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안다는 것
데이비드 브룩스 지음, 이경식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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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안다는 게 가능한가. 예를 들어, 내 아이는 내가 제일 잘 안다는 엄마의 착각이 아이를 망친다. 식성과 습관은 누구보다 잘 알 수 있으나 성장 과정에서 생각과 감정은 하루가 다르게 차이가 난다. 우리 애가 그럴 리가 없는데 친구를 잘못 사귀었다는 도시의 전설은 여전하다. 부모 자식뿐 아니라 연인과 부부 관계만큼 오해가 심각한 경우도 드물다. 많은 사람이 에리히 프롬을 소환하고 유행가 가사처럼 사랑은 받는 게 아니라 주는 거라고 되뇌지만 내가 바라보는 그, 혹은 그녀는 자신의 기대와 거리가 멀거나 전혀 다른 사람일 수도 있다는 걸 인정하지 않는다. 사람은 누구나 ‘그럴 리가 있다’는 게 디폴트 값이다. 리처드 니스벳의 탁월한 저서 『사람일까 상황일까』는 인간의 양면성을 상황 논리로 설명한다. 누구나 그럴 수 있고 사람은 앞뒤가 다르며 때와 장소에 따라 다른 말과 행동을 한다. 일관성이 없다는 이유로 비난받아야 하는 건 특정 직역, 정치인, 행정가, 공무원, 과학자의 논문 정도가 아닐까.

사람을 안다는 건 불가능하다는 전제로 데이비드 브룩스의 이야기를 경청하면 관점이 달라진다. 우리, 아니 당신이 믿는 인간 혹은 세계는 어떤가. 서로를 깊이 알면 우리의 세계는 어떻게 넓어지냐고 묻는 저자에게 서로를 깊이 알면 다칠 뿐이라는 시니컬한 답을 하고 싶을 때가 많았다. 『소셜 애니멀』부터 관계에 집중했다. 공동체적 삶을 지향하며 인생의 태도를 점검하려는 사람들에게 지적 영감과 성찰을 준다는 점에서 공상과학에 가까운 자기계발서와는 차원이 다르지만 저자의 지향점과 전제에는 동의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한 사람을 진심으로 바라보는 일’로 시작되는 이야기는 사례 중심으로 철학과 심리학, 문학과 신경과학을 넘나들며 소설과 영화를 가로지른다. 읽는 재미는 충분하며 인사이트도 충분하다. 모든 사람에게 ‘타인과의 관계’는 풀리지 않는 숙제다. 적당한 거리를 가늠하기 어려운 건, 사람마다 초점 자동 조절 기능으로 피사체를 선명하게 바라보는 기능을 장착한 인간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종교에 기대고 쇼펜하우어나 니체를 소환하고 템플 스테이와 명상을 시도하기도 하는 걸까. 정답이 없으니 끊임없는 시행착오를 거쳐 자기만의 ‘태도’를 결정하기도 한다. 그것이 바로 인간과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이며 자기 정체성이다.

차이는 극복하는 게 아니라 견디고 조절해야 한다. 하나가 되려는 허튼 노력과 우리가 남이냐는 호소가 깊은 상처를 남기지만, 때로는 인맥과 인연을 강조하며 관계를 이용한다. 남이 하면 이기적 집단주의 카르텔, 내가 하면 처세술에 능한 성공한 인맥 관리일까. 정서적, 개인적 1차 관계와 공적 영역의 2차적 관계를 구분하는 공정한 세상, 합리적이고 평등한 사회는 ‘꿈’에 가까운 지도 모른다.

그래도 사람들은 ‘희망’을 버리지 않고, 꿈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며 최소한 친밀하고 개인적인 관계에서라도 적절한 ‘거리’를 찾기 위해 노력한다. 관계를 망치지 않기 위한 나름의 노하우를 익히며 자기만의 스타일을 찾아간다. 그것이 사람 사는 세상의 지혜로움이기 때문이다. 데이비드 브룩스의 조언이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알 수 없다. 그것은 모든 책이 그러하듯 인간과 세상을 바라보는 개별 독자의 몫이다.

“사람들은 개인의 정신적 경험을 세상에 투사한다. 그럼으로써 자기의 감각기관과 개인사, 목표, 기대치에 의해서 특정한 지각이 형성되었음을 망각한 채, 자기의 정신적 경험을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세상이라 착각한다.” - 프로핏/드레이크베어 『지각Perception』 재인용, 1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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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의 일기
다니엘 페나크 지음, 조현실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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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대 총선이 끝나고 정운영의 『심장은 왼쪽에 있음을 기억하라』가 떠올랐고, 223차 모임 도서표지를 보고 이문구의 소설집 『내 몸은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왔다』가 생각났다. 한국어의 아름다움과 사투리 특유의 특징을 기막히게 살린 ‘재밌는’ 소설과 달리 다니엘 페나크의 『몸의 일기』는 날것 그대로인 ‘몸’을 드러내며 솔직함을 무기로 개별 독자의 몸을 돌아보게 한다.

한 남자의 몸에 관한 68년간의 기록은 색다른 의미를 갖는다. 1944년생 다니엘 페나크가 68세가 된 2012년에 출간한 소설의 주인공은 작가보다 스무 살쯤 연상인 1923년생으로 설정했다. 경험과 생각 이상의 무언가를 쓸 수 없는 게 작가의 한계라면 이 소설 역시 자전적 경험이 바탕이 됐으리라는 짐작이 어렵지 않다. 직립 보행을 하는 인간의 몸은 거의 매일 걷거나 뛰고 오랫동안 서 있다. 중력을 극복하려는 헬서들의 노력만큼은 아니어도 우리는 하루하루를 견디며 지나온 시간, 살아낸 인생을 고스란히 몸에 새긴다. 기억은 흐릿해지고 망각과 추억이 뒤섞여도 몸에 남은 흔적들은 어쩌지 못한다.

화자는 아내와 아들 그리고 동성애자 손자 등 오래 산 만큼 가족과 친구와 주변인들과 관계를 맺는다. 죽은 후에 딸 리종에게 남기는 형식의 글들이 간간이 섞여 있으나 두툼한 소설 한 권은 화자의 몸으로 쓴 인생을 표방한다. 그러나 타인과의 관계 안에서 작동하는 몸, 주변인들의 몸에 대해 관찰한 기록, 비올레트의 죽음으로 사라진 몸, 몸이 없는 상상 속의 동생 도도 등 다양하게 맺은 관계에서 몸으로 부대끼며 걸어온 길이 삶이라는 자명한 진리를 펼친다. 다니엘 페나크는 거대한 몸의 서사를 표방하고 있으나 어쩌면 우리 몸의 기쁨과 슬픔, 욕망과 한계를 통해 삶의 의미를 묻고 있는 듯하다.

따뜻한 봄나들이가 여름의 후끈한 열기로 가득했으나 남산과 한옥마을, 동대문 성곽길과 낙산공원, 함께 나눈 김밥과 샌드위치와 떡과 과일과 그리시니와 호두과자를 먹은 몸은 기억할 듯싶다. <책읽는 고양이>에서 시작해 밥집을 거쳐 다시 카페에 둘러앉아 계속된 책과 몸에 관한 우리들의 기나긴 이야기들이 울고 웃었던 시간도 우리 몸의 일부가 될 듯하다. 아픈 몸, 어머니의 몸, 건강한 몸, 좋아하는 몸...2분기 주제인 몸과 건강은 즉물적 삶의 실존적 토대다. 오롯이 자신에게 남겨진 몸을 돌보고 건강한 삶을 이어갈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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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다만 사랑의 습관 창비시선 500
안희연.황인찬 엮음 / 창비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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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만진 슬픔

_이문재

이 슬픔은 오래 만졌다

지갑처럼 가슴에 지니고 다녀 따뜻하기까지 하다

제자리에 다 들어가 있다

이 불행 또한 오래되었다

반지처럼 손가락에 끼고 있어

어떤 때에는 표정이 있는 듯하다

반짝일 때도 있다

손때가 묻으면

낯선 것들 불편한 것들도

남의 것들 멀리 있는 것들도 다 내 것

문밖에 벗어놓은 구두가 내 것이듯

갑자기 찾아온

이 고통도 오래 매만져야겠다

주머니에 넣고 손에 익을 때까지

각진 모시리 닳아 없어질 때까지

그리하여 마음 안에 한 자리 차지할 때까지

이 괴로움 오래 다듬어야겠다

그렇지 아니한가

우리를 힘들게 한 것들이

우리의 힘을 빠지게 한 것들이

어느덧 우리의 힘이 되지 않았는가

창비시선 500 기념 시선집.

문지시인선 600과 봄에 만났다.

오래 만진 슬픔도 언젠가 지나가나 봄.

이건 다만 고통의 습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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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에릭 와이너 지음, 김하현 옮김 / 어크로스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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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음악가 마일스 킹턴Miles Kington은 이렇게 말했다. “지식은 토마토가 과일임을 아는 것이다. 지혜는 과일 샐러드에 토마토를 넣지 않는 것이다.” 지식은 안다. 지혜는 이해한다. - 6쪽

에릭 와이너는 「들어가는 말」에서 지식과 지혜의 차이를 설명하려 애쓴다. 정보와 지식을 개인이 암기하고 저장했던 노하우know-how 시대를 지나 노웨어know-where 시대에 접어든 지 오래다. 그러나 아날로그의 추억은 레트로 감성으로만 소비되는 게 아니라 실생활의 습관과 태도로 각인되어 사고방식과 일상생활을 지배하기도 한다. 디지털 세대에게 정보와 지식은 검색의 대상일 뿐이다. 숙련된 기술과 전문가의 권위를 인정받는 각종 자격증과 시험 제도는 인간의 어떤 능력을 측정하기 위해 남아있는 걸까. 인공지능과 chatGPT로 인한 변화와 기술 발달의 속도에 적응하지 못한 인류 사회의 낡은 제도는 아닐까. 이제 인간의 능력은 무엇으로 그 차이를 구별할 수 있을까.

인터넷 알고리즘과 추천 영상에 갇힌 현대인의 일상은 시공을 초월한 듯 보이지만 거대한 그물에 포획된 일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미 정해진 길만 달리는 기차의 지루함은 안정성의 다른 이름이다. ‘일관성은 상상력 없는 자들의 마지막 피난처’라는 오스카 와일드의 충고가 자주 떠오른다. 습관적 사고와 행동, 일상의 루틴, 기차 레일이 모두 상상력의 부재를 증명하는 게 아닌가. 과거에 비해 상상할 수 없는 지식과 정보를 양산하고 활용하며 속도전을 치르는 인류의 삶은 조금 더 나아졌을까.

철학은 때때로 앎이 아니라 이해와 통찰의 중요성을 확인시켜 준다. 안다는 착각만큼 위험한 생각도 드물다. 내가 너를 안다, 그 사건은 내가 좀 안다, 그걸 아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소크라테스는 문답법을 통해 무지를 깨닫게 했다는데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 의심과 질문을 이어가고 있는가. 지식과 정보를 찾아서가 아니라 지혜를 찾아 떠다는 저자의 기차여행은 따분하고 지루하다. 분명한 해답, 확실한 깨달음, 차별화된 비법을 전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14명의 철학자를 찾아 떠나는 긴 여정에 동행한 독자들은 각자의 삶을 ‘성찰’하지 않았을까. 기억과 회고만큼 부정확하고 주관적인 사유 방식은 없다. 이것이 때로는 마르셸 프루스트처럼 거대한 문학적 성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자기만의 생각의 방에 갇히는 지름길이 되기도 한다. 어차피 객관적 진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믿는 모든 사실fact은 자기 합리화 과정일지도 모른다. 수학에 바탕을 둔 과학적 세계관으로 무장해도 우리는 길을 잃고 헤맨다. 루소처럼 걷는 법을 배우고, 간디처럼 싸우는 법을 익히며, 보부아르처럼 늙어가는 법을 터득해도 모든 순간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후회와 아쉬움을 남기지 않기 위해 몸부림치지만 어제는 돌아오지 않고 내일의 일은 아무도 알 수 없다.

촉촉하게 내리는 봄비가 그치면 벚꽃이 필 테다. 소크라테스를 소환하지 않는 시대가 도래할까. 자기 삶의 목적지가 아니라 방향과 태도를 점검하는 일은 실천과 행동으로 확인할 뿐이다. 어쩌면 에릭 와이너는 기차를 타고 여행을 하는 동안 철학자들을 소환한 게 아니라 함께 여행하는 딸 소냐에게 건네는 사랑과 응원의 당부가 아니었을까. 아주 조금 먼저 살아본 자들의 경험적 꼰대론이 아니라 같이 고민하고 각자의 길을 찾으려는 과정이 소중해 보인다. 길을 잃어도 괜찬다, 시간은 언제나 부족하다. 다만, 작은 변화와 새로운 도전이 없는 지루한 삶에서 행복을 찾는다면 가끔은 에피쿠로스나 시시포스의 조언도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스마트워치와 퇴직연금은 점점 나아지고 있다는 환상, 삶이 유의미하다는 환상을 준다. 우리는 방금 태운 칼로리와 모아둔 돈을 들여다보며 어딘가로 나아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내 삶은 유의미해. 내 손목 위의 작은 스크린 속에서 의미가 환하게 빛나고 있는 게 보여. 하지만 스마트워치를 찬 시시포스의 삶은 스마트워치 없는 시시포스의 삶과 똑같이 부조리하다. - 4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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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zeppa 문학과지성 시인선 597
김안(김명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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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제작으로 실린 「Mazeppa」는 우크라이나의 영웅, 이반 스테파노비치 마제파Ivan Stepanovich Mazeppa를 가리킨다.(류수연 해설, 「연옥으로의 한 걸음」, 108쪽) 또한 마제파Mazeppa는 리스트liszt의 초절기교 연습곡 4번이기도 하다.

나는 듣는다,

토끼가 겨울나무를 파먹는 소리,

얼어버린 눈동자가 물결처럼 갈라지는 소리.

나는 듣는다, 술로

연명하다 굶어 죽은 시인의 창밖으로 계절처럼

전진하던 기차 소리,

그 소리에 밤하늘의 불꽃이 흔들리고,

낭만과 폭력을 구분하지 못하던 시절과,

죽은 이의 입속으로 들어가는 벌레의 날갯소리,

듣는다,

음독이 묵독이 되는 소리,

기억을 잃은 이들이 거울 앞에 서는 소리,

나는 실패하고,

나는 전진하기에,

이것은 나의 몫이므로.

_ 「Mazeppa」중에서

함정에 빠진 젊은 청년 기사의 사랑 이야기와 시련과 생존을 거쳐 독립 영웅이 되는 반전 서사는 이 시집과 닮은 구석이 없다. 시인은 리스트가 제안하듯 시의 기교를 연습한 게 아니라 매 순간 처음인 모든 이의 삶에 반전을 기대하라는 위로를 보내려 한 것일까. 왼갖 잡소리를 듣고 싶지 않은 순간들, 뵈는 게 없어도 좋을 것 같은 장면들이 떠오른다. 누구나 자기 삶을 실패하며, 또 전진한다.

‘내가 젊을 적 쓰고자 했던 것들은 어떤 빈곤함의 형상, 때론 논리와 신랄한 야유, 잠자리 날개 같던 당신의 이마와 별 무리와 당신의 끝’(「시인의 말」중에서)이 먼저 튀어나와 당혹스럽다. 이제 젊지 않은 시인이 쓰고 싶은 건 뭘까? ‘말의 해방, 말의 깊이 따위를 향해 손 내밀다니 겁도 의미도 없이’ 변명과 술수로 부끄러운 연옥을 포장할 순 없다. 언어의 세계가 존재의 한계라는 사실을 자각했다고 인간이 전혀 다른 존재로 사는 건 아니다. 추악한 변명과 끝없는 변명으로 자신을 합리화할 뿐. 시인의 말은 이제 막 시작한 독자의 시 읽기를 방해한다.

그러다가 문득 ‘내 질문들은 자꾸만 어리석어지고, 어리석어지니 입을 틀어막고, 세상에는 이토록 많은 선의와 이토록 불가해한 다정함이 가득하니, 나는 그저 진부함과 유치함 속에만 존재하는 사람이 되어’(「뒤풀이」중에서) 버린 시인에게 공감하며 푸른 하늘을 잠시 쳐다본다. ‘세계의 절반은 어둠이고 그 남은 절반이 빛이라는 뻔한 술수’(「무의식」중에서)라는 사실을 몰라서 쓸쓸한 게 아니다. 사람들에게 선의와 다정함이 필요한 건 어둠 때문이 아니라 빛의 그림자 때문이 아닌가.

이념도 없고 분노도 없는 계절이 왔다. 마음이 질겨서 봄이다. 이제 나는 한 줄로도 만족하게 되었다. 한 줄만큼의 어리석음이면 족하다. 그 정도의 망신이면 족하다. 부끄러운 봄이다.

_ 「입춘」중에서

허나, 2024년의 봄은 이념과 분노로 가득하다. 마음이 모질지 못하면 견디기 힘든 시절은 저마다 다른 빛깔과 모양일 터. 사람들은 어리석음과 망신은 항상 타인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복잡하게 착하며 타인은 단순하게 나쁘다는 착각. 봄이 부끄러운 게 아니라 외면과 부인 그리고 자기 합리화의 모순을 견디는 힘이 가끔 못내 부럽다. 입춘을 지나 우수, 경칩까지 스쳐와도 갈 길은 멀고 험하다. 봄이 온다고 해서 부끄러움 없는 생활이 가능하다는 생각은 언제나 희망 고문이다.

‘설운 마음이 넘쳐서 누워만 있던 오후다. 잠든 딸아이 옆에 누워 머리를 쓰다듬다가 빗소리에 몸을 일으켜 앉으니’(「귀신의 맛」중에서) 창밖엔 켜켜이 쌓인 세월의 더께가 두툼하다. 잠든 아이의 손톱을 깎던 평화가 전생 같다. 고개 한번 돌리면 시간의 저편으로 넘어갈 수 있을까. 마음이 어린 후이니 하는 일이 다 어리다.

마음 밭에 거름을 주고 비가 와 촉촉하고 부드러운 상태가 되어야 쓸 수 있다. 읽는 일도 다르지 않다. 시인은 ‘지난가을이었다.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온종일 집에만 있었다.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니 읽을 수 있는 책도 없었다. 지난가을이었다.’(「붉은 귀」중에서)라고 고백한다. 읽고 쓰는 일이 아닌 사람들의 일상도 마찬가지다.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게 아니라 할 일을 못하는 상태, ‘지난 가을’이 아니라 굳이 ‘지난가을’이라고 말하고 싶은 때가 있다. 누구에게나 그 순간은 온다. 그러나 그 방법과 태도는 제각각이다. 지난 가을이 아니라 올가을로 만드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창에 비친 나를 본다. 늙고 있다, 늙은 개 같은 인간 늙은 인간 같은 개 같던 지난가을, 네발로 나는 빈다. 나는 반성합니다. 보세요, 최대한 인간처럼 걷고 있습니다. 마치 미래가 있는, 생활이 있는 사람처럼 웃으며 전활 받고, 네네, 생활이 있는 사람입니다, 나는 반성한다.’(앞의 시)

생활인의 슬픔에는 시인의 말대로 ‘자본주의의 돼지’가 된 친구를 우연히 만나는 일보다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다. ‘망각이 용서를 낳는다고 했던가, 그 용서가 영혼을 병들게 만든다고 했던가.’(「이 문장을 끝내지 못한 곳에서」) 어쩌면 용서하지 못하는 건 타인의 음험한 욕망이나 자본주의가 아니라 자기 자신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산다는 무언가 그립다는 말 한마디 때문이거나 모든 것을 상실했음을 확인하는 과정이다.

이것이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다. 다만 내게 필요한 것은 단 하나뿐이다. 그건 세상에 없던 새로운 비유를 만드는 일 같달까. 아버지의 구석진 장례식장에 온 사촌 동생 부부의 고귀한 옷차림 같은 거랄까. 눈앞에서만 착한 학생들처럼, 나는 한껏 슬퍼했었지. 아니 그런 것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일 테다. 마음을 쏟는다는 말은 두 가지로 읽힌다. 최선을 다했거나, 더 이상 쏟을 것 없이 모든 것을 상실했거나.

_ 「마음 전부」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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