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춤출 수 없다면 혁명이 아니다! - 감춰진 것들과 좌파의 상상력
최세진 지음 / 메이데이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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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치적 성향이 좌파이든 우파이든 많은 사람들은 현실에서 혁명을 꿈꾸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한다. 지킬 것이 많은 사람들은 점점 더 견고한 성을 만들어 나간다. 지금 이대로가 좋다. 변하지 않고 좀 더 확고하게 기반을 다지고 싶어 한다. 이런 사람들을 기득권층 혹은 보수라고 부른다. 물론 물질적인 재산이나 권력, 명예의 높고 낮음으로 쉽게 좌우를 나눌 수는 없지만 대체적인 성향은 이것들의 소유 유무에 따라 달라진다. 아니 어쩌면 이념 때문에 그것들을 얼마나 간절히 원하는 삶을 살았느냐에 따른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생각의 차이가 모든 것을 바꾼다.

  사람들은 대체로 정치적 이념이나 성향을 쉽게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확실한 자기 신념이나 이론적 토대가 마련되어 있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고 자신의 정치적 성향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잘 모르거나 무관심할 수도 있다. 전체 사회의 구조적 모순이나 변화 가능성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다면 지금 현재 나의 삶이 쉽게 달라지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것은 사람들의 잘못이 아니다. 정치 따위에는 관심도 없지만 지금 이 순간 내가 행복하고 즐거울 수 있다면 좋겠다는 사람들의 생각은 절대로 욕심이 아니다. 어쩌면 너무 평범한 바람일 수도 있으니까. 세상은 바보처럼 우직한 사람들 때문에 조금씩 변화해 왔다. 그것은 거창한 이데올로기도 정치적 신념도 아니다. 사람이 사는 세상은 모름지기 이러해야 한다는 소박한 믿음과 그것을 실천에 옮긴 사람들에 의해 변화해 온 것이다.

  엠마 골드만의 말을 인용한 최세진의 <내가 춤출 수 없다면 혁명이 아니다>는 제목이 지나치게 강렬하다. 내용을 포괄하고도 남음이 있을 만큼. 세상을 살아가는 가장 강력한 무기 중의 하나는 상상력이다. 특히 이 책에서는 좌파적 상상력에 대해 이야기한다. 우리가 알지 못했던 것들의 이면을 살펴보고 드러난 현상에 만족하지 않으며 본질을 꼼꼼하게 살펴보는 일은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들 중 하나일 수 있다. 모르는 게 약이고 배속 편한 분들을 위한 책은 아닌 것 같다. 좋은 게 좋은 거고 이미 엎질러진 물이니 돌이킬 수 없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신상에 이로우며 대세를 쫓아가는 것이 편한 삶의 방식을 가진 분들게 권하고 싶은 책이지만 김규항의 말대로 그런 분들은 이런 책에 손도 대지 않는다.

  혁명은 거창한 대의명분도 범접할 수 없는 이데올로기도 아니다. 그저 생활 속에서 조금씩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믿음에 대한 실천이다. 사람들은 어느 순간 세상이 180° 뒤바뀌는 것만을 혁명이라고 배웠다. 프랑스 혁명, 동학혁명 등 성공이든 실패든 상관없이 기존의 질서와 틀을 완전히 버리고 전혀 다른 세상으로 진입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불온하고 과격하며 때론 폭력적이고 무서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전혀 틀리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것이 혁명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전부는 아니다.

예전에 ‘혁명은 어느 순간 펑하고 터지는 것’이라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아마 저 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이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사회의 급격한 질적 변화’는 어느 날 그렇게 급작스럽게 올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날’이 오기를, 혹은 ‘그날’은 올 것이라고 줄기차게 노래했습니다. 그래서 오로지 그날을 위해 참고, 희생하고, 결의하고, 투쟁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며 보니까 그날은 그렇게 오는 것이 아닌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혁명은 그날부터 시작하나고 믿었던 것은 잘못된 생각이었습니다. 사회, 정치, 경제, 문화, 의식의 급격한 변화가 어느 한 날에 일어날 리 없습니다. 오히려 그날은 오랜 논쟁과 투쟁, 반란의 결과물이고, 하루하루가 바로 그날이었습니다. 그 혁명은 나날이 계속되는 일상 속에 지속되는 삶 속에서 계속되고 있었고, 계속되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 ‘머리말’ 중에서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이 말 속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책을 펼치자마자 나온 이 대목을 읽다가 가슴이 먹먹해졌다. 온몸으로 부딪혀 살아온 사람만이 얻을 수 있는 깨달음이기 때문이다. 간접적으로 이 말을 전해 듣는 독자인 나는 최세진의 말을 제대로 이해했을까?

  이 책은 전체 4부로 구성되어 있다. SF라는 장르를 가지고 자본주의와 노동자의 관계를 미래의 로봇으로까지 확장시킨 소설과 영화를 소재로 풀어나가고 있다. 즐겁고 재미있는 해커들의 이야기는 ‘혁명’이라는 단어가 왜 즐거움과 연결될 수 있는지 그리고 상상력이 없으면 불가능 한 것이 혁명이라는 사실을 조금씩 알게 해 준다. 2부에서는 바그너, 쇼스타코비치, 마야코프스키 그리고 조지오웰과 존 레논, 피카소, 미야자키 하야오 등 우리에게 익숙한 예술가들이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무엇을 바꾸기 위해 노력했는지 그들의 삶과 예술을 통해 소개하고 있다. 첨바왐바의 노래와 기행들은 대중 음악을 통해서도 얼마든지 가능한 ‘혁명’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혁명은 즐거운 것이며 아름다운 것이다.

  일상에서 만날 수 있는 혹은 역사를 통해 엿볼 수 있는 사람들과 사연들은 우리 인간의 역사가 다름 아닌 혁명의 역사였음을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인터넷이라는 매체를 통해 세상은 얼마나 변화할 수 있으며 어떻게 변해가는 가를 보여주었던 대표적인 사건은 2002년 ‘효선이와 미순이’를 위한 촛불 집회였다. 그것을 계기로 통신의 역사와 좌파적 상상력으로 이루어낸 변화들을 살펴보는 마지막 4부는 미래를 위한 제언으로 읽힌다. 인터넷에선 모두가 평등하다는 순진한 생각을 버리라는 충고로 이 책은 끝이 나지만 저자가 보여주고자 했던 세상의 감추어진 진실들과 그것을 드러내는 방식들은 유쾌하고 즐겁게 보인다. 변화의 중심에서 혹은 고통과 억압의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나 예술들이 미래를 위한 현실의 희생으로만 비춰지진 않는다. 내가 춤출 수 있을 만큼 즐겁고 행복한 일이 아니라면 그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또 한 해가 저물어 가는 소리가 들리고 무언가 새로운 상상력이 필요하다면 이 책을 한 번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다르게 볼 수 있는 시선과 새로운 인생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우리들 스스로가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것이 혁명이다. 체 게바라의 거친 수염이 아니라 양복쟁이의 단정한 넥타이에서 혁명은 시작될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상업주의에 물든 체 게바라의 초상권 문제로 알베르또 꼬르다가 열받은 적이 있지만 평전에 붙어 사은품으로 온 목걸이를 나는 내일도 목에 걸고 출근을 해야겠다. 공짜로 얻는 체의 초상화가 그려진 목걸이를 걸고 현실 속의 혁명을 꿈꾼다면 체도 꼬르다도 이해하겠지...


071125-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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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문학과지성 시인선 335
김선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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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울비에 젖은 낙엽만큼 처연해 보이는 것도 드물다. 심장을 태울 듯 타올랐던 붉은 단풍과 강렬한 노오란 단풍잎이 11월 겨울비에 젖어가는 저녁 어스름의 불빛들은 불행을 위장한다. 화려했던 시간들은 뒤에 두고 떠나는 아쉬움을 그나마 위로해 줄 수 있는 것은 어둠이다. 낙화가 그러하듯이 첫사랑도 그러하다.

낙화, 첫사랑

1

그대가 아찔한 절벽 끝에서
바람의 얼굴로 서성인다면 그대를 부르지 않겠습니다
옷깃 부둥키며 수선스럽지 않겠습니다
그대에게 무슨 연유가 있겠거니
내 사랑의 몫으로
그대의 뒷모습을 마지막 순간까지 지켜보겠습니다
손 내밀지 않고 그대를 다 가지겠습니다

2

아주 조금만 먼저 바닥에 닿겠습니다
가장 낮게 엎드린 처마를 끌고
추락하는 그대의 속도를 앞지르겠습니다
내 생을 사랑하지 않고는
다른 생을 사랑할 수 없음을 늦게 알았습니다
그대보다 먼저 바닥에 닿아
강보에 아기를 받듯 온몸으로 나를 받겠습니다


  삼십대 후반에 이른 시인의 목소리는 생의 한가운데 서 있는 위태로움과 희미한 깨달음들이 듬성듬성 뒤섞여있다. 그녀의 목소리는 일반적인 시의 문법에서 조금 비켜 서 있다. 언어의 내밀한 조직들, 소리의 울림들이 잔잔하다. 어렵지 않은 단어들과 쉽게 닿는 문장들이 머리보다 먼저 가슴에 도달한다. 이해되기 전에 전달되어야 한다는 엘리어트의 말에 충실하다.

  여전히 시의 존재와 기능은 위태롭다. 시를 읽지 않는 시대는 낡은 유물처럼 식상해져 버렸다. 언어의 기능이 살아 있는 한 시를 읽는 사람과 시를 읽지 않는 사람은 존재한다. 이분법적 구분이 의미 있는 것이 아니라 시에게 다가가는 사람들이 마음들에 여유가 없어지는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들만의 리그가 되어 부대끼고 속삭이기도 하다가 세상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소통하고 고함을 지르기도 한다.

  그녀의 목소리는 그만큼 크지 않지만 작지 않은 진동을 느끼게 한다. 그것은 상황과 느낌에 따라 달라질 수 밖에 없다. 당연하게도 자신만의 몫에 대해서는 누구도 말해줄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생활이든 꿈이든, 현실이든 이상이든 관계없이. 어느 구석진 계절의 끝자락을 여미는 사람들의 가슴에 오롯이 전해질 수 있는 슬픔이 있다면 그녀의 시는 조용히 다가설 수 있겠다. 내 몸속에 잠든 이가 누구이든지 간에.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그대가 밀어 올린 꽃줄기 끝에서
그대가 피는 것인데
왜 내가 이다지도 떨리는지

그대가 피어 그대 몸속으로
꽃벌 한 마리 날아든 것인데
왜 내가 이다지도 아득한지
왜 내 몸이 이리도 뜨거운지

그대가 꽃 피는 것이
처음부터 내 일이었다는 듯이.


  앞의 두 가지 부류의 사람을 다른 방식으로 나누어 본다. 시를 읽는 사람과 시집을 읽는 사람. 그것은 왜 다른가? 한 편의 고운 시는 유행가 가사처럼 가슴에 스몄다가 모래위에 내린 비처럼 소리 없이 사라져 버리기도 하고 가슴에 낙인을 찍어 큰 상처를 남기기도 한다. 하지만 한 권의 시집은 하나의 흐름을 가지고 있다. 소리 없이 조용히 흐르는 강물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시인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며 참을성 있게 집중해야 한다. 낮은 목소리로 평화로운 오후의 햇살을 느끼게 하다가 역사의 뒤안길에서 울부짖는 처절한 삶을 노래하기도 한다. 김선우의 시집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는 그렇게 읽혔다. 큰 호흡과 느낌으로 한 권의 시집을 따라가다 보면 중간에 표제작을 만난다. 대표 선수를 만나 한 판 겨뤄보려는 심사가 아니라 제목으로 선택된 시의 갈피들을 조금 더 샅샅이 훑어보게 된다. 천천히 그리고 부드럽게.

꽃나무

꽃이 지고
누운 꽃은 말이 없고

딱 한 마리 멧새가
몸을 튕겨가는 딱 그만한 천지

하늘 겹겹 분분하다
낮눈처럼 그렇게

꽃이 눕고
누운 꽃이

일생에 단 한 번
자기의 밑을 올려다본다


  무엇을 노래하든 그것을 읽어내는 독자는 다른 음성으로 듣는다. 시의 운명은 그러하다. 내 곁에 누가 머물러 있는지 돌아보다가 두고 온 사람의 뒷모습만 안타깝게 그리워하기도 하는 것처럼 이미 작가에게서 떠나온 시들은 수런거리며 독자에게 가끔 엉뚱한 이야기를 전하기도 하는 것이다.

  내가 읽는 것은 시가 아니라 어쩌면 내 삶과 내 마음의 갈피들인지도 모르겠다. 창 밖에 천둥이 치고 번개처럼 금이 간 너의 얼굴을 보여주어도 나는 어둠 속에 내리는 겨울비의 ‘소리’에만 집중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거미

새벽잠 들려는데 이마가 간질거려
사박사박 소금밭 디디듯 익숙한 느낌
더듬어보니, 그다

무거운 나를 이고 살아주는
천장의 어디쯤에
보이지 않는 실끈의 뿌리를 심은 걸까

나의 어디쯤에 발 딛고 싶어하는지
알 수 없지만
그의 발은 魂처럼 가볍고
가벼움이 나를 흔들어
아득한 태풍이 시작되곤 하였다

내 이마를 건너가는 가여운 사랑아
오늘 밤 기꺼이 너에게 묶인다


  시인은 생활인이고 문명인이며 언어의 노예이다. 모든 존재 이유인 말들을 거미줄처럼 뱉어내야 하는 천형. 안타까움보다 더 깊은 마음으로 가끔씩만 그들에게 다가가고 싶어진다. 말해버리는 순간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버리는 건 아닐까? 그래서, 너에게 아니 모든 사람들에게 외치고 싶어지는 순간이 있다. ‘나 괜찮습니다’라고. 그리고 문득 고개를 들어 창 밖 어둠 속에 눈길을 건넨다.

‘너 괜찮은 거니?’라고.

내 고단함을 염려하는 그대 목소리 듣습니다
나, 괜찮습니다
그대여, 나 괜찮습니다
                                     - ‘사랑의 빗물 환하여 나 괜찮습니다’ 중에서



071123-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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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자
한강 지음 / 창비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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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인에 따라 결과가 명확하다면 나는 인생을 좀 더 잘 살 수 있었을 것이다. 다른 사람도 그렇겠지만 말이다. 현상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원인이 있을까? 그걸 알면 문제가 해결되거나 결과를 예측할 수 있을까? 행복은 앎에서 시작되는 것일까? 오늘도 끊임없는 의문부로로 가득한 인생을 기웃거린다.

  소설이 가장 대중적이고 쉬운 장르인 것만은 틀림없다. 그래서 더 어렵다. 소설 뒤에 ‘나부랭이’라는 말을 붙이기도 한다. 소설 나부랭이나 읽을 시간이 있으면 다른 걸 하라는 말을 하는 사람도 많다. 사실 읽고 나서 인생이 바뀌거나 먹먹한 감동에 목이 메이는 경우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소설은 호기심에 대한 욕망을 주체하기 힘든 사람들의 몫인지도 모른다. 타인의 삶이 궁금하거든 뒷담화에 골몰하지 말고 소설을 읽으면 된다. 현실에 존재하는 수많은 종류의 사람들 중 하나일 수도 있고, 하고 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찾기 힘든 독특한 인물들을 만날 수도 있는 것이 소설이다. 살아 숨쉬는 활자들 속을 헤집다 보면 현실은 환상이 되고 현실은 하나의 허망한 꿈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아름다움은 여러 가지 형태로 드러난다. 언어 자체가 드러내는 명징한 광휘. 이것은 보통 시가 우리에게 선사하는 즐거움이다. 말들이 수런거리고 그 말들이 만들어내는 풍성함과 흥성스러움은 말들의 잔치이다. 소설이 전하는 즐거움은 여기에 해당될 것이다. 그러나 작가에 따라 말들을 풀어놓고 조이고 다듬는 방식은 전혀 다르게 나타난다. 소설가 한강의 연작 소설 <채식주의자>는 독자들에게 아름다움을 만들어주지 못한다. 구차한 삶의 이면을 드러내는 방식은 제각각이지만 가장 기본적이고 본능적인 음식에 관한 이야기는 더욱 그러하다. 거식증은 그냥 생기는 병이 아닐 것이다.

  영혜는 꿈을 꾼다. 모든 것은 꿈 때문이다. 지나치게 평범해서 아무것도 문제될 것 없는 사람으로 보이는 사람을 조심하라. 꿈에 드러난 메시지는 환상이며 비현실적이지만 무의식에 내재된 또 다른 욕망의 표현일 수도 있다. 문명을 가꾸어 살아가는 인간에게 감추어진 야성과 본능적인 충동에 대해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통로가 차단된 채 길들여지고 현실에 매몰되어가는 우리들에게 영혜는 또 다른 자아의 모습으로 비춰진다.

  어떤 것에든 열정을 쏟고 싶지만 쉽사리 드러나지 않는 내면의 풍경들이 고기에 대한 거부로 표현된다. 채식만을 고집하겠다는 이데올로기나 신념이 아니라 단순히 고기와 냄새에 대한 혐오감이 생기면서 그녀는 달라진다. 잠이 줄어들고, 고기를 못 먹는 차원을 넘어 음식 자체를 거부하기 시작한다. 거식증은 삶을 포기하겠다는 그녀의 선언처럼 들린다. 자살로 귀결되는 생의 허무주의가 아니라, 생명 자체에 대한 반성으로 이어진다. 정신 병원에 입원한 환자를 통해 삶을 반성한다는 것이 기괴할 수도 있겠으나 생각의 한 귀퉁이가 떨어져 나간 것이다.

  ‘몽고반점’은 2005년에 이상 문학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연작은 ‘채식주의자-몽고반점-나무불꽃’으로 이어지는 연작의 하나였다. 세 편의 소설이 정교하게 얽혀있다. 동일한 등장인물이 각자의 입장에서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영혜와 인혜의 남편이자 영혜의 형부 그리고 인혜의 목소리를 통해 서로 다른 소통 방식을 선택한다. 물론 이 소통은 인물들 간의 소통이기도 하지만 작가와 독자와의 소통이기도 하다. 세상과 소통하지 못하고 사람과 소통하지 못하고 차라리 ‘나무’가 되고 싶은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한강의 다른 소설들을 읽지 않아 그녀의 소설에 대해 속단하긴 어렵다. 쓴 것보다 써야할 것이 많은 작가라고 믿고 싶다. 후기에 썼듯이 볼펜으로 자판을 눌러가며 한 자씩 꼽씹었을 작가의 수고는 화려한 문장이 아니라 담백하고 속 깊은 영혼의 한 자락을 짚어내고 있다.

  오래된 친구와 기분 좋은 술 한 잔, 그리고 긴 수다 - 참치 살점을 들다가 문득, 영혜가 생각났었다. 그리고 또 잊어버리겠지만 그녀가 거부한 것이 고기만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고기를 볼 때마다 문득 그녀가 떠오를지도 모르겠다. 채식주의는 생명에 대한 외경과 거리가 멀다. 채식도 생명이니까. 소설이 전하는 메시지에 굳이 귀를 기울여야 할 필요는 없겠지만, 작가의 의도와 무관하게 <채식주의자>는 잡히지 않고, 보이지 않을 것 같은 심연으로부터 전해지는 고주파의 신호음과 유사한 느낌이다. 교신할 수 없다면 쉽게 다음을 이야기할 수도 없는 것이 아닐까? 우리의 삶도 어쩌면 끊임없이 누군가와의 교신을 시도하며 보이지 않는 신호를 보내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 혹은 그녀가 그것을 받아들이든 거부하든 간에 말이다.


071122-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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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
페터 회 지음, 박현주 옮김 / 마음산책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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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람들이 진정으로 냉담해질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긴장할 수는 있겠지만 냉담해질 수는 없다. 삶의 본질은 온기다. - P. 475

  자기 보호 본능으로 냉담을 가장해 위악을 떠는 사람이 있다. 상처받기 쉬운 영혼은 본능적으로 타인과의 거리를 유지하며 쉽게 마음을 열지 않고 냉랭한 시선으로 세상과 사람들을 관찰한다. 긴장은 냉담으로 이어지지만 한없이 외롭고 쓸쓸하다. 인간은 결국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삶의 본질을 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따뜻한 온기가 바탕이 되어야 사람이 살아간다고 말할 수 있다. 가족에서 발원한 그 온기는 타인에게 전이되고 사회와 세계로 전파되어야 한다. 우리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그렇다. 삶의 본질은 온기다!

  눈처럼 희고 눈부신 환상과 몽환의 공간쯤으로 상상되는 것이 북극의 나라들이다. 얼음과 눈의 나라로 상상할 뿐 가보지 못한 곳에 대한 편견과 상상은 그곳의 삶을 왜곡하기에 충분하기까지 하다. <인어공주>외에 덴마크의 어떤 작가를 알고 있는지 생각해 볼 필요도 없다. 한 번도 읽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페터 회의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은 그만큼 신선하지만 생경한 풍경으로 다가온다.

  덴마크 북쪽 동토의 땅으로 알고 있는 그린란드는 고교 시절 지리 시간에 그 존재 사실을 확인한 이후 없는 장소와 같았다. 적어도 이 소설을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작가는 자신이 발 딛고 살아가는 삶의 현장에서 소재를 취하고 호흡하는 것이 기본이다. 그러면 독자들은 자연스럽게 작가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깊이 빠져들게 된다. 이 책은 눈과 얼음으로 뒤덮힌 북극에 관한 보고서로 읽어도 좋을 만큼 이국적이고 신선하다.

  이사야라는 한 아이의 죽음으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스밀라의 아이도 아니다. 그저 한 아이에 대한 애정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알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모든 소설이, 아니 우리의 삶이 그러하듯이 이야기에 대한 호기심에서 출발했는지 모른다. 호기심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자극적인 욕망이다. 알고 싶다는 스밀라의 욕망은 물론 한 인간에 대한 애정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생각한 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인간은 현실에서도 많지 않다. 스밀라가 한 아이의 죽음에 바치는 행동은 삶에 대한 경건함이다. 무엇을 얻을 수 있고 왜 그래야만 하는가에 대한 물음에 정해진 답을 제시할 수 없는 것이 우리 삶의 아이러니다.

  스밀라는 머리가 아니라 가슴이 명령하는 대로 움직여 온 삶을 살아온 사람이다. 그린란드 이누이트인 어머니와 덴마크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나 스밀라는 경계인이다. 10대 초반에 어머니가 죽자 그린란드를 떠나 덴마크에 건너오지만 정착하지 못하고 고정된 실체를 거부한다. 결혼이나 종신직 등 안정적 삶에 대한 애착을 가져본 적이 없다. 스밀라는 아주 특별한 캐릭터다. 작가가 창조해낸 인물의 유형들이 많이 있겠지만 페터 회는 ‘조르바’처럼 현실에 ‘있는’ 인물이 아니라 ‘있어야할’ 인물 유형을 창조해낸 것이다. 독자들은 이 묘한 매력에 빠져 600페이지가 넘는 소설을 끝까지 놓지 못한다.

  이 소설의 또 하나의 특징은 다른 소설과 마찬가지로 작가가 보여주는 특유한 문체이다. 매력적이 소설들은 하나같이 ‘문체의 힘’을 알고 있다. 툭툭 내뱉는 듯한 말투 속에 생에 대한 통찰과 작가의 생각들이 배어 나온다. 그것은 개인과 사회의 갈등이기도 하고 안정과 불안에 대한 충돌이기도 하며 나와 너의 혼돈이기도 하다. 기막힌 묘사나 서정적인 분위기는 때때로 감상에 젖게 하지만 눈물에 호소하거나 억지 웃음을 강요하지는 않는다. 때로 메마른 듯 하지만 스밀라를 둘러싼 인물들이 보여주는 특이함이나 인물들간의 관계가 보여주는 냉정함은 스밀라의 생각과 행동을 오히려 빛나게 한다.

인생이 복잡해지는 것은 우리가 선택을 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앞으로 떠밀리는 사람은 단순하게 산다. - P. 509

  어느 순간에도 우리는 ‘선택’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스밀라도 자신의 삶을 끊임없이 선택했을 것이다. 무엇인가 두려움 속에 갇혀 있었을 수도 있고, 보이지 않는 그리움에 한 없는 외로움을 속을 헤맸을 것이라고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인생은 선택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선택했기 때문에 복잡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선택하지 않는 사람은 단순하게 산다.

  도시에서 바다로 그리고 얼음으로 공간을 이동하며 스밀라가 찾아나선 것이 단순히 이사야의 죽음에 대한 의혹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열정이었는지도 모른다. 추리 소설 형식을 띤 이 소설은 참으로 허망하게 끝을 맺는다. 정교한 씨줄과 날줄이 교차하는 방식이 아니다. 인간과 자연의 대립 구도라는 커다란 기본 구도를 가지고 있다. 문명과 자연 혹은 도시와 바다 그리고 인간과 얼음 등 다양한 대립 구도를 그려 볼 수 있다. 대척점에 서 있는 각각의 요소들은 유클리드나 수학이 보여주는 객관성을 벗어난 지점에 사람들의 본성과 생의 태도가 놓여 있다고 말하는 것 같다. 아무도 알 수 없는 것이 사람이라지만 이 책은 자연을 통해 그 속내를 보여주고 있다. 단순하게 표현하기 힘든 매력이 있기 때문에 꾸준히 읽히고 나도 호기심이 발동했는지 모르겠다.

젊었을 때는 섹스가 친밀감의 정점이라고 생각한다. 나중에 섹스는 거의 시작에 미치지도 못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 P. 517

  책을 읽다가 전체 맥락과는 무관하게 이렇게 밑줄을 치게 되는 경우가 있다. 단 두 문장이지만 여러번 곱씹었다. 내가 ‘나중’에 해당되는지 어떤지 알 수 없으나 나중에 읽어도 고개를 끄덕일 만한 문장이다. 아무도 알 수 없는 ‘나중’에 대해 작가는 알려주지 않고 여운을 남긴 채 소설을 맺는다. 이렇게,

‘우리에게 말해 줘’라고 사람들은 내게 와서 말할 것이다. ‘그래야 우리가 문제를 이해하고 끝맺을 수 있잖아’라고. 사람들은 잘못 생각하고 있다. 우리가 끝맺을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것들 뿐이다. 결코 결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 P. 619


071118-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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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11-21 2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읽다가 전체 맥락과는 무관하게 이렇게 밑줄을 치게 되는 경우가 있다

맞아요.
그런 적 있어요.

그런데 맨 마지막 줄의 숫자는 뭔가요?
2007년 11월 18일에 올해로는 133번째 읽은 책이란 뜻인가요?
부럽군요.


sceptic 2007-11-22 09:55   좋아요 0 | URL
사람마다 그럴테죠...저도 그렇구요...손이 가는 대목은 전체 맥락과 무관할 수도 있는거겠죠...

맞습니다. 매년 일련 번호를 붙이는 버릇이 있어서...
부러워하실 만한 건 아니고요...저도 권수를 줄이든가...한곳에 집중수렴하던가 계획을 세워봐야죠...
 
일중독 벗어나기
강수돌 지음 / 메이데이 / 2007년 2월
평점 :
품절


  중독 - addiction. 병적 증상에 대한 의과적인 진단이 분명하게 드러나면 우리는 환자라고 말한다. 정상이 아닌 비정상인 상태를 일컬어 병에 걸렸다고 표현한다. 미셸푸코의 <감옥의 역사>에 따르면 병원은 비정상인 미치광이들의 수용소에서 기원한다. 정상이 아닌 정신 상태나 정상이 아닌 몸의 상태를 동일한 것으로 보는 관점은 근대화의 과정에서 질병을 바라보는 기준이 되었다. 아프면 병원에 가고 약을 먹거나 수술을 하거나 치료를 받는다. 정상인으로 돌아오면 다시 사회로 환원될 수 있다.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칠 수 있는 상황들이다.

  그러나 중독인데도 칭찬을 받거나 부러움을 사는 경우가 있다. 일중독이 그러하다. 일반적인 기준이 적용되기도 힘들고 병으로 분류하기 어렵기도 할 뿐만 아니라 나쁘다는 인식이 별로 없다. 탁월한 능력, 일에 대한 열정이 만들어내는 괴물같은 인간형은 이미 몸과 마음이 병들어 치유 불가능의 상태에 이른다. ‘과로사’나 ‘자살’로 생을 마감하기도 한다. 압축적인 고도 성장을 이룩한 한국 경제의 기저에는 어두운 그늘과 잘못된 인식들이 견고하게 자리잡고 있다. 먹고 살기도 힘든 시절에 일만 할 수 있어도 행복했던 시절을 떠올리며 배부른 소리를 한다는 이야기를 할 수도 있지만 현실은 그리 만만하게 볼 수 없을 만큼 심각하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앞으로도 그리 크게 개선될 것 같지 않다는 데 있다. 경제적으로 성장을 하고 사회가 변화하면서 사람들은 ‘행복’에 대해 고민한다. 돈과 시간이 있어야 행복한 것은 아니집만 ‘여가 시간’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고 레져 산업은 미래에 각광받는 분야가 되었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얼마나 쫓기듯 그리고 ‘빨리빨리’ 살았는지 알 수 있다. 가만히 있는 시간, 아무것도 하지 않은 하루, 뒹굴뒹굴하면서 게으르게 보내는 것은 죄악시되었다. 과연 그러한가? 강수돌의 <일중독 벗어나기>는 이러한 통념과 편견에 대한 충고이자 학문적 고발이다. 경제학자의 입장에서 폴 라파르그의 <게으를 수 있는 권리>를 부록으로 번역하면서 일중독에 대해 연구한 이유는 우리 사회에 대한 명확한 경고 메시지를 보내기 위해서일 것이다. 한강의 기적을 이루었지만, 굶어죽는 사람은 없지만 앞으로 우리의 삶이 크게 여유있게 전개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아침부터 새벽까지 정신없이 뛰고 일하며 내일을 준비하고 전쟁같은 오늘을 보낸다. 매 시간 10건씩의 산재 사고가 나는 나라에 살면서도 이상 징후를 느끼지 못하고 경제 발전을 위해 희생되는 사람들이 생기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믿는다면 뭔가 이상한 나라가 아닐까?

  저자가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열심히 살자’는 말의 공허함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어느 순간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나이와 성별을 불문하고 ‘강자와 동일시’ 과정을 거치면서 멈출 수 없는, 지칠 줄 모르는 폭주 기관차가 되어 달린다. 한 번 입력된 목표는 수정되지 않고, 뚜렷한 삶의 목표(대개의 경우 물질적 부, 사회적 명예나 권력)는 인생의 목표가 되어 모두를 중독으로 만들어가고 서로 격려하고 용기를 북돋워준다. 내일을 위해 오늘을 희생하라고. 목표를 이룰 때까지는 참으라고. 그 과정을 견뎌내야 한다고. 공부든 일이든 우리는 목숨 걸고 한다. 남들보다 앞에 서야 하기 때문이며 경쟁 사회에서 살아남아야 하기 때문이다.

과연 어떤 노동력이 기업가에게 쓸모 있는 노동력인가? 그것은 신체 건강, 국어, 산수, 기술, 영어, 컴퓨터 등 노동능력이 좋아야 하고, 다음으로 성실성, 책임감, 신뢰성, 복종심, 충성심 등 노동자세의 측면이 좋아야 한다. 이런 것들은 학교 교육 속에서 훈련되는데 노동 능력 측면은 졸업장과 자격증, 각종 상장 등으로, 노동자세 측면은 개근상, 정근상, 봉사상, 생활기록부 등으로 측정된다. 나아가 애국가와 국기에 대한 맹세처럼 국가와 민족에 대한 교육을 통해 자기도 모르게 배타적 민족주의나 획일적 국가주의를 체득하게 된다. 원래 다양하고 복합적인 가능성(잠재력)을 가진 한 인간이 이런 식으로 오로지 일개 ‘생산요소’로서의 쓸모있는 노동력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보통 말하는 ‘환경파괴’보다 더 무서운 ‘인간 파괴’다. 또 이러한 인간파괴가 이미 가능했기 때문에 그 환경파괴조차 쉬이 가능할 것이다. - P. 79 

  학교의 기능은 이미 순종적 노동 기계를 생산하는 것으로 충분해졌다. 타인에 대한 배려와 다양한 경험, 질서와 봉사, 배려와 희생은 잊어야 한다. 획일적인 교복과 머리, 지시와 복종, 반복 숙달, 야자와 보충, 입시 지옥 등 떠오르는 것들은 사회에서 요구하는(대부분 기업에서 요구하는) 노동력을 갖춘 사람으로 길러내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산학협동은 그대로 학교가 기업을 위한 노동자 양성소로서의 역할을 성실히 하겠다는 협약이 된다. 취업과 실업은 천당과 지옥 만큼이나 먼 거리에서 우리의 목을 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은 이제 또다른 신분이 되어 보이지 않는 사회 계층을 형성해 가고 있다.

  일중독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 이러한 논의는 의미가 없어진다. 강수돌은 일중독의 심각성과 위험성 그리고 ‘동반중독’과 ‘2세 중독’에 대해서도 경고하고 있다. 일중독의 특성과 유형을 나누고 이론적으로 접근한다. 역사적 근원을 살피고 가정, 학교, 군대, 직장으로 나누어 사회적 배경을 점검한 후 경험적 사례들을 보여준다. 일본, 미국, 독일과 우리나라를 비교한 4개국 비교 연구는 흥미롭다. 동양과 서양이 다르고 같은 문화권에서 서로 다른 경향을 보인다. 중요한 것은 일중독에서 벗어나자는 이야기인데 저자의 대안과 주장이 미흡하다. 개인적 차원과 조직적, 사회적 차원에서 간단하게만 언급하고 있다. 총체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단순한 대안을 제시할 수는 없겠지만 추후에 집중적으로 그리고 심도 있게 논의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저자는 일중독을 한마디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폭력의 체계적 경험과 내면적 자율성의 결핍에 따라 생기는 두려움을 회피하기 위한 ‘자기방어’ 수단으로 등장한 것이다.(P. 55)”라고 정의한다. 생존기계로서 기능하는 현대인의 슬픈 자화상이다. 우리가 살아남아야 하는 미래의 삶은 모든 것을 효율과 자본의 논리로 풀어가고 있다. 신자유주의가 몰고 온 변화는 단순히 경제적인 측면에서만 논의할 수 없다.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고 교육 환경을 변화시키며 보이지 않게 우리의 삶을 쇠사슬로 묶어가고 있다.

  <‘나’부터 교육혁명>을 통해 보여주었던 저자의 관점은 변함없다. 기존 세상에 대한 비판적 시각과 낯설게 바라보는 대안들이다. 정답은 없지만 변혁이 가능한 세상을 꿈꾸는 것은 아름답다. 누구에게나 꿈이 있고 현실을 벗어나고 싶은 욕망이 내재한다. 다만, 그 꿈이라는 것이 생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나 삶의 진정성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세속적 욕망이나 물질적 소유욕에 불과한 것이라면 일중독에서 벗어나기는 힘들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무엇엔가 중독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다만 그 중독이 어떤 것이며 무엇을 위한 것인가에 대한 자기 점검은 반드시 필요할 것이다. 그것이 알콜이든 약물이든 일이든 혹은 사람이든지 말이다. 나는 무엇에 중독되어 있는지 돌아본다. 중독은 집착을 넘어선 병리적 현상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된 책이다. 특히 사회적 비난이나 삶을 황폐화 시킨다는 자각 없이 끝을 모르고 질주할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일중독이나 의존적 관계중독이나 그 끝이 외롭고 쓸쓸하기는 마찬가지다.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싶다. 헛된 꿈일까?


071113-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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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07-11-13 2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중독의 가장 큰 위험요소는 표면적으로 보이는 긍정적인 측면과 그로 인하여 자각하기까지는 모든 정신적 요소에 그 중독이 전이된 이후에나 가능하다는거군요.
오타 신고 - 3문단 3째줄 ( 분dirk -> 분야가)

sceptic 2007-11-13 22:28   좋아요 0 | URL
그나마 자각할 수 있다면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 있고 삶이 변화할 수 있다는 거죠...이 책에서 대부분 극단으로 치달았던 사례를 소개하고 있어 우울하기만 합니다. 주변에도 극구 부인하지만(본인들은 성취감이나 보람이라고 생각하지만) 일중독에 빠진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죠.

오타 감사합니다...^^

2007-11-14 20: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1-15 21:3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1-15 14: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1-15 21: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1-16 15: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1-16 16: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무히끄 2008-05-07 1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읽고 갑니다. 자본주의 사회가 낳은 각종 중독에서 벗어나는 길. 모두 방법은 알고 있는 것 같은데 행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 그러나 행하지 못할 때 그 앎은 진정한 앎이 아니라고 했지요. 이 책은 다분히 개인의 몫으로 해결의 방안을 돌리는 것 같지만 사실 책을 다 읽고 보니 내용에서 이미 개인적으로 풀 수 없다는 걸 제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갑자기 브레히트의 '동요하는 사람에게'라는 시가 떠오릅니다.

sceptic 2008-05-08 23:14   좋아요 0 | URL
누군가 길을 트고...모두가 함께 꿈을 꾸고, 제자리에서 실천하고...생각해 보지만 현실에서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실감하고 있습니다. 어려운 일이지만 포기할 수는 없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