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이 내게 말을 걸다 - 이욱연의 중국 문화기행
이욱연 지음 / 창비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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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  일본이 ‘가깝고도 먼 나라’로 표현된다면 중국은 멀고도 가까운 나라가 아닌가 싶다. 공간적인 거리만큼이나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는 나라가 중국이다. 국가와 민족은 달랐지만 지근거리에서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받으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중국의 문화는 우리의 문화와 얼마나 큰 차이가 있으며 어떻게 다른 양상을 보여주고 있는가. 최근의 한류 열풍으로 중국에 한국의 연예인이나 영화, 드라마가 붐을 이루고 있다고 하지만 문화는 그렇게 쉽게 전파되거나 흡수되지 않는다. 우리의 변화만큼 중국도 달라졌다. 자본주의 경제 체제를 받아들인 90년대 이후의 중국은 오히려 한국과 점점 닮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욱연의 <중국이 내게 말을 걸다>는 중국 기행문이다. 그러니까 중국이 내게 말을 건 것이 아니라 저자가 끊임없이 중국에게 말을 걸고 있다. 각 성을 찾아 떠나는 여행길에 마주쳤던 음식과 공간을 중심으로 꾸며진 책이다. 여행 자체가 목적이 아니고 ‘문화’라는 코드로 중국과 접속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영화’를 전제로 한다. 말하자면 영화를 통해서 바라본 중국과 현실 속의 중국을 비교 체험하는 기행문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뻬이징, 상하이, 홍콩, 충칭, 톈진, 시안, 꽝저우, 항저우, 샨뚱, 허뻬이, 난징, 후난으로 이어지는 멀고 먼 여행길에서 저자가 만난 것은 중국의 역사와 문화적 전통이다. 단순히 오래된 역사를 전제로 현재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은 또 하나의 편견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과거를 모르고 현재를 알 수는 없는 법이다. 지나온 세월과 그들의 풍습은 여전히 현재와 미래를 만들어 가는 토대를 형성하고 있다.

  특히 광활한 면적에 넓게 분포된 만큼 지역적 특성이 강하고 언어마저 다를 정도로 다양한 문화를 가지고 있으니 여행객의 입장에서는 중국을 쉽게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렵겠다. 토양이 다르니 음식도 다르고 지역색이 강하다. 단순화시키거나 중국을 이해하기 위한 방편으로 이 책을 선택할 필요는 없다. 이 책은 영화에 관심이 많은 사람에게 혹은 중국을 여행하고 싶은 사람 모두에게 읽을 만하다.

  저자는 기본적으로 중국에 대한 깊은 애정과 이해가 아주 깊다. 외부자의 시선으로 동경하거나 경외감을 바라보지도 않고 호기심과 색다른 문화 체험 수준의 이야기도 아니다. 먼저 하나의 도시를 소개하며 음식과 특징을 보여준다. 그리고 한 두 편의 영화에 깃든 이야기를 풀어 놓는다. 물론 방문의 목적과 글은 영화에서 출발했을 것이다. ‘붉은 수수밭’의 배경인 샨뚱을 찾아가는 방식이다.

  ‘패왕별희’를 앞세워 뻬이징을 찾아가는 방식이나 영화를 안 본 사람은 부분적으로 다소 지루할 수도 있다. 하지만 개인적인 소회나 타향에서의 감회를 감상적으로 적어간 기행문과는 조금 다르기 때문에 새로운 정보의 습득 차원에서 혹은 영화에 깊은 이해를 위해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겠다.
 
  북경 자전거, 색․계, 중경삼림, 첨밀밀, 스틸라이프, 영웅, 황비홍, 청사, 부용진 은 기억 속에 아련하거나 최근에 재밌게 봤던 영화들이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감회가 새로웠다. 중경삼림의 ‘캘리포니아 드림’이 들리기도 하고 진시황의 10보 앞으로 다가간 이연걸이 떠오르기도 했다. 영화가 만들어진 본고장을 둘러보는 형식의 글들이지만 단정하고 사색적인 문장들이 결코 지루하거나 따분하지 않다. 맹목적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기본적인 애정을 숨기지는 않는다. 중국이 아니어도 마찬가지지만 그들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문화적 접근이 필요하다.

  가장 대중적인 장르인 영화를 깊이 읽는 것은 한 국가와 민족을 이해하는 가장 쉽고 빠른 방법이 될 수도 있다. 이 책은 그런 면에서 적당히 가볍게 무겁지 않고 경쾌하게 읽어나갈 수 있어 좋다. 영화와 음식과 그들의 생활과 현재가 결합되어 하나의 ‘문화 기행’으로서 손색이 없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중국을 여행하기 전에 혹은 영화에 대한 추억을 떠올리며 읽기에 적절한 책이다.

  루쉰의 소설을 인용하거나 적당한 크기의 사진들이 삽입되어 상상력을 자극하고 영화의 장면들이 떠오르도록 배려한 구성도 간결하고 깔끔하다. 중국 영화를 좋아하거나 중국 여행을 앞둔 사람에게 선물해도 좋을 만하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내다볼 때 우리 입장에서 가장 신경 써야 하는 나라가 중국과 일본이다. 세계사의 흐름에서도 마찬가지겠지만 그들을 이해하는 일은 오늘의 우리를 이해하기 위한 객관적 조건이기도 하다. 그들과 우리는 결코 홀로 존재할 수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수 없기 때문이다. 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비분강개와 절치부심만이 과거사를 정리하는 옳은 방법이 아니라면 좀 더 깊고 넓게 그들을 이해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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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phung 2008-05-09 0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경삼림이라면... 마마스앤파파스의 캘리포니아드림을 갖다가 착각하신게 아닐지 싶으면서...

sceptic 2008-05-09 22:30   좋아요 0 | URL
허거덕이네요...맞습니다. 시카고의 호텔 캘리포니아가 아니라 마마스앤파파스의 캘리포니아드림입니다. 감사합니다.

sophung 2008-05-10 0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카고라니요... 아 자꾸... 이글스잖아요 아놔..

sceptic 2008-05-10 22:48   좋아요 0 | URL
-_-...1994년 공연 실황 DVD 다시 한 번 돌려봤습니다. <메멘토 모리>도 다시 볼까 생각중입니다...기억력의 문제가 아니라 이제 나이의 문제인것 같네요...ㅠ.ㅠ
 
봉섭이 가라사대
손홍규 지음 / 창비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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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소설은 여전히 유효하다.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에도 그러하며 미래에도 그러할 것이다. 문학의 종말을 외쳤던 가리타니 고진의 비명의 뜻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래도 여전히 문학은 위대한 힘을 지니고 있다. 다치바나 다카시처럼 소설을 읽지 않는 사람도 많지만 문학의 그 다양한 장르 중에 여전히 소설이 대표선수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다. 그것은 바로 삶의 진정성 때문이다. 과장되고 왜곡된 모습일지라도 당대를 살아가는 혹은 과거에 살았던 사람들에 대한 깊은 애정과 성찰로부터 소설은 시작된다. 우리는 그런 소설을 찾아 읽어야 할 이유가 분명한 이유가 있다.

  내가 아닌 ‘너’를 그리고 ‘우리’를 이해하기 위해서 소설은 읽혀야 한다고 믿는다. 사회를 조망하는 다양한 방법이 있겠지만 문학을 통한 방법만큼 ‘진실’에 접근하는 방법도 많지 않다. 허구적 사실을 전제로 한 소설을 통해 문학적, 사회적 진실에 다가가는 것은 위험해 보인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 혹은 객관적 진실이라는 것이 과연 존재하기나 하는 걸까 생각해 보자.

  한 작가의 주관적 견해와 평가라 할지라도 당대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과 방법은 우리의 그것과 일치할 때가 많다. ‘공감’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있고, 소설이 유용성이라는 측면에서 접근할 수도 있다. 어떤 측면이든 좋은 소설은 가려진 눈 속의 들보를 치우거나 외면하고 싶었던 현재의 모습, 생의 부조리와 아이러니를 적나라하게 드러낼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깊은 감동과 재미가 전제되어야 한다.

  최근의 소설들 이를테면, <쿨하게 한걸음>, <스타일> 등 이른바 칙릿(Chick-lit)이 주도하는 소설 시장에서 과연 손홍규의 <봉섭이 가라사대>와 같은 책들이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지가 개인적으로 궁금하다. 문학적 주제가 항상 진지하고 사회적 관심을 반영해야 한다는 당위는 없다. 그러나 인간의 문제와 사회적 관심에 대한 깊은 성찰과 반성을 토대로 하지 않은 소설이 과연 무슨 의미인가. 그것은 가벼움과 무거움의 문제가 아니다. 여성과 남성의 문제도 아니다. 소설의 역할과 기능에 대한 문제이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즐길만한 문화적 도구는 도처에 널려있다. 굳이 소설이 아니더라도 말이다.

  봉섭이 처럼 우리 사회의 주류 바깥에 서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만을 다룬다고 해서 좋은 소설인가에 대해서는 또 다른 논의가 필요하다. 결론적으로 나는 손홍규의 <봉섭이 가라사대>를 재미없게 읽었다. 작가의 의도와 소설의 주제들이 적절하게 표현되었고 고민의 흔적들과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도 분명하게 전달받았으나 말할 수 없는 미진함이 남는 것은 개인적인 취향의 문제이거나 문학적 감수성의 문제일 수도 있겠다.

  이 소설집에는 열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상식적인 시절’이 책의 머리를 장식하는 것은 소설적 흡인력으로 독자들에게 접근하기 위한 의도라는 것이 쉽게 감지된다. 가볍고 경쾌한 유머, 재치 있는 표현들이 작가의 언어적 감수성을 잘 보여준다. 우리 사회에서 과연 ‘상식’이 있기는 한 것인지 되묻고 있는 반어적 제목도 독자들에게 의미 있게 다가온다. ‘매혹적인 결말’은 소설가가 되기 위한 두 사람의 눈물 나는 일상사가 코믹하게 그려진다. 생존의 문제 너머에서 항상 삶의 의미를 묻고 있는 인간의 존재 양상을 보여준다. 과연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고 나면 인간에게 ‘인생’이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된다.

  ‘이무기 사냥꾼’과 ‘봉섭이 가라사대’, ‘뱀이 눈을 뜬다’, ‘도플 갱어’, ‘푸른 괄호’를 하나의 의미망으로 묶을 수는 없다. 공통점을 찾아내기도 힘들다. ‘붉게 타는 푸른 노을, 달 밝은 비오는 밤도 있지. 노란 적포도주 한잔은 어때. 행복한 가난뱅이, 배고픈 사장님, 모두가 일등이 될 수 있는 나라, 만인을 위한 민주주의, 아름다운 자본주의……’(도플갱어, P. 179)라는 모순된 말장난처럼 세상은 상식과 질서에 의해 모두가 노력한 만큼 댓가를 받고 착하고 바른 사람들이 잘 살아가는 세상이 아니라는 사실만 아프게 확인된다. 그것은 특별히 배후 조정자가 있거나 몇몇 나쁜 사람들이 존재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러한 생의 아이러니와 부조리에 대해 작가는 아직 진지하게 고민하거나 보다 많은 이야기를 토해내야 할 것 같다.

  마지막의 단 편 세 개는 연작으로 읽힌다. ‘최후의 테러리스트’, ‘최초의 테러리스트’, ‘테러리스트들’이 그것이다. 경험하지 못한 세대라고 해서 말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소설가에겐 상상력이라고 하는 무소불위의 칼이 쥐어져 있다. 그것을 어떻게 휘두를 것인가에 대해 깊이 고민한 결과물들을 우리는 책으로 만난다. 손홍규의 소설이 그런 의미에서는 충분히 읽을 만하고 매력적이라는 데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것이다. 다만 깊은 울림이 조금 아쉽다. 개인적인 취향일 수 있으나 지나간 시간에 대한 고통과 좌절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는 오롯이 작가의 몫이 될 수밖에 없다.

  우리 역사의 트라우마로 남게 된 ‘광주’를 통해 사람들은 참 많은 말들을 해 왔고, 앞으로도 남은 이야기도 많을 것이다. 그것은 언젠가 사라지고 기억의 저편에서 조금씩 밀려나가겠지만 기억하고 보여주고 살아있는 현재와 연결시키는 작업에 나는 개인적으로 갈채를 보낸다. 잊혀져 가는 과거가 아니라 우리가 기억하고 껴안아야 할 미래이기 때문이다. 손홍규의 소설들은 그렇게 현재의 고통들이나 과거의 기억들을 걸러내고 쓰다듬고 오래도록 생각나게 한다. 그만큼의 노력과 힘겨움은 문장의 곳곳에 배어 있다.

  조금 아쉬운 것은 앞서 말했듯이 문장들 사이의 긴장감과 전체를 아우르는 탄력이다. 깊이와 넓이를 요구하는 무뢰한 독자가 많을수록 작가에게 더 큰 고통과 더 나은 차기작을 기대할 수 있다고 믿는다. 소설의 미덕에 대해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는 책은 그러나 여전히 독자에게 필요하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소설을 열심히 읽을 수밖에 없다.

“왜 그랬어?”
“지겨워서.”
“그게 전부야?”
“우리 모두 서로를 지겨워하면서 이 세상을 견디고 있지.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세상보다 나은 다른 세상이 있다고 믿으면서. ……사실은 나 자신이 치욕스러웠어. 내게 재능이 없다는 사실도 싫었고 그런 내게 헛된 열망을 품게 한 세상도 싫었어. 모든 게 나를 조롱하는 것만 같았어.”   - 최초의 테러리스트, 본문 271페이지.


080504-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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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곳에 가면 그 여자가 있다
김현아 지음, 유순미 사진 / 호미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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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읽고 나서 사람들의 반응은 제각각이다. 나에게 책을 읽고 난 후의 느낌을 물었을 때, 좋은 책은 가슴이 먹먹하도록 울림이 큰 책이라고 말한다. 물론 인간의 감성을 자극하는 문학 작품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철학이든 역사든 사회든 어떤 분야를 막론하고 카프카의 말대로 정수리에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의식의 한 부분을 일깨우는 책은 이성의 한 부분을 자극하는 깨달음의 책이 된다. 문학이든 아니든 이성과 감성을 나눌 필요도 없이 오랜 향기와 여운으로 가슴에 남는 책이 좋은 책이라는 데 동의한다면 김현아의 <그 곳에 가면 그 여자가 있다>는 보기 드물게 머리와 가슴을 모두 어루만지는 책이다.

  이 책은 기행문 형식의 글들을 모았다. 문학적 답사라고 해도 좋겠지만 얄팍한 흥미 위주의 책과는 거리가 멀다. 그렇다고 해서 머리 아프고 난해하게 이야기를 풀어 놓지도 않는다. 난삽하게 수다스럽지도 않고 부산스럽게 치장하지도 않았지만 그 깊이와 고민들은 단순한 기행과 답사의 결과물로 볼 수만은 없다. 웅숭깊은 흑백의 사진과 더불어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고 현실을 벗어난 초월적 공간을 산책하는 듯하다.

  지나가 버린 시간들에 대한 단순한 경외나 이 세상을 떠난 사람들에 대한 아쉬움을 표현하기 위한 책도 아니다. 그녀들의 삶과 문학은 오롯이 현실이 되었고 수만 가지의 고리들은 인과 과정을 거쳐 현실 속에 살아 숨 쉰다. 다만 우리는 그것들을 쉽게 알아채지 못한다. 멀리 신라의 박제상 부인,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을 거쳐 조선의 허난설헌과 신사임당 그리고 매창을 만나고 20세기의 김일엽과 나혜석과 조우하며 마지막으로 고정희로 마무리 된다.

  그 지난한 세월 속에서 여성의 삶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진지한 고민과 학문적 성찰보다도 오히려 그들이 남긴 자취를 더듬어 보고 현장에 남아 있는 흔적들을 통해 그녀들을 반추하는 일이 우리에게 더 큰 의미로 다가온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인류의 절반인 ‘여성’은 어떤 존재인가 반문해 본다. 미래의 화두로 여성과 환경을 제시한 이윤기의 말을 빌지 않더라도 이제 수 천 년을 숨죽여 온 여성성의 재발견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새삼스럽게 거론할 필요도 없다. 우리는 이제 그런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경주에는 치술령과 분황사터, 선도산과 여근곡이 있다. 그곳에 가면 박제상의 부인과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을 만날 수 있다. 강릉 초당리와 오죽헌에 가면 허난설헌과 신사임당을 만난다. 부안 채석강과 곰소에 가면 매창을 볼 수 있고 수덕사에 가면 김일엽과 나혜석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마지막으로 해남에 들러 고정희의 시를 읽어본다.

  한반도의 좁은 땅을 뒤져 이 나라의 역사에서 명멸했던 여성들의 삶을 만나는 일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들의 삶을 돌아보는 일이다. 여성 해방 운동의 선구자로서 대표적인 인물들을 탐방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삶의 주체로서 올곧은 그녀들의 영혼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남성, 그들만의 리그에서 배제되고 소외되었던 여성들의 삶은 그녀들의 것이 아니었다. 그녀들은 ‘여성’이라는 이름이 아니라 그저 한 ‘인간’의 삶을 선택한 것이다.

  시대를 앞서 생각하거나 살아가는 일은 모질고 고통스럽다. 무엇보다도 외로움을 선택해야 하는 일이다. 지금 우리의 시대정신을 미래는 무엇이라고 정의할까 궁금하다. 자본의 욕망이나 경쟁의 논리로 무장한 사람들의 피폐한 삶을 미래는 어떻게 한 줄로 정리할 것인가. 과거의 상식이었을 평범을 거부했거나 소수자였던 그녀들의 삶의 궤적을 쫓는 일은 즐겁고 행복한 산책이 아니었다. 이 책을 읽는 일은 인류의 역사, 아니 우리들의 과거를 아프게 돌아보는 것이고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작은 화두를 발견하는 일이다.

  기획과 출판 의도를 뛰어넘는 저자 김현아의 글과 류의 사진들이 결합하여 이 책은 누구에게나 선물하고 싶고 읽히게 하고 싶은 책이 되었다. 때로는 답사의 과정을 생생하게 묘하하기도 하고 때로는 작은 흔적들을 통해 그녀들의 생을 돌아보는 저자의 감각적인 문장과 사색들을 따라가다 보면 류의 사진을 만나게 되고 사진 안에서 다시 그녀들을 만나게 된다.

  그 곳에 가면 그 여자의 살았던 시대가 있고 그 여자의 삶이 있고 아직도 살아 숨쉬는 그 여자의 영혼과 만나게 된다. 역사는 반복된 미래일 수도 있겠다. 이 책에 소개된 곳에 모두 가보았지만 어렴풋이 역사의 흔적들만 돌아보았다. 아니, 어쩌면 나는 그곳에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것은 아닐까?

  배낭 속에 책 한 권 집어넣고 사진기 둘러메고 떠나라고 끊임없이 충돌질하는 문장들을 견디기 힘들었다. 이제 ‘그 곳’에 갈 때는 ‘그 여자’를 만나기 위한 준비를 해야겠다. 어디서든 볼 수 있겠지만 이 책에 소개된 곳은 특별한 시선으로 돌아보게 될 것이다. 어쩌면 다른 모든 곳에서도 ‘그 여자’를 찾아보라는 저자의 숨은 의도를 발견하지 못할 뻔 했다.

  나무와 숲 사이로 사라져 버린 그 수많은 길들처럼 ‘그 여자’가 사라졌지만 세상은 또 다른 ‘그 여자’들로 가득하다. 우리 모두는 ‘그 여자’를 기억할 것이고 그녀들의 삶을 통해 더 많은 ‘그 여자’를 지금 여기에서 만나게 될 것이다. 저기 멀리 서 있는 소외된 타자가 아니라 삶의 주체로서 우뚝 선 ‘그 여자’를 위해 이 책이 쓰여졌다고 믿는다.


080430-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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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8-05-01 22: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궁금해지네요...

sceptic 2008-05-04 18:06   좋아요 0 | URL
문학적 기행문...여성들의 삶에 대한 기억들...을 더듬고 싶을 때, 혹은 여기 소개된 동네에 가시기 전에 한번 읽고 가시면 다른 의미가 전해지지 않을까 싶어요...

키도 2008-05-13 2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혜석의 죽음 뒤에 붙는 불운한 그림자를 걷게 해준 책이지요.
누가 누구의 죽음을 제단할 수 있을까, 생각했습니다.

경주와 고정희가 있는 해남.
제 경험속에도 상실과 희망이 교차하는 곳이어서
참, 울림이 컸습니다.

앞으로 님의 서재에 자주 오게 될 것 같네요.^^

sceptic 2008-05-15 13:12   좋아요 0 | URL
시간과 공간에 대한 기억과 그리움이 진하게 배어 있는 책이었습니다.

무이님도 많이 공감하셨다니 이 책은 독자들에게 충분히 생각의 기회를 제공한 듯 하네요.

가끔 오세요...^^
 
양반가문의 쓴소리 - 이덕무 <사소절(士小節)>, 이 시대에 되살려야 할 선비의 작은 예절
조성기 지음 / 김영사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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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무엇을 경계하며 살아갈까?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도대체 무엇을 삼가는 걸까? 예절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지켜야 하는 가장 기본적인 질서의 다른 이름이다. 함부로 행동하지 않고 타인을 배려하며 나를 절제하는 일은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인간의 조건이다. 하지만 우리 주변에는 ‘인간에 대한 예의’를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한 마디로 정의하기 어렵지만 이기적이고 무례한 사람들은 점점 많아진다. 범위를 조금 넓혀 가족 이기주의가 예절과 삶의 토대를 형성하는 기본 틀로 작용한 것이 근대 이후라고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그것이 절대 가치가 되어 버렸다.

  예절은 마음에서 우러나와야 하는 법이다. 그 형식과 내용을 구별할 수는 없고 형식이 내용을 구속하기도 하지만 습관이 되고 그것이 행동을 변하시키고 인생을 살아가는 기준이 되려면 온몸으로 실천해야 한다. 특히 작은 예절을 지키지 않으면 타인은 물론이고 나를 온전하게 세울 수 없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내 마음을 다스리는 일이라는 것을 선조들은 책 속에서가 아니라 실천적 삶을 통해 체득했을 것이다. 우리는 그 가르침에 귀 기울이고 고개를 끄덕이며 반성의 거울로 삼는다.

  영, 정조 대문장가인 박지원에 가려 빛을 보지 못한 사람이 이덕무이다. <사소절士小節>은 작은 예절의 소중함을 일깨우기 위한 훌륭한 저서이다. 선비의 작은 예절이라는 뜻의 제목을 달고 있지만 선비의 가정에서 지켜야할 예절 모음집이다. 이 책을 소설가 조성기가 <양반 가문의 쓴소리>라는 제목으로 해설을 달았다. 말하자면 이 책은 조성기의 <사소절> 해설집이다. 그래서 몇 가지 장점과 몇 가지 단점을 함께 가지고 있다.

  성품과 행실에 관한 교훈인 성행性行, 언어생활에 관한 교훈인 언어言語, 의복과 음식에 관한 충고인 복식服食, 행동거지에 관한 충고인 동지動止, 기타 삼가야 할 것들인 근신勤愼 편으로 나뉘어져 있고 하나하나 항목화하여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박지원의 <양반전>에서 양반의 법도와 권한을 듣고 “나, 양반 안해!”라고 외쳤던 사람의 심정을 헤아려 보자. 만약 그 사람이 이덕무의 <사소절>을 보았다면 어떤 부분에 대해서는 까무라쳤을 지도 모르겠다. 선비로 살아가는 일은 겉으로 드러난 형식과 격식의 틀에 매여 살아야 함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얼마나 스스로의 생각과 행동을 엄격하게 다스리고 통제하며 삼가고 또 삼갔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 책은 이덕무의 생애를 들여다 볼 수 있는 가벼운 책이다. 스스로 그렇게 살았을 것이고 그것을 권면하는 책이니 이덕무의 입장에서 보면 일상생활에서 반드시 필요한 ‘실용서’를 쓴 셈이다.

  지금의 관점에서 읽다보면 오히려 웃음이 나고 재미있는 부분들도 많다. 특히 복식과 행동에 관한 충고들은 당시의 풍속과 일상을 상세하게 들여다 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된다. 성품과 행실, 언어생활에 관한 것은 예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지 모른다. 방법과 태도가 조금씩 변했겠지만 그 근본정신과 타인에 대한 기본적인 배려는 고스란히 남아있다.

  ‘머리의 좋고 나쁨에 구애되지 말라, 뜻을 다하여 목표를 정하라, 정성을 기울여 날마다 부지런히 정진하라, 올바른 정신을 소유하도록 하라’는 것은 공부하는 기본자세에 대한 충고이다. 공부하는 사람들이 갖추어야 하는 기본자세는 하나도 달라지지 않은 것이다. 월급을 물으며 축하하지 말라는 충고나 음식이 차려지면 지체하지 말고 먹으라는 충고, 약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놀리지 말라는 충고, 근거 없는 말을 퍼뜨리지 말라는 충고 등은 현대인들도 뼈에 새겨 들을만한 충고이다.

  영조의 탕평책으로 규장각 검서관이 될 때까지 아니 그 이후에도 서출이라는 신분의 제약과 무관하게 책 속에서 진정한 자유를 찾아 스스로 ‘간서치’ 불렀던 이덕무. 방안에 들어온 햇빛을 좇아 책상을 들고 옮겨 다니며 하루 종일 책을 읽었다는 고리타분한 서생 이덕무. 그가 말한 선비는 돈과 권력의 정점에 서 있는 벼슬아치를 말한 게 아니었다. 소박하고 평범한 일상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지켜야 하는 기본적인 예절들과 ‘선비’라는 이름이 어울리는 사람이 갖추어야 할 마음가짐과 행동거지에 대한 사소한 충고들이다.

  어찌보면 지루하고 쪼잔한 잔소리쟁이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에게 ‘선비정신’이라는 게 있다면 정신세계에 면면히 흐르는 거대 담론으로서의 사상이 아니라 이렇게 일상에서 마주할 수 있는 실천적 지식인으로, 생활인으로 진솔한 모습을 보여주었던 이덕무의 모습이 아닐까 싶다. 그는 갔지만 그나 남겨 놓은 정갈하고 깨끗한 정신은 살아 있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자유와 제멋대로를 구분하지 못하는 우리 모두의 행동들을 돌아 보았다. 조선시대 냄새나는 생활규범이 아니라 오래된 미래가 보여주는 우리의 정갈한 생활 풍속을 오늘에 되살려 보는 것은 남다른 의미가 있다.

  느닷없이 하나님의 말씀과 성경에서 유사한 내용들을 끌어다 붙이고 인용하는 저자의 종교적 색채만 아니라면 깔끔하게 읽을 수 있었던 책이다. 오래 곁에 두고 생각날 때 마다 조용히 읽어 볼 만하다. 인간에 대한 예의와 사소한 법도가 시대가 흐른다고 해서 얼마나 달라지겠는가.

  ‘생긴 대로 살고 싶다. 내키는 대로 행동한다. 다른 사람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난 나다. 편한 게 최고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은 이 책을 피해 가야 한다. 숨통을 조이는 올가미로 여겨질 테니 말이다. 그렇지 않다면 한 번쯤 그 시절을 상상하며 이 시대와 비교하며 시간의 흐름을 확인하고 예절의 의미를 돌아볼 수 있는 책으로 가볍게 읽어볼 수 있겠다.


080429-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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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하이쿠 선집 책세상문고 세계문학 34
마쓰오 바쇼 외 지음, 오석륜 옮김 / 책세상 / 2006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보.고.싶.다. 이렇게 말해놓고 나면 세상의 모든 말이 아득하게 숨어 버린다. 도대체 더 이상 무슨 긴 말이 필요한가. 유행가의 제목으로도 쓰였듯이 가장 단순하고 명료한 감정 표현만큼 솔직하고 좋은 것은 없다. 구차한 설명과 필요 이상의 말들이 오히려 군더더기가 될 때가 있다. 일상에서 우리가 만나는 감정들이 당혹스러울 때가 있듯이 내 안에서 벌어지는 감정의 변화나 눈에 보이는 대상을 표현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있는 그대로를 말한다고 해서 내 안의 감정과 생각들이 전달되는 것도 아니고 화려한 수사를 동원해서 요설적으로 늘어놓는다고 해서 완전하게 표현되지도 않는다. 정작 길이는 중요하지 않는 법이다. 그래서 대하소설보다 때때로 전해지는 한 줄의 시가 가슴을 후벼 파는 것이다. 촌철살인은 문학뿐만 아니라 생활의 곳곳에서 드러나는 자명한 이치를 말해준다.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짧은 시 하이쿠는 5․7․5의 17자로 만들어진다. 일본어 원문을 읽을 수 없어 번역된 시를 읽어야 하는 아쉬움이 있다. 시는 소리와의 결합으로 이루어진다. 소리내어 읽지 못하고 운율을 확인할 수 없어 반쪽짜리 감상밖에 될 수 없어 안타까움이 사라지지 않지만 하이쿠의 맛을 음미해보고 싶은 욕심까지 떨쳐버릴 수는 없었다.

  <일본 하이쿠 선집>에는 대표적인 시인 다섯 명의 작품들을 가려 뽑았다. 가쓰오 우동이 생각난다는 아이의 농담에 웃어버렸던 마쓰오 바쇼(1644~1694)의 시 중 몇 편이 마음에 와 닿는다.

산길에 와서
어쩐지 마음 끌리는
제비꽃이네


  사물에 대한 색다른 시선은 시간과 장소의 변화만으로도 가능하다. 산길에 와서 제비꽃에 마음이 끌리는 마음이 보인다. 보이지 않는 고요함을 시각과 청각의 절묘한 조화로 이루어낸 하이쿠도 있다.

고요함이여
바위에 스며드는
매미의 소리


  자연에게 마음을 가탁하는 방법은 흔하다. 우리 시인에게도 자주 확인할 수 있는 우울과 쓸쓸함을 뻐꾸기가 대신 전하기도 한다.

우울한 나를
더 쓸쓸하게 하라
뻐꾸기여

  요사 부손(1716~1783)의 하이쿠는 참신하고 색다른 느낌이 전해진다. 익숙한 것에서 느껴지는 놀라운 발견이다. 모든 것이 얼어붙은 겨울나무 숲에서 살아 숨쉬는 나무의 향기는 놀라움이 아니라 생에 대한 작은 깨달음이었을 것이다.

도끼질하다
향기에 놀랐다네
겨울나무 숲

죽음 앞에 겸손해지는 모습, 어린 시절에 헤어진 어머니의 대한 그리움을 나타낸 하이쿠가 돋보이는 고바야시 잇사(1763~1827)의 하이쿠는 순간 눈물이 글썽이게 한다.

죽은 엄마여
바다를 볼 때마다
볼 때마다

  이 짧은 형식 안에서도 시구의 반복은 가능하고 그 반복은 어떤 다른 말보다 진한 그리움을 전해준다. 바다를 볼 때마다 죽은 엄마를 그리워하는 시인이 마음이 그대로 전해진다.

저녁의 벚꽃
오늘도 또 옛날이
되어버렸네


  아쉬움이나 미련은 단순히 시간의 흐름만으로 말할 수 없지만 오늘 떨어진 벚꽃은 완전하게 과거가 되어버린다. 오늘은 어제의 미래였지만 내일의 과거가 된다.

  가와히가시 헤키고토(1873~1937)의 하이쿠 한 편을 더 읽어보자. 순서를 바꿔버리는 표현이 기막히다. 떨어지는 은행잎을 바라보며 젊은 시절 벗을 떠올렸을 텐데 젊을 때 벗을 생각하면 은행잎이 떨어진다고 능청을 떤다. 우연을 필연으로 혹은 익숙한 순서를 뒤집어 버리는 발상의 전환은 누구나 갖고 있는 감각은 아닐 것이다.

젊을 때의 벗
생각하면 은행잎
떨어지누나


  우리나라 시인들의 한 두 줄 짜리 시도 많이 있다. 짧은 길이 때문에 더욱 강렬했고 오래 기억되는 시들도 많았다. 하지만 일본의 하이쿠는 형식적 틀이 고정되었고 그것을 시인이나 독자들이 정제된 미적 가치를 통해 음미했다는 사실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여러 번 읽어가며 하이쿠 밖의 사건들을 짐작하고 상황과 맥락을 상상하는 즐거움은 순전히 독자들의 몫이다. 흐린 하늘을 바라보며 하이쿠 한 편 감상하는 주말도 괜찮을 것 같다.


080426-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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