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그리고 그 밖의 것들
수잔 손택 지음, 김전유경 옮김 / 이후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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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을 위한 여러 가지 제안과 방법들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기적인 목적으로 주변 상황을 변화시키고 개인의 안락만을 도모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인간의 이타성은 그 유전적 요소에만 기대고 있다고 믿지 않는다. 인류 사회에 수없이 명멸했던 사람들 중에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사람들의 생애와 사상은 치열한 현재가 되기도 하고 아련한 추억으로 남기도 한다. 어렵고 고통스럽게 걸었던 길들이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편안하고 즐겁게 거닐 수 있는 산책로나 대로가 되어 버린 경우도 많다. 그럴 때마다 사람들은 그를 떠올리고 책을 통해 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게 된다.

  혁명을 위한 전사는 아니었지만 그녀의 생각과 행동은 편안하지 않은 길을 걸었다. 그 길이 때로 힘겹게 때로 편안하게 보였을지라도 그녀의 생각과 삶의 흔적들은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커다란 울림을 준다. 사람은 모두 다원적이다. 일면만이 소개되거나 한 가지로 규정지을 수 없다. 우리가 통상적으로 타인을 평가하는 기준은 그 사람의 가장 큰 특지이겠지만 또 다른 모습과 상반된 행동과 생각들이 고루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의외의 모습에 놀라기도 하도 흥미롭게 바라보기도 한다.

  <해석에 반대한다>, <타인의 고통>, <은유로서의 질병> 등에서 보여주었던 수잔 손택은 <나, 그리고 그밖의 것들>이라는 소설집에서 또 다른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은 1963년부터 1978년까지 발표되었던 단편들을 모은 책으로 작가로서의 그녀를 만나보게 한다. 학자로서가 아니라 작가로서 살고 싶었던 그녀의 희망대로 훌륭한 문학 세계를 구축했지만 작품 외적인 저작들이 불러일으킨 논란과 사회적 관심과 행보 때문에 그녀의 작품을 읽은 사람은 많지 않다. 수잔 손택은 항상 비판적 관점에서 기존의 질서와 틀을 거부했다. 그것이 삶의 질서이든 기득권층이 가진 권력이든 폭력적인 세계 질서든 상관없이 말이다.

  일곱 편의 단편을 통해 작가는 현대 사회를 비판하고 일상의 문제를 다루며 개인적 경험을 고백하고 있다. 맨 앞에 등장하는 단편 ‘인형’은 인상적이다. 자기 복제를 통해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망을 그려내지만 일상에서 벗어난 사람의 삶이 결국 행복하다고 말하기 힘들어 보인다. ‘지킬 박사’와 ‘사후 보고’도 마찬가지로 현대인의 일상을 통해 출구를 찾아 헤매고 있다. 그곳으로부터의 탈출과 일탈을 꿈꾸지만 결국 그 한계를 지닌 채 각성의 시간만을 제공할 뿐이다. 뿌리 뽑힌 자아의 모습은 어느 곳에도 쉽게 놓여지기 힘들기 때문이다.

  ‘미국의 영혼들’과 ‘베이비’는 미국적인 소설이다. 미국 사회에 대한 비판 정신이 은유와 풍자를 통해 드러난다. 우회적인 비판과 적절한 지적은 소설이 아니어도 좋겠지만 또 하나의 방법임에는 틀림없다. 재미있는 것은 소설 속에 드러난 작가의 고백들이다. 픽션을 전제로 한 소설에서 작가의 경험을 추론하는 것은 위험하지만 ‘중국 여행 프로젝트’, ‘안내없는 여행’, ‘오랜 불만을 다시 생각함’과 같은 단편들을 통해 작가의 영혼의 일부를 훔쳐 보았다면 지나친 해석일까?

  감성적이고 지적인 태도로 당대의 삶을 돌아보고, 자신이 발딛고 서 있는 현실을 돌아보는 작가의 태도는 쓸쓸하다. 외로움을 보았다면 작가의 소설을 통한 독자의 지나친 추측일지도 모르겠지만 작가의 눈은 표지 사진보다 깊어 보인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수잔 손택의 소설집을 읽는 것은 그녀가 다른 책들에서 보여주었던 시선과 생각과 또 모습을 보여준다. 누구나 다양한 시선과 감성과 생각을 벼리며 산다. 그것을 표출하지 못하더라도 말로써 때로는 행동으로 보여주기도 하도 꿈을 꾸며 살아가기도 한다. 작가의 진짜 꿈은 이렇게 현실보다 작품 속에서 실현되는 현실은 아니었을까?

  제목처럼 ‘나’와 ‘그밖의 것들’ 사이에 벌어진 간극만큼 현실은 부조리하다. 하지만 작가는 결국 그곳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하는 듯하다. 현실을 감싸고 꼼꼼이 살펴보고 애증을 간직한채 그것과 함께 하는 것이 작가가 선택한 길이 아닌가 싶다. 개인적인 경험과 그 속에서 부딪히는 현실 사이에서 작가는 오랫동안 전해오던 외로움을 보여주기도 한다. 비논리적이고 부조리한 현실과 맞서 싸울 힘과 용기도 결국 삶이라고 하는 굳건한 토대 위에서 가능하다고 믿는다. 내가 발딛고 선 땅 위에서 사람들 사이에서 휘두를 수 있는 날선 비판의 칼날과 실천에 옮길 수 있는 튼튼한 두 다리를 위해 작가에게 경의를 표한다. 소설이 소설로 읽히지 않는 그녀의 작품은 그녀의 영혼을 닮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070905-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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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9-05 1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잔 손택이군요...~ 리뷰 잘 읽었습니다. ^^

프레이야 2007-09-05 17: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고 싶었던 책입니다. ^^

sceptic 2007-09-07 2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손택 좋아하시면 한 번 읽어볼만 합니다...^^

 
파놉티콘 : 제러미 벤담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64
제러미 벤담 지음, 신건수 옮김 / 책세상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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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가 개인을 사회로부터 소외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들이 사회 속에서 이방인처럼 소외되어 있기 때문에 범죄가 발생한다. - 미셸 푸코, <감시와 처벌>, P. 420

  미셸 푸코의 <감시와 처벌>이 아니었다면 관심 없었을 파놉티콘을 꼼꼼하게 보고 싶었다. 마침 ‘책세상’에서 제러미 벤담의 <파놉티콘>이 나왔기에 숨가쁘게 읽었다. 이 책은 영어판이 아니라 1791년에 출간된 프랑스어 판본을 대본으로 삼아 번역했다. ‘제러미 벤담이 프랑스 국민의회 의원 가랑에게 보내는 편지’를 쓰고 친구 뒤몽이 요약해서 ‘감시 시설, 특히 감옥에 대한 새로운 원리에 관한 논문’이라는 제목으로 쓰여진 내용이다. 벤담이 프랑스에 직접가지 않고도 쉽고 정확하게 전달될 수 있도록 요약한 논문이기 때문에 복잡하고 상세한 건축 시설에 대한 내용들은 전부 생략되어 있으며 파놉티콘의 체계와 운영방식, 특징과 장점들을 잘 정리하고 있다.

  벤덤이 주장하는 공리주의와 초기 자본주의를 대표할 만한 건축 형태로서 ‘파놉티콘’을 내세운 푸코의 힘이 아니었다면 다시 주목받지 못했을 것이다. 근대 이전에 재판과 형벌을 기다리는 장소에서 감금이라는 처벌보다 재사회화의 기능을 떠맡았던 감옥은 사회적 이익을 중시한 공리주의적 성격이 잘 드러난다. 스스로를 통제함으로써 규율화된 인간을 만들려는 전략은 근대의 작동원리로서 현재까지 유효하다.

  21세기의 정보 산업화 사회에서도 이 통제 시스템은 점점 교묘해지고 있으며 역사적 관점으로 살펴볼 때 이러한 시스템의 미래는 여전히 폭력적인 수준으로 발달할 것으로 보인다. 비판적 관점은 차치하고서라도 근대의 작동원리라는 측면에서 ‘파놉티콘’은 미래 사회를 비춰보는 탐조등의 역할을 하고 있다. 조지오웰이 예견했던 사회는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 그렇지만 단순 비교하면서 부정적 관점으로만 보아서는 안된다. 개인과 인권이 중시되는 사회가 옳으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는 논쟁의 범위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닐까? 어떤 사회를 지향하느냐, 어떤 삶을 추구하느냐의 문제는 사회적 합의를 넘어 개인의 선택이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감독관은 마치 유령처럼 군림한다. 이 유령은 필요할 때는 곧바로 자신이 존재한다는 증거를 드러낼 수 있다.
  이 감옥의 본질적인 장점을 한 단어로 표현하기 위해, 진행되는 모든 것을 한 눈에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하는 파놉티콘(panoptique/panopticon)이라고 부를 것이다. - P. 23


  얼마나 많은 시선과 감시 속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는지 알지도 못한다. 교통카드는 초단위로 사람들의 움직임을 파악할 수 있으며 길거리와 건물마다 설치된 감시카메라와 인공위성에서 내려다보는 세상은 거시적, 미시적 관점에서 거의 완벽하게 피할 수 없는 시선들에 둘러싸여 있다. 개인이든 국가든 서로서로 감시의 눈길을 거두기 힘들만큼 익숙해지고 있다. 유령처럼 군림하고 있는 감독관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살아 숨 쉬는 모든 공간 속에서 우리는 자유롭지 못하다.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이제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규율적 제도와 폭력적 시선들은 개인들에게 자기검열 기제로 작동한다. 스스로, 알아서 기어다닌다. 조심하고 방심하고의 문제는 중요하지 않다. 익숙한 시선들 속에서 무덤하게 지내거나 무시해 버리기도 한다. 개인정보는 이미 공유되어 있으며 사생활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마음만 먹는다면 누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아내는 것은 정말 어렵지 않은 세상이 되었다. 커다란 권력이나 힘있는 자의 특권이 아니라 조금만 관심을 기울여도 혹은 기울이지 않아도 쉽게 알려지는 수단과 방법들이 도처에 널려있다.

  벤담은 파놉티콘을 공리적 관점이나 초기 자본주의의 작동 원리로 제시했지만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위해 ‘파놉티콘’이 기능했다고 믿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누구에 의한 어떠한 제안이든 개인과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합의없이 주장되고 실행되었다면 분명한 폭력이다. 그토록 갈망했던 감시체계의 감시자가 되지 못했지만 벤덤은 자신의 구상에 대해 단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으며 전 재산과 인생을 걸고 올인했다. 이후에 비슷한 형태의 감옥이 지어지고 실행되었지만 과학과 기술의 발달은 파놉티콘 체제보다 월등한 감시체계와 통제 시스템을 만들어내고 있다.

  불과 몇 백년 동안 사람들의 삶은 빠르게 변해왔으며 그 형태와 기능 면에서 비교를 불허한다. 태어나면서부터 부모가 ‘빅브라더’가 되고 학교에 입학하는 순간, 병영에 도착하는 순간, 사회에 첫 발을 내딛는 순간 우리는 모든 자유를 포기하고 벤덤이 그토록 갈망했던 일망 감시체계의 시선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책의 말미에서 그가 주장했던 것처럼 말이다. 푸코의 <감시와 처벌>을 읽기 전에 적절한 에피타이저로 이 책을 권한다.

마지막으로 이 원리는 다행스럽게도 학교나 병영, 즉 한 사람이 다수를 감독하는 일을 맡는 경우에 모두 적용할 수 있다. 파놉티콘 장치를 통해 단 한 사람에 의한 용의주도함의 이점은 다른 체계에서 사용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성실함보다 더 나은 성공을 보장한다. - P. 70


070903-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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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들의 풍경 - 고종석의 한국어 산책
고종석 지음 / 개마고원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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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들은 저마다 자기의 풍경을 갖고 있다. 그 풍경들은 비슷해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 다르다. 그 다름은 이중적이다. 하나의 풍경도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고, 풍경들의 모음도 그러하다. 볼 때마다 다른 풍경들은 그것들이 움직이지 않고 붙박이로 보인다. 그러나 변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그것이야말로 말들이 갖고 있는 은총이다. 말들의 풍경이 자주 변하는 것은 그 풍경 자체에 사람들이 부여한 의미가 중첩되어 있기 때문이며, 동시에 풍경을 보는 사람의 마음이 자꾸 변화하기 때문이다. - <말들의 풍경>을 시작하며, 1989년 김현

  1990년 겨울에 나온 김현의 <말들의 풍경> 서문은 이렇게 시작된다. 1부 말들의 풍경에서 김현은 최승호, 최승자, 김정란, 김혜순, 곽재구, 박남철, 유하, 황인숙, 송찬호, 기형도의 시에 대해 말하고 있고 2부 보이는 심연과 안 보이는 역사 전망에서는 이성부, 이승훈, 김정웅, 박상륭 등의 작품을 분석하고 있다. 너무나 익숙해져버린 이름들이다. 아득한 스무살 무렵 추억의 언저리를 더듬게 한다. 여전히 건재하게 한국 현대시에 주요 시인으로 남아 있는 이들이 당시엔 재기 발랄한 신인이거나 젊음의 열정을 내뿜을 무렵이었다. 17년의 세월이 흘렀으니 충분히 감회에 젖을 만하다.

  고종석은 선배의 책 제목에 기댄 것도 아니고 똑같은 제목으로 책을 묶어 냈다. 영화용어로 ‘오마주’에 해당하는 것일까? 한국일보에 연재되었던 칼럼을 모아 <말들의 풍경>이라 이름 지었다. 법학과 언어학을 공부한 저자의 이력은 글을 읽는데 크게 도움을 주지 않는다. 최근에 <모국어의 속살>에서 보여주었던 혹은 지금까지 그가 보여주었던 우리말과 글에 대한 애정과 관심 그리고 비판적 관점들이 이 책에서도 오롯하다. 신문의 칼럼이라는 제한된 분량때문인지 깊이 있고 심층적인 내용을 담아내지는 못했지만 하나의 주제와 인상들을 찾아내 빛을 내고 담아내는 솜씨는 장인의 경지에 이르렀다. 신문에 실린 글이기 때문에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지만 어려운 말이 없고 저자 나름의 뚜렷한 색깔과 고집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문장들이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담백하다.

  제목에 걸맞게 우리말에 대한 관심과 분석들이 정확하고 날카롭다. 일상에서 사용되는 우리말의 특징과 한계들, 그 깊이와 갈피를 짚어낸 칼럼들이 하나의 주류를 이루고, 또 하나의 흐름은 인물에 대한 탐색이다. 정운영, 김윤식, 이오덕, 전혜린, 서준식, 양주동 등 우리말과 글을 살려 쓴 사람들의 글과 생각들을 꼼꼼하게 털어내고 제자리에 놓아 본다. 조금씩 차이는 있을 수 있겠지만 나름의 고집대로 이오덕을 평하거나 김윤식을 이야기하는 방식은 공감을 할 만하다. 홍승면, 임재경이나 정운영 등 선배들에 대한 인상과 글을 통해 보여주었던 특징들도 재미있었다.

  책으로 묶어내기 전에 분류하고 편집하고 내용을 수정하는 수고를 건너뛰며 날 것 그대로 시간의 순서대로 나열하는 방식을 취한 점이 독특하다. 각 글 뒤에 연도와 날짜를 밝혀 놓음으로써 당시의 맥락과 상황들을 엮어서 생각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독자의 입장에서는 다소 불편해 보일 수도 있으나 정치적 시론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재미있는 기록의 성격을 지닌다. 그 재미라는 것이 개인이 속한 집단과 사회가 사용하는 한국어의 풍경들에 대한 소박하고 맛깔스런 밥상과 같다. 책을 묶어내는 방식이나 책에 대한 욕심을 조금 털어버린 채(수십권의 책을 냈기 때문에 욕심이 없어 그런지도 모르지만) 소탈하게 엮어낸 <말들의 풍경>은 김현의 그것에 견주어 비교하는 것은 온당치가 않다.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이제 작고할 당시의 김현의 나이를 넘어선 저자가 선배에게 보내는 투정과 질투가 가당치 않다고 했지만 독자가 보기엔 정겹고 즐겁기만 하다.

  김현 선생이 생전에 이촌동 자택을 찾은 제자나 지인들이 돌아갈 때 버스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고 계시더라는 이야기를 고등학교 때 문예반 동기 녀석한테 들었던 기억이 아직도 새롭다. 특별한 이야기도 아니었지만 우리는 한동안 헤어지며 버스에 대고 손을 흔드는 우스꽝스런 짓을 했었다. 그 몇 년 후에 돌아가셨다. 제대로 이해되지도 않았겠지만  선생의 책들을 읽으며 문학에 눈떴다. 감탄과 아쉬움들은 표현이 부족해 말로 다하기 어렵지만 이제 아련한 추억과 그리움의 시간으로 남아 있다.

  17년이 지난 후 고종석은 <말들의 풍경>에서 이렇게 말한다. 언어를 바꾸려는 힘과 현실을 바꾸려는 힘의 작동원리가 같지는 않겠지만 언어의 언저리에 서성이며 쑤석거리는 모습으로 남게 될 줄이야…… 한결같은 모습으로 계속될 고종석의 이야기에 여전히 귀 기울이고 있을 것이다.

현실은 언어 이전에 있는 것이어서 언어를 바꾸려는 노력이 고스란히 현실을 바꾸는 힘이 될 수는 없겠지만, 언어의 비틀림을 응시하는 일은 현실의 비틀림을 살피는 첫걸음이 될 수 있다. - P. 99


07083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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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eptic 2007-09-04 15: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글은 아니라서..즐거운 독서 하세요...
 
예술, 정치를 만나다 - 위대한 예술가 8인의 정치코드 읽기
박홍규 지음 / 이다미디어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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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존주의 철학자 부버는 “교육은 만남이다.”라고 선언했고, 볼노우는 “만남은 교육에 선행한다.”고 말했다. 교육에서 뿐만이 아니라 사람이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행위 이전의 문제다. 서로 자아를 확인하고 관심과 공감이 형성될 때 만남은 의미를 갖는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 아니라 학문과 예술도 마찬가지다. 겹쳐지고 누벼지는 지점이 없으면 만남은 불가능하다.

  최근 들어 ‘○○, ○○를 만나다’는 책 제목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 특별한 홍보가 필요 없는 무임승차를 노린 새로운 마케팅 기법인 것 같다. 이다미디어의 편집팀과 홍보팀 관계자들의 각성을 요구한다. 책 제목이 성의 없어 보여 빛을 바란다. 박홍규의 책이 아니었다면 사지 않았을 <예술, 정치를 만나다>는 대중적인 시각과 접근법으로 박홍규를 새롭게 읽을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위대한 예술가 8인의 정치코드 읽기라는 부제가 말해주듯 정치와 직간접적으로 자의든 타의든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예술가들의 면면을 살펴보는 책이다.

  루벤스, 괴테, 바그너, 베르디, 피카소, 채플린, 사르트르, 레논 - 이들이 그 주인공인데 인물들 사이의 연관성으로 묶이기는 힘들다. 음악 3명, 문학과 미술이 각 2명, 영화 1명으로 장르를 구분하지 않았으며 앞에 4명은 20세기 이전, 뒤에 4명은 20세기 이후의 인물들이다. 저자가 말하듯이 이밖에 정치와 관련된 예술가들은 더 많이 있지만 박홍규의 개별적 저작이나 다른 책에서 소개된 인물들은 제외되었다.

  중세를 벗어나 르네상스와 고전주의를 거친 예술의 특징들은 미술과 음악에서 공통적인 특성으로 나타난다. ‘일그러진 진주’인 바로크와 낭만주의는 전 시대에 대한 반발과 계승 발전되었다는 주지의 사실을 굳이 확인하지 않더라도 거장들의 삶은 역동적이었고 시대의 중심에 서 있었다. 당대 최고의 화가이자 정치가로서 화려한 삶을 살았던 루벤스나 괴테, 반유대주의와 히틀러의 추종으로 유명한 바그너, 그와 비교되는 이탈리아의 베르디의 삶은 역사와 정치의 소용돌이 속에서 너울거리는 한 인간의 모습과 고뇌하는 예술가의 면면들을 보여준다. 예술가도 정치적 동물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어떤 형태로든 자신의 정치적 신념과 생각들을 작품 속에 반영하거나 작품과 무관하게 정치적 행위들을 남겼다.

  19세기의 국가주의와 민족주의 혹은 제국주의와의 결합으로 예술은 한층 더 정치성을 띠게 된다. 격동의 20세기 명멸했던 수많은 예술가들 중에 <게르니카>를 각인시킨 피카소나 온몸으로 세상을 풍자했던 채플린, 자유와 정의를 추구했던 사르트르, 반전평화의 메시지를 노래에 담아냈던 존 레논의 생은 그들이 남긴 정치적 인간으로서의 모습이 먼저 다가오기도 한다. 만남이 예술에 선행한다는 전제가 가능하다면 표현주의 관점이라는 편향된 시각이 아니라 작품을 이해하기 위한 최소한의 선행 조건으로서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은 어떨까 싶다.

  저자는 연대기적 요소에 따라 이들의 삶을 단순화하여 나열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특유의 방대한 인문학적 지식과 당대의 역사와 사회, 정치 환경에 대한 해석으로 그들의 삶을 이야기하고 그들의 예술을 해석하기도 한다. 예술에 대한 모든 비평과 해석이 주관적이라는 전제하에 박홍규의 관점을 들여다본다면 공감과 관심을 충분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정치적 상황에 따라 부침이 심했던 예술가들의 삶은 누구보다도 예민하게 현실 상황에 반응했을 것이며 그들이 남긴 작품들 속에는 우리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고뇌와 절망, 환희와 열망들이 담겨있을 지도 모른다. 조금 다른 방식으로 예술과 예술가들을 정치적으로 바라보는 것도 새로운 즐거움으로 남는다. 전혀 새로운 시도는 아니지만 ‘정치’라고 하는 하나의 코드로 읽어내는 방법은 충분한 가치와 재미를 선사한다.

  <아나키즘 이야기>에서 존 레논의 ‘이매진’으로 박홍규의 아나키즘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던 장면이 떠올랐다. 책을 읽고 귓가에 맴도는 노래를 한참동안 컬러링으로 사용했다. 예술은 고급과 저급으로 나눌 수 없고 특히 일본을 통해 유입된 미술 - 예술에 대한 개념이 어떻게 오해되었고 100년 이상 이 땅에 뿌리 깊게 고정관념을 만들어 왔는지 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삼중당 문고판 <구토>를 책꽂이에서 다시 꺼내 읽어보아야겠다는 생각도 들었고 채를린 영화를 다시 꼼꼼히 보고 싶은 마음도 생겼다. 예술의 전당에서 보았던 <오르세미술관전>보다 최근에 덕수궁 미술관에서 보았던 <비엔나미술사박물관전>이 인상 깊었던 이유를 되새겨 보았다. 합스부르크 왕가 컬렉션답게 바로크의 거장들이 대거 등장했기 때문이거나 일목요연한 하나의 주제와 정리가 되어있었기 때문일까? 수백 년 전 유럽의 왕들의 호사 취미에 대한 거부감이나 가려진 민중들의 고통의 신음소리가 들렸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직접 보지 않고 먼저 읽고 알고 규정 지어버리는 그림에 대한 태도 때문일지도 모르겠으나 눈에 낀 색안경이나 관념성을 지워버리고 싶은 욕망이 앞선다. 아는 만큼 보이는 게 아니라 그림은 보는 만큼 알게 되는 것은 아닐까 싶다.

  한 권의 책을 통해 예술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이 아니라 다시 바라보는 계기가 되었다. 저자의 말대로 ‘모든 예술은 정치적이다’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은 하나의 태도가 아니라 당연한 말인지도 모른다. 예술의 순수성이라는 용어가 애매하고 모호해진다. 순수성은 어디까지라고 말할 수 있을까? ‘자유’라는 가장 기본적 가치에 충실해야할 예술의 본모습을 기대하는 것은 ‘정치적 자유’를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인간 영혼의 가장 본질적인 자유를 위해서만 복무하는 예술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070828-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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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 2007-08-29 08: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는 행위에 의해서도 가치가 만들어지지만 만든 행위 자체에서도 가치가 만들어진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보는 시각은 시대에 따라 사람에 따라 무수히 다양해지니까 꼭 가치를 부여하는 행위를 본다에서만 찾을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sceptic 2007-08-30 17: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당연한 말씀이시죠. '꼭' 가치를 부여하는 행위를 본다에서만 찾을 수 없겠죠...만든 행위가 기본이고, 보는 행위는 다른 시각일 뿐이죠.
 
조대리의 트렁크
백가흠 지음 / 창비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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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집을 읽으면 제목과 내용이 뒤섞이고 차례를 다시 훑어보지 않으면 나중에 누구의 단편이었는지 기억나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백가흠의 소설집 <조대리의 트렁크>는 9편의 단편이 모두 기억나고 다른 소설가의 단편과 헷갈릴 것 같지도 않다. 이 책은 그만큼 인상적이었다. 인상적이라는 말은 다르다는 건데 소재나 내용 면에서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것들을 선택했다는 말이고 문체가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다는 말이다.

  아침마다 조간을 펼치며 심각한 수준으로 무섬증을 느낄 때가 있었다. 사회면을 들여다보는 일이 곤혹스럽고 마치 다른 세상의 이야기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때가 많다. 애써 눈을 돌리고 싶고 외면하고 모른 척 하고 싶은 이야기들이 있다. 분명, 내가 살아가는 현실에서 벌어진 일이며 우리들의 자화상임에도 불구하고 피하고 싶을 때가 많다. 백가흠은 그것들을 들춰낸다. 덤덤하고 무심하게 들춰낸다.

영화를 보다가 눈을 질끈 감거나 귀를 막고 듣고 싶지 않은 소리가 있다. 그것을 굳이 보여주는 감독이나 돈 내고 보지 않으려 노력하는 관객을 떠올려본다. 비슷한 상황은 아니지만 ‘웰컴, 마이!’를 보면서 나는 책장을 넘기기가 두려웠다. 끔찍한 현실은 소설 속에서 재현되고 실날하게 이면의 감추어진 진실들을 드러낸다. 뉴스에 스쳐지나가는 장면이나 사건의 제목 속에 숨어있던 불편한 현실과 적나라한 진실들을 보여주려는 작가의 의도는 성공적이다.

  백가흠과의 첫 만남은 흥미로 이어질 것 같다는 느낌이다. 소설이 보여주는 현실은 아름답고 과장된 꿈을 표현하려는 공간이 아니다. 가볍고 유쾌할 수도 있고 무겁고 진지할 수도 있지만 삶의 진정성이 배어나는 시린 느낌이 드는 소설이 나는 좋다. 손등이 갈라져 피가 나거고 역거운 장면과 상황들이 이어져도 현실과 소설의 공간은 중첩되고 갈라지며 혼란스런 감동과 충격으로 독자들을 몰아갈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저마다 다른 진실을 쏟아내며 아파하고 비명을 지르는 소설이 훌륭하다고 할 수는 없다. 소설을 통해 원하는 것은 독자마다 다를 것이다. 현실을 잊을 만큼 매력적인 이야기와 재미를 느낄 수 있고 알지 못했던 사실들을 확인하거나 전혀 다른 측면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갖게 해 주기도 한다. 철저하게 거짓과 환상의 세계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불편하더라도 그것이 진실하다면 두 눈 부릅뜨고 한 번쯤 확인할 필요도 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정상성에서 벗어나 있다. 기준에 따라 ‘정상’이 달라질 수 있겠지만 소수자들의 이야기라고 하면 더 적절하겠다. 버려진 아이와 적응하지 못하는 어른, 장애와 동성애으로 이어지는 소설의 면면은 때로 공포영화보다도 그로테스크하다. 장면 자체보다도 상황이 보여주는 비극성과 구조적인 비명이 더 끔찍하게 들린다. ‘웰컴, 베이비!’에 등장하는 엿보는 아이, ‘웰컴, 마미!’의 반지하방에 갇힌 아이, ‘루시의 연인’의 주인공, ‘조대리의 트렁크’에 갇힌 할머니, ‘굿바이 투 로맨스’의 두 여자는 모두 갇힌 사람들이다. 공간적
인 폐쇄성은 단순한 두려움보다 단절의 다른 표현이다. 인간의 존재 가능성은 소통에 있는 것이 아닐까? 서로 공존하며 소통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도전이 백가흠이 도달하고 싶은 세상이라는 생각은 지나친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믿고 싶다.

  ‘사랑의 후방낙법’이나 ‘웰컴, 베이비!’에서 작가는 ‘사랑’에 대해 유리창에 비친 흐릿한 빗물 수채화처럼 이야기한다. 투명하고 맑은 사랑이 아니라 애매하고 모호한 태도를 취할 수 밖에 없는 사랑이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남자가 남자를 사랑하고 여자가 여자를 사랑하는 것은 남의 일일 때만 허용될 수 있다면 그것은 무관심과 다름없다. 다양한 인간 군상들의 복잡한 삶의 모습들을 모두 담아낼 수는 없지만 뒤안길에서 소수자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생에 대한 관심과 애정은 단순히 좋은 소재로 그치지 말아야 한다. 소설을 통해 현실을 뒤바꿀만한 혁명을 하자는 게 아니라 또다른 시선과 간접 체험을 통한 세상에 대한 통찰력은 키워나가야 하는 것인 아닌가 싶다.

  백가흠의 소설은 열린 세상 속의 닫힌 사람들에 대한 답답한 보고서일지도 모른다. 외부적 시선으로 그들을 들여다보는 관찰자의 시선이 아니라 ‘매일 기다려’의 노인처럼 내부의 순수하고 견딜 수 없는 생의 욕망들이 밖으로 분출될 수 있을 때까지 나는 기다려 볼 참이다. 작가의 방향과 다음 책들이 어떤 방향으로 흐르든 또 하나의 기다림이 아니겠는가. 구린내 나는 현실과 불편한 진실을 찾아 떠나는 작가의 뒷모습을 바라볼 준비는 되어 있다.


070824-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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