 유일한 길이다. 지금 그것ㅇ르 하지 못한다면, 장기적으로 우리에게 열린 길은 파시즘과 제국주의 외에는 없다. 이 문제를 해소하는 것 외에 또 다른 돌파구는, 없다! - P. 273

지금 절정에 도달한 학교 파시즘, 여기에서 벗어날 출구는 두 가지뿐이다. 이 미친 짓을 어른들이 갑자기 깨달음을 얻어 정지시키든지, 아니면 십대들의 총파업, 예를 들면 ‘동맹휴학’이나 ‘수능 총파업’ 같은 걸로 그들 스스로 정지시키든지 둘 중의 하나다. 이를 통해 사회적 해법을 찾지 못한다면, 그 다음은 제국주의를 돌파구로 생각하는 파시즘형 사회의 도래가 있을 뿐이다. 도저히 출구가 보이지 않을 때, 국민들은 파시즘을 선택하게 된다. - P. 276

한국의 십대, 오후 3시가 되면 집에 돌아갈 수 있게 해주고, 수요일에는 놀 수 있게 해주면 좋겠다. 월․화 학교 가고, 수요일 쉬고, 목․금 학교 가고, 토․일 쉬고, 이런 리듬을 만들어주면 좋겠다. 그리고 그 빈 시간을 채울 수 있도록 도서관과 문화센터, 문학회와 그룹사운드 혹은 과학실험실 같은 것을 만들어주는 게 지금 정부가 해야 할 일 같다. 그리고 어른들은 지금의 십대가 그렇게 지식과 여유, 도전과 예술, 포용과 인권 같은 것들을 내면화한, 그런 자유로우면서도 창의로운 시민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을 해야 한다. 스위스와 스웨덴 혹은 독일이 이미 그렇게 하고 있고, 핀란드와 네덜란드다, 덴마크도 이렇게 한다. 이게 안 되나? 세계 7대 강국은 이렇게 해서 만들어지는 것이지, 1000만 원씩 등록금 내라고 하고 하루 여섯 시간도 못 자게 하면서 학생들을 ‘좀비 프로그램’에다 집어넣어서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 P. 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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