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옹 창비시선 279
정호승 지음 / 창비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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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틈

살얼음 낀 겨울 논바닥에
기러기 한 마리

떨어져 죽어 있는 것은
하늘에 빈틈이 있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빈 틈이 있다. 가슴 속에 구덩이 하나씩을 파고 있는 것처럼. 그 빈 틈 때문에 정호승을 읽기 시작한 것은 아니었을까. ‘정호승’은 고교시절 나의 로망이었다. 열일곱에 그의 시집 <슬픔이 기쁨에게>, <서울의 예수>와 <새벽편지>를 읽으며 시에 눈뜨다. 2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그의 책이 나오면 어김없이 손이 간다. 조희봉처럼 ‘전작주의자’를 꿈꾼 적은 없지만 정호승의 책은 <서울에는 바다가 없다>라는 소설까지 읽었다. <서울의 예수>에 실린 시인의 서늘한 눈빛에 한동안 잠 못 이루던 시절이었다. 사춘기였고 한 시대를 어렴풋하게 감지할 수 있었던 감수성을 지닌 시기였다.

  김지하나 황지우, 오규원이나 김승희, 신경림이나 박노해 등 숱한 시인들을 만났지만 첫사랑을 잊지 못하듯 문학적 감수성 때문이었을 것으로 기억한다. 정호승은 언제나 낮은 목소리로 툭, 툭 내뱉듯 혹은 하늘을 바라보며 독백하듯 이야기한다. 날카롭고 예리한 눈빛만큼이나 사물에 대한 관찰과 시선이 농밀하다. 꼼꼼하고 세심한 시선은 대상에 대한 애정으로부터 비롯된다. 그것이 사물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확대되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로 증폭된다.

  정호승의 빈 틈은 익숙한 것들을 낯설게 바라보는 곳에 있다. 그의 뛰어난 시편들에는 언제나 역설이 숨어있다. 아니듯 그렇고, 그러하지만 아무것도 아닌 것들 속에 숨어 있는 무언가를 끄집어 낸다. 진실은 사실에 앞선다. 객관적 정황들에 앞서 그가 보여주는 내면의 진실과 그 언어들은 솔직한 고백의 형태로 때로는 차갑지만 정확한 발언으로 빈 틈이 없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의 가슴은 고구마를 파는 청년처럼 언제나 군고구마 대신 기다림을 굽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밤의 연못

밤의 연못에 비친 아파트 창 너머로
한 소년이 방바닥에 앉아 혼자 라면을 끓여먹고 있다
나는 그 소년하고 같이 저녁을 먹기 위해
나도 라면을 들고 천천히 밤의 연못 속으로 걸어들어 간다
개구리 두꺼비 소금쟁이 부레옥잠 들이 내 뒤를 따른다
꽃잎을 꼭 다물고 잠자던 수련도 뒤따라와
꽃을 피운다


  그의 시선은 항상 낮은 것에 머물러 있다. 참여, 순수 논쟁이 뜨겁던 시절에 회색으로 몰리기도 했지만 세상이 둘로 나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시의 역할과 의미는 시인들마다 제 각기 다르게 해석한다. <슬픔이 기쁨에게> 시절부터 지금까지 줄곧 라면을 끓여먹는 소년에게 관심을 가져왔고 기쁨보다는 슬픔을, 웃음보다는 눈물을 사랑했던 시인이다.

  한 시인의 시적 경향이 다양하게 변모하면서 부침을 거듭하는 것을 볼 때마다 변화 없이 꾸준한 모습만을 보여주는 시인들을 볼 때마다 사람들은 다른 목소리를 낸다. 정호승의 목소리에 질릴 때도 되었지만 나는 여전히 그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관심을 가지고 있다. 시인 지망생이었던 후배 소설가 고원정이 어느 인터뷰에서 ‘정호승 시인이 내가 시를 통해 하고 싶었던 말들을 이미 하고 있기 때문에 시인의 길을 포기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여전히 들을 만하다.

유등

등불 하나 강물에 떠나보내지 않고
어찌 강물을 사랑했다 하랴
강물에 등불 하나 흘려보내지 않고
어찌 등불을 사랑했다 하랴
떠나가지 않으면 떠나보내리라
흘러가지 않으면 흘려보내리라
강가의 가난한 사람들이
외로운 술집이 되어 가슴마다 술 마시는 밤
밤하늘을 헤엄치는 푸른 물고기들이
떼지어 강물에 뛰어내려 등불의 길을 따른다
부디 흐르는 강물에 칼을 꽂지 말아다오
누가 무너지는 촉석루를 껴안고 울고 있는가
지나가는 사람은 지나가게 내버려두고
떠나가는 사람은 떠나가게 내버려두고
유등(流燈)이여
그대 별들과 함께 서서 죽는 곳은 어디인가
나 흘러가면 돌아오지 않으리라
마지막 남은 등불 하나 바다에비치리라


  정호승의 시에 자주 등장하는 시어들이 있다. 밤, 하늘, 별, 강, 기다림, 사랑, 죽음, 가난 등이 그렇다. 서정시의 정의에 가장 근접해 있는 그의 시가 장수하는 비결이고 대중성을 확보하는 밑거름이다. 하지만 지루하지 않고 여전히 제 목소리와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그것을 바라보는 시인의 애정 어린 눈길이거나 진정성 때문이리라.

  언제나 완전한 시적 성취를 이룬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그의 시편들에서 읽어내는 완성도는 다양한 측면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문학적으로 완전한 시는 없다. 독자들에게 전해지는 순간 시들은 전혀 다른 언어로 반응하기도 한다.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읽는 이에 따라 다르게 해석하기도 하고 주관적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오독(誤讀)이 오히려 감동을 불러올 수도 있다. 독자들은 그만큼 다양하다. 난해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언어 유희에 그친 듯한 시들보다 정호승의 시가 오래 가슴에 남는 이유는 쉽고 간단하기 때문이다. 진실은 언제나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작고 낮은 목소리로 속삭인다. 지나치게 포장하지 않고 편안하고 가볍게 다가온다.

포옹

뼈로 만든 낚시바늘로
고기잡이하며 평화롭게 살았던
신석기 시대의 한 부부가
여수항에서 뱃길로 한 시간 남짓 떨어진 한 섬에서
서로 꼭 껴안은 채 뼈만 남은 몸으로 발굴되었다
그들 부부는 사람들이 자꾸 찾아와 사진을 찍자
푸른 하늘 아래
뼈만 남은 알몸을 드러내는 일이 너무 부끄러워
수평선 쪽으로 슬며시 모로 돌아눕기도 하고
서로 꼭 껴안은 팔에 더욱더 힘을 주곤 하였으나
사람들은 아무도 그들이 부끄러워하는 줄 알지 못하고
자꾸 사진만 찍고 돌아가고
부부가 손목에 차고 있던 조가비 장신구만 안타까워
바닷가로 달려가
파도에 몸을 적시고 돌아오곤 하였다

  두 사람이 부부이든, 연인이든 그들의 부끄러움을 헤아릴 줄 모르는 사람들에게 시인은 말한다. 사랑은 가장 내밀한 언어로 표현되는 가장 아름다운 시라고. 여전히 바다로 달려가고 싶은 수많은 연인들에게 신석기 시대의 꼭 껴안은 남녀의 모습은 시공을 초월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화석이 될만큼 사랑했던 그들의 사연이 궁금해진다. 그래서 시인은 물고기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너를 사랑한다고”

나는 물고기에게 말한다

그래도 너를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을 때
그래도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을 때
그래도 떠날 때는 내 돈을 모두 너에게 주고 싶다고 말하고 싶을 때
그래도 너에게 단 한푼도 줄 수 없다고 말하고 싶을 때
나는 촛불을 들고 강가로 나가 물고기에게 말한다
물고기는 조용히 지느러미를 흔들며 내 말을 듣고만 있을 뿐
아무에게도 아무 말도 하지 않으므로

내 산을 모두 밭으로 만들어 너에게 주고 싶다고 말하고 싶을 때
네 밭을 모두 산으로 만들어 내가 가지고 싶다고 말하고 싶을 때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이제는 인간이 되고 싶지 않을 때
기어이 인간을 버리고 혼자 울고 싶을 때
나는 강가로 나가 물고기의 허리를 껴안고 운다
침묵만이 그들의 언어이므로
침묵 외에는 그 어떠한 말도 하지 않으므로


  파란 가을 하늘만큼 아름다운 것이 있을까? 꿈이든 희망이든 좌절이든 절망이든 하늘은 늘 푸르게 감싼다. 시원스레 탁 트인 하늘을 보면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을 수 있다. 사실 하늘에게 일하지 않았으니 굶겠다거나, 사랑하지 않았으니 굶겠다는 다짐은 하지 않을 것이다. 인생에는 웃을 수밖에 없는 일이 더 많기 때문이다. 그냥 하늘 한 번 쳐다보고 웃어버릴 수 없는 일은 없다. ‘나는 언제나 한 마리 짐승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일과 사랑에 굶주린 ‘한 마리 인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하늘에게

어제 하루 일하지 않았으므로
오늘 하루를 굶겠습니다
어제 하루를 사랑하지 않았으므로
오늘 또 하루를 굶겠습니다

굶겠습니다
오늘 하루도 일하지 않았으므로
내일 하루도 굶겠습니다
오늘 하루도 사랑하지 않았으므로
내일 하루도 굶겠습니다

인생에는 웃을 수밖에 없는 일이 더 많다고
어머니는 빙그레 웃으시지만
나는 언제나 한 마리 짐승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배고픈 한 마리 인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포옹하고 싶은 많은 것들을 생각하며 정호승의 ‘포옹’을 들고 가을을 맞아 보는 것은 어떨까? 내게는 얼마나 포옹할 것들이 많은가? 포옹할 수 없는 것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07092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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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9-21 14: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sceptic 2007-09-26 2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끔 들러 흔적 남기지 않고 글 읽고 갑니다. 무례를 용서하시고 님도 행복한 가을 맞으세요...
 
역사론 현대사상의 모험 10
에릭 홉스봄 지음, 강성호 옮김 / 민음사 / 200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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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가의 눈으로 바라본 현실은 방법론에서 차이가 있더라도 그것을 바꿔나갈 추동력을 얻지는 못한다. 현실은 현실일 뿐이고 방법론이나 인식론은 그것으로 그친다. 20세기가 주목한 역사가로 에릭 홉스봄을 손꼽아 보아도 그의 인식은 한계에 그친다. 한 권의 책으로 그의 사상과 생애를 논할 수는 없다. 다만, 개인적으로 안타까운 것은 변화를 이끌어 낼 힘이 부족하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살아있는 것은 선택이 아니다. 인간은 탄생부터 죽음까지 의지와 선택에 의해 실행되지 않는 것이 더 많다는 사실을 어렴풋하게 알게된다.

  인생은 불합리하고 공평하지도 않으며 세상은 더욱 더 그러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은 역사를 통한 거시적 안목을 통해서가 아니라 사회와 일상 생활을 통해 자연스럽게 깨닫게 되는 진리이다. 20세기를 <혁명의 시대>, <자본의 시대>, <제국의 시대>로 명명했던 영민한 역사가인 에릭 홉스봄은 마르크스 역사관의 철저한 적용자이다. 그의 주저들을 읽지 않은 상태에서 <역사론>을 읽는 것은 순서가 뒤바뀐 것일 수도 있다. 그의 생애를 정리하는 듯한, 역사에 대한 인식 태도와 방법론을 망라한 이 책은 그의 책들을 읽어나가기 위한 방편일 수도 있겠다.

  특정한 사실과 시대적 사실을 다룬 ‘역사’가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해 논의하는 글들을 모은 책이다. 결코 가볍고 만만치 않은 이론들이 상당부분 차지하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에 입각한 역사주의 관점이나 아날학파에 대한 날선 비판들은 이 책을 읽기 위한 배경지식이 필요하다. 전체 21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책은 앞부분과 뒤 부분에 제시된 이야기들만으로 충분한 가치가 있다. 결코 가볍지 않으면서도 역사에 관한 에릭 홉스봄의 견해가 잘 피력되어 있고 두고두고 곱씹어 볼만한 수많은 제언들과 통찰들이 빛을 발한다.

  선동적 역사와 이데올로기적 역사는 자기를 정당화하는 신화가 되는 경향을 지닌다. 근대 민족과 민족주의의 역사가 입증해 주는 것처럼, 이것보다 더 위험한 눈가리개는 없다.
  이러한 눈가리개를 없애려고 시도하는 것, 혹은 적어도 눈가리개를 조금 들어올리거나 이따금 들어올리는 것이 역사가의 직무이고, 역사가가 그러한 일을 하는 한 사람들이 배우려 하지 않을지라도 현대 사회에 도움이 되는 어떤 것을 말해 줄 수 있다. - P. 70


  역사를 단순히 지나간 과거에 대한 반성이나 미래를 예견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이 책에서도 강조하듯이,

역사가는 일어날 가능성이 없는 일에 대해 실제로 어느 정도 이야기할 수 있고, 일어날 가능성이 없는 일에 대해서는 더 많이 이야기할 수 있다. 역사가의 말은 그리 많이 경청되지 않는다. 그것이 역사의 본질적 속성이기도 하다. 그러나 역사가가 실제로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여 미래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는 데 힘을 쏟고 개선한다면, 그리고 조금 더 많이 능력을 알린다면, 사람들은 역사가의 말을 조금 더 들으려고 할 것이다. 역사가는 전부는 아니지만 일부는 보여줄 수 있다. - P. 98

고 말한다.

  경제학과 관련된 관심은 인간의 정치나 경제와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홉스봄은 마르크스의 역사관을 통해 상부구조와 하부구조 그리고 토대가 되는 경제학을 역사 안에 담아내기 위한 방법론을 제시한다.

역사에서 분리된 경제학은 키가 없는 배이고, 역사가 없는 경제학자들은 배가 나아갈 방향에 대해 많이 생각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 P. 174

마르크스의 역사관은 ‘사회학적’인 것이거나 ‘경제학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학적인’ 성격과 ‘경제학적인’ 성격을 모두 지녔다는 점이 본질적인 특징이기 때문이다. 사회적 생산 관계와 재생산 관계(즉 가장 광범한 의미의 사회 조직) 그리고 물질적 생산력은 분리될 수 없다. - P. 248


그가 선언적으로 말하는 역사에 대한 강연과 발표, 언론을 게재된 기고문들은 하나같이 현재의 상황뿐만 아니라 우리가 걸어왔던 과거의 시간들을 돌아보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사건에 대한 기록들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우리는 역사를 때때로 망원경으로 바라보기도 하고 현미경으로 들여다보기도 한다. 그러나, 미시적인 관점에서 ‘특수사’만을 다루는 역사가 아니라 거시적인 관점에서 ‘전체사’를 다루는 것이 역사의 임무라고 주장하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하나하나의 관점 속에서 쉽게 그것들을 찾아 조합시킬 수는 없다. 이 책은 역사란 무엇인가에 대한 또 하나의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과거의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하는 카Carr의 견해를 우리는 여전히 역사에 대한 가장 훌륭한 정의라고 믿고 있다. 하지만 마르크스의 유물론적 역사관에 기초한 에릭 홉스봄의 역사에 대한 길잡이와 안내들이 오히려 더 현실적이고 적극적인 태도가 아닐까 싶다. 역사가 현실에서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의 문제는 역사가들의 몫이 아니라 당대의 현실을 만들어가는 우리들의 요구 사항이어야 한다. 그래서 저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역사가들은 자신들의 주제 밖에서 객관적 관찰자와 분석자로 서 있지도 않고 서 있을 수도 없다. 우리가 옛날 텍스트를 편집하는 것 같은, 오늘날의 공공연한 열정과 멀리 떨어져 있는 어떤 것을 다루고 있다 할지라도, 우리 모두는 우리가 처한 시대와 장소에 대한 가정에 빠져 있다. - P. 442


070917-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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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덩이 창비청소년문학 2
루이스 새커 지음, 김영선 옮김 / 창비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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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모두는 하나씩의 구덩이를 파고 있다. 그 구덩이에 무엇인 들어있는지도 모르면서 구덩이에서 뭔가 나올 거라는 희망에 기대어 삽질을 한다. 흔히 우리가 ‘삽질하네’라는 속어는 쓸데없는 짓을 하거나 필요없는 짓을 일컫는 말이다. 생각해 보자. 삽질을 하지 않고 사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우리는 모두 삽질을 하고 있다.

  구덩이가 필요해서가 아니라 파지 않으면 뒤처질 것 같은 불안감이 목을 조른다. 그 불안감은 미래의 불확실성에서 오는 것인지 타인과 비교해서 내 삶을 바라보는 기준에서 기인한 것인지 알 수 없다. 확실한 것은 누구나 구덩이를 파고 있다는 사실이다.

  ‘창비청소년문학’ 시리즈의 두 번째 소설로 나온 루이스 쌔커의 <구덩이>는 이현의 <우리들의 스캔들>에서 보여주었던 재미와 감동을 이어가고 있다. 아동출판시장은 많은 출판사들의 관심과 경쟁으로 뜨겁게 달구어져 있지만 청소년을 위한 책들을 살펴보면 사정이 다르다. ‘논술’을 축으로 한국 문학 시리즈나 외국의 고전을 소개하는 시리즈들이 기획되고 있다. 청소년을 위한 창작 소설이나 순수문학은 성장 소설을 중심으로 몇몇 작가들이 고군분투하고 있을 뿐이다. 나라말 출판사의 ‘국어시간에 고전읽기’ 시리즈나 ‘서해 클래식’시리즈 등 출판사들의 기획과 노력 여하에 따라 좋은 책들이 꾸준히 나오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같은 맥락에서 ‘창비청소년문학’ 시리즈는 청소년을 위한 문학 작품의 꾸준한 발굴과 작가의 양성에까지 관심을 기울였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루이스 쌔커의 <구덩이>는 참 재미있는 소설이다. 소설의 중요한 기능 중 하나가 즐거움이라면 충분한 조건을 가지고 있는 소설이다. 초록 호수 캠프에서 벌어지는 단순한 사건을 중심축으로 과거와 현재가 퍼즐처럼 들어맞는다. 소설의 마지막 장면까지 추리 소설 기법을 사용해서 독자들에게 흥미와 긴장의 끈을 놓치지 않도록 하고 있다. 한 눈을 팔거나 다른 생각의 여지를 주지 않는 소설은 일단 성공적이라고 볼 수 있다.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무엇엔가 몰두 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매력적인 소설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은.

  성장소설이면서 사회소설, 추리 소설이면서 모험소설의 형식까지 갖추고 있는 이 소설은 하나의 유형으로 규정지을 수 없다. 청소년을 위한 소설이라고 해서 단순하고 교훈적인 내용으로 채워질 거라는 편견은 여지없이 깨진다. 사회적 관점에서 아이들을 바라보는 태도도 점검해 보아야 하고 법의 잣대와 판단으로 청소년 문제를 어떻게 개선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문제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청소년 시기에 겪어야 하는 정신적인 고통과 열악한 현실을 극복하는 과정이 감동으로 다가온다.

  누구나 어려움은 있다. 나이와 상관없이 청소년이든 어른이든 고통스런 현실에 묶여있다. 그것을 극복하는 다양한 방식을 안다는 것은 뚜렷한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한 방편이 아니라 현실 밖에서 얻는 위로와 공감의 시간이 된다. 적극적인 상상력과 그칠 줄 모르는 도전 정신으로 현실을 이겨내려는 주인공 스탠리와 제로의 모험 정신은 나이와 상관없이 즐거운 대리만족의 경험을 선사한다.

  헐리웃 영화에 나옴직한 스펙터클이나 엄청난 상상력은 아니지만 과거와 현재가 이어지고 현실 상황들이 인과 관계에 의해 정교하게 움직이는 소설은 청소년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지적 호기심을 이끌어 낸다. 어떤 잘못을 했기 때문에 어떤 벌을 받아야하는가에 대한 법과 제도에 대한 비판에서부터 그들을 이해하는 어른들의 방식과 소외된 아이들에 대한 관심에 이르기까지 하나하나 생각해보고 고민해 볼 수 있는 문제들이 이 소설에는 다양하게 포함되어 있다.

  현실은 때때로 사막을 건너는 일과 같다. 신기루 속에 희미하게 보이지도 않는 엄지손가락 모양의 산을 찾아 떠나는 제로와 스탠리는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고민하고 좌절하고 방황하는 청소년들의 자화상은 아닐까 싶다. 잃어버린 꿈을 찾아 현실의 일탈을 꿈꾸는 어른들에게도 유년시절의 꿈과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구덩이>를 읽고 나니 갑자기 삽을 들고 나가 내 마음의 크기만한 구덩이를 하나 파고 싶어졌다. 나는 얼마나 큰 구덩이에 갇혀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지.


070913-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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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진화
데이비드 버스 지음, 전중환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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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움은 인간에게만 주어진 감정일까? 진화론적 관점에서 보면 인간의 유전 형질에서 비롯된 모든 행동 양식과 본능적 욕망과 충동들은 ‘적응’의 문제로 귀결된다. 그렇다면 인간이 인간일 수밖에 없는 요소는 무엇일까 고민해 본다. 그리움인가 아닌가.

  진화심리학은 동물의 생태를 관찰해 온 진화생물학과 더불어 가장 흥미로운 과학의 한 분야이다. 인간의 행동과 심리 상태가 어떻게 진화해 왔는지에 대한 관심은 당연해 보인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고민해 보았던 문제들에 대한 대답을 찾기 위해 고민해 본 사람이라면 데이비드 버스의 <욕망의 진화>를 권할 만하다. 짝짓기 행동의 원인이나 여자가 원하는 것 그리고 남자가 원하는 것에 대한 책들도 넘쳐난다. 단순하고 자극적인 호기심을 충족시켜주기 위한 책들을 읽었다면 이제 진지한 고민을 할 때도 되지 않았나 싶다. 남자는 여자를 모르고 여자는 남자를 잘 모른다. <화성에서 온 남자, 금성에서 온 여자>가 선풍적인 히트를 기록한 이유가 이 책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보다 근원적이고 기본적인 요소에 대한 관심과 해답이 제시되지 않는다면 남자와 여자의 갈등과 오해는 계속될 것이다. 물론 안다고 문제가 없어지지는 않지만 상대방에 대한 이해는 수많은 분노와 갈등을 줄여주는 역할을 할 수도 있다. 과학은 우리에게 많은 지식과 정보를 제공해 주고 수많은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제공하는 기능을 담당해 왔다. 진화 심리학이라는 학문이 우리가 걸어온, 인류가 살아온 세월에 대한 흔적과 패턴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제시한다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실제 행동에 나타나는 결과들과 그 결과의 원인들에 대한 깊은 고민과 통찰력을 제공해 주는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인간 본성에 대한 이러한 상(像)은 많은 사람들을 불쾌하게 할지도 모른다. 남편이 때때로 너무나 쉽게 거의 처음 본 여자와 침대로 직행한다는 사실이 아내를 불편하게 할지 모른다. 아내가 계속해서 짝짓기 가능성을 탐색하고, 다른 남성에게 성적으로 접근해 달라는 힌트를 던지고, 때로는 들키지 않고 남편을 오쟁이 지운다는 사실이 남편을 볼편하게 할지 모른다. 인간 본성에는 경악스러운 면이 있다. - P. 196

  세상에는 불편한 진실들이 많다. 안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 그리고 대책이 없거나 막막한 이야기들. 인간 본성에 관한 솔직하고 진실한 이야기들이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진실이 아니라고 우기는 것보다 우리의 행동과 현실에 나타난 문제들을 객관화 시켜 보거나 통찰력을 가지고 관찰하는 일이 필요한 것은 아닌가 싶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받아들여야 하는 진실이 있는 법이다. 두렵다고 회피할 수는 없다. 내가 왜 그렇게 행동하고 있는지, 왜 내 마음은 그렇게 흘러가는지 알 수 없을 때 이 책이 조금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 같다. 적어도 남녀 간의 관계에 있어서 만큼은.

  여자가 원하는 것, 그리고 남자가 원하는 것, 하룻밤의 정사, 배우자 유혹하기, 두 사람이 함께 살아가기, 성적 갈등, 파경, 남녀의 화합, 여성의 은밀한 성 전략 등 580여 페이지에 걸쳐 상세하고 진지하게 남자와 여자의 관계들을 살펴보고 있는 이 책을 독자들은 어떻게 받아들일까 궁금해지기도 하다. 종교에 따라, 자신이 처한 상황과 입장에 따라 각기 다른 형태로 인식할 수도 있겠다. 확정된 사실이 아니라 인류학적 관점에서 수많은 시간동안 인종과 국가를 초월해서 시행된 관찰과 면접 등 진화심리학에 관한 연구 결과가 고스란히 녹아있다. 다양한 연구 결과들이 나왔고 진행되고 있으나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느냐의 문제는 전적으로 독자에게 달려있다. 과학이 모든 걸 해결해 준 시대는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없을 테니까 말이다.

이미 2,000년 전에 오비디우스가 이와 똑같은 현상에 주목하여 문자로 씌어진 역사를 통해 이 전술이 줄곧 사용되어 왔음을 기술했다. “소녀들은 시를 격찬하지만 값비싼 선물을 받으려 애쓴다. 아무리 까막눈 멍청이라도 돈만 많다면, 소녀들의 눈길을 사로잡을 수 있다. 오늘날은 진정 황금만능의 시대이다. 황금으로 명예를 사고, 황금으로 사랑을 얻는다.” 우리는 아직도 황금만능 시대에 산다. - P. 207

  돈많은 남자 김중배를 선택한 심순애의 비련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2,000년 전에 오비디우스가 한 말을 기억해야 한다. 돈은 자원이고 안전이며 평화이고 행복이다. ‘금융은 돈이 아니라 행복입니다’라는 논증적 오류를 포함한 광고 카피가 당당하게 대한민국 안방에 울려퍼지는 현실은 어쩌면 당연해 보인다. 자본주의 사회든 아니든 생물학적인 관점에서 보다 많은 자원을 보유한 남성에게 끌리는 여성의 본능을 절대로 욕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는 이 책은 더 이상 ‘사랑’만 먹고 살겠다는 순진한 다짐도, 순애보도 가당치 않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우리가 몰랐던 많은 행동 패턴들, 특히 남녀 간의 심리와 행동 방식들은 오랫동안 진화되어온 ‘적응’의 결과이며 욕망에 충실한 유전자의 명령이라는 사실들이 확인된다. 축적된 연구 결과들이 대중적인 책을 통해 이렇게 쉽고 설득력 있게 전해지기도 힘들 것 같다. 인간의 질투에 관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질투심을 일으키는 사건은 남성의 경우에는 부성을 보장받아야 한다는 적응적 문제에 직결되는 반면에 여성의 경우에는 자원과 헌신을 보장받아야 한다는 문제에 직결된다. - P. 259

  이 책을 읽는 내내 충돌하는 것은 세상의 윤리와 도덕 그리고 유전자와 욕망 사이의 충돌이었다. 이 둘 사이에 벌어지는 간극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는 쉽지 않다. 진화심리학자와 종교인 그리고 윤리학자 사이의 대담과 토론을 준비해 보면 어떨까 싶은 상상을 해 보았다. 인간은 끊임없이 교육을 받고 윤리적 가치관을 신봉하지만 사람이 살아가는 세상에는 교과서와 다른 일들과 상상을 초월한 행동들을 접하게 된다.

  여성들의 배란기에 혼외정사가 급증하는 이유, 동성애에 관한 미스터리, 시간의 따른 변화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단순한 호기심으로 접근할 수 있는 문제지만 적응적 측면에서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까지 재미있고 편안하게 설명되어 있다. 학문적인 관점으로 흘러 다소 딱딱할 수 있는 주제들을 이렇게 쉽게 풀어낸 데이비드 버스의 <욕망의 진화>는 앞으로도 꾸준히 인간이 접근해야 부분들에 대해서까지 세심하게 배려하고 있다. 시간이 흘러간다고 모든 것이 해결되지는 않겠지만 현재와 같은 삶의 형태가 고정된다면 유전자의 정보 자체도 적응적으로 변화하겠지만 현재까지 조상들이 적응하며 살아남은 유전자의 기억들과 인간에게 이미 프로그래밍 되어 있는 행동 방식들이 쉽게 변하지 않을 것 같다.

인류학자 나폴레옹 샤농이 야노마뫼 족 사람들에게 미국에서는 자유나 민주주의 같은 이상을 지키기 위해서 전쟁을 선포한다고 전하자, 그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그들에게는 여성을 생포한다는 목적 외에 다른 목적을 위해 목숨을 건다는 것이 바보같이 생각되었을 것이다. - P. 424

  전쟁에 관한 야노마뫼 족 사람들의 견해와 미국인들의 견해가 많이 다를까 궁금했다. 그리고 과연 자유나 민주주의와 같은 이상을 위해 미국이 전쟁을 하고 있다는 설명이 사실일까? 야노마뫼 족처럼 나도 이해하지 못하겠다. 차라리 생존을 위해 혹은 석유와 같은 더 많은 자원을 위해 전쟁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면 더 쉽게 이해하지 않았을까?

사랑과 연애, 섹스와 결혼에 관한 남녀의 엇갈린 욕망에 관한 진실이 이 책을 통해 모두 밝혀지긴 어렵지만 많은 의문점이 해소되었다. 정답이든 아니든, 하나의 관점이든 삐뚫어진 시각이든 아니든 그것을 판단하는 것은 독자들의 몫이겠고,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하고 이해하고 배려할 수 있다면 이 책은 분명히 의미가 있다.

  저자의 다음과 같은 바람은 어쩌면 희망 사항일지도 모른다. 화합이라니? 욕망을 절대 화합하지 않는다. 다만 화합을 가장한 채 드러나지 않고 감추어질 뿐.

진화라는 엄청난 시간대를 고려하는 과학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인간의 전체 성 전략 레퍼토리 가운데 유독 하나의 전략을 중시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정당화되지는 않는다. 우리의 인간 본성은 우리 성 전략의 다양성에서 발견된다. 인간의 성 전략 레퍼토리에 내재한 다양한 욕망들을 이해한다면 화합을 향해 한 걸음 더 내디딜 수 있을 것이다. - P. 418


07091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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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9-11 14: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올라오는 거 보고서 사려고 계속 보관함에 넣어놨던 책인데 ㅎㅎ
지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비로그인 2007-09-11 20: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표지부터 굉장히 독특한 느낌을 주어서 잊혀지지 않는 책이었습니다. 상당히 좋은 느낌이군요. 한번 읽어보고 싶은 책이네요.^^

sceptic 2007-09-13 1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쫌 두껍긴한데...책장도 잘 넘어가고...읽을만 합니다...실망은 없으실듯...싶네요...^^
 
설득의 논리학 - 말과 글을 단련하는 10가지 논리도구
김용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반드시 읽어야 할 것 같은 책이 있다. ‘설득’이 들어가는 책이 그렇다. 이 책을 읽은 다른 사람에게 설득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읽어야할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로버트 치알디니 ‘설득의 심리학’을 읽지 않았지만 내용을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김용규의 <설득의 논리학>에서 언급하고 있으니 ‘설득’은 심리학을 넘어 이제 논리학까지 범위를 넓혔다. 그러고 보면 ‘설득’은 누구에게나 폭넓게 호기심과 관심을 유도하기 좋은 소재임에는 틀림없어 보인다. 유혹의 기술은 제목 뿐 아니라 표지에서도 드러난다. <철학 카페에서 문학읽기>의 서체를 그대로 활용한다. 자신감 있고 부드러우면서도 막힘없이 휘갈려 써 내려간 <설득의 논리학>은 표지에서부터 충분히 독자들을 설득하고 있다.

  말로든 글로든 우리는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누구를 설득한다. 물건을 파는 사람부터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는 사람까지 모두가 마찬가지다. 자신의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이해시키고 자신의 주장에 동의하도록 하는 특별한 방법이 있다면 누구나 한번쯤 관심을 갖지 않겠는가? 그 방법과 기술이 심리학이든 논리학이든 독자들은 타인을 설득하기 위한, 세상을 살아내기 위한 도구에 흥미를 보일 수밖에 없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충분한 매력과 호기심을 자극한다.

  철학과 논리학은 친척이다. 아니, 철학을 위한 도구로서 논리학은 역할과 의미를 지닌다. 철학이 사람과 세상에 대한 고민이듯이, 사물과 언어에 대한 성찰이듯이 논리학도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도구로서 훌륭한 역할을 한다. 저자는 이 책에서 10가지 논리 도구를 제시한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를 발판으로 세익스피어와 베이컨, 셜록 홈즈와 비트겐슈타인, 파스칼과 쇼펜하우어까지 다양한 논리를 선보이며 실증적인 예시와 쉽고 간단한 설명으로 논리학의 매력을 선보인다.

  일상에서 가장 설득 당하기 쉬운 광고의 전략으로부터 이야기를 풀어나가며 관심을 갖게 한다. 설득은 논증이라는 단순한 이야기부터 시작하기 때문에 고개를 끄덕이며 저자의 이야기에 귀 기울인다. 삼단논법과 세 가지 변형, 배열법과 yes-but 논법, 귀납법과 가추법, 가설 연역법은 익히 알고 있는 방법들이다. 논쟁술과 토론술, 이치논리와 퍼지논리는 생소하지만 어려운 내용은 아니다. 저자는 이처럼 다양한 기술을 소개하며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독자들을 설득한다.

  첫째, 쉽고 재미있게! 대중적인 독서가 가능하도록 이 책은 어려운 설명이나 딱딱한 내용들을 최선을 다해 쉽고 간단하게 설명하고 있다. 풍부한 사례와 간단하고 쉬운 설명은 이 책을 논리학에 접근하기 위한 유인으로서 충분한 역할을 한다. 반면에 한계도 지니게 된다. 한정된 분량에 10가지 논리 도구를 백화점식으로 나열하는데 그친다는 느낌이다. 깊이와 넓이에는 한계가 있으며 폭넓은 분야에서 찾아볼 수 있는 사례가 아니라 공식에 맞아 떨어지듯 한 예문이 대부분이다.

  둘째, 요약 정리가 뛰어나며 기본적인 개념과 원리에 충실하다. 각 장마다 논리의 길잡이 코너를 마련해서 그 장에서 설명한 개념들을 간략하게 다시 정리하고 있다. 필요할 때 꺼내 볼 수 있을 만큼 간단하지만 정확하게 개념들을 설명하고 있다. 아쉬운 점은 구체적인 방법론이 없다는 것이다. 지나친 욕심일지도 모르겠지만 저자는 이 방법들을 배우고 익혀 말이든 글이든 실전에서 사용하면 놀라운 효과를 발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훈련과 실전에서 사용여부는 독자에게 맡기고 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언제 어디서 어떤 방법으로 연습해야 하는지 체득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셋째, 저자의 문장이다. 다른 분야의 책들도 마찬가지지만 각 학문 분야에서 논쟁점이나 핵심적인 사항들을 소개하는 글들의 성공 여부는 순전히 저자의 능력에 달려 있다. 수많은 철학서들이 난무하고 논리학 책이 넘쳐나지만 옥석을 가리기는 쉽지 않다. 자신의 상황과 목적에 맞는 책을 고르는 어려움은 겪어 본 사람만이 안다. 아카데미즘에 갇혀 지루하고 딱딱한 이론의 나열로 그치는 경우도 있고 알맹이 없이 쉽고 흥미로운 이야기로 남는 것 없이 공허한 경우도 있다. 단순한 소개와 개념 설명만으로 그치는 경우가 그렇다.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은 것 같지만 뭔가 아쉽고 허전하며 깊이에 대한 욕심이 끊임없이 목구멍으로부터 올라오는 순간을 만나게 된다. 저자 김용규의 문장은 깔끔하고 설득적이다. 다양한 분야에 대한 관심과 폭넓은 독서를 바탕으로 풍요로운 알맹이들을 쉽게 전달하려는 노력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책은 어디쯤 어떤 자세로 서 있는지 나에게 객관적인 판단은 어렵다. 모두에게 필요한,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할 수 있는 책을 만나기는 어렵다. 정말 마음에 드는 사람을 만난 듯 오랫동안 가슴 설레고 뿌듯하게 한 줄 한 줄 음미하고 두고두고 생각나는 책을 찾아 오늘도 헤매고 있는 나는 누구인지 10가지 논리 도구로도 설명이 불가능하다.


070907-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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