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누구를 ‘후배’라고 부를 때는, ‘같은 꿈을 꾸고 있는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같은 방향을 보고 있는 사람들’, ‘같은 희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모두 아우르는 말이다. 때로 그 ‘같은 꿈’ 때문에 ‘같은 상처’를 입는 경험을 나누어 갖기도 해서 동질감은 더욱 짙어진다. - P. 73

아직 희망을 버릴 때가 아니다. 지금은 희망을 키워갈 때이다. - P. 145

나는 항상 부끄러움을 통해서 배운다. - P. 166

“자신이 알고 있는 제한된 지식만을 반복적으로 사용할 것을 강요받는 삶, 그것이 노동자의 가장 큰 비극입니다.” - P. 180

가족이 아닌 사람을 위해 묵묵히 자신에게 손해가 되는 길을 선택하는 모습은 그것이 비록 ‘작은’ 희생일지라도 가족을 위한 ‘큰’ 희생 못지않게 감동적이다. 피 한 방울도 섞이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서 부당한 권력과 자본에 의한 피해가 뻔히 예상되는 길을 선택하는 것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 P. 217

그토록 어려운 처지의 장애인도 훌륭하게 성공했으니, 그보다 더 어렵지도 않은 조건에서 성공하지 못한 사람은 불성실하거나 게으르기 때문이라는 은근한 조장이 그 글에 숨어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 사회의 모순된 억압 구조를 개인의 불성실로 은폐하고 싶어하는 불순한 시도가 글쓴이도 모르는 사이에 그 글 속에 숨어 있는 것은 아닐까? - P. 220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노종조합이란 단어가 자신의 인생과 바늘 끝만큼이라도 관계를 맺게 될 것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생각해보지 않은 사람들 앞에 나가 설 때마다 막막함과 무력감이 나를 짓눌러 똑바로 서 있기조차 버겁다. - P. 249

최소한 사회적 약자들을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 그것이 다른 많은 경험들과 함께 ‘톨스토이 예술론’을 통해 내가 깨달은 최저값이다. - P.25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아직 희망을 버릴 때가 아니다 - 우리 시대와 나눈 삶, 노동, 희망
하종강 지음 / 한겨레출판 / 2008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The pen is mightier than the sword. 고대 멸종 언어처럼 기억이 가물거리는 영어 문장 하나가 떠오른 것은 왜일까? 오래전 어느 영문법 책에서 보았겠지만 경험으로 체득하기까지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 글을 쓴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읽는다는 것은 하나의 의사소통 과정이며 내밀한 고백의 시간이다. 작가의 고백을 듣고 독자는 자신의 경험과 더하여 또 따른 의미망을 직조해 낸다. 책은 그렇게 큰 울림으로 독자에게 다가갈 때 전체로 완성된다.

  ‘책은 형식이 아니라 내용이다’라고 말한다면 그 또한 모순이다. 언어 기호의 분석이 가능한 일차적 조건이 충족되어야 하는 일이 책읽기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일단 읽는다는 행위 속에 전제된 능력과 기능들을 논하지 않는다면 책의 내용은 책의 전부일 것이다. 책을 읽고 무엇을 느끼고 어떻게 생각이 달라지고 내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개인적인 영역에 속한다. 적어도 내게는 그러하다.

  한 권의 책을 통해 내가 변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그렇게 조금씩 세상이 달라질 수 있다는 믿음이 없다면 책읽기는 고통스런 시간 때우기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어찌 보면 현실과 동떨어진 책상물림들의 한가한 소일거리로 비춰질 수 있는 행위 속에 현실의 최전선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접하게 되면 독자들은 당황하게 된다. 저널리즘의 의무와 역할은 이 중간쯤에 위치하는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하종강의 글이 내게 주는 충격파는 만만치가 않다. <아직 희망을 버릴 때가 아니다>는 쉽게 감동하지만 절대로 눈물 흘리지 않는 내 눈을 적신 몇 안되는 책 중의 하나이다. 하종강의 책이 처음은 아니다. 한겨레에서 매년 봄 특강을 진행하지만 매년 책으로만 만나고 있다. <7인 7색 21세기를 바꾸는 교양>, <21세기에는 지켜야 할 자존심> 등의 책과 <그래도 희망은 노동운동>이라는 책을 통해서 만난 하종강의 모습이 이 책을 통해 갑자기 달라진 건 아니다.

  하지만 이제 그의 몸도 나이가 들어가고 있고 시간의 흔적은 모든 살아 있는 것들에게 먼 미래의 소멸에 대해 이야기한다. 건강이 악화되어 쉬는 동안 준비했다는 이 책의 내용은 그가 살아온 흔적들이다. 쌓여온 세월들이고 이 땅의 노동 현실에 대한 침착한 보고서이며 21세기 우리 사회를 돌아보는 자화상이다. 그래서 숙연해지고 마음 아프며 책장을 넘기다 문득문득 하늘을 보게 된다. 고인 눈물 흐르지 않기 위해서.

  감상적이고 문학적인 글이 아닌 철저하게 생활과 현실에 기초한 책의 내용이 전하는 감동은 특별하다. 그것은 하종강이 살아왔고 겪어왔던 이 땅의 노동자들에 대한 기록이기 때문일 것이다.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다. 아직도 ‘노동자’라는 말조차  꺼리는 것이 대부분 사람들의 의식이다. 자신이 노동자이면서도 그 용어를 싫어하고 미래에 노동자가 될 예정이면서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대부분인 우리 사회가 정상은 아니다. 중고등학교에서부터 철저하게 노동 기본권을 배워 익히고 의무적으로 노동법을 가르치는 유럽의 선진국들의 예를 들 필요도 없이 우리 사회의 노사 관계에 대한 인식은 왜곡되어 있고 모순에 가득하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겠다는 대통령이 당당하게 당선되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우리나라는 기업하기 나쁜 나라였다는 말인데 그 말은 사용자의 편이 아니라 대다수의 사람들이나 정책들이 노동자의 편이었다는 말인가? 지나가던 견공이 웃을 일이다. 20여 년간 노동자들에게 상담과 강연을 해주며 그들의 함께 울고 웃었던 하종강의 글들은 머리도 가슴도 아닌 발이 썼다. 발로 쓴 책의 감동은 발로 시작되었지만 뜨거운 가슴을 거쳐 차가운 머리에까지 도달한다. 분노와 아픔을 넘어 변혁과 실천의 문제까지 고민하게 만든다.

  단순한 생활인의 주변 이야기가 아니라 대표적 개인으로 볼 수 있는 노동자들의 면면이 가슴 아프게 눈에 밟힌다. 차라리 이 책이 소설이라면 좋겠다는 엉뚱한 생각을 하기도 했다. 먼 미래에 이런 시절도 있었노라고 추억할 수 있는 순간이 올 거라는 믿음이 없다면 하종강은 그 긴 세월동안 ‘희망’을 버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직 희망을 버릴 때는 아닌 것 같다. 서로 손잡고 함께 걸어가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치지 않는 학교와 더 높은 곳을 향해서 앞만 보며 달려가는 사람들로 가득한 현실에서 하종강이나 그가 만난 사람들은 패배자이며 낙오자라고 볼 수 있을까?

  아니다, 그렇지 않다. 그것은 현실을 견뎌내는 유일한 힘이 ‘희망’인 사람들에게 모욕이다. 근본적인 문제의 원인과 대책을 세워나가자는 원론적인 감상이 아니라 먼저 생각을 바꿔야 한다. 그들이 누구인지 그들은 저 멀리 있는 ‘노동자’들인지 아니면 우리들 모두인지 알아야 한다. 그래서 무엇이 문제이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생각해야 한다.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나의 문제이며 내 가족의 문제이고 우리들 모두의 현실이라는 사실을 똑바로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와 나눈 대화의 기록과도 같은 하종강의 이야기는 삶과 노동 그리고 희망에 대해 따뜻한 시선으로 말을 건네고 있다. 당신은 행복하냐고. ‘부채감’ 때문에 평생을 살아갈 힘을 얻는다는 하종강의 말이 과장은 아닐 거라고 믿는다. 우리는 하종강에 대한 부채감 때문이라도 그가 말하는 희망에 대해 한 번쯤 고민해 보아야 한다. 문제가 없는 것이 아니라 인식조차 하지 못하는 우리의 생각이 먼저 변해야 한다. 생각이 변하면 행동이 달라지고 행동이 달라지면 세상이 바뀐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은 작은 행동과 실천이 하종강이 말하는 희망은 아닐까 싶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080402-03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책을 읽는 방법 - 히라노 게이치로의 슬로 리딩
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김효순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최근 3년간, 올해 3개월을 포함해서 3년 3개월간 480여 권의 책을 읽었다. 3분의 1쯤이 문학 서적이고 나머지는 인문, 사회, 철학, 역사, 예술 등 다양한 분야의 책들이다. 고전은 물론 최근에 발간된 책에 이르기까지 꼼꼼하게 훑어보고 신중하게 선택하고 진지하게 읽어왔다. 결코 적지 않은 분량의 책들에 대한 애정과 관심과 열정은 순전히 ‘무목적성’ 때문에 가능했으리라. 아무 이유도 목적도 없이 걷는 길은 행복하기만 하다. 책 자체가 목적이기 때문이다.

  특별한 목적이 있었거나 생계와 직결된 일이었다면 나는 절대로 책을 즐길 수가 없을 것이다. 서늘한 바람이 부는 나무 아래, 따스한 햇볕이 드는 호수가의 그늘진 벤치, 창 밖에 눈 내리는 겨울밤의 따스한 거실, 차창에 부딪히는 빗소리를 들을 수 있는 버스 창가, 여명이 밝아오는 새벽 기차의 구석 자리. 책을 읽는 장소가 중요하지 않겠지만 손에서 책을 놓지 않는 습관은 고치고 싶지 않다. 주변에 흔한 다독가에 비하면 많은 책을 읽는 것은 아니다. 목적과 방법이 다르겠지만 1년에 300권이 넘는 책을 본다는 사람도 보았기 때문이다.

  버릇처럼 이야기하지만 질은 양을 담보로 하지만 양이 곧 질이 될 수는 없다. 책에 관한한 스스로 프로라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히라노 게이치로의 <책을 읽는 방법>은 마음 가짐을 다시 가다듬는 계기가 되는 책이다. 다소 황당하게 들리겠지만 단순한 활자 해독 수준에서 시작하는 독서는 그 질적 수준이 천차만별일 것이고 한 권의 책에서 건져내거나 얻을 수 있는 정보의 양과 질적 변화의 과정은 독자들마다 상당한 차이를 보일 것이다.

  같은 책을 읽었지만 기억에 남는 대목이 다르고 이해의 수준과 폭도 다르다. 독자의 반응과 이해의 수준이 그 책이 최종 소비자인 독자에게 의미하는 것은 작가의 그것과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책을 읽는 방법에 따라 같은 책이 독자마다 다르게 전달될 수 있다는 말이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이면서 쉽게 간과했던 ‘책을 읽는 방법’은 자기 반성과 성찰의 기회를 제공한다. 나는 어떻게 책을 읽고 있는가? 왜 책을 읽는가? 지극히 단순하고 당연한 질문에서 출발한다면 이 책은 독자마다 다른 방식으로 다가 갈 것이다.

  히라노 게이치로를 처음 만난 건 <일식>을 통해서였다. 도쿄대 법학부에 재학 중이던 1998년 아쿠타가와 상을 수상하며 등장한 괴물 같은 소설가로 기억한다. 무라카미 류와 비교되면서 화려하게 문단에 등단했다. 내가 ‘괴물 같은’이라는 수식어를 쓴 이유는 소설 <일식>에 대한 충격 때문이었다. 20대 초반의 젊은이가 썼다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해박한 지식과 철저한 고증을 바탕으로 한 중세 유럽의 분위기가 그대로 전해지는 소설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몇 권의 소설을 더 읽었지만 처음과 같지 않았고 <장송>은 아직 읽지 못했다.

  말하자면 ‘읽을 읽는 방법’에 대한 그 주관성과 허다한 방법론 속에서 히라노 게이치로라는 이름 때문에 읽은 책이다. 이 책은 몇 마디 충고로 요약할 수 있다. 하지만 문장 하나 하나에서 전해지는 실천과 경험의 충고가 뼈에 사무친다. 매끈한 말솜씨와 화려한 수식으로 현혹시키는 종류의 책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철저하게 개인적인 경험에서 우러나온 실천적 방법론으로 가득하다. 특별한 노하우나 비법을 전수하는 책은 아니지만 저자가 걸어온 길에 대한 실화를 통해 실전에 필요한 방법론을 제시하고 있는 책이다.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천천히 읽어라!’로 요약된다. 속독법에 관한 책이나 속독법 학원을 운영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미칠 노릇이겠지만 ‘슬로 리딩’이라 명명된 히라노 게이치로의 책을 읽는 방법에 이의를 제기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양의 독서에서 질적인 독서로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이 저자의 일관된 주장이다. 그러다 보면 매력적인 ‘오독’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지독(遲讀)’이 곧 ‘지독(知讀)’이라는 말이 히라노 게이치로의 책을 읽는 방법을 요약하고 있다.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 미시마 유키오의 <금각사>, 푸코의 <성의 역사 1 - 앎의 의지> 등을 예로 들어 슬로 리딩을 어떻게 실천하는 지 직접 보여주는 대목은 많은 사람들에게 책을 제대로 읽는 방법에 대해 많은 공감을 주었을 것이다. 얼마나 많이 읽는가에 관심을 둘 것이 아니라 왜, 어떻게 읽는가에 관심을 두어야 하는 이유를 정확하게 짚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실용적 목적에 따라 짧은 기간 동안 많은 책을 조사하거나 자료를 수집하는 사람들, 단기간에 레포트나 논문을 써야 하는 사람들을 예외로 하더라도 책이 하나가 도구가 되거나 단순히 정보 수집의 방법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 이 책은 책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해 준다. 그렇다면 나에게 책이란 무엇인가? 가끔 떠올려 보는 생각이지만 이 책을 통해 나는 다시 한 번 자기 점검의 시간과 기회를 갖게 되었다.

  사람마다 책을 읽는 목적과 방법이 다르겠지만 서로 곁눈질하고 배워가며 자신의 방법을 찾아가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오늘도 손에서 책을 놓지 못하고 흐린 하늘을 쳐다보며 휴일의 아쉬움을 달랬던 나는 화창한 봄날이 와도 책을 찔러 넣고 떠날 것이다. 그곳이 어디든 책과 함께 떠나는 여행은 즐거움으로 가득하리라. 그래서, 행복한 여행은 계속된다.


080330-03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라파엘로와 아름다운 은행가 - 빈도 알토비티 초상화 이야기
데이비드 앨런 브라운.제인 반 님멘 지음, 김현경 옮김 / 휴먼앤북스(Human&Books) / 2007년 11월
평점 :
절판


  예술은 우리를 특별한 매혹의 세계로 안내한다. 말할 수 없는 아름다움과 설명할 수 없는 미적 감수성은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정신적 기쁨이다. 한 화가의 그림이나 성향에 몰입하는 것은 위험할 수도 있고 다양하고 폭넓은 그림에 대한 애정으로 확산될 수도 있다. 우리 주변에서 쉽게 접근하기는 어렵지만 예술, 특히 그림은 볼 때마다 새로운 느낌과 감동을 전해주기도 하고 그림 하나가 주는 감동을 평생 잊기 어려울 수도 있다.

  르네상스를 빛낸 화가 중의 한 명인 라파엘로의 그림은 부드러운 빛과 여유 있는 인물들의 표정으로 기억된다. 그 중에서 젊은 피렌체 사람의 초상화 ‘빈도 알토비티’라는 젊은이는 대단한 매력을 발산한다. 데이비드 앨런 브라운과 제인 반 님멘이 쓴 <라파엘로와 아름다운 은행가>는 빈도 알토비티 초상화에 관한 이야기이다. 한 작가의 한 작품을 중심으로 이렇게 역사를 가로지르는 드라마 같은 이야기들이 숨어 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했다.

  이 책은 한마디로 ‘빈도 알토비티’ 초상화에 관한 보고서이다. 이탈리아의 피렌체에서 은행가였던 주인공의 초상화를 그리면서 사실적으로 묘사했다면 요즘 말로 얼짱에 수많은 오빠부대를 거느릴 만한 미남이다. 단순하게 잘 생겼다는 말은 물론 아니다. 사진이 아니라 그림을 통해 보여지는 것 너머까지 전하는 능력을 지닌 라파엘로의 그림은 보는 사람을 매혹시키기에 충분하다.

  특히 이 은행가의 그림은 모나리자와 비교되기도 하고 있으며 이 그림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매력을 묘사하고 있다. 금발의 젊은 남자가 오른쪽 어깨너머로 정면을 응시한다. 검은 모자를 쓰고 있고 푸른색 망토를 걸치고 있다. 볼은 발갛게 상기되어 있으며 이마와 금발 머리에 부딪히는 빛은 환하게 반사된다. 귀밑머리는 가늘고 섬세하다. 아직 솜털이 벗겨지지도 않은 것 같은 남자는 미소년처럼 보인다. 하지만 내 눈에 옥의 티처럼 보이는 반지 낀 왼손은 아무리 보아도 어색하다. 오른쪽 어깨부분 가슴에 얹은 손은 나중에 그려 넣었다는 심중을 굳힐 수밖에 없다. 녹색 화면을 배경으로 관객을 응시하는 젊은 은행가의 눈은 깊고 푸르다. 빨간 입술과 오똑한 코, 짙은 눈썹과 하얀 등은 현실 밖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을 하게 한다.

  이 한 장의 그림이 그려진 것은 1512년경이었고 주문받은 그림은 라파엘로에 의해 예술작품으로 탄생한다. 16세기 이탈리아의 부유한 집안에서 초상화는 각별한 의미를 가진다. 결혼기념이나 조상들의 초상화를 그리기도 했다. 이렇게 탄생한 젊은 은행가의 초상화는 수백 년 동안 상속과 매각을 통해 주인이 바뀌다가 지금은 위싱턴의 미국국립미술관에 걸려있다.
우여곡절을 겪는 동안 그림의 행방과 그림을 둘러싼 수많은 사건들은 마치 영화처럼 인상적이다. 통시적 관점에서 그림의 이동이 보여주는 경로는 그대로 당대 사회의 역사와 문화적 요인들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미술사 여행을 이 초상화 하나로 떠날 때 지루할 거라는 생각을 했다. 특별히 관심 갖고 있던 작가도 아니고 그림이 주는 이미지나 느낌이 환상적인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초상화는 초상화일 뿐이다. 과장과 왜곡이 보태지기도 하겠지만 초상화가 주는 감동이 얼마나 클 것인가에 대한 생각은 바람직하지 않지만 적어도 내게는 통용되는 사실이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그림 한 점이 500여 년의 세월을 견뎌온 과정이 그대로 소설처럼 흥미롭기도 하고 충분한 의미를 찾을 수도 있다.

  무관심한 태도와 경직된 사고에서 창의력이나 기발한 아이디어가 나오기 어렵다. 내가 생각한 것이 옳고 다른 사람의 견해가 틀리다는 오만은 이미 수구와 보수를 넘나드는 위험한 생각이다. 콘크리트처럼 생각이 굳어지면 깨지기 전까지 바뀌지 않는다. 그림에 대한 숱한 해석과 다양한 논의들은 풍성한 잔치와 같다. 긴 세월 속에서도 그 빛과 이미지를 잃지 않았고 시간의 흐름 속에서 예술적 감동은 여전하다. 미술사에 대한 상상력과 역사적 사실들에 대한 통찰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는 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그림은 이후에도 여러 사람에 의해 확대 재생산 된다. 수많은 복제가 이루어지고 비슷한 유형의 인물들이 미술사에 자주 등장한다. 그만큼 이 그림에 대한 동료나 후대 화가들에 대한 영향력이 컸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한 장의 초상화가 보여주는 종횡무진 서양 미술사에 얽힌 에피소드들은 논픽션 드라마처럼 흥미 있지만 번역된 문장이 매끄럽지 않기 때문인지 전체적인 흐름이 이어지지 않고 끊어진 국수처럼 따로 떨어진 느낌이다. 유기적인 문장들 간의 결합이 아쉽기만 하다.

  또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내용 밖의 문제이다. 본문 237페이지와 이후 부록과 주를 포함해 370페이지이다. 부록과 옮긴이의 말은 물론 마땅히 들어가야 한다. 주도 빼놓을 수는 없다. 하지만 본문 237페이지에 불과한 책의 가격은 무려 29,000원이다. 어지간해서 책값 이야기는 잘 안하는데 하드커버와 컬러 도판이 필연적이었다고 해도 이 책을 화집이 아닌 일반 도서로 판매할 목적이었다면 지나친 가격이다. 소장 가치가 있는 책도 아니고 그저 르네상스 시대 한 그림에 대한 후일담으로 재미있게 접근할 수 있는 편집과 디자인 그리고 가격을 제시할 수 있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싶다.

어깨너머 아득한 눈빛을 던지는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가 맨 처음 떠올랐던 이 책의 표지가 화면에 가득하다. 그림은 언제나 우리에게 깊은 감동을 주기만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여전히 인간이 휴식할 수 있는 영혼의 안식처를 제공하며 우리를 이상적 유토피아로 이끌기도 한다. 완전한 저 너머의 세계에 가고 싶지만 이 책의 목적은 거기에 있지는 않다.


080328-03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두두 문학과지성 시인선 342
오규원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설 연휴 특판을 위한 백화점 ㄷ참치 코너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다. 매장에서는 백화점 직원들이 판매를 하고 나는 지하 2층 창고에서 매장까지 물건을 옮겨 놓는 일이었다. 때때로 선물용으로 배달되는 참치를 들고 배달을 나가기도 했다. 보름간의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남는 시간은 지하 창고 불빛 아래 참치 박스들 틈에 작은 공간을 마련하고 책을 보았다. 그 때 밑줄을 그어가면서 읽었던 책이 바로 오규원의 <현대시작법>이다.

  <왕자가 아닌 한 아이에게>, <이땅에 씌어지는 서정시>, <가끔은 주목받는 생이고 싶다>와 시선집 <사랑의 기교>를 보면서 나는 정호승이나 신경림, 황지우와 또 다른 세계를 들여다 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오규원은 내게 그렇게 특별한 시인이었다. 이후 발간된 시집들은 모두 사 보았지만 이론서들은 한 권도 읽지 않았다. 그런 시인이 작고 한 지 벌써 1년 남짓한 시간이 지났다. 그리고 그의 마지막 시집 <두두>가 나왔다.

그대와 산
― 서시

그대 몸이 열리면 거기 산이 있어 해가 솟아오르리라, 계곡의 물이 계곡을 더 깊게 하리라, 밤이 오고 별이 몸을 태워 아침을 맞이하리라


  시집을 왜 사서 읽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문법전공 국문과 교수처럼 시는 늘 그만큼의 거리를 두고 서 있다. 오규원의 시는 더더욱 그럴지도 모른다.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시를 이해해야 한다는 말이 무색한 오규원의 짧은 시들은 인식 이전의 차원을 보여준다. 언어가 보여줄 수 있는 한계를 치열하게 고민했던 시인의 마지막 목소리는 군더더기 하나 없는 맑고 깨끗한 이슬과 같다.

  시간의 흐름에 따른 사물과 자연의 변화는 시인에게 단순히 경외와 감탄을 자아내지 않는다. 지금 거기 존재하는 대상에 대한 날것 그대로의 이미지를 보여줄 뿐이다. 하지만, 언어가 보여주는 장면 그대로 표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관점에 따라 선택된 장면이고 선택된 언어에 따라 다르게 보여질 뿐이다. 객관적 거리와 표현은 불가능하다. 그것에 도전하는 무모함을 보여주는 시들은 절대 아니다. 시인은 그저 자신의 눈에 비친 풍경들을 간결한 언어의 세계로 표현하고 있을 뿐이다. 그것을 읽어내는 독자의 마음에 그려지는 하나의 이미지는 이미 시인의 그것과 전혀 다른 모습일 수도 있다.

4월과 아침

나무에서 생년월일이 같은 잎들이
와르르 태어나
잠시 서로 어리둥절해하네
4월 하고도 맑은 햇빛 쏟아지는 아침


  시간은 정지해 버린 듯 멈춰 있지만 4월과 아침은 교묘한 눈빛을 교환하며 4월의 아침이 빚어내는 장면을 고스란히 정지시킨다. 사진조차도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표현될 수 있다는 사실에 동의한다면 오규원의 시들은 단순한 정지화면만을 보여준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산과 길

여러 곳이 끊겼어도
길은 길이어서
나무는 비켜서고
바위는 물러앉고
굴러 내린 돌은 그러나
길이 버리지 못하고
들고 있다


  시집의 제목인 ‘두두(頭頭)’와 물물(物物)은 두두시도(頭頭是道), 물물전진(物物全眞)이라는 선가(禪家)의 말에서 시인이 빌려온 것으로, 모든 존재 하나하나가 도이며, 사물 하나하나가 모두 진리라는 의미라고 한다.

식빵과 소리

식빵을 얇게 썰어
살짝 굽는다
한 조각 위에
버터를 바르고
한 조각을 덧씌워
종이 냅킨으로 감싸 쥔 뒤
아, 하고
입 가득 넣고 깨문다

바싹!

오후
그리고
4시

  동작과 행위들까지 정지해 버리는 시간들. 소리가 들리지 않는 이미지의 적막을 깨는 소리가 들린다. 바싹! 긴 여운이 남는 소리는 아지만 오후 4시에 들려오는 ‘소리’는 순간 또다시 적막 속으로 사라진다. 이 시집은 크게 ‘두두’와 ‘물물’로 나뉘어져 있다. 유고시집의 특성상 끊임없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시인의 목소리를 연상하자니 죽음 너머의 세계를 상상하지 않을 수 없다.

  존재의 무(無)로 돌아간 시인과 유작으로 남은 시들이 던지는 화두는 무겁거나 진지하지는 않다. 시인의 의도였는지 알 수 없으나 의미를 넘어서 존재 하나하나의 소중함을 깨닫거나 다시 돌아보게 된다. 의미가 없다는 말이 아니라, 의미를 부여하자는 말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명징하게 드러내 주고 있다. 지극히 단순하고 깨끗하게!

고요

라일락 나무 밑에는 라일락 나무의 고요가 있다
바람이 나무 밑에서 그림자를 흔들어도 고요는 고요하다
비비추 밑에는 비비추의 고요가 쌓여 있고
때죽나무 밑에는 개미들이 줄을 지어
때죽나무의 고요를 밟으며 가고 있다
창 앞의 장미 한 송이는 위의 고요에서 아래의
고요로 지고 있다


  고요의 위와 아래를 생각하다가 장미 한 송이가 지고 있는 장면을 떠올려 본다. 고요하지 않은 세계의 이편에서 고요한 세계의 저편으로 건너 간 버린 시인이 남긴 고요는 삶과 죽음의 경계를 보여주려는 것은 아니었겠지만 소란스런 삶의 세계와 대비되는 적막한 죽음의 세계를 보여주는 듯하다.

  세상에 존재하는 구멍 속으로 사라진 시인이 그립다. 그 구멍은 물론 바닥이 보이지 않을 것이고, 모든 것들은 사라지는 구멍일 것이다. 이제 더 이상 그의 목소리를, 그의 시를 볼 수 없다는 아쉬움보다 그가 남겨 놓은 시들을 다시 꼼꼼이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앞선다.

  그가 남겨놓은 빈 자리는 작은 구멍 하나만큼 비워 놓고 싶다.

구멍 하나

구멍이 하나 있다 바닥이 보이지 않는

지나가는 새의 그림자가 들어왔다가

급히 나와 새와 함께 사라지는 구멍이 하나 있다

때로 바람이 와서 이상한 소리를 내다가

둘이 모두 자취를 감추는 구멍이 하나 있다



080327-037

댓글(1)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치니 2008-03-28 08: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에게 마침 필요한 시들! 보관함 냉큼 들어갑니다.
그런데 대단하세요, 그 힘든 알바 중에 짬을 내어 시집 읽으셨다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