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뮨주의자의 현실에 대한 긍정은 항상 현실에 대한 변혁을 내포한다. 현실을 긍정하지만 그 현실에 머물지 않기에 우리는 코뮨주의가 이념이라고 말한다. - P. 7

위대한 사랑은 그 사랑의 대상을 먼저 창조한다고 했던가. 우리는 친구를 창조함으로써만 우리의 우정을 이어간다. 적을 친구라고 우기는 게 아니라, 적을 친구로 만드는 것이 우리의 우정이고 사랑이다. 혁명가는 세계를 전복하는 혁명으로 세계에 대한 그의 우정을 보여주지 않는가. 우정이나 사랑은 어떤 때 꽤나 잔혹한 행동을 우리에게 요구한다. - P. 16

코뮨주의자로서 우리는 또한 사유화(privatization)에 반대한다. - P. 18

자본은 결핍으로 충만한 신체이다! - P. 27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는 말을 자신의 삶을 바꾸지 않는 변명으로 삼지 말라고. 중요한 것은 당신의 삶을 바꾸는 것이다. 그리고 여러 대안적 실험들을 소통시키고 확산시키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세상이 바뀐다.” - P. 29

코뮨주의는 대안적 삶에 대한 끊임없는 물음과 시도 속에서 언제든 실현된다. - P.  29

결여감을 지닌 자는 떠나지 못한다. - P. 31

자, 이제 우리도 웃으며 떠날 시간이다! - P. 31

대중이 혁명적이라는 것은 “대중이 혁명을 욕망한다는 뜻에서가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을 욕망한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대중은 ‘소용돌이(volution)’를 ‘반복(re-)’하는 흐름이다. 따라서 대중 바깥에서 혁명을 기획하고 계산하려는 시도는 무익하다. 혁명은 대중에게 속한다는 의미에서, 그리고 혁명은 계산 너머에 존재한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 P. 64

혁명가란 혁명의 불길을 지도하는 자가 아니라 불을 붙이는 자이다. 그는 시대의 습기를 가장 먼저 날려버린 가장 건조한 지대로서 스스로 타오름으로써 불길을 주변으로 전파하는 자이다. 전달도 증폭도 대중들의 운동이다. - P. 68

“스승이 될 수 없는 친구는 진정한 친구가 아니고, 친구가 될 수 없는 스승은 진정한 스승이 아니다.”(이탁오의 <분서> 재인용) - P. 87

혁명은 대중이 만드는 것이고, 대중의 능력에 의해 진행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 P. 104

전위는 정해진 어떤 계급적 이익이나 ‘보편적 진리’를 알려주고 전달하는 조직이 아니라, 앞서서 실험하고 앞서서 실행하며 참조할 수 있는 새로운 사례를 창안하는 그런 조직이어야 한다. - P. 105

사적 소유는 타자의 추방과 배제가 기본 특징이다. 그래서 소유권을 기초로 정의된 기본 권리들은 암묵적으로 ‘타자=위험 세력’. ‘타자=침해자’라는 인식을 전제한다. 이런 틀에서는 타자를 향한 어떤 적극적 개방이나 적극적인 구성도 사고하기 어렵다. - P. 127

코뮨주의적 소유는 ‘소유’의 의미 자체를 바꾸는 것이다. 코뮨주의적 소유에서, 소유는 여전히 ‘권리’로 불릴 수 있지만, 이때 권리는 어떤 법적 형식을 지칭한다기보다, 관계를 구성할 수 있는 ‘기예’나 ‘능력’을 의미할 것이다. - P. 137

삶의 윤리란, 서로를 갈라놓는 분리의 격자 속에 던져진 가상의 이념이 아니라, 함께 생성하는 관계를 가리키는 말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 P. 248

냉소주의자는 단지 질서들을 객관적으로 인식할 뿐이라고 주장하지만 사실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나쁜 질서들을 객관적 현실로 실현하는 기획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것이다. 이런 냉소주의적 태도를 작동시키는 것은 차악을 선택하지 않으면 최악의 상태에 빠질 것이라는 공포이며 자기 능력에 대한 무지와 불신이다. - P. 303

사뮈엘 베케트는 “예술가가 된다는 것은 아무도 실패해본 적이 없는 방식으로 실패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것은 유머리스트에게도 어울리는 정의이다. 유머리스트는 빈번히 실패한다. 그러나 아무도 실패해 본 적 없는 새로운 방식으로만 실패한다. 그는 피로감 없이 유쾌하고 즐거운 실패들을 이어간다. 그는 자신의 실패, 과오, 심지어는 자신의 성공과도 쉽게 헤어질 수 있을 만큼 이별 능력의 최대치를 지녔기 때문이다. - P. 322

코뮨주의란 무엇인가? 그것은 현실 너머의 이념으로 주어지고 의지의 조직화로 성취되는 초월적 관념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생산 관계를 해체하는 운동 속에서 구성되는 공통적(commune) 삶의 양식이다. ‘공통적’이란 어떤 의미인가? 관념론자들은 서로 다른 개체들이 동일한 관념, 표상, 속성을 공유하는 사태를 공통적이라고 표현한다. 그러나 유물론자에게 공통성은 관념의 동일성이 아니다. 공통성은 관념 이전에, 관념과 무관하게 운동하는 물질의 고유한 양태이다. 공통성은 서로 다른 힘과 방향을 지닌 운동(흐름)들이 연합하면서 구성하는 신체성이다. - P. 328

마르크스는 이렇게 ‘모든 사람이 그가 원하는 분야에서 자신을 도야할 수 있는’ 상태, ‘오늘은 이 일, 내일은 저 일을 하는 것’이 가능한 사태를 자유라고 불렀다. - P. 375

코뮨주의란 복수의 개인들이 능동적으로 이러한 집합체인 코뮨을 구성해 가는 활동이다. 능력의 관점에서 보자면 코뮨주의란 복수의 개체들의 능력이 서로 증대하도록 적극적으로 협력-체인 코뮨을 만들어 가는 활동이다. 코뮨의 구성을 통하여 집합체의 잠재력의 폭이 커지며, 협력하는 각인들은 하고자 하는 바를 더욱 잘 할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코뮨주의란 바로 협력-체, 즉 코뮨의 능동적이고 의식적인 구성을 통하여 능력을 증대해 가는 활동인 것이다. - P. 3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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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6시 창비시선 282
이재무 지음 / 창비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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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는 삶이다. 가장 고급한 예술 장르가 아니라 사람이 살아가며 반응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호흡이다. 지천명知天命에 들어선 시인의 눈에 비친 세상과 삶의 숨결들은 그대로 생생한 언어로 되살아난다. 시를 칼을 빼들고 언어의 탄환을 장전한 시인은 삭막한 시대현실과 부대끼는 사람들의 고통과 한숨을 겨냥해 날카롭고 절절한 목소리를 토해낸다. 한 시대가 가고 세월은 흘렀으며 또 다른 세상을 살아가는 시인은 시라는 창을 통해 또 다른 풍경과 새로운 깨달음과 삶에 대한 통찰을 적는다.

  정치적 현실이 변했고 사람들은 나이를 먹어간다. 새로운 세대는 그들의 문화와 세계관으로 무장한 채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질곡의 현실과 ‘나’를 둘러싼 세상은 그리 녹록치 않다. 시인의 내면 풍경에는 여전히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그래서 가끔 ‘마량에 가면’ ‘좋겠다’는 희망과 소박한 꿈을 꾼다. 그것은 현실 도피가 아니라 ‘뜻도 모르는’ 인생에 대한 회한이며 긍정이며 낙관인 지도 모른다.

좋겠다, 마량에 가면

몰래 숨겨놓은 애인 데불고
소문조차 아득한 포구에 가서
한 석 달 소꿉장난 같은 살림이나 살다 왔으면,
한나절만 돌아도 동네 안팎
구구절절 훤한, 누이의 손거울 같은 마을
마량에 가서 빈둥빈둥 세월의 봉놋방에나 누워
발가락장단에 철지난 유행가나 부르며
사투리가 구수한, 갯벌 같은 여자와
옆구리 간지럼이나 실컷 태우다 왔으면,
사람들의 눈총이야 내 알 바 아니고
조석으로 부두에 나가
낚싯대는 시늉으로 던져두고
옥빛 바다에 시든 배추 같은 삶을 절이고
절이다가 그것도 그만 신물이 나면
통통배 얻어 타고 휭, 먼 바다 돌고 왔으면,
감쪽같이 비밀 주머니 하나 꿰차고 와서
시치미 뚝 떼고 앉아
남은 뜻도 모르는 웃음 실실 흘리며
알량한 여생 거덜냈으면,

  마지막으로 거덜 내고 싶은 인생이 ‘웃음’으로 마무리 될 만큼 우리들 인생에는 사랑과 웃음이 중요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남루한 생의 저물녘에 마주하는 ‘나’의 모습과 과거의 기억 속에는 늘 따스한 미풍이 분다. 상처받지 않은 인생이 어디 있을까? 그것도 결국 사랑으로 인한 상처일 뿐이다. 시인에게 세상은 이제 무덤과 어둠과 그늘일 뿐일 수 있다. 비극적 인식을 전제하지 않는다면 어쩌면 시라는 장르가 필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것을 버텨 낼 수 있는 유일한 희망과 남은 시간에 대한 추동력은 어둠 속에 묻힌 작은 불빛과 아름다운 추억과 생명에 대한 외경에서 비롯된다. 이재무의 시를 오독한 것이 아니라면 부조리한 현실과 석양의 그림자를 길게 드리운 생의 한가운데서 느끼는 통찰과 섬세한 감각들은 열정과 욕망과는 거리가 멀다.

그 여자

만날 때마다 몸과 마음

숯불 위에 놓인 번철처럼 뜨겁게 달구어놓는

그 여자 빼어난 미모가 차라리 슬퍼 보이는,

도발 안쪽에 감추어진 가련함을,

구멍 속으로 기어드는 구렁이같이

무논 속으로 뛰어드는 개구리같이

사랑했네 하지만 그 수려한 미색 속에는

호랑이 날카로운 발톱의 마음도 살고 있어

사랑이 클수록 상처도 컸네

그녀를 사랑하는 일 수만평 진흙밭

새구두 신고 걷는 일처럼 벅찬 일이었네

신은 여자에게 지색을 주고 요철 심한

생의 굴곡 안겨주었네

사랑은 불행까지 품어주는 일

나, 오랫동안 그녀를 앓아야 하네


  그러다 문득 도시 한가운데서 혼란을 느끼기도 한다. 이 시집의 표제작이 된 ‘저녁 6시’는 냄새를 통해 생의 감각을 되살린다. 생물학적 공복감의 근원은 인간의 한계를 절감하게 한다. 먹기 위해 일하고 살아가는 사람들, 살기 위해 먹어야만 하는 우리들의 자화상은 도심 한복판 저녁 6시에 마주하는 냄새를 통해 확인된다. 때로는 ‘치명적인 독’일 될 수도 있는 본능적 욕망의 범람을 경험한다. 감각을 마비시킬 정도의 냄새는 현대인들의 욕망이며 신산스런 삶의 또 다른 이름이다.

  그 냄새의 숲속을 비틀거리며 걸어가는 ‘나’의 뒷모습은 처량하기 보다는 안타까움이며 두려움이고 우울한 우리들의 모습이다. 시인은 일상의 감각과 생활의 패턴들을 ‘냄새의 감옥’으로 표현한다. 비아냥거리는 냉소가 아니라 경험에서 우러나온 내밀한 고백이다.

저녁 6시

저녁이 오면 도시는 냄새의 감옥이 된다
인사동이나 청진동, 충무로, 신림동,
청량리, 영등포 역전이나 신촌 뒷골목
저녁의 통로를 걸어가보라
떼지어 몰려오고 떼지어 몰려가는
냄새의 폭주족
그들의 성정 몹시 사나워서
날선 입고 손톱으로
행인의 얼굴 할퀴고 공복을 차고
목덜미 물었다 뱉는다
냄새는 홀로 있을 때 은근하여
향기도 맛도 그윽해지는 것을,
냄새가 냄새를 만나 집단으로 몰려다니다보면
때로 치명적인 독
저녁 6시, 나는 마비된 감각으로
냄새의 숲 사이를 비틀비틀 걸어간다.


  ‘냄새’로 시작된 ‘공복’은 ‘가난’으로 이어진다. 그 개념이 달라진 시대를 반영한 아래 시는 자본의 물결과 신자유주의 시대 한복판에 알몸으로 서 있는 ‘가난’을 ‘선하지도 힘이 세지도 않다’는 반복적인 표현으로 강조한다. 이제 가난은 죄이며 악이며 부정이다. 더 이상 생을 긍정하지 못하고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가난에는 아무 의미도 희망도 낙관도 없다.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라고 반문하던 신경림의 <가난한 사랑 노래>는 이제 철지난 유행가가 되어 버렸다. 가난하면 외로움도 두려움도 그리움도 사랑도 허용되지 않는 시대를 살아가는 것은 아닌가. 이 시대의 가난은 과연 어떤 것인가?

가난에 대하여

선과 악의 기준이 사라진,
오직 미추만이 가치를 결정하는 시대에
성자였던, 생을 긍정하던 가난은
선하지도 힘이 세지도 않다
산개되어 얼굴조차 볼 수 없는 가난은
다만 무력할 뿐이어서 크게 울지도 못한다
가난이 힘이 되던 시절이 있었다
뭉쳐서 무기가 되고 전망이 되던 날이 있었다
떼지어 살고 있어서 쉽게 눈에 띄던 시절
가난은 단연 주목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가난은 저마다 무력한 개인이 되어
모래알로 흩어졌다 지하로 잠적해버렸다
눈에 띄지 않는 가난에 대하여
누가 관심과 애정을 보일 것인가
생활의 중증장애자, 구차한 천덕꾸러기 되어
몰매 맞는 가련한 왕따,
가난은 이제 선하지도 힘이 세지도 않다

  시인의 마지막 희망은 ‘젊은 꽃’으로 상징된다. 노인의 피부에 검버섯이라는 저승꽃이 피는 것은 ‘누구에게나 밀려드는 시간의 밀물’이다.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자연의 순리이다. 누구도 거역할 수 없는 생의 진리와 마주하게 되면 우리는 겸허하게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게 된다. 늙은 나무에 꽃이 피는 것처럼 우리는 죽음을 맞이하는 그 순간까지 꽃을 피우겠다는 희망을 버릴 수는 없다. 그래서 ‘젊은 꽃’이 시집의 마지막에 놓여 있는 것일까?

젊은 꽃

때 되면 누구에나 밀려드는 시간의 밀물
그 또한 막아낼 재간이 없었다
물에 잠긴 자리마다 검게 죽어가는 피부
지나온 생의 무늬는 목까지 차오른다
하루의 팔할을 사색으로 보내는 그,
긴 항해 마치고 돌아온 목선처럼 지쳐 있지만
바깥으로 드리운 그늘까지 늙은 것은 아니다
주름 많은 몸이라 해서 왜 욕망이 없겠는가
봄이면 마대자루 같은 그의 몸에도 연초록
희망이 돋고 가을이면 붉게 물드는 그리움으로
깡마른 몸 더욱 마르는 것을,
늙은 나무가 피우는 저 둥글고 환한 꽃
찾아와 붐비는 나비와 벌 들을 보라
검은 피부에도 가끔은 꽃물이 든다


080114-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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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의 문장들 청춘의 문장들
김연수 지음 / 마음산책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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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청춘은 들고양이처럼 재빨리 지나가고
그 그림자는 오래도록 영혼에 그늘을 드리운다.


  먹고 싶은 과자를 아껴 두는 아이의 마음-그것이 단순한 욕망의 절제가 아니라 충족이 주는 낯선 소멸과 허무 때문일지라도-은 차라리 공포에 가깝다. 소풍 전날 잠 못 이루는 아이가 결국 땅거미 질 무렵 귀가 길의 비참함을 꿈에서 보아 버리듯이 말이다. 나는 이 책을 그렇게 읽었다. 오랫동안 미뤄두다가.

  김연수의 유일한 산문집을 애써 외면한 것은 은근한 기대나 설렘과는 다르다. 애써 감춰 둔 서랍 깊숙한 곳에 존재 여부만 알고 있는 낡은 편지의 내용처럼 짐짓 모르는 척 하는 마음에 가깝다. 서른 다섯. 소설가는 청춘을 정리한다. ‘들고양이처럼 재빨리 지나가’는 순간들을 알아채버린 것이다. 그 때부터 아주 ‘오래도록 영혼에 그늘을 드리’워야 한다는 사실을 실감한 것이 분명하다.

  축축하게 비에 젖은 날씨를 핑계로 포장마차에 들어서는 기분으로 책장을 넘겼다. 이 책은 처음부터 그렇게 심하게 젖어있다. 현재라는 말은 성립하지 않는다. 이 모든 순간이 발화되는 순간 과거가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김연수는 그 아쉬움을 달래듯, 자신의 젊음 혹은 과거의 한 찰나들을 정리한다. 과연 이런 책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우선 소설이 아닌 현실속의 작가를 만나고 싶어 하는 팬서비스 차원이라고 볼 수 있다. 드라마나 영화의 배역이 아니라 현실 속의 배우를 만나고 싶어하는 것처럼. 좋아하는 소설가의 일상과 마주하며 친근감을 느끼고 그의 소설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배경지식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반면 작가는 소설의 형식으로 담아내지 못한 이야기들을 편안하고 솔직하게 드러내는 장소가 된다는 면에서 의미가 있다.

  또 하나는 시대적 공감이다. 동년배이거나 유사한 환경에서 성장했거나 생활하는 사람과의 교감과 공통점은 작가와 동질감을 느끼게 해주고 알고 있으면서도 미처 생각지 못했거나 지나쳤던 것들에 대한 새로운 발견을 의미한다. ‘그때 그 시절’을 노래하는 철지난 유행가처럼 낡고 빛바랜 사진들이지만 흑백으로 포장되고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왜곡되어도 굳이 상처받지 않을 수 있고 심지어 아름답다는 수식어를 사용할 수도 있다.

  이런 시간의 흔적들과 삶의 파편들은 단순한 회고담을 넘어서 한 작가를 이해하고 그의 작품들을 심층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밑거름이 되기도 한다. 지나간 시간들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보고 지금의 나를 돌아보며 미래에 대한 자그마한 꿈과 희망을 만들어보기도 한다. 김연수의 <청춘의 문장들>은 그렇게 많은 이야기들을 쏟아내고 있는 먼지 묻은 뮤직 박스와 같다.

  고등학교 시절에 읽은 <데미안>과 <파우스트>와 <설국>에 대한 기억, 김광석의 노래에 대한 선명한 기억과 그의 죽음, 천개의 눈을 가진 밤을 사랑한다는 고백, 중문 바다에 대한 회고, 스무 살 언저리에 느꼈던 삶의 불확실성……. 책을 읽으면서 나는 김연수와 낄낄거리고 소주를 한 잔 했으며 어깨 겯고 거리를 쏘다니기도 하다가 김광석의 노래 소리에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지극히 개인적으로 그리고 반어적으로 이 책은 참 나쁜 책이다.

  작가의 젊은 날을 사로잡은 문장들, 시편들, 노래들과 얽힌 추억들을 들려주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김연수라는 작가의 삶에 대한 내밀한 고백들은 맨 정신으로 들어주기 힘들다. 어설픈 가난과 시간에 대한 불가해함을 읊조리는 문장들이 아니라고 한다면 나의 지나친 편애가 반영된 것이다. 하지만 어쩌랴, 작가의 말대로 ‘덧없이 사라지는 것들’이 먼 기억 속에서 안개처럼 모호하게 혹은 청춘이라는 이름으로 서성이고 있는 것을. 제발, 부디 오래도록 철들지 않고 나이와 무관하게 ‘청춘’이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삶을 꿈꾼다. 그리고 단 하나의 문장을 기다려 본다.그와 함께.

사이에 있는 것들, 쉽게 바뀌는 것들, 덧없이 사라지는 것들이 여전히 내 마음을 잡아끈다. 내게도 꿈이라는 게 몇 개 있다. 그 중 하나는 마음을 잡아끄는 그 절실함을 문장으로 옮기는 일.


080110-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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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기심 - 10대의 사랑과 성에 대한 일곱 편의 이야기 창비청소년문학 6
김리리 외 지음, 김경연 엮음 / 창비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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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에게나 꿈은 있다. 어릴 적 내 꿈은 서른일곱 살 아저씨가 되는 거였다. 이유는 모르겠다. 그리고 천천히 멋있게 늙어가는 나를 상상해 보았다. 그렇게 이루기 어려운 꿈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많은 함의가 포함된 ‘멋’있는 사람이 되긴 쉽지 않다. 2008년이 들어서면서 나이에 대한 거부감이 생겼다. 자신의 나이가 싫어진다는 것은 분명 늙어간다는 반증이다. 빨리 나이 먹고 싶어 애꿎은 떡국만 퍼먹던 시절이 그리워진다는 것은 서글픈 일이다. 어쩌면 나도 이제 나이를 줄여 말하고 싶은 나이가 되어 버렸는지도 모른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또 하나의 증거는 ‘호기심’이다. 그것이 사라져간다. 안다는 것과 모른다는 것의 경계를 알 수 없지만 이제 미치도록 궁금하거나 끝까지 파헤쳐 알고 싶은 것들이 줄어간다. 그것은 단순한 호기심의 차원은 아니겠지만 분명한 변화중의 하나이다. 아는 것이 많아졌기 때문이 아니라 그만한 열정과 욕망이 사라져 가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어진다.

  10대의 사랑과 성에 대한 이야기를 묶은 <호기심>은 ‘창비청소년문학’ 시리즈 여섯 번째 책이다. 일곱 명의 소설가가 동일한 주제를 가지고 쓴 단편이 묶여있다. 이번 주제는 ‘사랑과 성’이다. 10대 뿐만이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나 관심과 재미를 가질 수밖에 없는 이야기들이다. 중요한 것은 10대라는 제한 조건이다. 2차 성징이 끝나고 사춘기를 겪고 나면 어른이 된다. 우리가 그들을 10대라고 부르든 청소년이라고 부르든 상관없이 그들은 성인의 몸을 가지고 있다. 문제는 정신적인 성숙이다. 자신의 의사 결정권이 제한되고 사회적 억압이 기다리고 있으며 부모의 통제와 가정에서의 역할 때문에 그들은 갈등하고 고민하며 혼란을 겪는다.

  누구나 똑같은 성장통을 겪으며 어른이 되지만 부모와 사회에 대한 대응 방식은 각기 다르다. 스무 살이 넘도록 부모에게 기대거나 자신의 의지대로 세상을 살아갈 능력을 갖추지 못한 다 큰 어린이도 점점 많아진다. 그것은 단순한 경제적 자립 능력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나 자신의 신념과 의지, 꿈을 향한 열정과 신나는 노력이 부족해지는 것은 아닐까? 88만원 세대를 바라보는 기성세대의 눈과 이제 10대의 홍역을 치르는 사람들의 눈은 제각각이다. 그들이 살아내야 하는 세상에 대한 고민과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세상은 그들의 꿈과 항상 일치하지 않는다.

  우리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전근대적, 봉건적 사고방식과 새로운 세대가 지닌 가치관은 늘 충돌하고 갈등하며 혼란을 가중시킨다. 선악의 가치 판단은 무의미해지고 ‘사랑과 성’이라는 것도 쉽게 규정되지 않는 세대의 고민들을 소설가들은 잘 이해하고 있을까? 사회, 문화적 환경이 달라지면 ‘사랑’에 대한 개념도 ‘성’에 대한 태도도 달라지게 마련이다. 가정에서 부모의 역할과 학교나 사회에서 보여주는 성인들의 가치관과 문화는 청소년들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10대들의 ‘사랑과 성’에 대한 고민은 어쩌면 고스란히 성인들의 자화상일 수도 있겠다. 아련한 추억 속에 낡은 사진처럼 자리잡은 그때 그 시절을 떠올리기에 현실은 훨씬 더 심각하다.

하지만 이 소설집에 나타난 아이들의 고민은 평온하며 안전하며 일상적이다. 김리리의 <남친 만들기>, 이혜경의 <공주, 담장을 넘다>, 임태희의 <호기심에 대한 책임감>은 귀여운 수준의 고민들이고 순수하고 깨끗한 동화같은 이야기들로 비춰진다. 항상 심각하고 아픈 상황만을 다룬 소설이 청소년들에게 유익하겠느냐는 반문에는 할 말이 없지만 식상한 내용과 뻔한 전개와 결론이 보여주는 교훈적 혹은 전형적 스토리가 감동을 줄 수 있을까?

  박정애의 <첫날밤 이야기>는 형식면에서 소설이 주는 의미를 찾고 있다. 청소년문학도 ‘문학’이라면 내용은 물론이고 전달 방식이고 구성면에서 참신하고 새로운 틀이 필요하다. 박정애는 그런 면에서 성공을 거두고 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호기심을 충족시켜 주는 훌륭한 방식을 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금이의 <쌩레미에서, 희수>에는 유일하게 학생이 아닌 청소년이 등장한다. 제도권 학교에서 적응하지 못하거나 공교육의 범위를 벗어난 청소년들에 대한 고민들은 좀 더 심각하고 진지하게 고민되어야 한다. 그런 측면에서 학생과 학생이 아닌 청소년 사이의 교감을 다루었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할 수 있겠다. 이용포의 <키스 미 달링>은 나이와 신분을 뛰어넘는 사랑을 다룬다. 도덕이나 사회적 제도나 틀로서 사랑을 규정하거나 묶을 수 없거나 그것이 가능하다는 논리와 교훈이 아니라 재치있는 문장으로 어두운 그림자를 걷어내고 가벼운 고민으로 넘겨 버리는 아쉬움이 있다.

  박수와 응원을 보내고 싶은 시리즈이며 분명히 필요한 종류의 책들이 발간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인 욕심이겠으나 보다 깊고 다양한 방식의 고민들을 담아낼 수 있는 작가들의 노력과 출판사의 기획이 요구된다. <호기심>이라는 지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주제를 가지고 10대들의 ‘사랑과 성’을 다루기에는 아쉬운 점이 많았다. 그 시절을 거쳐 온 성인들에게는 생에 첫 경험들을 통해 성숙해가는 수많은 후배들을 이해하는 도구가 될 수 있겠다. 방학을 맞은 학생과 학생이 아닌 청소년들 그리고 그들의 부모들이 함께 읽고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 계속되길 바란다.


080109-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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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1-10 01:4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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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1-12 20:2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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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1-14 21:5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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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의 역사 1 : 지식의 의지 - 제3판 나남신서 410
미셸 푸코 지음, 이규현 옮김 / 나남출판 / 2010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하는 ‘성’은 다양한 의미를 내포한다. 그 성에 내재한 의미만큼 상징하는 바도 다르고 그것에 대한 태도 또한 다르다. gender와 sex에 대한 인식의 차이만큼 우리가 받아들이는 ‘성’은 각양각색이다. 그것이 사회적 관점이든 개인적 관점이든 역사적 관점에서 다루어지고 있는 것과는 조금 다른 측면일 수 있겠다. 미셸 푸코는 <성의 역사1~3>에서 인간의 ‘성’을 철학적 관점으로 해석하고 있다. 이 책들은 미셸 푸코의 마지막 저작이라는 데에도 의의가 있다. 4권이 예정되어 있었으나 사후 출판을 절대 반대했던 유언에 따라 아직까지 출판되지 않은 상태이다. 어쨌든 뭔가 미진함이 남아 있지만 인류학적 관점에서 인간의 ‘성’을 집요하고 철저하게 다루고 있다는 면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하나의 현상이나 대상을 바라보는 관점은 관찰자의 주관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1권에서 저자는 전반적인 흐름과 본격적인 논의가 이루어직 전 단계로 전반적인 환경과 역사적 과정을 탐구하고 있다. <성의 역사 1>보다 ‘앎의 의지’라는 부제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 철저하게 억압적인 시대였던 빅토리아 여왕 시대를 살아야했던 사람들을 필두로 억압의 가설이나 성의 장치들 그리고 죽음의 권리와 생명에 대한 권력이라는 측면에서 ‘성’의 의미를 고찰하고 있다. 성sexualite과 섹스sexe의 개념 차이에 대해 구별하며 번역자의 용어도 눈여겨 보아야 한다. 단순한 성행위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둘러싼 역사적 개념과 사회적 환경을 고려하여 규정된 개념이다.

  이 개념을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프로이트와는 개념이 조금 다르다. 프로이트가 사용했던 성생활이나 그와 관련된 내용과는 다르게 이면에 숨어 있는 권력과 앎의 의지와 연관지어 사용한 용어인 ‘성sexualite’은 빅토리아 여왕 시대풍의 사람들에게는 억압적 요소로 작용한다. 이렇게 17~18세기를 거쳐 근대에 확립된 성의 개념과 기독교적 억압 요소가 어떤 식으로 발현되었는지가 ‘앎의 의지’에서 탐구하고자 하는 주제이다. 과연 ‘성’은 무엇이며 그것을 바라보는 인간의 태도는 어떤 역사적 과정을 걸어왔는가? 그렇게 고착된 개념들과 태도는 어떤 변화를 거쳐 왔는가? 그것이 미셸 푸코가 탐구하고 싶었던 이유는 아닐까?

  책을 읽으면서 참 많은 생각을 했다. 인간이라는 동물종이 ‘문화’를 만들어 나가는 과정은 역사와 철학의 접점 속에서 끊임없이 정교해지는 억압의 구조였다. 질서와 절제를 미덕으로 한 기원후 1~2세기 혹은 기원후 4세기 경 그리스와 로마에서 시작된 논의들과 저작들 속에서 먼지 묻은 ‘성’에 대한 개념들을 끄집어내는 저자의 수고로움과 노력이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

  그것은 단순히 역사적 관점에서 ‘성’을 바라본다는 의미만은 아니다. 역사가는 통시적 관점에서 ‘성’을 둘러싸고 있는 혹은 ‘성’과 관련된 사건 혹은 현상들을 정리하고 분석하는 데 그칠 것이다. 그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이 아니라 나름의 한계를 지닐 수 있겠다는 생각이다. 미셸 푸코는 한 발 나아가 문헌들을 뒤적이며 그들이 주장했던 연애, 결혼, 가정, 동성애와 관련된 의미망들을 촘촘하게 엮어내고 있다.

쾌락과 권력은 서로 상쇄되지도 서로 등을 돌리지도 않는다. 쾌락과 권력은 서로 뒤쫓고 서로 겹치며 서로 재활성화한다. 쾌락과 권력은 복잡하고 확실한 자극과 선동의 매커니즘에 따라 서로 연관된다. - 1권, P.70

  근대로 이행과정에서 성은 어둠 속에 침잠한다. 그것은 섹스를 ‘비밀’스런 것으로 운명지어버린 과정에 놓여 있다. 그래서 오히려 끊임없이 증폭되고 오해되고 억압받아 온 것은 아닐까? 기독교적 윤리의 토대를 이루고 있는 기원후 1~4세기 문헌들을 고찰하려는 미셸 푸코 태도는 일견 당연해 보인다. 그 발원지를 찾아 변형 혹은 왜곡 된 사적 과정을 고찰하려는 것은 현재를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 다만 쾌락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그것을 통제하는 권력과 지식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의문이 남는다.

  교묘하게 비틀고 가리고 헤집으며 자유로운 사유 방식을 택하는 저자의 개방적 태도가 오히려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결론에 익숙하고 주장을 준비하고 있는 독자의 입장에서 보면 어리둥절하게 1권이 끝나 버린다.

  쾌락은 도덕적으로 옳지 않은가? 대답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도덕이란 무엇인가? 우선 저자가 ‘도덕’을 어떻게 정의하는지 살펴보자.

‘도덕’이란 단어의 모호성은 다들 알고 있다. 이것은 가족, 교육기관, 교회 등과 같은 다양한 규제체제를 통해 개인이나 그룹들에 제시되는 행동규칙과 가치들의 총체를 의미한다. -2권, P. 41

  쾌락의 활용에 대해 논하고 있는 2권은 형식면에서 서론과 결론을 갖추고 있다. 세 권 중에서 가장 재미있게(?) 읽었다. 양생술과 가정관리술, 연애술과 진정한 사랑에 대해 논하고 있는 2권은 전 기독교 시대의 쾌락에 대해 역사적으로 추적하고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그리스와 로마에서 논의됐던 쾌락의 종류와 의미를 살펴보고 그것을 대하는 태도와 방법을 논한다. 그것은 단순히 사적 전개 과정을 보여주는데 그치지 않고 진정한 사랑의 의미가 무엇인지 인간의 삶에서 쾌락이란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인지 돌아보게 하는 역할을 한다.

  남성과 여성의 차이와 오해에서 비롯되는 관계 설정. 그것이 도덕과 결합될 때 빚어지는 억압의 메커니즘과 교묘한 틀이 숨어 있다. 우리는 그것을 바라보고 있다. 1권이 1976년에 발간되고 8년이 지나 2권과 3권이 출판된다. 현재적 의미를 살펴보는 것보다 그것을 밝히기 위해서는 우선 과거로의 여행을 떠났을 저자를 생각하며 그 이후의 이야기들이 더없이 궁금해진다. 4권으로 출판 예정이었던 ‘육체의 고백’을 기다려 보면 조금은 궁금증이 풀릴 듯도 하다.

성적 활동이 이와 같이 도덕적 평가와 구분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성행위가 그 자체로 하나의 악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이 원죄의 표지를 지니고 있기 때문도 아니다. - 2권, P. 64

  인류가 활용해 온 쾌락은 도덕적 평가의 대상이 아니다. 기독교적 윤리로서 악이나 원죄로서 바라보아서는 결코 그 의미와 삶의 연관성을 찾아낼 수 없다는 이야기로 들린다. 결혼과 가정, 연애와 소년애에 대한 상세한 서술과 고찰은 그 갈피 속에서 드러나는 의미들을 읽어내야 한다. 미셸 푸코는 문장들 사이에 여백과 생략이 많다. 결론짓고 정리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그것들을 모조리 독자에게 숙제로 남긴다. 아니 그 텍스트를 대하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해석해 달라는 주문은 아니겠지만 수많은 가능성과 상상력과 사유의 단초들을 열오 놓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

  마지막 3권에서 내세운 주제는 ‘자기 배려’이다. 그런데 이 자기 배려는 협소한 이기적 관점이 아니다. 국가의 관점에서 영속적인 사회를 유지하려는 태도나 어떤 질서 그리고 자연 질서와 합일되는 전통 속에서 자신의 쾌락을 꿈꾸게 하고 있다. 고대의 전통이 사라진 시대, 근대를 거치면서 우리는 그 자연스럽고 질서 정연한 전통과 결별한 것은 아닐까? 육체적 관점과 아내, 그리고 소년들을 통해 ‘성’과 사랑이 지닌 의미와 질서들을 일별하는 것이 3권의 내용이다.

  교양 있는 인간형이란 자신의 육체는 물론 조화롭게 계발된 정신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정치적 인간으로 이상형은 이렇듯 쾌락을 조절하고 아내는 물론 다른 소년들과의 관계 들이 국가의 정치적, 문화적 개념 속에서 검토되어야 한다. 이러한 전통들이 오늘에 되새겨져야 한다는 주장은 물론 아닐 것이다. 저자는 이런 관점과 논의들 속에서 진정한 쾌락은 자신에 대한 배려와 관계들 속에서 맺어지는 ‘절제’에서 찾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억압과 권력의 구조가 아니라 스스로의 선택과 주체적인 삶이 주는 행복에서 우리는 한 발 멀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자연이 성적 쾌락에 부여한 상위기능, 성적 쾌락이 전달하고 따라서 소모시켜야 할 물질의 가치, 바로 이런 것들이 성적 쾌락을 질병에 근접시키는 것이다. 1, 2세기의 의사들이 그 같은 양면성을 최초로, 그리고 유일하게 표명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러한 양면성에 대해 과거에 입증된 것보다 더 발전되고 더 복잡하며, 더 체계적인 병리학을 기술하였다. - 3권, P. 135

  의사들과 철학자들의 공모로부터 기독교의 윤리는 시작되었다. 신과 인간의 관계를 잘못 이해하고 왜곡된 종교는 인간의 삶의 황폐화한다. 신의 존재 여부를 떠나 자연이 인간에게 부여한 육체로부터 모든 것은 시작된다. 종족이 보존되고 또 하나의 쾌락을 추구하기 위한 ‘성’이 문화와 역사적 관점에서 어떤 양상으로 변모되었는지 살펴보는 것은 탈근대의 시각에서 접근해 보아야 할 문제는 아닌가? 아니면, 21세기를 살아가야 하는 나의 삶에 대한 또 다른 시각과 통찰을 위한 인식 도구로서 역할을 해야 하는가?


080108-00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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