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절하게 참 철없이 - 2009 제11회 백석문학상 수상작 창비시선 283
안도현 지음 / 창비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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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소원

적막의 포로가 된다는 것

궁금한 게 없이 게을러지는 것

아무 이유 없이 걷는 것

햇볕이 슬어놓은 나락 냄새 맡는 것

마른풀처럼 더이상 뻗지 않는 것

가끔 소낙비 흠씬 맞는 것

혼자 우는 것

울다가 잠자리처럼 임종하는 것

초록을 그리워하지 않는 것


  한 시인의 시집을 읽는다는 것은 그의 한 시절과 만나는 일이다. 시인은 계절이 바뀌고 세월이 흐르며 살아온 시간들과 바라본 사물들, 떠오른 생각들로 언어의 집을 짓는다. 그것이 한 권의 시집이 되어 독자에게 읽힌다. 그래서 한 권의 시집을 읽다보면 시인의 눈이라는 렌즈를 통해 바라본 세상과 내면의 풍경들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독서가 말없는 저자와의 끊임없는 의사소통 과정이라면 시읽기는 시인의 정서와 교감하는 통음通音의 과정이다.

  특히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시인의 시집은 더욱 그러하다. 그에 대한 사전 정보와 배경지식이 있고 다른 시를 통해 그와 만난 적이 있다면 매우 친숙하고 반가운 마음으로 시인의 시를 읽게 된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는 시를 통해 널리 알려진 시인 안도현의 <간절하게 참 철없이>는 이전의 시편들에서 보여주었던 모습들과 새로움이 중첩된다. 나는 그를 첫 시집 <서울로 가는 전봉준>으로 만났다. 2004년에 나온 <너에게 가려고 강을 만들었다>에 이르기까지 안도현의 시는 변함없이 연탄불의 따스함을 바탕으로 한다. 인간에 대한 애정과 자연에 대한 따스한 시선들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에 독자들은 그 훈훈함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세상에 대한 애정없이 어떻게 시를 쓸 수 있을까마는 안도현의 시선은 여전히 축축하다. 물기어린 시선으로 때로는 나약하게 때로는 간절하게 대상을 관찰하고 훈훈한 숨결로 감싼다. 이해되기 전에 전달되는 시의 특성을 가장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는 시인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하지만 문학적 변모와 변화의 기대까지 만족시켜주지 못한다는 아쉬움은 소수 독자들의 바람일지 모르지만 아직 이른 판단이기도 하다.

병어회와 깻잎

군산 째보선창 선술집에서 막걸리 한 주전자 시켰더니 병어회가 안주로 나왔다

그 꼬순 것을 깻잎에 싸서 먹으려는데 주모가 손사래 치며 달려왔다

병어회 먹을 때는 꼭 깻잎을 뒤집어 싸먹어야 한다고, 그래야 입 안이 까끌거리지 않는다고


  이번 시집 <간절하게 참 철없이>에서도 시인 특유의 잠언투의 문장과 주관적 판단과 감성에 기댄 시선들이 여전히 매력적이다. 특히 ‘백석(白石) 생각’이라는 시를 쓸 정도로 이번 시집에는 음식에 관한 시가 많다. 사라지는 것이 모두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잊혀져가는 수많은 음식에 관한 추억과 아련한 기억들 그리고 그것을 중심으로 관계 맺었던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이 잘 나타난 시편들이 신선하게 다가온다. 익숙한 음식들인 수제비, 무말랭이, 닭개장, 민어회, 에서부터 먹어본 적도 없는 예천 태평추, 건진국수, 전어속젓, 콩밭짓거리 등 다양한 음식들이 입 안에 침을 고이게 한다. 음식은 오감을 자극하며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대상이기도 하다. 그것들을 지나간 시간들과 사라져가는 기억 속에서 아슴하게 들추어낸다. 짙은 아쉬움보다 붉은 그리움으로 다가오는 시들이 이 시집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오래된 발자국

시골 서점 책꽂이에 아주 오랜 시간 꽂혀 있는 시집이 있다
출간된 지 몇해 째 아무도 펼쳐보지 않은 시집이다
시인이 죽은 뒤에도 꼿꼿이 그 자리에 꽂혀 살아 있다
나는 그 시인의 고독한 애독자를 안다
본문은 펼쳐 읽지 못하고 제목만 뚫어지게 바라보던
날마다 시집 귀퉁이만 밟아보다가 돌아서던 그를 안다
햇볕의 발자국을 가진 사람을 안다


  그러나 세월의 흐름은 망각을 담보로 한다. 시인의 시도 잊혀질 것이고 수많은 책꽂이에 꽂혀 칼잠자는 낡은 책의 운명을 맞이할 것이다. 제각기 다른 자세와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시인들 속에서 안도현의 시가 빛을 발하는 것은 앞서 말한 대로 대상에 대한 부드러운 시선 때문이다. 따뜻하게 감싸고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낮은 목소리로 사람과 자연과 그리고 나를 사랑할 줄 아는 언어로 무장한 채 살아가는 시인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시대가 변하고 세월이 흘러도 ‘서울로 가는 전봉준’에 대한 애정과 또 다른 관심들도 이어지길 바란다. 진심으로 간절하게 나는 ‘참 철없이’ 살고 싶기 때문이다.


080127-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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찐빵 2008-01-29 1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집에서 저도 '가을의 소원'이 제일 마음에 와 닿았는데 여기도 그렿네요,
반갑습니다.
가을이 되면 친구들에게 들려주려고 아껴 두겠습니다,

sceptic 2008-01-29 22:15   좋아요 0 | URL
그렇죠...그냥 전달되는 시들은 마음이 먼저니까...공감할 수 있다면 더욱 좋구요...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 관용과 카리스마의 지도자
아드리안 골즈워디 지음, 백석윤 옮김 / 루비박스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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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인류의 역사는 인간의 욕망의 역사와 그 궤를 같이 한다. 수많은 영웅이 탄생한 것은 시대의 요구와 변화 때문이다. 특별한 능력을 지닌 개인의 노력으로 인류의 역사가 바뀌는 것은 아니다. 정치적 상황과 군사적 힘을 지닌 사람들의 능력과 판단은 대단히 중요한 역사의 흐름을 결정한다. 하지만 운명적으로 탄생한 영웅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사회와 정치적 상황을 배우고 익히며 권력과 힘의 논리를 적절하게 이용할 줄 아는 사람이 영웅이 된다. 인류 역사에 명멸했던 수많은 영웅호걸에 대한 우리의 판단과 예찬적 태도는 이미 확정된 결과에 대한 편향을 드러내는 심리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알렉산더와 더불어 유럽의 역사에서 가장 인상적인 영웅을 꼽으라고 한다면 누구나 카이사르를 떠올릴 것이다. 기원전 유럽의 역사를 풍미했던 카이사르는 우리에겐 문화와 역사적 상관 관계가 적어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적은 없겠지만 문명의 충돌과 교류 과정에서 간접적으로 그의 영향이 없을 수는 없다. 예를 들어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1년 365일인 달력을 처음 만들어 사용했던 카이사르력을 우리는 지금도 사용하고 있다. 중간에 수정보완 작업이 이루어지기 했지만. 카이사르가 제왕절개 수술로 태어났다는 어떤 증거도 발견되지 않았지만 우리는 그 유래를 카이사르에서 찾는다.

  어쨌든 한 시대를 주름잡았던 카이사르를 어떻게 규정지을 것인가는 역사가들의 몫으로 돌릴 수만은 없다. 지나간 시대와 인물들에 대한 객관적 평가가 불가능하겠지만 기원전에 살았던 인물에 대한 호기심과 그 시대의 사실에 대한 판단과 평가는 계속 될 것이다. 다만 문학가와 달리 역사가의 책은 가공의 사실을 흥미위주로 만들어 낼 수는 없는 것이다. 블랭크는 사실에 기초해서 메워질 것이며 앞뒤 상황 맥락이나 인과관계를 고려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에이드리언 골즈워디는 역사가이며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소설이 아닌 역사이다.

  일단 책의 외모를 살펴보자. <잊혀진 병사>라는 두툼한 책을 본 적이 있는데 루비박스의 의도는 분량과 단행본 그리고 책의 가격을 모두 고려해야 하는 고민을 했을 것이다. 860여페이지에 달하는 두툼한 분량의 책을 국판(152×218mm)보다 조금 작게 만들었다. 어쩌란 말인가. 책을 겨우 한 손에 거머쥐고 책장을 넘기기도 힘들다. 전체 3부로 이루어져 있으니 팔릴만한 책이면 얇고 가볍게 세 권으로 분권을 했겠지만 그 정도의 대중성을 확보하기는 힘들다고 판단했는지 외모가 조금 빠진다. 지나치게 두껍워 부담스러웠고 이럴 경우 책등이 갈라지는 현상은 필수적이다. 이에 대한 대책은 없어보인다. 갈라지면 갈라지는대로 그냥 봐야한다는 단점이 있다. 책은 일단 내용이 중요하지만 외모도 무시할 수 없다. 가독성을 고려해서 판형과 종이의 두께와 재질이 결정되고 디자인과 커버를 고려해야 한다. 개인적인 취향일 수 있겠지만 담고 있는 내용에 알맞은 외모도 겸비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 책은 편년체로 기술되어 있다. 한 인물의 평전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카이사르라는 인물을 정점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들이 마치 한 편의 거대한 장편 서사시를 보는 듯하다. 워낙 극적인 생애와 이력을 지닌 인물이기 때문에 카이사르의 행적 자체가 하나의 역사서로 손색이 없을 정도이다. 지금까지 수많은 책들이 나와있고 앞으로도 이 책이 마지막은 아닐 것이다. 그만큼 풍부하고 다양하게 해석되고 재조명을 받고 있다는 것은 카이사르라는 인물에 대한 중요성을 입증하는 예가 된다. 카이사르가 하지도 않은 “브루투스 너마저도……”라는 말을 만들어낸 세익스피어의 희곡도 카이사르에 대한 하나의 해석일 뿐이다. 정치인으로서 그리고 장군으로서 그를 판단하는 것은 주어진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당시의 역사적, 정치적, 군사적 상황을 정확하게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카이사르 스스로 쓴 <갈리아 전기>나 키케로의 저작들, <내전기> 등 다양한 인물들이 쓴 당시의 역사와 전쟁과 사료들을 모아 카이사르의 일대기를 구성하는 일은 힘겹고 어려웠을 것이다.

  저자는 이 지난한 과정들을 훌륭하게 극복했다는 평가를 받을 만하다. 집정관이 되기까지 기원전 100년부터 59년까지를 1부로, 갈리아의 전쟁시기인 기원전 58년부터 50년까지를 2부로, 내전을 거쳐 독재관이 되기까지 기원전 49년부터 암살당하는 44년까지를 3부로 나눠 서술하고 있다. 실제 사건과 객관적 정황들을 각종 사료에 의해 제시한 다음 이에 대한 해석과 평가를 중간중간 삽입하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다소 어색하고 딱딱한 느낌을 주기도 하는 것이 이 책의 특징이다. 하지만 앞서도 언급했듯이 카이사르의 삶 자체가 주는 극적인 긴장감과 다양한 변주들이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다. 길고도 험난한 한 로마인의 이야기는 유럽의 한 시대를 풍미했던 영웅의 고뇌와 당시의 정치적 상황들 그리고 부족간의 갈등과 알력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한 인물에 대한 보고서이면서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전쟁 서사시이며 시대를 뛰어넘는 인간의 욕망에 대한 참고서이다.

  파르살루스 전쟁장면과 루비콘 강을 건너는 장면 그리고 클레오파트라와 강을 따라 남쪽으로 배를 타고 여행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루비콘 강을 건너기 전까지의 카이사르의 고뇌를 수에토니우스는 “주사위는 던져졌다(iacta alea est)."(P. 622)라고 표현했다. 지나치게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측면에서만 다루어진 면이 아쉽기도 하지만 한 사람의 남자로서 그리고 인생의 후반기에 접어들었을 나이에 그간의 힘겨웠던 시대와 세월을 따라 클레오파트라와 배를 타고 떠나는 카이사르의 심정이 어떠했을 것인지 조금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알렉산드리아 전쟁을 마치고 이집트를 떠나 카파도키아의 파르나케스를 속전속결로 처리한 후 개선식을 장식한 간결한 문구 ‘VENI VI야 VICI(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P. 732)는 대리인에게 보낸 편지를 내용을 인용한 것이었다. 

  로마의 문화와 구체적인 생활모습 등의 내용을 생략하고 카이사르라는 한 인물에게 초점을 맞춘 이 책은 철저하게 그리고 상세하게 한 인물의 생애를 추적하는 것으로 잡다한 인물에 대한 평가를 대신한다. 너무나 잘 알려져 있고 반복되어 온 인물에 대한 새로운 해석과 평가라는 측면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상세하게 한 인간의 삶을 추적함으로써 ‘카이사르의 관용’과 카이사르라는 인물 자체에 대한 오해와 편견들을 풀어내고 있다. 독자들이 개인적으로 그려놓았던 카이사르에 대한 평가가 어떠하든 이 책은 아주 비교적 객관적이고 냉정한 시선으로 카이사르의 행동과 삶을 다양하게 언급하고 있다. 알 수 없는 흔적들과 그 시대를 살았던 인물들의 대한 서로 다른 평가에 대한 판단은 독자들의 몫으로 남겨질 수밖에 없고 이 책 이후의 책에 기대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080124-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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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오류 -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게 만드는
토머스 키다 지음, 박윤정 옮김 / 열음사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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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세상에서 가장 먼 길은 머리에서 가슴까지 가는 길이었습니다’라는 말은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보다 이해하고 공감하며 나누고 사랑할 줄 아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더 어렵고 힘들다는 말이다. 즉, ‘머리와 가슴’은 ‘이성과 감성’에 대한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신체의 한 부분으로 생각할 만큼 우리는 수 천 년 동안 마음이 가슴 속에 있다고 믿어왔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사랑이 가슴에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과학적 상식으로는 이성이든 감성이든 모두 머릿속에 있다. 이를테면 ‘세상에서 가장 먼 길은 좌뇌에서 우뇌까지 가는 길이었습니다’ 정도가 맞는 말일 것이다.

  인간의 뇌에 관한 호기심은 의학 분야와 과학 분야에서 눈부신 발전을 초래했다. 뇌 과학은 이제 촬영장비와 기술의 발달로 상당한 연구 성과를 거두고 있으며 많은 학문 분야에 파급 효과를 미치고 있다. 의학은 물론 교육과 심리학에서도 이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어려운 문제들의 실마리가 풀려나가고 있다. 아직 미흡하지만 신경세포와 해마를 비롯한 각 영역별로 그 기능과 역할들을 하나씩 밝혀 나가고 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역할을 하는 기관이나 그 기관의 역할과 영역을 구체적으로 알고 싶어 하는 인간의 욕망은 상당한 진전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인간의 신체 중에서 뇌는 가장 신비롭고 알 수 없는 영역이다. 마치 컴퓨터의 CPU에 비유되는 뇌에서 처리되는 정보와 판단에 따라 인간의 삶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열쇠는 모두 뇌가 가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생각을 한다는 것은 뇌가 활성화되는 것이고 뉴런을 단위로 한 신경세포들의 활발한 상호작용이다. 그러한 생각들이 모여 주체와 객체를 판단하고 그것들의 관계를 규정한다. 우리의 정체성은 몸과 더불어 마음, 즉 우리의 뇌의 작용에 대한 타인의 평가이자 판단이다. 따라서 ‘나’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방법은 나의 뇌가 작동하는 방식과 정보를 처리하고 판단하는 작용에 대한 경우의 수에 대한 조합들이라고 볼 수 있다.

  내가 하는 생각과 판단은 지극히 합리적이고 논리적이며 이성에 기초하고 있을까? 아니면 설명되지 않는 감성과 살아오면서 쌓여온 수많은 편견과 잘못된 경험들에 의해 결정되고 있을까? 토머스 키다의 <생각의 오류>는 이런 질문에 대한 1차적으로 객관적인 답변을 제시해 준다. 이 책이 말하는 기준은 단 하나, 바로 ‘과학적 합리성’이다. 여기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사고하고 판단하면 일상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생각의 오류’들을 줄일 수 있다는 충고이다. 저자는 이 세상이 얼마나 잘못된 믿음과 결정으로 가득차  있는지 실제 사례를 통해 차근차근 설명하고 있다.

  인간의 사고 형성과 의사 결정 과정에 대한 깊은 관심과 연구를 지속해 온 토마스 키다의 <생각의 오류>는 우리에게 적지 않은 시사점을 전해준다. 저자는 우선 머리말에서 여섯 꾸러미를 제시한다. 이 질문들에 대답해보자. ‘통계수치보다 이야기를 더 좋아한다. 확인하고 싶어한다. 삶에서 운과 우연의 일치가 하는 역할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세계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 지나치게 단순화한다. 잘못된 기억을 갖고 있다.’ 대부분의 항목에 그렇다고 대답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꼼꼼히 읽어볼 필요가 있다. 세상은 아는 만큼 보일 수도 있고 모르는 게 약일 수도 있지만, 적어도 무엇이 나의 생각에 잘못된 영향을 미치는지 항상 합리적 판단을 내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나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지 확인해 볼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를 제공하는 책이다.

  지금까지 주가가 떨어진 종목을 골라 투자하는 사람, 농구경기에서 세 번 연속 골을 성공시킨 선수에게 패스를 하라고 외치는 사람, 우주의 생명체와 채널링이 가능하다고 믿는 사람, 머피의 법칙을 경험한 사람, 사진처럼 선명한 기억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 등 일상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을 떠올려 본다. 이런 사람들에게 당신의 판단과 생각에 오류가 있다고 지적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생각해 보자.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오늘도 복채를 챙겨들고 무속인을 찾아가는 사람들, 신문 한 구석의 ‘오늘의 운세’를 자세히 들여다보는 사람들, 혈액형으로 성격을 가늠하는 사람들은 우리 모두의 자화상이다.

  객관성은 가능한가? 냉정한 판단력과 과학적 사고는 훈련을 통해 가능하다. 자신의 경험과 생각으로 세상을 재단하는 무모함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우리는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한다. 나도 틀릴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무엇을 잘못 생각하고 실수를 저질렀는지 차근차근 돌아보면, 우리는 생각보다 많은 편견과 선입견, 잘못된 정보들을 끊임없이 뇌에 저장하고 그것들을 강화시키기 위한 선택적 일화들과 지식들만을 저장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확인하게 된다. 나만 그런가? ‘생각의 오류’는 ‘행동의 오류’로 이어질 수 있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항존한다.

  양비론과 양시론을 펼치며 중립적 태도를 취하고 판단을 유보하는 것이 올바른 삶의 자세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지식 정보화 사회에서 넘쳐나는 지식과 정보들을 선별하고 가공하고 판단하고 창의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은 ‘생각의 오류’를 없애는 데서 출발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21세기에 살아남기 위한 생존전략으로서는 물론이고 나를 둘러싼 사람들과 우리로 확장된 인류 전체가 반성해야하는 수많은 오류들을 다시 점검해야 한다. 바로 지금 이 순간이 지나친 자신감에 넘치는 당신에게 보내는 저자의 충고에 귀 기울여 보아야 할 시간은 아닐까?


080119-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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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자 케이스 스타노비치Keith Stanovich가 지적했듯, 여자는 투표를 할 수 없고 흑인은 읽는 법을 배울 수 없다는 것도 150년 전에는 상식에 속하는 문제였다. - P. 43

미디어의 맹폭격을 잘 견뎌내려면 항상 자신의 사고를 주의 깊게 성찰해야 한다. 사고에 오류가 없으면 이런 보도 내용에 휘둘릴 위험성도 적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요한 원인은 일화적인 증거에 의지하는 우리의 성향에 있다. - P. 49

연구 결과 우리는 통계수치보다 이야기에 더 의존한다고 한다. - P. 51

사고방식은 믿음에, 믿음은 결정에 영향을 미친다. 내세울 만한 증거가 없을 경우, 믿음은 틀릴 가능성이 더 많다. 그리고 잘못된 믿음을 토대로 결정을 내리면, 결정도 잘못될 가능성이 더 커진다. 그러므로 믿음을 형성하고 결정을 내릴 때는 비판적인 사고력을 강도 높게 적용할 줄 알아야 한다. - P. 74

대부분의 사람들은 회의주의자를 모든 것에서 흠집만 찾으려는 냉소적인 사람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회의주의자는 이런 사람이 아니다. 회의주의자는 어떤 주장을 믿기 전에 그 증거를 평가해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일 뿐이다. 회의주의는 하나의 방법이지 태도가 아니라는 말이다. - P. 75

인간은 원인을 찾고 싶어 하는 동물이다. 인간에게는 세계 속에서 일정한 양상을 발견하려는 천부적인 욕구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삼라만상의 원인을 발견한 이들은 진화의 과정에서 살아남아 자신의 유전자를 후대에 전할 수 있었다. - P. 132

우리에게는 믿음을 견고하게 유지하기 위해서 보고 싶은 것만 보려는 강력한 욕구가 있다. 세계가 우리의 믿음에 들어맞는다는 것을 확인할수록, 우리 믿음이 진실이라는 생각도 더욱 강해지기 때문이다. - P. 162

우리 믿음은 소유물과 같다. 우리가 물건을 사는 이유는 그것이 유용하기 때문이다. 믿음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믿음을 간직하는 이유는 흔히 이 믿음을 뒷받침해 주는 증거 때문이 아니라, 이 믿음이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를 잘못된 믿음으로 인도하는 편향적인 인식은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 다음의 세 가지 질문이 좋은 출발점이 되어줄 것이다.

1) 이 믿음이 진실이기를 바라는가?
2) 이 사건이 일어나리라고 예상하고 있었는가?
3) 이런 바람과 기대가 없다면, 이 일을 다르게 인식할까?

그렇다는 답이 나왔다면, 세계에 대한 자신의 인식을 해석하는 방식에 당신은 특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 P. 179

우리는 흔히 상관관계를 잘못 파악하며, 이런 오류로 건강은 물론 경제적인 면에서도 상당한 대가를 치른다. 그런데도 상관관계가 있으리라는 기대나 바람으로, 있지도 않은 상관관계를 믿을 때가 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 이런 바람과 기대가 세계를 인식하고 평가하는 방식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 P. 202

“혼돈 이론과 복합성 이론은 미래가 본질적으로 예측 불가능한 것임을 말해 준다. 이는 우리 경제와 주식 시장, 제품가격, 날씨, 인간을 포함한 동물의 개체 수, 이외의 여러 가지 다른 현상들도 마찬가지다.” 요컨대 본질적으로 예측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 P. 240

우리에게는 확인을 받으려는 타고난 성향이 있다. 기존의 믿음과 기대를 지지해 주는 정보에만 선택적으로 주의를 기울인다는 말이다. - P. 244

실제로 면접을 통한 주관적인 평가는 해로울 수 있다. 신뢰성과 타당성이 모두 부족하기 때문이다. 많은 연구 결과를 봐도, 면접관의 주관적인 평가는 지원자의 성공 여부를 가늠하는 훌륭한 지표가 될 수 없으며, 면접관들의 평가도 서로 엇갈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 P. 311

외부 세계를 인식하는 과정처럼, 과거의 사건을 기억하는 과정도 구성적이다. 암시적이고 유도적인 질문들이 기억에 영향을 미치고, 우리는 과거의 경험을 조합해서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낸다. 또 인식작용의 경우처럼 자신의 바람이나 기대에 따라 다른 기억을 끄집어낸다. - P. 343

집단이 개인보다 뛰어나지만, 집단 안에서 가장 우수한 인재는 혼자 일할 때 집단보다 더욱 훌륭한 성과를 보여준다는 말이다. - P. 371

우리가 믿음을 원하는 이유는 삶에서 확실성을 바라기 때문이다. 그러나 삶은 아주 복합적이고 예측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흑백의 관점에서 생각하는 편이 더 편해도, 자신의 믿음을 확신하는 편이 더 마음 편해도, 우리가 모르는 것이 참으로 많다는 점을 인정할 줄 알아야 한다. - P. 377

심리학자 톰 길로비치의 말처럼, “우리를 곤란에 빠뜨리는 것은, 흔히 우리가 모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것들”인 것이다. - P. 3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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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뮨주의 선언 - 우정과 기쁨의 정치학
고병권.이진경 지음 / 교양인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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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류의 발생 이후 가장 완벽한 사회 체제에 대한 고민은 계속된다. 토마스 모어는 ‘유토피아’를 이상적 세계로 그려냈지만 꿈은 실현되지 않았다. 홍길동은 ‘율도국’을 허생은 ‘빈섬’을 실험했으나 소설 속의 환상의 섬들일 뿐이다. 인류의 고민은 끝나지 않았고 그 꿈은 영원히 실현되지 않을 지도 모른다. 철학자나 경제학자 혹은 문화인류학자나 사회학자에게 그 원인을 묻는다면 제각각 다른 대답을 내놓을 지도 모른다. 인간의 이기적 욕망으로 인한 살육과 침략 전쟁은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되고 있다. 부조리한 현실과 모순된 세상을 위해 인간은 신을 창조했지만 그 분도 아직 우리에게 해답을 주거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것 같다.

  21세기에 등장한 <코뮨주의 선언commun-ist manifesto>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연구 공간 ‘수유+너머’의 고병권과 이진경의 이름을 빌려 쓴 이 책은 발칙하고 신선하다. 기본적인 토대와 연구 성과들이 없다면 이 선언은 불가능했겠지만 서기 2007년에 대한민국에서 외치는 그들의 함성은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지 참으로 난감해진다. 지금까지 흘러온 인류의 역사와 사회적 변혁의 면면들이 고스란히 녹아있으면서도 새로운 해석과 주장을 펼치는 이 선언문을 치기어린 발상이나 아웃사이더들의 외침으로만 보기에는 꼼꼼히 눈여겨 보아야 할 대목들이 많다.

  1848년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당선언>을 통해 세계에 대한 해석이 아니라 변혁을 주장했다. 급변하는 혁명의 시기에 선언을 한 걸출한 두 젊은이의 나이는 불과 서른과 스물 여덟이었다. 세계는 용광로처럼 변화의 불길로 들끓고 있었으며 세상은 곧 혁명으로 완전히 뒤바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고, 완고한 세계를 뒤흔들긴 했지만 혁명의 기운은 손에 잡힐 듯 눈에 보일 듯 했지만 안개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그 160년이 흘렀고 21세기 접어들었다. 대한민국에서 ‘코뮨주의’를 선언한 사람들의 마음과 갈피들을 들여다보는 일은 우리들의 자화상을 보는 것과 같다. 현재까지 인류가 이룩한 역사와 사회적 토대는 결코 암울한 예측과 비관적인 전망으로 가득 차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미래와 역사에 대한 해석과 전망은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지만 지금 이대로의 현실이 바람직하거나 올바른 방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코뮨주의 선언>은 21세기를 위한 아니 인류 전체를 위한 보편적 이데올로기로 판단할 수 있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혹은 어디를 향해 질주하고 있는가. 삶의 역동적 변화 속에서 인류 사회가 만들어 온 문명과 문화 사회 제도와 체제는 자본과 화폐 제도로 대표되는 시스템 속에 갇혀있다.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그 원인과 해법을 고민하려는 노력들은 지속되어야 하며 ‘공산주의’가 아니라 ‘공통체’를 전면에 내세운 ‘코뮨주의’의 진정한 가치와 실현 방식들에 대해 귀 기울여 보아야 할 충분한 이유와 타당성은 우리 생활 곳곳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그것은 현실에 대한 부정과 비판이 아니라 우리 삶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며 변화에 대한 기대와 희망이며 더 나운 세상에 대한 꿈을 반영하고 있다. 몽환적이고 이상적인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세계를 새롭게 인식하고 삶의 목적과 방법에 대한 성찰이고 나와 우리에 대한 고민과 반성의 결과물이다. 고병권과 이진경 두 사람에 의한 발상과 전환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다 함께 꿈꾸어야 가능한 혁명에 대한 이정표이다.

코뮨주의자의 현실에 대한 긍정은 항상 현실에 대한 변혁을 내포한다. 현실을 긍정하지만 그 현실에 머물지 않기에 우리는 코뮨주의가 이념이라고 말한다. - P. 7

  머리말을 대신한 <코뮨주의 선언>은 본문으로 제시된 정치와 주체 그리고 감응이라는 영역에서 살펴보고 있는 세부적인 모델들을 제시하고 있다. 각각의 사람들이 지금까지 인류가 걸어 왔거나 고민해 왔던 부분들을 살펴보고 지금 우리의 현실과 미래의 삶에 대한 고민의 결과물들을 정리해 놓은 것들이라고 볼 수 있다. 사회의 주류에서 벗어난 혹은 아카데미즘 안에 머물러 있는 완고한 틀을 벗어나고자 하는 노력들은 우리들 삶의 자유를 표방한다. 사람이 산다는 것은 기존의 형식적 틀에 온몸을 끼워 맞추려는 노력이 아니라 보다 유연하고 창의적인 방식으로 우리의 삶을 디자인하려는 노력이다. 그 안에서 우리는 자유로울 수 있고 행복할 수 있으며 더불어 살아가는 즐거움과 기쁨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로크에서 촉발된 개인의 신체에 대한 ‘소유’의 개념 그리고 사유화의 길을 걸어온 인류의 재산권에 대한 반성은 나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사유화의 개념에 반대하는 급격한 코뮨주의가 쉽게 받아들여지지는 않겠지만 혁명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대중이며 대중의 힘에 의해서만 모든 변화는 가능하다.

  대통령을 잘못 뽑아서 내가 먹고 살기 힘들어진 게 아니다. 이명박이 당선됐다고 해서 장밋빛 미래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고 착각한다면 우리에게 희망은 없다. 마르크스는 “‘모든 사람이 그가 원하는 분야에서 자신을 도야할 수 있는’ 상태, ‘오늘은 이 일, 내일은 저 일을 하는 것’이 가능한 사태를 자유”라고 말한다. 우리의 삶은 끊임없이 자유로워져야 한다. 나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구속과 억압에서 벗어나야 한다. 자본과 소유의 압박에서 탈출할 수 있을 때에만 자유로운 삶은 가능하다. 그 대안적 삶의 모델을 제시하고 먼저 행동하는 사람들에 의해 세상은 조금씩 변화해 갈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사뮈엘 베케트의 말을 패러디 하자면 실패하더라도 아무도 실패해 보지 않은 방법으로 실패해야 하며 그 실패의 과정과 결과들에 의해 우리는 또 한발 앞으로 나아갈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버릴 수 없다. 비록 160년 후에 다시 선언된, 혹은 새로운 세기에 대한 전망과 변혁의 가능성을 내포한 <코뮨주의 선언>이 헛된 희망과 이상적 꿈에 불과하다는 비판을 받을지언정 그 가능성과 변화의 노력까지 물거품이 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굳음 믿음이 필요하다. 선언의 마지막에 나온 말처럼 “자, 이제 우리도 웃으며 떠날 시간이다!”


080117-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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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 고병권이 쓴 '민주주의'
    from 그린비출판사 2011-05-25 15:02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무엇인가’를 묻는 책들이 태풍처럼 출판계를 흔들어놓고 있다.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 바람이 채 가라앉기 전에, 뒤를 이어 유시민의 『국가란 무엇인가』 바람이 불고 있다. 이제 여기에 다시 고병권의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바람을 추가해야 한다. 그러나 고병권이 몰고 올 바람은 일시적으로 불고 지나갈 바람이 아니라, 끊임없이 반복해서 되돌아올 바람이다. 그것은 한국의 정치·사상 지형에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파열을 내는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