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득이 - 제1회 창비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창비청소년문학 8
김려령 지음 / 창비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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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야기의 본질은 소통과 전파에 있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이야기는 사람들에 의해 가감되기도 하고 전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 과정을 거쳐 새로운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집단 전체의 지혜가 고스란히 다음 세대로 전해지기도 한다. 구전문학은 그렇게 제 기능과 역할을 다하며 공동체의 무의식을 반영하기도 했고 교육의 기능을 담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는 이야기가 사라진 시대를 살고 있다.

  구전 문학이 기록 문학으로 정착되고 집단 창작에서 개인 창작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이야기는 글을 통해서 즉 책을 통해서만 유통된다. 그렇다고 해서 이야기의 기능과 역할이 축소 된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사회 시스템 전체가 자본의 논리에 의해 가동된다는 사실은 이야기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창조적이고 흥미 있는 이야기는 문화산업의 이름으로 소설로 창작되거나 영화, 게임의 스토리가 되기도 하며 거대한 부를 창출한다. 그러니 현대 사회에서 이야기는 돈이라는 명제가 성립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가 사라져 가는 시대에 청소년들의 이야기는 돈이 되지 않기 때문일까? 그들을 위한 사색과 고민은 넘쳐나는 듯 하지만 정말 알맹이는 없다. ‘고교생이 읽어야할~’로 시작되는 시리즈나 ‘논술대비를 위한~’로 시작하는 수험생들의 불안감을 조장하는 자극적인 문구들은 일제강점기 근대 단편 소설이거나 유명 작가들의 대표작들 모임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청소년들 스스로 주체가 되어 고민하고 선택하고 방황하며 정체성을 찾아야하지만 그것을 다루고 있는 책들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대입제도에는 온 나라가 떠들썩하게 관심이 많지만 어떤 길을 가야할 것인지, 그들의 고민과 꿈은 무엇인지에 대한 관심은 아주 적다. 네모난 빵틀에 구워진 빵들처럼 똑같은 옷을 입고 똑같은 시간에 등교해서 똑같은 책을 펴고 똑같은 공부를 하고 똑같은 꿈을 꾼다. 자본주의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썰매를 끄는 개처럼 헐떡이며 무한질주의 고통스런 생활이 오늘도 이어진다. 극단적이고 부정적인 편견 같지만 큰 틀은 손대지 않고 그 안에서 그들은 사소한 즐거움과 어이없는 고민들을 할 때가 많다.

  아니 어쩌면 제도권 안에서 움직여지고 경쟁의 대열에 서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그들은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김려령이 그려낸 <완득이>처럼 소수자에 대한 이해와 관심은 점점 남의 일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제1회 창비청소년문학상 수상작다운 이 소설은 청소년들에게 읽힐 만하다. 고민의 폭이 깊고 진지하며 대상이 뚜렷하고 폭넓은 시야를 확보하고 있기 때문이다.

  난장이 아버지와 외국인 어머니를 둔 완득이가 이 소설의 주인공이다. 그 어머니조차 얼굴도 모른 채 살아왔다. 고등학생으로 설정된 완득이는 말하자면 사회의 소수자다. 어른의 몸과 아이의 지능을 가진 피한방울 섞이지 않은 삼촌과 아버지는 춤을 추며 생계를 꾸려가기도 하고 장터에서 물건을 팔기도 하며 지하철에서 구두 깔창을 팔다가 쫓겨다니기도 한다. 그러나 완득이가 살고 있는 옥탑방 건너편엔 담임 똥주가 산다. 소설의 첫 장면은 교회에서 완득이가 기도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일주일 안에 담임을 죽여달라는 기도이다.

  시종일관 담임 똥주와 완득이의 관계는 유쾌한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다. 똥주는 일반적인 관점에서 교사의 말투와 행동은 아니다. 욕도 잘하고 지독한 반어와 역설로 학생들을 비꼬기도 하며 끊임없이 완득이를 괴롭게 한다. 그 괴롭힘은 물론 완득이의 입장에서다. 두 옥탑방을 중심으로 완득이와 똥주가 만들어내는 인간적인 관계가 이 소설의 중심 축이다.

  완득이의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삼촌은 완득이의 배경이다. 같은 반 여학생 정윤하는 완득이와 다른 모범생이며 공부도 일등이다. 윤하를 완득이 옆에 세우는 작가의 의도가 눈에 띠게 노골적이고 담임 똥주에게 부자 아버지가 있기 때문에 가난은 장식에 불과하다는 설정이 다소 작위적이긴 하지만 전체적인 고민의 폭은 완득이의 불우한 환경에 머물지 않고 사회적인 거시적 관점으로 확대된다. 이주 노동자 문제와 소수자에 대한 편견, 입시를 목적으로 이루어지는 학교 교육의 현실, 기성세대의 편견 등 다양한 관점들이 서로 얽혀 있지만 청소년들이 읽기에 부담스럽지 않도록 경쾌하고 발랄한 문장과 표현이 유지된다는 것이 이 소설의 장점이다.

  킥복싱을 배우게 되면서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과 정체성을 확인하게 되는 완득이는 소설이 끝날 때까지 한 번도 이기지 못한다. 싸움이라면 자신 있는 완득이에게 사각의 링은 또 다른 하나의 세계이다. 정해진 규칙과 룰이 엄존하는 현실의 축소판과 같은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을 극복해내는 과정이 완득이가 성장하는 과정일 것이고 이 사회에 편입되는 통과의례일 것이다.

  이 소설은 청소년 성장 소설이라는 골격을 유지하면서도 일상에서 벗어나 있는 청소년에 대한 관심과 어쩌면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어느 학교에나 오늘도 맨 뒷자리에서 엎어져 자고 있는, 학교를 그만두고 담장 밖에서 길을 잃어버린 청소년들에 대한 관심을 잃지 않고 있는 소설이다. 다양한 관심과 그들의 고민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그들은 어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만만하거나 단순한 고민으로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지 않다. 성적과 대학만이 지상 과제일 때도 있겠지만 인간의 성장 과정에서 당연히 갖게 되는 성장통을 앓고 있으며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할 고민으로 밤을 새우기도 한다.

  나이가 어리다고 해서 그리움이나 사랑, 이별과 죽음, 삶의 이유와 방향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벌써 그 시절을 잊어버린 어른만의 생각일 뿐이다. <완득이>는 불과 얼마 전에 겪었던 우리들 유년의 기억을 되새기며 청소년들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는 책이며 무엇보다도 나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이해와 배려를 위해 청소년들이 꼭 읽을 만한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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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럼, 지구를 뒤덮다 - 신자유주의 이후 세계 도시의 빈곤화
마이크 데이비스 지음, 김정아 옮김 / 돌베개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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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슬럼slum의 어원은 slumber선잠이다. 피곤하고 고통스런 삶을 이어가는 빈민층에게는 숙면조차 사치일지 모른다. 편안하고 안락한 잠자리는 거주 조건을 단적으로 말해줄 수 있지만 그것조차 영위하지 못하는 빈민층이 사는 곳을 슬럼이라고 하는 지도 모르겠다. 또한 슬럼은 도시와 별개의 개념으로 생각할 수 없다. 인간 문명의 눈부신 결과물인 도시의 거주형태는 슬럼이라는 그림자를 만들어낸다. 빛이 있는 곳에 어둠이 있게 마련이다.

  왜 인간은 한 곳에 모여 살아야 하는 것인가는 우매한 질문이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이 서로 협력하지 않고 군집 생활을 하지 않을 수는 없다. 다만 얼마만한 거리에서 어떤 거주 형태로 모여 살아야 하는 문제는 그 답이 쉽지 않다. 도시의 발달은 통치 목적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노동 집약적인 산업 혁명의 이후 급속하게 확산되기에 이른다. 효율성을 우선으로 하는 공장식 기계 산업은 보다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고 보다 많은 노동 시간이 필요했다.

  농업 사회에서 산업 사회로 그리고 정보화 사회로 이행되는 과정에서 도시는 필연적으로 확대되었지만 70년대 이후 벌어지는 도시의 집중 현상은 새로운 관점으로 접근해야 한다. 거대도시의 필요성에 따라 계획적으로 만들어지는 경우도 있지만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의 물결에 밀려 황폐화된 농촌을 떠나 도시로 몰려드는 가난한 사람들이 슬럼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마이크 데이비스의 <슬럼, 지구를 뒤덮다>는 ‘신자유주의 이후 세계 도시의 빈곤화’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도시의 갱년기가 만들어내는 자연스런 슬럼현상은 일부 서구 유럽의 선진국에 해당되는 이야기이다. 멕시코와 인도를 비롯한 후발 개도국이나 아프리카에서 벌어지고 있는 거대 도시화와 급작스런 슬럼의 형성은 참혹하기만 하다.

  슬럼은 다음 몇 가지 유형을 지닌다. 도심이 빈곤해지거나 해적형 도시화가 이루어지거나 눈에 띄지 않는 셋방살이 형태이거나 변두리의 밑바닥을 이루거나. 이들 슬럼 주민은 네 가지 유형으로 분류가 가능하다. 먼저 스쿼터, 즉 남의 땅에 들어와 집을 짓고 사는 주민이 있고 두 번째로 해적형 분양지의 피분양자, 세 번째로 세입자, 네 번째로 강제퇴거 주민, 농촌 유민, 국내외 난민들이다.

  이 책은 전지구적으로 벌어지는 슬럼 현상에 대한 상세한 보고서이며 우려할 만한 미래에 대한 묵시록이다. 국가별로 슬럼의 유형과 원인 슬럼의 주거 조건들을 살펴보고 있는 부분에서는 할말을 잃는다. 6장 슬럼의 생태학에서 이런 생활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재난과의 동거, 죽음과 질병을 부르는 도시, 똥통생활, 유아살해범에 관한 상세한 내용들은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 조금만 눈을 들고 멀리 내다보면 내가 살고 있는 지구라는 행성은 모순과 재앙으로 가득하다. 저자는 물론 이런 현상들에 대한 적극적인 인식과 대책을 촉구하기 위해 이 책을 썼을 것이다. 하지만 독자들에게는 우울한 우리들의 자화상을 확인하는 것에서 문제의식을 가져야 한다.

  강제 철거에 대한 세계사적 기록은 한국이 보유하고 있다. 1988년 올림픽을 개최하기 위해 서울과 인천에 살고 있는 빈민 72만을 강제 이주시킨 기록은 영원히 기록될만한 충격적인 사례로 이 책에 소개되고 있다. 어느 나라보다도 철저하게 개인의 사유 재산에 대한 공적 제재가 빈번하고 강력한 나라 대한민국은 토지 수용과 강제 철거에 관한한 국제적 명성을 얻고 있는 것이다. 책을 읽다가 소개되는 대한민국의 사례들은 우리를 부끄럽게 만든다. 도심 재개발이나 신도시 개발로 인한 강제 철거는 21세기에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슬럼 화재 사건을 다룬 대목에 이르면 독자들의 충격은 극에 달할 것이다. 일찍 죽어버리는 개는 쓰지 않고 쥐나 고양이에게 불을 붙혀 화재를 일으키는 방법을 사용하는 대목이 바로 그것이다. 1990년대 이후 급속도로 진행되는 농촌의 파괴는 도시의 슬럼을 가속화고 있으며 도시 주변의 슬럼은 또 다른 형태로 자본의 이익에 복무하고 있다. 상하수도 문제, 인구과밀, 전기 등 공공설비의 부재 -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재앙은 계속되고 있으며 미래는 불투명하다.

  제 3 세계 도시들의 초호화 주택 단지들은 슬럼과 철저하게 단절되어 있으며 빈민들의 세금이 부유층의 공간과 설비에 투자되고 있는 현실을 폭로하고 있다. 금융 제국주의와 부패 권력, 중간계급의 헤게모니가 빚어내는 빈곤과 억압의 슬럼화는 지구의 미래를 보여주는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이 책의 저자는 이러한 최근의 지구 상황을 비교적 차분하고 객관적인 목소리로 들려주고 있다. 그래서 더욱 섬뜩한 불안감을 느끼게 된다.

  슬럼은 우리와 동떨어진 다른 나라의 특별한 상황일까? 빈부 격차의 심화, 비정규직의 확대, 고용 없는 성장, 한국형 재벌의 성장, 순환 출자 구조를 통한 비정상적인 지배구조, 계급을 고착화시키는 교육기회의 대물림, 청년실업률 급증, 사회 복지 비용의 감소 등 최근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들을 몇 가지만 떠올려 보아도 우리는 안전지대에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저자의 의도가 미래에 대한 부정적 전망이나 위협이 아니라 암울한 현실에 대한 반성과 대책 마련에 있는 것이라면 이 책을 통해 우리가 어떤 측면을 다시 돌이켜 보아야 하고 현실의 어떤 부분들에 대해 문제의식을 가지고 대책을 마련해야 하는지 자연스럽게 고민의 방향을 제시해 준다.

  서로 다른 관점에서 뜨거운 논쟁을 불러 일으켰던 이 책의 의미는 책을 읽어나가면서 현실과의 접점 속에서 찾아져야 한다. 도시 행정, 경제 개발, 정책 결정 등 다양한 분야의 관련자들에게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우리들 모두의 문제라는 인식이 우선 필요하다. 무서운 미래, 암울한 세계는 바로 지금 우리들의 현실이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으로 다가온다. 나는 지금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서 있는가? 먼 우주에서 바라보는 나의 삶과 나를 둘러싼 세계의 모습은 과연 어떠한가? 이 책은 그것에 대한 아주 작은 실마리를 제공해 주고 있어 우울하다.


080323-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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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의 겉과 속 3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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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라마를 보지 않는 이유는 재미가 없기 때문이다. 언제부터 재미가 없어졌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거실에 TV를 치우고 붙박이 책장으로 채워버렸다. 끊임없이 쌓여가는 책들이 비좁게 서서 칼잠을 자고 있지만 공간은 여전히 부족하다. TV대신 책을 보는 것이 뭐 그리 나을 것은 없겠지만 적어도 시간을 소모하고 있다는 자괴감을 갖지는 않는다.

  텔레비전이든 책이든 많은 사람들의 생활 속에 깊이 뿌리 내린 문화 현상들은 순간적인 유행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문화라고 부른다. 계층과 계급에 따라 향유하고 즐기는 문화가 조금씩 다를 수 있지만 넓은 의미에서 한 사회의 혹은 특정 민족이나 국가의 문화로정착하게 된다. 이에 비해 대중문화라는 말은 우리가 일상에서 일반 대중들의 소비적 문화 현상으로 이해한다. 상대적으로 고급문화라는 말이 성립된다면 대중문화는 예술적 가치가 뛰어나거나 깊은 사색과 통찰을 거쳐 얻을 수 있는 문화 취향과는 거리가 멀다.

  즉흥적이고 일회적이며 소모적인 현상일 수도 있고 가볍게 접근하고 누구나 쉽게 공감할 수 있다는 특징도 갖는 것이 대중문화이다. 2005년에 나온 <대중문화의 겉과 속 3>은 가장 최근에 벌어졌던 문화 현상들에 대한 보고서이다. 김찬호의 <문화의 발견>이 실제 현장 중심의 다양한 문화 현상들을 몇 가지 키워드로 풀어냈다면 강준만의 <대중문화의 겉과 속 3>은 문화 현상을 이루는 매체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시간이 흘러도 텔레비전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텔레비전이 없었던 시절에 우리는 무엇을 하고 살았을까 싶을 정도이다. 방송문화와 연예문화 그리고 인터넷 문화와 디지털기술 ․ 산업, 휴대전화 문화와 생활 ․ 소비 ․ 일상문화 등 여섯 개의 장으로 구분되어 있는 3권은 이론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시켜 나간 2권과 다르게 다시 1권처럼 현상 중심으로 초점을 바꾸었다.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던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에 열광했던 사람들의 심리, 삼순이 역할을 맡았던 ‘김선아’의 이미지, 주인공 ‘김삼순’의 행동과 대사를 살펴보는 것으로 이 책은 흥미롭게 접근한다. 하나의 문화 현상이 벌어지게 되는 것은 그것이 파괴력이 어디에서 출발하든 공감대와 내재적 폭발력을 지니게 된다. 확대 재생산 되는 과정을 거쳐 유행이 되고 하나의 현상이 되며 사람들의 생각이나 생활까지도 변화시킨다. 이것이 문화의 힘이다. 이름도 생소했던 파티쉐를 선호하는 청소년이 늘기도 했고 당돌하고 대찬 30대 솔로 여성들이 함께 울고 웃기도 했다.

  이른바 유행이라는 것은 일시적이고 소모적인 현상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당대의 시대정신이나 사회 현상을 잘 드러내는 바로미터가 되기도 한다. 최근 ‘텔미댄스’의 열풍을 보면 알 수 있다. 가볍고 경쾌한 몸짓과 반복적이고 쉽게 따라할 수 있는 리듬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온 국민을 열광시켰다. 순진하고 귀여워 보이는 소녀들의 표정과 몸짓속에 순수함과 섹시함을 교묘하게 결합시켜 놓은 박진영의 솜씨 또한 놀랍다. 하나의 현상은 감각적이고 즉흥적인 즐거움과 쉽게 결합한다.

  일본과 중국을 뒤흔들었던 한류 현상에 대한 분석과 인디 문화에 대한 고찰들은 지나간 이슈라기보다 진행되고 있는 우리들의 과제이기도 하다. 블로그나 포털 저널리즘은 유행을 넘어 댓글과 커뮤니케이션이라는 소통의 과정으로 이해하고 접근해야 한다. 온라인 게임의 강국인 대한민국의 원인과 현상들도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고 MP3 산업에 대해서도 살펴보고 있다. 여전히 지속되는 대중문화의 핵심적 요소들을 다양한 시선과 이면에 대해 고민해 보는 일은 현재를 고민하고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을 제공한다.

  4권, 5권으로 이 책은 계속해서 나올 수 있다. 현재의 관점에서 문화 현상들은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지속적으로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시 우리의 삶을 담아냈던 박태원의 소설들처럼 시대의 이 책들은 훗날 기록 필름과 같은 역할을 할지도 모르겠다. 어떤 기록도 기록자의 가치가 반영된다는 사실을 전제한다면 이것은 강준만의 눈에 비친 사회 현상들이다. 얼마나 객관적으로 - 객관적이라는 말이 성립할 수 있다면 - 분석하고 기록하느냐의 문제는 저자 뿐 아니라 독자들의 비판적 시각도 필요하다.

  하나의 사물을 다양한 각도에서 사진을 찍어내듯 수많은 사람들이 현재 우리의 모습을 다양한 매체를 통해 그리고 다양한 방법으로 담아내고 있다. 그 속에서 우리는 어떤 태도로 현재와 미래를 바라보아야 하는 것일까? 이것은 개인의 선택이기도 하지만 거시적 관점에서 미래의 아젠다를 만들어가는 일이기도 하다.

  특히 확고하게 자리잡은 휴대전화 문화는 눈여겨 볼만했다. 메시지에 열광하는 사람들과 생활이 되어버린 아이들, 카메라폰이 바꾸어 버린 세상의 모습은 심각하게 우리의 모습을 반성하게 된다. 디지털 치매 현상에 대한 분석에는 고개를 끄덕이며 깊이 공감했다. 그 당사자가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기록은 기억을 지배한다고 하지만 그만큼 사람을 바보로 만들어가고 있다. ‘지식in’이 백과사전 역할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지식에 정의와 태도마저 바뀌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다.

  아무리 걱정하거나 경계해도 시대는 변하고 세대는 바뀌며 그것을 따라 대중문화가 형성된다. 다양한 이념들과 삶의 가치들이 부딪히고 조화를 이루면서 이 사회는 유지되고 지탱되어 간다. 하지만 대중들은 그 모든 현상들의 주체로서 스스로 판단하고 움직이며 이끌어 간다고 볼 수 없다. 그 현상들의 이면에 숨겨진 자본의 논리와 왜곡된 사실, 추악한 음모들을 가만히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그럴 수 없다면 우리는 눈 뜬 장님으로 혹은 무비판적 소비재로 활용될 수도 있다.

  안다고 세상이 변하지는 않는다. 내 삶 속에 물들어가는 모습에 대한 반성과 작은 실천은 대중문화 현상들 속에서도 반드시 필요한 자세이다. 그것이 어디쯤에 멈출 것인지, 어떤 태도와 반응을 보일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내가 수용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대중들 각자의 몫이다. 책임 회피가 아니라 주체적 자각의 필요성을 말하는 것이다.


080322-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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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 읽기의 혁명 - 개정판
손석춘 지음 / 개마고원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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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7년에 6개월간 한겨레 신문 독자 모니터링을 했다. PDF파일 형식의 편집 상태 신문이 전송되면 신문을 보듯이 클릭해서 관심있는 기사를 보면 된다. 내가 클릭하는 순서와 기사의 내용이 모니터링 되는 것이다. 신문사에서는 어떤 편집에 따라 독자들의 기사 선호도와 관심 정도가 달라졌는지 확인했을 것이다. 때로는 같은 내용을 따른 편집으로 보여줄 때도 있었다. 먼저 클릭하는 기사의 내용이 달라지고 관심도도 조금 변하게 된다. 이것이 편집이다. 같은 기사 내용에 가치가 개입되어 현실이 재단되며 표제에 따라 여론이 춤을 춘다.

  내가 처음 본 신문은 동아일보였다. 물론 부모님의 선택이었고 신문과 뉴스 내용이 내겐 세상의 전부였다. 우리는 그렇게 세상에 눈을 뜨기 시작한다. 지금도 아이들은 부모님이 보는 신문과 TV의 뉴스를 통해 세상을 바라본다. 그것이 어떤 내용이든 의심 없이, 마치 종교의 경전처럼 한 치의 의심도 없이 굳게 믿는다. 그것이 내가 세상을 배운 방식이고 아이들이 세상을 배워나가는 기준이다. 물론 지금은 인터넷 매체의 발달로 예전과는 사뭇 다른 양상이기는 하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신문과 TV 뉴스의 영향력은 줄어들지 않았다.

  조선일보를 본 기억은 없고 이후 중앙일보와 한국일보 그리고 최근에 매일경제를 보시는 부모님의 성향은 일반적인 보수성향이라고 볼 수 있다. 조선일보만은 안 된다고 외쳐서 그런지 적당한 선에서 타협을 하신 것인지 알 수 없지만 경향신문이나 한겨레를 권하는 것은 무리인 듯싶다. 어떤 신문을 보느냐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아니, 어떤 성향의 신문을 보느냐가 중요하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신문의 성향과 논조대로 세상을 바라본다. 자신도 모른채 무슨 색이 들어간 안경인 줄도 모르고 투명하게 바라본다고 믿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쉽게 신문은 다 똑같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관연 그럴까? 손석촌의 <신문 읽기의 혁명>은 세상 읽기의 혁명이다.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현재 하고 있는 일에 대해 말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종류의 책보다 실감나게 읽힌다. 게다가 기자의 글솜씨가 아닌가. 가독성이 극대화되어 어렵고 비판적인 이야기도 술술 넘어간다. 사실 어려운 이야기는 없다. 신문을 둘러싸고 있는 권력과 자본의 먹이 사슬에 관한 냄새나고 지저분한 역학 관계에 대한 새로울 것도 없는 분석이다.

  이 책은 청소년들에게 권할 만하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부모들이 보는 신문이나 자기가 접하고 있는 세계가 전부인 것으로 생각하는 청소년들에게 사물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열어 줄 수 있겠다. 현상과 본질의 차이에 대해 아무리 설명을 듣고 책상머리에서 고민해보아도 쉽게 답은 찾아지지 않는다. 직접 부딪히고 경험해 보아야 한다. 한계가 있다면 간접 경험을 통해 그것이 가능하겠다. 신문만큼 좋은 간접 경험은 없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널리 읽혔겠지만 지속적으로 재개정판이 나오고 후속편도 나왔으면 좋겠다.

  이 책의 초점은 한 곳에 집중되어 있다. 바로 ‘편집’이다. 기사의 내용과 취재 과정 그리고 취재원이나 기사문 작성과 같은 표면적인 이야기들은 거의 다루어지지 않는다. 쉽게 말해 내용면에서 기사문의 형식과 글쓰기에 관한 정보를 접하려는 독자는 큰 코 다치겠다. 이 책은 철저하게 기사 작성 너머의 풍경을 조망하고 있다. 취재가 아닌 편집의 중요성과 절대성에 대해 다루고 있는 책이다. 기사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편집을 알아야 비로소 기사가 보인다는 것이다. 좋은 기사가 나와야 하고 신문은 기본은 취재에서 출발한다고 믿는 많은 독자들에게 이 책은 신문에 대한 패러다임의 전환을 요구한다.

  손석춘은 그 명백한 증거들을 실제 신문 기사와 조선, 동아, 중앙, 한겨레를 통해 실증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1997년에 나온 초판에 비해 2003년에 나온 개정판은 사료로서의 가치가 존중되고 시대에 뒤떨어진 기사들은 교체되어 조화를 이루고 있다. 신문 기사처럼 시대의 변화와 시간의 흐름에 허망함을 느끼는 것은 많지 않을 것이다. 매일 지나간 과거를 써나가는 기자들의 고통과 애환 그리고 치열함을 충분히 읽어낼 수 있다는 점도 현직 기자가 출신의 저자가 쓴 이 책의 장점이다.

  책의 구성은 네 부분으로 간단하게 나누어져 있다. 신문의 편집이 무엇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으로 지면은 평면이 아니라 입체라는 것, 사설을 읽어야 편집이 보인다는 것, 신문 지면은 살아 숨쉬고 있다는 것을 순서대로 보여주고 있다. 제목처럼 신문 읽기의 혁명이 아니라 신문의 제작과정과 편집과정을 제대로 알고 읽으라고 기자의 안타까운 외침이다. 그래서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유효한 책이다. 내 생각의 절반을 내가 보는 신문에게 빚지고 있다면 얼른 이 책을 뒤적여 봐야할 것이다.

독자 자신이 주체적으로 시시비비를 가리며 읽어야 한다. 독자 개개인의 입장에서 신문을 재편집할 때 지면 읽기란 신문 편집자와 한 판 장기를 두는 것과 같다. 상대방이 둔 수를 보며 그 의중을 읽어야 하기 때문이다. - P. 280

  책을 읽다보면 저자의 의도는 쉽게 짐작된다. 한겨레 노조위원장을 거친 저자의 이력이 말해주듯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재벌 신문들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책이기도 하다. 눈뜬  장님으로 살아가거나 그것이 자신의 계급의식이나 삶의 형태와 상관없이 신문사의 의도대로 세뇌되어 있는 사람들에게 울리는 경종이다.

  하나의 사물을 바라보는 서로 다른 관점들을 가지고 대립하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상대방을 인정할 줄 모르는 태도일 것이다. 동일한 사건을 두고 표제를 뽑는 방식도 의도도 다르다. 사설부터 기사의 배치에 이르기까지 의도적이고 계획된 편집들은 여전히 자본의 논리와 사주의 이익에 철저하게 복무하고 있으며 재벌 광고주의 이익과 권력 앞에 비참한 모습으로 무릎 꿇고 있다. 현대사의 굴곡에 따라 변신로봇처럼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었던 각 신문들의 실체를 우리는 여전히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다.

  인터넷 포탈 사이트나 인터넷 신문 매체로 인해 종이 신문의 발행부수나 위력은 전에 없이 약화되었다. 하지만 매체가 달라졌을 뿐, 우리가 인식하는 현실의 모습과 그것을 바라보는 방식에는 큰 변화가 없어 보인다.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신문 읽기의 혁명 뿐만 아니라 매체 읽기의 혁명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는다.

080319-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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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론을 따라 1면 머리기사가 정해지기도 하지만 신문의 머리기사에 따라 여론이 흘러가는 경우가 더 많다는 사실에서 그 의미를 실감할 수 있을 터이다. - P. 16

삶의 현실과 신문 지면 사이에 불가피하게 놓이게 된 여과장치가 바로 편집인 셈이다. - P. 23

가치판단이 빠진 편집이란 애초부터 성립 자체가 불가능하다. - P. 24

신문 표제란 제목과 달리 기사를 종합하는 한편 역동적이고 구체적으로 그것을 드러내주어야 한다. - P. 63

사설을, 신문을 ‘비판적 안목’으로 읽을 수 있도록 교육하는 일대 방향 전환이 필요하다. - P. 226

독자 자신이 주체적으로 시시비비를 가리며 읽어야 한다. 독자 개개인의 입장에서 신문을 재편집할 때 지면 읽기란 신문 편집자와 한 판 장기를 두는 것과 같다. 상대방이 둔 수를 보며 그 의중을 읽어야 하기 때문이다. - P. 280

독자 한 사람 한 사람은 ‘언론기관’이라는 골리앗 앞에서 대단히 무기력한 존재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독자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신문을 올바르게 읽어 나간다면 독자들은 골리앗을 쓰러뜨린 다윗이 될 수 있다. 신문을 볼 때 편집을 읽어야 한다는 이 책의 주제도 결국 다윗이 골리앗에게 던졌던 돌멩이를 독자들에게 전해주기 위해서였다. - P. 283

삶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거짓말을 대량으로 양산하는 ‘보이지 않는 권력’에 철저히 예속될 수밖에 없다. - P. 2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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