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 단 하나뿐인 이야기
나딘 고디머 엮음, 이소영.정혜연 옮김 / 민음사 / 2007년 12월
평점 :
품절


  문화와 역사를 달리하는 소설가들이 공감할 수 있는 일이 무얼까? 인류 보편적 가치나 공통 관심사를 찾아내는 일은 어려우면서 쉬운 일이다. 문학이 인간의 정서와 삶의 모습들을 반영하는 거울이라는 데 동의한다면 소설가도 동시대를 살아가는 생활인이라는 전제가 가능하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세상을 살아가면서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한 것을 글로 써야하는 것이 소설가의 의무이자 한계이다.

  남아공 출신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나딘 고디머는 AIDS라는 질병을 매개로 전세계 소설가들의 단편들을 한 권의 책으로 엮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AIDS 질병 퇴치를 위한 기금 마련이다. 소설책의 판매 수익금은 전액 AIDS의 예방과 치료를 위해 쓰인다. 다섯 명의 노벨 문학상을 포함해서 스물 한 명의 소설가는 이에 동참했고 자신의 작품 중 책의 제목처럼 <내 인생, 단 하나뿐인 이야기>들을 풀어 놓는다.

  이 책 한 권을 통해 아서 밀러, 가브리엘 마르케스, 살만 루슈디, 주제 사라마구, 귄터 그라스, 존 업다이크, 미셀 투르니에, 수전 손택, 오에 겐자부로 등 살아있는 세계 문학의 거장들을 만날 수 있다. 이런 기획물의 경우 잡탕찌개 같은 느낌을 줄 수 있는 우려가 있다. 예를 들어 시인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시인들의 시를 모아 책을 낸다. 그런 책은 나도 몇 권 쯤 낼 수 있지만 시를 고르는 안목과 개인적인 감상과 해설이 기존 작가의 권위에 기대고 있기 때문에 크게 의미가 없다. 이 책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이런 종류의 책은 손이 잘 가지 않는다.

  다만 책이 가지는 선한 의도와 모여 있는 소설가들이 주는 무게의 유혹을 떨치기 힘들었다. 하나 하나의 단편들은 잘 차려진 뷔페처럼 특별한 맛을 보여준다. 너무 짧아 맛을 보기도 전에 다른 요리로 넘어가는 아쉬움이 있지만 각각의 단품들이 품어내는 향기와 빛깔은 먹을만 하다. 그러고 나면 전체적인 조화의 문제가 남는다. 제목처럼 어떤 특별한 이야기나 한 생을 통틀어 단 하나밖에 없는 특별한 이야기들로만 여겨질 수 없는 이야기도 많다. 제각각 독특한 소재와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지만 그것들이 쉽게 하나의 주제나 특징으로 묶여지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것 같다.

  4천만 명에 이르는 AIDS 환자 중 3분의 2 가량이 아프리카에 몰려있다. 생활환경과 문화 수준의 발달 정도는 자본과 직결된다. 이제 자본은 건강이며 지식이고 희망이며 꿈이 되어 버린 시대에 살고 있다. 책 한 권을 사서 몇 푼의 돈이 그들의 치료 비용으로 사용되는지 보다 항상 그들을 생각하고 배려하며 작은 실천에 옮기려는 마음이 더 중요하다. 스물 한 명의 작가들도 모두 한 마음이라고 믿는다. 자신의 자식 같은 단편 하나씩을 내놓은 마음들이 소중해 보인다.

  마거릿 애트우드의 ‘납의 시대’, 귄터 그라스의 ‘증인들’, 치누아 아체베의 ‘설탕쟁이’, 나딘 고디머의 ‘최고의 사파리’는 사회성 짙은 작품들로 시대의 아픔이나 역사적 체험들을 통해 지나간 시간들 혹은 현재의 고통들을 진지하게, 때로는 유머스럽게 잘 표현하고 있는 작품들이다. 어떤 시대, 어떤 환경이든 작가는 늘 문제적 상황들에 대한 고민과 동시대인들의 아픔에 대해 관찰하고 그것을 잘 표현해 낼 줄 아는 능력을 지녀야 한다는 평범한 생각을 해 본다.

  이에 반해 아서 밀러의 ‘블도그’, 하니프 쿠레이시의 ‘마침내 만나다’는 현대인들의 일상에서 마주칠 수 있는 문제들을 재미있게 그려내고 있다. 무겁고 진지한 주제에 반해 재밌고 흥미있는 소재로 이 책의 다양성을 확보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다른 작가의 작품들도 신선하고 독특한 이야기들이 많지만 기억나는 몇 편의 작품들이다. 개인적인 취향이기 때문에 사회문화적 환경이 다른 작가의 다양한 작품들을 하나씩 음미하는 즐거움이 남다르다.

  소설은 현실의 고발이거나 생활 속에 숨겨진 삶의 은유이거나 역사적 반성이거나 미래에 대한 희망일 수 있다. 소설의 기능이 무엇이든 사람들은 그것을 통해 울고 웃고 눈물을 흘리거나 꿈을 꾼다. 이 책 한 권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그럴 것이다. 잡다한 단편들의 묶음이 아니라 여러 나라의 작가들이 같은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하며 읽어 볼 일이다. 오에 겐자부로를 제외하고는 동남아시아와 아랍권의 작가들이 빠져 있어 아쉽기는 하지만 지역적 균형에 큰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 다함께 꿈꾸고 힘을 모으려는 의도와 나딘 고디머의 수고와 여러 작가들의 단편이 빛을 발하기만 한다면 문학 외적 요소나 의미를 차지하고서라도 우리는 재미있는 단편집과 만날 수 있게 된다.


080208-01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무함마드와 예수 그리고 이슬람 - 이슬람과 그리스도교, 그 공존의 역사를 다시 쓴다, 비움과 나눔의 철학 3
이명권 지음 / 코나투스 / 2008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서쪽 하늘을 빨갛게 물들이는 저녁놀이 아름답다. 자연이 빚어내는 환상은 우리가 벗어나기 힘든 인간의 한계를 절감하게 한다. 만일 신이 존재한다면 그에게 감사하겠다. 인간이 이해하지 못하는 근원적인 문제들과 본질적인 의문들의 열쇠를 단 하나의 존재에게 의탁하는 일은 나약한 이기심의 발로이다. 신의 존재를 설정하고 나면 참 많은 문제가 해결된다. 부조리한 세상과 불공평한 인생도 달리 보이고 현실의 고통까지도 참을 수 있다. 내세와 천국이 우리를 인도하여 영생의 길로 이끌어줄 것이기 때문이다.

  단순하게도 나는 <왜 세계의 절반은 왜 굶주리는가?>와 같은 책을 읽으면서 신의 존재를 부정한다. 종교가 없는 유물론자가 신의 존재 여부를 논쟁하거나 증명하는 책에 관심을 가질 리 없다. 다만 신이 갖는 의미와 역할은 다른 문제이다. 엄연히 종교를 믿는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면서 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하지만 담임 목사 1인 체제로 공룡처럼 덩치만 키우는 대형 교회나 좋은 돈벌이 수단으로 절을 사고 파는 사람들이 과연 종교인의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는 의문스럽다. 어디에나 빛과 그림자가 있기 마련이지만 종교를 제대로 알고 있는지 종교인의 역할과 신도들은 석가나 예수, 무함마드의 말씀과 신의 가르침에 따라 살아가고 있는지 반문해본다.

  그래도 문제는 남는다. 신의 존재 유무는 차치하고서라도 신의 종류를 가지고 싸우는 것이 인간 종족이다. 전 인류의 20% 이상이 믿는 종교인 이슬람은 소수 종교가 아니다. 유대교나 그리스도교에 비해 역사와 전통, 신도 수에서 결코 2등 종교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슬람교에 대한 많은 편견을 가지고 있다. 테러리스트를 먼저 떠올리고 호전적이고 폭력적인 이미지의 아랍인을 연상한다. 종교에 대한 배타적 태도를 갖지 않고 있다면 이슬람과 그리스도교를 비교하고 무함마드와 예수를 견주어 보는 노력과 올바른 이해가 필요하지 않을까?

  이명권의 <무함마드와 예수 그리고 이슬람>은 이러한 의문들에 답하는 좋은 안내서이다. 특정 종교에 대한 비교 우위를 논하는 책도 아니고 복음을 전파하거나 선교를 위한 책은 더더욱 아니다. 제목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우리가 지금까지 오해하고 있는, 혹은 잘 알지 못하는 무함마드의 존재와 이슬람이라는 종교에 대한 해설서이다. 무함마드와 예수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확인하는 것은 두 종교를 이해하는 초석이 된다. 이 책은 크게 2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1부에서는 무함마드와 예수를 비교하고 이것을 토대로 2부에서는 이슬람이라는 종교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특정 종교의 입장에서 치우친 견해를 밝히거나 오호의 감정이 개입되었다면 나는 이 책을 끝까지 읽지 않았을 것이다. 비교적 객관성을 유지하면서 일반적으로 모르고 있는 내용에 대한 안내와 잘 알려진 예수를 비교함으로써 이해의 폭을 넓혀주고 있는 책이다.

문제는 구원의 주체가 누구이며, 구원의 중개자가 누구인가 하는 소위 메시아에 대한 개념에서 이들의 신앙은 달라지고 만다. 무함마드는 어디까지나 알라-하나님의 사도로서의 역할만 할 뿐이지만, 신약성서와 그리스도교에서의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성육신한 세상의 메시아이자 삼위일체의 존재로 평가된다. 이른바 예수는 하나님과 같은 위치를 지닌 구세주로서의 신앙의 대상이 된다. - P. 155

  유대교, 이슬람교, 그리스도교에서 믿는 신은 모두 하나님GOD이다. 십자군 전쟁을 위시해서 종교 전쟁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와 그 궤를 같이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의 가르침과는 모순된 논리지만 인류는 종교의 이름으로 전쟁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았다. 믿는 것은 하나인데 그들끼리는 싸운다. 초등학생에게 물어 답이 나오지 않으면 그것은 상식에 위배된다고 나는 믿는다. 물론, 교리상의 차이와 신의 말씀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차이가 벌어지고 갈등과 반목이 생겨났다고 해도 종교의 근본 원리나 목적에 부합하지는 않는다.

  무함마드를 사도(예언자)로 규정하여 일위일체만을 인정하는 이슬람교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규정하여 삼위일체론을 펼치는 그리스도교는 출발부터 다를 양상을 보인다. 무함마드와 예수의 존재를 어떻게 규정하느냐가 바로 두 종교를 바라보는 관점과 해석의 틀을 달리한다. 핵심적인 차이점이 드러냄으로써 유사성은 묻혀버리고 만다. ‘라 일라하 일랄라La ilaha illa Allah’ 즉, ‘알라 외에 다른 신은 없다’는 <꾸란>의 가르침은 이슬람이라는 종교의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각종 <복음서>들이 전하는 말씀과 무함마드의 <하디스>는 두 종교의 차이점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쉽게 말해서 무함마드는 인간이고 예수는 신이다. 이슬람의 입장에서 예수는 인간이고 사도(예언자)일 뿐 신이 아니라는 말이다.

  ‘신앙고백, 공식예배, 자선, 단신, 순례’의 다섯가지 기둥이 이슬람교를 버텨내고 있다. 이슬람의 역사와 경전인 <꾸란>의 내용을 살펴보면서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인 차이점으로 받아들인 점은 ‘자선’이다. 예수는 마음을 중시했고 의도를 중시했지만 이슬람에서 ‘자선’은 의무사항이다. 명목상 십일조를 통해 가난하고 고통 받는 자를 돕고 있지만 강제 사항은 아니라는 것이 필자의 해석이다. 반면에 이슬람교는 ‘자선’이 거역할 수 없는 의무사항에 해당된다. 최근 사찰이나 교회, 목사 등 납세 문제가 언론에서도 다루어지고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나눔의 역할과 순수한 종교의 목적에 충실한가를 따져보는 일이다. 대다수의 종교인들이 이러한 가르침에 충실하며 사회의 어둠과 그늘진 곳을 보살피고 있겠지만 과연 ‘대다수’라고 말할 수 있는지 반성해 보아야 한다.

  이영희 선생은 한국 교회는 ‘모이자! 돈내라! 집짓자!’는 세 마디로 실날하게 비판한 적이 있다. 특정 종교에 대한 비난이 아니라 우리나라 교회에 대한 반성의 목소리였을 것이다. 서방 언론에 의한 이슬람이라는 종교에 대한 편견을 버릴 수 있는 마음의 자세가 갖추어졌다면 이 책은 우리에게 읽을 만한 길잡이가 될 것이다. 무함마드와 예수가 누구인지 보다, 이슬람이라는 종교가 어떤 종교인지 보다 여전히 그것들이 우리의 삶을 어떻게 영향을 미칠 것이며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과 반성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080205-01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녀의 눈물 사용법
천운영 지음 / 창비 / 2008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가 살아가는 동안 가장 자주 느끼는 감정은 기쁨보다 슬픔일 것이다. 문학은 기본적으로 아픔과 고통, 후회와 절망으로 버무려져 있다. 말할 수 없는 기쁨과 환희의 순간을 시나 소설로 기록하고 싶은 욕망을 느끼는 작가는 많지 않다. 쉽게 말해 사랑할 때 보다 이별 후에 우리는 일기를 쓰거나 편지를 쓰고 내면의 풍경을 돌아보게 된다는 말이다.

  천운영의 소설집 <그녀의 눈물 사용법>은 지나치게 속물적인 제목이다. 소설이라는 장르의 출발 자체가 고급문화와는 거리가 멀지만 유행가 가사같은 제목으로 일단 주목을 끌기에 충분하다. 대중적이라고 해서 모두 비속하거나 예술적이라고 해서 전부 난해하고 어려운 것은 아니다. 모든 작가들의 영원한 숙제인 예술성과 대중성의 절묘한 조화는 이루어내기 어려운 경지임에 틀림없다. 천운영의 소설집은 제목으로 판단컨대 충분히 대중적이다.

  이렇게 속단하고 책을 구입한다면 후회하기 십상이다. 그의 전작들을 읽어본 독자들이라면 그런 실수를 하지 않겠지만 처음 대하는 사람들이라면 애절한 연애소설 쯤으로 짐작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의도야 어찌됐든 천운영의 소설은 이전에 그녀가 보여주었던 이야기들에서 한 발 내딛고 있지만 커다란 범주에서 보면 그녀만의 색깔을 완고하게 고집하고 있다. <바늘>과 <명랑>을 통해 내가 만났던 그녀의 모습은 이번 소설집에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하나의 세계를 구축하기 위한 과정일 수도 있고 하나의 세계를 깨뜨리기 위한 과정일 수도 있다.

  여러 평론가들과 독자들의 충분한 주목을 받을 만큼 그녀의 소설들은 매혹적이었으며 특별했고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것은 그녀의 글에 묻어나는 도발적인 시선 때문이었고 길들여지지 않은 외로움과 자유로운 상상 때문이었다. 여성성을 폭력적으로 드러냈던 단편들과 집요하고 치밀한 관찰의 결과물들을 세세한 묘사를 통해 보여줬던 단편들이 사실적이면서 독자들에게 불편한 진실들 적나라하게 까발리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현실에 대한 충실한 보고서일 수도 있고 감추어진 진실과 드러나지 않는 시선에 대한 거울의 역할을 하기도 하는 것이 작가이다. 천운영은 삶이 드러내는 우울과 고통을 드러내는 다양한 방식을 통해 독자들을 불편하게 한다. 끔찍하거나 잔인하기 때문에 눈감아 버리고 싶은 현실이 아니라 쉽게 감지되지 않는 영역들과 굳이 관심을 가지고 싶지 않은 것들에 대해 천착하는 태도는 그녀를 다른 작가들과 구별짓게 한다.

  단편 ‘소년 J의 말끔한 허벅지’는 2007년 이상 문학상 수상 후보작으로 먼저 만났다. 노파의 누드를 찍는 소년을 본 작중 화자의 느낌은 지독한 편견과 독선에 대한 허망한 패배처럼 보인다. 카메라의 피사체를 통해 자신을 드러내는 작가의 시선은 프레임 안에 고정될 수밖에 없다. 장록 속에서 죽어가는 아이의 숨소리가 귀에 들릴 듯한 ‘그녀의 눈물 사용법’은 영과 육의 문제가 아니라 삶의 부조리가 빚어내는 아픈 상처에 대한 이야기로 읽었다. 세상은 결코 공평하지도 순수하지도 않다. 누구나 장롱 속에 감추어 둔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 그것이 눈물을 유발하는 요인일 수 있지만 구체적인 사용법을 알려주는 것은 물론 아니다.

‘알리의 줄넘기’는 혼혈 2세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어디선가 읽었는데 기억이 나질 않는다. 1인칭 화자인 여자 아이 알리는 유머를 잃지 말라는 아버지의 말을 기억한다. ‘내가 데려다 줄게’는 태생적 소수자인 알리와 다르게 사회적으로 매장당한 사람이다. 억울함을 풀기 위해 자살을 결심한 사내를 통해 우울한 삶의 단면을 드러낸다. ‘노래하는 꽃마차’와 ‘후에’에서는 가족 구성원의 부재를 통해 결핍된 인간의 모습을 보여준다. ‘내가 쓴 것’과 ‘백조의 호수’는 오히려 완벽해 보이는 인물의 이면을 들춰낸다.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사이의 경계를 넘나들며 표현하기 어려운 미묘한 감정들을 섬세하게 묘사한다. 거칠게 보이지만 그녀의 솜씨는 고통의 흔적이며 상처가 만들어낸 선명한 생채기의 모습이다.

  또 하나의 세계를 넘어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릴 수도 있고 지금까지 보여줬던 모습을 더욱 구체화할 수도 있겠지만 천운영은 이제 한 걸음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싶다. 감추어진 욕망과 그것이 욕망인 줄도 모른 채 억압된 것들에 대한 고단한 열망들을 보여줬다면 이제 그것들을 안아줄 수 있는 여유과 작은 희망의 씨앗들을 심어야 하지 않을까? 버려진 것들이 아니라 낮은 곳에 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와 아픔을 보여줬으니 이제 그들과 함께 할 수 있는 혹은 그 이전의 모습들이 간직한 꿈과 만나고 싶다.

  ‘바늘’에 찔릴 것 같은 예리함과 섬세함으로 무장한 그녀의 문장들이 어떤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것인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새로움과 특별함에 대한 강박증을 벗고 독자들도 그녀의 색다른 모습들을 기대하고 있을 것이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빛과 밝음의 세계에 식상한 독자들에게 천운영의 소설은 별미와 같다. 그 독특함을 기대하는 독자이거나 또 다른 모습을 기대하는 독자이거나 <그녀의 눈물 사용법>은 대조적인 관점으로 읽혀지겠다.


080203-01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려올 때 보았네
이윤기 지음 / 비채 / 2007년 10월
평점 :
품절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고은의 시 ‘그 꽃’ 전문이다. 시는 누구에게든 강렬하고 매혹적인 인상을 남긴다. 개인적인 친분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이윤기는 고은의 시 한 구절을 그의 책 제목으로 삼았다. 나이와 세월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니지만 이 짧은 시는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인생을 살만큼 살아본 경지가 아니면 쉽게 뱉어낼 수 없는 언어이다. 많은 함의를 지닌 시는 여러 사람에게 다양한 울림을 주고 변주된다. 승리와 패배, 젊음과 늙음, 기쁨과 슬픔 등 상승 곡선과 하강 곡선의 끊임없는 교차가 이루어지는 것이 인생이라면 우리는 어느 한 시기에서든 이 시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깨닫게 된다.

  개인적으로 나는 산문집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이유는 단순하다. 산문집은 누구가 쓸 수 있고 쓰는 사람마다 다양하며 특별한 이야기들을 담아낼 수 있다. 우리가 흔히 수필이라고 하는 가장 어려운 장르의 글을 가장 편안하게 묶어내는 방식이 바로 산문집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잡다한 이야기와 번다한 말들로 개인의 감정을 포장하거나 거추장스런 이야기들을 담아내는 포장지로 손쉽게 이용되는 산문집은 별로 내키지 않는다. 남의 일기장을 들여다보는 기분이 들 때도 있고 주관적 관점과 감상이 한 권 넘치게 흐르는 것도 반갑지 않다.

  다만 특정한 분야에서 혹은 색다른 이야기들을 재미있게 들려줄 자신이 있을 때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성석제의 이야기 박물지 <유쾌한 발견> 같은 경우가 그러하다. 혹은 김현의 <행복한 책읽기>가 그러하다. 개인적인 취향이기 때문에 산문집은 보다 보편적인 정서를 이끌어 낼 수 있는 일상의 이야기들이나 공통 관심사를 가진 분야의 이야기들이라면 다른 어떤 책보다 재밌을 수 있다. 이윤기의 산문집 <내려올 때 보았네>는 고은의 시 구절을 제목으로 달았지만 탈속의 경지를 보여주는 내용으로 묶일 수 없는 것들이 많다.

  <그리스 로마신화>나 <그리스인 조르바>의 번역가로 먼저 떠오르는 이윤기는 소설가이면서 신화학자이기도 하다. 조희봉의 <전작주의자의 꿈>을 보면 이윤기에 대한 저자의 각별한 애정을 확인할 수 있다. 그의 소설과 산문은 물론 무려 200여권이 넘는 번역서를 모두 구해서 읽는 전작주의를 실현하려는 책벌레 조희봉의 특별한 이야기가 생각난다. 사적인 부분에 대한 궁금증보다는 그가 번역서나 소설에서 못다한 이야기들이 궁금했다.

  산문집에서는 한 사람의 진솔한 모습들이 그대로 드러난다. 솔직하지 못한 글도 있을 수 있겠지만 하나의 사건이나 평범한 사물을 대하는 태도를 통해 우리는 저자의 인간적인 모습을 적나라하게 확인한다. 이윤기도 마찬가지다. 생활인으로서 그가 보여주는 모습과 주변 사람들 그리고 여행을 통해 그가 만났던 사람들의 이야기는 새로움이라는 측면보다 인간 이윤기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주는 역할을 한다.

  한 분야를 올곧은 태도로 평생 투자한 사람의 여유와 신념을 엿볼 수 있는 이윤기는 뚜렷한 사회적 신념이나 문학에 대한 분명한 색깔을 드러내는 작가라고 볼 수 없다. 다만 책에서 언급한대로 명창들 앞에서 노래 부르는 것을 주저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고 온전히 제 목소리를 낼 줄 아는 열정과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을 가진 작가이다. 글과 책을 통해 세상과 만나고 사람을 사귀었고 올라갈 때 보이지 않던 꽃이 보이기 시작하는 시점에 이르렀다. 저자를 이렇게 표현한다면 일면의 모습으로 전체를 판단하는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사람을 어떻게 한 두 마디 말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나와 생각이 같은 부분도 있고 다른 부분도 있는 것이 사람이다. 타인과의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공감대이며 소통할 수 있는 열린 마음의 자세이다. 이윤기는 적어도 마음이 열린 사람인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다. 베트남 전쟁에 참전한 것에 대한 소회나 일본에 대한 태도에서 개인적으로 못마땅한 부분이 있다. 하지만 나름의 방식대로 세상을 살아가는 우직한 태도는 눈여겨 배울 만한 부분이다. 동시대의 작가를 이해하고 그의 작품들을 이해하는 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를 이해하는 좋은 방법 중의 하나이다.

  각자가 모두 자신의 노래를 분명하고 자신 있는 목소리로 부를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행복의 문을 열게 된다. 백인백색이지만 나름의 방식대로 신념과 목적을 가지고 부른다면 일단 희망이 보이는 것이 아닐까? 물론 나만의 노래가 소음과 공해가 되지 않도록 나와 너의 관계를 즐겁게 하고 모두 함께 부를 수 있는 합창이 되도록 노력해야 하는 것은 한 사람의 노력만으로는 불가능하다.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내가 부를 수 있는 노래를 제대로 부를 수 있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을 잠시 해 보았다. 나는 지금 올라가고 있는지 내려가고 있는지 조차 분간할 수 없을 때가 많다. 바람의 숨결과 나무의 손길, 꽃의 아름다움이 눈에 보이기 시작하는 것은 나이 들어감의 증거가 아니라 또 다른 눈을 뜨기 시작했다는 증거라고 믿는다.


080201-013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깐따삐야 2008-02-01 22: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이 책 가지고 있어요. 이윤기 할아버지 넘 좋아요.^^

sceptic 2008-02-02 12:17   좋아요 0 | URL
^^ 네...훌륭한 번역가로 기억에 남는 소설가로 남으시겠지요...
 
박노자의 만감일기 - 나, 너, 우리, 그리고 경계를 넘어
박노자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8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일기의 목적은 무엇일까? 일기는 독자를 전제로 하는가? 일기의 목적은 일차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객관화하는데 있다. 스스로의 감정과 정리되지 못한 상념들을 적다보면 머릿속에 얽힌 실마리를 풀어낼 수 있다. 일기를 객관적으로 적다는 것은 형식에 대한 모순이다. 주관적인 감상과 생각들을 거침없이 솔직하게 풀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글로 표현하는 과정에서 모호했던 느낌과 자신의 태도를 스스로 점검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나는 책을 통해 독서일기를 쓴다. 그러면서 내가 누구인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끊임없이 반성하고 사유한다. 도구와 방법은 다르겠지만 모든 사람은 그렇게 자신을 돌아보며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독자의 문제를 살펴보자. 일기는 스스로 살아온 날들의 기록이며 자신이 보고 듣고 느낀 것들에 대한 하루하루의 역사이기도 하다. 개인의 일상이든 사회적 현상이든 누적된 기록은 기억을 지배하고 하나의 흐름과 관점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예전처럼 펜으로 종이에 적는 형식에서 벗어나 블로그 등 사이버 공간에 공개된 일기는 예상 독자를 염두에 두고 있다는 특징을 지닌다. 지극히 사적인 일기의 내용과 형식이 자유로운 소통의 형태로 공유된다면 통상적인 의미의 일기와는 성격이 달라진다.

  특히 글을 쓰는 작가나 연구하는 학자, 기자, 연예인 등 공적인 활동을 하는 사람들의 일기는 책으로 출판되거나 직간접적으로 독자를 염두에 둔 글쓰기의 형태이다. 정해진 틀에서 벗어나 보다 자유롭게 혹은 자기 검열을 거치지 않은 글이기 때문에 생생하고 과격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책임을 면하기는 어렵지만 어쨌든 단순하고 거친 생각의 표현과 만나는 일이 독자들에게는 또 다른 즐거움 일 수 있다.

  이제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한국인 <박노자의 만감일기>는 또 하나의 사회비평서이면서 박노자의 일상사까지 조금은 들여다 볼 수 있는 책이어서 신선하다. 일기의 내용이 신변잡기적인 것이 아니라 나를 중심으로 우리, 국가와 민족 그리고 그 경계 넘어 통찰하고 있기 때문에 타인의 사생활을 들여다보는 즐거움이 아니라 미처 생각해 보지 못한 것들에 대한 아픈 성찰이 드러난다. 때로는 분노와 격정을 섞어 때로는 차분한 반성과 이성적 판단이 드러나는 사색적이고 거시적인 안목이 돋보인다.

  박노자는 스스로 사회주의적 지향점을 지닌 사람이다. 1인 독재나 공산당의 이름을 빌려 국가 권력을 휘둘렀던 스탈린의 방식이 아닌 진정한 사회주의자이다. 이상적인 꿈에 불과하다고 패배주의적 비판을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가 현실 속에서 바꿔나가야 할 부분들이 너무 많다. 지배계급들의 잘못된 행태와 권위주의, 비정규직과 소수자들의 아픔들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오슬로에서 생활하면서 한국과 비교되는 장점들, 모국이었던 러시아의 상처들도 박노자의 직접 체험에 의해 생생하게 묘사되고 있다.

  우리는 21세기를 살아가고 있지만 근대적 물신주의와 신자유주의의 거센 물결에 부대끼고 있다. 더불어 함께 사는 행복, 타인에 대한 배려, 소수자에 대한 희생 등 사회적으로 추구해야 할 가치에 대해 대체로 무심하다. 이기적 가족주의에 매몰된 채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들이 처절하기까지 하다.

“아무생각 없이 생활하는 일상 생활, 그것이 악의 근원이다.”라고 말한 한나 아렌트의 말을 곱씹어 본다. 악의 평범성과 일상성에 대한 반성이 없다면 우리는 긍정적인 사고방식의 환상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무엇이 잘못되었는가에 대한 통렬한 반성과 내가 살아가는 태도와 나의 사유 방식에 대한 점검이 왜 필요한지 박노자는 묻고 있는 듯하다. 벽안의 러시안이 한국인으로 귀화하여 바라보는 관점이 객관적일 수만은 없을 것이다. 항상 스스로를 타자라고 생각하는 저자의 목소리는 우리에게 아픈 성찰의 시간을 제공한다.

  주류 사회의 아비투스를 향해 부나비처럼 맹목적으로 덤빌 일이 아니다. 우리 스스로 삶의 주인이 되어 나를 넘어 경계를 허물고 모두 함께 꿈꾸고 변화의 노력을 시작할 때 분명, 미래는 다른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라고 믿는다. 박노자도 그런 고민과 사유의 자락들을 일기에 적고 있다. 나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서 소통은 시작된다. 세상에는 나와 다른 수많은 ‘나’가 존재한다. 그들을 어떻게 인식하고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세계의 변혁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까?

  종교나 학문을 통해 혹은 독서와 명상을 도구로 삶이란 무엇인지 고민할 수도 있다. 사유의 방식은 저마다 다르다. 길가에 낙엽을 쓸어담는 환경미화원의 손길에서 걷지 못하는 사람을 위해 문턱과 계단을 없애는 노력으로부터 세상을 바라보는 안목을 생긴다. 철학적 사유와 예술을 통해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리 모두가 꿈꾸는 세상이 어떤 곳이어야 하는지 인류는 참 오랜 시간 동안 고민해 오고 있다. 박노자와 같은 개인적 고민들이 사회적 고민으로 확장될 때 공적인 일기나 책읽기는 의미를 지니게 된다고 믿는다. 일기를 통해 그리고 책을 통해 조금씩 변화해가는 사람들의 마음 언저리를 생각해 본다. 미래에 대한 낙관적 전망과 세상에 대한 믿음은 사람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된다. 언제든 우리는 시작할 준비가 되어 있다. 한 걸음 앞으로 내디딜 마음의 준비가.

080130-01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