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행복하니? - 보통 아이들 24명의 조금 특별한 성장기, 2004년 올해의 청소년 책
김종휘 지음 / 샨티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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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에 유일한 희망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아이들 때문이라고 믿는다. 아직도 그런 순진한 믿음을 가지고 있느냐고 반문한다면 할 말이 없지만 그래도 그것마저 버릴 순 없다. 아이들의 기준과 나이가 모호하긴 하지만 나는 오늘도 믿고 있다.

  그런데 그 아이들이 변하고 있다. 부모와 학교와 세상에서 배운 것들을 모두 버려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아이들이 많지 않다. 사실 우리들은 아이들에게 뭘 가르치고 있을까 진지하게 고민해 본 적은 있나? 수많은 사람들이 교육에 목숨을 걸고 교육이 미래라고 외치지만 어쩌면 모두 껍데기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제도권 공교육의 현실은 참담하기만 하다. 그곳을 벗어나기 위해, 혹은 성인이 되기 위해, 혹은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발판으로 삼는 곳이 학교라면 일리히의 말대로 ‘학교 없는 사회’가 가장 행복한 사회가 될 지도 모른다. 학교의 어원은 ‘여가’에서 출발했다. 할 일 없어 모여 놀고, 부모들의 노동력을 착취하기 위해 아이들을 모으기 시작한 곳이 학교다. 지금은 학교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었다.

  지나치게 부정적인 해석일까? 언제까지 학교에서는 아이들의 머리 길이와 치마 길이에 목숨을 걸고 지각했다고 운동장을 돌릴 것이며 강제로 보충 수업과 야간 자율 학습을 시킬 것인가? 죽기 전에 그것이 사라진 학교를 볼 수 있을까? 대한민국의 모든 학교의 상황이 동일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학교는 여전히, 아직도 19세기식 사고 방식과 전근대적인 관점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10대의 아이들과 20대에서 60대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교사들이 모여 곳이라서 애당초 소통이 불가능한 것인가? 결론적으로 학교는 행복한 곳인가? 아이들이 거의 모든 시간을 보내는 학교는 행복한가?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어야 김종휘의 <너, 행복하니?>라는 질문에 답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자 센터의 김종휘가 만난 아이들은 보통 아이들이다. 24명의 인터뷰를 통해 그들의 이야기에 귀기울였고 그것을 한 권의 책으로 정리한 <너, 행복하니?>를 통해서 바라본 대한민국의 아이들은 행복의 반대편을 서성이고 있다. 진짜 행복은 무엇이며, 내가 하고 싶은 것은 어떤 것인지, 내가 잘 할 수 있는 건 뭔지, 정말 그걸 하면 안되는 건지 고민해 본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다가 이 보통 아이들의 특별한 성장기를 들여다 보다가 울컥 눈물이 쏟아질지도 모르겠다.

  한국식 교육 풍토와 한국식 경쟁 사회에서 그래도 살아남을 수 있느냐는 반문에 당당히 대답할 수 있는 이 24명의 아이들은 우리 주변의 모든 아이들과 다르지 않은 아이들이다. 김종휘는 그들을 통해 새로운 교육과 삶의 방식을 이야기한다. 우리가 잃고 살아가는 것은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과연 우리의 학창 시절은 행복했나? 우리는 행복하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나? 아이들에게 행복해지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있나? 행복이 무엇인지 가르쳐 준 적이 있나?

  밤하늘의 별만큼이나 행복해 질 수 있는 방법이 많은데도 아이들을 네모난 교실과 네모난 틀 속에서 규격품으로 자라고 비슷한 미래와 당연한 과정을 상상하며 어른들의 방식으로 길러진다. 경쟁은 필수고 이기심은 선택이다. 그 순수하고 맑은 영혼들을 물들이는 자본과 경쟁의 논리, 억압과 복종의 순응적 이데올로기는 오늘도 헤게모니를 장악해가고 있다.

  한 우물이 아니라 여러 우물을 파서 행복해 진 아이들, 가족의 경계 너머에서 행복을 찾은 아이들, 타고난 ‘끼’를 무기로 행복해지는 아이들, 시민운동을 통해 나를 찾고 행복을 얻은 아이들, 세계를 무대로 뛰는 아이들, 자신이 학교를 만들어가는 아이들, 개혁을 위한 정치를 시작한 아이들, 새로운 기업을 만들어가는 아이들.

  스물네 명을 몇 개의 범주로 묶을 수는 없지만 그들은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으며 서로 다른 빛깔을 가지고 있다. 이들이 대한민국에서 가장 행복한 아이들이라고 말할 수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꾸는 꿈이 비슷해질수록 경쟁은 치열해지고 행복은 멀어질 수도 있다. 꽃밭에 핀 꽃들의 모양과 크기가 다르듯이 그들도 제각기 다른 모양과 향기를 가지고 있다. 그들을 살릴 수 있는 교육과 사회는 불가능한가? 어른들은 아직도 정신을 못차리고 있다.

“내기할까? 내가 세상을 바꾸는지, 세상이 날 바꾸는지”라는 당시 리바이스 청바지 광고 문구를 개인의 신념으로 삼아 준표는 머리를 기르기 시작했다. - P. 117

  어른이 된다는 것은 세상과 타협하는 일이며 꿈을 포기하는 일이며 이기심으로 가득해지는 일이며 돈이 최고라는 생각을 갖게 되는 일이며 나만 옳다고 생각하는 일이며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일이다. 하지만 준표가 옳다.

  아이들이 희망인 이유는 ‘내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나는 믿는다. 절대로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어른들보다 준표같은 아이들이 훨씬 더 많아지기를 그래서 세상을 바꿔주기를 기대해 본다. 아니, 팔짱끼고 옆에서 구경하지 않고 그들과 함께 어깨 겯고 함께 걸어갈 것이다. 그래서 ‘너, 행복하니?’라는 질문에 ‘나는 행복하다’고 대답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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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 지식인, 그들은 어디에 서 있나
경향신문 특별취재팀 엮음 / 후마니타스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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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아득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날의 기억은 영등포 여고 교지에 수필 형식의 글로 실렸으며 어딘가 책장 구석에 그 교지가 한 권쯤 남아 있을 것이다. 1987년 서울역 앞에서 전경 버스가 불타오르던 순간 나는 시내버스 안에서 멍하게 그 장면을 바라보았다. 신문 1면에 실렸던 그 장면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고등학생이었던 내가 시위에 참가했던 건 아니었고 글자 그대로 ‘세상 구경’을 위해 시내로 나가는 버스를 탔던 것이다. 말하자면 세상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노선이 길었던 그 버스는 혜화동을 출발해서 마포대교를 건넜다. 한강 둔치에서 평화롭게 테니스를 치는 사람들, 강변을 거닐던 사람들이 생각난 건 이글이글 타오르던 버스의 불꽃 속에서였다. 사회적 의식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궁금증과 호기심에 가까웠다고 기억한다. 대학 신입생이었던 선배들이 가끔 들러 토요일 오후에 <철학의 기초이론>과 <철학에세이>를 던져 주고 돌아갔다. 하얀 한복을 입고 길가에 앉아 시위대를 향해 손수건을 흔들던 할머니 빌딩 창문마다 매달려 함께 소리치던 넥타이 부대, 길거리를 가득 메우고 구호를 외치던 사람들 - 내게 1987년은 사진처럼 선명하게, 혹은 단편적인 흑백사진으로 남아 있다.

  수업 시간에 ‘노동의 새벽’을 읽어주셨던 선생님이 계셨고, 황지우와 김정환, 신경림, 김지하, 조태일의 시집을 뒤적이던 시절이었다. 뭐가 뭔지 세상은 뒤죽박죽이었고 첫사랑은 아득했으며 아무도 정답을 알려주지 않는 풀리지 않는 수학문제처럼 혼자 끙끙거리던 시절이 1987년이었다. 친구 녀석과 처음 음악다방엘 갔던 것도 아마 1987년이었지 싶다.

  그리고 20년이 흘렀다. 2007년에 후마니타스에서 출판된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은 단순한 책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개인적인 감회를 더해 우리 사회가 걸어온 길에 대한 분명한 뒤돌아보기 작업이다. 이 책은 경향신문사 특별취재팀이 이룬 값진 성과이며, 21세를 향한 디딤돌이며, 지금 우리의 모습을 반성하기 위한 거울이다. 누구에게나 권할 만한 책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읽지 않았다면 두고두고 후회했을 책이다.

  한겨레만 쳐다보며 이렇게 훌륭한 기획과 이슈를 모르고 지나쳤을 아둔함에 발등을 찍는다. 참 아는 게 없고 단순하며 정보에 어둡고 뭐든 잘 까먹는 개인적인 버릇들이 때때로 원망스럽다. 그래도 이 책을 만나 며칠 동안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내용은 결코 행복하지 않지만 독자로 만난 이 책은 올 해 만난 책 중에 가장 값진 책 중의 하나가 될 듯하다.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말이 떠오릅니다. ‘세계를 개선시키려는 그대의 눈빛이 날 근심케 한다.’ 사회를 뜯어고치려는 그 열정이 우리를 불안케 하는 거죠. - P. 37페이지

  ‘연구공간 수유+너머’의 고병권의 말은 역설적으로 이명박을 떠올리게 한다. 현실은 늘 비관적이었는지 모른다. 고병권의 말대로 만하임의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방황하지만 객관적 인식이 가능한 ‘자유 부동하는 지식인’, 그람시의 전체를 바라보는 계급의 눈으로서 ‘유기적 지식인’, 사르트르의 통치 계급 이해에 복무하면서 지배계급의 유기적 지식인으로서의 ‘기능적인 지식인’으로 보는 것이 전통적인 지식인에 대한 정의였다. 하지만 이런 전통적인 의미에서 지식인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필요하지도 않다.

  지식인들의 현실 인식은 많은 사람들의 생각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대단히 중요하게 여겨진다. 우리 사회가 절차적 민주주의를 확립하기 이전에는 더욱 그러했다. 시대가 변했고 지식이 대중화 되면서 지식인의 역할과 위상도 달라졌다. 이영희 선생님과 같은 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만들어질 수 있는 사회적 상황도 아니지만 그것을 단지 시대의 변화 탓으로 돌릴 수만은 없다. 그렇다고 지식인이 특정한 역할을 해야 하는 것도 아니고 필수 불가결한 요소라고 볼 수도 없다.

  어쨌든 지금 이 순간 떠오르는 지식인은 이 책의 49페이지에 정리된 ‘2007년 한국 지식인 이념 분포도’를 참고하면 된다. 매스미디어나 책을 통해 자주 접했던 낯익은 얼굴과 이름들이 이념 성향에 따라 분포되어 있어 공간적인 개념으로 시각화 되어 있다. 다소 낯설지만 잘 정리되어 있다. 은퇴했거나 작고한 사람이 제외되어 있고 나름의 한계가 있겠지만 일목요연하게 일괄할 수 있어 많은 도움이 된다.

  한국 지식인의 풍경과 오늘날의 상황을 살펴보고 지식인의 위기에 대해 살펴본 후 정치, 경제, 문화 권력과 지식인의 관계를 점검하고, 시민운동과 정책지식과 지식인의 관계를 정리했다. 지식인 생산 공장이 되어 버린 미국과 학술진흥재단을 검토했으며 마지막으로 대중지성을 살펴보는 것으로 책을 마무리했다. ‘지식인의 죽음’을 넘어라는 좌담은 결론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이 책은 ‘지식인’을 주제로 현재 우리 사회에서 ‘지식인’이 탄생하는 과정의 문제점과 그들이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어떤 식으로 다양한 권력 관계를 형성하는지 혹은 그 지식이 어떻게 사용되고 있으며 대중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꼼꼼이 따져보고 있다. 이것을 또 다시 몇몇 지식인에게 분석을 의뢰하는 아이러니는 어쩔 수 없는 한계(?) 볼 수 있다.

  취재과정에서 부딪히고 고민했을 내용들이 고스란히 책에 드러난다. 그것을 읽어나가는 입장에서 얼마나 잘 소화하는지는 독자들의 몫으로 남겨진다. 이 책에서도 소개되지만 <해방전후사의 인식>이나 <전환시대의 논리> 등 한 권의 책이 우리 사회에 미친 영향은 실로 엄청나다. 시대가 변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논리가 달라졌다. 이 시대를 대표하는 ‘시대정신’은 민주주의나 민중해방이 아니라 경쟁과 자본일지도 모르겠다. 지식인의 역할과 위상도 당연히 변하고 있다.

  그러나 과연 우리가 기댈만한 혹은 믿을 만한 지식인이 존재하지 않을까? 아무리 자유로운 소통과 대중지성의 시대와 왔다고 할지라도 ‘지식인’으로 불릴 만한 사람들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으며 그들의 역할과 임무는 쉽게 말해질 수 없다. 그것은 우리들의 요구가 그들의 몫이다. 대중과 지식인은 이제 서로 믿을 수 없는 관계를 이루고 있는지도 모른다. 누구나 대중이며 누구나 지식인이 될 수 있는 시대를 점검하기 위해 이 책은 꼭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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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from 행복을 찾아서... 2009-05-19 14:34 
    저는 경향신문을 좋아합니다. 경향신문의 기사를 쓰는 시선이라고 해야하나, 독특한 관점이 있는데, 이걸 참 좋아합니다. 그래서, 서점에서 '경향신문 특별취재팀' 이라는 글귀만 보고 냉큼 사서 보게 된 책이 바로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입니다. 지식인의 죽음 카테고리 정치/사회 지은이 경향신문 특별취재팀 (후마니타스, 2008년) 상세보기 300페이지도 채 되지 않는 책이라, 금방 읽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훨씬 어려웠습니다. 책에..
 
 
 
몸으로 하는 공부 - 강유원 잡문집
강유원 지음 / 여름언덕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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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나는 회사원 철학박사 강유원을 무림의 고수로 여긴다. 그의 텍스트 지향 홈피를 들락거리고 그가 쓴 책과 번역한 책들은 의심 없이 읽고 있다. 호남의 강준만이나 영남의 박홍규처럼 의심 없이 돈을 주고 책을 사는 몇 안 되는 사람 중의 하나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에 대해 절대적인 믿음을 가질 정도로 순진하지도 어리석지도 않지만 책을 읽으면서 오호惡好의 감정이 생기기도 하고 깊이 공감하기도 한다. 자연스런 현상이지만 선호하는 저자가 생기고 혐오스럽지는 않더라도 다시는 그의 책을 사지 않게 되는 경우도 있다.

  강유원의 <몸으로 하는 공부>는 몇 년 전에 출간 된 책이지만, 기회를 놓치고 미루다가 집어 든 책이다. 이 책은 그의 표현대로 잡문집이다. “‘잡문’이라는 단어는 논쟁들, 지엽말단의 문학, 지나친 자유, 언어의 가치하락에서 유래하는 폭력들로 이루어진 무질서한 총체로 이해해야 한다.”는 투르니에의 글을 인용해서 그 의미를 밝히고 있다. 말하자면 강유원식 겸양 어법으로 이해하면 되겠다. 어쨌든 그의 생각과 그간의 이력들을 짐작할 수 있게 되어 편안했고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적어나가 쉽게 읽혔으며 그의 글에 대한 이해를 돕고 그가 걸어온 길에 대한 과정을 밝히고 있어 흥미롭다.

  단순한 호기심에서 강유원 개인에 대한 궁금증까지 골고루 해소할 수 있다고는 할 수 없지만 ‘공부’를 통해 우리가 만났던 강유원에 대해서는 다양하고 깊은 대화가 가능하다. 생각의 끝자락을 내보이고 편안하게 들려주는 이야기들 속에 진정한 소통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이 책은 그렇게 강유원식 공부 방법에 대한 관심을 가진 독자에게 긴요한 책이다. 소설 읽기 이외에 다른 독서가 필요하지 않거나 조중동의 기사가 세상의 전부라고 믿는 독자들에겐 필요없는 책이니 선별해서 읽어야겠다.

  익히 알려져 있듯 강유원은 직장 생활을 하며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주경야독하는 사람이 대단해서가 아니라 그의 공부방식 때문에 사람들에게 회자되었다. 힐쉬베르거 <서양철학사>를 50번쯤 읽고 나니 눈이 트이는 경험을 했다는 말을 듣고 나니 기가 질리는 게 아니라 막말로 참 ‘독한 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방법과 태도에는 공감했고 스스로의 절제와 노력이 없다면 불가능한 것이 공부라는 사실을 이제 몸으로 깨닫는 나이가 되었다.

  진짜(?) 공부가 뭔지 공부 방법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이 있다. 모두다 챙겨 들을 만 하다. 왜냐하면 나름대로 공부를 해 본 사람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공부의 목적과 방법에 있는 것이 아닐까? 강유원의 생각에 동의한다면, 혹은 그와 비슷한 생각을 해 온 사람이라면 유용하게 적용할 수 있을 것이고 나름대로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가 담겨 있는 책이다.

책이 손에 잡혀야 새로운 것을 알게 되고, 자신이 모르는 게 무엇인지도 알게 된다. 자신의 무지를 깨닫는 순간이 바로 지식에의 열정이 시작되는 때이다. - P. 18

  이렇게 작은 깨달음으로 시작하는 공부 이야기는 아는 것과 모르는 것, 책 따로, 세상따로, ‘문화’라 부리는 것은 문화가 아니다, 학문의 현실적 쓸모 등 네 부분으로 편의상 나누어져 있지만 그 구분은 무의미하다. 마지막으로 제시한 ‘탈 아카데미즘의 길목에서’와 ‘내가 공부하는 방법’은 깊은 인상을 남긴다. 공부라는 대체 무엇이며 어떠해야 하며 또 무엇을 위한 것인가에 대해 정리되지 않는 사람들에게 혹은 나름의 방식과 비교 대상이 될 만한 사람에게 좋은 참고 도서가 될 것 같다.

  타인의 방식을 빌려 오는 것은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그 안에서 자신만의 방법이 생기고 그것이 몸에 익혀진다. 완전히 자기만의 공부 방법이 생길 때 편안하고 자유로우며 즐겁고 행복한 공부가 된다. 입신 영달을 위해, 돈 벌이의 수단을 위한 공부를 공부라 하지 않는다. 그렇게 하는 것이 부정적이거나 잘못 되었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세상을 달리 보는 눈이 트이고 앎의 세계에 입문할 수 있는 입장권이 생기지는 않는다.

  즐겁고 행복한 공부는 스스로를 괴롭히고 채찍질할 수밖에 없다. 앎의 즐거움과 깨달음의 희열, 끝없는 지적 호기심도 ‘욕망’이라는 또 하나의 허영이 아니라 생의 진실을 들여다볼 수 있는, 세상을 올바로 볼 수 있는 방법과 도구가 되기를 희망한다. 그것은 온몸으로 전해지는 짜릿함이며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삶의 기쁨이다.

  나는 아직도 공부가 무엇인지 모르겠다. 세상을 바꿔야 진정한 목적이 달성된 것인지, 나의 안목과 시선이 달라지고 관점의 변화만 가져오면 되는 것인지, 실용적인 목적과 개인의 이익의 위해 노력하는 것인지. 하지만 책을 읽고 정리하고 무엇인가 써나가야 한다는 사실 하나만큼은 이제 어렴풋하게 체험하기 시작했다. 공부는 지겹고 고통스러운 과정이 아니라 스스로 즐기고 온몸으로 느껴야 하는 삶의 과정이다. 누구에게나 필요한.

지금까지 어설프게나마 적어본 <내가 공부하는 방법>을 실천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요인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자기 학대>이다. 스스로를 괴롭히면서도 스스로 즐거울 수 있는 매저키스트가 된다면 남이 뭐라 하든 신경 쓰지 않고, 공부를 해서 명예를 얻지 않아도 슬프지 않으며, 공부가 돈이 되지 않는다 해도 서럽지 않다. 어쩌면 이런 상태가 바로, 옛 사람들이 말했다는 ‘위기지학爲己之學’인지도 모르겠다. - P. 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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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손에 잡혀야 새로운 것을 알게 되고, 자신이 모르는 게 무엇인지도 알게 된다. 자신의 무지를 깨닫는 순간이 바로 지식에의 열정이 시작되는 때이다. - P. 18

실용적인 지침 하나 : 누군가 뭘 ‘안다’고 말하면 ‘해봤어?’라고 한번쯤 물어서 그의 지행합일 정도를 측정해 보자! - P. 22

‘내가 뭘 안다’고 스스로 자부할 때에는 항상 ‘것이 틀릴 수도 있다’는 의심을 스스로에게 제기해야 한다. 따라서 앎에 대한 참다운 자세를 가진 사람은 늘 자신이 있는 것이 무엇이고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한다. 다시 말해서 그는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한다. - P. 28

책과 세상이 따로가 아니니 책 읽기와 세상 읽기는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어야 마땅할 것이다. - 이렇게 말하면 사실 거짓말이다. 책은 책이고 세상은 세상이라고 느껴질 때가 훨씬 많으니까 말이다. - P. 44

책이라는 게 그저 종이에 활자로 인쇄해서 나오면 끝나는 물건이라는, 책에 대한 얄팍한 생각만을 가진 사람들은 나의 이론 분노를 어이없어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책은 그렇게 만만한 물건이 아니다.
책 따로 세상 따로인지, 책과 세상이 서로 엉켜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나의 경우에는 내 삶과 책은 서로 엉켜 있다. 난 책에서 읽은 것을 세상에서 확인하고 세상에서 겪은 것을 책에서 정리한다. - P. 52

현대사회에 지식인이 살아가는 모습은 다양하지 않다. 둘뿐이다. 체제 안으로 흡수co-고용opt되어 살아가거나, 아니면 꿋꿋이 살아가거나 뿐이다. 후자를 선택하면 훨씬 개운하다. 단 후자를 선택했으면 자의에서건 타의에서건, 남이 알아주건 알아주지 않건 우는 소리를 해서는 안 된다. - P. 76

끝으로 한국의 일상적 파시즘론자에게 두 마디.
한마디, 뭘 분석하려면 경제적 바탕 위에서 하도록.
두 마다, 남들 욕하지 말고 자기부터 파시즘적 작태를 저지르지 말도록. - P. 116

고민하라. 번뇌하라. 아무 생각 없음은 악이다. - P. 130

끊임없이 공부하고 그것에 근거해서 독자적인 판단을 하도록 노력하라. 21세기적 인간이 되어 살아남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을 스스로 지키기 위해서라도 그렇게 해야 한다. 그렇게 살기가 귀찮으면 단순한 사회로 돌아가라. - P. 130

내가 사람을 만나고 사귀는 기준이 대체로 이렇다. 사람 자체보다는 그가 하는 짓을 따진다. 그가 나와 어떤 관계 속에 있는지, 앞으로 어떻게 서로를 이용할 것인지 등은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난 소위 ‘인간적 관계’로 얽힌 사람이 별로 없다. 담담하게 사람을 만날 뿐이다. 정이 별로 없다. 누구를 특별히 미워하지도 않으며 각별히 아끼는 사람도 없다. - P. 160

내가 특정이념을 신봉하지 않는 것은 이념이 덧없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념 이전에 인간이 있었으니 이념이 인간의 삶을 피폐하게 만든다면 그것은 더 이상 의미 있는 게 못된다. 나는 사태를 객관적으로 설명해주는 이론들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 P. 161

부박한 세상에서, 하루가 다르게 바뀌는 사회에서 믿을 건 고전뿐이다. - P. 167

세상이 아무리 뒤죽박죽되어도 원칙을 지키는 사람이 있다면 언젠가는 제자리로 되돌아올 희망을 가질 수 있다. 다음으로 아무리 어린 사람이어도 존중해야 한다는 걸 배울 수 있다. 세상은 나이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능력과 인격으로 살아가는 곳이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이 하는 일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결국 제대로 된 삶의 기초라는 걸 배울 수 있다. 이 모든 것들은 공부에서만이 아니라 세상을 살아가는 데서도 기본이다. - P. 178

역사책 읽기는 철학적 주제들에게 생동성을 가져다준다. 몰역사적인 철학적 사유는 위험한 것이다. - P. 192

지금까지 어설프게나마 적어본 <내가 공부하는 방법>을 실천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요인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자기 학대>이다. 스스로를 괴롭히면서도 스스로 즐거울 수 있는 매저키스트가 된다면 남이 뭐라 하든 신경 쓰지 않고, 공부를 해서 명예를 얻지 않아도 슬프지 않으며, 공부가 돈이 되지 않는다 해도 서럽지 않다. 어쩌면 이런 상태가 바로, 옛 사람들이 말했다는 ‘위기지학爲己之學’인지도 모르겠다. - P. 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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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첫 문학과지성 시인선 345
김혜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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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나먼 은하계가
너무 커서 우리 귀엔 들리지도 않는
비명을 내지르며 돌고 돌다가
내 가슴에 안경알 고정시키는 나사못만큼
작은 소용돌이로 붙박여올 때

저기 저 남태평양쯤에서
몰려다니던 미친 태풍이
구름을 몰고 천둥 벼락 치며 휘몰려 다니다가
내 발끝에서부터
내 새끼손가락의 보일 듯 말 듯한 지문만큼
작은 소용돌이로 북상해 올 때


  김혜순의 아홉 번째 ‘첫’을 외치는 시집의 표지 후기에 적힌 글이다. 그때가 언제인지 알 수 없으나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시인이 그때마다 길어 올린 언어의 물은 흥건히 가슴을 적시지 않고 자아의 타자와 사물과 세계는 골고루 섞이고 융합하다가 서로를 밀어내고 고통스럽게 이별한다.

  안경알에 박힌 나사의 소용돌이와 새끼손가락 끝에 희미하게 남은 소용돌이는 서로 무관한 하지만 시인의 가슴에 파문을 남긴다. 김혜순의 시들은 늘 그렇게 충돌과 소용돌이 속에서 부딪히고 깨지며 상상의 세계와 감성의 세계를 현실 밖으로 끄집어낸다. 우주로 확장된 언어들의 울림은 독자의 공감을 얻기 힘들다. 자세히, 그리고 가만히 들여다보아야 보일까 말까 하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시인들의 초상이 하나씩 사라지는 서사의 시대에 김혜순은 여전히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또 다른 별에서> <우리들의 음화>를 그려다가 <나의 우파니샤드, 서울>에서 <불쌍한 사랑 기계>가 되었다. <달력 공장 공장장님 보세요>라고 외치다가 이제 <당신의 첫>으로 돌아왔다.

  지극히 역설적인 시집이 아닌가 싶다. 언제고 마지막일 수 있는 시의 변주들을 들고 뻔뻔스럽게 ‘첫’을 외치고 있다. 처음이고 싶은 욕망의 표현이라기보다 나를 중심으로 세상과 조우하는 경험이 만들어 낸 감각과 떨림 그리고 조용한 진동들은 모두가 처음일 수 있겠다.

지평선

누가 쪼개 놓았나
저 지평선
하늘과 땅이 갈라진 흔적
그 사이로 핏물이 번져 나오는 저녁

누가 쪼개놓았나
윗눈꺼풀과 아랫눈꺼풀 사이
바깥의 광활과 안의 광활로 내 몸이 갈라진 흔적
그 사이에서 눈물이 솟구치는 저녁

상처만이 상처와 서로 스밀 수 있는가
두 눈을 뜨자 닥쳐오는 저 노을
상처와 상처가 맞닿아
하염없이 붉은 물이 흐르고
당신이란 이름의 비상구도 깜깜하게 닫히네

누가 쪼개놓았나
흰낮과 검은밤
낮이면 그녀는 매가 되고
밤이 오면 그가 늑대가 되는
그 사이로 칼날처럼 스쳐 지나는
우리 만남의 저녁


  ‘당신이란 이름의 비상구’가 닫혀버리지만 ‘우리 만남의 저녁’은 계속된다. 끝없는 자기 부정과 세상과의 불화 속에서도 시인은 치열하게 지평선 너머로 시선을 던진다. 광활한 공간은 지평선으로 맞닿아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시인이 보는 사람과 세상은 보이지 않는 간격을 메우는 일일지도 모른다. 언어로 표상되는 낯선 세계에서 그녀의 시는 만났다가 헤어지고 또 다른 시선으로 인식의 대상들을 풀어 놓는다. 지평선은 어디에나 있고 저녁은 끊임없이 반복된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질투하는 것, 당신의 첫,
당신이 세상에서 가장 질투하는 것, 그건 내가 모르지.
당신의 잠든 얼굴 속에서 슬며시 스며나오는 당신의 첫.
당신이 여기 올 때 거기에서 가져온 것.
나는 당신의 첫을 끊어버리고 싶어.
나는 당신의 얼굴, 그 속의 무엇을 질투하지?
무엇이 무엇인데? 그건 나도 모르지.
아마도 당신을 만든 당신 어머니의 첫 젖 같은 것.
그런 성분으로 만들어진 당신의 첫.


  ‘당신’이라는 존재의 처음은 어디였을까? 그것은 나의 처음을 묻는 질문과 다름이 없다. 그 ‘첫을 끊어버리고 싶’다는 말은 영원을 준비하는 말은 아닐까. 존재의 본질에 대한 호기심과 탐구가 아닐지라도 현존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관심은 우리들 모두에게 늘 존재의 의미를 묻는다.

  ‘당신의 첫’은 나의 마지막일 필요는 없다. 다만 거기에 머물러 있는 것들에 대해 늘 고민하고 생각하고 그리고 인식한다. 생명과 존재에 대한 탐구와 인식 태도는 시인의 시를 태어나게 하는 근원이 된다. 시집 곳곳에 마련된 시원의 세계는 세상만물에 대한 태도이며 방법이고 목적이다.

당신의 눈물

당신이 나를 스쳐보던 그 시선
그 시선이 멈추었던 그 순간
거기 나 영원히 있고 싶어
물끄러미

꾸러미
당신 것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내 것인
물 한 꾸러미
그 속에서 헤엄치고 싶어
잠들면 내 가슴을 헤적이던
물의 나라
그곳으로 잠겨서 가고 싶어
당신 시선의 줄에 매달려 가는
조그만 어항이어 싶어


  모든 시들은 대상에 대한 무한한 애정에서 비롯된다고 믿는다. 그것이 증오로 때로는 자기 분열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당신’으로 호명된 대상은 나를 돌아보는 거울이 된다. 당신을 통해 헤엄치고 가슴을 적시고 싶은 것이다. 물끄러미 바라보는 시선은 그렇게 끝없이 확장될 것이고 새끼손가락의 소용돌이처럼 가슴속에 작은 파문을 일으킨다.

  일상을 조금만 벗어나면 보이지 않던 많은 것들이 보인다. ‘지금-여기’가 아니라 ‘거기-당신’에 대해 작은 애정과 관심, 치열한 고민과 주관적 인식을 통해 세계를 인식하는 태도를 버리지 않고 있는 시인의 내면 풍경은 그렇게 고스란히 내게로 전해진다. 비록 그것이 오독일지라도 내가 누구인지 묻고 싶을 때 ‘그때 나’를 확인하는 방법으로 늘 유용하다.


08052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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