촘스키의 아나키즘
노암 촘스키 지음, 이정아 옮김 / 해토 / 2007년 2월
평점 :
절판


상상해봐, 천국이 없다고
노력하면 너무 쉬워
우리 밑에 지옥도 없다고
우리 위에는 하늘뿐이라고
상상해봐, 모든 사람들이
오늘을 위해 산다고 

상상해봐, 어떤 국가도 없다고
그건 어렵지 않아
누구도 그 때문에 죽이거나 죽지 않고
또 어떤 종교도 없다고

상상해봐, 모든 사람들이
평화롭게 산다고
넌 날 꿈꾸는 사람이라고 할지 몰라
그러나 나는 혼자가 아니야
나는 언젠가 네가 우리와 함께하길 바라
그러면 세계는 하나가 되겠지

상상해봐, 어떤 사유私有도 없다고
넌 상상할 수 있을 거야
탐욕도 굶주림도 없다고
모두가 형제라고

상상해봐, 모든 사람들이
세계를 공유한다고

넌 날 꿈꾸는 사람이라고 할지 몰라
그러나 나는 혼자가 아니야
나는 언젠가 네가 우리와 함께하길 바라
그러면 세계는 하나가 되겠지

  존 레논의 ‘Imagine’이다. 반자본, 반국가, 반종교를 외치는 이 노래는 아이러니하게도 광고음악으로 자주 사용되곤 했다. 한참 동안 핸드폰 컬러링으로 사용했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팝송을 좋아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노래는 박홍규의 <아나키즘 이야기>에서 첫 페이지를 여는 노래이기도 하다.  

  아나키즘은 자유이다. 어느 것에도 구속받지 않는 자유, 인간이 꿈꾸는 완전한 세상이다. 이념적 성향으로 분류하면 아나키즘도 다양한 방식을 추구한다. 사회주의와 모호한 경계를 드러낼 때도 있고 개인주의나 자유주의와 결합된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나 정교한 이념적 틀이 중요하지는 않다. 바쿠닌이나 크로포트킨 그리고 최초의 <최초의 아나키스트>의 주인공 윌리엄 고드윈의 생각도 아나키즘을 대표할 수는 없다. 시대와 환경이 달라졌고 세상은 변하고 있다. 아나키즘은 여전히 유효한 가치를 지니고 있지만 쉽게 규정되거나 함부로 단정짓기에는 복잡하고 다양한 양상을 지닌 채 확대 재생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변형생성문법’으로 구조주의 언어학의 기틀을 마련한 촘스키는 늘 사회를 향해 발언한다.  

  <촘스키의 아나키즘>은 그래서 새롭게 보이지는 않는다. 대담 형식으로 구성된 이 책은 지금까지 촘스키가 보여주었던 사유의 진폭을 보여준다. 자본주의와 국가주의에 대한 냉엄한 비판과 소수의 자본가와 권력자들을 향한 비판의 칼날은 세월이 흘러도 무뎌지지 않는다. 그를 지탱하는 힘은 인간의 언어에 대한 분석과 학문적 바탕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하지만 언제나 청년정신으로 살아가는 그의 생각이나 글들은 거시적인 안목에서 우리의 현재를 돌아보게 하는 풍향계의 역할을 해준다. 우리는 누구이며 어디로 가고 있는가? 

  다분히 미국적 현실에서 미국의 지성인으로 미국에 대한 비판을 가하는 국내용으로 그를 평가하는 것은 지나치다. 자본주의의 절정에 선 나라에서 국가를 넘어 제국으로 치닫는 미국에 대한 그의 생각은 바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한 판단으로 보아도 무방하기 때문이다.  

  열 살 때부터 그를 매료시켰다는 아나키즘은 도대체 어떤 사상인가? 단순하게 정부를 부정하는 무정부주의로 번역하는 오해의 소지가 있고 편견을 가질 수 있게 할 수 있으니 그냥 아나키즘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 같다. 

무정부주의는 ‘인간이 인간을 착취하는 것에 반대’한다는 점에서 분명 반자본주의다. 그러나 무정부주의는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는 것’도 반대한다. - P. 59

  어쨌든 이 책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촘스키의 생각을 드러내고 있지만 명확한 개념을 밝히거나 아나키즘의 구체적 아젠다를 이끌어내지는 못하고 있다. 각종 강연회나 인터뷰를 통해 철저하게 현실 사회의 모순에 대한 촘스키의 눈과 입을 빌려 아나키즘에 대한 이야기를 적용해 나간다는 면에서는 오히려 읽을 만하다. 

  억압과 구속이 무엇인지조차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던지는 촘스키의 메시지는 오히려 공허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현실을 인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그가 말하는 방식이나 그의 눈에 비친 모습들을 이해조차 할 수 없을 수도 있다. 보이지 않는 족쇄와 견딜 수 없는 모순들이 보이는 사람들에게 적절하겠다. 공무원과 국가를 상전처럼 모시고 사는 우리들의 자화상을 한 번쯤 불합리하다고 느껴 본 사람이라면 함께 공감할 수 있다. 

  김수영의 ‘푸른 하늘을’이 갑자기 떠오른 이유를 알 순 없지만 ‘자유’나 ‘혁명’ ‘피’의 이미지로 대변되지 않는 아나키즘을 생각하며 엉뚱한 시가 떠오른 이유를 모르겠다. 알고 싶지도 않다. 오늘은 머리가 엉켜버렸으므로.

푸른 하늘을 
  
푸른 하늘을 제압하는
노고지리가 자유로왔다고
부러워하던
어느 시인의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자유를 위해서
비상하여본 일이 있는
사람이면 알지
노고지리가
무엇을 보고
노래하는가를
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있는가를
혁명은
왜 고독한 것인가를 

혁명은
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

071004-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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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7-10-05 0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상상만 할 수 있으면 즐겁지요.아나키즘처럼 이상적이며 낭만적인 것이 어디있겠습니까...인류가 사라지지 않는하 규제적 이념정도로만 '이매진'될 것입니다.그것도 의미없는 일은 아니지만...보이지않는 모순들을 보더라도 아나키즘적 방법이 거부될 수도 있습니다.
최근에 읽던 테리이글턴의 <성스러운 테러>의 한대목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형식에 대한 집착이나 형식을 부인하는 니힐리즘,독재와 아나키가 실상 한 동전의 이면임을 알아야한다." 독재와 아나키를 같은 선상에 놓은 것은 동의할 수 없지만 어떤 맥락에서 이 논의가 나왔는지는 알기때문 뉘앙스는 이해합니다.멀리 거슬러올라가면 마르크스와 바쿠닌 논쟁(고진은 오히려 정치적으로 맑스가 바쿠닌편에 가까왔다고 말하지만) 식민지시대 아나볼 논쟁과 비슷한 맥락이겠지요.아나키즘의 풍부한 상상력은 여러가지로 응용가능하고 보완적 성격을 가질 수 있지만...거대담론으로는 규제적일수 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sceptic 2007-10-05 18:17   좋아요 0 | URL
아나키즘은 이상적이거나 낭만적이지 않고, 존 레논의 노래가 낭만적이죠...^^

맑스와 바쿠닌은 갈등했던 것처럼 보이지만 제 생각엔 사상적으로 가장 근접한 동지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고진에 말에 공감하는데요, 독재와 아나키를 같은 맥락에 놓은 것도 이해는 갑니다. 가장 큰 문제는 너무 다양한 방법론과 현실에 대한 접근 방법이 파격적이라는...

어쨌든 꿈이나 꿀수 있는 현실 저편의 이상이 아니라, 정교화한다면 현실에서도 실현 가능한 방법들도 찾아지지 않을까요? 그래도 '이매진'을 한 번씩 들으면 마약처럼 노곤해집니다.
 
상상의 공동체 - 민족주의의 기원과 전파에 대한 성찰 나남신서 377
베네딕트 앤더슨 지음, 윤형숙 옮김 / 나남출판 / 2003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려 안으로 자주독립의 자세를 확립하고, 밖으로 인류공영에 이바지할 때다. 이에 우리의 나아갈 바를 밝혀 교육의 지표로 삼는다......”로 시작하는 국민교육헌장을 외워보았다. 첫 번째 문장을 자신있게 외웠고 뒤에 문장은 더듬더듬 기억이 났다. 초등학교 시절에 뜻도 모르고 열심히 암기했던 문장들이 하나 둘씩 떠오른다는 사실이 놀랍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다.

  1968년 12월 5일에 박정희가 반포한 ‘국민교육헌장’은 취지와 의도와 무관하게, 앞부분에 ‘민족’을 내세우고 있다. 민족을 중흥하겠다는 국민교육의 목표는 ‘상상력’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 베네딕트 앤더슨이 <상상의 공동체>에서 내세우는 핵심적인 주장이다. ‘민족주의 기원과 전파에 대한 성찰’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던 책의 개정증보판을 원제대로 나남출판에서 2002년에 출판했다. 월드컵의 광풍(?)이 몰아치던 시기였기 때문에 ‘민족주의’에 담론들이 넘쳐났고 보이지 않는 열기로 가득했던 한반도의 상황들을 돌아보는 데 유효한 저작이다.

  우리가 맹목적으로 믿고 있는 민족이라는 개념에 대해 의심해 본적이 없다면 베네딕트 앤더슨의 이야기는 놀라움으로 가득해 보일 것이다. 종교적 공동체와 언어 공동체로 양분할 수 있었던 사람들을 근대화 과정에서 자본주의의 발달과 더불어 ‘민족’이라는 개념으로 묶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근대적 의미의 ‘국가’의 성립과 그 궤를 같이하고 있다. 지역적 특성을 토대로 국가와 민족은 하나가 되었으며 단일 민족이 하나의 국가를 이루지 않더라도 실체가 분명하지 않은 문화적, 언어적 공통성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의 애국심과 인종주의는 ‘문화적 조형물’로 이루어진 역사적 공동체일 뿐이다.

  민족은 본래 제한되고 주권을 가진 것으로 상상되는 정치공동체이다.
  민족은 가장 작은 민족의 성원들도 대부분의 자기 동료들을 알지 못하고 만나지 못하며 심지어 그들에 관한 이야기를 듣지도 못하지만, 구성원 각자의 마음에 서로 친교(communion)의 이미지가 살아있기 때문에 상상된 것이다. - P. 25

민족은 제한된 것으로 상상된다. 왜냐하면 10억의 인구를 가진 가장 큰 민족도 비록 유동적이기는 하지만 한정된 경계를 가지고 있어 그 너머에는 다른 민족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 P. 26


  문화적 기원을 통해 ‘민족’의 의미와 기원을 살펴보는 작업은 보이지 않는 인종간의 결속력의 근원을 살펴보는 일이다. 과연 민족의식의 기원은 무엇인가?  식민지와 제국주의자들을 중심으로 크리올이라 불리우는 식민지 이민자들의 의식을 통해, 혹은 식민지의 원주민들의 의식을 통해 저자는 민족주의의 한계와 계급성을 드러내고 있다. 자본주의의 기원과 함께 민족주의의 개념이 기원이 밝혀진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문제는 민족주의가 안고 있는 파시즘의 성격을 말한다. 생각해보면 파시즘적 민족주의가 내포하는 있는 불온한 의도는 다중의 의도와 신념을 빌미로 숨겨진 의도에 복무하고 있다. 숨겨진 의도는 민족주의를 내세워 체제를 공고히 하려는 소수 기득권층과 배타적 이기주의자들의 검은 속내에 감추어져 있기 마련이다.

  이 책에서 말하는 민족주의가 신자유주의 물결과 함께 어떤 양상으로 전개될 것인가는 지금 우리들이 주목해야 하는 부분이 아닐까 싶다. 국가간 경계가 모호해지고 다국적 자본이 유동적으로 움직이는 상황에서 과연 ‘상상의 공동체’는 유지될 수 있을 것인지 궁금하다. 객관적인 관점에서 상황을 파악하는 논리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이제는 전개된 상황을 정확하게 분석하고 능동적으로 행동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 나가야 하는 것은 아닐까? 민족은 언어와 종족을 넘어선 위치에 자리 매김하고 있으며 공고한 물적 토대를 바탕으로 확고부동하게 자리잡고 앉아있다. 쉽사리 무너질 것 같지 않은 이 거대한 괴물을 상대로 한 지난한 싸움들이 힘겹게만 느껴진다. 싸워 무너뜨려야 할 대상으로 파악해서도 안되겠지만 그 기원과 역할을 알지 못한 채 맹목적인 믿음을 고수할 수는 더더욱 없는 노릇이다.

  서장에서 밝히고 있는 민족에 대한 정의는 이 책 전체에서 저자의 주장을 견고하게 지탱하고 있다.

민족은 제한된 것으로 상상된다. 왜냐하면 10억의 인구를 가진 가장 큰 민족도 비록 유동적이기는 하지만 한정된 경계를 가지고 있어 그 너머에는 다른 민족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 P. 26

민족은 주권을 가진 것으로 상상된다. 왜냐하면 이 개념은 계몽사상과 혁명이 신이 정한 계층적 왕국의 합법성을 무너뜨리던 시대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 P. 26

마지막으로 민족은 공동체로 상상된다. 왜냐하면 각 민족에 보편화되어 있을지 모르는 실질적인 불평등과 수탈에도 불구하고 민족은 언제나 심오한 수평적 동료의식으로 상상되기 때문이다. - P. 27

  아무것도 아닌 것들에 의해 미혹된 채 세상을 바로 보지 못하는 나에겐 너무나 많은 들보들이 눈을 가리고 있다. 걷어내고 부러뜨려도 누군가 색안경을 씌우고 안개를 뿌린다. 청명하게 맑은 시선으로 푸른 가을 하늘을 바라보고 싶다. 그것이 현실을 바라보는 가장 기본적인 준비라고 믿는다. 민족이라는 개념이 ‘상상된 공동체’이든 ‘문화적 조형물’이든 ‘역사적 실체’이든 상관없이 현실 속에 굳건하게 뿌리내리고 있는 편견과 왜곡된 의식은 쉽게 바로잡히지 않는다. 그것들을 극복하기 위한 작은 노력들을 시작해야 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몫이다.


07100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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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0-02 20: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0-02 23: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 - 20세기를 온몸으로 살아간 49인의 초상
서경식 지음, 이목 옮김 / 돌베개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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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세기가 달라졌기 때문에 달라지는 변화는 없다. 인위적인 시간 구분일 뿐이지만 우리가 20세기를 돌아보는 이유는 두 세기에 걸쳐 살아가는 행운(?)을 누리는 특권 때문은 아닌지 모르겠다. 역사적인 맥락에서 현실을 바라보는 행위는 구체성을 띠기보다 거시적인 관점에서 접근하는 방식을 취하게 된다. 전체적인 맥락과 흐름을 파악할 수 있고 전후 관계와 사정을 알게 된다. 시간의 흐름은 모든 것을 포용하며 많은 것들을 반성하게 한다. 물론, 과거를 바라보는 눈도 사람마다 다를 수 있지만, 객관적 거리라는 것이 불가능 할 수도 있지만 지나간 시대를 돌아보는 일은 현재와 미래를 알 수 있는 가장 좋은 척도일 수도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지나간 기억들을 더듬게 된다.

  서경식의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은 지난 세기를 온몸으로 살아냈던 사람들을 저자 나름의 주관적 기준으로 뽑았다. ‘20세기를 온몸으로 살아간 49인의 초상’이라는 부제는 적절해 보인다. 시인 로르카부터 서승과 서준식의 어머니 오기순에 이르기까지 당대를 뒤흔들었던 역사적 사건들 속에서 묵묵히 혹은 치열하게 신념을 지켰던 사람들이 첫 번째 기준이 된 듯하다. 20세기는 기억할 만한 여러 가지 사건들이 있었다. 특히 1936년 스페인 내전과 1973년 칠레의 쿠데타가 이 책에서 자주 언급된다. 지금도 카탈루냐 자치 문제는 스페인에서 진행형으로 이어지고 있지만 1936년 프랑코의 반란과 1973년 피노체트의 군사쿠데타는 지금까지도 아물지 않는 상처로 남아있다. 자연사할 때까지 장수한 피노체트나 5.18의 주역으로 전 재산 29만밖에 없는 전두환이나 우리는 여전히 부끄러운 역사 속을 거닐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아는 게 별로 없다. 그래서, 알고 싶어서 오늘도 읽는다.

  ‘육성으로 듣는 열정의 20세기’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장석준의 <혁명을 꿈꾼 시대>는 기억할 만한 연설을 중심으로 23명을 내세워 20세기를 정리하고 있다. 지난 세기의 역사를 정리하는 또 하나의 방법으로 읽을 만 했던 책이다. 서경식의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과 함께 읽기 좋은 책이다. 두 책에서 겹치는 사람은 딱 세 사람이다.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 파블로 네루다, 살바도르 아옌데가 바로 그 사람들이다. 초점이 다른 책이므로 중복된 사람들이 큰 의미가 없을 수 있지만 관심을 갖고 보아야 할 부분이 분명히 있겠다. 피델 카스트로와 함께 쿠바 혁명을 이끌고 볼리비아 혁명을 뛰어든, 사르트르로부터 ‘20세기의 가장 완전한 인간’이라는 평가를 받은 체 게바라는 말할 것도 없고 1936년의 스페인과 1973년의 칠레 쿠데타를 경험한 파블로의 네루다와의 인연 그리고 체 게바라처럼 의사 출신으로 칠레의 인민 정부를 이끌다가 카스트로의 선물인 기관총을 들고 대통령 궁에서 총에 맞아 죽은 살바도르 아옌데의 삶을 들여다본다. 20세기를 기억해야 하는 많은 것들 중에서 사건이 아니라 사람을 중심으로 생각한다면 우리는 누구를 손에 꼽을 것인가?

  우리에겐 한일합방과 일제 강점기, 해방과 한국전쟁, 5.16 군사쿠데타와 5.18이 있다. 한 세기를 몇 개의 역사적 사건으로 정리하는 것은 얼마나 허망한가. 개별적인 사건들 속에 깃들인 한과 눈물은 현재 진행형으로 계속되고 있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것을 외면하며 살아가고 있다. 우리의 현대사를 정리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고 계속 될 것이다. 20세기에 기억할 만한 한국인을 중심으로 지난 세기를 정리해 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겠다. 누가 떠오르는지 헤아려보자.

  한국 사람이지만 일본에서 살아온 서경식은 20세기 후반에 이 작업을 시작했다. 49명은 세계사의 관점이나 일본의 역사를 중심에 놓고 볼 때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사람들만을 엄선한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사에키 유조, 아이미쓰, 가모이 레이, 마키무라 고우, 오구마 히데오, 하라 다미키, 가네코 후미코 등등 일본인 들은 처음 들어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에 비해 안중근, 김구, 홍범도, 김산, 윤동주, 김지하, 박노해 등은 우리에게 너무 익숙하다. 그 밖에 파블로 카잘스, 바실리 칸딘스키, 에리히 케스트너, 안네 프랑크, 프리모 레비 등 세계사를 중심으로 한 인물들이 있다. 한국과 일본 그리고 유럽의 인물로 3분할 수 있으나 크게 의미는 없다. 일본의 상황과 입장에서 일본 사람들에게 읽힐 목적으로 쓴 짧은 글들이기 때문에 대표성에 의문을 제기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다만 인물들의 면면을 들여다 보며 우리가 지난 세기를 돌아볼 수 있는 시간과 기회를 갖는 것이 의미가 있다.

  회한과 한숨으로 가득한 비극의 세기라고 밖에 말해질 수 없는 질곡의 세월을 견뎌왔다. 21세기에는 사람이 사람답게 존중받고 전쟁이 없는 평화만이 가득한 세기가 될 수는 없을까 하는 상상은 공상에 가깝게 느껴진다. 9.11 테러로 21세기의 문을 열었고 이라크에 대한 침략 전쟁은 계속되고 있으며 팔레스타인과 가자지구, 코소보 사태는 암울한 미래를 예견한다. 아직도 끝나지 않은 야만의 역사는 우리에게 계속되고 있다.

  사람들은 언젠가는 죽는다. 그러나 <사라지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고 말하는 저자의 말은 선명하게 가슴에 남는다.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시대를 두 눈으로 쳐다본 사람들이다. 우리의 기억 속에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사람들은 이 밖에도 더 많다. 그들을 기억하는 것은 같은 실수와 비극을 반복하지 말자는 뜻이기도 하다. 사람이 사람답게 산다는 것, 세상은 누군가에 의해 변화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믿음을 가질 수 있다면 저자의 바람은 이루어진 것이 아닐까 싶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모두 ‘사라진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다.


070928-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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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9-29 11: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9-28 22: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sceptic 2007-10-02 15: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짧은 평전 모음 같은 느낌인데...다시 한번 정리하기에 좋은 책인것 같습니다...덕담 나눠주시니 제가 감사하죠...
 
하나의 대한민국, 두 개의 현실 - 미국의 식민지 대한민국, 10 vs 90의 소통할 수 없는 현실
지승호 지음, 박노자 외 / 시대의창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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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살고 있는 사회에 대해 다른 시각을 갖는 것은 불온하다. 세상을 긍정적, 낙관적으로 바라보아야 행복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많은 것들에 대한 호기심과 관심은 인식의 폭을 넓혀 주지만 현실은 여전히 요지부동이다. 스스로 진보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사회를 보는 관점이 래디컬하다. 강유원은 이 말을 참 좋아한다고 했다. 현실 인식은 사람마다 다르고 대응 방식도 다르다. 여기에는 두 가지 문제점이 있다. 첫째는 세상과 현실에 대해 혹은 사람에 대해 가지고 있는 무지와 편견이다. 뭣도 모르면서 아는 척 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자기가 아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아집과 독선이 문제이다. 호환, 마마보다 무섭다. 둘째는 자신의 계급과 이익에 반하는 생각과 행동을 하는 것이다. 빌헬름 라이히의 표현한 대로 ‘파시즘의 대중심리’는 상상을 초월한다. 조선일보를 자신의 생각이라고 굳게 믿는 노동자의 경우를 일컫는다. 한미 FTA가 체결되면 왜, 어떤 방식으로 나에게, 우리에게 이익이 되는지 모르지만, 이라크에 파병하면 어떻게 이익이 되는지 모르지만 ‘국익’을 위해서 필요하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국익’과 ‘10% 부자’를 구별하지 못하는 대다수 국민들을 위한 세상 바로알기 캠페인이라도 벌여야 하는 것이 아닌가?

  박노자, 홍세화, 김규항, 한홍구, 심상정, 진중권, 손석춘 - 심상정을 제외하고는 여러권의 책을 통해 끊임없이 만나고 있는 사람들이다. 인터뷰어 지승호는 이번에‘도’ 이들을 선택했다. ‘신자유주의와 자본 파시즘에 맞선’ 사람들이라는 표현이 무색하지 않다.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의 역할을 충실하게 해나가고 있는 사람들이다. 누구 말마따나 읽을 필요가 없는 사람들은 이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이들의 책을 읽고 이들의 인터뷰집을 읽는다. 매년 봄 한겨레 특강을 통해서나 프레시안 특강을 묶은 <여럿이함께>라는 책을 통해서 만나는 사람들은 왼쪽에 가슴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적어도 그들의 말에 공감하거나 들어볼 마음의 자세를 가진 사람들은 사실 이 책을 읽을 필요가 없다.

  이제 지승호의 책은 살펴보지 않고 사도 후회하지 않을 만큼 신뢰가 간다. 한 인터뷰어에 대한 개인적인 믿음은 그간 그가 보여준 성실함과 끈기 그리고 세상을 보는 눈 때문이다. <하나의 대한민국, 두 개의 현실>이라는 제목으로 묶어낸 그의 책은 일곱 명의 시각으로 바라본 21세기를 여는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그들만의 리그가 펼쳐지는 현실과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은 별개일 수밖에 없다. 가진 것이 다르고 지켜야 할 것이 다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앞으로 펼쳐질 미래가 전혀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삶에 대처하고 있으며 미래를 바라보고 있을까?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책을 읽으면서, 세상을 살아가면서 현실인식은 지극히 암울해진다. 시니컬하고 래디컬한 성향을 벗어버릴 수가 없는 것이다.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사람됨’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적어도 내겐 ‘사람됨’으로 채워지지 않는 부분들이 있다고 믿는다. 홍세화가 인터뷰 중에 사르트르의 말을 인용한다.

생존 수단이 존재 이유를 훼손해서는 안 된다. - P. 77

  한 참 동안이나 이 말을 들여다보았다. 고아처럼 자라며 오늘 저녁 한 끼를 해결할 방법이 없는 아이들이 있다. 먹고 사는 일 자체가 생존의 목적인 사람들이 있다. 자본의 힘은 블랙홀처럼 인간의 존재 이유를 빨아들인다. 망각의 힘은 생존 수단으로부터 시작된다. 주변의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지만, 그들만의 리그는 오늘도 계속된다.

  미국의 ‘자발적 식민지’가 된 나라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의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공화국’의 가치를 잃어버린 우리의 모습을 알아야 한다. ‘자본 파시즘’이 지배하는 나라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한 번도 거울을 보지 않으면 내가 누구인지 알 수가 없다. 머리 까만 미국인들이 주변에 너무 많다. 한국 사람인지 머리 까만 미국 사람인지 알 수가 없다. 삼성이 지배하는 나라에서 머리 까만 미국인과 함께 내일을 생각하지 않는 우리들의 자화상은 비참하기만 하다. 개혁이 아니라 혁명이 필요하다.

  생각해 보자. 브라질의 룰라나 베네수엘라의 차베스에 대해서, 그들의 선택에 대해서. 김규항은 인터뷰 도중에 이런 말을 한다.

사람들은 자기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갖게 되어 있어요. - P. 300

  어떤 식으로든 대중이 움직여야 현실이 달라진다. 이대로는 안 된다는 인식이 우선이겠고 그 다음은 움직여야 한다. 이기적 욕망과 무임승차에 대한 간사함을 이겨낼 방법을 찾아나가는 것은 시민 사회 단체의 몫이나 활동가들이 책임져야할 일이 아니다. 나 혼자 꿈을 꾸면 공상이 되지만, 다함께 같은 꿈을 꾸면 현실이 된다.


070927-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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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권영길 후보와 함께 하는 블로거 간담회에 초대합니다.
    from 태터앤미디어 공식블로그 : 블로그 미디어 & 마케팅 2007-10-08 17:13 
    안녕하세요. 태터앤미디어팀 정윤호입니다. 17대 대선을 맞아 블로고스피어에서도 대선과 관련하여 다양한 이야기들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태터앤미디어에서는 대선후보들과 블로거들이 한자리에 모여 평소 후보에게 궁금했던 점이나 대선공약 등에 대해 직접 질문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고 있습니다. 한국 정치사상 그리고 언론사상 초유의 실험이라고 평해주셔서 더욱 열심히 진행하고 있습니다. :) 오는 10월 15일 월요일에는 대선 후보 릴레이 간담회 두번째로 민주..
 
 
2007-09-27 23: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9-28 18: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드팀전 2007-09-28 07: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들을 그 수준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요?
사람들에게 공을 다 넘기는 것은 아닐까요?

sceptic 2007-09-28 14:36   좋아요 0 | URL
원인을 하나로 집어낼 순 없지 않을까요? 어떤 노력으로도 움직이지 않는 사람들에게 늘 면죄부만 주는 것은 아닐까요? 누군가의 몫으로, 혹은 타인의 탓으로만 돌리는 책임 회피는 온당한 평가가 이루어지지 않은 거 아닌가요?

2007-09-28 14: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9-28 18: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9-28 19: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09-28 20: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드팀전 2007-09-28 2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중'의 자발적 동의 내지는 그 수준을 이야기하려면 이를 강제하고 조정해내는 또다른 축에 대해서도 이야기해야하지 않을까요..그게 없는 '수준론'은 '거대한 또다른 축'에 대한 면죄부와 '허무주의'의 블랜딩이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혁명(가능이나 한지 모르겠습니다만)이 단순히 '의식혁명'을 뜻하지 않는다면 말이지요.

sceptic 2007-09-28 20:51   좋아요 0 | URL
'수준론'이 단순히 '대중'을 비하하기 위한 목적이 아님을 드팀전이 모르실리 없지요? 김규항의 말이 현실에 대한 '허무주의'나 '면죄부'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을 찾거나 해야겠는데 자발적으로 혹은 선동적으로라도 이루어지지 않는 현실의 답답함을 이야기하고 싶었으나 책의 내용과 생각의 표현이 적절하게 나타나지 않았나 봅니다.

혁명...불가능하기 때문에 꿈꾸어야 한다는 말은 말장난일까요? 의식혁명도 행동의 변화가 없이는 헛된 공상에 불과하지 않나 싶습니다.

가끔 달아주시는 댓글로 또 다른 생각을 이어갑니다. 댓글 봉사 감사드립니다.

드팀전 2007-09-28 2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규항도 그런 뜻이었겠지요..그러니까 잘해보자고.
최근에 제가 들었던 '패배주의적 수준론'때문에 자꾸 그렇게 보이나봅니다.

sceptic 2007-10-02 15: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패배주의적 수준론'은 당연히 경계해야 겠지만 대책없는 희망도 이젠 그만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적정선을 찾기 힘들지만...다들 잘해보자는 얘기지만 방법들이 워낙 많이 다르네요...
 
강조해야 할 것
수잔 손택 지음, 김유경 옮김 / 이후 / 2006년 4월
평점 :
품절


  일상에서 만나는 수많은 글들을 통해 우리는 많은 생각을 하고 새로운 것을 배운다. 인식의 힘은 실천으로 옮겨져야 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온몸으로 보여준 작가 중의 한 사람인 수전 손택은 그녀가 떠난 이후에도 많은 이야기를 건네고 있다.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진리가 있다면 말하지 않아도 향기가 나고 목소리 높여 이야기하지 않아도 전달된다. 현장 운동을 통해 사회 변혁을 꿈꾸었던 사람은 물론이지만 자신의 위치에서 진보적 태도를 견지하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때때로 현실과 타협하고 싶은 순간이 있고, 자신의 신념을 의심하기도 한다. 이기적 욕망이 꿈틀거리는 순간도 있었을 것이고, 미래를 향한 전망은 어둡기만 한 시간들을 견뎠을 것이다. 한 사람의 작가를 사회적 현상과 관계 속에서만 파악하는 것은 잘못된 평가이다. 작가는 작품으로 말해져야 하며, 모든 생이 어쩌면 작품 해석을 위한 도구적 역할을 할 수도 있다. 그런 면에서 작가와 작품 그리고 현실의 관계를 분리해서 생각할 수는 없다.

  <강조해야 할 것>이라는 책은 그녀의 에세이들을 모아놓은 책이다. 1부에서는 ‘내가 본 것들’을, 2부에서는 ‘내가 읽은 것들’을, 3부에서는 ‘그곳과 이곳’이라는 주제로 묶었다. 본 것은 물론 영화과 연극 무용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음악을 제외한 모든 예술은 시각을 통해 구현된다. 기술 복제의 시대로 명명되는 20세기의 예술은 영화로 대표된다. 현실을 이야기하는 다양한 방식중의 하나로 영화를 선택한 켄 로치 같은 감독은 영화의 역할과 의미를 우리에게 다시 한 번 되새기게 한다. 지난 세기의 가장 큰 특징을 ‘영화’라고 해도 그리 틀리지 않은 말이 될 것이다. 영화든 그림이든 관객과 애호가의 입장에서 그것을 제대로 바라보지 않는다면 작가와 소통할 수 없고, 작가는 작품 속에 갇혀 고립된다.

아무리 많은 영화가 만들어진다 해도, 아무리 좋은 영화가 만들어진다 해도, 영화애호가들이 사라지면 영화도 사라진다. 영화의 부활은 새로운 종류의 영화 사랑을 통해서만 가능할 것이다. - P. 19

그림을 그릴 만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기억 속에 있는 그리고 기억에 의해 변형된 무엇이다. 또한 오랜 시간에 걸친 생각과 수없는 회상이라는 시험을 통과한 것이다. 그림은 수많은 결심과 덧칠, 붓질이 쌓인 결과이다. 어떤 그림은 감정의 정확한 두께를 찾기 위해 몇 년에 걸쳐 그려지기도 한다. - P. 67


  글을 쓰는 작가의 입장에서는 말할 필요도 없이 중요한 것은 ‘언어’이다. 수전 손택은 동시대인으로서 롤랑 바르트의 글쓰기나 보르헤스의 소설들에 대해 다양한 방식으로 말걸기를 시도한다. 선명하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타인의 글을 들여다본다. 투명하고 맑은 시선은 깊은 사유와 폭넓은 독서를 통해서만 가능할 것이다. 수전 손택의 글들은 그렇게 명징하고 서늘하게 핵심을 찔러댄다. 하지만 그녀의 글은 단단하고 건조하기보단 부드럽고 따뜻하다.

  선명하게 다가오는 이미지나 분명하고 선언적인 문체가 도드라지기도 하지만 재치있는 언어를 구사하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자유롭게 이야기한다. 그래서 독자들은 편안하지만 분명한 그녀의 목소리에 귀기울이게 되는 것은 아닐까 싶다. 사라예보에 ‘고도를 기다리며’를 공연하면서 그녀가 보고 듣고 느낀 것들은 <타인의 고통>에서도 언급되고 있지만, 현장성을 바탕으로 한 그녀의 글들은 머리보다 가슴으로 다가온다. <해석에 반대한다>로 기억되는 그녀를 보다 다른 관점에서 혹은 다른 글들을 통해서 그녀를 바라보는 것은 독자에게 색다른 경험이다. 에세이의 형식은 편안하고 자유롭다. 분량과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작가의 생각과 느낌들을 생생하게 전달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소설이든 희곡이든 비평이든 그녀의 존재방식은 글쓰기였다. 글이 무기였고 행동이었다.

언어 외에 새로운 것이란 없다. 강렬한 어휘 선택으로, 뛰어오르는 구두점으로, 쾌활한 문장 리듬으로 인간관계의 고통을 망각하게 하는 것. 더 섬세하고도 게걸스러운 방식의 앎을, 감정이입을, 견제 방식을 고안하는 것. 그것은 형용사의 문제이다. 강조해야 할 것은 바로 이것이다. - P. 230

읽기는 쓰기에 앞선다. 그리고 읽기로 인해 쓰고자 하는 욕망이 촉발된다. 읽기는, 읽기에 대한 사랑은, 작가가 되겠다는 꿈을 꾸게 한다. 그리고 작가가 되어 오랜 시간이 지나도 다른 사람이 쓴 책을 읽거나 과거에 자신이 좋아했던 책을 다시 읽는 것은 쓰기에서 오는 스트레스에서 해방되는 멋진 기분전환이 된다. 기분전환, 위안, 고통, 그리고, 그렇다. 영감이 된다. - P. 361

  표지 날개에 실린 작가의 사진을 본다. 반백 그녀는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다. 그녀가 바라보았던 곳은 어디일까? 현실 너머에 있는 이상적 공간이 아니라 가장 치열한 현실은 아니었을까 싶다. 삶에 대한 열정과 예술에 대한 심미안을 가진 그녀는 늘 실천하는 양심으로 비판적 지성으로 불리었다. 그녀에 대한 평가가, 세간의 관심이 어떠하든 그녀의 내면에 숨어 있던 영혼의 울림은 독자에게 번역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그렇게 그녀를 독자에게 가장 잘 전달할 수 있는 언어로 가득하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쉽게 읽히지 않는다.

나는 번역하지 않는다. 나는 번역된다. - P. 470


070926-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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