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절한 복희씨
박완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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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아버지, 할머니는 아버지가 결혼도 하시기 전에 돌아가셨다. 아버지의 늦은 결혼 탓도 있겠지만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넘치는 사랑을 받아 본 적 없는 나의 아쉬움은 나이 들면서 커져만 간다. 그 분들에 대한 추억도 없고 기억도 없다. 외할아버지는 자주 뵙지 못하다가 초등학교 2학년 때인가 돌아가셨고 결코 살갑지 않았던 외할머니는 중학교에 입학할 무렵 외삼촌과 미국으로 이민을 가셨다.

  개인적으로 가족의 울타리와 그 안에서 마주치는 문제들을 되짚어 보게 하는 박완서의 <친절한 복희씨>는 여성과 가족에 관한 소설이다. 그것도 중년을 넘긴 아낙들의 이야기다. 여성 중심이며 가족의 한계를 넘어서지 않는 범위에서 벌어지는 일상사의 보고서에 가까울만큼 친근하고 세심하다. 그 마음의 갈피갈피를 잡아내고 표현해내는 솜씨는 오랜 시간 동안 공력을 쏟아본 소설가의 내공을 충분히 짐작하게 한다.

  박완서의 소설은 우리가 알고 있는 인위적 허구의 세계를 뛰어 넘는다. 우리가 알고 있는 상식의 세계와 일상사를 샅샅이 훑어내는 입담은 글말보다 구전문학에 가깝다. 구수하고 정겹기만 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옛 이야기를 들려주던 할머니의 막힘없는 솜씨처럼 부드럽고 자연스럽다. 불편하거나 작위적인 느낌이 없다는 것은 장점일 수도 단점일 수도 있다. 독자의 취향과 소설에 대한 편견으로 읽는 재미와 감각이 조금씩 다를 수도 있을 것 같다.

  21세기의 화두를 환경과 여성이라고 했던 이윤기와 최열의 대담이 생각난다. 아주 오랫동안 잊고 살았는지도 모른다. 어머니와 할머니의 삶의 그림자에 대해. 항상 물과 공기처럼 불편을 최소하고 보이지 않는 곳까지 세심하게 살펴주는 그들의 손길의 고마움과 섬세한 마음들을 우리는 자주 잊고 사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딸과 아내, 어머니와 할머니의 이름으로 살아왔고 살아가고 있는 이 땅의 여성들에게 보내는 작가의 시선은 따스하다.

  작가의 개인적 이력이나 늦은 등단에 대한 관심들이 작품 세계를 설명해 주지는 않는다. 마흔이 넘은 나이에 소설을 쓰기 시작해서 80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소설집을 내는 모습은 분명 힘겨운 자기와의 싸움이며 소설가로서 영광스런 일이다. 꾸준한 독자와 작품 세계에 대한 자신감은 아름다운 모습이다. 박완서의 소설은 특유의 날카로운 시선과 빈틈없는 관찰로 빚어내는 천의무봉처럼 물흐르듯 자연스런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긴장과 건너기 힘든 깊은 골짜기들을 상세하게 들여다보고 있다. 또 그것을 억지스런 설정이나 상황이 아니라 보고 듣고 느낀 그대로 서술하듯이 막힘이 없다. 있는 사실 그대로를 전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마치 그런 느낌으로 읽히는 단편들이다.

  철저하게 1인칭 여성 화자의 입장에서 남편과 아들과 며느리와 손주들과 주변의 친구들을 대상으로 엮어내는 이야기들은 대단히 사적인 영역에 머문다. 사회적 환경과 인물들로 대표되지 못하기 때문에 일반화에는 어려움이 있다. 하지만 특수한 관계로 보기에는 어딘지 모두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킬 만한 요소들이 내재되어 있다. 이것이 박완서 소설이 가지고 있는 힘이 아닐까 싶다.

  이제 어쩌면 그녀의 소설집을 만날 수 없을 지도 모른다. 아랍 문화권에서 판매 금지 처분을 받은 마르케스의 <슬픈 창녀들의 추억>처럼 인생의 끝자락에서 삶을 관조하는, 하지만 자유로운 작품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지도 모른다. 안목과 사고의 폭이 지니는 한계는 어느 작가에게나 작용한다. 박완서도 자신의 입장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한계는 있다. 하지만 나처럼 그의 소설을 어머니를 위해서 사는 사람도 있다. 친구와 마을 문고 책장 한쪽 벽면 먼저 읽기 내기를 했다는 어머니의 추억도 박완서의 그것들과 유사한 점이 많을 것이다. 소설을 읽는 내내 어머니를 떠올렸다. ‘그 남자네 집’과 같은 추억은 없었을까. 촛불 밝힌 식탁의 어머니와 같은 마음이셨을 텐데.  상황과 입장은 달라도 공감할 수 있는 부분들에서 독자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체험을 객관화시키고 카타르시스를 얻기도 한다.

  이 책에 실린 9편의 단편은 실버 세대의 문학이라고 명명해도 좋을 만한 작품들이다. 후반생에 대한 소소하고 시시콜콜한 일상들과 고민들이 결코 작다고는 할 수 없다. 어차피 우리들이 살아가는 인생의 단면들은 시대와 나이를 불문하고 그 순간에는 가장 격렬하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그려본 적도 없는 노년의 내 모습과 고민들은 어떤 것들일 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순간처럼 스치듯 지나가는 인생사에 대한 깊은 성찰도 반성도 필요하지 않은 것은 아닐까. 그저 나와 함께 하는 많은 사람들에 대한 애정과 나의 주체성에 대한 고민만이 오롯이 남겨지는 것은 멀리 혹은 가까이, 넓게 혹은 좁게 세상을 바라보는 하나의 시선이 부족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번 주말에는 이 책을 들고 가야겠다. 어머니께.


071207-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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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사적 소유, 국가의 기원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65
프리드리히 엥겔스 지음, 김경미 옮김 / 책세상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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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가족 행복 시대를 내건 정동영은 대선에서 승리할 수 있을까? 국가가 가족의 행복을 책임지겠다는 발상이 재미있다. 이 슬로건에는 일자리 창출이나 가정 경제에 국한된 문제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읽어낼 수 있지만 돈만 있으면 가족이 행복해질 수 있다는 발상이 위험해 보이기도 하다. 물론 오로지 ‘돈’ 때문에 불행할 수밖에 없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공감할 수 있는 공약이 될 수도 있겠지만 단순하게 접근할 수 없는 많은 문제들을 함의하고 있다.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19세기에 바라본 결혼과 가족은 어떤 의미였을지 잘 살펴 볼 수 있는 책이 <가족, 사적 소유, 국가의 기원>이다. ‘책세상’의 고전시리즈로 나온 이 책은 모건의 <고대사회>에 대한 엥겔스의 생각을 정리한 책이다. 역사적 관점에서 결혼과 가족의 형태가 어떤 변화 과정을 거쳤는지는 매우 중요하다. 인간과 사회를 이해하는 단서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국가의 최소 단위가 가족이라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개인이 최초로 관계 맺는 사회는 가족이다. 엥겔스는 국가의 기원을 살펴보기 위해 최소 단위에 먼저 관심을 가졌다. 하지만 이 책은 전문을 번역한 책이 아니라 전체 9장 중에서 1장과 2장만을 싣고 있다. 3장부터 9장까지는 구체적이고 상세한 내용을 설명한 것에 불과하지만 제한된 분량과 시리즈의 특성을 감안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고전의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토대를 마련하는 것은 결코 쉽지가 않다. 씨줄과 날줄처럼 얽혀있는 역사와 사회, 문화와 사상을 주유하는 일은 단순한 산책으로 여겨 즐겁기도 하지만 점점 복잡해지는 미로와 같이 느껴질 때도 있다.

  군혼 형태를 띤 혈연 가족은 원시 사회가 보여준 인류 최초의 결혼과 가족 제도의 모습이었다. 부모 자식 혹은 형제 자매 간의 성교 금지에서 출발한 푸날루아 가족과 대우혼을 거쳐 일부일처제로 정착하기까지 인류의 성의 역사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한 형태로 변모해왔다. 여성 중심의 모계 사회가 주류를 이루었고 자녀에게 재산 상속이 이루어질 수 없었던 시대에 비하면 결혼의 역사는 남성 권력의 강화와 여성 권위가 뒤바뀌는 상황의 연속이었다. 현재까지도 여전히 확고하게 굳어있는 가부장제와 차별적 시선들은 결혼과 가족제도의 왜곡된 변형 그리고 사유 재산 제도의 변천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18세기 계몽주의에서 물려받은 지극히 불합리한 관념 가운데 하나는 사회 발전의 초기에 여성이 남성의 노예였다는 점이다. 모든 야만인 그리고 낮은 단계와 중간 단계의 미개인, 부분적으로는 높은 단계의 미개인들의 경우에도 여성은 자유로울 뿐 아니라, 존경받는 지위에 있었다. - P. 77

  사적 소유를 부정하고 노동 해방을 꿈꾸었던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생각은 여성 문제에 대한 인식도 공유했다. 사회 발전 초기에 여성이 어떤 모습이었고 어떤 존재였는지 따져보는 일보다 중요한 것은 현실에서 여성의 모습이다. 일부일처제가 오로지 여자에게만 해당될 뿐이라는 인식은 엥겔스의 결혼과 여성에 대한 인식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실제 삶에서도 엥겔스는 부르주아적 일부일처제를 혐오했고 가족을 만들지도 않았으면 쓸쓸하게 죽음을 맞이했지만 그는 신념을 행동으로 보여주었고 웅변보다 감동적인 실천이 무엇인가를 선언하듯 죽었다. 우리가 흔히 시대정신(Zeitgeist)이라고 말하는 것이 있다. 엥겔스가 살아가던 시대의 시대정신은 ‘혁명 정신’이었을 것이다. 사회의 변혁과 혼란 속에서 그것을 지켜보고 온몸으로 소용돌이의 중심에 서기도 했으며 좌절과 실패를 맛보기도 했지만 그들의 실천적 노력은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결혼과 가족 제도에 대한 견해와 그의 이론도 마찬가지이다.

일부일처제와 나란히 노예 제도가 존재한다는 것, 즉 남자의 처분에 맡겨진 젋고 아름다운 여자 노예가 존재한다는 점이 애초부터 일부일처제가 오로지 여자에게만 해당될 뿐, 남자에게는 그렇지 않다는 독특한 특성을 보여준다. 그리고 일부일처제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이러한 특성을 보인다. - P. 98

  군혼에 비해 단혼이 가지는 이익과 행복은 절반의 것이다. 현재 가장 보편적으로 시행되고 있는 단혼은 최초의 계급적 억압을 초래했으며 노예제와 사적 소유와 함께 오늘날까지 지속되는 불합리한 제도라는 것이 엥겔스의 인식이다. 모든 진보는 상대적 퇴보이며 한쪽의 발전과 행복은 다른 쪽의 고통과 억압이라는 말은 지금 현재 우리들이 살아가는 시대 정신을 대변하는 것 같아 오래도록 가슴에 남는다. 

역사에 나타난 최초의 계급 대립은 단혼에서 남편과 아내의 적대의 발전과 일치하고, 최초의 계급 억압은 남성에 의한 여성 억압과 일치한다. 단혼은 위대한 역사적 진보 중 하나지만, 동시에 노예제나 사적 소유와 함께 오늘날까지 계속되는, 즉 모든 진보가 동시에 상대적 퇴보이며 한쪽의 행복과 발전이 다른 쪽의 고통과 억압으로 관철되는 시대를 열었다. - P. 102


071204-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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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세상에 홀리다 - 신화, 종교, 과학에 얽힌 시각적 경이로움의 역사
줄리언 스팰딩 지음, 김병화 옮김 / 세미콜론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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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우리의 의식을 만들기 시작하는 것은 보는 것(seeing)이다. 시각적 정보에 의해 모든 사건과 사물들이 우리에게 정보를 제공한다. 그것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 의해 결정되며 그 시선은 간단하지 않은 우리들의 의식구조와 인식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본다는 것은 인식하는 것이고 인식하게 되면 우리는 그것을 안다고 이야기한다.

  시각적 정보를 통해 우리는 세상과 만난다.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지만 1차적이고 즉자적인 정보는 오로지 시각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다른 감각들의 중요성이 덜하다는 것은 아니지만 인식의 차원에서 본다면 언어의 사용을 위한 청각보다도 우선적이다. 머릿속에 갈무리 되지 않은 언어의 개념은 무용하다. 기표(記表·Signifiant)는 기의(記意·signifie)를 전제로하는데 기표는 감각적 이미지의 재현으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예술은 시각으로부터 출발한다는 당연한 진술이 나온다. 줄리언 스팰딩은 예술을 봄(seeing)으로부터 출발한다. <미술, 세상을 홀리다>는 출판사의 책 제목에 대한 고민이 담겨 있지만 책 내용을 그다지 잘 담아내지도 못했고, 진부한 방식의 답습으로 강한 인상도 흡인력 있는 문구도 제시하지 못한 채 밋밋하게 ‘○○, ○○하다’는 제목이 주는 안정감에 편승하고 있어 조금 아쉽다. 번역서의 제목은 책의 이미지와 판매부수에 결정적인 요소임을 모르지 않았을 텐데 고민이 부족하지 않았나 싶다. 제목을 시비 거는 이유는 훌륭한 내용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했다는 안타까움의 다른 표현이다.

  이 책은 다른 미술관련 책들과 많이 다르다. 우선 미술사를 표방하고 있지만 연대기적 서술이나 유파별 혹은 작가별 서술은 찾아볼 수가 없다. 미술사를 통찰하는 유일한 기준은 ‘경이로움(wonder)’이다. 책의 원제가 ‘경이로움의 예술(Art of Wonder): 보는 행위의 역사(A History of Seeing)’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영국의 큐레이터이자 미술사가인 저자는 미술에 대한 또 하나의 접근 방식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시각에 의한 미술과의 만남은 1차적이고 가장 본질적인 접근이다. 보는 행위를 통해서 비로소 마주할 수 있는 수많은 미술과의 만남을 주선하는 자리에 독자들은 참석하지 않을 수가 없다.

 “진정한 발견의 여정은 새로운 풍경을 찾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눈을 새롭게 하는 데 있다.”는 프랑스 소설가 마르셸 프루스트의 말로 시작되는 이 책은 미술 뿐만 아니라 자아와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과 시각의 중요성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여행의 중요성은 장소가 아니라 동행하는 사람인 것과 같이 무언가 깨달음과 각성이 필요하다면 새로운 풍경을 쫓을 것이 아니라 새롭게 눈을 떠야 한다는 전언을 읽어낼 수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많은 것들에 대한 오해와 관심은 사실 편견의 다른 이름인지도 모른다. 보이지 않는 부분에 대해 말할 수 없지만 보이는 것조차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본다는 것(seeing) 자체에서, 우리 눈만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보는 과정에서 또다시 놀라운 것이 발견될 것이다. 사적 경험의 감정적이고 도덕적인 세계는 지금까지 사실관계만을 따지는 과학적 탐구 분야에서 오랫동안 배제되어 왔지만, 이제는 탐구의 대상이 되고 있다. 하지만 이곳 역시 예술가가 활동할 풍요롭고 다채로운 사냥터이다. 의식, 죽음의 인식, 예술 제작은 모두 서로 연관되어 있을 수 있고, 이러한 연관성이 바로 우리와 다른 생물, 심지어는 우리의 가장 가까운 친척인 네안데르탈인과의 차이일 수도 있다. 우리가 볼 수 없는 지평선이 눈앞에 펼쳐져 있다. 우리 경험의 핵심적 본질인 감정과 생각은 그 지평선에서 다시 한 번 경이감에 사로잡힐 것이다. 결국은 우리 눈에 별이 있는지도 모른다. - P. 315

  예술의 발생과 기원으로부터 출발해서 현대 미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예술적 표현과 흐름들을 재미있고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저자의 노력은 책 곳곳에 배어있다. 우선 책날개 부분을 활용한 삽화들과 사진들은 낯선 작품과 애매한 느낌을 즉각 해소시켜 주는 시각 자료로서 충분한 역할을 한다. 본문에 삽입된 그림이나 사진 자료는 물론이지만 엄청난 양의 자료들을 크기와 편집을 통해 적절하게 그리고 다양하게 배열하고 있어 가독성을 떨어뜨리지 않으면서도 이해하기 쉬운 장점을 지니고 있다.

  과학과 종교는 신화를 바탕으로 한다. 특히 서양 예술은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신화의 시대부터 종교의 세기 그리고 과학적 합리성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에피소드와 예술적 경향들 그리고 작가들의 노력이 작품을 통해 제시된다. 아프리카 미술에 대한 조예가 깊은 저자는 해박한 지식과 인문학적 배경으로 예술과 역사 그리고 색다른 예술의 세계를 소개한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진부한 표현을 떠올리게 하는 이 책은 미술을 이해하는 또 하나의 방법으로 오래 기억될 것이다.

  별과 태양과 달, 탄생과 죽음, 빛과 어둠 등 주제별로 엮어내는 이야기들은 하나의 작은 이야기로 묶이면서 전체가 미술사 전체를 조망하도록 치밀하게 구성되어 있는 책이다. 계획한다고 해서 아무나 쓸 수 없는 책임은 물론이다. 일견 부럽기도 하고 번역서가 가지는 다소 딱딱하고 건조한 문장이 가지는 아쉬움이 남기도 하는 책이다. 어쨌든 대중적인 미술사로 이만한 책은 만나기가 쉽지 않다. 책을 번역한 김병화가 인용한 마티스의 말을 다시 한 번 음미하며 책장을 덮는다.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보는 모든 것들은 후천적인 습관에 따라 다소 왜곡된다. 이런 현상은 영화 포스터와 잡지들이 온갖 틀에 박힌 이미지를 쏟아 내는 오늘날 더욱 자명해 보인다. 편견이 마음을 오염하든 이런 이미지는 눈을 오염한다. 왜곡 없이 사물을 보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이 용기는 모든 대상을 항상 처음 보듯 대해야 하는 화가에게 반드시 필요하다. 어린아이와 똑 같은 눈으로 삶을 바라보아야 한다. 이 능력이 없으면 자신을 독창적이고 개인적인 형태로 표현할 수 없다.” - P. 321(마티스)


071202-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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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7-12-03 0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관심도서로 보관해 놓은지 좀 되었는데...언제 읽게 될런지.^^

sceptic 2007-12-04 09:03   좋아요 0 | URL
묵혀 두었다가 마음의 여유가 생기실 때 읽어보셔도 괜찮을 듯 싶습니다...^^
 
근원수필 범우 한국 문예 신서 1
김용준 지음 / 범우사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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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마지막으로 책을 선물 받아 본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선물에 익숙치 않은 탓도 있겠지만 나와 책에 대한 잘못된 선입견도 한 몫 하는 것 같다. 어쨌든 오랜만에 책 한 권을 받아 들고 감회가 새로웠다. 김용준의 <근원수필>은 그렇게 내게로 왔다.

  근원近園은 김용준의 호를 말한다. 선부(善夫), 검려(黔驢), 우산(牛山), 노시산방주인(老枾山房主人) 등 자신의 호와 관련된 이야기들이 책에 자세하게 소개되어 있다. 참으로 담박하고 진솔하며 고졸한 맛이 느껴지는 글들이다. 시는 지용 소설은 태준이라 했다지만 김용준의 글은 문학과 비문학의 경계를 넘나들며 간결하고 격조 높은 문장의 힘이 느껴진다. 부드러우면서도 힘 있고 낭랑하면서도 팽팽한 긴장의 끈을 놓치지 않고 있다.

  개성이 가장 강하게 그리고 고스란히 드러나는 글이 수필이다. 글쓰기의 마지막 단계이며 자유스러운 만큼 부담스럽고 치우치기 쉬운 형태의 글을 ‘수필’이라 칭한다면 근원수필은 그 본령을 보여주고 있다. 내가 수필을 읽지 않는 이유는 대개의 경우 자신의 사념과 소소한 일상사에 대한 단상이거나 감상적인 멋 부리기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지나치게 남의 글을 폄하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공감하거나 이해하고 싶지 않은 부분들이 많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김용준의 글은 60여 년 전의 글임에도 불구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하게 된다.
분량에 상관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고결한 맛을 잃지 않으며 차고 넘치지도 않고 부족해서 미흡하지도 않다. 딱 적당하게 그 만큼만 말하는 절제의 미덕과 중국의 고전 등 해박한 지식, 사물에 대한 애정에서 비롯되는 따뜻한 감수성은 글을 읽는 맛의 절정을 느끼게 한다.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살아간다는 일의 행복과 사람과 사물에 대한 애정을 잃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의 행복을 고스란히 간직한 김용준의 <근원수필>은 올해 놓칠 뻔 했던 귀중한 책으로 기억될 것이다. 몰라서 읽지 못하는 책들이 얼마나 많은가 새삼 깨달았고 책의 숲을 거닐며 얻게 되는 즐거움에 대해 다시 한 번 감사하게 되었다.

  2004년에 수능을 치렀던 수험생들은 언어영역에서 만났던 지문으로 기억할 것이다. 김용준의 ‘게’가 출제되었기 때문이다. 2000년에 출제되었던 최순우의 ‘무량수전 배흘림 기둥에 기대어 서서’가 보다 알려지지 않았던 이유는 월북했다는 이유 때문에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김용준은 1904년에 태어나 1950년 6.25가 발발해 9월에 월북해서 평양미술대학 교수를 지내고 1967년에 세상을 등졌다. 서울대 미대가 만들어질 때 중추적인 역할을 했지만 우리 사회의 레드 콤플렉스의 영향으로 빛을 보지 못했던 안타까운 또 하나의 예술가였다. 백석, 정지용, 이용악, 김기림과 같은 시인들과 이태준, 홍명희, 이기영, 박태원 등의 소설가를 만나게 된 것은 1988년 이후의 일이다. 해금 작가에 대한 관심과 조명은 이제 불과 20년이 지났을 뿐이다. 아픈 역사와 과거를 상징하는 또 하나의 작가로 나는 김용준을 기억할 것이다.

  상황 속의 존재인 인간은 글쓰는 행위를 통해 자신의 존재와 정체성을 확인한다. 생활 속에서 글쓰기가 보편화된 21세기에 과연 글이란 어떤 것이며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저마다 다르겠지만 전범이 될 만한 모델이 필요하다. 곁에 두고 오래 읽을 수 있고 누구에게나 권할 만한 좋은 책으로 추천할 수 있겠다.

  오늘 윤대녕의 칼럼을 읽다가 토머스 울프의 소설 <그대 다시는 고향에 못 가리>에서 인용한 “더 큰 사랑을 찾기 위하여 지금 가장 사랑하는 친구를 잃어버릴 것. 더 큰 땅을 찾기 위하여 지금 그대가 딛고 있는 땅을 잃어버릴 것.”이라는 구절이 오래도록 여운이 남을 만한 문장을 발견했다. 잃어야 얻는다는 평범한 진리를 다시 한 번 확인했으며 얼마나 겸손하게 사람과 사물을 대하고 세상을 살아야 하는지 생각했다.

  시간이 지나고 세월이 흘러도 스스로에 대한 각성과 반성, 보다 깊은 사유와 성찰이 인생에 있어서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새삼 깨닫게 된다. 항상 낮은 자세로 배우고 익히며 무엇보다도 가슴속에 살아 숨 쉬는 뜨거운 열정과 세상에 대한 사랑을 확인하는 일이 중요함을 확인하게 된다. 오늘도 이렇게 하루를 살아냈다.


071128-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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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니 2007-11-29 16: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수필을 꽤 좋아하는 편이라, 반갑게 보관함에 담습니다. ^-^

sceptic 2007-11-29 23:28   좋아요 0 | URL
이 책은 추천해도 욕먹지 않을 것 같습니다. 글이야 개인적인 취향도 많이 작용하지만 저는 아주 즐겁게 읽었습니다.
 
지식인을 위한 변명
장 폴 사르트르 지음, 박정태 옮김 / 이학사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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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0년 전과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사르트르식으로 말하자면 지식인들의 사회적 위치가 달라졌고 특수성과 보편성 측면에서 고민거리가 줄었다. 지배계급인 부르주아의 속내를 폭로하거나 까발릴 것도 없이 너무나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이제 지식인의 역할은 행동과 실천만 남은 것일까? 그런 논리라면 모든 지식인은 활동가나 혁명가가 되어야 하나? 직접 움직이지 않는 지식인은 정체성에 혼란이 온 것이거나 사이비 지식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일본에서 사르트르가 3일간 강연했던 내용을 고스란히 살려 낸 책이 이번에 새로 발간된 <지식인을 위한 변명>이다. 고등학생까지 읽힐 목적으로 어려운 용어와 인용한 사람들에 대한 각주까지 상세하게 안내되어 있다. 가장 쉽고 이해하기 쉽게 펴낸 책이라고 볼 수 있지만 내용 자체의 어려움은 쉽게 희석되지 않는다. 구체적이고 친절한 해설이 따라붙지 않는 다음에야 한계가 있는 것이다.

  번역본이 보여주는 용어상의 한계는 ‘세계-내-존재, 준-의미작용, 비-지식’과 같은 철학용어는 그 자체의 의미가 이해되지 않는다. 사용된 맥락보다 먼저 개념이 잡히지 않으니 문맥 속의 의미를 잡아낼 뿐이다. 하이데거를 위시한 실존주의 철학이 성행했던 시기의 용어와 개념들은 우리의 사유 방식으로 이해하기가 만만치 않다. ‘존재’라는 개념 자체도 ‘be’동사가 없는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는 없는 개념이나 마찬가지라고 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것은 물론 번역의 문제가 아니라 한 언어가 다른 언어로 차용되면서 발생하는 당연하고 지극히 자연스런 현상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철학적 개념을 설명하는 책이 아니기 때문에 거칠게 훑고 넘어가도 사실은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는 퇴색하지 않는다. 동양사람인 일본인을 대상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던 사르트르가 강연을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흥미롭다. 서양과 동양의 구분이 아니라 패전의 멍에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일본인들은 우리 시각으로 보면 지독한 ‘빨갱이’였던 사르트르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수 있는 여유가 있었던 것일까? 어쨌든 이렇게 시간이 흘러도 그 의미와 약발이 떨어지지 않는 책을 고전이라고 한다면 이 책은 이미 고전의 반열에 올라섰다고 볼 수 있다.

  사르트의 어법은 강경하고 거칠다. 한국식으로 말하면, 그가 살아온 삶이 그러하듯이 올곧은 선비의 모습이다. 부러질지언정 구부러지지 않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문장에서 느껴지는 힘은 강연을 통해 전해지는 목소리만큼 분명하고 단호하다. 3일간의 강연을 통해 ‘지식인이란 무엇인가?’, ‘지식인의 기능’, ‘작가는 지식인인가?’에 대해 이야기 한다.

  강연에서 주로 다루어지고 있듯이 지식인은 불안한 존재다. 지배계급(부르주아)와 피지배계급(프롤레타리아) 사이에 위치한 중간자의 입장으로 지배자의 특수성과 피지배자의 보편성을 모두 간직한 모순적 존재로서 살아가야 하는 숙명이다. 결국 지배계급에 기대어 살아가 수밖에 없는 이들은 피지배 계급인 노동자 계급의 목표와 일치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두 계급 사이의 모순과 갈등 속에 존재할 수밖에 없지만 노동자 계급의 포괄주의와 보편성은 지식의 전문성과 일치한다. 따라서 특수성에 기댄 지식인의 삶은 필연적으로 모순이 생기게 되는데 바로 여기에 지식인의 역할과 기능이 있다. 삶의 외적 모순을 극복하고 내적인 갈등을 해소하는 차원에서 기능해야 하는 것이 지식인의 기능과 역할이라는 것이다. 노동자 계급의 보편주의에 기초한 지식인의 전문성은 결국 지배계급의 착취와 억압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시간이 흐르고 세상이 변했지만 소수자에 의한 다수의 지배는 더욱 공고해졌다. 지배계급의 헤게모니는 더욱 강력해졌으면 네트워크를 형성해가고 있다. 서서히 그 전모가 밝혀지는 검은 괴물 그룹 삼성이 그 증거이다. 산업자본은 현대 사회의 지배계급이다. 맑스주의에 기초한 사르트르의 사유는 멈출 줄 모르고 계속되는 자본의 증식과 거대화를 예견한 듯하다.

  21세기에도 여전히 유효한 사르트르의 사유 방식은 거칠지만 설득력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모든 인간은 ‘상황속의 존재’일 뿐이다. 지금 우리가 이 땅에서 지식인으로 자처하거나 그런 이름으로 불리워지는 사람들을 떠올려 본다. 그들의 과연 지식인인가? 지식인의 기능에 충실한가? 더불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작가는 지식인인가? 지식인인의 기준은 무엇인가? 기생충처럼 자본에 달라붙어 있거나 왜곡된 시선을 선전하는 사이비 지식인은 없는가? 두 눈 뜨고 지켜보는 것이 우리의 임무이며 지식인의 역할과 기능을 충실히 수행하는 참된 지식인을 만나고 싶은 것이 우리의 작은 소망이다. 아니, 어쩌면 우리 모두가 지식인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071127-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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