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케의 눈
금태섭 지음 / 궁리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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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는 말은 착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법이란 착한 사람에게는 필요 없다는 전제가 되는데 과연 그럴까? 사람이 모여 사는 사회에서 일정한 규칙이 없이 생활하는 게 가능할까? 나는 그렇게 믿지 않는다. 인간 본성에 관한 철학자들의 일갈에 대해 살펴 볼 필요도 없이 세상은 지옥이 될 것이다. 성선설을 믿든 성악설을 믿든 백지설을 믿든 모든 인간은 ‘욕망’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욕망’이라는 것이 선천적이든 학습에 의한 후천적인 것이든 그 접점에서 갈등은 시작된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정의의 여신 디케Dike는 눈을 가리고 있다. 왼손에는 천칭을 오른손에는 칼을 들고 있는 모습은 상징적이다. 불편부당한 법의 원칙을 강조하는 엄숙한 손짓은 믿음직스러워 보인다. 하지만 현실에서도 그 천칭이 균형을 이루는 것은 아니다. 영화로까지 만들어졌던 ‘無錢有罪 有錢無罪’의 원리는 디케의 칼보다 무서운 원칙으로 작용한다.

  돈과 권력의 유무와 상관없이 동일한 법 적용이 이루어지는 사회가 가능하기는 한 것인가? 법을 집행하는 사람들과 그 대상이 되어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쉽게 답하지 못하 것이다. 현실과 이상은 늘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세상을 이끌어 온 것인지도 모른다. 법은 법대로 현실은 현실대로 움직여왔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법적용의 원칙과 취지는 이상적이지만 현실에 그대로 적용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법에 기대는 경우가 많다. 자신의 억울함과 부당함을 호소하는 많은 사람들과 그렇지 않다고 외치는 사람들 사이에서 법은 언제나 진실을 밝혀주는 등불이 되어 주고 있는지 의문스럽다. 아마 세상을 살아가면서 사람들은 쉽게 타협하지 않으려 하지만 냉정한 현실과 마주할 때면 흔들리고 또 흔들린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법을 가장 큰 권력이라고 생각한다. 법을 집행하고 법을 다루는 사람이 되려는 노력은 부와 권력을 거머쥐는 것과 동일시한다. 그 행위의 숭고함과 냉정함에 대해 고려해 볼 여지도 없이 현실에서 막강한 힘을 발휘한다.

  한겨레 신문에 ‘현직 검사가 말하는 수사 제대로 받는 법'(2006. 9. 11)이라는 기고문으로 화제가 되었던 금태섭 변호사의 <디케의 눈>은 법에 대한 고민들이 담담하게 서술되어 있다. 피의자가 됐을 때 행동지침을 서울중앙지검 검사 신분으로 일간지에 실었으니 파장은 만만치 않았다. 지금은 변호사가 되어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상황이지만 오히려 그 때의 시선과 용기가 훨씬 숭고하게 느껴진다. 자신이 속한 집단에 대해, 그 집단의 이익에 반하는 이야기들을 솔직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은 결코 많지 않다. 내부 고발자는 아니더라도 용기가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이 책은 영화 ‘라쇼몽’으로 출발한다. 개인적으로도 자주 인용하는 영화라서 일단 반가웠다. 디케의 눈을 속이기 위한 사람들의 치열한 거짓말 혹은 스스로 사실이라고 믿는 것들에 대한 불안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법의 존재 의의는 바로 그 지점에서 탄생한다. 검사보로 일하던 시절의 사건을 통해 혹은 유전자 감식의 발달로 인해 진화해 왔다고 하지만 법의 심판은 지금도 여전히 진실의 발끝만 매만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진실을 찾는 것은 맨손으로 물을 움켜쥐려는 것처럼 어렵고 때로는 불가능하기까지 하다.”는 저자의 말은 순결한 고백처럼 느껴진다. 법으로 진실을 규명할 수 없다는 비관론이 아니라 법을 집행하고 혹은 법의 심판을 받는 사람들에게 전하는 진지한 외침이다. 정의正義를 무엇이라고 정의定議할 수 있을까?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LA폭동이나 두순자 사건, 패리스 힐튼 사건은 흥미 있게 법과 현실 사이의 고민을 읽어낼 수 있게 한다. 특히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미란다 경고의 유래를 통해 과연 우리 사회의 법이 지향해야 할 곳은 어디인가 고민해 볼 만하다.

  미국와 우리는 역사와 문화가 다르다. 하지만 가끔 그들에게 배워야 할 혹은 부러운 구석이 있다는 사실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아메리칸 드림도 맹목적인 반미도 우리에겐 필요없다. 냉정하게 판단하고 합리적으로 현실의 문제를 고쳐 나갈 만한 이해와 용기가 필요하다. 1년에 88건의 사건을 맡는 미국의 대법원과 그보다 200배가 넘는 사건을 판결해야 하는 우리의 현실을 비교하는 것도 현실적이지는 않지만 그래도 고민의 한 자락을 펼쳐 놓는다.

  저자의 ‘법으로 세상읽기’는 실제 생활과 관련된 사건이나 일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법과 연결시켜 일반들도 ‘리걸 마인드 legal mind'가 필요하다는 점을 역설한다. 안다. 누구나 그것이 필요한 줄을 안다. 하지만 현실에서 누가 얼마나 법의 원칙을 따져가며 살며 많은 관심이 있는가. 억울하고 고통스런 순간에 최후의 수단으로 선택하는 것이 법이기도 하고 자신의 억울함과 분노를 해결해 줄 대상으로 법을 찾기도 한다. 우리가 법에 대해 알아야 할 것은 그것이 언제라도 힘없고 돈 없는 사람들의 편이라는 사실이었으면 하는 생각을 해본다.

  세상에는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만 있는 것은 아니다. ‘국경없는 의사회’만 있는 것이 아니듯이. 금태섭 변호사의 <디케의 눈>은 사람들의 눈을 밝혀 주길 바라지만 폭넓은 시야와 실용적인 상식을 제공하기 보다는 ‘법’ 자체에 대한 고민과 성찰이 담겨 있는 책이다. 저자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이 책은 법을 통해 세상과 사람을 읽어가고 있는 변호사의 진솔한 이야기로 읽힌다.

  즐거움과 정보를 함께 전해주며 고민의 단초를 제공할 수 있다면 기꺼이 금태섭의 다음 책도 사 줄 용의가 있다. 완결된 구조를 지닌 잘 짜여진 책은 아니지만 현실에서 마주치는 문제들에 대해 혹은 유사한 상황들에 대해 한번 쯤 돌아볼 수 있는 좋은 성찰의 기회가 되었다. 인권은 멀고 자본과 권력은 가깝다. 우리 사회가 조금 성숙했다고 느낄 수 있는 판결과 합의들이 계속 이루어지길 바랄 수밖에. 그래도 나는 법과 저만치 멀리 떨어져 살고 싶다는 단순한 생각을 해 본다.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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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을 찾는 것은 맨손으로 물을 움켜쥐려는 것처럼 어렵고 때로는 불가능하기까지 하다. - P. 12

진실에 대해서는 항상 겸허한 마음을 가지고 틀릴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야 하지 않을까? - P. 20

제삼자에게 객관적 진실이란 과연 있을까? 나는 내가 <라쇼몽>에 등장하는 나무꾼과 같이 진실을 말한다고 생각하지만, 과연 내가 나무꾼일까? 그리고 과연 나무꾼의 말은 진실일까? - P. 35

어떤 사회가 위기에 처했을 때, 혹은 외부의 적과 만났을 때 내부의 희생양을 찾아 구성원들의 단결을 이뤄내고 위기를 극복하려고 시도한 것은 역사상 흔히 있던 일이다. - P. 88

법은 나에게 항상 이해할 수는 없지만 언제나 아름다운 여인처럼 구애와 도전의 대상이었다. 온갖 암시와 신호로 가득 찬 법의 미로 속에서 진실의 단서를 찾아 헤매는 과정은 결코 나를 지치게 하지 않는 진지하고 스릴 넘치는 모험과도 같았다. 짧고 보잘 것 없는 글을 통해서 그 즐거움을 함께 나눌 동행을 찾을 수 있다면 나로서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 P. 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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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밥상 - 농장에서 식탁까지, 그 길고 잔인한 여정에 대한 논쟁적 탐험
피터 싱어.짐 메이슨 지음, 함규진 옮김 / 산책자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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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교보문고가 있다. 주말에 한 번씩 들러 포식자가 먹잇감을 사냥하듯 천천히 서점을 산책한다. 나는 이것을 눈으로 즐기는 뷔페라고 하는데 그 포만감은 말로 표현하기 힘든 것으로 실제 음식으로는 절대 채워지지 않는다. 팔짱을 낀 채 분류된 코너 매대를 돌며 신간을 확인한다. 관심이 가는 실용서까지 훑어보는 것으로 에피타이저를 마친다. 본격적으로 벽과 스탠드형 책꽂이로 발길을 옮긴다. 일요일 오후의 여유 있는 만찬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다.

  분야별 개론서와 전문서를 일괄하고 한 권씩 꺼내들고 목차를 읽고 첫 페이지 첫 문장을 읽는다. 책등을 보인 채 일목요연하게 늘어선 책들의 제목을 훑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흐름이 파악되고 내가 읽은 책 주변을 자세히 들여다본다. 상하좌우에 꽂혀 있는 책들을 통해 다시 한 번 의미를 되새기기도 하고 다름 도서 목록에 참고하기도 한다. 힐쉬베르거의 <서양철학사>를 꺼내들고 강유원을 떠올리다가 <천의 고원>은 수없이 표지만 만지작거리다 도로 꽂아 넣는다. 장석주의 말이 생각나서 사지 않는다.

  철학 분야 윤리학 코너의 책등을 읽다가 피어 싱어와 짐 메이슨의 <죽음의 밥상>이 윤리학 책이라는 사실이 생각난다. 원제가 ‘The Ethics of What We Eat’이다. 윤리학의 주체는 항상 인간일 수밖에 없다. 우리는 도대체 먹는 것까지 윤리를 따져야 한다는 말인가? 자연의 약육강식이라는 기본적인 법칙으로 보아도 인간은 먹이사슬의 정점에서 모든 것을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피터 싱어는 단호하게 아니라고 말한다. 옮긴이 함규진도 후기에서 이 책을 끝까지 번역하고 나서도 고기를 맛있게 먹을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했다고 하는데 나는 이 책을 읽는 동안 여러 번 고기를 먹었지만 자연스럽게 젓가락이 채식 쪽으로 기울었다. 앞으로도 베건이 될 자신은 없다. 완전 채식주의자가 될 수는 없다면 양심적인 잡식주의자는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도대체 먹을 게 없단 말인가? 책은 나에게 희망과 즐거움보다 고민과 실천을 요구한다.

  이 책은 크게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전형적인 현대의 식단을 관찰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양심적인 잡식주의자와 완전 채식주의자들을 살펴본다. 한 가정에서 먹는 일반적인 식탁의 풍경에서 시작해서 장을 보는 과정을 취재하고 그것들이 식탁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을 하나하나 역추적한다. 소나 돼지, 닭이 키워진 농장의 현실을 파헤친다. 앨빈 토플러처럼 발로 쓴 <죽음의 밥상>은 올해 읽은, 내가 뽑는 추천 도서에 오를 것이 틀림없다.

  이론에 치우치거나 일방적인 주장의 위험성을 극복하기 위해 그는 스스로 농장의 잡부가 되어 바닥을 기고 ‘쓰레기통 다이버’들의 생활을 알기 위해 직접 쓰레기통 속에 뛰어드는 철학자가 과연 얼마나 될 것인가를 생각해 본다면 피터 싱어가 쓴 이 책의 의미를 알게 될 것이다. 이론과 실천이 적절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작가나 책을 만나게 되면 경외감을 느낀다. 이 책이 바로 그렇다.

  공장식 농장에서 길러져서 우리 식탁에 오르는 과정을 알게 된다면 육식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수밖에 없다. A4 한 장 크기의 공간에서 생의 전부를 보내야 하는 닭의 일생에 대해, 전기충격기에 의해 기절하지 않은 채 목이 잘려 뛰어다니는 소에 대해, 꼼짝 못하게 갇힌 돼지의 스트레스에 대해 나는 한번이라도 생각해 보았을까?

  피터 싱어가 내세우는 동물에 대한 동정同情은 사실 인간에 대한 개념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나는 이 책을 통해 깨달았다. 각종 종교와 근대 시민 혁명을 통해 이루어낸 인종 차별의 극복과 남녀평등 등은 자연스럽게 인간과 동물의 ‘차별’ 문제로 이어진다. 그간 끊임없이 반박의 논리와 반대 이론들이 제기되었지만 인간의 종種차별주의에 저항하는 철학자 피터 싱어의 이야기는 한 마디 한마디가 살을 파고들며 뼈에 사무친다. 나는 그렇게 읽었다.

  우리의 일상에서도 이제 유기농은 낯설지 않다. 공정무역이 활성화되고 있지만 아직 실천에 옮기지 못하는 나로서는 조금 더 많은 관심과 실천을 다짐하는 계기가 되었다. 좁은 면적을 가진 우리와는 거리가 먼 것 같지만 로컬푸드는 화석 연료의 사용, 지역경제 활성화, 우리 농민들의 삶을 생각해보면 쉽지 않은 문제로 얽혀 있다.
 
보통 미국인의 한 끼 식사는 그 거주 지역에서만 식재료를 구해 만든 식사에 비해 석유 사용량이 17배나 높다. 따라서 이산화탄소 배출량도 17배나 높다. 따라서 이산화탄소 배출량도 17배가 된다는 것이었다. - P. 205

조그마한 텃밭이라도 스스로 가꾸고 상추 한 잎이라도 키워 먹어야겠다는 뼈아픈 자각들이 생긴다. 늘 그렇지만 문제는 실천이다. 이 책 한 권으로 피터 싱어의 생각과 방법을 모두 알 수도 없고 실천할 수도 없겠지만 아주 많은 생각을 했다. 과연 인간이란 존재는 무엇인가? 먹거리에 대한 윤리학이 철학적 문제를 동반하고 있으며 오로지 자본의 논리에 의해 산업이 되어버린 우리의 식탁을 돌아보게 되었다.

  ‘농장에서 식탁까지, 그 길고 잔인한 여정에 대한 논쟁적 탐험’이라는 부제에 어울리는 긴 여행처럼 읽었다. 미친소 문제로 뇌용량 2MB임이 드러난 대통령 덕분에 이 책이 조금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읽혔으면 하는 바람이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 수 없고 국가가 국민위에 존립할 수는 없다. <리바이어던>의 가르침이나 <아나키즘 이야기>의 주장이나 <코뮨주의 선언>이 아니더라도 이렇게 실천적인 책 한 권은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때가 있는 법이다. ‘죽음의 밥상’이 아닌 ‘건강한 밥상’은 국가라는 괴물이 아니라 우리가 차려 먹어야 한다.


080602-0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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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승달도 눈부시다 - 선시가 있는 풍경
김영옥 지음 / 호미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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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의 다양한 풍경 속에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상황은 많지 않다. 현실은 언제나 치열하고 경쟁적이며 옆을 돌아볼 틈조차 없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쉴 사이 없이 뛰고 또 뛰다가 가끔 하늘을 올려다보고 한숨을 쉰다. 추적추적 비라도 내리는 날이면 전 생애를 뒤돌아보거나 막연한 미래를 걱정한다.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에게 인생이 무어냐는 질문은 참 부질없다. 정답이 필요 없을 뿐더러 있다고 해도 모두가 그것을 맹목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다양한 삶의 방법과 태도를 가지고 있지만 가끔씩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을 갖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필요하다. 어디로 가려는지 고개를 들고 조금 멀리 내다보고, 잠시 쉬어 뒤돌아보면 지금 여기가 보인다. 불가佛家에서는 인연因緣으로 관계를 풀어내지만 그 끝도 시작도 알 수 없는 세계는 범인의 세계와 거리가 멀게만 느껴진다. 그래도 나는 때때로 산사를 찾는다. 물론 종교적 목적은 아니다. 고즈넉한 산속의 거처는 인간의 삶에 대한 반성과 성찰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아침에 도道를 얻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하지만 깨달음이 생의 목표가 아니라면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나는 그저 사는 동안 치열하게 앎과 삶의 과정을 즐길 수 있었으면 좋겠다. 욕심을 버리는 일이 쉽진 않으나 그것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는 조금씩 알 것 같은 나이가 되었나보다. 경쟁논리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끝없는 욕망의 노예가 되지 않을 수 있다면 성공한 인생이 아닐까?

  참선參禪만으로 깨달음을 얻거나 도道를 얻는 것은 아니다. 한 알의 모래 속에 우주가 들어있다는 생각을 하는 순간 인간은 한없는 자유를 느낄 것이다. <초승달도 눈부시다!>라고 느끼는 순간 세상은 밝고 환한 빛으로 가득하다. 김영옥은 그 풍경들을 담담하고 조용한 목소리로 풀어 놓는다. 달빛 아래 조용히 흐르는 산사의 계곡 물소리처럼 시원하고 나지막하게 들리는 문장들은 담백한 차 한 잔과 어울린다.

꿈같고 환영 같은
육십칠 년 세월이여
흰 새 날아가고 물안개 걷히니
가을 물이 하늘에 닿았네
- 천동 정각, ‘임종게’

내 무덤, 푸르고
푸르러져
그 푸르름 속에 함몰되어
아득히 그 흔적조차 없어졌을 때,
그 때 비로소
개울들 늘 이쁜 물소리로 가득하고
길들 모두 명상의 침묵으로 가득하리니.
그 때 비로소
삶 속의 죽음의 길 혹은 죽음 속의 삶의 길
새로 하나 트이지 않겠는가.
- 최승자, ‘미망 혹은 비망 8’


  소리 없는 창 밖에 내리는 빗소리처럼 아득하기만 하다. 죽음은 명상과 침묵의 연장일 뿐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길 때쯤 죽음을 맞이하고 싶다. 그것조차 욕심이겠지만.

그 때 고요히 바람이 불었나니
맑고 가난한 솔씨 하나
홀로 바다로 날아가
바다에 깊게 뿌리를 내렸나니
- 정호승, ‘해인의 바다’중

옷 한 벌과 밥그릇 한 개로
산문을 자유로이 들고 나네
저 모든 산의 눈을 다 밟은 뒤에
이제는 돌아와 흰 구름 위에 누웠네
- 벽송 지엄, ‘의선 스님에게’


  선시禪詩가 있는 풍경은 소리도 없다. 오규원의 시가 보여주는 언어의 진경처럼 맑고 투명하다. 빛도 색도 없는 물과 같다. 저자는 지하수처럼 시원하고 맑고 깨끗한 선시禪詩와 함께 산중의 모습을 아름답게 보여준다. 수행과정이 결코 만만하거나 즐겁다고 할 수는 없다. 다만 그것을 통해 진리를 얻고자 하는 산사의 풍경이 숙연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산길이 산을 내려와 문득
뒤돌아보면 따라 내려오는
저문 산, 물을 건너면
먼저 건너가 뒤돌아보는 저문 산
- 장석남, ‘산길이 산을 내려와’중

파란 바람아 불어오니라 불어가니라
알려고 하는 자에게만 비밀을 일러 주고
저 나뭇가지들을 흔들어 주어라
- 고형렬, ‘바람 나뭇잎’중


  알려고 하는 자에게만 비밀을 알려주는 바람을 찾아 늘 길 떠날 준비를 하고 싶다. 끝없이 버리고 또 버리고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고 싶다. 도道를 얻으려는 것조차 욕망이니 그것조차 내려놓고서. 아득한 지평선을 향해. 그렇게.

080601-0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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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할 권리
김연수 지음 / 창비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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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아올 현실이 존재하는 한 여행은 영원히 모든 사람들에게 꿈이며 환상이고 향수이고 추억이다. 정착 생활 이전의 인간 생활은 정처없는 ‘떠돎’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근원적으로 ‘저기-멀리’를 동경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인간은 그렇게 생래적으로 미지의 세계에 대한 환상과 그리움을 가지고 태어났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우리 안에 유목적 유전자가 존재한다고 말이다.

  빅토르 위고는 사람을 세 종류로 분류했다. 떠나온 고향을 그리워하는 못난 사람, 어느 곳에 정착하든 그곳이 고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고향은 어디에도 없다고 생각하는 유목적인 사람이 그것이다. 물론 위고는 정착하지 않고 끊임없이 떠나는 사람을 가장 상급의 인간이라고 평가했다. 근원적으로 정착과 이동의 모순과 역설 속에서 인간의 역사는 도약과 좌절을 거듭했다. 그렇게 때문에 우리가 알고 있는 수많은 역사는 민족 간의 이동이나 머물지 않으려는 인간들의 충돌로 이해할 수도 있겠다.

  여행과 사뭇 동떨어진 이야기로 들리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일이 어쩌면 이렇게 끝없는 동경과 그리움의 과정인지도 모른다. 떠나고 싶은 욕망과 안주하고 싶은 욕망은 늘 부딪힌다. 안전의 욕구와 호기심은 묘한 대조를 이루면서 인간의 삶에 팽팽한 긴장감을 주기도 한다. 이동의 자유를 제한했던 시대와 국가를 기억한다면 여행에 대한 동경과 자유와 행복은 더욱 소중하게 여겨진다.

  소설가 김연수의 <여행할 권리>는 산문집이다. 대한민국, 그러니까 우리의 현실 밖에서 생활하면서 겪고 느낀 산문집이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여행’과는 거리가 좀 있다. 잠시 현지를 돌아보는 이야기나 스치듯 낯선 곳의 감상과 여정을 적어놓은 책이 아니다. 물론 그런 부분이 나오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독일과 중국, 미국, 일본을 통해 길어 올린 작가의 내면의 풍경들이다. 각국에 체류하면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가 감각적으로 그리고 특유의 유머러스한 문체로 밝고 경쾌하게 표현된다.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을 만나는 즐거움 혹은 곤혹스러움을 재미있고 편안하게 풀어내고 있어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책이다.

  일정 기간 체류하면서 적어나간 글들은 다양한 사유의 흐름을 보여준다. 문학과 역사에 대한 아픈 성찰도 엿보이고 우리가 알지 못했던 사소함에 대해서도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세상에 넘쳐나는 수많은 여행 관련 책들 속에서 단순히 작가이기 때문에 이 책을 선택할 필요는 없다. 이 책을 선택하는 독자들은 김연수를 좋아하거나, 소설가의 눈에 비친 것들에 대한 호기심을 갖고 있거나, 낯선 세계에 대한 막연한 이야기를 좋아하거나 아니면 그저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이어야 할 것 같다.

  훈츈, 밤베르크, 버클리, 옌지, 룽징, 토오쿄오 그리고 서울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김연수의 종횡무진 여행기는 얼굴을 웃음을 띠고 편안하고 간편한 복장으로 나서는 기분이다. 심각하고 사색적인 풍경도 아니고 우울하고 반성적인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물론 사물과 풍경들에 대한 관찰과 흥미가 아니라 사람과 문학, 역사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색다른 느낌을 주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내가 읽어 낸 큰 장점은 유머와 편안함이다. 자칫 가벼움으로 흐를 수도 있지만 다져진 내공과 문장이 힘이 차고 넘치지는 않는다. 적절한 수준에서 조절되고 독자들 입장에서 문안하게 읽어낼 수 있을 정도는 된다.

  가벼운 마음으로 여행의 기록으로 혹은 이국적인 사람들과 낯선 곳에 관한 감상 차원에서 읽혀질 수는 있지만 전체적으로 다소 산만한 감은 지울 수가 없다. 편안한 주제로 묶어 내기는 했지만 장소나 방법의 일관성은 없다. 자유롭고 편안한 느낌이 오히려 장점이 될 수도 있지만 마지막에서 발언하고 있는 ‘우리에게 오직 질문하고 여행할 권리’가 있다는 도발적인 주장이 책 전체에서 설득력 있게 제시되고 있지는 못하다.

  소설가이기 때문에 누릴 수 있는 여행의 조건과 권리가 우리에게 주어지지는 않는다. 일반적인 관점과 방법과는 거리가 먼 것이 장점이자 단점이다. 색다른 ‘여행’에 관한 관점으로는 훌륭하게 읽힐 수 있지만 그렇게 만만하거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하지만 일상적인 여정과 색다른 것을 제시하는 책들 사이에서 이 책은 나름의 재미와 독특함을 지니고 있기는 하다.

  어찌되었든 김연수의 글은 읽을 만하고 그의 문장들은 나를 즐겁게 한다. 낄낄거리며 술 한 잔 하고 싶은 생각이 들게 하는 작가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혼자만의 생각이지만 즐겁다. 어쩌랴 상상은 자유고 현실은 구속이니.

  여행은 어디를 가느냐가 아니라 누구와 함께냐가 문제다. 어떤 술을 마시느냐가 아니라 누구와 마시느냐가 중요하듯이 말이다. 어디를 가든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는 것들은 사람마다 다르고 즐기고 바라보는 방법도 제각각이다. 집을 중심으로 반경 1km이내에서 모두 해결할 수 있는 일들을 굳이 여행을 통해 확인 할 필요는 없다. 아, 그것도 나름의 방법인가?

  내일은 매주 돌아오는 토요일이다. 누군가는 떠나고 누군가는 돌아오는 시간이다. 요일과 무슨 없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동’하고 ‘일탈’하는 날임에는 틀림없다. 김연수의 말대로 오직 질문하고 여행할 권리를 포기하고 사는 건 아닌지 한번 쯤 확인해 보는 건 어떨까 싶다. 떠나고 남는 것도 일종의 습관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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